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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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완성도와 깊이: 보도를 넘어 근원적인 철학적 질문으로.

황정은 저, ‘연년세세’를 읽고.

이틀 전,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함께 느리지만 행복하게 보낸 열흘을 뒤로하고, 내가 집어 든 책은 황정은의 신작 ‘연년세세’였다. 신형철의 소개 덕분에 재작년에 ‘백의 그림자’를 읽고 단번에 나는 황정은의 문체에 반했다. 묵직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나 상황을 평이한 단어와 친숙한 단문으로 덤덤하게 기술하는 그녀의 글은 한강 작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해 출간되었던  ‘디디의 우산’을 읽고 나서는 내 기대가 조금 과장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나는 그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매혹되었던 황정은의 문체는 그대로였는데,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전개가 나의 공감을 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상했다. 나는 그것이 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내 공감능력이 부족한 걸까, 이해력이 부족한 걸까, 하는 답이 없는 고민들). 그 생각은 잊히지 않고 일종의 짐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마침 중고서점에 방문한 날, 작년에 출간된 황정은의 최신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숙제를 해결하는 심정으로 나는 책을 구입했다.

‘백의 그림자’, ‘디디의 우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황정은의 작품 ‘연년세세’. 농숙해진 그녀의 문체와 적확한 문장의 선별은 작품의 간결성과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었고, 한국 정서에 잘 부합하는 내용과 이야기 전개는 가독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머릿속에서 겹쳐졌고, 이 책을 쓴 황정은의 숨은 의도가 한국의 역사적 정황과 맞물린 서민들의 모습을 반영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백의 그림자’도, ‘디디의 우산’도 모두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대상을 그리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일상을 겨우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덤덤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연년세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읽히는 작품이었다. 

고전 문학이나 현대 소설이나 가릴 것 없이, 내가 읽은 대작의 대부분은 시대 정황을 잘 반영한다. 진공 속의 이야기나 관념만으로 이뤄진 작품은 없었다. 역사성과 현실성이 독자들의 공감을 사며 작품의 가치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황정은의 작품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땐, 황정은만의 개성 있는 문체와 더불어 시대 정황과 맞물린, 그러나 자칫 잊히기 쉬운 서민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 시대에 그 시대를 기록하는 작가가 존재하여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이야기들을 남길 수 있다는 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작품 같은 경우엔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한국 사람이 아니면 읽고 깊은 공감을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에 대한 우려다.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잊히는 작은 목소리들을 담아낸다는 의미는 충분히 크다고 할 수 있지만, 황정은이 담아낸 그 작은 목소리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무언가를 그리 묵직하게 건드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옆집 할머니와 옆집 아주머니가 들려주는 사연 깊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정도의 효과만이 내게 남아 있다는 점이 나는 못내 아쉽다. 다음 작품에선 한국인만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호소할 수 있는 주제를 다뤄준다면 황정은만의 매력적인 문체가 더욱 빛을 더 발하지 않을까 싶다. 완성도 높은 보도 형식의 이야기만이 아닌, 좀 더 깊고 보편적인 이야기 (이를테면, 좀 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다루는 이야기들)를 기대해본다.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0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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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쫓는 모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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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지만 쫓기지 않고, 지배당하지 않는 인생.

무라카미 하루키 저,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머리가 복잡할 땐 책을 든다. 그런데 이게 언제나 쉬운 건 아니다. 평소보다 예민한 상태라 아무 책이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선정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네 권의 책을 폈고 모두 열 페이지 이상 앞부분을 읽었다. 그러나 다시 덮고 책장에 꽂았다.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이번 주말에 끝까지 읽게 된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 책이었다. ‘양을 쫓는 모험’.

