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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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예감: 책임과 혼란.

줄리언 반스 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이 책의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이다. 저자의 뛰어난 필력, 그리고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짜임새 있는 작품의 전개 덕에 숨가쁘게 책을 다 읽고, 쉴 시간도 없이 다시 책장을 앞뒤로 뒤적거리다가, 순간적인 전율과 함께 내용을 파악하고 나서야 난 비로소 한국어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원제를 직역했거나 – 이를테면, ‘끝의 예감’ 정도로 – 번역을 아예 하지 않았더라면, 책을 읽기 전 이 책에 대한 나의 인상은 분명 달랐을 테고, 저자의 의도는 물론 작품 속 복선 같은 여러 상징적인 메시지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을 것 같다.

한국어 제목은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효과를 내는 반면, 영어 원제는 끝이 열려 있다. 예감에 대한 결론을 함부로 내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을 영화화한 작품 역시 한국어 제목과 같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좀 실망스럽다. 작은 뉘앙스의 차이지만 내겐 원작을 전달하는 차원에 있어서, 비록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제목에 붙은 마침표의 유무가 의외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뭐랄까, 보이지 않는 마침표가 처음부터 상상력을 제한시킨다고 할까.

어쨌거나 그렇게 난 한국어 번역본으로, 그래서 사뭇 강제로 제한된 상상력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250 페이지 정도 되는 두께를 약 두 시간에 걸쳐 몽땅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저자 줄리언 반스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치밀하게 설계라도 한듯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말, 그러나 이미 그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 작품 여러 군데 깔려 있었음을 뒤늦게서야 ‘아..이럴수가.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하며 깨닫게 되는 책. 이런 소름 돋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난 이 책을 주저없이 권한다. 고전소설이 가져다주는 고유하고 묵직한 매력은 없지만, 현대소설만이 가지는 참신함과 순발력 (그러나 상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가벼운) 등으로 반나절 즐거운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복선은 아무래도 소설 속 화자인 토니의 고등학교 역사 수업 중에 등장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를 정의하는 조 헌트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들이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는 장면이다. 토니는 “역사란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며 거의 본능적인 대답을 했다. 이에 선생님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듯, “역사는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고 첨언했다. 반면, 이 소설의 비극적이면서도 신비로움을 머금은 인물 에이드리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에이드리언은 토니와 늘 함께 하던 패거리에 뒤늦게 합류했었지만, 어느새 조용히 우월한 입지를 선점하는 독특한 이미지의 인물이었다. 생각하는 수준이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았으며, 함께 있어도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동시에, 그는 언제나 암묵적인 리더였다. 또한 그는 학업에서도 남달랐는데, 그의 월등한 성적은 케임브리지에 입학할 정도였다. 토니의 어머니 말씀을 빌자면, 에이드리언은 “너무” 똑똑했다.

베로니카. 주인공 토니가 대학 시절 잠시, 하지만 의미 있게, 사귀었던 여자 친구 이름이자 노년의 토니와 재회하게 되는 인물이다. 사귈 땐 그녀의 집에 초대 받아 그녀의 가족과 함께 한 달 간 머물기도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속마음을 언제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토니는 결국 그녀와 헤어진다. 그리고 뜻밖에도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기 시작한다. 비극의 불씨였다.

당연히 탐탁치 않았지만 토니는 자신이 둘에게 쓴 편지에서 쿨하게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둘의 행복을 빌어주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 눈치 챘겠지만, 이 책은 예순이 넘은 토니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기억, 즉 그의 역사다. 비극적인 건, 그 역사가 고등학생 시절 자신이 역사 수업에서 대답했던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는 점이다. 그가 둘에게 썼던 편지 내용은 전혀 쿨하지 않았다. 4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자신이 쓴 편지를 읽게 되었을 때, 그는 곧장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스럽기 그지없고 추잡스럽고 악의가 가득한 저주의 말들이었다.

