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헤르만 헤세 선집 6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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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로 향하는 삶.


헤르만 헤세 저, '크눌프'를 읽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가?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눈 앞에 펼쳐지는 낯선 세상, 그리고 비로소 대면하는 익숙하고도 낯선 자아. 함께 떠난 여행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우린 혼자 떠난 여행에서 선물로 받아오곤 한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은 피부와도 같았던 견고한 보호막을 깨부수고 나오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엔 아픔이 동반되기 마련이며, 때론 그로 인해 깊숙하고도 치유되지 않을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대개는 상처가 아닌 치유로 수렴한다. 여행에서 돌아온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린 자신의 내면 세계를 한층 더 거짓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고, 한 단계 성장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홀로 여행을 떠난 자는 대자연이 주는 웅장한 침묵 속에서도 자기 안의 소란스런 여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소음을 느끼고, 광장의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도 기어코 자신의 내면으로 숨어들어가 고독에 잠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으로서, 홀로 떠난 여행자는 고독과 침묵 가운데 자신의 내면세계에서도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삶의 주인공 자리를 잠시 내어놓고 삶의 구경꾼으로서 자신의 삶과 그 삶을 이루고 있는 훨씬 더 큰 그림을 보게 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목이 곧은 우리들은 좀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놓지 못한다. 언제나 보이는 것은 부족한 것들과 더 성취해야 할 것들뿐, 만족이란 없다. 조금이라도 더 열정을 쏟아 부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여기서 멈추면 분명 무슨 큰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절대 멈출 수 없다. 무조건 전진이다.


그러나 인생의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러한 '계속 전진'형의 종말은 파멸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시 정지’ 버튼 없이 ‘재생’ 버튼만 눌러댄다면, 언젠간 배터리가 소모되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주인공과 관객의 자리를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변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야 할지 잘 분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높은 곳에 올랐을 때 가질 수 있는 성취감뿐만이 아닌, 이런 잠시 멈춤의 순간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망각의 동물인 인간의 삶에서의 풍성한 아름다움은 여러 '일시 정지'의 순간이 만들어내는 향연일지도 모른다. 기억해 내고, 곱씹게 해주어 잃어버릴 추억을 소화시키고 기념해 나가는 것이다.


소설의 장점 중 하나는 소설을 통해 이런 '일시 정지'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린 실상의 분별력을 얻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 낯섦이 허구와 실상을 관통하여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크눌프. 그는 방랑자다. 평생을 홀로 여행을 떠난 자다. 삶 자체가 여행이 되어버린, 잠시 멈춤의 시간이 너무 길어져 ‘일시 정지’가 아닌 ‘정지’의 삶이 되어버린 한 사람의 삶의 단면을, 난 올해 들어 여섯 번째로 읽은 헤세의 단편 소설, '크눌프'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한편으론 삶의 구경꾼이던 크눌프의 삶을 구경하는 이차적인 구경꾼으로서, 또 한편으론 방관하고만은 있을 수 없어 그의 삶에 녹아 든 아픔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공감하고, 미처 쓰여지지 않은 그의 삶의 여백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시에 그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독자로서 난 이 책을 읽어냈다. 이로써 나 역시 크눌프를 만나 일깨움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내게 다가온 크눌프의 삶은 ‘정지’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보다는, ‘정지’도 다른 차원에서는 하나의 ‘재생’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지’는 재생의 여집합이 아닌 또다른 세계일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정지’는 ‘재생’과 동등한 위상을 가지고 서로 공존과 공생을 하는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알려주었다. 그렇다. 크눌프의 삶을 통해 나는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소위 질서라고 믿어왔던 상하우열의 관계를 좌우평등의 관계로 바라볼 수 있었다.


크눌프는 고아도 아니었고,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가정에 불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지적인 면이나 감성적인 면에서 뒤떨어지는 아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라틴어 학교에 다닐만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성적도 좋았으며, 여러 방면에서 잔재주도 많아 친구들로부터 경탄과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보스가 아닌 부드럽고 겸손한 리더였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변이 없었다면 아마도 어른이 되어 큰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크눌프에게 작은, 아니 그에겐 인생 전부가 되었던, 이변이 생기고야 말았다. 라틴어 학교를 다닐 때였다. 2살 연상의 한 소녀가 그의 앞에 나타났고, 크눌프는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에 빠질만한 남자라면 적어도 라틴어 학교에 다녀선 안된다고 했다. 적어도 공립학교에 다녀 기술을 배운 사람이라야 된다고 했다. 학자나 교수 따위는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크눌프는 학교를 못 다니겠다는 말을 했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야단을 맞고 나서, 학교에서 쫓겨나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일부러 공부를 게을리하고 일부러 틀린 대답을 하며 수업이나 과제를 빼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원하는 공립학교로 옮기게 되었지만, 약속되었던 그녀의 사랑은 끝내 받지 못했다. 대신 은근히 경멸하는 듯한 눈빛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작업공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크눌프는 모든 것을 잃은 것만 같았다.