하루키 책은 묘한 힘이 있다. 어렵지 않고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통속적인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간다. 일필휘지로 써진 글이 아니라 다듬고 다듬어서 기나긴 퇴고의 과정을 거친 글답게 문장이 간결하고 정제되어 있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한 번 읽게 되면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계속 읽게 된다. 문장력과 글의 전개에 있어서는 정말 배울 게 많은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 훌륭한 문장력과 전개 방식으로 전달하는 메시지 역시 그냥 지나쳐버릴 만큼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엔 무겁고 암울하고 허무하기까지 한 하루키만의 감성이 진하게 배어있다. 이는 어쩌면 하루키와 같은 시공간을 향유한 일본 작가들의 공통된 시대적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이 감성은 주로 등장인물들의 상실과 죽음 (특히 자살) 등으로 표현된다. 아마 이 두 가지 단어를 빼놓고는 하루키 문학을 설명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하루키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는 섹스와 같은 성적인 상상과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도 남자 위주의 관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대상화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조금은 저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자주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하루키 문학의 본질인 것처럼 매도하고 하루키를 폄하하는 데엔 반대한다. 성적인 행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심심찮게 등장하여 삼류소설처럼 경박하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해한 하루키 문학의 정수는 성적인 것이 단지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상실과 죽음의 깊은 강이 하루키 문학 저변에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하고, 성적인 표현들은 그 강에서 저항하거나 물살에 휩쓸려가거나 무심한 시선으로 자기 자신의 삶조차 관조하는 인물들의 평범함, 즉 그들도 우리와 별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하루키 문학은 철학적이고 감성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적이다). 

‘양을 쫓는 모험’은 하루키가 치밀하게 계획한 구도에 따라 읽게 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독자는 완전히 작가의 작전에 말려들게 된다. 지루한 부분 없이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연속해서 긴장과 스릴을 느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부분이 나에겐 물음표였다. 몰입까지 되며 페이지를 넘겨왔는데 갑자기 덜컥하며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결코 짧지 않은 작품이지만, 관념적인 서술보다는 상황 묘사와 대화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도중에 읽어나가는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도 도통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었다. 아직 뭔가가 더 설명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도중에서 끝나버린 느낌이 들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실 제목부터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말에 다다르면 알게 되겠거니 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나는 끝내 오리무중이었다. 철학 책처럼 어렵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랬더라면 이틀 만에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웠다. 아니, 어려웠다는 표현보다는 아리송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이 작품은 특히나 비유와 상징이 핵심 주제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제목에서 등장하는 ‘양’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또한, 언뜻 일상적인 사건을 전개해나가는 것처럼 읽힐지 모르겠지만 꽤나 환상적인 요소가 군데군데 깊이 침투해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환상소설이라고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을 빼고는 이 책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묘한 작품인 셈이다. 하루키의 문체와 그의 사상과 감성, 이런 것들이 잘 뭉쳐져서 하나의 독특한 문학이 탄생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만났던 하루키와는 조금 달랐다. 작품이 써진 시기를 보니 그의 초기 작품이다. 순간 아하! 싶었다. 아직 농숙해지기 전의 하루키의 천재성이 이곳저곳에서 번쩍이다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이 ‘양을 쫓는 모험’이었던 것이다.

