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밑에 헤르만 헤세 선집 2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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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스를 죽였는가.


헤르만 헤세 저, ‘수레바퀴 밑에’를 읽고,


밤 9시가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혼내주기 위해 아버지는 오랜만에 분노의 회초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같은 시간, 아들은 멀리서 이미 주검이 되어 차디찬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억압의 상징인 수레바퀴 밑에서 기어이 한스는 죽음을 맞이했다.


한스 기벤라트는 재능있는 아이였다. 시골 마을에서 유일하게 주 시험에 응시하여 차석으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영예를 누릴만큼. 한스의 합격은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학교 교장의 명예였으며, 마을 목사의 자부심이었다. 한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그는 주위의 칭찬과 격려에 순응적이었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며 성공의 피라미드에 오르는 꿈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과도한 공부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일상을 빠른 출세를 위한 준비 과정과 맞바꾸는 그들의 친절한 손길에 그대로 순종했고 또한 증폭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선순환의 효과가 한 영혼의 파멸을 가져다 줄지는 그땐 아무도 몰랐다.


한스의 짧은 인생은 초창기에 터보 엔진을 장착한 로케트와 같았다. 가파르게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경쟁자 하나 없는 블루 오션을 누리기도 했다. 아주 총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빨리 올라가면 빨리 내려오는 것일까. 한스의 표면적인 오르막길의 끝은 신학교 입학 후 첫 학기에 불쑥 찾아와 버렸다. 수도원 침실을 같이 사용하는 친구 헤르만 하일너를 만나고나서 부터였다.


헤르만 하일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체제에 비판적으로 저항하는 시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신학교에 들어올만큼 인재였지만, 학업에 매진하는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았으며, 한스 이외에는 친구도 없이 홀로 어둑한 연못 근처에 앉아 시를 읊거나 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체제의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하는 반항아적인 그의 내면에 있던 불안한 정서는 급기야 그로 하여금 퇴학 처분을 받게 만든다. 그가 강제로 떠나게 되자, 유일하게 그와 함께 일탈을 일삼아 문제아로 낙인 찍혔으며 학업에서도 멀어질대로 멀어진 한스 역시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고 요양 차원에서 집으로 보내진다.


한스의 귀가는 한스에게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아버지의 망신이었고, 학교 교장의 명예 실추였으며, 마을 목사의 수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사적이고 고급스럽게 그 감정들을 잘도 숨겼다. 그들 중 한스의 실패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으며, 곧 자살할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가득차게 되자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자살을 계획하면서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과 눈짓과 몸짓에 초연할 수 있었으며 묘한 환희까지 느꼈다. “두고 보라지. 다들 깜짝 놀랄 일이 생길테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비록 어린 시절 짝사랑했었던 소녀 에마와의 재회로 뒤늦게 찾아온 주체하지 못할 사랑의 충동을 느끼며 한스는 마치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에마는 말도 없이 고향으로 떠났다. 비록 어린 시절 평범한 아이들처럼 말썽부리며 뛰어놀던 장소에도 직접 가서 그때의 향수에 젖어도 보았지만, 그곳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만큼 자신이 커버렸다는 사실을 한스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실망을 숨기는 것이 마치 아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이자 사랑인 것처럼 여기는듯한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한스는 견습공으로서 일을 시작한다. “어찌 된 일이야? 네가 철물공이 된거니?”, “주 시험에 합격한 기계공이군!”과도 같은 조롱에도 별 대꾸하지 않을 각오가 된 것이었다. 이미 한스는 자살 충동에 흥분하는 시기를 지나 몽롱한 나른함과 나태함으로 이루어진 체념의 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듯한 기분도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무 빨리 늙어버린 탓이었다.


나중에 저자 헤르만 헤세의 연보를 보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스와 하일너는 각각 헤세의 분열된 자아다. 헤세 역시 어릴 적 인재였고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쫓겨났다. 견습공으로서도 일해보았다. 아버지와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즉, 헤세는 자신의 실제 내면 세계를 기반으로 삼아 창작과정을 추가하여 이 소설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책이 헤세의 자서전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책을 덮자 마음이 무거웠다. 이미 중학생 시절에 한 번 읽었기 때문에 한스의 죽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난 끝까지 그의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다. 특히나 그의 죽음의 상세한 과정과 설명이 책에 부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나의 허무함이 배로 커져버렸었다. 한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믿는 유일한 구두장이 플라이크 빼고는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버지도, 학교 교장도, 그리고 마을 목사도. 아무도.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건 그들이야말로 수레바퀴를 돌리는 장본인이었다는 점이다. 한 어린 영혼을 처참하게 파멸로 이끈 수레바퀴를 그들은 그들의 공명심으로 성실하게 돌려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스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죽음으로 응답해야 할만큼 말이다.


