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열다 -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가해한 세계 앞에서 비아 시선들
토마스 머튼 지음, 정다운 옮김 / 비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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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기 위한 정직한 자세


토마스 머튼 저, '성서를 열다'를 읽고


제목이 '성서를 읽다'가 아닌 '성서를 열다'라는 점에 주목한다. 읽기 위해서는 먼저 열어야 하는 법. 그렇다. 이 책은 성서를 본격적으로 읽는 단계가 아닌 그 전단계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는 어떤 책인지, 성서를 읽는 나는 누구인지, 성서를 읽을 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성서를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저자의 탁월한 통찰과 뛰어난 필력은 덤이다. 


저자는 우리가 종종 성서를 일방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성서를 현실과 상관없이 영적인 세계의 이야기로만 여긴다든지, 거룩하고 독실한 신자들의 전유물로 여긴다든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심지어는 상식에 반하는 책으로 여기는 경우도 왕왕 벌어지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성서가 어떤 책인지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뼈아픈 말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우려한다. '그리스도교가 광신으로, 어리석은 종교성으로 왜곡될 때 우리의 지성은 모욕당합니다'라고.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최근 들어 특히 심해진 것 같은, 창조과학을 내세우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그것도 선택적으로) 읽는 근본주의자들의 반지성적인 주장과 활동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복음과 상황' 2024년 5월호에 실린, 최근 창조과학 비판으로 징계 위기에 처한 서울신대 박영식 교수의 인터뷰 기사 제목, '두려움은 근본주의를 만들지만, 참된 신앙은 두려움을 이긴다'라는 문장도 연이어 생각났다. 쓰인 지 50년이 넘게 지난 토마스 머튼의 통찰과 우려는 지금 이 시대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창조과학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의 존재는 성서 해석의 자세와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실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성서를 향해 묻기 시작하면 성서 역시 우리를 향해 묻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성서를 읽는 것은 단지 읽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서 읽기는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고 상호적인 대화여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성서에서 물으면, 성서는 우리에게 언제쯤 그렇게 진짜 삶을 살기 시작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성서 읽기는 지식과 경험의 축적, 혹은 소원성취나 문제해결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마치 예수가 성육신하신 것처럼, 마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처럼, 우리의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것인지를 위한 목적을 띠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서를 읽는 우리들은 불편하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성서를 한 번 이상 읽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 목사의 설교에 인용되는 구절을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성서 읽기일 정도다. 성서 안에 모든 답이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조차도 성서를 잘 읽지 않는다는 모순은 성서 읽기가 현실 신자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님을 반증한다. 성서는 결코 편한 책이 아니다. 친절하지도 쉽지도 않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어본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깊이 우려하는 점이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혔다. 결코 편안한 책이 아닌 성서를 우리는 익숙해지다 못해 편안하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진지하고 치열하게 읽어보지도 않고, 마치 신앙생활을 오래 한 열매인 듯 우린 경건의 모양만 갖춘 채 성서와 별문제 없이 지내는 법을 터득해 버린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성서를 잘 안다고 확신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말한다. 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분투의 여정이라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성서 안의 극명한 걸림돌과 모순을 정직하게 마주하려 분투하는 길이며, 우린 그 길로 나아가려 애써야 한다고. 우리의 목표는 그러한 모순을 손쉽게 해결해 치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넘어선, 그러면서도 때로 우리와 불가사의하게 얽혀 있는, 기이하고 역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나는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계속해서 뼈 때리는 통찰을 진행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명제에 지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성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며, 성서에 인격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성서에 대한 참여는 그분과 기꺼이 논쟁하고, 때로 저항하면서도, 우리의 분명한 잘못을 깨닫고 마침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그 전 과정을 포함한다고. 성서는 부정직한 순종보다 정직한 항변을 더 높이 본다고 (아, 명문이지 않은가!). 


저자는 우리가 종종 편향되게 성서를 해석한 뒤 그 한 가지 관점을 '신앙'이라 부른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어서 선포한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오히려 신앙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우리의 편향은 우리가 성숙해질 책임에서 도피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을 배제하고, 그것을 몰이해 속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나아가, 우리의 선입견, 우리의 한계로 쪼그라들지 않도록, 정해진 답을 가지고 성서를 열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성서를 대함에 있어 지름길로 가고픈 유혹, 절반의 진실에 안주하고픈 유혹을 이겨야 한다고. 우리의 편견에 안성맞춤인 편안한 해석으로 성서를 협소하게 만들면 결국 우리는 성서를 오해하다 못해 진리를 위조하는 데 이르게 될 거라고 경고하면서 말이다 (두렵지 않은가? 창조과학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여). 


