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 문학 읽는 그리스도인
이정일 지음 / 예책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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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인생과 신앙의 반려자이자 도우미


이정일 저,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를 읽고


이 책은 전작 (이정일 저,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과 맥을 같이 한다. 저자의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오랜 신앙적 경험을 토대로 문학이 인생과 신앙에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차근차근 친절하게 들려준다. 전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특정한 아홉 편의 문학 작품을 선정하여 그것들을 중심으로 각 장을 구성한 것이다. 


놀랍게도 선정된 아홉 작품은 모두 현대 문학에 속한다. 가장 오래된 작품이 원서로는 1995년 작이다. 현대 문학보다 고전 문학을 더 사랑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지만, 고전을 잘 읽지 않는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춘 저자의 배려가 느껴져 나의 실망은 쉽게 누그러질 수 있었다. 또한 이 사실은 저자가 끊임없이 문학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문학에 대해 조곤조곤 풀어주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저자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공부는 언제나 힘이 있는 법이고 마땅히 칭찬받아야 한다.


문학 박사이자 목사인 저자의 정체성은 이 책을 관통한다. ‘문학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니. 내가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프로 과학자이자 아마추어 문학도,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저자의 세계관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전작에서도 들었던 인상이 이 책에서도 지속된 것을 보면, 저자가 쓴 두 책은 출판사의 기획 의도에 맞춰 써낸 것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된 열매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즉, 이 책은 저자의 생각이 아닌 삶을, 좋은 제안이 아닌 실제 증거를 담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문학과 인생과 신앙, 이 셋의 하모니와 시너지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고 저자와의 소통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다. 누군가는 이 문장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라면 성경을 읽어야지 문학을 왜?, 라는 의문 아닌 의문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다. 이 문장의 방점은 “더”에 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다.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만이 아닌 문학 읽기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함’이라는 디모데후서 3:16-17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나 역시 저자의 메시지에 100% 공감한다. 우린 문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성경을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만 읽어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도 된다. 이는 사실이다. 실제로 성경을 제대로 읽게 되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 모순된 부분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애써 이런 불편한 사실들을 외면하려고 하지 않는 솔직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만 읽어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우리에게 목회자나 신학자와 같은 성경 선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그들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만 읽으면 된다고 경솔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거나, 읽어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문자적으로 수동적으로 읽었거나, 아니면 그저 목사들의 설교에서 인용되는 제한된 본문 정도만을 알고 자신이 성경을 읽고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의 성경 읽기 방법이 늘 우리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말씀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의심하고 질문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끊임없는 흔들림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자. 하나님을 정말 신뢰한다면 우리가 의심과 질문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비치는 과정에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런 면에서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도 크게 무리가 없지 않을까.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성경 읽기와 의심과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 중 성경 선생 역할을 훌륭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 신앙의 성장과정 중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가 육의 양식으로 밥을 매일 먹듯 영의 양식으로 성경을 매일 읽는다면, 우린 자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목회자나 신학자를 찾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풀리지 않고 누적된 여러 문제로 인해 해소되지 않은 답답함을 가진 채 살아가는 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일상이지도 모른다. 바로 이때다. 일상 속에서 언제나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도구.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선생이 되어줄 수 있는 문학. 저자는 책에서 지속적으로 말한다. 문학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충실한 반려자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도록 돕는 훌륭한 도우미라고. 여전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은 독자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예책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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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록
서자선 지음 / 지우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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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무용성의 유용성


서자선 저, ‘읽기:록’을 읽고


‘읽기’는 크게 두 번에 걸쳐 우리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첫 번째는 언어와의 첫 만남에서다. 우리는 언어의 유입으로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 읽을 줄 알게 된다는 건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나만으로 가득 찼던 상상의 세계에서 타자와 세상이 함께 존재하는 풍성한 세계로 진입한다. 그 세계는 언어의 세계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언어의 법을 배우고 복종하고 또 내 것으로 삼게 된다. 두 번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과도 같은 인생의 전환점에서다. 이는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기회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책을 만나게 되는 시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 이전에도 글을 읽긴 읽었으나 그건 읽은 게 아니었다는 고백을 하게 될 정도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읽기의 기능과 효과를 기계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면화하여 자기 것으로 삼아 비로소 즐길 수 있게 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감히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독서 활동가이자 책 전도사, 그리고 알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유명인, 이 책의 저자인 서자선은 위에서 언급한 두 번째 전환점의 산 증인이다. 단순히 글을 읽을 수 있는 기계적인 단계를 지나 그녀는 읽기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잘 활용하는 단계도 거뜬히 넘어선 지 오래다. 그녀는 성실하게 지속한 읽기를 통해 읽기가 나와 타자와 세상에 끼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깊게 깨닫고 그것의 유용성을 전도하는 자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나 역시 독자로서 그 선한 영향력을 입는다.