토니는 자신이 썼던 그 편지를 다시 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자신에게 남긴 유산에 관한 편지 한 통이 수면 아래 있던 그 기억의 문을 열어버렸다. 기대 밖에도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토니에게 남긴 건, 짧은 편지, 500달러,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었다. 토니는 앞의 두 항목은 그런대로 이해할 만했지만, 마지막 항목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베로니카가 아닌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도저히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일기장은 현재 베로니카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베로니카의 이메일을 알아내서 연락을 취하는 토니. 그녀를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그는 이십대 시절에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낀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반응은 그때와 같이 쌀쌀맞다. “넌 여전히 감을 못 잡는구나.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느지막한 나이에 그녀와 재회한 첫 날, 토니가 그녀로부터 받은 게 바로 자신이 이십대 때 썼던 그 편지다. 추악한 그 편지의 정점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미래를 저주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저주는 혹시라도 둘 사이에서 생겨날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여전히 베로니카가 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대신 그 편지를 주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녀를 세 번재 만나던 날, 그녀는 갑자기 토니를 데리고 어떤 자택 요양 간호 대상자를 만나러 간다. 그 대상자는 나이가 젊었다. 베로니카의 아들이 있다면 아마도 저 나이겠다 싶었다. 그 이후 토니는 베로니카의 의중을 알고 싶었는지 계속해서 그 곳을 찾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간호 대상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는 그가 에이드리언의 아들임을 확신하게 된다. 너무나 똑같이 생겼고 행동거지가 닮았기 때문이었다.

토니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저주가 현실이 되어있음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로니카에게 사죄의 편지를 쓰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토니는 자신의 기억이 그렇게나 부정확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의 역사는 결국 에이드리언의 대답처럼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임도 증명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게 결말이 아니다. 토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이드리언의 아들이 있는 곳을 또 찾아간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되는 충격적인 사실. 그건 에이드리언의 아들의 보호자로부터 들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베로니카는 엄마가 아니라 누나라는 것이었다!

이럴수가. 그제서야 나 역시 토니가 젊었을 적 한 달 간 머물었던 베로니카의 집에서 토니가 느꼈던 베로니카의 어머니에 대한 묘한 감정과, 그가 베로니카와 헤어진 뒤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친필로 작성해서 보냈던 위로 편지의 숨은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또한 베로니카가 의도적으로 토니를 자신의 어머니와 단 둘이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고, 그 이후 토니에게 좀 더 애정을 준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베로니카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라 경쟁자였음을 말이다. 어쩌면 토니가 베로니카의 집에서 에이드리언에 앞서 베로니카 어머니의 유혹에 넘어갔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토니 어머니 말씀대로 토니는 좀 덜 똑똑해서 (덜 민감해서) 그 유혹을 몰랐을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에이드리언. 토니는 40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싸늘하게 대했던 베로니카의 얼굴표정과 태도도 모두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책임감을 느꼈다. 죄책감을 느꼈다. 토니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어찌 보면 이 책은 싸구리 3류 영화 같은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작가의 뛰어난 필력과 스토리 전개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토리 전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인간의 심리와 본성 등을 탁월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에 대해서, 나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나의 역사는 나라는 승자의 거짓말로 도배되고 있는지, 아니면 나라는 패배자의 자기기만으로 가득차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부정확한 나의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나의 확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눈을 뜨고 나도 토니처럼 책임과 혼란을 느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6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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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 과학 시대 창조 신앙
김정형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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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창조 신앙으로.

김정형 저, ‘창조론’을 읽고.

하나님을 문자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하면서도 스스로 기독교 정통임을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이나, 고작 반지성/반과학적인 주장 (이름하여 유사과학)에 머무르면서도 감히 과학이란 단어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주관적 해석을 진리인듯 자신있게 강요하는 동시에, 자칭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창조과학자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공통된 입장을 가진다. 영어로 ‘Creationism’이라 명명된 이 입장은 우리말로 넘어올 때 ‘창조론’으로 오역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다. 저자 김정형은 책의 서두에서 이 오역을 먼저 바로 잡는다. 근본주의자들이나 창조과학자들의 반지성적인 창조에 관한 입장은 ‘창조설’로, 이에 반해 ‘창조론’은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창조에 관한 교리’라고 정의한다. 이 책의 주제이자 제목이 ‘창조설’이 아닌 ‘창조론’임을 주목할 때, 우린 저자가 창조과학의 오래된 논쟁적인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바른 이해를 추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우리의 창조 신앙이 창조설에서 창조론으로 나아가길 염원한다. 더불어, 과학 시대를 맞이한 지 이미 오래인 현대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현대 과학을 배척하지 않고 품는 창조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에 따라 이 책의 부제는 ‘과학 시대, 창조 신앙’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이 책의 기본 구조는 ‘소박한 창조 신앙’에서 ‘성숙한 창조 신앙’으로의 진화 과정이다. ‘첫 번째 순진성’이라고 본인이 명명한 ‘기독교 전통의 창조론’에서 출발하여, 자신과 전통이라는 한계를 넘어, 더욱 풍성해진 창조론, 즉 ‘두 번째 순진성’에 다다르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여정에서 험준한 산과 깊은 골짜기를 지나야만 했다. 이는 아마 나를 포함하여 8,9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겪은 비슷한 여정일 것이다. 가치관과 믿음의 혼란을 불러오는 그 어두운 나날들. 하지만,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사탄의 유혹이 아닌 연단의 과정이다. 두렵고 힘들지만 그 여정을 통과하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지고, 개인의 협소한 구원론 위주의 사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그 경계를 넘어 더욱 풍성한 다양성과 함께 성숙한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성숙한 창조 신앙도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겪어낸 열매일 것이다.

