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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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평범성, 그리고 진정한 겸손함

카렐 차페크 저, ‘평범한 인생’을 읽고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평범하다’는 것은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는 뜻이다. 뛰어나거나 색다르다는 것은 비상하거나 특별하다는 의미로써, 그렇게 판단하기 위해선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평범하다는 의미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이를테면, 휴대폰 사용자가 평범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건 아주 최근의 일이고 (시대 영향), 한국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건 평범하지 않아도 미국에서 사용하는 건 당연할 정도로 평범한 일이다 (문화 영향). 평범하다는 건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평범함은 이렇듯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정의하기 나름일까? 모든 평범함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일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평범함은 존재하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인생에 대해서는 이런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의미 부여가 가능한 것 같다. 평범한 인생. 그러니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평범함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인생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른바 절대적 평범성. 묘하게도 이것이 내가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 카렐 차페크. 세계적으로 수많은 비범한 작가를 탄생시켰던 19세기 말에 태어나 1차 세계대전을 겪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체코 출신 작가다.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낸 장본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중 하나다. 그는 노벨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반파시즘 투사로 활동했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짧았으나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에 읽었던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탓일까.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완벽하고 신비한 세상이 아닌 우리의 사사롭고 부서지고 보잘것없는 일상, 즉 평범한 인생 가운데 거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밀하게 관찰하여 자기만의 색을 입히는 성찰을 통해 자신을 넘어서고 타자와 세상으로 나아가 모두를 관통할 수 있는 깊은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예술과 문학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 우연찮게도 나는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내겐 적시에 만난 보석 같은 작품이었다.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앞뒤 서너 페이지를 제외하면, 평범한 인생을 살다 간 한 철도 공무원의 자서전으로 읽히도록 의도된 단편소설이다. 정년퇴직한 주인공은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어느 날 자서전을 쓰기로 작정한다. 평소에 주위를 잘 정돈하는 습관을 따라 모든 것을 정리하고도 더 정리할 게 없을까 하다가 자기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기에 이른다. 

“아주 평범한 삶에 대한 전기를 쓰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 항변을 한다. 평범한 삶에 대한 재고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재해석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삶은 여백, 즉 삶에서 영화를 뺀 나머지라는 생각과 맞닿아 있어 나는 꽤 흡족한 마음으로 공감하며 읽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그리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펜을 들고 자기가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전체 인생을 톺아보기 시작한다. 아, 인생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정리가 또 있을까!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보냈던 학창 시절, 철학 전공으로 대학을 지원했으나 갑자기 그만두고 시를 쓰다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철도 공무원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던 이십 대 시절, 성실함과 총명함으로 성공적인 철도 공무원으로 거듭나고 중간에 결혼까지 성공했던 중년 시절까지, 그는 그야말로 무난히 그의 평범한 인생을 빈 종이에 적어나간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써놓은 것들이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내면에 있던 여러 자아들이 내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평범한 인간, 억척이, 우울증 환자, 시인, 영웅, 낭만주의자, 거지, 은밀한 사람 등의 정체성을 가진, 그와 모든 인생을 함께 해온 여러 자아들의 익숙한 존재를 재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연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었던가, 한 자아가 일목요연하게 기술하는 인생이 과연 내 인생 전부를 말하는 것일까, 하고 그는 생각하게 된다.

여러 자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은 다중인격도 정신분열도 환각도 아니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인생 전체에서 겪는 가장 평범한 일이었다.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의 자아가 공존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많은 자아들을 조상들의 흔적과 연결시키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어떤 자아는 아버지의 모습인데 반하여 또 어떤 자아는 어머니의 모습, 또 다른 어떤 자아는 할아버지의 모습, 등등. 즉 ‘나’라는 한 사람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조상들의 일부의 총합 혹은 그것들이 여러 조합으로 모인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나’에서 끝나지 않고 ‘너’로 또 ‘우리’로,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는 ‘너’와 ‘그들’로 이루어져 있고, ‘너’ 역시 ‘나’의 일부가 들어가 있으며,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의 일부를 부분적인 공유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 혼자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가 ‘우리’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평범한 인생이고 우리 모두의 인생이자 절대적 평범성으로의 수렴인 것이다.