책 뒤에 붙어있는 해석을 읽고도 나는 아직도 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책을 두 번 읽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저 ‘양’의 의미를 ‘인간의 탐욕’,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농축된 이데올로기의 근원’, 혹은 ‘관념뿐인, 그래서 형체가 필요한 악의 실체’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미숙한 생각만 들뿐이다. 양이 사람에게 들어가 사람을 조종하고, 그 사람이 필요 없으면 다시 나와 다른 숙주를 찾고… 여기에 기독교적인 관점만 살짝 집어넣으면 양은 곧 ‘악마’ 혹은 ‘악령’ 정도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과 악마라... 반대되는 듯한 이 이미지는 기독교적인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주인공의 친구, 결국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 ‘쥐’는 양이 자기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자살을 감행했기 때문에 양에 의해 조종되지 않은 채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죽었지만 살았던 사람인 것이다. 악에 물들지 않은, 나약하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끝까지 유지한 사람이 바로 ‘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화자인 ‘나’는 ‘쥐’로부터 양을 전달받아 강력한 힘을 얻고자 처음부터 은밀하고 치밀한 계획으로 일관했던 '비서'에게 끝까지 이용당한 꼴이었지만, 양에 이용되지 않고 자살로 미리 생을 마감하여 끝까지 인간으로 남은 친구 ‘쥐’의 폭파 계획에 동조한 끝에 얼떨결에 탐욕스러운 '비서'를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음으로 모는 실행자가 된다. 가만히 보면, ‘나’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누군가의 의지에 끌려가거나 동조하는 등 다소 수동적인 인간으로 그려졌던 것 같다. 그는 '비서'의 말을 듣고 그의 명령 같은 부탁에 의지하여 양을 찾아 나섰지만, 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의 힘에 의지하여 '비서'처럼 무언가를 도모해보려는 욕심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양을 찾아냈고, 양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나아가, 그는 양에 지배되지 않았고, 양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의 힘을 노린 탐욕의 인간인 '비서'를 궁지로 모는 역할을 해냈다. 나는 이러한 ‘나’가 왜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채택되었는지, 그가 마지막에 펑펑 울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언뜻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무언가를 쫓는다. 그런데 그것들이 숭고한 목적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은밀한 탐욕과 이기심 등이 물들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우리들은 ‘비서’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와 같은 사람으로 머문다. 뭐가 뭔지 잘 모른 채 그 무엇을 쫓다가 지치기도 하고, 누군가의 말에 따라 다소 수동적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어쩌다가 ‘쥐’와 같이 드문 (‘비서’와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친구와의 교감으로 ‘악’에 물들지 않고 ‘악’을 폭파시킬 수도 있다.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인간이 ‘비서’로 그려졌다면, 주인공 ‘나’는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나약하고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실패한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의지대로 완벽하게 살게 되면 '비서'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비서’의 양을 쫓는 모험과 ‘나’의 양을 쫓는 모험을 대비시키며 이 책을 감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과 결과는 다르지만, ‘비서’나 ‘나’의 인생은 '양을 쫓는 모험'이다. 우리 인간의 인생이란 어쨌거나 '양을 쫓는 모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비서'처럼 양에 지배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문학사상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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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푸코의 진자 상.중.하 세트 - 전3권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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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비밀, 그리고 인간의 탐욕.

움베르트 에코 저, ‘푸코의 진자’를 읽고.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드러나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사람들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건다. 비밀은 그럴 만한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이 그런 힘을 갖기 위해 진실일 필요는 없다.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그렇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비밀은 비밀스러운 힘을 가지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것, 아니 드러나지 않아야만 하는 것, 이를 위한 인간의 집요한 노력, 탐욕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열정이 어쩌면 비밀의 본질을 구성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목숨을 바쳐 지켜낸 비밀이 텅 비어있을지라도 말이다.

‘장미의 이름’을 계기로 강한 매력을 느껴 두 번째로 읽게 된 에코의 작품 ‘푸코의 진자’는 이러한 비밀의 비밀스러운 속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거기에 숨은 인간의 심리, 은밀하면서도 경박한 탐욕, 그리고 숙명적이고도 무력한 인간의 한계를 극적으로 파헤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 카소봉과 벨보, 디오탈레비가 착수한 비밀 작업 ‘계획’이 서서히 진행되어가는 과정에서 그 이면에 흐르는 그들의 심리 변화를 무의식적으로 공감할 수 있음은 물론, 비밀이란 것이 어떻게 인간에게 정신적, 육체적 힘을 행사하는지 그 섬뜩한 현장을 또렷이 보게 될 것이다.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그들은 이내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고, 그들이 창조해낸 세계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들이 창조한 이야기의 재료는 ‘아무거나’였고, 사실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쿨하게 보이면서 말만 되면 되는 것이었다. 재미난 건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나중엔 그 바닥에서 비밀 중 비밀인 것처럼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해프닝을 목도하며 그냥 웃고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바로 저자의 목소리와 시선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에코가 이 작품을 통해, 비밀의 비밀스러운 속성이 의외로 얼마나 가벼울 수 있고 얼마나 허무할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사로잡혀 비밀을 더 비밀스럽게 만들고자 안간힘을 쓰며, 그것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켜내려고 발악을 하는 동시에, 그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자 혹은 극소수의 사람에 포함되고자 목숨까지 건다는, 이 웃지 못할 비극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실로 이 작품은 인간 탐욕의 폐부를 깊이 찔러 쪼개는 저자의 통찰이 번뜩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를 공감하기 위해서는 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텍스트의 향연에서, 그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으로 가득찬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잘 살아남아야 한다. 역사와 신비, 의도되지 않은 거짓과 의도된 거짓이 마구잡이로 섞여있어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내용, 이를테면 성전기사단, 장미십자단, 프리메이슨, 예수회, 연금술, 은비학, 악마 연구가들 등등의 음모론과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장난과 악의가 난잡하게 뒤섞인 숱한 이야기들, 과학의 영역까지 이야기가 확장되어 비밀을 가진 사람은 마치 푸코의 진자를 움직이게 하는 저 위의 부동점에 서서 지구 지자기류를 마음껏 조정하여 세계를 장악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황당무계한 음모론 같은 것들이 바로 이 텅 빈 비밀의 배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지만, 이 작품을 읽을 땐 텍스트라는 나무 하나하나에 집중하기보다는 콘텍스트를 잡으려고, 즉 숲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음모론 전공자 (?)가 아니라면 말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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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 소설가의 쓰는 일, 걷는 일, 사랑하는 일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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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에세이.