크눌프에겐 라틴어 학교보다 그녀와 연인 관계가 되는 것이 더 큰 가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철없는 십대들의 불장난 같은 거라 치부하고, 바보같은 짓을 하여 인생을 망쳤다고 하기엔 크눌프는 너무 가진 재능이 많았고 게다가 멋졌다. 그는 그 이후로 어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내게 인상적인 것은 떠돌이 크눌프를 만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었다. 그들은 모두 크눌프를 아꼈으며, 그에 대해 불쌍하다는 마음보단 약간의 동경과 함께 존경을 담아 보냈다.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돈과 권력은 차치하고서라도 크눌프에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집과 가정도 없었지만, 대신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의 존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치들을 떠올리게 해주었고, 그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다시 풍성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맞이했다. 똑같은 일상에 지쳐 인생의 무의미함을 맛보고 있을 가정에 며칠 간 묵게 된 크눌프는 그 가정에 다시 생기가 돌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대접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대접받는 그에게 고마워해야할 입장이 수시로 연출되기도 했다. 크눌프는 어쩌면 산소나 천사와도 같은 역할을 본인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눌프는 보통 사람들이 잃어버린지조차 잊어버린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자유'였다. 정착을 하고 소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려고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와 같은 삶을 살다가 자연스럽게 잃어버리게 된 자유로운 삶, 깊숙한 마음 한 켠에 먼지가 잔뜩 덮인 채 존재하고 있는 그 자유에 대한 동경. 그렇다. 크눌프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자유의 세계로부터 각박한 현실 세계로 파송된 일종의 전도자였던 셈이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잊혀진 자유의 가치를, 마치 오래전에 책갈피로 끼워두었던 만원 짜리 지폐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가 어느 날 우연찮게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쁜 심정으로, 발견했던 것이다. 잊어버렸던 '일시 정지'의 버튼을 다시 발견하고 지금도 누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오랜 방랑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크눌프는 결국 폐결핵에 걸렸고, 때마침 만난 의사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마지막까지 그가 선택한 곳은 병원이 아니라 길 위였다. 어느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크눌프는 죽음을 맞이했다.


재미있게도, 죽기 전 그가 믿었을지도 모를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크눌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후회와 원망을 토로했고, 하나님은 크눌프에게 그의 삶이 방랑으로 이루어져왔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으니 만족하기를 요구했다. 크눌프의 방랑과 그 동안 받은 조롱과 고통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진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리고 크눌프에게 있던 방랑벽도 하나의 특성으로 인정하시며 그 특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거라고 말씀하셨다. 크눌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한탄할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다고 인정과 고백을 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나의 정체성을 이루기도 하는 '기독교인'에 대해서,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서. 묘하게도 크눌프의 삶과 겹치는 게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저 주고 거저 받고, 내 것을 움켜쥐거나 내 것을 크게 부풀리려 하지 않고 남들과 나누는 삶, 비록 세상에서 정의한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삶, 비록 스스로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자 방랑자로서의 삶을 살아 가지만, 어느 곳에 가든지 환대를 받으며 오히려 환대를 해준 사람의 삶이 그를 만난 이후로 더욱 풍성해지는 삶, 그 풍성함을 보고 또다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다른 곳을 향해 미련없이 떠나는 삶. 오늘은 은혜로운 설교 말씀이나 감동을 주는 귀한 글보다 크눌프의 삶이 내겐 더 묵직하게 와닿는다. 나 역시 결국은 이방인이요 나그네란 사실을 다시 떠올린다. 안정된 정착을 구하는 삶보다 불안함을 각오하고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크눌프가 했듯 평생의 여행이 되더라도, 나를 떠나 남에게로 향하는 삶을 살고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9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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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할데 헤르만 헤세 선집 8
헤르만 헤세 지음, 윤순식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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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심장.


헤르만 헤세 저, '로스할데'를 읽고.


책을 덮고, 아들을 향한 나의 마음은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함께 후회와 반성으로 벅차올랐다. 태어난 지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들은 간질병 진단을 받았었다. 아직 젖도 끊지 않았고 말도 못하는 갓난아이에게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과도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상징후가 발견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아들에게 부모인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의사가 처방해 준 정신과 약을 먹이는 것이 다였다. 인간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나는 그 조그마한 어린 생명을 통해서 오랫동안 충분히 먹먹해질 만큼 통감했었다. 어느 날 새벽, 예고도 없이 찾아온 사건이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우리에겐 가히 치명적이었다. 수개월 동안 나와 아내가 겪었던 그 절망감과 탄식, 소리 없는 절규와 기도의 외침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나 나를 감쌌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비록 아들은 기적적으로 치유가 되었고, 그래서 일단락된 사건이지만, 결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기억 속으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책을 읽고 나서 말이다.


