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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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이란?

가즈오 이시구로 저,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인간은 특별할까? 다른 생물체에 비해, 다른 동물들에 비해 과연 무엇이 특별한 걸까? 특별하다면 그 특별함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기인한 걸까? 아니면, 철학적 혹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걸까? 인간의 특별함은 이미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사회정치학적으로 수없이 다뤄진 주제이고, 지금도 여전히 이에 대한 논쟁이 그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면, 아직 이렇다 할 답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상과학에서나 상상할 수 있었던 클론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것들이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는 추세도 있기에 이런 현상은 계속 지연되고 지연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우린 끝내 답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이런 논쟁을 역사적으로 지속하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특별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나 싶다.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묻고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자, 즉 현존재라고 정의했다. ‘모든 인간은 의미 중독자’라는 우스갯소리는 결코 우습게 넘길 말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은 소위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부르는 ‘숨 쉬고 먹고 자고 싸고 성장하고 번식하는’ 행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이다. 따지고 보면 자살이라는 행위를 범하는 유일한 존재자 역시 인간이기도 하다. 이 역시 의미를 묻고 찾고 따지는 인간의 속성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인간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여느 생명체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기독교 신학적인 관점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로써 특별하다. 인간만이 창조주로부터 그 타이틀을 부여받았다. 창조세계를, 즉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를 다스리고 관리하고 섬기며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신적 대리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어떨까? ‘종속과목강문계역’과 같은 전통적인 생물 분류도에서나, 다윈의 진화론이 반영된 계통 분류도에서나 마찬가지로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로 정의된다. ‘DNA 변이에 의한 다양성’이라는 진화의 좁은 관점으로만 보면 인간이 가장 진화한 생명체라고 단박에 정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진화에 있어서 최상위권에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며, 모든 동물과 식물을 먹이로 삼을 수 있고, 그것들을 함부로 파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생태계에서도 인간은 도구의 사용과 탐욕으로 꼭대기를 차지한 지 오래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누가 지구의 주인일까?”라는 질문 앞에서 당당하게 “인간”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한낱 산업혁명 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개척은 파괴가 되었고, 발전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터전의 상실을 가져왔다. 생물학적인 인간의 특별함의 근거를 크고 발달한 뇌와 고등한 지능에서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이 마음껏 사용된 결과들의 부정적이고 추악한 꼴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인간의 특별함이 무슨 가치가 있었는지 우린 조용히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쓰임새가 악의 도구로도 이용된 듯하지만 어쨌거나 인간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고도의 지능을 소유한 생명체이다. 얼마 전부터 ‘뇌과학’이라는 학문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아진 이유도 전혀 낯설지만은 않다. 모든 세상은 뇌로 조절하거나 만들어내는 현상일 뿐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주장도 있고, 영혼마저도 뇌의 부산물이라는 유물론적인 주장, 프로이트가 밝혀낸 무의식의 영역도 뇌세포의 기능을 밝혀내면 모두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의 주장까지 인간의 뇌는 알려진 것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여전히 많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인간의 특별함’을 ‘인간의 우월함’이 아닌 ‘인간의 인간다움’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인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생물학적으로도 공인된 인간의 뇌의 우수성을 전제할 때 우린 뇌가 작동하고 영향을 미치는 크게 두 가지의 영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이 그것이다. 이성은 논리, 합리성 등을, 감성은 감정, 공감 능력 등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IQ가 모든 것인 것처럼 여겼던 시절이 지나고 EQ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것도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똑똑하기만 해선 인간이 인간답다고 말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널리 퍼진 결과였다. 문학적인 표현까지 들어서 ‘메마른 사람’이라느니 ‘냉혈한’이라느니 하는 단어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어느새 인간다움의 정의를 이성의 작용만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감성의 영역으로 확대시켜 이성과 감성 간의 조화로써 설명하려고 애쓰게 된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은 이러한 ‘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소설의 허구적 장치를 활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클라라는 AF (Artificial Friend)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로봇이다. 가게에 가서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으며 각 AF마다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서 구매자의 기호와 요구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언젠가는 곧 닥칠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클라라의 시선을 통해 독자들이 인간을 한 걸음 떨어져서 객체화시켜 바라보게 만든다. 말하자면 인간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같은 시스템 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화자가 아닌 로봇 화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인간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모습들, 혹은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모습들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읽힌,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공감력’인 것 같았다. 단적인 예로 클라라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버전의 AF와 클라라가 속한 버전을 비교하는 대화를 들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새로 나온 B3가 인지 기억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공감력이 좀 부족한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렇다. 클라라는 다른 AF 보다, 심지어 기술적인 면에서 더 완성도 높게 제작된 B3 레벨보다도 공감력에 있어서는 월등했던 로봇이다. 로봇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클라라는 사람의 내면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분석할 줄 안다. 무엇보다 사람을 공감할 줄 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독특한 캐릭터인 클라라를 통해 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공감력에 있다고 넌지시 짚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또한 클라라를 구입한 조시 엄마의 계획은 클라라를 조시의 대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조시는 아팠다. 언니처럼 곧 죽을지도 몰랐다. 그때를 대비해 조시 엄마는 클라라로 하여금 조시의 모든 것을 배우고 복제하길 바랐던 것이다. 행동이나 표정뿐만이 아닌 마음 씀씀이 마저도. 