에세이 형식까지 겸하고 있어 이 책의 앞부분은 읽어나가기가 어렵지 않다. 반면, 중간 부분을 읽어나갈 땐 상대적으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 저자의 치열한 고민과 연구, 성숙한 신앙과 믿음을 가능하게 했던 피와 땀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비록 신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저자의 학문적인 이야기를 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곧이어 뒷부분에 등장할 저자의 성숙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천천히 시간을 내어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성숙한 창조 신앙 편에서는 과학 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의 창조 신앙의 현 위치를 검토할 수 있으며, 창조에 관련된 오래된 논쟁을 넘어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창조 신앙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할지 가늠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구원론이 지나치게 강조된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건강한 창조론이 한국 교회에서 함께 강조되길 소망한다. 그러면 나를 구원하신 예수만 감사할 게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아가 나뿐만이 아니라 타자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더욱 풍성한 감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창조과학을 포함한 여러 창조설로 인해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통해 하나의 방향과 답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부디 이 책이 창조과학 논쟁이 자취를 감추고 건강한 창조론이 회복되는 데에 있어 하나의 작은 등불이 되길 기원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5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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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 고통과 기억의 위로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이문원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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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찾아서.

프레드릭 뷰크너 저,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를 읽고.

어렸을 적 경험한 아버지의 자살. 뷰크너의 거의 모든 글에 망령처럼 따라붙는 이 사건은 그의 시간을 두 세계로 나눈다. 그는 이를 각각 ‘시간 이전 (Once Below a Time)’과 ‘시간 이후 (Once Upon a Time)’라는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구분한 뒤, ‘시간 너머 (Beyond Time)’로부터 구원의 어떤 비밀이 우연하고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시간 속으로 침투해온다고 믿는다. 시간 너머의 어떤 능력이 우리 모두의 인생과 모든 시간을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세계의 구분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시절로 대표되는 첫 번째 세계로부터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여정의 시작인 두 번째 세계로의 진입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두 세계 모두가 어떤 초월적인 존재와 힘의 주관 하에 놓여있다고 보는 건 물론 개인의 믿음에 달린 문제다. 하지만 뷰크너는 솔직담백한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그의 정제된 신학적 성찰을 지극히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쉽게 풀어내면서 그 초월적 존재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러므로 뷰크너를 읽는다는 건, 두 세계를 통과하는 모든 인간의 삶이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한 여정’임을 발견해내고 내 삶도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이 책 역시 그의 ‘하나님을 향한 여정’의 일부다. 한국어로 ‘하나님을 향한 여정’이라고 번역된 그의 작품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 이 책은 그 작품의 일부를 포함하기도 한다 – 다소 혼란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이 표현을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번에 세 번째로 만난 그의 글을 읽으며 앞선 두 책을 읽을 때와 동일한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뷰크너뿐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향한 여정’도 다시 멈춰 서서 귀 기울이고 조용히 바라보면서 묵상할 수 있었으며, 거기서 공명되는 어떤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 습관이 될 만큼 충분히 경험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영향 아래 놓여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혹은, 철저히 어둠 속에서 혼자인 것만 같았으나, 뒤돌아보니 정말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안도감과 평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전율의 순간이다. 제한된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시간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는 순간이다. 이런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의 순간들은 살면서 종종 예기치 않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며, 당면한 문제와 다급한 욕망에 묶여있던 우리의 눈을 조금은 더 편안하게 먼 곳을 향하게 한다. 해방과 자유의 순간인 것이다.