'로스할데'는 요한 페라구트라는 저명한 화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나의 아들과는 달리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죽어간 7살의 어린 아들, 피에르가 살았던 저택의 이름이다. 그곳은 시내와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위치해 있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장소였던 로스할데는 화가에게 늘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진지하고 고상한 아내에게는 표면적이나마 평화를 선사했으며, 엄마와 아빠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던 피에르에게는 동화 속을 체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로스할데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행복은 먼 과거의 산물이었고, 현재에도 여전히 빛나는 로스할데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빛 바랜 추억을 덮어주는 황금가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용히 끈질기게 지속된 가정의 불화는 로스할데의 깊은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었던 것이다. 참지 못한 큰 아들 알베르트는 그 때문에 다른 지방에서 기거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화가인 요한 베라구트는 3년 전에 별채를 지어, 작업은 물론 식사 외의 모든 일상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었다. 본채와 별채를 자유로이 들락날락 거리는 피에르는 오래된 로스할데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방금 앉은 딱지가 깊은 상처를 치유한 증거가 될 수 없듯, 그들의 오래된 불화는 굳게 다문 입술처럼 굳어져 보였을 뿐, 속에서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어느 날, 인도에서 온 화가의 옛 친구, 오토 부르크하르트의 방문은 그 딱지에 작지만 치명적인 구멍을 내는 뾰족한 못 역할을 해낸다. 로스할데의 풍부한 아름다움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적나라한 현실이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나 타인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제 3자인 부르크하르트의 눈에도 그들의 불화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베라구트는 부르크하르트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숨김없이 토로했고, 친구가 돌아간 이후에 혼자서 침잠하며 오래된 문제의 본질과 그 동안 미뤄왔던 해결책을 실행에 옮기기로 서서히 결단해 나간다. 그의 유일한 미련은 바로 아들 피에르였다. 수면 아래 깊숙이 있었던 오래 묵은 문제를 끄집어낸 뒤, 그는 더욱 예술가의 혼에 집중하여 그림을 그려나갔고, 그러면서 점점 아들 피에르까지도 단념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러면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결코 마음 먹은 대로 되어지지 않는 법. 아내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피에르까지 내려놓기로 결단하고, 그래서 모든 것에서 초월한 듯한 가벼운 마음까지 갖게 되었지만, 피에르가 기다려주지 않았다. 피에르는 뇌수막염에 걸려 며칠 만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심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유일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아들이 죽고 나서, 화가는 다시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초연해져서 아내와 큰 아들에게 모든 것을 양도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하면서 여행을 떠나 보낸다. 모든 것을 놓아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욱 예술가의 영혼을 불태우며 그림 그리는 일에 매진한다. 어쩌면 영원한 떠남이 될지도 모르는 부르크하르트와 약속한 인도로의 여행을 기쁨으로 기다리면서 말이다.


저자인 헤르만 헤세 역시 첫 결혼에 실패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결혼 후 10년 뒤에 출간되었고, 그의 평탄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의 얼룩진 자국이 짙게 묻어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하고도 흥미로운 건, 그가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예언해 버린 셈이었다는 점이다. 헤세 역시 이 책의 주인공 역인 화가 요한 베라구트처럼 문학이라는 예술에 정진하기 위하여 아내와의 공식적인 이혼을 책을 출판한 후 9년 뒤에 치러내기 때문이다.


헤세는 아마도 이 책을 통하여, 예술가의 혼을 꺼뜨리지 않고 더욱 깊은 우물을 파내는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가져다 주는 행복마저도 내려놓을 수 있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암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결혼 생활이 불행으로 치달을 줄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겠지만, 베라구트가 아들의 죽음 이전에 아들을 포기하는 장면과, 아들이 죽은 후 마치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이를 잘 뒷받침하는 듯하다. 아들 피에르는 예술가의 심장이 아닌 한 아이의 아빠로서의 심장, 또한 한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심장을 유일하게 뛰게 해주었던 존재였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멈춰버린 그의 따뜻한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사랑이 그에게 다시 찾아올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예술가의 심장만이 남은 화가에게서 난 왠지 모를 차가움과 가련함이 느껴졌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석연치 않은 질문이 남는 건 그저 나의 기우에 불과한 걸까?


만약 내게 두 개의 심장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베라구트나 헤세와는 달리 후자를 택할 것이다. 예술적인 면에선 어떤 의미를 남길지 몰라도, 자기 자신을 건조하게 만들며 바싹 태워 차가운 뼈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육체에 남은 심장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를 택한 헤세의 선택 덕분에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내게도 그의 예술가적인 성향은 충분히 영향을 미치지만, 그의 삶을 생각하면, 특히 그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어떤 면에선 능동적인 선택이라기보단 되어진 일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입히고 재해석한 결과이겠지만, 그래도 한 인간의 행복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것이 내겐 훨씬 더 가치가 있어 보인다. 나 같은 냉철한(?) 과학자의 눈에는 읽히지 않는 영역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오늘은 헤세가 슬퍼 보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2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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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선집 7
헤르만 헤세 지음, 윤순식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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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색을 넘어 하나의 빛을 향하여.