과연 어떤 특정한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공감력이 뛰어난 클라라라고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한 영역의 일일 것이다. 작품 속에는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도 등장하고 절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도 등장한다. 이들의 갈등 구조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클라라는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스포를 하고 싶지 않아 힌트가 될 만한 대사를 아래에 적어본다. 조시 아빠의 대사다. 

“너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니? 신체 기관을 말하는 건 아냐. 시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인간의 마음.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만약에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조시를 제대로 배우려면 조시의 습관이나 특징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어?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아?”

아래 역시 조시 아빠의 대사다. 

“하지만 네가 그 방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또 다른 방이 있다고 해 봐. 그리고 그 방 안에는 또 다른 방이 있고. 방 안에 방이 있고 그 안에 또 있고 또 있고. 조시의 마음을 안다는 게 그런 식 아닐까? 아무리 오래 돌아다녀도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 또 있지 않겠어?”

공감력에 탁월했던 클라라의 결정은 의미심장하다. 공감을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해서 결코 그 사람과 똑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특별함은 고등한 뇌 덕분이라고 생물학적으로 말할 수 있고, 뇌가 작동하는 두 가지 영역 중에서도 감성적인 측면, 즉 공감력에 인간의 인간다움이 심겨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 개인은 탁월한 인간다움으로도 결코 복제할 수 없다는 것. 모든 인간은 고유한 존재라는 것. 가장 인간다운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감력을 넘어서는 인간의 고유한 개별성. 저자는 바로 여기에 인간의 특별함 내지는 인간다움이 숨어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나의 두 번째 책의 두 번째 문학 파트너로서 당당하게 후보로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생물학적인 측면에 상응할 문학작품으로 ‘클라라와 태양’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전 작품 ‘나를 보내지 마’도 읽고 나서 천천히 결정해야겠다. 인간의 뇌, 이성과 감성, 지능과 공감력. 흥미로운 글이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0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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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캘린더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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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함의 이면.

오가와 요코 저, ‘임신 캘린더’를 읽고.

오가와 요코에게 1991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 ‘임신 캘린더’를 포함하여 이 책에는 ‘기숙사’, ‘해 질 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이라는 두 단편소설이 더 실려 있다. 이 글은 세 작품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임신 캘린더'에 대한 감상문이다. 

임신을 경험해 본 적도, 경험할 수도 없는 내가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이유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 먼저, 몇 달 전부터 오가와 요코의 글이 좋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심란하고 시간에 쫓기는 일상으로 치달을 때 그녀의 글을 읽으면 환기가 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쉬이 지나칠 사소한 것들의 소중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되돌아보게 도와주는 내 인생의 antidote랄까. 책장에는 아직 대기 중인 그녀의 작품 두 권이 더 있다. 괜히 마음이 놓인다.