저자는 이 짧은 책에서 독서를 어떻게 시작했는지부터 시작해서 독서를 하는 이유, 어떤 저자들의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마지막으로 독서를 통해 어떤 변화를 경험했고 경험할 건지를 겸손하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무용하게만 보이는 독서의 힘, 이 무용성의 유용성을 아는 자들 중에 속한 나에게는 저자의 고백에 하나하나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 경험에서 묻어난 고백이기에 저자의 권고는 더욱 힘이 있다. 


이 책은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읽기 수월한 책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관심만 가진 분들도, 나아가 기독교와 상관없이 책 읽기와 나누기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 읽어도 큰 부담이 없을 것 같다. 저자가 문을 열거나 관여하고 있는 독서모임도 기독교 신자에게만 열려있지 않다. 나 역시 혼자 읽는 것과 함께 읽는 것의 차이를 잘 알기에, 나아가 어떤 하나의 카테고리에 갇히지 않고 열리고 풍성한 나눔에서 어떤 긍정적인 열매가 더 나타나는지 잘 알기에 이 역시 동의가 된다. 


기독교 신자로서 특별히 저자와 뜻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궁금한 게 생기면 스스로 질문하고 찾으려고 애쓰는 자세를 가지라는 권고다. 이 권고는 읽기라는 방법을 도저히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신앙/신학 서적은 목회자나 신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책 읽기라는 건전한 배움을 통해 더욱 깊고 풍성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작게는 개인 신앙의 회복, 크게는 한국교회의 회복과도 궤를 같이 하리라 믿는다. 사소하지만 지속할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읽기의 신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경험하길 기대한다.


#지우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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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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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부재와 결핍 속에서 피어난 사랑


크리스티앙 보뱅 저, ‘작은 파티 드레스’를 읽고


우리는 모두 태어남과 죽음 사이를 살아간다. 유년기를 거치며 성년기로 나아간다. 자크 라캉은 ‘에크리’에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재해석하며 ‘언어의 유입으로 인한 주체의 탄생’을 말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환영일지도 모를 그 모습을 따라 상상으로 자아를 구성하는 단계 (상상계)에 머물던 아이는 어느 날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면서 새로운 세계 (상징계)로 진입하며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상징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이자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을 인식하고 모든 관계를 맺는 세계다. 인간은 언어에 노출되고 그것의 법에 복종하면서 비로소 주체가 되는 것이다. 


거의 한 달 만에 손에 든, 귀국 후 처음 읽은 책은 한국 오자마자 선물 받은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품 중 하나였다. 어느덧 읽기와 쓰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나에게 지난 한 달은 가혹했다. 금단현상이랄까. 똑같은 하루를 살아도 뭔가 중요한 것 하나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내 가족과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는데도 그 휑한 느낌은 여전했다. 그만큼 수년에 걸쳐 내 일상을 진하게 물들였던 읽기와 쓰기는 마치 공기나 물처럼 나를 그리고 내 삶을 장악해버린 것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인정하게 된다. 사소하지만 성실한 지속의 힘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은 반복의 힘을. 여백과도 같은 일상의 힘을.


이 책을 읽으며 예전에 아주 잠시 곁눈으로 공부했던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석이 떠오른 건 아마도 이 책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처음부터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아니다”였기 때문일 것이다. 보뱅은 유년기를 전체 인생에서 구분 짓는다.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그 무엇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했던 시기를 유년기로 본다. 보뱅에게 유년기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간직된 시기다. 무엇보다 유년기에는 책 (언어 혹은 글로 해석할 수도)이 없다. 그는 말한다. “독서라는 경이로운 애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무한한 공간이 바로 우리 자신이고,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유년기라고. 유년기의 아이는 어느 날 언어를 접하게 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유년기의 온전함은 상실된다. 대신 공포를 동반한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비록 맥락은 다르지만, 보뱅에게 있어서도 언어의 역할은 라캉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특히 글을 알게 된다는 것의 의미가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지대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언어, 즉 글 읽기를 통해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온다. 문자의 부재에서 문자의 바다로 건너온다.