헤르만 헤세 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스펙트럼 중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의 시작과 끝, 그리고 희망의 약속이 담긴 무지개 색의 시작과 끝. 우린 빨간색을 좋아할 수도 있고 보라색을 좋아할 수도 있으며, 빨간색이 될 수도 있고 보라색이 될 수도 있다. 단, 기억해야 할 두 가지는 두 색 모두 하나의 빛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보이지 않는 빛의 영역이 보이는 영역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짧은 나머지, 그나마 드러난 현존재 격인 가시광 영역의 다양함과 다채로움조차도 모두 맛보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는 숙명을 지닌다. 빛 자체가 될 수 없다면, 인간다운 삶은 밋밋한 단파장의 교만한 외골수가 아닌, 풍성히 모든 파장을 아우르는 낮고 겸손한 방향을 추구하는 과정에 있어야 할 것이다. 빛 자체가 아니고선 삶을 장악할 수 없으며, 삶이란 장악하는 대상이 아닌 탐험하며 알아가는 대상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스스로 꺾여서 받은 빛을 굴절시키고 무지개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풍성한 빛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빛의 영역까지도 암시해줄 수 있는 하나의 프리즘으로 거듭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듯, 내 안에도 다양한 자아가 존재한다. 드러난 자아와 미처 드러나지 않은 자아까지도 모두 모여 나를 이룬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나르치스의 말에 따르면, 그 어느 것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각 자아는 부분적인 것이고, 성장하는 것이며,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뀔 때가 있다. 하나의 자아가 선택되어져 대표격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일환이다. 이를 통해 '나'는 한층 더 '내'가 되며, 우린 이를 자아실현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내 안의 무수한 자아 중 과연 어떤 자아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내가 가진 고유한 색깔을 드러내는, 즉 나의 천성에 맞는 자아는 어떤 것일까? 우린 때로 적성 검사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등으로 이를 알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살아가며 직접 숱한 경험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단번에 알아낼 수는 없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그런 경험들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여러 자아를 성찰하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여 성장시키고 실현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헤세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자아의 성찰과 성장, 그리고 실현의 이야기를 다룬다. 두 개의 자아가 한 인물 안에서 분열하여 변증법적인 성장을 이루는 그의 작품 '황야의 늑대'나 '페터 카멘친트', 그리고 '싯다르타'와는 달리, '수레바퀴 밑에', '게르트루트', 그리고 '데미안'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헤세는 상반된 두 자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독립된 두 영혼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렇게 창조된 두 인물에게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은 곧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나르치스는 정신적인 사람으로 대표되며, 상상력보다는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학자 스타일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차갑고 어두운 느낌의 성숙함을 타고났다. 반면 골드문트는 천부적인 예술가 재능을 가진 사람의 대표격이다. 그는 외모에서도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어린애 같은 순진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르치스가 빨간색이었다면 골드문트는 보라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파장의 색이 모두 하나의 빛에서 출발했듯,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 상반된 천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귀한 성품이었다. 두 영혼 모두 같은 창조주에 의해서 빚어진 고유한 성품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들이 각자의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과정, 그러니까 각자에게 부여된 똑같이 고귀한 성품을 자기의 천성에 맞는 자아를 찾아감으로써 성장시키고 실현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은 4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지루할 틈을 일체 주지 않는 치밀한 논리와 스토리 전개를 자랑한다. 중학생 때 한 번 읽어봤기 때문에 나로선 이번이 재방문임에도 이 책은 놀랍도록 내게 새로움을 듬뿍 선사해주었다. 미성년자로서 읽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9살 아이를 가진 결혼 14년 차의 마흔을 넘긴 한 성인 남성이자 아버지로서 읽었기 때문인지, 책을 공감하는 넓이와 깊이도 달랐다. 특히 골드문트가 나르치스를 떠나 홀로 방랑하며 겪었던 수많은 경험들, 이를테면 외로움과 배고픔과 추위를 이겨내는 과정, 그리고 숱한 여자들과의 사랑과 불륜으로부터 쾌락과 함께 행복과 공허함을 맛보는 과정, 또한 폭력과 살인, 흑사병으로 말미암은 수많은 죽음들을 직접 현장에서 목격하고 체험하는 과정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25년 남짓한 세월이 내겐 자아실현의 아름다움보다 인간의 죄악에 대한 사실적 공감을 더욱 증진시킨 셈이다.