딱 한 번 나는 아내를 통해 임신 전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내의 배가 서서히 불러오는 과정은 진기했다. 머리로 아는 지식과 현실 속 경험은 언제나 괴리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의사인 아내와 생물학자인 남편에게도 그 놀라움은 마찬가지였다. 불러오는 배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나, 그 배를 옆에서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나, 생물학적 원리를 상세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신기했던 것이다. 정확히 예정일에 맞춰 아들이 태어났고, 터지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 단단히 부풀어 오른 아내의 배는 곧 터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날을 떠올리면, 사실 나는 아들 녀석보다는 서른 시간 직접 해산의 고통을 겪어냈던 아내의 모습이 기억에 더 많이 남아있다. 다리를 벌리고 힘을 주던 그 숙연했던 장면. 땀이 범벅이 되어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과 이마에 끈적하게 달라붙어있던 아내의 모습. 나는 그 시끄러웠던 적막 속에서 첨예한 긴장을 느끼며 무능력하게 서 있기만 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모든 게 낯설었으며, 모든 게 서툴렀다.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적인 것만 같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에게 아이의 생일은 아내가 죽다 살아난 날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도 아내의 쭈그러든 배를 만지면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못 숙연해진다. 

위에 적은 나의 기억은 아무래도 간접적이고 정제된 입장일 것이다. 임신 당사자의 직접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예민해진 아내와 식성이 변한 아내를 맞추려고 노력하면서도 어설플 수밖에 없는 모습을 가능한 신경전 없이 유쾌하게 헤쳐나가는 것밖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남편의 입장, 즉 임신 당사자가 아닌 임신 당사자를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마치 ‘임신’ 하면 생각나는 자연스러운 공식 입장이 된 것 같아 나는 종종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 작품 ‘임신 캘린더’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물론 이것 역시 소설이라는 허구적 장치와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제한 때문에 간접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순 없겠지만 말이다.


언니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기까지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여동생이 이 작품의 화자다. 여동생은 언니의 임신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 혹은 곧 태어날 아이로 인해 생겨날 긴장 어린 행복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이 직접 임신을 한 게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임신 때문에 입덧을 하게 된 언니와 그 언니를 수발하며 무능력하게 조심스러운 형부, 그리고 그 때문에 요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밖에 나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기록해나간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얻어온 그레이프 후르츠로 잼을 만들어 과체중으로 임산부로서 위험한 상태에 처한 언니에게 계속해서 그 잼을 공급해준다. 그 과일에 아이에게 해로울지도 모르는 물질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고 알고 있음에도 그 일을 지속한다. 여동생의 행동에 의아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언니의 행복이나 아이의 생명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알 것 같으면서도 끝내 알 수 없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작품은 끝에 다다른다. 

여동생뿐만이 아니다. 임신 당사자인 언니 역시 임신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기쁨과 행복에 들뜨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입덧으로 아무것도 못 먹다가 입덧이 사라진 즉시 먹는 기계가 된 것처럼 쉬지 않고 먹어대는 동물의 이미지마저도 떠오를 정도였다. 곧 태어날 소중한 생명을 품고 있는 위대한 예비 엄마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거의 무시되는 형부 정도의 입장밖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언니나 여동생이 ‘임신’에 대한 직접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조금은 섬뜩하다는 생각, 조금은 이해할 것만 같은 생각, 그러나 나중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임신 우울증, 산후 우울증 같은 단어가 언젠가부터 낯설지 않게 들리는 것도 어쩌면 그런 것들이 임신에 대한 임신 당사자의 솔직한 입장이 더 진하게 담겨있는 건 아닐까,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 대한 숭고함 앞에서 감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이런 걸 미리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멍청하지 않은 남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답 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7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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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번 써봅시다 -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
장강명 지음, 이내 그림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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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기에 대한 동네 형의 진심 어린 조언.

장강명 저, ‘책 한번 써봅시다’를 읽고.

6년 만에 힘들게 박사 학위를 받아냈을 때, 사람들이 박사라고 불러주면 고맙고 기분이 좋았다. 부끄럽지 않았다. 나름대로 그에 합당한 애를 써서 성취한 대가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작년부터 새로이 듣게 된 ‘작가’라는 단어 앞에선 부끄럽기만 하다. 그 말을 듣기에 나는 여전히 무언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작년 말, 나는 한 일인 출판사 대표의 위험지수 높은 고마운 믿음 덕분에 책 한번 써본, 소위 ‘저자’가 되었고, 또 얼마 전에는 한 작은 기독교 출판사에서 개최한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부문 가작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작가라고 불리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은 두 번째 책을 낸다고 해서 쉽게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을 작가라고 부르기에 한참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서점에 가면 글쓰기에 관계된 책들 앞에서 기웃거리고는 한두 권을 훑어본다. 구매하는 책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서점에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하는 의식 중 하나다. 내 마음엔 여전히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말이다. 

