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귀향 - 기독교, 이성, 낭만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적 옹호서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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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후퇴가 전진이 되다.

 

C. S. 루이스 저, ‘순례자의 귀향’을 읽고.

 

이 책의 원제는 Pilgrim’s Regress. 저 유명한, 존 번연의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천로역정이 17세기 작품이라면, ‘순례자의 귀향’은 20세기 천로역정인 셈이다. 그것도 루이스의 향기가 짙게 배인 천로역정이다. 재미있게도 두 작품의 플롯은 흡사하지만 (당연하다. 루이스가 천로역정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제목에 사용된 두 단어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Progress가 ‘전진’을 뜻하는 반면, Regress는 ‘후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으로 가는 길이 직선 코스라고 가정한다면 (물론 천국은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천로역정은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알다시피 소설이다),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여러 차례 곁길로 들어서서 뜻하지 않았던 위기를 만나게 된다. 가장 짧은 거리인 직선 코스가 존재함에도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불필요한 우회로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항상 외부에서 주어진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 위기를 벗어나 크리스천은 다시 제 길로 들어서며, 마침내 천국 문에 이른다.

 

이 작품의 주인공 존은 한술 더 뜬다. 서쪽의 섬 (갈망의 대상이자 천로역정의 천국과 같은 상징적 의미)을 향하여 길을 나선 존은 여러 환란을 겪다가 마침내 다다른 협곡 너머에서 어렴풋하게 보인 그 섬이 출발지 퓨리타니아에서 보았던 지주 (하나님을 상징한다)의 성이라 불렸던 동쪽 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 속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아니다. 여전히 둥글지만 훨씬 작은 세상이다. 존이 그 산을 마주하게 된 것은 그가 둥근 세상을 한 바퀴 돌았기 때문이었다. 종착지라고 생각했던 그 점이 출발지의 뒷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존은 뒷면으로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여태껏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만 했다. 말하자면, 후퇴다. Regress는 존의 모든 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Regress는 Progress가 된 셈이다. 이 점이 루이스의 천로역정 (바로 이 책, 순례자의 귀향)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아주 중요한 차이를 내는 부분일 것이다.

 

전진하지만 둘러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속성이 천로역정에서 상징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면, 전진한다고 믿었으나 결국 그것이 뒤로 가는 것이었고, 그 끝에서 제대로 된 사실을 깨달으며 회심을 경험한 뒤 새로운 눈을 뜨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면서 목적지에 다다르는 인간의 모습은 ‘순례자의 귀향’에서 도드라진다고 볼 수 있다. 한 방향성을 그린 천로역정의 Progress보다 완전히 반대되는 두 방향성을 담은 ‘순례자의 귀향’의 Regress가 가지는 의미는 독자들에게 의외로 깊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 부분이 표현된 곳을 아래에 발췌해본다. (참고로 처음 존이 서쪽으로 향할 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길동무의 이름은 ‘미덕’이었고, 가이드 없이 혼자 걸어갈 때가 많았지만, 협곡을 건너고 (회심을 한 뒤) 다시 동쪽으로 길을 되돌아갈 때는 ‘슬리키스타인사우가’라는 가이드가 계속 함께 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성령의 인도를 상징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되돌아가야 해요. 그게 앞으로 가는 길이에요. 유일한 경로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개울을 건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Regress는 Progress가 되었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이 점을 유념해서 읽게 된다면, 아마 내가 느꼈던 심오함과 뜻밖의 감동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 인간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을까 한다. 되돌아가는 길이 앞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 그게 올바른 길을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은 루이스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도 여러 사람들과 장소의 이름이 상징적인 개념을 나타내어 (이를테면, 믿음, 우유부단, 고집, 질투, 자선, 굴욕의 계곡, 허영의 시장 등) 알레고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자칫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유독 루이스의 이 작품에서는 그 상징적인 이름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기스문트 계몽’이라는 등장인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뜻하고, ‘마더 커크’는 교회를 상징하며, ‘차이트가이스트하임’은 시대정신을 의미하고, ‘놋스토’는 ‘쓸모없는 곳’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천로역정과 비슷한 플롯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알레고리의 수준이 나 같은 일반인들이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품 뒤에 붙은 ‘저자의 말’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나는 이 작품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난해함은 이 작품이 루이스의 회심 후 단 2주 만에 일필휘지로 써진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많은 부분 용서가 되는 듯하다. 이 책의 번역자인 홍종락이 말한 대로, 루이스의 다른 모든 작품들은 어찌 보면 이 작품의 해제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홍종락이 추천한 것처럼, 루이스가 노년에 그의 회심기를 잘 담아놓은 작품 ‘예기치 못한 기쁨’을 함께 읽는다면, 이 작품의 배경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 아니면 절대 채울 수 없는 갈망과 그 갈망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루이스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7. 시편 사색: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816749868369777

8. 순례자의 귀향: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47954605249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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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싶다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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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방법 이전에 자질.