온전한 자아가 간직된 시기가 유년기이기 때문에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올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아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커다란 상실이다. 이어서 기다림이 시작된다. 이 기다림은 어떤 특정한 것을 향하지 않는다. 그저 공기처럼 우리 안에 존재한다. 무와 기다림은 함께다. 보뱅은 말한다. “유년기가 끝나면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우리 자신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자신을 향해,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너무나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간다. 사랑은 순수한 힘을 회복시키며, 근사한 것들의 소망이며, 하루하루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이며, 생명 그 자체이며, 우리의 얼굴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순결한 아이의 얼굴을 되돌려준다. 그러다가 사랑도 떠나간다. 여기서 보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임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몸을 떠는 짐승의 막연한 자각이다.” 사랑이 떠나가면 세 동방박사가 찾아온다. 우수와 침묵과 기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셋은 유년기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천천히. 날마다 조금씩. 언제나 같은 순서다. 침묵이 한복판에, 중심에 있다. 침묵의 희고 작은 드레스.


이 책은 서문과 아홉 편의 에세이로 엮어진 짧은 산문집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책, 읽기, 쓰기, 기다림, 침묵, 사랑 등이다. 읽기와 쓰기에 대한 내용이 정면에 드러난 부분을 제외하면, 분량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글이 다분히 관념적이어서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 기다림, 침묵, 사랑은 그 의미가 모호해서 이 단어들이 담긴 에세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조차 잘 와닿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저자가 쓴 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아홉 편의 에세이를 선택하고 엮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편집자의 취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인 크리스티앙 보뱅이 시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취한 태도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글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보는 방식, 마치 시를 읽듯, 분석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전체를 느끼면서 감상하는 방식으로 아홉 편의 에세이를 읽어 나가는 게 어쩌면 편집자의 숨은 요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책을 연이어 두 번 읽은 지금은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작품 전체를 시로 감상하기로 하고 두 번째로 읽은 후 드는 생각은 의외로 저자의 메시지가 명확하다는 점이었다. 보뱅은 단순히 읽기와 쓰기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시인의 감성과 깊은 통찰력을 가진 작가로서 노래하듯 글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인 우리는 그의 글에서 심오한 철학적인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확대해석으로 굳이 이 작품을 과대 포장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 나가다가 섬광처럼 가슴 깊숙이 어떤 문장에 찔리게 되면 책을 놓고 생각에 잠기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중간중간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읽기와 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문장들이어서 이것들을 읽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책은 나처럼 읽기와 쓰기를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권하고 싶다. 특히 이 문장들은 반짝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무게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읽고 나면 무언가가 반드시 남게 될 것이다. 이에 두 가지 문장만 맛보기로 소개해본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건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아, 이 역설! 부재와 결핍 속에서 피어난 사랑! 진정한 읽기와 쓰기의 시작과 끝!)


보뱅에 따르면, 글을 통해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온 우리는 자아의 상실을 겪고 난 이후 끝도 목적도 없는 기다림에 이르게 되지만, 이내 사랑이 찾아와 우리를 인도한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곧 사랑이 찾아온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하게 된다. 온전한 자아의 부재는 성숙한 자아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이를 매개하는 건 바로 글이다. 먼저는 읽기, 그리고 이어지는 쓰기. 보뱅의 말처럼 기계적인 읽기와 쓰기가 아닌 침묵을 기반으로 하는 읽기와 쓰기, 나 하나로만 가득 찬 읽기와 쓰기가 아닌 타자를 지향하는 읽기와 쓰기만이 진정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길에 동참하련다.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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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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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의 힘 그리고 신비


가즈오 이시구로 저, ‘파묻힌 거인’을 읽고

기억을 잃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특히 노화, 질병, 사고로 인한 망각은 인생의 무거운 추가 되어 당사자뿐 아니라 그 가족, 친지들을 말 없는 무게로 짓누른다. 개인의 망각은 비단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작게는 가족 문제로, 크게는 사회적인 문제로 확장될 여지를 가진다. 한 사람의 망각은 여러 사람의 슬픔을 동반하는 것이다.