두 시간 정도 집중해서 이 책을 읽으며 통쾌함과 동시에 착잡함을 느꼈다. 답을 얻었다는 데에서 통쾌함을 느꼈고, 이런 저자의 가르침을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던 수십 년 전에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착잡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신앙은 성서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때론 무속적이기도 한 것 같은 뉘앙스가 많이 묻어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아마도 한국 교회에서 신앙을 배운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경우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성서를 제대로 알고, 성서를 읽는 우리를 제대로 알고, 성서의 가르침을 하나씩 배우며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길 간절히 기원한다. 


#비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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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말하다 - 비극으로, 희극으로, 동화로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오현미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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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싶은 설교


프레드릭 비크너 저, '진리를 말하다'를 읽고


설교자들이 주요 독자층인 듯한 이 책은 설교를 주로 듣기만 하는 나에게 다시 설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해 주었다. 저자가 말하는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에 잠시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설교를 들어본 횟수가 손꼽을 정도인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 시대 이 한국 교회에 목사는 참으로 많은데 참 설교자가 요원하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말이다.


진부할 정도로 너무 당연해서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명제 중 하나는 '설교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일 것이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비슷한 여정을 겪는다. 특히 늙어가는 중엔 비틀거리면서도 어쨌거나 가야 할 길을 인도받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오랜 시간 길을 잃거나, 완전히 길을 벗어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꽤 오래 길을 벗어났었다 (어쩌면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른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왔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지나야 했다. 그때 내게 가장 갈급했던 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하나도 몰랐었다). 깨닫기 위해선 먼저 들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그것을 듣지 못했다. 내 귀가 가려져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무도 내게 진리를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어두운 옛 기억의 저장고를 방문해 본다. 그리고 가정문으로나마 이렇게 바라게 된다. '그때 내 옆에 복음의 진리를 담백하게 들려주는 설교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하고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 비크너는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아니 어쩌면 유일한, 설교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 그는 복음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비극의 소식이라고 한다. 반면, 복음은 누군가가 그 인간을 위해 희생하여 그 인간은 어쨌든 사랑받고 죄 사함 받으며 구원을 경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희극의 소식이라고 한다. 나아가 이 비극과 희극의 만남은 너무 좋아서 있을 법하지 않은 사실 같은, 즉 동화 같은 소식이라고도 한다. 복음은 비극이기도, 희극이기도, 또 동화이기도 한 진리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바로 설교라는 것이다. 


그렇구나 싶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임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깨우는 것이 설교자의 몫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 은혜 이전에 죄에 빠진 상태를,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 이전에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임했던 흑암과 공허와 혼돈을 직시하게 도와주는 것, 그러니까 희극의 소식 이전에 비극의 소식을 먼저 들려주는 게 설교의 바른 순서라는 생각이다.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은 채, 다시 말해 비극의 소식이 거세된 희극의 소식만이 설교라는 타이틀로 전해지면, 그 소식은 영적인 사실을 외면하고 엉뚱한 말로 소망과 위로와 힘을 주려는 가식과 위선의 말장난에 그치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많은 설교가 이런 모습을 띠고 있다!). 


나아가 비극과 희극이 만난다는 것, 빛이 어둠에 최종 승리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의 동화라는 비크너의 말이 지금도 내 귓전에 맴돈다. 그리고 그 동화는 허구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일어나고 있는 실제 역사라는 말도 큰 감동이 된다. 현실의 수레바퀴 아래서 이런저런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세상 풍파에 살아남는 처세의 달인, 즉 어른의 모습으로 서려고 나도 모르게 애쓰던 내 모습을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경이에 찬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복음의 진리를 계속 듣고 싶어 하고 그 진리의 성취를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며 실제로 동참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갖게 된다. 매주마다 기대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설교, 하나님 백성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설교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꼬박꼬박 듣고 싶다. 나 자신을 직시하여 깨어지고 회개하고 참회하게 되는 설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믿음이 감사와 축복으로 충만하게 여겨지는 설교,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설교, 그런 설교가 모든 교회에서 들려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 프레드릭 비크너 읽기