이 책은 헤세의 자서전을 읽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헤세의 목적은 분명 거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어떻게 하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가 헌신하며 도왔다고 생각하면서, 한 어린 영혼을 공식적이고 효과적으로 파멸시킬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지름길을 제시하며 거기에 강렬한 비판을 가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미 고고하게 확립된 체제와 규범, 그 배후에 숨어서 실리를 취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본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실하게 지속해서 돌려야만 하는 수레바퀴. 그렇다. 수레바퀴는 겉으로는 건실하게 보이는 사악하게 획일적인 프레임의 중추다. 그것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프레임에 순응적이지 않은, 즉 창의적으로 탁월하거나 아니면 부족하고 약한 이들을 규격화시키는 힘이다. 한스는 그 수레바퀴로 만들어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개성이 넘치며 제각기 다른 영혼들이다. 결코 획일화될 수 없는 존재다. 공장의 규격화된 부속품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의 교육 제도를 포함한 수많은 체제와 규범들을 보면 공장과 다름 아니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가 잠정적인 프로크루스테스일지도 모른다. 한때 스스로는 그 프레임에 저항했으나 결국 순응해버렸고 이젠 남들까지도 자로 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각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소통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아름다움은 세상에선 그저 비효율적인 잡음에 불과하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수레바퀴는 그렇게 우리들로부터 인간다움과 낭만을 앗아갔다.


죽은 한스를 생각한다. 그는 바로 우리일 수도 있고, 후대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자녀일 수도 있단 말이다. 떠밀리며 사는 삶엔 소망이 없다.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시대에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난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끽끽대는 기계소리를 거부한다. 두 번째의 한스가 나오지 않도록 우리가 나서야 할 차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4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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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선집 3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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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찾는 구도자.


헤르만 헤세 저, '싯다르타'를 읽고.


평일에 팔다리가 피곤해질 때까지 일을 한 사람들에게 휴일은 더욱 축제처럼 느껴진다. 일상을 잃어본 사람은 일상의 위대함에 전율하기 마련이다. 순식간에 망각은 착각이 되고, 착각은 깨달음이 된다. 보람과 성취감, 그리고 경이감, 이름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된 행복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이런 소중한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우리를 찾아왔다가, 아쉬워할 새도 없이 순례자처럼 사라져 버린다. 깨달음은 어느새 착각으로, 착각은 다시 망각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 인간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진리를 찾기 위한 인간의 역사는 곧 철학과 신학의 역사다. 진리가 본질적인 가치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인간은 그것을 찾기 위해 모든 방법으로 모든 곳을 뒤졌다. 누군가는 피안의 세계에서, 누군가는 차안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았다. 누군가는 사유만으로, 또 누군가는 감각만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진리가 사물의 배후에 있다고 하여 눈에 드러난 현상계를 무의미하고 우연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경멸했으며, 또 누군가는 사물들 속에 진리의 본질과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진리를 찾기 위하여 자아를 벗어나고자 온갖 힘을 다했지만, 누군가는 외부가 아닌 오히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했다. 과연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에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진리가 어디에 있든, 진리를 찾기 위해 진지한 발걸음을 내딛는 모든 구도자에겐 그 과정 자체가 인생 전체를 의미할 만큼 절박하고 의미심장할 것이다. 구도자는 그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설 때도 있을 것이며, 고뇌와 희열의 경계에 서서 번뇌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조차 망각과 착각, 그리고 깨달음의 변증법적인 고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불교의 윤회 사상이 어쩌면 이런 인간의 행로를 잘 설명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여기, 한 구도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싯다르타.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위대한 현인이자 사제, 브라만의 우두머리로 자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탁월함은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정신적 만족도, 영혼의 안정도 얻지 못한 채 불안해했다. 그의 진리를 갈구하는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늘 고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고행과 명상 등으로 해탈에 이르려는 사문들의 일행에 합류한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래서 자신을 초탈한 경지에서 경이의 세계와 접하는 것이었다. 타고난 재능과 뛰어난 학습능력으로 그는 몰아와 침잠을 익혔다. 단기간 내에 사문들 중에서도 탁월함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3년 뒤 사문 생활도 접기로 결정한다. 몰아의 경지에 이를 줄 안다 해도, 매번 또다시 자아로 되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러한 윤회로부터 고뇌를 느꼈다. 이런 것들이 그저 자아라는 고통에서 잠시 동안만 벗어나게 해주는, 마치 잠시 동안만 의식을 마비시키는 것과 같은 미봉책으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원했던 해탈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문들의 방법으로는 결코 열반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사위성에서 부처인 고타마를 직접 대면하면서 싯다르타는 그 동안 자신이 추구해왔던 소망, 즉 스승의 가르침을 매개로 해탈에 이르려는 마음을 접게 된다. 스승으로부터 배우려고 했던 것, 그러나 그들이 도저히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자아를 벗어나 아트만과 브라만을 추구했지만, 그러다가 자기 자신까지도 잃어버렸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그는 결단한다. 앞으로는 자기 자신한테서 배워서 자기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자신의 비밀을 알아내겠다고. 싯다르타는 자기 내면으로 향하는 도정에 들어선 것이었다.