나와 같은 세대인 작가,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를 구매하게 된 이유는 그의 유튜브 강의를 몇 개 들어본 경험과 그가 말하는 스타일에서 짐작되는 진정성 때문이다. 나에게 비친 장강명은 자기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와 주관적인 생각을 애써 포장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담백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말속에서 진정한 겸손함을 보았다. 거짓이 배인 입바른 겸손함이 아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줄 아는 겸손함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좋았다. 

나의 직관적인 느낌과 판단은 옳았던 것 같다. 이 책에서 그는 그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그리고 작가가 되고 나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예비작가에게 진심 어리고 실제적인 조언을 아낌없이 선사한다. 글쓰기에 관련된 많은 책들을 꽤 오랫동안 훑어본 나로서는 이 책이 가지는 차별적인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장강명이라는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았다. 

장강명은 책이 중심에 있는 사회, 즉 책이 의사소통의 핵심 매체가 되는 사회를 꿈꾼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릴 줄도 모르고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런 세상을 소망한다. 그곳은 생각이 퍼지는 속도보다는 생각의 깊이와 질을 따지는 곳이라고 말한다. SNS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사람들은 점점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카드 뉴스와 같은 짧은 글, 요약 버전의 글을 선호하며, 이젠 그마저도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매체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사람들은 긴 글만이 아닌 글 자체를 읽지 않게 되고 있는 것이다. 읽기 않고 보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게 되면 나중엔 결국 그것을 못하게 되는 것처럼, 언젠가 인류가 읽지 않게 되는 세상이 불쑥 도래할까 두렵기도 하다. 평소에 내가 가진 생각과 공명을 이뤄 나는 그의 소망에 두 손을 모았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책 쓰기’라는 주제로 써진 수많은 책들의 거품을 언급한다. 많은 글쓰기 관련 책들은 자전거 타기를 가르쳐주겠다면서 연습하기 좋은 공원의 조건을 길게 나열하는 것과 같다는, 단번에 공감이 가는 비유를 든다. 그가 말했듯이 자전거는 적당히 평평하고 사람 적은 가까운 공터에 가서 연습하면 된다. 글 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특별한 비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비법을 찾아 글쓰기 관련 책들을 탐독하는 건 아마도 자기 계발서에 심취해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샛길을 찾아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려는 기회주의자으 마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장강명은 강조한다. 그런 지엽적인 것들 말고, 글 쓰기의 본질은 하나의 테마로 200자 원고지 600매를 쓰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전문 레이서가 아닌 동네 형의 자리에서 글 쓰기에 대한 진정성 어린 조언을 하기 시작한다.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글 쓰기는 재능이 없어도 된다. 글쓰기 잠재력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학창 시절 들었던 선생님의 평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한다. 특히 이 부분에선 단락을 그대로 아래에 옮겨본다. 아마 글 쓰기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확 꽂히는 말이 아닐까 해서다.

| 형편없는 책을 발표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봐 무서워서 책을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 책을 쓰지 않고 계속 후회하며 사는 것. 둘째,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것. 셋째, 멋진 책을 쓰고 후회하지 않는 것. 물론 멋진 책을 쓰는 게 제일 좋다. 그리고 형편없는 작품을 내고 괜히 썼다며 후회하는 것과 책을 아예 쓰지 않고 후회하는 것, 둘 중에서는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 졸작을 써도 실력과 경험이 쌓이고, ‘다음 책’이라는 기회가 또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 기회도 없다.| 60-61페이지 발췌.

그리고 그는 글 쓰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유독 왜 쓰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며, 그 질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일갈한다. 왜 쓰느냐는 질문은 왜 골프를 치냐, 왜 산행을 하냐, 왜 달리냐는 질문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프로 골프선수가 되기 위해서, 산악인이 되기 위해서, 달리기 대회 우승을 하기 위해서 골프를 치고 산행을 하고 달리는 게 아니다. 그런 것들을 목적으로 해야지만 그 행위들이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글 쓰기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글은 베스트셀러 작가나 대문호가 되기 위해 쓰는 게 아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다. 그거면 된다. 책은 그러다 보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서 충고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고. 작법서를 참고는 하되 너무 신뢰하지는 마라고. 