1. 주목할 만한 일상: https://rtmodel.tistory.com/762

2.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https://rtmodel.tistory.com/1059

3. 진리를 말하다: https://rtmodel.tistory.com/1783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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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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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인식의 다리


파스칼 메르시어 저, '언어의 무게'를 읽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김춘수의 '꽃'에서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그는 그저 하나의 몸짓일 뿐 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일까? 타자에 의해 이름이 불리는 존재만이 비로소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된다는 말일까? 나는 이 시에서 '이름'을 '언어'로 바꿔본다. 그러면 언어는 자연스레 무게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잇는 다리의 무게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겠지만, 작품 속 주인공 레이랜드의 시간도 여러 번 재부팅된다. 그럴 때마다 언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인생의 여러 막을 닫고 다시 여는 무대 커튼 같은 것이었다. 커튼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순간이 그에게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재인식하는 순간이었던 걸까. 일상에 흩어진 소중한 것들이 하나씩 빛을 잃어가는 동안 우리는 점점 무뎌져간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 구원을 맞이하고, 우린 그제야 빛바랜 사진을 눈물을 머금고 다시 바라보듯 잃었던 의미를 재발견하며,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곤 하는 것이다. 언어는 잃었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재해석하게 해 주며 인생의 새 막을 여는 구원의 열쇠이기도 하다.  


레이랜드는 과거에 옥스포드를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러나 그에게 옥스포드는 몸에 안 맞는 옷이었다. 여러 언어를 알던 동양학자였던 삼촌 집을 찾은 어느 날, 거실에 붙어있는 지중해 연안의 지도를 보며 레이랜드는 남다른 꿈을 갖게 된다. 지중해에 접한 모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것. 언어에 재능과 애착이 있던 그는 도망 나오듯 대학을 그만두고 주먹구구식으로 여러 언어를 배우고 익히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무모한 일처럼 보였다. 이 작품의 저자 파스칼 메르시어의 전작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떠오를 만큼 말이다. 그 역시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한 여자를 만나 포르투갈어를 들은 뒤 모든 걸 내려놓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노년의 그레고리우스가 행했던 무모한 일보다는 아무래도 젊은 레이랜드의 무모한 일이 그의 인생을 더 크게 변화시켰을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삶이나 남들의 시선에 맞춘 삶이 아닌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던 레이랜드는 낡은 호텔의 종업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고, 쪽방에서 생활하면서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를 틈타 번역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 연장선의 삶에서 운명처럼 리비아를 만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 당시 기자였던 리비아는 출판사 사장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면서 그녀가 출판사를 물려받게 된다. 영국에서 만난 그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갑작스레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로 이사하게 된 이유였다. 트리에스테는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도시였다.


꾸준히 번역가의 길을 걷던 레이랜드는 트리에스테에서 아내를 심장마비로 잃고 큰 충격에 휩싸인다. 다시 안 맞는 옷을 입듯 출판사를 인계받아 이끈다. 번역 일도 계속하면서 말이다. 이때부터 레이랜드는 죽은 아내에게 남몰래 꾸준히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리비아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리비아는 레이랜드의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그런 존재가 사라졌으니 레이랜드가 느끼는 하루하루는 그저 반복되고 견뎌내야 하는 빛바랜 일상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랜드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청천벽력이었다. 발작을 경험했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뇌 스캔 사진에는 눈부실 만큼 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뇌종양이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하루하루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레이랜드는 출판사를 매각한다. 큰 결단이었다. 매각한 이후에도 그는 그곳을 떠올리면 사장 자리에 자신이 아닌 리비아가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에게 출판사는 죽은 아내의 분신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이어서 그는 아내와 함께 살던, 그리고 아내가 죽었던, 그리고 성인이 된 딸과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 위치한 집을 떠나 홀로 삼촌이 유산으로 남겨준 영국 런던 집으로 향한다. 같은 일상을 그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에겐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이 소설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이후에 소개된다. 그것은 레이랜드의 뇌종양 판정과 출판사 매각 후 삼촌 집으로 향하는 장면 사이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당황스럽기도 한 그 사건은 바로 레이랜드의 뇌종양 판정과 시한부 선고가 오진에 의한 판단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요컨대 사진이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진 아래에 깨알만큼 작은 글씨로 적힌 다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새도 없이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충격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던 것이다. 