 

제임스 설터 저,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읽고.

 

‘가벼운 나날’을 읽게 되었던 건 전적으로 신형철의 추천 때문이다. 약 2년 전부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조금씩 틈나는 대로 읽어오면서 그가 쓴 꼭지 하나하나, 아니 문장 하나하나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그의 글을 넘어 신형철이란 사람 자체를 신뢰하게 되었다. 진정성 있는 글은 한 번도 못 만나본 사람끼리의 신뢰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평소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에 대해선 상당히 조심하는 편인데도, 그동안 조금씩 견고히 쌓여온 신뢰 덕분에 나는 그가 추천한 책 목록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었다. 그가 쓴 추천사를 읽고 나서 나는 반드시 이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고,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겼다. 

 

나의 신뢰는 옳았고, 그 선택은 나의 독서 여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비단 ‘가벼운 나날’이란 한 작품을 알게 된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겐 제임스 설터라는 작가를 알게 된 사실이 중요했다. 2015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제임스 설터의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 제목이 “책은 적게 팔렸으나 찬사는 오래 이어진 작가의 작가 90세에 죽다”였다고 할 정도이니, 미국 현대 소설을 거론하면서 아마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제임스 설터가 아닐까 한다. 비록 대중성에 있어서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만, ‘작가의 작가’라는 수식어는 아무한테나 부여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제임스 설터로부터 글쓰기에 대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었다.

 

한 작가에게 매료되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작가의 전 작품을 읽고 싶은 충동. 그것은 자연스레 하나의 계획으로 자리 잡고, 이미 잔뜩 쌓인 나의 독서 리스트에서도 당당히 상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이후, ‘어젯밤’, ‘올 댓 이즈’, ‘그때 그곳에서’, ‘소설을 쓰고 싶다면’이 내 책장에 차곡차곡 들어왔고, 뭘 먼저 읽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 끝에 나는 소설이 아닌 산문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골랐다.

 

이 산문집을 고른 이유는 당연히 제목에 이끌려서다. 언제 한번 소설을 꼭 써야지 하는 생각을 여러 해 전부터 가지고 있던 터라, 마침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들었던,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문체의 작가가 쓴 ‘소설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흥분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좁고 다분히 무식한, 동시에 정석 코스가 아니라 교묘한 샛길을 찾아 뭔가를 뚝딱 만들고 싶어 하는 얄량하고 가소로운 나의 욕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소설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프로토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14년, 그러니까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89세의 나이로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세 차례에 걸려 강연한 내용을 한데 모은 책이다. 그리고 책의 나머지 절반 정도는 1993년에 ‘파리 리뷰’에서 했던 제임스 설터의 인터뷰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자기 계발서 따위가 아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사실 나는 누가 여러분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오히려 실망은커녕 그에 대한 신뢰가 더 생겨버렸다. 숨은 샛길을 찾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제야 제목이 이해되었다. 소설이 쓰고 싶다면 가져야 할 자질과 준비자세, 준비운동, 그리고 소설을 쓴다는 건 고된 작업일뿐더러 소설이 작가의 동반자로서 많은 시간을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 그의 경험 등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는 책이었던 것이다. 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질로써 그는 두 가지를 크게 언급한다. 면밀하게 관찰할 줄 알기, 그리고 자기만의 고유한 문체를 가지기. 아직 내가 완독한 소설은 ‘가벼운 나날’밖에 없지만, 그 한 권만 봐도 이 두 가지는 충분히 검증이 가능하다. 내가 매료되었던 이유도 그의 일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고유한 문체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퇴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글은 묵히고,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고, 오래 달리기처럼 수없이 고치고 고치는 작업을 해야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즉시 그가 쓴 절제된 문장들이 떠올랐고, 그것들이 오래 묵고 잘 정제된 열매임을 알게 되자마자 머리를 강하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볍게 보였던 그 문장들이 전혀 가볍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한 번 더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질은 비단 소설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이라는 더 큰 범주로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어나간다는 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헤세와 도스토예프스키, 카잔차키스와 같은 고전문학 작가들로부터 얻은 영감과 제임스 설터나 필립 로스와 같은 현대문학 작가의 문체가 한데 어우러져 나를 통과하며 부디 무언가 의미 있는 열매가 맺혀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참고: 제임스 설터 저, '가벼운 나날':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01189163259183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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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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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