헤세의 이 작품과 가장 비슷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데미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정신적으로 숭고한 가치를 지녀 누구보다도 그 면에서 앞서있는 자가 (데미안과 나르치스) 존재하고, 그들로부터 각각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아 마침내 자신의 자아실현을 이루는 자가 (싱클레어와 골드문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도 있는데, 그것은 헤세가 선정한 각 작품의 제목에서 짐작해낼 수 있다. 소설 '데미안'은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 자아실현을 이루는 싱클레어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는 싱클레어가 없다. 반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두 이름이 모두 등장한다. 이러한 차이는 여러 가지 추측으로 설명이 가능할 수 있으나, 자아실현을 해내는 인물의 관점에서 볼 때 난 하나의 개인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즉, 두 작품 모두 제목은 자아실현을 해내는 자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의 이름이 적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데미안'에서는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로 흐르는 일방적 영향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이에 흐르는 쌍방적 영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의 제목에 두 이름이 모두 적힌 이유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서로의 자아실현을 한층 더 도왔기 때문이다. 실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의 잃어버린 반쪽이었던 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쌍방의 관계를 선호한다. 데미안처럼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신적인 존재가 아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에서처럼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배워가며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동일한 비중의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주위에서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오름직한 동산이 되어 모두가 모두에게 동일한 비중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꿈꾼다. 빨간색이든 보라색이든 상관없이 그 어느 색이라도 자신의 색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른 색과의 조화로 인해 더욱 풍성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세상을 꿈꾼다. 동시에 모두 하나의 빛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높고 낮음이 아닌 다르지만 동등한 색으로 존재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이토록 풍성한 빛의 향연으로 인해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고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빛의 영역을 겸손하게 인지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빛의 근원을 향해 모두가 머리를 숙이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자아의 실현은 나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의 색이 아닌 여러 색을 만들어낸 하나의 빛을 향하는 것이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7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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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 유희 헤르만 헤세 선집 11
헤르만 헤세 지음, 박계수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카스탈리엔의 빛.


헤르만 헤세 저, ‘유리알 유희’를 읽고.


살아가면서 우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생을 마감할까.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알고 사랑하고 섬겼다면 그 인생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이 만남이고 만남의 가치가 양이 아닌 질에 있다면, 의미 있는 인생이란 깊이 있는 교제와 그 사람에 대한 깊고 풍성한 앎에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숨쉬며 서로의 이름을 알고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론 스킨십을 나누면서 오감을 길들이는 것이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반적인 방법이겠지만, 점점 각박해져 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자연에서 우린 더 이상 경이감을 느끼지 못하며, 날마다 편리해져만 가는 문명의 파도에 떠밀려가며 춤 추듯 살아간다. 사람을 직접 만나기 위해 시간을 약속하고 손목시계를 보며 기다리던 낭만은 간편한 스마트폰 덕분에 말끔히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화상전화의 발달로 인해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언제든 얼굴을 보며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낭만과 여유라는 틈새는 효율과 편리가 메워버린 것이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만나게 되었지만, 과연 우린 예전보다 사람을 더 깊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작년 말, 아내로부터 헤르만 헤세 전집을 선물 받아, 올 한 해 다 읽고 모두 감상문을 남기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나 나이 마흔을 넘기며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마음껏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글 읽기와 쓰기였다. 녹슨 고철이나 고인 우물처럼 정지해버린 나의 인문학적 소양을 소생시키고도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계획했던 검소한 방법은 몇몇 고전문학 작가들을, 할 수 있는 한도에서 깊게 만나보는 것이었다. 내게 평생 짐이 되어버린 안경을 쓰게 만들었던 추리소설을 탐독하던 중학생 시절, 어머니의 소개로 접한 첫 고전문학이 '데미안'이었다. 어느덧 25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첫 관문으로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내겐 적격이었다.


또한, 정신적인 전환기를 거치며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란을 경험했기에, 숙명적으로 나는 서로 다르면서도 상보적인 두 세계의 경계에 설 수밖에 없었고,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물음, 그리고 진리를 비롯한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고, 난 외로웠다. 응답되지 않은 무수한 질문들은 늪이 되어 나를 삼키기 시작했고, 나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내 자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치고 힘들었다.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의심의 숲을 지나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쳐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테지만, 지난한 이 시기가 쏘아대는 화살의 방향은 아무래도 외부보다는 내부를 향하는 법이고, 함부로 던져진 화살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다. 내 안의 자아는 그렇게 아파하며 치유를 소망했다. 다행히 반성과 성찰은 현미경과 같아서, 희미하기만 했던 자아에 대한 발견과 재발견, 그리고 하나인 것 같았던 자아가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선 아주 오래된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난 겨우 성장할 수 있었다.


헤세를 읽어낸다는 것은 헤세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두 세계의 존재와 그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넘어 공존과 화합에 이르기 위하여 끊임없이 내적 성찰을 거치며 성장해 나가려는 자아의 고뇌와 의지를 깊숙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렇다. 나는 헤세를 알도록 운명 지어져 있던 것처럼 헤세를 읽어냈다. 내 인생 전체를 봤을 때 헤세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건 참 다행이었다. 그로 인해 난 참 행복했으며, 내 마음은 감사함으로 충만하다. 많은 빚을 졌다.


두 세계는 자아의 서로 다른 외부 세계일 수도 있고, 한 육신을 공유하며 공존하는 서로 다른 두 자아일 수도 있다. 헤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헤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아의 성찰과 성장, 그리고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때론 상반된 두 자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독립된 두 인물을 창조해내기도 하고 ('수레바퀴 밑에', '게르트루트',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해당), 때론 서로 다른 두 자아가 한 인물 안에서 분열하도록 만들어 갈등을 넘어 통합으로 향하는 변증법적 자아성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페터 카멘친트',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 부분적으로 ‘크눌프’에도 해당). ‘유리알 유희’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담고 있다.