이런 것들 말고도 꽤 많은 조언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딱딱한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아닌 친한 선배나 동네 형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듣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서, 글 쓰기에 관한 책을 고르느라 망설이고 있다면 나는 적극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역시 글은 멋보다는 진정성이다.

#한겨레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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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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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평범’의 비린내 나는 실체.

손원평 저, ‘아몬드’를 읽고.

나는 한때 정점을 찍고 잊히고 마는 베스트셀러보다는 정점을 찍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를 선호한다. 한번 가볍게 읽고 마는 대중소설보다는 조금 공을 들여야만 읽어낼 수 있고 읽고 나면 소장하고 싶어지는 고전소설을 좋아한다. 그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관심도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관통하여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그 힘을 나는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알라딘 웹사이트에 들어가 책을 훑어보는 나로선 손원평의 ‘아몬드’를 놓쳤을 리가 없다. 우선 표지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주인공인듯한 한 소년의 얼굴. 표지 전체를 차지하는 증명사진 식의 큰 그림. 제목 ‘아몬드’, 그리고 한 소년의 얼굴.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의 짧은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두 가지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작품 소개를 들춰보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읽어볼 만하겠다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해석을 통과한 관점으로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 년이 훨씬 넘도록 늘 보관함에만 간직하고 있었다. 며칠 전, 마침 새책과 다름없는 중고책으로 구매가 가능해서 다른 책들과 함께 구매를 했다. 두 시간 만에 다 읽었다. 정유정의 필체가 생각날 만큼 유난히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작품이었다. 작가 손원평의 탁월한 필력과 그녀가 사용한 단문의 연타는 흡입력과 속도감을 제대로 구현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속도와는 상관없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를 다룬다. 한국 사회, 특히 청소년과 연결된 사회문제의 단면을 소설이라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 정확히 짚어낸다. 허구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을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익명성에서 안전함을 찾아내고 그 안에 숨어들어 비겁한 자신을 옹호하는 군중들의 심리, 겉과 속이 너무나도 다른 인간의 파렴치한 모순, 그 이율배반성이 ‘정상’ 혹은 ‘평범’이라는 탈을 쓴 참혹하고도 슬픈 아이러니, 시한폭탄 같은 그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사건 사고, 그 현장에서 고스란히 피해자가 된 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 만한 이야기로 잘 그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한 소년, 이름이 ‘윤재’인 청소년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 작가는 윤재를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알려진 ‘알렉시티미아 (Alexithymia)’라는 선천적 질환자로 설정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한국 사회를 가능한 한 거짓 없이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질환에 걸린 윤재는 앞서 언급한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간들의 모순 혹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결함 (?)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한 시스템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기에 있어서 그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의 시선을 차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시스템 안에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선천적으로 다른 시선을 가진, 그래서 마치 외부 인물의 시선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윤재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즉, 윤재에게 이 질환을 허용한 작가의 의도는 윤재에게 연민을 갖게 하거나 이런 질환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숨은 폭력성을 누설하고 수정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시선이 의도하지 않게 가지는 고유한 객관성 (?) 혹은 솔직 담백함 (?)을 렌즈로 삼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역설적인 관점은 소설만이 가지는 장점을 아주 잘 활용한 결과이고, 작가의 탁월한 인물 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작품이 가지는 핵심이 아닌가 한다.

(참고: 이 질환은 공식 의학용어로써 편도체의 작은 크기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편도체가 작다고 해서 모두 이 질환에 걸리는 것도 아닐뿐더러, 이 질환의 원인이 편도체의 작은 크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와는 다른 질환이다.)

이 작품은 제10회 창비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은 오히려 성인이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청소년과 직접적인 관계를 해야만 하는 부모님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비린내 나는 어른들의 냄새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청소년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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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르 클레지오 저, ‘우연’을 읽고.