미야모토 테루 저, ‘환상의 빛’을 읽고.

강렬한 잔상에 의지하여 급하게 써 내려가는 글도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니지만, 그 거친 글을 묵히고 묵히면서 실 같은 잔상만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을 가하며 만들어지는 글은 한층 더 깊이를 가지는 법이다. 원석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발견된 뒤 거치는 숱한 정제 과정을 초고에서 퇴고로 진행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과정을 거쳐 탄생한 글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독자의 마음을 보다 깊숙이, 정확하게, 그리고 단번에 찌르기 때문이다. 살면서 그런 글들을 만난다는 건 값지고 멋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좀처럼 당해내지 못하는 글은 한결같이 놀라운 절제력을 가진 글들이다. 절제의 미학이랄까. 급하게 찾아왔던 예기치 않은 기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몰아닥친 슬픔도 모두 정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거품이 빠지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기억하는 존재이고 또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의지하는 존재이기에, 거품이 빠지는 지난한 과정은 다분히 견디는 시간으로 이뤄진다. 다행히 그 시간의 끝에 어떤 목적지가 있는 경우라면, 견뎌온 모든 시간을 기다림이라는 단어로 함축하여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견딤이 우리를 항상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는 않는 법. 오래 참고 견디다가 그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우리 주위에는 엄연히 산재한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인고의 쓴 시간이 아름답고 단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생 전체를 잠식시키는 슬픔은, 그리고 별안간 찾아와 우리가 그동안 힘들게 견뎌온 시간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슬픔은 바로 그 견딤의 과정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흩어진 아주 작은 기억의 조각들, 그 기억과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어떤 뜻밖의 순간들을 만날 때 우리를 불청객처럼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1부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이라는 꼭지에서 다룬 작품이다. 100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중편 소설이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침투하여 꽈리를 튼 지독한 슬픔을 이야기한다. 결혼하고 아기가 태어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았을 무렵, 작품 속 화자의 남편은 버럭 자살로 생을 마감해 버린다. 그렇다. 이 책은 남겨진 한 여자의 슬픈 독백이다. 

놀랍도록 절제된 화자의 목소리는 이미 죽은 남편에게 쏟아내는 독백 형태로 그려져 있다. 그녀는 이런 독백을 그동안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 모른다. 다소곳한 말투, 깊은 슬픔의 바다에서 이미 어떤 선을 넘어서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 폭풍 같은 감정은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은 상실과 슬픔의 잔물결이 영원한 삶의 친구가 되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 힘을 뺄 대로 뺀 작가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독자에게 의미 있는 생채기를 내는 듯하다. 마치 보슬비가 어느새 옷을 다 적시듯. 나는 평범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문장들을 읽어나가다가도 문득 어떤 한 문장에 다다를 때면 무너졌다. 그러면 책을 잠시 덮고 심호흡을 하고 다시 읽어나가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새로운 남편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죽어버린 전 남편에게 이렇게 열심히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참 불쾌한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리면 어느새 죽은 당신에게가 아니라.. 중략...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저는 와지마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바깥에 시선을 둔 채 죽어버린 당신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만, 그 무렵에는 저 혼자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당신에게 말을 거는 버릇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을 거는 당신은, 선로를 걸어가는 뒷모습의 당신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 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신형철이 정확하게 짚은 대로, 작가가 이 작품에서 은연중 힘을 주고 있는 키워드 중 하나는 ‘뒷모습’이다. 그녀에게 계속해서 떠오르는 모습도 철로 위를 걸어가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이다.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 그녀는 죽은 남편의 뒷모습을, 보지도 못했던 그 뒷모습을 떠올리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그 뒷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녀는 죽은 남편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가난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채 그들은 결혼까지 했고 아이도 낳았다. 남편이 자살했던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었다. 심지어 남편은 그날 밤 일을 마치고 집 근처까지 와서 카페에 들러 커피까지 마셨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된다. 그런데 다시 철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왜, 도대체 왜 남편은 자살을 감행했던 것일까. 