이율배반성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모순되고 말이 안 되는 모습들,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모습들, 일관성도 없고 즉흥적으로 마구 움직일 때가 많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습들,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은 어떤 한 사람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의 내면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일 것이다. 반면, 이렇게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자아들이 모두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 역시 간과하면 안 되겠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면 죽이지 않고 살릴 것이며 배제하지 않고 보듬으며 함께 가려고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타자를 차별, 배제, 혐오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개별자가 아니라 서로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생각을 흥미롭게 읽으며 나는 다시 나와 타자와 세상을 생각해본다. 그 관계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더욱 겸손해지려고 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평범한 인생은 겸손한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평범성은 닮은 듯 다른 우리를 인지하고 인간다움을 되찾아 나보다 남을 향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진정한 겸손함 일지도 모르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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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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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노래하는 예술

토마스 만 저,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 유럽 예술의 흐름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시기는 ‘데카당스’라는 단어를 빼곤 설명할 수 없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가지는 불어로써 ‘쇠락’ 혹은 ‘퇴폐’를 의미한다. 프랑스 예술가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데카당스 예술은 관능이나 도취를 일삼는 탐미주의 혹은 세기말적인 그로테스크 예술 양식과 맞닿아 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삶에 대한 강한 반감, 삶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는데, 삶 자체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에 데카당스 예술은 삶과 인간 모두에 반하는 사조, 그래서 삶과 예술을 분리시킨 예술로 이해하면 되겠다. 생의 철학, 힘에의 의지,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주의: 수동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절대 아님) ‘아모르 파티’를 주창했던 니체가 이러한 데카당스를 비판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토마스 만은 작가, 즉 글을 읽고 쓰는 예술가로서 삶과 예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하면서 삶을 살아낸 장본인 중 하나다. 그의 초기작인 이 작품 ‘토니오 크뢰거’는 삶과 예술의 경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둘 다 속하길 원하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고뇌가 담겨있다. 작가 토마스 만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진하게 녹아있는 단편소설이기도 하다. 

토니오 크뢰거는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작가 토마스 만의 고뇌가 함축적으로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크뢰거’라는 성은 명문 가문 출신을 상징하는 데 반하여 ‘토니오’는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며 상류층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아버지로부터 명문가적인 피와 어머니로부터 남국적인 예술가의 피를 물려받은 인물로 그려진다. 상류층 자제로 (토니오 크뢰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영사였다) 태어난 토니오 크뢰거에게 전자는 삶과 인간을 대변하고 후자는 예술과 정신을 대변한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며 깊이 사랑하기도 했던, 그러나 어느 이상 가까이할 수 없었던 파란 눈의 친구 한스와 멀리서 동경했던 금발 머리의 잉에는 상류층 자제들의 전형적인 삶을 살아내는 (‘순응하는’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여자 친구이자 화가인 리자베타는 한스와 잉에의 대척점에 놓인, 그러니까 삶과 동떨어진 채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전형적인 예술가로 그려진다. 그리고 중간에 낀 토니오 크뢰거는 두 진영 모두에게 온전히 속해있지 않으면서 두 진영 모두 사랑하며 그 안에 온전히 속하길 갈망하는 경계인인 것이다. 

이 작품은 토니오 크뢰거의 성장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토니오 크뢰거는 남다른 속성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삶에 순응하지 못했다. 그는 남몰래 시를 썼다. 왜 자기는 친구들과 다를까, 하고 고뇌했다. 그리고 그 고뇌는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 예술가는 어떤 학습에 의해서 길들여진다기보다는 타고난다는 뉘앙스로 충분히 읽힐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남다른 길을 걸었고 성인이 되어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점점 더 심화되었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삶과 예술, 이 둘은 분리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그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고향을 방문하게 되고 이국 땅을 여행하면서 그는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쩌면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예술가, 그리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예술가가 되길 다짐하게 된다. 생동하는 예술은 삶을 떠나서는 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게 된다. 이는 서두에 언급했던 데카당스 예술 사조에 대한 강력한 반기이자 변증법적 성장의 열매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잘 와닿지 않는 고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예술가들의 마음을 잘 대변하여 전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고뇌가 아닐까 한다. 나 역시 읽고 쓰는 일을 사랑하는 한 작가로서 토니오 크뢰거의 다짐을 조용히 응원하고 지지하게 된다. 화려하고 아름다우나 죽어있는 예술은 진정한 예술이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 일상을 배제한 채 환각으로만 보일 수 있는 예술은 우리의 삶을 오히려 파괴할 뿐이니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의 사사로운 일상 가운데 거할 테니까. 그것을 발견하여 관찰하고 성찰하고 통찰해내는 자가 바로 예술가일 테니까.