망각이 언제나 부정적인 건 아니다. 사실 우린 망각을 일상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경험하기에 그나마 지금과 같은 Norm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뇌는 사고의 중추를 담당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몸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 필요 (혹은 생존 본능)에 따라 우리 뇌는 기억을 조작하기도 삭제하기도 한다. 이런 작용들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우리 몸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우린 미처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우린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 중 도대체 얼마만큼을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상상해보라. 모든 걸 다 기억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린 알고 보면 무의식적 망각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우린 모두가 기억하고 또 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망각의 힘을 어떤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악이용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 집단이나 국가가 강제적으로 삭제, 왜곡한 역사는 이러한 사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목적은 단 하나다. 세탁. 역사는 사실의 나열이 아닌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악과 불의를 동원하여 승리를 거머쥔 자들의 영웅담이 역사로 둔갑하는 순간, 무고한 후대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유린당하게 된다. 그 악한 승자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애써 진실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달해야 할 이유다. 이때 기억은 약자들의 강력한 저항이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 전작 읽기는 이제 끝이 보인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헤세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다작을 한 작가가 아니라서 전작 읽기를 가장 늦게 시작했으나 가장 빨리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에 출간된 이 작품 ‘파묻힌 거인’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나를 보내지 마’ 이후 10년 만에 낸 장편소설이다. 황혼을 노래하는 그의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은 나를 강렬하게 매혹시켰고, 나는 그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는 이 3부작 이외에 총 5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고, 내가 아끼느라 아직 읽지 않고 있는 ‘녹턴’이라는 제목의 단편집 하나도 출간했다. 첫 작품이 1982년에 출간되었으니 올해로 정확히 40년이 지난 셈인데, 전작이 9권밖에 없는 조촐한 작가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고, 그만큼 한 작품의 밀도가 높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 작품 ‘파묻힌 거인’은 내가 읽은 그의 마지막 장편이 되었다.

‘파묻힌 거인’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기억과 망각의 이야기다. 하지만 치매나 사고로 인한 기억상실증 같은 애처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벌이는 의도적인 망각, 그리고 그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행위에 목숨 걸고 저항하여 다시 찾아내려는 기억, 이 둘 간의 대립이 자아내는 이야기다. 여기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소설가답게 이처럼 사회적인 논쟁거리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주제에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의 옷을 입힌다. 용이 나오고, 도깨비가 등장하며, 기사 (무려 아서 왕의 조카!)가 여전히 살아있는 데다, 이동 수단은 걷고 말 타는 정도밖에 없고 총이 아닌 칼로 싸우는 시대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단편집 하나 빼고 다 읽은 독자로서 이 작품은 나에게 독특한 느낌을 선사해주었다. 여전히 내가 반했던 그의 문체는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너무나도 색다른 스타일의 글쓰기 앞에서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심리 상태와 진행을 기가 막히게 잘 묘사하고 그것을 서사로 사용하는 그의 기술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판타지 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에겐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브리튼 족과 색슨 족의 대립이 발생했던 과거, 브리튼 족 출신이자 위대한 왕이었던 아서 왕은 색슨 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그는 색슨 족이 미래에 저지를 수도 있는 복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멀린에게 주술을 이용하여 모든 사람의 기억을 제거한다. 주술의 매개체는 용이었다. 용이 살아있는 한 그 주술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아서 왕의 후손들은 용의 수호자가 되어 멀린의 주술을 계속 유지하도록 힘쓴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인 가웨인 경 (아서 왕의 조카이자 기사) 역시 사람들을 속인 채 용을 보호하는 비밀 임무를 노쇠할 때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과거에 떠났던 아들을 만나려고 마을을 떠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의아해했다. 여러 경로로 그들은 용이 뿜는 안개가 바로 그 원인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아들을 만나러 가는 목적과 더불어 다시 기억을 되찾고 싶은 목적도 가지게 된다. 그러려면 용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노부부는 가는 길에 만난 전사 위스턴과 용에게 물린 자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며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한 소년 에드윈과 동행하게 된다. 주요 인물은 그러므로 노부부, 기사, 전사, 소년, 이렇게 총 다섯 명인 셈이다. 그들은 중간중간 헤어졌다 만났다 하면서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용의 은신처 앞에서 만나게 되는데, 비밀리에 용을 보호하고 있던 가웨인 경 (브리튼 족)과 용을 죽이라는 왕의 임무를 부여받고 온 전사 (색슨 족) 사이에 결투가 벌어진다. 결국 가웨인 경과 용은 위스턴에게 죽게 되고 안개가 사라지며 사람들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파묻힌 거인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는 색슨 족의 복수가 시작되는 비극적인 시작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는 무거운 의미를 지니긴 하지만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고 눈여겨봐야 할 부분, 혹은 잠시 멈추게 되고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부분은 이러한 이야기에 있지 않다. 적어도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노부부의 우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시 기억을 되찾게 되면, 그때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될까, 하는 질문 앞에서 나는 뒤통수를 한 방 먹은 것처럼 먹먹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 용이 내뿜은 안개로 인한 망각은 좋은 기억만 제거한 게 아니라 기억하지 말아야 할 기억도 제거했다. 그 망각은 선택적 망각이 아닌 무작위적 망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액슬이 비어트리스에게 부탁하던 말이 내겐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다음과 같다.