본질적인 것이 늘 피안에 있다고 여겨왔으나,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더 이상 피안이 아닌 차안의 세계에 머물렀다.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도 않게 되었고,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삶을 시작한다. 예전엔 경멸했었던 현상계의 일부가 되었다. 사유만이 아니라 감각도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다. 더 이상 외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내면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던 탓일까. 강을 건너고 도시에 이르러 그는 카말라라는 고급 창녀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그 동안의 삶과는 정반대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사색과 기다림, 그리고 단식이었던 그가 점점 세속적으로 변해갔다. 쾌락과 탐욕, 나태함의 노예가 되었다. 부에 대한 욕망이 생겼으며 기어이 도박꾼까지 되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황금 새장 속에서 죽은 새를 집어 던지는 꿈을 꾸게 되는데, 그 순간 그는 그가 던진 새와 함께 자기 내부에 있던 선과 그 밖에 가치 있는 것들까지도 송두리째 내던진 기분을 느낀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 덕분에 감각만으로 이루어져왔던 그 동안의 삶의 유희가 끝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과감히 그의 장원과 도시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에 건넜던 강가에 이르렀고 자신에 대한 실망과 인생의 부질없음을 놓고 자살을 생각한다. 그 순간 완성을 의미하는 ‘옴’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육신을 소멸시킴으로써 안식을 찾으려는 어린애 같은 욕망만이 크게 자라나버린 자신의 모습에 개탄한다. 그는 옛 자아는 죽었고 새로운 자아가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기쁨을 느꼈다.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강가를 나머지 인생의 출발점으로 삼게 된다. 거기엔 바주데바라는 뱃사공이 있었다. 예전에 그 강을 건너 도시로 갈 때 도와주었던 뱃사공이었다. 싯다르타는 그와 함께 동고동락을 하게 되며 자연, 특히 강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다.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고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모습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을 띤다. 아래를 향해 나아가고, 가라앉고, 깊이를 추구하는 강물처럼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함께 깨달음과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고타마의 입적이 다가와 전국에서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왔다. 그 행렬 가운데에 카말라가 있었다. 이미 화류계를 떠나 불제자가 되었었던 카말라는 혼자가 아니었다. 싯다르타의 아들과 함께였다. 불행히도 카말라는 강가에서 뱀에 물려 죽게 되고 아들만 남아 싯다르타가 바주데바와 함께 키우게 된다. 아들이 나타나고부터는 싯다르타 자신도 완전히 어린애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 인간 때문에 고민하고, 한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빠져 정신을 잃어버려 바보 천치가 된 것이었다. 그러한 맹목적인 사랑이 일종의 번뇌요,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란 사실을, 그것이 윤회이자 슬픔의 원천이자 시커먼 강물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것이며 자신의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방지고 불손한 아들은 돈을 훔쳐 달아난다. 


아들로 얻은 상처는 싯다르타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하지만 그 상처 덕에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전보다 덜 현명하고 덜 오만해졌다. 대신 전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각이나 통찰이 아니라 오로지 충동이나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들의 삶에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낄 줄 알게 되었다. 아직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허영심, 탐욕 등 우스꽝스러운 특성들이 이해가 되었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그는 그런 것들이 있기에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것들이 있기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엄청난 고통을 겪고, 엄청난 고통을 견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 각각의 열정과 행위들에서 생명, 생동감, 불멸의 브라만을 보았다. 드디어 싯다르타는 완성의 경지에 접근하게 된 것이었다. 얼굴에는 깨달음의 평온이 피어났다. 


현인으로 소문난 뱃사공, 싯다르타를 만나보러 고타마의 제자가 되었던 옛 친구 고빈다가 찾아온다. 그는 여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순례의 길에 있었다. 기이한 인생을 살아온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나눈다. 고빈다는 그렇게 말하는 싯다르타에게서 평화를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른 모습을 보았다. 다음은 싯다르타의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한 혐오를 그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을 내가 소망하고 상상하는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기꺼이 이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 죄악을 저지르고 관능적 쾌락과 허영심에 빠졌으며,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에 빠져야 했네. …(중략)... 사물들이 환영이건 실재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네. 내게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네. 세상을 깔보지 않고,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의 마음, 외경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할 뿐일세.” 