뷰크너는 이 책에서 고통은 물론 치유하는 기억의 힘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은 기존에 출간된 그의 여러 작품에서 ‘고통과 기억의 치유력’에 관련된 글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다). 그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아버지의 자살 사건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되는 고통의 상실은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가 명명한 ‘마법왕국’이란 기억의 방을 통해 이미 죽은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과 친구까지도 기억해내고는 그들이 남긴, 혹은 그들과 함께 겪은, 고통의 순간들을 일부러 방문하여, 그때 그곳에도 어김없이 임재했던 하나님을 소환한다. 그리곤 과거와 현재의 고통에 대한 치유를 경험한다. 뜬 눈으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얼굴과 열린 귀로도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을 그는 기억이란 마법을 통해 보고 들으며, 마침내 기억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낸 아이처럼 기쁨을 회복하고 온전한 퍼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이 있다. 그냥 묻어둔 기억들,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기억들, 여전히 날카로운 송곳처럼 언제든 우리를 찌를 준비가 되어 있는 기억들 가운데 분명 우리가 놓치고 있는 기억의 조각이 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받는 여러 방법 중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뷰크너의 기억 방법 (그리스도인에게 이 방법은 곧 기도와 같다)을 사용한다면, 우리 역시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의 순간을 통해 고통의 끝인 기쁨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 기쁨을 되찾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의도적으로 기억의 방으로 들어가는 일은 곧 고통을 재방문하여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밭길을 걷는 위험이나 죽음의 깊은 협곡 위를 평온하게 덮고 있는 크레바스 위를 걷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을 향한 신뢰는 의심의 어두운 숲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확연한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움의 심연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거기 바로 그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조각. 하나님의 임재. 궁극의 답. 결국엔 하나님을 찾고 그를 찬양하고 감사하게 되는 인간의 여정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만 국한된 피날레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5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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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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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눈먼 사람들.

주제 사라마구 저,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고.

이 책의 배경은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의 배경과 같다.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객이 바뀌었다. 전작에서 주요 인물이자 누구보다도 먼저 눈이 멀어 강제로 집단 수용되었던 사람들이 일선에서 빠졌다. 대신 그들을 통제하는 데 무능력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엔 자기들도 눈이 멀어버렸던 정부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기이한 사건 이후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저자 주제 사라마구는 같은 공간을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제목으로 표현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4년이 흐르고 ‘눈뜬 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과연 이 도시엔 그동안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저자는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기억하다시피, ‘눈먼 자들의 도시’의 주요 사건은 ‘백색 실명’이었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실명이 모든 사람에게 급속도로 전염되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반면,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주요 사건은 ‘백지 투표’다.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국민 투표에서 이상하게도 수도에서만 투표된 70 퍼센트가 백지였다. 다른 지방은 과거 투표 결과와 비슷했다. 수도에서만 발생한 특이한 현상이었다.

정부는 분개했다. 며칠 후 투표를 다시 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재투표에선 오히려 15 퍼센트가 증가한 85 퍼센트의 투표용지가 백지로 판명되었다. 백지 투표는 물론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현상을 수도 주민들이 담합하여 정부를 기만하는 반동적인 행위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번엔 가만히 있지 않기로 결정한다. 수도 주민들에게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투표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스스로 깨닫고 반성한 뒤 다시 ‘착한’ 국민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정한다. 수도를 다른 지방으로 옮기고, 모든 공권력이 빠져나가 주민들만 남을 텅 빈 수도에 계엄령을 내려 수도를 고립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은밀하게 실행에 옮긴다.

과연 정부가 의심한대로 수도 주민들이 몰래 비밀스런 동맹을 지어 ‘백지 투표’라는 행동으로 국가에 반동적인 시위를 했던 것일까. ‘백색 실명’이 누군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모두에게 전염되었듯, 혹시 ‘백지 투표’도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70 퍼센트, 85 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전염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시작점은 누구일까. 이 공상적인 질문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결국 참혹한 열매를 맺게 된다.

전작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안과 의사의 아내였다. 모두가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눈이 멀면서 더욱 거리낌 없이 드러난 인간 본성의 추악한 실태를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동시에 살인자이기도 했다.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빌미 삼아 폭력과 강간을 자행했던 남자들의 우두머리를 살해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었다. 그녀 외엔 모두가 눈이 먼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백지 투표 상황이 벌어진 뒤, 어떤 한 남자가 공식적으로 정부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남자는 가장 먼저 눈이 멀어 신호등이 바뀐지도 모르고 차 안에서 울부짖던 바로 그 사람이다. 편지의 내용은, 4년 전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안과 의사의 아내였다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4년 전 눈이 멀지 않았던 여자가 이번 백지 투표 사태를 조장한 주범이라고 추론할 논리적 근거는 전혀 없다. 공상일 뿐이다. 하지만 내무부장관에게는 달랐다. 그는 기어코 이 편지를 시작으로 하여 불의한 방법을 동원해서 그 여자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아 사건을 거짓으로 종결지으려는 음모를 기획하게 된다.