두께 (약 800페이지)에 압도당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던 건 어쨌거나 내겐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큼직한 내 손에도 묵직하게 잡히는 두께의 책을 일주일이 넘도록 시간을 들여가며 비로소 읽어냈을 때, 내게 남은 여운은 후련함이 아닌 아쉬움이었다. 800페이지가 오히려 짧게 느껴질 정도로 내 안의 나는 더 읽기를 갈구했다. 뜻밖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아직도 내 가슴 속엔 유리알 유희의 명인 자리를 내려놓고 마기스터 루디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카스탈리엔 밖, 즉 세상으로의 도약을 감행했던 요제프 크네히트와, 그의 마지막을 삼켜버린, 빙하가 만들어낸 그 고요한 호수가 잔상으로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했던 때는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여 아름답게 비치던 어느 스위스 산골의 이른 아침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마음은 아직 그곳에 머무는 듯하다. 호수가 차갑고 슬프다.


'유리알 유희'는 13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쓰여진 헤세의 마지막 소설로써, 그의 노벨 문학상을 결정짓게 만든 대작이다. 여기엔 그의 모든 작품이 다 녹아있기도 하다. 이 책을 그의 전집 중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던 이유는 적어도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을 모두 '유리알 유희' 안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물처럼 숨겨진 각 작품의 정수들이 이 곳에서 모두 한데 어우러져 그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혼자 몰래 마른 침을 삼키며 난 전율했다. 그렇다. 나는 그 전율과 함께 이 책을 읽어냈다. 각각의 작품에서 독립적으로 표현되어진 두 세계의 통합을 추구하는 헤세의 바람은, 그의 작품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땐 바로 이 책, '유리알 유희'에서 마침내 실현되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난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유리알 유희란 모든 학문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고, 고도로 발전된 어떤 기호와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비밀 언어로 표현되어지는 정신적 유희이다. 하나의 유리알 유희는 예를 들어, 천문학과 수학과 음악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총체적이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서양의 문화와 전통 뿐만이 아닌 동양의 지혜까지도 균형 있게 포함하고 있기에, 우린 유리알 유희를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높고 순수한 인간의 정신성을 대변하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을 그 목표로 하는 유희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유리알 유희는 현실에서 존재하진 않는다. 그저 헤세의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피부에 와 닿도록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책을 읽어도 도대체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리알 유희가 탄생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왜 헤세가 이런 상상력을 발휘했는지 조금은 더 이해를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직접 겪었던 헤세는 20세기를 인간의 정신성이 곤두박질친 시대로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순수한 정신적인 부분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된 특정 구역의 이름이 바로 '카스탈리엔'이다. 카스탈리엔은 타락한 정신성이 회복되어 이상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신적 유토피아인 것이다. 이곳은 세속적인 국가를 포함한 세상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면서 국가로부터 모든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세상 속에서 영재만을 발굴하여 데리고 온 후 그들에게 전 인생을 바쳐 오로지 순수 학문 연구를 수행하게 하고, 과거 수도원에서의 생활처럼 금욕적이고 경건하면서도 검소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구별되어진 작은 세상이다.