소설 ‘싯다르타’는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밑에’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발견하고 성찰하고 실현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소설들을 읽는 독자인 우리들은 ‘싯다르타’의 싯다르타가 되기도 하고,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되기도 하며, ‘수레바퀴 밑에’의 한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저자 헤르만 헤세의 자아의 반영이었다. 소설이란 영역이 100 퍼센트 상상과 허구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창작의 시작은 저자,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자아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인도 선교사 가문에서 태어난 헤세는 일찍이 인도에 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도가 사상이 핵심적으로 이 책을 이루는 사상이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인 내가 읽었을 때 이 책은 기독교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헤세는 어떤 특정한 종교를 필두로 하여 진리를 찾을 수 있다거나 자아실현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헤세는 종교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자아실현의 완성은 종교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진리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은 ‘싯다르타’와 ‘데미안’, 그리고 ‘수레바퀴 밑에’를 읽고 나서 내게 비슷한 잔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인간의 다른 이름을 ‘진리를 찾는 구도자’라고 언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헤세는 인간의 본능과 존재의 이유와 가치에 대해 자신의 인생을 매개로 하여 깊게 성찰한 소설가이자 철학자, 그리고 심리학자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재미있게도 나는 제목부터 불교의 이미지가 진득한 이 책 ‘싯다르타’를 읽으며 기독교인이 살아내야 할 바른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싯다르타가 마침내 이른 결론 (내가 그대로 인용한, 싯다르타가 고빈다에게 한 말)에서 특히,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그의 말이 핵심이 되겠다. 물론 도가적인 향이 물씬 풍겨 마치 은둔자의 삶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자의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은혜 중 은혜는 나 같은 자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받아 주신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행해야 하는 삶의 자세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헤세의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새해가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12권 중 벌써 2권을 먹어 버렸다. 데미안은 작년에 읽었으므로 9권밖에 안남은 셈이다. 속도를 조금 늦춰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5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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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루트 헤르만 헤세 선집 5
헤르만 헤세 지음, 황종민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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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


헤르만 헤세 저, '게르트루트'를 읽고.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모진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우린 이런 면에서 커다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올해 들어 세 번째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게르트루트'에서 난 또 다른 헤세의 자아와 그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소설 '게르트루트'는 '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음악가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다. 헤세는 이 소설 속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쿤'과 오페라 가수인 '무오트'로 분열하여, 자아의 스펙트럼 중 ‘예술가’라는 하나의 채널을 선택하여 증폭시킨다. 그러면서도 그 채널을 역으로 타고 프리즘을 거슬러 올라가 빛의 근원에 도달하려고 시도한다. 거기는 헤세 자신과 ‘수레바퀴 밑에’의 한스, ‘싯다르타’의 싯다르타, ‘데미안’의 싱클레어, 그리고 우리 모두의 거짓 없는 자아가 녹아 있는 곳이다.


이 책은 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을 회고하면서 시작된다. 뚜렷한 미래를 꿈꿔본 적이 없었지만, 어릴적 바이올린을 배웠고 음악의 즐거움을 알게 된 기억 덕분에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학교 진학을 결정한다. 비록 능동적이진 않았으나, 어쨌거나 음악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음악이 좋아서 들어갔지만, 학교에서 요구되는 규칙과 규율과 의무에 부딪혀 그는 힘들어했다. 현실세계에서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해보니 그는 그저 자신이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던 철부지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그는 실로 학습되지 않은 천재였다. 그의 안에선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는 그러한 자신을 깨닫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음악에 대한 회의를 느끼던 어느 겨울날, 그는 짝사랑했던 리디라는 소녀의 철없는 제안으로 가파른 언덕으로부터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다가 커다란 나무에 부딪혀 큰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그는 평생 다리를 절룩거리는 불구가 된다.


그런데 그 사고 덕분인지, 쿤은 음악에 대한 사랑과 동경, 그리고 그의 피에 흐르는 예술가적 기질에 집중하게 되고, 그로부터 기쁨과 위안을 얻게 된다. 음악만이 그에게 유일한 벗이자 휴식처가 된 것이었다. 복학한 뒤에도 그는 전에는 자신을 옥죄는 것으로만 느꼈던 학교 생활까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외적으로 불구가 되었으나, 내적으로는 성장하여 강해진 것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절름발이 인생의 시작이 그의 내면에 있던 예술가적 자아를 일깨우고 꺼집어내어 음악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음악가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것이었다.


재탄력을 얻은 그의 예술가적 기질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휴가기간 동안 자연과 함께 누린 철저한 고독과 침묵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는 자신의 첫 소나타와 가곡을 작곡하게 되는데, 학교 선생을 통하여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유명한 오페라 가수, 무오트에게 곡이 알려지고 인정까지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오트와의 만남은 쿤에게 있어 또 다른 낯선 세계로의 진입이었다.