혹시 그녀는 답이 없는 이 질문의 연쇄 속에서 남편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올해 여름 일주일 차이로 있는 나와 아내의 생일을 지나면서 혼자 이런 말을 떠올리며 블로그에 끄적거린 적이 있다. 

‘서로의 앞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고, 서로의 뒷모습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읽어낸다.’ 

부부는 보통 언제나 함께 있어, 서로가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경우가 많지만, 어느 날 문득 배우자의 얼굴에서 그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 마음이 잠시 무너지면서 한없이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사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 나는 종종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아, 이것밖에 해줄 수 없었던가. 더 잘해줄 수 없었던가’ 하며 나는 나의 미련함과 옹졸함과 가소로움 때문에 이내 부끄러워진다. 치장되지 않은 나의 민낯은 아내의 뒷모습에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짐하곤 했다. ‘좀 더 사랑하며 살아야지! 소중함을 알아채며 살아야지.’ 나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아내를 본 게 아니라 나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고 부족한 내 모습을… 하물며 자살로 멋대로 죽어버린 남편의 뒷모습이 살아남은 그녀에게는 얼마나 많은 말을 걸어왔을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면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문득 두려워지기도 한다. 부부 중 누군가는 먼저 죽는 법인데, 나의 뒷모습이나 아내의 뒷모습이 언제나 남을 한 사람에게 슬픈 형상으로 남게 될까 봐. 그 뒷모습 때문에 이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슬픔에 잠겨 살까 봐.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들에 지금은 저항하고 싶다. 아직은 사랑하는 사람이 뒷모습을 보이며 바라보았을지도 모를 환상의 빛을 떠올리고 싶진 않다. 대신 나에게 남은 인생을 좀 더 사랑하며 살기로 다시 다짐한다. 아내가 안고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6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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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진화 - 성경은 인류 기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피터 엔즈 지음, 장가람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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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재해석된 아담의 신학적 의미.


피터 엔즈 저, ‘아담의 진화’를 읽고.

이 책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아담의 진화’라니! 게다가 저자가 피터 엔즈다. 예상컨대, 그동안 한국의 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에겐 이 두 가지 (제목과 저자)가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조금만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둘 다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아담의 진화’는, 저자가 서론에서 명확하게 밝히듯, ‘아담이 진화했다’라는 말이 아니라 ‘아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화했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목만 보고 불경함을 느낀 나머지 이 책을 포기한 사람은 십중팔구 진화라는 단어에 대해 반지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잘못된 확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이런 ‘묻지 마’ 확신은 건강하게 뿌리내린 믿음이 아닌 맹신에 바탕을 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피터 엔즈는 생물학자가 아니라 성경해석학자이고, 그는 진화론을 옹호하거나 대변하려고 이 책을 쓰지도 않았다. 둘째, 피터 엔즈가 그의 2005년 저서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의 영감설’의 후폭풍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퇴출당한 이유는 그의 신학적 해석이 기독교 정통신학에 위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떠나게 만든 학교의 한계 혹은 잘못된 확신 (당시 학교의 주류를 이룬 입장과 관점)때문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정직 이전에 개최되었던 교수회의에서도 엔즈의 책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확정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정직을 결정했던 이사회 삼분의 일은 여전히 그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그의 정직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엔즈가 학교를 떠난 이유는 그가 이단이어서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 희생이었다고 해석하는 게 적합해 보인다.