유리알 유희는 바로 이 카스탈리엔 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즉, 타락한 인간 사회의 반동적인 힘이 끝내 다다른 지점에 바로 유리알 유희가 있는 것이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비록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내적 갈등을 겪다가 카스탈리엔 밖으로 나가게 되지만, 카스탈리엔 안에서 가장 존경 받고 영예로운 유리알 유희의 명인으로 성장했었다. 이 책은 요제프 크네히트의 성장기라고도 할 수 있고, 한 인간의 성장과 자아의 재발견과 성찰, 이어진 내면의 갈등, 그리고 마침내 갈등을 이겨내고 초월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크네히트는 세속적인 부와 명예, 그리고 그것들의 정반대에 위치한, 정신적이기만 한 모습까지도 모두 던져버리고, 보다 통합되고 완전하면서도 순수한 것을 향하여 홀로 꿋꿋이 전진하는 정신적 승리자였다. 그는 실로 세속적 세상도 넘어서고 정신적 유토피아, 카스탈리엔도 넘어선 조화로운 통합의 상징, '유리알 유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해 본 자에게는 중재자나 화해자로서의 역할이 암묵적으로 기대되는 법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현실에서 그들은 그 특권을 거부하고, 오히려 분노에 가득 찬 채 가장 효과적인 파괴자로 군림하거나 아니면 고독한 아웃사이더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은 한 세계를 넘어 두 세계를 모두 얻고 싶어하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남을 향한 삶으로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깊숙이 숨겨졌던 지배욕과 몰래 감추었던 나르시시즘의 본격적인 발아 시기와도 같다. 그 결과, 중재나 화해가 아닌 견제와 장악이 선택되고야 마는 이 비극은 과연 인간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양쪽 진영을 모두 알아 화합과 통합을 도모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른 극소수의 사람들조차도 결국에는 두 세계를 모두 파괴하거나, 두 세계를 모두 등지고 떠나 고독한 방랑자가 되어버리는 이유는 아마도 우린 인간 내면에 뿌리깊게 각인된 근본적인 죄와 악에서 그 답을 찾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특권의 자리에 가도, 범인의 자리에 머물러도, 우린 모두 ‘인간’으로서 같은 선상에 위치해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네히트는 파괴자도 아웃사이더도 아닌 길을 선택했다. 그 둘을 모두 내려놓았지만, 죽기 직전까지 그는 그 둘의 화합과 통합을 위한 소망을 놓지 않았다. 비록 육체적 죽음을 맞이했지만 말이다. 난 이 부분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구별되어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카스탈리엔은 한 땐 세상의 모든 정신적인 부분을 총괄하고 배포하며 타락한 인간의 정신성 회복에 앞장섰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갇힌 우물이 되어갔다. 어찌 보면 크네히트는 지진이 일어날 것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지하는 예민한 동물처럼 카스탈리엔의 몰락을 예감했던 것이다. 카스탈리엔은 우리 시대의 일부 종교집단이나 상아탑 안에 갇혀 국민의 세금만으로 자기 배를 채우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 특권층의 사람들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거나 정화하는 peacemaker 역할이 애초부터 주어졌지만, 그 안에서만 머물며 세상과 소통 없이 고상함만으로 안락하는 peacekeeper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의 거짓과 불의를 정화시키고 그 이전으로 회복시킬 공적인 사명을 담당해야 할 기관이 사적인 안위만을 취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린, 특히 기독교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들은 우리들의 카스탈리엔이 본질적 임무를 다하고 있는지 점검해야만 하고, 우리에게 크네히트가 준비되어 있는지 자문할 때다. 장망성은 세상보다 카스탈리엔에서 먼저 시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세상 속에 함께 존재할 때 카스탈리엔의 빛은 흐려지지 않고 밝게 빛날 것이다. 교회와 나그네 된 하나님백성의 바른 위치와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점검할 때다.


#김영웅의책과일상


1. 수레바퀴 밑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43022562409185

2. 싯다르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50722494972525

3. 게르트루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4071523637622

4. 페터 카멘친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9595666418541

5. 황야의 늑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93746594003448 

6. 크눌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04866382891469

7. 로스할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44402088937898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906654982712608

9. 데미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71433049568136

10. 유리알 유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61378043906966

11. 요양객: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13336575377776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0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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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우종학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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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크따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에서 박 기자와 한 교수라는 두 명의 가상 인물을 설정하고, 그 배후에서 모든 걸 조율했던 우종학 교수 (존칭 생략)가 그의 두번째 책, 과도기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무대 뒤에서 연극을 보여주며 간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다가, 이번엔 나이를 예측하기 힘든 동안의 (^^) 감독이 무대 앞에 나와서 직접 관중들과 만나며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작품을 설명하는 셈이다. 무크따를 읽는 독자는 한 교수가 박 기자에게 하는 친절한 일대일 과외에 동참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과학과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면, 기독교인들이나 심지어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무크따는 부담없는 입문서로써 적절하다. 반면, 과도기는 저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원하는 강의를 동영상이나 녹취록이 아닌 직접 강사를 코 앞에 두고 라이브 강의를 들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을 고화질의 멋진 천문학 관련 사진들과 함께 (심지어 올 컬러다!)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장감과 더불어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강사로부터만 자연스럽게 전해오는 진심어린 한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기 위해선 아무래도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는 이 책의 독자층으로서 적절할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과학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인의 바른 응답을 요구하며 기대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을 밝히고 그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했던 책이 무크따였다면, 과도기는 좀더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부터 쌓여온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는 것에 무크따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과도기는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에도 지속될 과학시대가 지속해서 던져줄 도전에 대해서 기독교가 어떻게 응답해야 올바를지 청사진을 넌지시 제시하기 때문이다. 과도기가 미래까지도 내다보며 기독교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이 고무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과학과 신앙에 얽힌 오해와 편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당분간은 미래에도 진행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것이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안타까운 현실을 다시 직시할 수 있었고, 나 역시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저자의 한을 공감할 수 있었다.


과도기의 목적은 21세기 과학이 기독교에 던지는 세 가지 도전을 검토하고, 이 도전들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고찰하는 데에 있다. 책의 기본적인 구조 역시 세 가지 도전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짜여 있다.


우종학 교수의 저서나 수많은 강연에서 일관되게 언급되는 중요한 견해 하나는, 성경과 자연이 하나님을 알려주는 두 가지 책이라는 것이다. 두 책의 저자는 동일하게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두 책이 말하는 내용은 결코 상충될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성경이 창조를 ‘누가’ 했는지를 밝히는 책이라면, 자연은 창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같지만, 책의 목적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는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전제가 될뿐 아니라, 과학과 신앙의 올바른 대화를 시작하는 데에 있어 아주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숙고해 둘 필요가 있다.