첫 만남 이후, 무오트는 쿤에게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는 쿤의 곡들을 가장 먼저 사랑해 주었고, 무엇보다 그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가장 먼저 진심으로 인정해 주었다. 실로 무오트는 수면 아래 있던 쿤을 수면 위로 올려주는 다리였던 셈이다. 또한 무오트의 유명세는 무명인 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나중에 쿤은 곳곳에서 그가 작곡한 곡들이 연주될만큼 유명해지고, 신문에도 실리며,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평도 듣게 될만큼 성공한 음악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는 무오트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음악가의 인생도 사람의 인생인 법. 음악가의 인생에서 무오트는 쿤에게 정체성을 확립시켜주고 성공까지 가져다주는 다리가 되어 주었지만, 사람의 인생에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랑을 앗아가는 주범이 된다. 쿤은 자신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연인으로 지내자는 적극적인 제안까지 유일하게 했었던 여인, 게르트루트를 무오트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는 친구로 지내자는 게르트루트의 확고한 응답을 받은 불구자였고, 무오트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닌 오페라 가수였다.


비록 무오트의 고질적인, 카사노바적이면서 사디스트적인 성향 때문에 고결했던 영혼의 소유자 게르트루트조차도 결혼 후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별거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게르트루트의 눈에선 더 이상 고결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쿤은 그들의 결혼 때문에 맘먹었던 자살 생각도 이겨내고, 그들의 별거로 인해 고통받는 게르트루트와 무오트와도 관계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성숙한 인격을 보여준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와의 서먹했던 관계에서 왔던 영향도 이겨내며 쿤은 한층 더 성장하게 된다.


쿤이 열등감을 가진 헤세와 우리의 자아라면, 무오트는 오만함을 가진 헤세와 우리의 자아다. 책에서도 쿤은 게르트루트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친절과 사랑을 동정으로 생각하곤 하는 오류에 자주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열등감의 표출인 것이다. 반면, 무오트는 많은 것을 가졌으나 정작 내면의 안정을 찾지 못하여 늘 가학스러우리만큼 탐욕적인 사람으로 그려진다. 오만함의 병폐인 것이다. 책에서는 비록 오만함이 열등감을 이겨 게르트루트를 아내로 얻게 되지만, 그 승리는 오만함의 파멸로 이어진다. 게르트루트와의 별거로 인해 결국 무오트는 자살을 실행에 옮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열등감이 오만함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열등감과 오만함은 야누스의 두 얼굴과도 같다. 그 정체는 바로 교만, 둔갑의 귀재인 교만은 약자에게 가서는 열등감이 되고, 강자에게 가서는 오만함으로 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약자의 열등감과 강자의 오만함을 넘어설 때 우린 비로소 '진정성'과 마주한다. 열등감과 오만함은 우리 안에 자주 공존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것들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한다. '나'만 아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 그래서 나를 속이고 남도 속이는 죄악의 실체. 모든 폭력의 근원, 패망의 선봉, '교만'은 '진정성'의 대적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나'를 넘어 '남'에게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이라면, 험난할지라도 교만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게 되는 과정이 우리의 인생이라면,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적인 영역에 갇힌 자아가 공공성을 띠게 되는 모습에는 분명 희망이 있다. 공공성의 무게중심은 '내'가 아닌 '남'에 있으며, 그래야 '우리'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진정성과 함께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린 마침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세는 무오트를 통해 오만함으로 표현된 교만에 막혀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 인간의 유형을, 쿤을 통해 열등감으로 표현된 교만을 이겨내어 자신을 넘어서 성장과 성숙을 이룬 인간의 유형을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교만은 우리 안에서 언제나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분열한다. 그리고 마치 정반대로 보이는 두 축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하나의 다리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했던 소중한 사람 게르트루트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교만을 넘고 나를 넘어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오트가 아닌 쿤처럼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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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카멘친트 헤르만 헤세 선집 10
헤르만 헤세 지음, 김화경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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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 시인에서 인간으로.