오가와 요코 저,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를 읽고.
(책의 부제: 소설가의 쓰는 일, 걷는 일, 사랑하는 일)

감상에 앞서 고백할 게 하나 있다. 이 책을 읽고 오가와 요코가 좋아졌다. 나는 오가와 요코의 글에 빠져들었고 매료되어 버렸다. 그녀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글은 계속 읽고 싶은 글, 아끼면서 읽게 되는 글, 옆에 두고 싶은 글, 또 읽고 싶어 지는 글이다. 살면서 이런 글을 만난다는 건 평소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여러 작가가 쓴 수십 권의 산문집 (혹은 에세이집)을 읽었지만, 이 책만큼 내 마음에 담기는 산문집은 없었다. 아무렴, 에세이는 이렇게 쓰는 거지, 하며 글을 읽는 내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에세이라는 장르를 비로소 처음 접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틀간 책을 읽으며 나는 오가와 요코의 눈과 귀와 마음이 되어 내 주위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 따스한 시선은 책 밖으로 걸어 나와 숨을 쉬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와 내 주위에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있던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잊혔던 것들이, 소멸하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 조용히 빛을 발하게 되었다. 감사했다. 회복이었다. 나도 모르게 무뎌지고 타성에 젖어가던 나를 멈추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주는 묘약이었다. 책 한 권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충만하게 만들고,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에까지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또 한 번 글의 힘을 실감하며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꼭지를 다 읽을 때마다 내 마음 한편은 잔잔한 감동으로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은 자괴감에 빠져 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쉬이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을 어찌 이리 따스하면서도 세밀한 시선으로 담아낼 수 있는지, 어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조용히 내면화하여 자기 객관화와 절제를 거치고 그 이면에 담긴 깊은 의미까지 통찰하여 누구라도 읽기 쉬운 언어로 고스란히 번역해낼 수 있는지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감탄은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뿐히 뛰어넘는 정도였다. 이윽고 나의 모자란 글쓰기 역량에 대한 회의가 몰려왔다. 내가 도무지 써낼 수 없는 글이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고, 나는 좌절했다. 물론 이 좌절은 이내 나의 글쓰기에 대한 큰 자양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세 달 전 읽었던 그녀의 대표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나는 그녀의 잔잔하고 편안한 문체에 적잖이 마음을 빼앗겼었다. 감상문에도 밝혔듯이 이미 그때 반드시 기억에 남을 작품임을 예감했었다. 그 여운이 남아 그녀의 이름으로 작품을 검색하던 중 지난달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렜다. 그런데 소설이 아닌 에세이였다. 오히려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에세이는 소설과 달리 작가의 직접적인 입김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체나 사상 등을 알고 싶다면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유용하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조사 없이 보관함을 거치지 않고 그 책을 곧바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이 책을 다 읽고 돌이켜볼 때 그때 나의 선택은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잘한 것이었다.