음모의 중심에는 내무부장관이 있다. 그가 비밀리에 수도로 보낸 경찰 3명 (특히, 경정)의 심리변화와 그들과 나누는 대화가 이 소설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아마 저자의 숨은 메시지가 담긴 부분이 아닐까 한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질문과 수사 명령. 도대체 누구를 위한 수사인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난 알 수가 없었다.

수사를 책임지고 수도에 들어간 경정은 끝내 자신은 장관이 시킨 임무를 완성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아마도 양심의 소리를 이길 수 없었으리라), 결국엔 정치 공작의 희생양으로 안과 의사의 아내와 함께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 책은 때론 코믹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처참한 정치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버젓이 눈뜬 자들임에도 마치 눈먼 자들처럼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 눈을 뜨나 감으나 우리 인간은 눈먼 존재라는 것을 이 소설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동시에, 현실은 그나마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수의 눈뜬 사람조차도 잔인하게 죽여버리는 정치판임을 풍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나는 묻는다. 나는 눈뜬 자인가, 눈먼 자인가. 눈을 뜨면 죽임을 당한다 해도 눈을 뜰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계속 눈을 감고 살 것인가.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4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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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 과학 시대 창조 신앙
김정형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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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창조 신앙으로.

김정형 저, ‘창조론’을 읽고.

하나님을 문자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하면서도 스스로 기독교 정통임을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이나, 고작 반지성/반과학적인 주장 (이름하여 유사과학)에 머무르면서도 감히 과학이란 단어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주관적 해석을 진리인듯 자신있게 강요하는 동시에, 자칭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창조과학자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공통된 입장을 가진다. 영어로 ‘Creationism’이라 명명된 이 입장은 우리말로 넘어올 때 ‘창조론’으로 오역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다. 저자 김정형은 책의 서두에서 이 오역을 먼저 바로 잡는다. 근본주의자들이나 창조과학자들의 반지성적인 창조에 관한 입장은 ‘창조설’로, 이에 반해 ‘창조론’은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창조에 관한 교리’라고 정의한다. 이 책의 주제이자 제목이 ‘창조설’이 아닌 ‘창조론’임을 주목할 때, 우린 저자가 창조과학의 오래된 논쟁적인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바른 이해를 추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우리의 창조 신앙이 창조설에서 창조론으로 나아가길 염원한다. 더불어, 과학 시대를 맞이한 지 이미 오래인 현대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현대 과학을 배척하지 않고 품는 창조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에 따라 이 책의 부제는 ‘과학 시대, 창조 신앙’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이 책의 기본 구조는 ‘소박한 창조 신앙’에서 ‘성숙한 창조 신앙’으로의 진화 과정이다. ‘첫 번째 순진성’이라고 본인이 명명한 ‘기독교 전통의 창조론’에서 출발하여, 자신과 전통이라는 한계를 넘어, 더욱 풍성해진 창조론, 즉 ‘두 번째 순진성’에 다다르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여정에서 험준한 산과 깊은 골짜기를 지나야만 했다. 이는 아마 나를 포함하여 8,9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겪은 비슷한 여정일 것이다. 가치관과 믿음의 혼란을 불러오는 그 어두운 나날들. 하지만,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사탄의 유혹이 아닌 연단의 과정이다. 두렵고 힘들지만 그 여정을 통과하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지고, 개인의 협소한 구원론 위주의 사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그 경계를 넘어 더욱 풍성한 다양성과 함께 성숙한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성숙한 창조 신앙도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겪어낸 열매일 것이다.

에세이 형식까지 겸하고 있어 이 책의 앞부분은 읽어나가기가 어렵지 않다. 반면, 중간 부분을 읽어나갈 땐 상대적으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 저자의 치열한 고민과 연구, 성숙한 신앙과 믿음을 가능하게 했던 피와 땀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비록 신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저자의 학문적인 이야기를 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곧이어 뒷부분에 등장할 저자의 성숙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천천히 시간을 내어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성숙한 창조 신앙 편에서는 과학 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의 창조 신앙의 현 위치를 검토할 수 있으며, 창조에 관련된 오래된 논쟁을 넘어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창조 신앙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할지 가늠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구원론이 지나치게 강조된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건강한 창조론이 한국 교회에서 함께 강조되길 소망한다. 그러면 나를 구원하신 예수만 감사할 게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아가 나뿐만이 아니라 타자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더욱 풍성한 감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창조과학을 포함한 여러 창조설로 인해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통해 하나의 방향과 답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부디 이 책이 창조과학 논쟁이 자취를 감추고 건강한 창조론이 회복되는 데에 있어 하나의 작은 등불이 되길 기원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5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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