“케리그 (용의 이름)가 죽고 이 안개가 사라지게 되면 말이오. 그래서 기억들이 돌아오고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던 기억들도 생각나면 말이오. 혹은 한때 내가 저질렀던 어두운 소행들이 기억나서, 당신이 날 다시 보게 되고,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오. 이것만은 약속해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요." (383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뿐만 아니다. 노부부가 고향을 떠나기 전 비어트리스가 만났던 한 여자가 해준 말도 기억에 남는다. 다음과 같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조금밖에 무섭지 않았어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이 땅에 망각의 안개가 덮여 저주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종종 말하던 거잖아요. 그때 그 여자가 내게 물었어요.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 후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을 할 때면 너무 겁이 날 때가 있어요.” (71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과연 이런 관계들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말과 행동이 맺은 열매인 걸까? 혹시 어떤 중요한 망각으로 인한 열매는 아닐까? 파묻힌 거인이 깨어나듯 잊혔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면 과연 우린 이런 관계들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기억뿐만이 아닌 자연스러운 망각에서 나는 신비를 발견한다. 다만, 잊어야 할 것은 잊고,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길 바랄 뿐이다.

#시공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33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7.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8074846530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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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헤르만 헤세 지음, 김윤미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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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헤세

헤르만 헤세 저,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를 읽고

헤세의 작품에는 유독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작품 주인공이 예술가인 경우도 있고, 그림이나 음악이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헤세 자신이 예술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이 책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헤세가 쓴 음악에 관련된 글들을 여기저기서 모아 엮은 책이다. 그가 쓴 소설의 일부분이 소개되기도 하고, 그의 에세이, 시, 편지, 서평, 메모 등의 짧은 글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음악뿐 아니라 미술에 관련해서도 이런 책이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다. ‘헤르만 헤세, 그림 위에 쓰다’ 정도로 말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그의 여러 작품을 훑어보며 예술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면서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써나가도록 하겠다. 음악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예술로 범위를 확장할 때 헤세가 그의 모든 작품에서 조용히 외쳤던 합일 사상을 더욱 명료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을 읽고 단순히 헤세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식으로만 결론을 낸다면, 그건 아마도 곁다리만 짚는 격이 되지 않을까 한다. 헤세는 작가이지 음악가가 아니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되겠다. 음악은 주제가 아니라 소재라는 점도 간과하면 안 된다. 주제는 헤세의 철학 내지는 사상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도 수차례 언급되지만, 그것은 바로 ‘합일’이다. 두 개 이상의 대립된 자아나 성향을 보여주고 그 둘 사이에서 택일하여 하나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닌,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는 일’, 즉 합일 사상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헤세를 이해하는 게 이 책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황야의 늑대’에서 주인공 하리 할러는 음악과 문학,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자다. 그는 두 자아, 즉 ‘늑대’와 ‘시민’ 사이에서 고뇌하는데, 어느 날 꿈에 고전 음악의 대가 모차르트가 나타나 계시와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서로 반대되는 두 자아가 공존하고 상생하는 하나의 큰 자아, 즉 합일을 이루는 자아가 모든 고뇌의 해결책이라는 메시지였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르치스가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학자 스타일로서 정신적인 사람을 대표한다면, 골드문트는  천부적인 예술가 재능을 지진 사람을 대표한다. ‘황야의 늑대’에서는 한 사람 내면의 두 자아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대립되는 두 자아가 독립적인 두 사람으로 그려진다. 골드문트는 조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르치스와는 반대되는 길 위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방랑과도 같은 인생의 긴 여정을 마치고 죽기 직전 어엿한 수도원장이 되어 있는 나르치스에게 돌아와 마지막 조각품을 탄생시키는 장면은 여전히 강한 인상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나르치스에게 비친 그 조각품은 자신이 평생 몸을 담았던 지성의 길만이 아닌 그와 반대될지도 모르는 예술의 길로도 진리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작품이었다. 참고로, 예전엔 이 작품이 한국어판으로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각각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대변하는 단어다. 