헤르만 헤세 저, '페터 카멘친트'를 읽고.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쉬지 않고 일한다. 끊임없이 들어주고, 끊임없이 말해준다. 자연은 찾는 이에게 훌륭한 상담가인 것이다. 페터를 붙잡아 주었던 존재도 사람이 아니었다. 장엄하게 늘어선 산맥과 첨탑처럼 솟아오른 산봉우리, 그리고 그 위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구름이었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그에게 안식을 주었고, 난해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었으며, 잠자고 있던 그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선생이었다. 변함 없지만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자연은 그렇게 페터를 맞이했고 또 성장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사랑했던 어머니도, 첫 우정으로 성큼 다가왔었던 리하르트도, 수줍어하는 듯 큼직한 눈을 가졌던 작고 연약한 영혼의 아그네스도, 그리고 그에게 진정한 사랑과 미덕을 가르쳐주었던 불구자 보피도 모두 짧은 생을 뒤로 하고 페터를 떠나 죽음의 세계로 먼저 가버렸다. 또한 사랑의 불을 지펴 그의 마음을 후벼 파듯 아프게 했던 에르미니아 알리에티도, 또 엘리자베트도 페터를 스쳐 지나가며 각기 제 갈 길을 갔다. 그러나 자연만은 변치 않고 남았다. 사랑도 죽음도 그를 지나쳐갔지만, 자연만은 언제 찾아가도 가만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고,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어루만져 주었으며, 그에게 따스한 말을 건네주었다. 지친 그의 영혼은 자연 속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페터는 스위스 알프스 산자락에 놓인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의 성은 카멘친트, 마을 사람의 대부분이 가진 성이기도 하다. 가까운 친척과 먼 친척의 구분만이 있을 뿐인 그 작은 마을 니미콘은 식물의 한 군락처럼 대대로 자연 속에서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페터에게 니미콘의 순리를 거스르는 순간이 찾아온다. 어쩌다가 쓰게 된 편지 한 통 때문에 마을 수도원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김나지움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있어 산골 소년의 운명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자신도 몰랐던 글쓰기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의 일부로써 그를 형성했던 자연의 풍성함은 페터를 작가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연은 그를 시인이 되게 했다.


니미콘을 떠나 도시에서 대학도 다니고, 비록 성공하진 못했으나 사랑에도 빠져보고, 여행도 수없이 다녀보고, 졸업하여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도 보았지만, 그의 자연에 대한 동경과 사랑, 그리고 애찬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러나 페터에게 부족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에 대한 지식의 부재였다. 유달랐던 자연에 대한 강한 애착이 남긴 뜻하지 않았던 효과였다.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나서부터 그의 시상을 담는 메모장과 기억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된다. 그의 연구 대상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보피였다.


페터도 반신불수의 꼽추, 보피를 첫 대면부터 좋아하진 않았다. 처음에는 여느 사람들처럼 그를 흉측하고 불쾌하고 거북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어느 날, 그를 혼자 친구의 집에 놓아두고 친구 가족과 함께 소풍을 나갔을 때였다. 그가 늘 연구하며 사랑해 마지 않았던, 그래서 이웃 사람들에게 늘 이야기해 주었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섬광처럼 생각이 났고, 그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신의 목소리로 들렸다. 페터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바로 옆에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 하나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여태껏 무엇 때문에 성자의 삶을 연구하고 그의 사랑의 노래들을 부르고 외우고 또 사람들에게 가르쳐왔는지, 떠밀려오는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자신의 모순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한달음에 자물쇠가 걸린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다.


보피는 선천성 불구자였지만 사람과 자연, 인생과 세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은 지혜로웠으며 그의 영혼은 아름다웠다. 페터의 부족했던 부분 (사람에 대한 지식)이 가족이나 친구, 사랑했던 여인이 아닌, 하마터면 쉽게 스쳐 지나갈뻔했던 불구자 보피로부터 채워지게 된 것이었다. 사랑의 실천과 지혜의 나눔을 통해 마침내 사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보피의 죽음을 지켜보며 가슴을 또 한번 쓸어 내렸지만,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고향에 돌아온 페터는 또 다시 자연 속에서 치유함을 받는다. 그리고 한층 성장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책상 서랍에는 필생의 역작을 쓸 자료들이 준비가 되었지만, 그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 바로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라고 고백한다. 실로 자연은 그를 치유하여 작가나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더불어 사랑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까지도 깨닫게 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페터는 시인에서 인간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는 '게르트루트'처럼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소설이다. 그러나 '게르트루트'와는 달리 이번에는 헤세의 자아가 두 개로 분열되지 않고 주인공인 페터 카멘친트에게 온전히 들어가 있다. 헤세를 작가의 대열에 합류시킨 첫 번째 소설이었기 때문인지, 나는 내가 읽어온 헤세의 소설 중 가장 가미되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헤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페터는 상류층도 아니었고, 극빈곤층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는 천재도 아니었으며, 바보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평범했다. 페터의 성장과정은 평범한 우리들의 삶과 별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일까?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일상의 조각들이 기술된 이 책에서 난 나의 일상을 보았으며, 작은 굴곡을 지나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의 성장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생각과 그가 하는 행동들이 나의 그것들과 겹쳐졌다. 책을 덮고 나니, 나도 페터처럼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한 것 같은 느낌이고, 그에게 사람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던 사랑과 지혜라는 소중한 열매를 내가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스위스의 알프스 산자락에서 말이다. 덕분에 내가 어릴 적 올랐던 동산은 알프스 산맥을 이루는 하나의 봉우리가 되었고, 내가 메뚜기와 잠자리, 하늘소와 사슴벌레, 가재와 올챙이를 잡던 초원과 계곡은 돌연 스위스의 그것이 되었다.