아, 오진이라니! 레이랜드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죽었다 살아난 심정이었을까? 감사로 충만한 마음이었을까? 혹시 분노에 사로잡히진 않았을까? 특히 그에게 남다른 의미였던 출판사를 매각까지 한 이후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레이랜드는 나중에 여러 번 출판사를 손님으로 방문한다. 초반에는 돌이키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했다. 단 열흘만 일찍 알았다면 출판사 매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랜드는 무너지지 않고 진화하고 성숙한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 그 사건 때문에 그의 앞에 열렸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레이랜드의 성장기 혹은 성숙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모진 운명의 장난 같은 사건도 언어와 함께였다. 그는 발작을 겪을 때마다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읽을 수는 있는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지 두려워했다. 병이나 발작이 몸은 앗아갈 수 있어도 언어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처럼 레이랜드가 목숨보다 소중히 지키려고 했던 건 어쩌면 언어였다. 그는 결국 그의 언어를 지켜내고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인생의 새 막을 다시 시작했다. 


레이랜드가 성숙해 가는 과정 역시 언어와 함께였다. 출판사를 매각하지 않았더라면, 런던의 집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사람들과 생기지 않았을 사건들로 인해 그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워진다. 중요한 건 그 모든 만남 역시 언어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레이랜드라는 주인공 입장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여러 작가와 번역가와 출판사 관련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다양한 삶의 굴곡과 명암을 훑어보는 것만 해도 이 작품은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이들의 다양하고 독특한 모든 삶이 언어로 수렴된다는 점 또한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누군가 인간은 의미중독자라고 했다.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 성장하고 성숙하며, 또 언어로 끝이 나는 인간의 삶. 정녕 인간의 내적 발생은 언어로 말미암는가. 인간답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과연 언어를 빼고 인간다움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언어의 무게는 결국 삶의 무게이자 모든 의미의 무게이고 결국 존재의 무게가 아닐까. 이 아름다운 작품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찬찬히 읽어온 나날들이 이제 저문다. 하지만 언어로 기록한 이 감상문은 나를 새로운 막으로 인도하리라 믿는다. 내 남은 삶에 하나의 잔상을 남기면서 아름다운 무게를 더하리라 믿는다.


* 파스칼 메르시어 읽기

1. 리스본행 야간열차: https://rtmodel.tistory.com/1203

2. 언어의 무게: https://rtmodel.tistory.com/1726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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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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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서사에 깃든 지독한 인간의 심리


정유정 저, ‘7년의 밤’을 읽고.

간결한 단문으로 휘몰아치는 정유정의 필력은 치밀한 서사와 정제된 묘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살아난 텍스트의 모든 여백이 긴장과 스릴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단숨에 빨려 들어갔고, 금세 압도되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작품을 함께 하던 약 다섯 시간 동안 나는 마치 오랜 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다섯 시간이 아니라 닷새가 지난 것 같다. 너무 깊게 몰입한 나머지 일으킨 착각일 것이다.

작가가 창조해낸 가상의 공간, 세령호. 나는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작품 속에 빠져든 나는 잠시 동안 작가의 창조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세령호의 안개가 나를 감싸는 것 같고,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세령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크고 검은 눈, 허리까지 닿을 만큼 길게 풀어헤친 머리, 엄마 화장품으로 아무렇게나 칠한 조그맣고 하얀 얼굴, 구석구석 멍든 몸, 흰 팬티 차림의 작고 여린 아이, 이제는 스스로 눈을 감을 수 없는 아이, 오세령. 세령은 공포에 질린 채 도망치고 있었다. 강도나 괴한이 아닌 아빠로부터. 제기랄. 이것이 캄캄한 밤, 인적이 드문 어두운 안개 길을 그 조그만 발로 거침없이 달려야만 했던 이유다.