피터 엔즈는 그의 2016년 저서 ‘확신의 죄’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팽배한 잘못된 확신을 죄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는 행위가 신앙생활에서 장애가 될 때가 많은데,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죄’와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잘못된 확신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믿음을 더 신뢰하게 만든다. ‘의심’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가져야만 할 것 같은 ‘확신’이 오히려 진리를 가리고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의 길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하고 의심하기를 두려워하는 건 결코 하나님을 변호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는 행위가 될 수 없다. 엔즈가 간파한 대로,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아닌, 여태껏 올바르다고 여겨왔던 자신의 믿음이나 신앙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게 되는, 웃지 못할 역설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신뢰는 우리를 합리적인 의심의 어두운 숲 가운데서도 빛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책은 2012년 출판된 것으로 앞에 소개한 두  책 사이에 만들어졌다. 피터 엔즈의 인생에 있어선 중간 단계의 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이 책에서 말하는 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탁월한 성경해석학자답게 창세기와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 언급한다. 하나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 (1부), 또 다른 하나는 바울 시대와 바울의 관점 (2부)이다. 여기서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뭔가 의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목에서부터 ‘아담’을 언급해 놓고서 왜 뜬금없이 창세기와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을 논하냐고 충분히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엔즈는 이러한 질문을 미리 예상한 듯하다. 아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화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아담에게 곧바로 직행하는 방법보다는 먼저 좀 더 거시적인 배경, 즉 아담 기사가 적힌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성경이 쓰이고 그것을 해석했던 당대의 콘텍스트를 읽어내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1부에서 저자는 창세기를 ‘이스라엘의 자기 정의로서의 고대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는 역사적인 부분도 과학적인 부분도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어떤 특별한 신학적인 목적을 가지고 써진 책이다. 창세기를 포함한 모세오경을 전적으로 모세가 광야 생활 가운데 기록했다고 덮어놓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 보수진보 교단교파를 떠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오경이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단독 저자에 의해서 써진 책이 아니라 이름 모를 여러 저자들을 거치며 쓰였고 나중에 편집된 책이라는 사실에 무게를 둔다. 바벨론 유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재앙 이상의 현실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빼앗겼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으며, 선택받은 민족이라 믿었던 그들 자신이 포로로 잡혀간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포로기가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국가적 필요가 생겼던 것이고, 이러한 목적 하에 이루어진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창세기를 포함한 오경을 완성하는 일이었다고 저자를 포함한 많은 성경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히브리 성경의 탄생은 바벨론 유수에 대한 응답으로 국가적인 자기인식의 실천이며, 교회가 신학적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문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스스로를 정의한 문서를 가지고 지금 이 시대를 바로 읽기 위해 필요한 작업은 과학과의 조화를 찾는 게 아니라 신학적 연관성을 찾는 것이다. 특히 창조와 아담 기사가 적힌 창세기가 포로기 이후에 편집된 책이라면 그 목적은 신학적인 것이지 결코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진화론을 가지고 들어와 6일 창조나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창세기에서 찾아내려고 하거나 둘을 어떻게든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으며 창세기가 의도한 목적에서 한참 벗어나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과학과 신학은 그런 식으로는 결코 같이 갈 수 없다. 둘은 일치가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뿐이다. 일치를 위해서는 과학이나 신학 쪽에서 무언가를 반지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는 일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화를 위해서는 과학이 과학다운 모습으로, 신학이 신학다운 모습으로 같이 갈 수 있다. 결국 해석의 문제라는 말이다.

성경비평이라는 학문이 종종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마치 무신론을 대변하는 학문인 것처럼 오해되곤 했었지만, 21세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경 지식들은 19세기에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성경 내부의 집중적인 연구, 정경, 외경, 위경을 포함한 다양한 고대 문헌들과의 비교연구,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기반으로 한 성경의 역사적 연구, 그리고 자연과학적인 증거들을 통한 성경의 재해석과 그로 인해 빚어진 숱한 논쟁들을 거쳐오면서 얻어진 열매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저자는 무엇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온 다양한 창세기 해석 중에서도 다음을 강조한다. 