#김영웅의책과일상
#민음사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0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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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되신거 정말 축하드립니다 *^^*

Youngwoong Kim 2022-03-09 02:53   좋아요 2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눈부신 계절 - 모든 순간, 모든 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
후우카 김 지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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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을 통과한, 그 눈부신 빛


후우카 김 저, ‘그럼에도 눈부신 계절’을 읽고

누군가의 기억의 방으로 초대받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 기억이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한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것을 내것인 것처럼 여기고 받아들이는 일. 누군가를 공감하는 일. 공감 없는 이해는 피상적이고 때론 잔인할 수도 있기에 이러한 과정은 한 사람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겪어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거룩하다 말한다. 타자를 안다는 것은 이런 거룩한 과정을 통과한 아름다운 열매이자 사람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라고 믿는다.

후우카를 안 지 5년이 넘었다. 현재 남편인 정현욱 목사 덕분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나에게 있어 몇 안 되는 소중한 만남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글이었다. 후우카의 글에서 나는 무언가를 느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글 이면에 감춰진 그 무엇이 어느 날 내 안으로 훅 들어왔다. 단지 여성의 글이기 때문도, 단지 글을 잘 쓰기 때문도 아닌 그 무언가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읽기를 고대하던 글이 마침내 책 한 권으로 탄생했다. 나만큼 이 책을 오래도록 기다린 독자가 또 있을까. 그녀의 글들이 소복이 담긴 첫 책, ‘그럼에도 눈부신 계절’을 읽고 나는 후우카라는 한 사람을 더 알게 된다.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

제목이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럼에도’라는 단어와 ‘눈부신’이란 단어의 무게를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그럼에도’는 결코 하기 쉬운 말이 아니다. 그런데 ‘눈부신’은 더 그렇다. ‘그럼에도’의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눈부신’의 깊은 단계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눈부신’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럼에도’의 고된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독자로선 두려울 수도 있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저자의 진정성 깃든 글쓰기는 당신의 눈과 마음을 집중시키고 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시간마저 멈추게 할 것이다. 이 책은 단지 ‘읽는’ 책이 아닌 한 사람을 ‘아는’ 책이다. 겸손하고 낮은 마음이 준비되었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들라.

이 책은 에세이집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삶의 어두운 심연을 통과했고 또 통과하고 있는 한 사람의 글이다. 세상엔 많은 에세이들이 넘쳐난다. 어려운 삶을 살아내고 좀처럼 하기 힘든 경험을 한 많은 사람들의 많은 글들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저자의 유려한 글쓰기는 포장에 집중되곤 한다. 자신의 상처를 파는 글들 역시 교묘하게 허세를 부리는 데 사용되곤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이 책의 저자 후우카는 그 일을 덤덤하게 해냈다. 많은 에피소드들은 눈물을 자아낸다. 읽는 이에게까지 삶의 비참함과 비루함을 느끼게 한다. 바닥 끝까지 내려간 삶을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그 헛헛함은 자세를 고쳐 앉아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다행이다. 저자도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그런 어두움을 드러내는 목적이 아닌 그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언제나 빛나는 빛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참 고맙다. 고되지만 올바른 길 위에서 견뎌내어 줘서 고맙다. 

삶의 어두운 심연 한가운데에도 가느다란 구원의 눈부신 빛줄기를 발견하는 일. 그리고 그 빛에 의지하여 어두운 숲을 통과해내는 일. 이 두 과정은 외부의 척박함은 물론 낯설지만 익숙한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또 다른 자아와의 숙명적인 만남과 화해를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혼자만도 힘든데 저자는 홀로 키워내야 하는 어린 세 자녀들이 있었고, 재혼 후 두 자녀가 늘어나 총 다섯 자녀를 돌보는 엄마이기도 하다. 가난은 그녀의 삶의 방식이었다. 일본 어머니와 한국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써 일곱 살 때 처음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오며 박대를 당해야만 했다. 책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첫 번째 남편과의 이별에도 말 못 할 사연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면 이미 먹먹해진 가슴이 조여 온다. 갈 데까지 간 것 같은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들면 당장 여기서 그만두고 싶어 진다. 인생이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지만 저자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었고 깊은 어둠과 여러 얼룩으로 칠해진 고된 삶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녀가 나지막이 고백하는 ‘눈부신’이라는 단어가 한없이 빛나는 까닭은. 그녀가 말하는 ‘눈부신’은 흔히 사람들이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 동공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그런 눈부심이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그 눈부심은 별 볼 품 없는 빛줄기로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빛으로 보였다. 딸깍 스위치를 올리면 단번에 켜지는 스타디움의 화려한 불빛이 아닌 어두운 골목에서 새어 나오는 한 줄기 가느다란 백열구가 내는 빛에 가깝다고 보았다. 그것이 진창 속에 비친 한 줄기 가느다란 구원의 빛인 것이다.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그 영원한 빛. 하나님의 임재. 침묵 가운데에서도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 이 책에 쓰인 바로 그 ‘눈부신’의 의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면 좋겠다. 화려하기만 한 빛이 아닌 어두움을 통과한 가느다란 빛. 그 눈부신 빛의 임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희망을 발견하길 소망한다.