부와 명예를 등에 업은 사이코패스, 아빠 오영제로부터 폭력과 수치와 모멸을 견뎌내며 간신히 살아오던 열두 살의 초등학생. 엄마 하영은 남편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미리 도망쳤다. 으리으리하지만 텅 빈 그 집에 세령은 늘 교정을 해준답시고 손찌검을 해대는 아빠 오영제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세령이 죽던 날은 마침 세령의 생일이었다. 생일날, 그러니까 세령의 마지막 날이었던 그날에도 세령은 오영제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오영제에게 있어서는 교정, 세령에게는 공포이자 폭력이었다. 세령은 활활 타는 초가 꽂힌 병을 오영제에게 던지고 기회를 틈타 창을 넘어 도망쳤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살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도망은 죽음으로 끝나버린 세령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아아, 아빠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그 길이 이렇게 끔찍한 사건의 전야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오영제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런 게 인간이란 탈을 쓰고 있다니! 내 심장은 쉬지 않고 벌컥댔다. 대동맥으로부터 피가 용솟음치는 게 느껴질 만큼. 그런데 작가 정유정은 여기에 오영제 가족뿐만이 아닌 최현수 가족을 연결시킨다. 세령의 허망한 죽음이 연결고리였다. 세령을 죽인 건 오영제가 아닌 최현수이기 때문이다. 세령은 오영제로부터 도망치던 중, 마침 그곳을 처음 방문한 최현수의 차에 들이 받힌다. 아, 이런 기막히고 비극적인 운명! 물론 최현수가 세령을 차로 친 건 사고였다. 악의가 전혀 없는 순수한 사고였다. 문제는 세령의 사인이 교통사고에 의한 다발성 장기 부전이나 과다출혈이 아닌 질식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 차에 부딪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여자 아이가 살아있었다. 놀란 나머지 최현수는 운전석에서 나와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정신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아빠”라고 읊조렸다. 마음이 무너졌다. 그때 최현수는 아이를 들고 곧장 병원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대신, 솥뚜껑 같은 왼손으로 입을 막아 생사를 오가는 아이의 마저 남은 숨통을 끊었고,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세령호에 던져버렸다.

최현수는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를 당한 상태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면허가 갱신될 참이었다. 불법으로 운전을 해서 곧 살게 될 사택을 확인하러 밤늦게 세령호에 다다른 것이었다. 오는 도중에 술 한 잔 걸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최현수는 잘 나가던 야구 선수였다. 한때 팀의 전성기를 이끌던 포수였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고 왼팔이 마비되는 증세가 잦아지면서 주전에서 밀려나야 했다. 2군에서 뛰다가 결국엔 야구를 그만둬야 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191센티미터, 110킬로그램의 거구를 장점으로 활용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보안업체 경비직이었다. 그렇게 최현수는 자존감을 잃어갔고 술에 절어 살게 되었다. 어쩌다가 만난 아내 은주와의 결혼은 그를 더 깊은 나락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지키고 싶은 존재는 아들 서원이었다. 서원이만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이 작품은 서원의 일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써졌다. 7년 전 사건, 그러니까 세령의 사고, 최현수의 살인, 오영제의 복수극이 빚어낸 재앙이었던 세령 댐 수문 방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그날로부터 7년이 지난 이후, 승환과 함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다니다시피 살다가 그나마 정착한 등대마을에서 서원은 자기에게 배달된 운동화, 승환이 썼음이 분명한 세령호 사건에 대한 소설, 그리고 하영과 승환 사이에 오갔던 편지 다발과 승환이 남긴 컴퓨터 파일들을 훑어본다. 그날은 승환이 갑자기 사라진 날이었고, 서원이 전보 한 통을 받은 날이었다. 전보는 아버지인 최현수의 사형 집행이 치러졌으니 시신을 수습하라고 알리고 있었다. 서원은 이러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사실일 수밖에 없는 추리를 해내고 전율과 함께 깨닫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영제가 실제로 살아있고, 여태껏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7년 전 못다 한 복수를 최현수의 사형 집행일에 맞춰서 완성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동안 전학에 전학을 마다하며 도망치다시피 살아온 나날들도 모두 오영제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형 전 오영제의 행동을 노련한 포수의 육감으로 정확하게 예측한 최현수와 승환, 그리고 두 형사의 도움으로 승환과 서원은 죽을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오영제의 복수극, 아니 미친 살인극을 가까스로 저지하게 된다. 7년의 밤이 비로소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결말에 이른다.