“진화론과 기독교 간의 의미 있는 대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고대의 모습 그대로 창세기를 바라봐야만 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나 짊어질 수 없는 짐을 그 책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를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로 갖고 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창세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 안에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현대 과학의 관심에서가 아닌 신학적 진술로서 창세기를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창세기 초반부에 있는 장들은 역사적인 사건을 문자적 혹은 과학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관해 고대의 표현방식대로 선포한 신학적 진술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쉽게 생기는 갈등, 이를테면 “당신은 과학을 성경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라는 거친 반응이 야기되는 것도 이미 창세기가 과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진화와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토론하기 위해서 우린 창세기가 어떤 장르이며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예상을 재조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그 재조정의 첫 번째 단계로 고대의 정황 안에서 창조 기사가 기록되었다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아담 기사의 일부 요소는 보편적 관점에서 인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것임을 시사한다면서 이런저런 성경해석학적인 자료들을 들면서 주장한다. 말하자면, 아담은 고대 근동의 이스라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아담의 육체적 죽음은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은유적 죽음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고, 아담이 첫 번째 인간이라거나 인류의 대표라는 의미에서 모두 해방받게 되는 셈이므로 진화론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기회조차 제거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직 한국 기독교 정서 안에서는 자칫 불경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성경과 고대 근동 역사를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었다는 것과 더불어 출애굽 및 가나안 정복 등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아담 기사에 대한 해석도 여러 다양한 해석 중 하나로써 일리를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2부에서 저자는 바울이 생각한 아담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사실 아담은 구약성경에서 역대상 1:1을 제외하면, 창세기 5장 이후에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아담의 불순종이 보편적 죄와 죽음의 근거가 된다면, 어째서 구약은 단 한 번도 아담을 이와 연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의 질문은 예리한 칼날과도 같다. 바울에게 있어 아담은 신학적으로 필요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전제를 배제할 수 없으며, 사실 이것이 아담의 역사성 논쟁을 첨예하게 이끈 주원인이었다. 또한, 창세기에는 가인의 불순종의 원인으로서 아담의 불순종이 제시되지 않는다. 노아가 당대의 유일한 의인이었다고 적힌 창세기 6장의 내용도 아담이 보편적 죄악의 원인이라면 해석하기 곤란한 문제가 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불순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죄에 빠졌다면 노아라는 의인은 존재할 수 없고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그러한 죄악의 원인을 아담에게서 찾지 않는다. 이렇게 저자는 아담 기사를 무조건적으로 모든 인간의 타락, 죽음, 죄악의 원인으로 해석하는 것에도 허점이 있음을 성경 자체의 모순을 들면서 보여주고, 보편적 죄와 사망의 원인을 아담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복음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한다. 

바울이 아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명확한 사실은 바울이 아담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 다소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라고 해석한다. 시간 순으로 보자면 아담이 그리스도보다 먼저라고 할 수 있지만, 바울이 이해하는 아담은 그리스도로 인해 형성된 존재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은 당대의 유대 해석가들과 마찬가지로 아담을 자신의 복음 메시지를 정교하게 설명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사용, 해석했다는 것이며, 다른 구약성경을 창의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방식으로 인용하였듯 바울은 아담 기사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로마서를 예로 들며 바울이 특히 ‘하나님의 하나의 백성’을 강조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와 죽음이라는 동일한 문제로 특징지어지는 보편적 인류에 속해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구에게나 허락된 구속이 그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고, 바울의 아담이 바로 이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이 감히 창세기의 아담 기사를 창의적으로 해석한 근본적인 이유를 그가 간접적으로 경험한 그리스도의 부활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예상할 수 없었던 급진적인 구원 행위의 절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해결책을 제공하셨어야 했을 만큼 이에 상응하는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인류의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바울은 이 해결책의 본질 때문에 인간이 겪는 문제가 그의 유대 세계관보다 더 폭넓고 깊어야 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정말 문제가 된 것은 유대인의 율법 준수 실패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유대인도 이방인처럼 죄를 짓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모든 인류가 겪는 문제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 문제에 빛을 비추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대단한 결말에 비추어 이제 이스라엘 국가의 이야기를 다시 이해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고, 이는 그가 구약성경을 해석한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바울은 창세기가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담의 탓으로 돌린 것일지도 모른다. 창세기는 단순히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로써 보편적인 죽음에 초점을 두는 반면, 바울은 아담의 범죄가 그를 포함한 우리의 죽음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죄의 권세 아래 머물게 된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아담을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창세기 저자보다도 더 큰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창세기 자체의 객관적 해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인류가 빠져있던 죽음과 죄 문제가 해결되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울에게 있어 아담은 역사적, 생물학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존재로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진화론이 맞냐 아니냐에 대한 답을 원했거나, 어떻게 창세기 아담 기사를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혹은 진화론을 어떻게 창세기를 동원하여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원했다면 반드시 실망했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도 서론에서 밝히듯 창조과학 쪽으로 편향된 부류나 진화론을 마치 무신론을 대변하는 주 무기 다루듯 여기는 부류를 상대로 쓰인 책이 아니라 자연과학과 성경의 대화에 이미 마음을 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진화는 관찰 가능한 현상이자 객관적 사실이며, 진화론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거가 계속 쌓여가고 있고 그로 인해 합리적인 추론이 점점 사실화되어가고 있는 이론이다. 더 많은 증거들은 앞으로도 계속 쏟아질 것이다. 그동안 여러 독립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발견된 많은 점들 (생물학적,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하나의 굵은 선 (진화론)을 그려가고 있다. 자정기능이 그 어느 영역보다도 잘 작동하는 과학을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는다는 명목 하에 무시하거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밀한 두려움에 이끌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합리적 이성을 사용하길 거부한다면, 그 믿음은 더 이상 하나님이나 기독교를, 나아가 자기 자신의 신앙까지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어렵지 않게 창세기가 적힌 목적과 더불어 당대의 콘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누군가에겐 하나의 답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답은 모든 의문을 다 풀어주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인 피터 엔즈 역시 이 책에서 하나의 해석을 친절하게 풀어나갔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해석도 해석일 뿐이라는 점은 누군가에겐 여전히 불편한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결국 해석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고 귀 기울이며 잘못 각인된 맹신과 반지성의 뿌리를 계속해서 뽑아나가는 것에 방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 대열에 기꺼이 참여하길 원한다. 가장 과학다운 과학, 가장 신학다운 신학,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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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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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논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움베르토 에코 저, ‘장미의 이름’을 읽고.