그리고 골드문트의 마지막 조각상은 바로 지와 사랑을 모두 겸비한 이미지가 구현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우린 헤세의 합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미안’에서도 미술과 음악은 이야기 전개에 있어 꿈과 함께 빠질 수 없이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싱클레어의 자아가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직접 그리는 새 그림 (이 장면에서 ‘데미안’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문구가 등장하게 된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라삭스다”)과 사람 그림 (꿈과 기억을 재료로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싱클레어의 개성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가 그린 사람은 그렸을 당시엔 누군지 몰랐지만, 나중에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과 너무 닮았음을 알게 된다. 비가시적인 아프라삭스는 가시적인 에바 부인과 같은 의미로써 총체적인 삶과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싱클레어에게 개성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피스토리우스는 오르간 연주자였다. 이 작품에서도 그림과 음악은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에서 음악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에서도 ‘유리알 유희’의 일부분과 작업 노트가 일부 소개되어 있다. 헤세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정수가 녹아있는 작품이기도 한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에 위치한 중학교로 부름 받기 위해 어느 날 음악 명인의 방문을 받고 테스트를 받았던 부분이 바이올린 연주였다.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에 가서도 음악과 라틴어에서 최고 점수를 받는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유리알 유희를 알게 되고 그는 그것의 명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유리알 유희란 모든 학문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고, 고도로 발전된 어떤 기호와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비밀 언어로 표현되는 정신적 유희이다. 이를테면, 천문학과 수학과 음악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총체적이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서양의 문화와 전통뿐만이 아닌 동양의 지혜까지도 균형 있게 포함하고 있기에, 유리알 유희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높고 순수한 인간의 정신성을 대변하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놀이인 것이다. 책에서도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는 명료하게 묘사되지 않을뿐더러 헤세의 상상력 속에서 만들어진 놀이이기 때문에 구름 속에 있는 듯 막연한 느낌을 주지만, 음악이 여러 학문들의 조화를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즉, 이 작품 속에서도 헤세는 음악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게르트루트’는 ‘쿤’이라는 한 음악가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다. 쿤은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다. 그와 대립되는 성향의 ‘무오트’라는 인물 역시 오페라 가수로 등장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예술가,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음악가의 두 스펙트럼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게르트루트’라는 한 여인들 두고 벌이는 두 음악가의 경쟁 구도도 엿볼 수 있는데, 소설의 초점은 주인공 쿤의 자아 성장에 맞춰진다. 쿤이 열등감을 가진 자아라면, 무오트는 오만함을 가진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오만함의 주자 무오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열등감의 주자 쿤은 자신의 교만을 이겨내고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비록 게르트루트와 하나가 되는 기회를 놓쳐버리지만 한층 큰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로스할데’에서는 주인공이 화가로 설정되어 있다. 로스할데는 요한 페라구트라는 저명한 화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어린 나이로 죽은 아들 피에르가 살았던 저택의 이름이다. 예술가의 혼에 집중하여 아들까지도 단념하게 될 정도로 그림에 열정을 쏟았던 요한 페라구트의 선택이 내겐 안타까운 결정으로만 보였던 작품이었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헤세가 일반 시민성과는 다른 예술가의 정신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목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헤세는 고전 음악에 심취했던 작가였다. 바흐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들었고 틈만 나면 연주회를 찾았다. 낭만주의 음악도 좋아했다. 슈베르트와 쇼팽을 좋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런 헤세의 음악 사랑을 단순히 음악에 대한 메시지로 읽으면 중요한 사실을 놓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헤세는 음악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철학인 합일 사상을 더욱 꿈꾸고 글로 그려내려고 애썼던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게 헤세를 좀 더 깊게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낫지 않을까 한다. 그는 음악은 이성을 통하지 않고 영혼을 곧바로 울린다고 믿었다. 음악만이 가진 초월적인 힘을 믿었고 그것에 심취하기도 하면서 영감을 얻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예술가 친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는. 어찌 보면 예술은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혹은 글이든 모두 통하는 게 아닌가 한다. 미술가는 그림이나 조각으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그리고 작가는 글로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결과물이 다를 뿐 모두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담고 시간과 공간에 담긴 이미지를 담고 고유한 가치를 창조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 헤세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군요, 하는 정보를 하나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헤세는 예술가로서 다른 예술 분야인 음악과 미술과 조화를 이루며 더욱 풍성한 예술 세계를 맛보고 그것을 살아낸 장본인이었군요, 하는 결론에 이르는 게 어떨까 싶다. 마치 유리알 유희의 기본 정신이 헤세의 인생 전체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북하우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3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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