책이 쓰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저자의 목적과 의도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의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게 읽어야 그 책을 잘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부합하지 않게 책을 읽는 것은 독자들이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독자에 불과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책을 해석한다든가, 자신의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숨긴다면, 아마도 그 독자는 둘 중 하나다. 저자를 평가할 만큼의, 아니면 저자보다도 뛰어난 역량을 가진 존재이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는 자기중심의 비겁하고 이기적인 존재일 것이다.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의 우산 아래 모여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상식적인 경계를 무시하고 저자의 목적과 의도에 상관없이 독자인 자신들의 신념과 주장에 모든 것을 맞추어 왜곡해서 두 가지 책인 성경과 자연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오류를 범하는 그들의 의도가 처음부터 그릇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려고 했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신앙을 공격한다고 여긴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한 우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끼리 한 마음으로 되기 위하여 일종의 정신 교육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 수단으로써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든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도 않은 것들을 자신들의 사상에 맞추어 마치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과장해서 해석한다든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 슬그머니 무시하며 읽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잘못된 방법 때문에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되었고, 심지어 나중엔 자신들도 그 결과가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인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나름의 정당성 (아마도 기독교인 중 다수라서?)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잘못된 길을 고수하고 남들까지도 혹하게 만드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로 인해 처음의 의도 자체도 의심받게되는 자가당착의 모습까지도 보이는 것 같다. 분명 그들이나 나나 똑같은 창조주인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건 분명히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었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책에서도 우종학 교수는 누차 반복하면서 이 부분, 즉 책의 잘못된 해석방법을 강조한다. 창조과학이라는 우산 아래 모인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기독교인 그룹은 책에 잘 명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창조 방법에 대해선 성경은 별 관심이 없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대신 자연이라는 책은 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인간은 과학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자연이라는 책을 해석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사실이다. 과학 자체는 자연현상을 관측하고 실험하고 증명하면서 기존에 몰랐던 사실을 밝혀내는 역할을 한다. 과학은 또한 한계를 지닌다. 즉, 과학으로 밝힐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신의 존재 유무다. 과학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유신론/무신론의 오래된 싸움을 끝낼 해결사가 될 수 없다. 과학이 아직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과학이 밝힐 수 있는 영역 밖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립적이며 중립적일 수 밖에 없는 과학을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이 자신들의 공격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정도를 넘어선다.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군중몰이를 하는 것처럼 왜곡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 자체가 심히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중립적인 과학을 신앙과 적대시하며 마치 과학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와 모순되는 것처럼 느끼는 통념이나, 과학을 무신론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과학주의 무신론자뿐 아니다. 교회가 직면한,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도전은 바로 기독교 내부에 있는 근본주의/문자주의적인 방식에 길들여져 있고 이를 신봉하고 있는 무리들이다. 창조과학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마치 기독교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듯하다. 우주와 지구와 생명의 탄생, 그리고 진화를 설명하는 중립적인 과학의 증거들을 뭉뚱그려서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하고 반역하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죄악시하며, 눈과 귀를 닫고 등을 돌려 스스로 만든 그림자에 갇혀 그들끼리 소통하며 그들끼리 하나가 되기 위해 행하는 정신 교육이 내가 보기엔 정말 시대착오적이며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인 우종학 교수는 책에서도 여러번 말한다.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 대상으로 교회 내부에서만 배회하며 과학에 흠집이나 내지 말고 당당하게 링 위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붙자고 말이다. 과학자는 증거에 기반한 논리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창조과학자들이 지속해서 정정당당한 링 위의 결판을 피하고 여론몰이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내 생각에도 그들은 정말 박근혜 정부처럼 탄핵되어야만 할 것 같다. 진검승부를 피하고 언론이나 여론을 이용해서 일반인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마약과도 같고 종교와도 같은 방법으로 자기 편만들기나 하는 시대는 이미 탄핵되었다는 점을 그들이 바로 알았으면 한다. 나아가, 기독교를 지키려고 했지만, 탈기독교 현상을 그들이 부추기고 있다는 점도 꼭 똑바로 인지하고 그들의 방향에 수정을 가했으면 좋겠다.


과학의 발전 속도는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그 증가하는 속도로 밝혀내는 사실 또한 가히 엄청나게 많다. 앞으로도 이런 흐름은 지속될 것이며 첨단과학이 일상이 될 정도의 과학시대를 살아갈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접하게 될 때 어떻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할 것이며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건강하게 지켜나갈지는 무척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나 역시 생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이 부분에 대해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한국에선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새물결아카데미를 축으로 한 운동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새물결플러스를 축으로 한 기독교 출판업계가 좋은 책을 출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에 있는 과학자 기독교인뿐 아니라, 세계에 흩어진 남은 자로서의 과학자 기독교인들까지도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를 내어 과거부터 누적된 과학과 신앙의 해묵은 편견이 깨어지고 서로간의 건전한 대화가 이루어져 보다 넓고 보다 깊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날을 고대한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2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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