평범한 추리소설의 경계를 가뿐히 허물어버리는 듯한 이 범상치 않은 작품은 역사는 물론 기호학, 과학, 철학, 신학까지 모두 한상에 올려 성찬을 베푼다. 탄탄한 플롯은 스릴감 넘치는 전개와 더불어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약 90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소비되는 물리적 시간마저도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꿈만 같은 추억으로, 그래서 다시 꾸고 싶은 꿈처럼 기억되는 작품이다. 소장 가치, 재독 가치가 충분하다. 단, 중세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만약 다시 읽게 될 경우, 당대 주요 철학과 신학의 흐름을 미리 간단하게라도 공부해 놓거나, 이 책에 대한 해제가 담긴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 혹은 ‘장미의 이름 읽기’와 병행한다면,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이미 마니아 층이 형성된 이 작품을 읽은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 중 상당수는 아마도 벌써 이런 비슷한 과정을 밟지 않았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액자 형식을 따른다. 서문에 등장하는 ‘나’라는 화자는 1968년 8월 16일, 한 권의 책을 손에 넣게 되고 이탈리아어로 번역한다. 1842년 라 수르스 수도원장 ‘발레’가 프랑스어로 번역 및 펴낸 책이었다. 발레가 번역한 책도 원본은 아니었다. 18세기 석학 ‘마비용’ 수도사가 편집한 사본이었다. 원본은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14세기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멜크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 ‘아드소’의 수기이다. 아드소가 백발의 노인이 된 뒤, 수십 년 전 당시 자신이 작성했던 노트와 기억에 의지하여 라틴어로 양피지 위에 작성한 사건의 기록이다.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고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길을 잃고 2년 전 읽기를 관둔 적도 있다) 본론을 이해하는 데에 그다지 큰 영향을 안 준다고 볼 수 있는, 이러한 두 번의 번역 과정과 ‘나’의 손에 우연히 들어오게 된 배경을 굳이 설명하면서 저자가 이 작품의 문을 여는 까닭은, 아마도 6세기가 지난 20세기 현재, 라틴어로 쓰였던 원본 ‘아드소의 수기’에 대한 역사성 및 사실성, 그리고 희귀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탓일 것이다. 

작품의 액자 역할을 하는 서문을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아드소 수도사의 수기가 펼쳐지는데, 이는 1327년 11월 말, 정확히 7일 동안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어느 수도원 (아드소는 의도적으로 이 수도원의 위치와 이름을 함구한다. 그래서 이는 ‘서문’에서 ‘나’라는 화자가 수기를 통해 추측한 것이다)에서 아드소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일을 베네딕트 수도회의 성무 공과 시간에 따라 시간 순으로 기록한 회고담이다. 즉 아드소는 모든 사건의 직접 관찰자였고 증인이었으며, 그 충격적인 내막과 엄청난 결론까지도 세밀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이성과 감성이 충분히 숙성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쏟아내며 이 수기를 작성한 것이다. 그는 수기 마지막에 나로선 의미를 좀처럼 파악할 수 없는 고백을 다음과 같이 남긴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렇듯 제목 ‘장미의 이름’은 작품 마지막 문장에서 탄생했다. 소설을 한 번 읽은 나로선 (아마 두 번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작품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장미’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여러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장미라는 단어에 주목하지 않고 문장 전체의 의미를 짐작해 볼 때,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장미의 붉은빛과 향이 사라지듯 지난날 기억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했다 할지라도 오감을 통과하는 생생함을 잃기 마련이고,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덧없는 이름뿐이듯 우리들의 기억도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 (이를테면 정체성 같은)만이 남을 뿐이다’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나는 얕은 추측을 해볼 뿐이다. 