인생은 성공이 아닌 성장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성장은 성공과 실패를 모두 포괄한다. 성공도 실패도 성장을 이루는 요소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성공을 거뒀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성장을 이뤘는지가 더 중요한 가치이지 않을까 한다. 햇살이 산을 비출 때 생기는 음영에 의해 산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듯, 인생도 굴곡이 있기 때문에 더욱 풍성하고 윤택해지는 게 아닐까 한다.


인생의 절반이 지나간다. 나이 마흔이 넘으니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것만 같고, 익숙히 알았던 것들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 뒤에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하고는 뛸듯이 기뻐한다. 여유가 생기고 조금은 지혜로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페터는 작가요 시인이었지만, 그리고 나이가 들어 고향에 돌아왔지만, 정작 그의 역작은 책에서는 끝내 완성, 아니 시작도 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의 인생은 아직 열매를 맺기에는 무르익지 않았다.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 열매를 맺기 위해 자료들을 모으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과학자에서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페터 카멘친트', 내겐 뜻밖의 위로가 되었다. 어릴 적 자연에서 뛰어 놀던 때가 몹시도 그립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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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늑대 헤르만 헤세 선집 4
헤르만 헤세 지음, 안장혁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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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 공존과 대립을 넘어.


헤르만 헤세 저, '황야의 늑대'를 읽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스펙트럼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빛도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빛보다 더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인간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프리즘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하나의 몸과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 여러 개의 자아로 분열하게 되는 걸까? 그 분열된 자아는 전체 자아의 일부일까, 아니면 그들 자체가 수많은 작은 전체들의 집합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그렇게 분열된 자아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큰 자아일까, 아니면 여러 자아들이 뒤섞인 채 그저 하나의 몸에 갇혀 있는 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헤세는 소설을 통하여 과감히 자아를 분열시킨 후 대립적인 성향을 지닌 등장 인물들에게 그의 분열된 자아를 불어넣어 독립된 인간을 창조해낸다. 올해 들어 다섯 번째로 읽은 그의 소설 '황야의 늑대'에서도 그는 또 다른 자아를 선택, 증폭, 대립시킨다. 헤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커다란 줄기라고 할 수 있는 자아 성찰, 발견, 성장이 이 책의 중심부에도 굵직하게 뻗어있지만, 이 책에는 그의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특이한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이 아닌, '하리 할러'라는 한 개인의 내면에서 두 개의 자아가 공존, 대립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두 자아 중 하나가 인간이 아닌 짐승, 늑대라는 것이다.


'늑대'의 이미지는 타고난 개성을 지닌 채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을 의미하는 반면, 그와 반대되는 '사람'의 이미지는 - 책에서는 '시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 체제와 질서에 길들여져, 어쩌면 클론처럼 독립된 개성이라곤 전혀 없이 획일화된 여느 시민을 대표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과 늑대라는 두 자아가 공존하는 장소가 늑대가 아닌 한 인간의 내면이기 때문에 늑대는 아무래도 시민에게 숙주의 컨트롤 타워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늑대의 입장에서 하리 할러의 내면 세계는 맘껏 살기에 척박한 황야가 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하리는 결과적으로 자기 안의 두 자아가 만든 괴리감으로 인해 내면의 고뇌를 감싸 안고 한 시대를 부유하는 현대 인간의 대표격이 된다. 하리는 척박한 세상을 황야의 늑대처럼, 마치 숙명적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다분히 현대적이다. 헤세가 그의 처녀작, '페터 카멘친트'에서 자연의 순수하고 풍성하고 자유로운 감상적 이미지를 강조했었다면, 그의 무르익은 완숙함과 천재성이 단연 돋보이는 이 책 '황야의 늑대'에서는 도시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다. 책을 덮고 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삐쩍 마르고 늙은 회색의 늑대 한 마리가 네온 싸인이 가득한 어두운 도시 한 가운데를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늑대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가히 입체적이다. 상상 속 하리의 얼굴인 것 같다가도 늑대의 얼굴은 내 얼굴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 황야의 늑대는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되고 억눌린 자아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듬어지지 않고 결코 길들여지지 않은 채 외롭고 처절한 방황 속에서 연명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민'에게 꾸준히 주도권을 내어주는 존재, 우리 모두의 내면에도 이와 같은 황야의 늑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헤세의 자아 분열은 곧 우리의 자아 분열이기에, 우리 내면에서의 여러 가지 목소리 중 시민과 늑대의 채널을 찾아 귀를 기울인다면 우린 이 책의 주인공 하리에게 우리 자신을 어렵지 않게 대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하리 할러'라는 이름의 중년 남성이 그의 쇠약해진 육체와 영혼을 이끌고 오랜만에 고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고향은 하리에게 있어서 젊었을 적 시민의 삶을 영위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그 시절 덕분에 세상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음악과 문학,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자가 되었다. 책도 냈으며 신문에 글도 기고하는 지성인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찾은 고향에서 잠시 거주하기로 했던 곳은 시민적인 느낌을 주는 어느 하숙집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마치 금새라도 산뜻한 비누 냄새가 날 것 같은 청결하고도 모범적인 집이었다. 