에세이는 시선이다. 작가의 시선을 중간 매개체 없이 느낄 수 있는 글이 바로 에세이다. 에세이를 읽고 감동을 받는다는 건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감동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 시선을 기꺼이 따라가며 사소한 일상을 함께 관찰하고 성찰하고 통찰하며 위로와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 글은 마음에 담기지 않은 채 버려지는 간판과도 같은 글이 된다. 독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휘황찬란한 글, 온갖 양념이 버무려져 첫맛은 강하나 계속 먹을 수 없는 글, 아아, 이런 글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글 속에도 깊숙이 침투하여 꽈리를 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오가와 요코와 같은 글을 만나고 먹고 하나가 되는 경험은 가뭄 가운데 내린 한 줄기 비처럼 귀하고 소중한 양식일 것이다. 이제 예순이 다 된 오가와 요코가 조금 더 많이 글을 써주면 좋겠다. 나는 오가와 요코의 팬이 되었다.

#티라미슈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2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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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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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할 만큼 고적하고 아름다운 에세이.


한정원 저, ‘시와 산책’을 읽고.


아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 조용히 압도되는 느낌.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이 휑한 아름다움. 이내 그친 눈처럼 아쉬우면서도 고독함과 애잔함을 잔뜩 머금고 있어,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도록 항상 옆에 두고 싶은 글. 이런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맞이할 때면 나는 경건한 자가 되어 입을 봉하고 눈과 귀만 열어 작가가 그려놓은 세계로 다소곳이 나아간다. 이 책의 감상을 적기에 나는 차라리 벙어리가 되는 편을 택하고 싶다. 그냥 느끼고 받아들이고, 또 젖어보기를 택하고 싶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몇 자 적어본들 하얀 눈에 섞인 까만 먼지가 될까 봐, 그래서 부서질까 봐 염려가 된다. 부디 이 짧은 감상문이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오가와 요코의 산문집,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를 읽고 곧장 분위기를 이어 표지부터 파랗고 하얀 눈을 연상케 하는 책을 골랐다.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이 무너질 땐, 오케스트라의 거창한 연주나 화려하고 높은음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독주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잔잔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적당히 느린 피아노 곡에 손이 간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수십 권의 책 중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제목부터 와 닿았다. ‘시와 산책’이라… 처음 보는 작가, 처음 보는 출판사. 모든 게 낯설었다. 그러나 그 낯섦이 나를 묘하게 끌어당겼다. 하얗고 깊은 숲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책 양 날개에는 아무런 소개도 없다. 텍스트로 승부하는 간소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첫 꼭지를 읽고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휑하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밤은 지새워도 충분히 용서가 될 것 같았다.


오가와 요코의 에세이를 읽고 에세이의 정수를 맛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정원의 에세이를 읽고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정수’라기보다는 ‘정수 중 하나’로 말이다. 두 에세이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느낌이다. 한 가지만 예로 들면, 오가와 요코의 글에서 사람이 느껴진다면, 한정원의 글에선 혼자가 느껴진다. 그래서 더 적막하고 외롭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아마도 두 작가의 삶의 배경 때문일 것이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워본,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해내고 예순의 나이를 바라보는 오가와 요코와 수도자가 되기로 작정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중년의 나이로 사람이 아닌 반려묘와 함께 살아가는 한정원. 에세이는 그 사람의 숨결과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책 전반에 배어 있는 이 서로 다른 느낌은 아마도 두 작가의 삶의 흔적과 현재를 반영하는 것일 테다. 두 에세이를 연달아 읽으며 나는 서로 다른 두 인생과 두 사람과의 조우를 통해 한층 더 깊고 풍성해진다.


글의 간결성과 절제미, 간접적인 표현 안에 숨은 도발적인 직접성. 시 같은 에세이. 에세이 같은 시. 마침 오가와 요코와 한정원의 책이 ‘산책’이라는 단어를 공유한다. 오가와 요코의 정겨운 산책이 있는가 하면, 한정원의 고적한 산책도 있다. 우리 인생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 인생을 그렇게 두 가지의 산책처럼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두 책 모두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놓아두었다. 종종 꺼내 읽게 될 것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따스한 시선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휑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맛보기 위해서.


#시간의흐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27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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