수기의 주인공은 물론 아드소이다. 그러나 7일 간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의 해결을 위해 아드소를 조수 (필사 서기 겸 시자)로 부리면서 스토리를 이끌고 나가는 인물은 프렌체스코 수도회의 박식한 수도사,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이다. 윌리엄과 아드소 수도사의 관계는 아서 코난 도일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셜록 홈즈’와 ‘존 왓슨’, 혹은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에르퀼 푸아로’와 ‘아서 헤이스팅스’ 정도로 이해하면 될듯하다. 세 작품 모두 전자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으로, 후자는 전자를 보조하며 모든 사건을 기록하는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저자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첫 추리소설인 이 작품에서 이러한 인물 구도를 가져온 것은 아주 적절했고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구도는 자칫 ‘슈퍼맨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작품을 보호할 수 있으며, 스토리 전개와 작품 전체의 객관성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성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 작품의 특성상, 나는 이 방법을 선택한 저자가 아주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7일 동안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연쇄 살인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아드소와 함께 4명의 수도사가 시체로 발견된 이후에 비로소 사건 진상의 결정적인 단서 (즉 장서관의 미궁 속 숨겨진 방을 찾는 단서)를 찾아내고 범인을 마주한다. 신학에도 철학에도 능통한 윌리엄 수도사는 자연과학에도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 시대가 14세기 초인만큼 자연과학은 기독교를 대적하는 악마의 발명품이나 장난감으로 오인되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윌리엄 수도사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돋보기안경을 가지고 원시를 극복하는 장면, 자성을 가진 돌을 이용해 나침반을 고안하는 장면, 거울의 착시를 알아채는 장면, 약초의 독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습 등 윌리엄 수도사는 당대 수도사들과는 달리 자연과학을 이단시하지 않고 친구로서,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로써 여기고 사용할 줄 아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사실은 윌리엄 수도사로 하여금 여러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잘못된 기독교 신앙과 확신에 빠지지 않고 이성과 논리를 이용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배경이 된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가지고 있던 여러 미신적이고 반지성적인 믿음을 꼬집고 풍자하고 싶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과거에 이단 조사관으로 일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진해서 그만두었다. 그 이유가 기막힌데, 다음과 같다.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다른 표현으로 등장하지만 여기선 122페이지에 나온 짧은 문장을 인용한다. 

“조사관 시절에 나를 괴롭혀 온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어요. 그래서 조사관 노릇을 그만두고 만 것이랍니다. 내게는 사악한 자들의 약점을 조사해낼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알고 보니 사악한 자들의 약점은 도덕 높은 분들의 약점과 같더란 말입니다.” 

이것만 봐도 윌리엄 수도사가 어떤 인물인지는 대충 감이 올 것이다. 그는 기독교 고위 성직자와 그들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살인까지도 허용하는 인물들, 즉 양극단에 위치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간파할 정도로 그 당시 썩어버린 기독교 내의 정치와 이권 다툼 등의 타락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식의 언변은 작품이 진행되면서 종종 등장하게 되는데, 근본주의에 천착하지 않은 기독교인 독자라면 아마도 나처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여러 번 윌리엄 수도사의 대사로 인해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가령 다음과 같다. 내가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던 부분이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가짜 그리스도는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XXX (스포일 하지 않기 위해 이름 숨김)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에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오래된 문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존속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강력한 숨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이성과 논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아, 기가 막히지 않은가. 한낱 심심풀이로 읽을 수 있는 이런 추리소설 같은 픽션에서 여러 신학/신앙 서적에서 느끼지 못하던 깨달음을 얻게 되다니! 기독교 신앙의 유무를 떠나 나는 이 작품을 모든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재미와 교훈, 통쾌함과 깊은 성찰에 이르기까지 일석이조의 효과를 수차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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