#토기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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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도제희 지음 / 샘터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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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로부터 난데없는 위로를


도제희 저,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독자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저자는 201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서 당선, 등단한 작가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풀어가는 솜씨가 훌륭하다. 직장에서 난데없이 퇴사한 이후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으며 치유를 경험한, 보기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책 소개란에 적힌 “물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 수영을 배운다면, 퇴사라는 인생의 수렁에서 저자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택한 생존법은 고전 읽기다”라는 문장이 내 이목을 사로잡았다. 사건과 상황만 다를 뿐 나 역시 인생의 낮은 점에서 책이라는 세상을 만난 후 궁극적으로 다다른 곳이 고전 문학이었고, 그 절박한 읽기를 통해 치유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나와 전혀 다른 필체를 구사하고, 관심 분야도 많이 다른 것 같고, 유일한 공통점은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을 탐독했다는 사실밖에 없는, 전혀 몰랐던 작가의 책을 나는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구매해버렸다.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읽어본 사람은 드문 도스토옙스키. 그의 작품은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이 분량에서부터 두꺼운 벽돌을 연상시키며 독자를 가뿐히 압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쉽게 외면을 받곤 한다. 그러나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경솔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도 벽돌 같은 외형만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어려운 내용이라 판단한다면 곤란하다. 용기를 내어 벽돌 뚜껑을 열고 일단 읽기 시작하면, 철학적이거나 학문적인 문장들이 아닌 3류 소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통속적인 문장들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를 도전하길 원하는 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한 마디는, 부디 벽돌에 눌리지 말고 뚜껑 한 장만 열고 몇 페이지만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라는 것이다. 이것만 실천에 옮겨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더. 도스토옙스키는 통속에서 심오를 끌어내는 작가다. 이 점을 마음에 두고 통속을 즐기다 보면 어느덧 자연스레 심오의 단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독자들은 그저 통속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본인의 힘들었던 순간을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그와 함께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그 경험의 열매인 셈이다. 그러나 그에 따라 책의 내용도 힘들고 무거울 거라 예상한다면 큰 오산이다. 저자는 평범한 소시민인 듯하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대신하여 경험한 바를 잔잔한 에세이로 풀어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보고 듣고 만나고 겪은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들에서 퇴사라는 흔하지 않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상황과 사건에 걸맞은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배경, 혹은 대사 등을 자연스레 연결시키면서 스무 편이 넘는 꼭지로 구성된 에세이를 풀어나간다. 갑의 자리보다는 을의 자리에서 바라본 세상을 글로 풀어내기에 도스토옙스키 만한 작가가 또 있을까 하고 개인적으로 나는 생각한다. 저자도 나도 낮고 누추하고 눅눅한 진창 같은 곳에서도 한 줄기 따스한 빛이 비친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은 유경험자이며, 그런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기에 도스토옙스키는 그야말로 정확한 표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난데없이 터져버린 사건과 상황, 난데없이 다가온 도스토옙스키. 혹시 아는가. 도스토옙스키는 또 다른 위로받을 독자를 위해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그 독자라 바로 당신일지.

#샘터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94599463918140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024470600931025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11384872239590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34426206602123
16. 닮은 듯 다른 우리 (by 김영웅):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57630130948397
17.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5027567450621330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8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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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5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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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적 상황과 전개가 주는 뜻밖의 위로


가즈오 이시구로 저,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을 읽고

몇 주째 지속되는 원인 불명의 불안 때문이었을까. 마침 읽고 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내 내면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운명을 믿진 않지만 운명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공간을 향유하는 공감각적인 독서는 종종 독자를 과도한 자기 주관으로 이끌곤 한다.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그로 인해 조용히 위로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주관적인 해석을 부정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위로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니까. 마치 운명처럼 알 수 없는 이유와 이해하기 힘든 과정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니까.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감정선이 있다면 불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겐 불안의 시기를 함께 했던 고마운 친구로 기억될 이 작품은 중간중간 전지적 작가 시점을 병행하는 듯한 부분도 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술된다. 중년 남성인 주인공 라이더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피아니스트다. 800 페이지를 가뿐히 넘기는 분량을 가득 메운 자잘한 모든 이야기는 유럽의 어느 이름 모를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현재 그는 여느 유명한 음악인들처럼 세계를 돌며 연주 일정을 소화 중이다. 