작품 읽으면서 독자가 아닌 소설 지망생으로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 작가는 각 인물의 내면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작가는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각 등장인물이 되어 그 고유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얻은 생동감 넘치는 입체감은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했고 독자의 몰입을 유도했다. 등장인물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오해하게 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러운 부분을 어떻게 추리해나가는지, 그리고 그렇게 감추거나 드러낸, 혹은 감춰지거나 드러나게 된 심리를 어떻게 분석하고 대처해나가는지, 정말이지 정유정 작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등장인물들에게 투영하고 그들만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놀랍도록 입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앞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은 하영 (오영제의 아내), 은주 (최현수의 아내)를 비롯하여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고유한 서사도 소설 전체의 흐름과 완벽하게 맞물린다. 각 인물들이 가진 상처에는 한국인으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정서가 깊이 녹아있다. 허투루 버릴 게 하나 없는 치밀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환상과 사실을 오가는 서술 기법.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단문의 화려한 연타. 탄탄한 서사와 인간 본성의 심연을 깊숙이 파고들지만 결코 직접적이지 않은 묘사들. 나는 독자로서 그리고 소설 지망생으로서 연신 침을 삼키며 이 작품을 읽어냈다. 프로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처음 읽는 정유정 작가. 여태껏 왜 몰랐을까! 그동안 고전소설을 읽는답시고 현대소설을 게을리했던 것, 서양 고전을 탐독한답시고 한국소설을 등한시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한국 현대소설일 텐데 한국 현대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유정 작가를 비롯한 한국 현대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마침 스무 권이 넘는 소설이 중고로 구입이 가능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이번 기회로 인해 한글로 써지고 한국 정서가 녹아있는 한국 현대소설의 세계로 본격적인 진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나에겐 큰 흐름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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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라는 세계
이종태 지음 / 복있는사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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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재료를 아는 사람이 아닌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길


이종태 저, '경이라는 세계'를 읽고


철학, 신학, 문학, 과학 등의 모든 학문, 그리고 모든 지식과 깨달음의 문을 열고 정직하게 걸어가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고, 또 마주해야만 하는 것. 앎이라는 과정의 동반자이자 길잡이, 나아가 그 과정 자체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고, 그것으로 한 걸음 다가간 대상과의 거리를 줄이기는커녕 더 확대시켜 결코 다가설 수 없다는 인정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기쁘게 받아 내고야 마는 것. '경이'일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앎이라는 과정을 겪게 된다. 모름과 앎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변증법적인 발전을 해나간다. 그래서 앎은 앎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모름으로, 그 모름은 다시 앎으로 변모해 나간다. 특히 인간은 눈앞에 있는 어떤 것 하나를 더 알았음에도 그것으로 인한 '플러스 원'만 보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도 채우지 못한 채 더 넓어지기만 하는 '무한대'의 영역도 보게 되는 존재자다. 이런 면에서 나는 파스칼과 같은 생각이다. 인간 내면의 심연에는 신의 흔적이, 신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앎과 모름의 변증법은 의식하든 못하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하는데 그것이 나는 바로 '경이라는 세계'이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제목 말이다.


공부하면서 종종 느끼는 깊은 전율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플러스 원'을 장착했을 때이기보다는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무한대'의 텅 빈 공간이 그제야 눈앞에 드러났을 때에 찾아온다. 하나의 앎은 무한의 모름을 가리키고 나는 그렇게 다시금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다시 출발점에 선 나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앎의 과정은 좁은 탑 꼭대기로 올라가는 여정이 아니라 황량할 만큼 더 넓은 대지로 이끌리는 여정이라 믿는다. 지경이 넓어진 자의 숙명, 그리고 이런 무한반복이야말로 겸손의 통로일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언제나 저 너머를 묻는 존재자다. 표면이 아닌 이면을 궁금해하고, 표층이 아닌 심층을 보고 싶어 한다. 이렇게 인간만이 가진 특징의 기원을 기독교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할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 점이야말로 '경이라는 세계'가 발아하는 근원이지 않을까 한다. 신비를 소멸하고 경이감과 경외감을 거세시키는 무수한 노력들, 이를테면 기계주의나 과학주의 등의 경도된 사상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신앙과 믿음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그 무엇.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이 없다 말하는 사람들까지 그 내면에 동일한 것이 심겨 있다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인간스러움'이 아닌 '인간다움'의 근원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루이스를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경험했던 경이의 순간들.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끈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 저자의 말마따나 경이의 눈은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신비를 풀려고 하기보다 사랑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눈일 것이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무수히 많은 틈새의 신이 사라진 이 시대, 별의 재료를 파악했다고 별이 무엇인지 다 아는 것처럼 여기는 이 시대. 신비 앞에 서서 경이감과 경외감에 잠식되어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닫고 신을 벗고 두 팔을 든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그 경이의 세계를 언제나 감지하려고 또 그 세계와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사람다운 사람, 경건한 사람, 겸손한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복있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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