모게, 나시마, 아자르. 이름만으로도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작품. 지금까지 꽤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이처럼 이국적인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 소설은 없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단지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대신, 르 클레지오 특유의 색채라고 보는 게 더 적당할 것이다. 그가 만약 프랑스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이 작품을 썼더라도 분명 똑같은 느낌을 충분히 표현해내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내가 읽은 책은 한국어 번역본 아닌가. 재창작이라고도 불리는 ‘번역’이라는 높은 관문을 통과하면서도 낯선 이국의 느낌을 뒤틀어짐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작품이라니! 나는 르 클레지오가 더 궁금해졌다. 언제 내 손에 들릴진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황금 물고기’와 ‘사막’이 책장에서 대기 중이다. 이 두 작품은 또 어떤 맛을 낼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영화감독으로서 세상 성공의 정점을 찍고 난 이후 점점 쇠락해가는 중년 남성, 쥐앙 모게. 무책임하게 아내와 딸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어디론가 떠나길 갈망하던 소녀, 나시마. 그리고 이 둘을 이어준 ‘아자르 호’. 제목 ‘우연’은 프랑스어 ‘hasard’이고, ‘아자르 호’의 ‘아자르’는 행운이라는 의미를 지닌 스페인어 ‘azar’에서 따온 것인데,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 같은 발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아자르’는 우연이기도 행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모게와 나시마의 만남도 우연이기도 행운이기도 했을까?

굳이 철학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가의 의도에서 그런 뉘앙스를 느낄 수는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런 논의 없이도 충분히 매력을 지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낯설고도 매력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이 작품을 단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한다. 

모게의 극적인 인생의 내리막길에 어느 날 갑자기 끼어든 나시마. 그녀가 소년으로 변장한 채 아자르 호에 몰래 숨어 모게와 같이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건 그녀에게 있어선 목숨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나날이 훨씬 많은 나이인데도 나시마는 그만큼 벌써 인생의 코너에 몰린 것처럼 절박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절박함이 우연을 만든 것일까. 아버지가 타고 간 커다란 배, 그가 떠나버린 바다, 그 원시적인 자연, 그리고 홀로 남겨진 채 망가져가는 엄마. 다행히 모게는 나시마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해서 짧지만 굵은 그들의 항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계획했던 게 아니기에, 이 두 사람 사이의 만남은 우연이라고 하는 게 옳다.

그러나 과연 그 만남이 행운이었을지에 대해선 작품을 다 읽은 나로서도 확답을 내리긴 힘들다. 모게는 과거에 자신이 연루되었던 어떤 한 소녀의 죽음이 관련된 사건으로부터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나시마와의 항해 도중 큰 폭풍우를 만난 이후, 모게는 나시마를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모게와 헤어진 나시마는 어쩌다가 집을 떠나 방황하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모게와 만나게 되었는지 취조당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난파된 배에서 모게에 의해 구조되었다는 거짓말을 끝내 지키지 못한다. 나시마는 유괴당한 어린 소녀가 되었고, 모게는 유괴범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빌미로 모게는 과거의 그 사건으로부터도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아자르 호까지 빼앗기게 된다. 바닥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허약해진 심신을 이기지 못해 병원에서 죽어간다. 그러는 사이에 성인이 된 나시마는 공부를 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병원에 입원하기 전 모게가 아자르 호에 몰래 설치해둔 부탄가스통을 이용해 동료와 함께 아자르 호를 몰래 띄우고 폭파시켜버린다. 모게와의 우연한 만남의 장소가 되어주었던, 나시마에게는 처음으로 가슴 벅찬 자유와 해방을 느끼게 해주었던 아자르 호는 그렇게 영원히 사라졌다. 모게와 아자르 호는 생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행운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이리저리 뒤튼 뒤 나는 이 둘의 만남을 행운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우기고 싶진 않다. 우연이긴 했으나 행운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우연한 만남이 가져온 결과는 두 사람에게 있어 아픔과 슬픔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가슴 깊이 잊히지 않을 만남, 그 만남을 과연 나시마는 아픔과 슬픔 없이 기억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만남은 불행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같은 어원, 같은 발음을 가진 ‘아자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이 책의 제목이 ‘행운’이 아닌 ‘우연’으로 정해진 이유이기도 할 것이라고 조용히 생각해본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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