표면적으로는 목요일 밤에 있을 공연 중 피아노 연주와 짧은 연설이 그가 이 도시를 방문한 주된 이유다. 소설은 그가 며칠간 묵을 호텔에 발을 디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유명세에 걸맞게 누군가의 환대를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그 상황을 묘사한다. “나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심지어 프런트 직원마저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택시 운전사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라이더만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마저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장면인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부터 이러한 어긋남에 대한 묘사로 할애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이 작품에 흐르는 전체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압축된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어긋남’ 혹은 ‘미끄러짐’ 정도가 아닐까. 특히, 카프카의 ‘성’을 읽어본 독자라면 내가 그랬듯 이 작품의 주인공 라이더와 ‘성’의 주인공 측량기사 K가 중첩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K는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소설 끝까지 성 주위를 맴돈다. 마찬가지로 라이더 역시 일정에 있는 무언가를 실행하려고 할 때마다 그 도시에 거주하는 여러 사람들의 간섭과 사사로운 부탁 때문에 일이 계속 연착되고, 때론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일에 휘말리기도 하다가, 결국엔 자신이 이 도시로 온 주된 이유인 피아노 연주와 연설을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직면하게 된다. 닿으려고 하지만 닿을 수 없고, 계속해서 어긋나고 미끄러지기만 하는, 어찌 보면 마치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 같은 며칠 간의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이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는 이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중요한 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남는다.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의도적으로 주인공 라이더의 과거 기억 속에 있는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과 상황의 파편들을 이 도시의 사람과 사물을 통해 형상화해 놓는다. 라이더를 건망증이 심한 인물 혹은 단편적인 기억 상실증에 걸린 인물로 해석해도 무방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이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를 철학적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할 입장이다. 나는 그런 입장보다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나 사물들이 주인공의 기억 혹은 과거의 상처와 맞물려 망령처럼 되살아나 주인공을 괴롭히고, 주인공은 그 과정을 불완전하게 처리하며 변화를 맞이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입장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명확한 해설을 내놓지 않지만, 처음으로 만난 짐꾼이 알고 보니 장인어른이고, 그 짐꾼의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려 만나게 된 여자와 소년이 알고 보니 아내와 아들이며, 호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자니 갑자기 그 방이 자신이 어릴 적에 살던 집 안의 방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나, 주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이 과거에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는 사실 등, 자칫 어느 한 기억 상실증 환자의 섬뜩한 단편적인 이야기로 해석하는 입장을 고수하다 보면 이 작품은 3류 소설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괴기스러운 실험작 정도의 작품으로 폄하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배경들을 주인공 라이더의 기억과 맞물린 비유나 상징으로 보고 그에 따라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을 가한다면 비록 관념적이긴 하지만 오히려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줄어들게 된다. 물론 가즈오 이시구로가 자신의 철학을 문학적 장치인 소설로 구현하려고 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앞에 언급한 두 입장 중 어느 하나만 옳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독자인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카프카적인 어긋남과 미끄러짐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다. 답답하기도 하고 묘연하기도 하며 다분히 환상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제목과는 상관없이 적잖이 위로가 된 작품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황혼을 노래한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에서 느꼈던 그의 고유한 필체를 이 작품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전 작품을 읽기로 작정했던 이유는 그 필체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목적에서 어긋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어긋남 때문에 나는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매력을 느낀 그의 필체는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의 최근 작품인 ‘클라라와 태양’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도 공히 다뤄지고 있는 소재는 바로 기억이다. 황혼 3부작의 주된 소재가 기억이라고 할 수 있고, 전혀 다른 필체로 쓰여진 이 작품에서조차 기억이 중심 소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기억을 요리조리 요리할 수 있는 작가로 기억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하나의 필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배울 게 정말 많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제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이 몇 안 남았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프게 느껴진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7.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80748465303230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86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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