그런데 하리 안에 있는 늙고 굶주린 늑대의 눈에는 그 집이 너무나도 규율과 규범에 의해 자로 잰듯하여 반듯한 느낌을 주어 신물이 날만큼 역겨운 곳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늑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어 자살이 마지막 해결책이라고까지 생각할 만큼 자신의 과거와 올곧은 시민적 삶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그가 그렇게 시민적인 하숙집을 선택했던 이유는 그의 안에 여전히 그가 태어나고 자란 안정적인 시민적 삶에 대한 동경과 본능적인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늑대'라는 자아가 '시민'이라는 자아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헤세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두 자아로 인해 발생하는 괴리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책을 읽고 있던 내게 이런 복종의 모습은 약간의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자연스럽고 안전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역사를 지속해오며 탄탄히 굳혀온 가치체계, 즉 개성을 거세시키고 획일적인 인간의 대량생산을 유도하는 이 시대의 조류 자체가 다름 아닌 '시민의 탈을 쓴 늑대'와도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헤세는 하리를 통해 어쩌면 암묵적으로 묵인되는 이 세상 흐름의 부조리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우리 모두의 고유하고 숭고한 개성의 말살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시민과 늑대의 대립은 결국 시민에 대한 늑대의 현실적인 복종으로 이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늑대의 복종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지 못했다. 하리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 보았을 때, 오히려 그것은 인간성 상실의 위기를 가져다 준 것 같았다. 책 전반에 걸쳐 하리는 끊임없이 자기 안의 이중성 때문에 고뇌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까지도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환상 속 살인까지 저지르는 모습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하리가 자살을 계획하고 있을 무렵 헤르미네라는 여성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는 자살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는 정반대된다고 볼 수 있는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로 몸을 담그는 시작이었다. 춤을 배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도 조금씩 하며 뒤늦게 사랑을 배웠다. 50세가 되기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삶의 빈 자리가 채워져갔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어져갔다. 그런 향락적인 삶조차도 또 다른 시민적인 삶의 일환일 뿐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하리는 예전에 심취했던 고전 음악과 고전 문학에 대한 꿈을 꾸게 됨으로써 하나의 답을 얻게 되는데, 그가 사랑했던 불멸의 위인, 괴테와 모차르트가 각각 다른 꿈에서 나타나 공교롭게도 같은 메시지를 그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그가 여태껏 견지해온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나, 헤르미네를 만나고 뒤늦게 배웠던 삶의 자세를 모두 넘어서는 유머, 즉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우르라는 메시지였다. 차안에도 피안에도 안주하지 않는 삶의 자세, 그것은 곧 시민과 늑대와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였으며, 하리의 분열된 두 자아가 독립적이기보단 서로 보완해나가며 상생하는 하나의 큰 자아를 이루고 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였다. 


난해하게도 느껴졌던 이 책을 읽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우리 인간들이 각기 다르고 고유한 개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면, 우린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이유를 하나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다름의 아름다움을 잡음으로 여기고 재단하려고만 한다면 그런 세상은 프로크루스테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각 사람을 바라보는 눈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고, 각자가 스스로 내면의 자아를 바라보는 눈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프로크루스테스가 키를 잡고 있는 세상은 주로 승자독식과 약육강식, 그리고 소수층이 무시되어 언제나 사회에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들이 들끓게 되어 있는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곳이기에, 헤세는 '황야의 늑대'를 통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과 그것의 배후에 내재된 인간의 근원적인 죄된 속성, 즉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의 실체까지 수면 위로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더욱이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였기 때문에 이미 전쟁을 직접 한 번 겪은 헤세 자신의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그리고 전쟁이 상징하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의 면목을 조용히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황야의 늑대일지도 모른다. 시대는 날로 편리해져가고 외적인 모든 것들은 풍요로워져간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까지 연장되고 있으며 질병으로부터도 점점 해방되어져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인 속성은 그에 부응하지 않고 오히려 황야의 늑대처럼 삐쩍 말라가며 방황하고 있진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성 상실, 내면 세계의 붕괴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결과로 타인을 죽이거나 자신을 죽이는 사건도 일상이 되어간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괴테나 모차르트의 조언처럼 어쩌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유머일지도 모르겠다. 유머라는 의미는 각자에게 다르겠지만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8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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