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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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을 읽고


'가난한 사람들'과 '분신' 사이에 쓰인 이 작품은 별다른 설명 없이 뾰뜨르 이바니치와 이반 뻬뜨로비치 사이에 오고 간 아홉 통의 편지로 구성된 아주 짧은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친했던 두 사람이 불과 며칠 만에 절교에 이르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인다. 두 사람이 만나 직접 대화를 했더라면 아마도 일이 그렇게 불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는 직접 대화보다 언어를 걸러서 정갈하게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 반면, 편지를 읽거나 쓸 때만큼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가진다. 아무리 답장이라도 모든 문장에 대해 응답할 수도 없을뿐더러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관점의 차이 때문에 작은 오해가 큰 오해로 쉽게 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한다. 요즈음 시대에 이메일이나 채팅으로도 이러한 오해의 순간들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데, 펜으로 직접 종이 편지를 쓰고 배달하여 빠르면 그다음 날에나 읽어보고 답장을 쓸 수 있었던 19세기엔 그 오해가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이 작품에선 뾰뜨르가 다섯 번, 이반이 네 번 편지를 쓰게 된다. 서로가 번갈아 쓴 답장을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소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의 입장만을 변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서로에 대해 내세우는 칼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나 같은 경우 두 번 읽어도 가관이었다. 피식 헛웃음이 나올 만큼 말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 성공한 이후 '분신'의 골랴드낀을 준비하고 있던 도스토옙스키의 모습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작품엔 추가적으로 두 통의 편지가 더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발신인을 밝히지 않는데, 거기엔 어떤 의도가 있는 듯싶다. 두 통의 편지는 각자의 아내가 예브게니 니꼴라이치라는 한 남자와 저지른 불륜 혹은 그에 상응하는 행각을 담고 있다. 두 아내가 직접 예브게니에게 과거에 썼던 편지다. 유추해 보건대 뾰뜨르와 이반이 서로의 아내가 저지른 수치스러운 행각의 증거를 몰래 가지고 있다가 서로 절교를 선언하는 동시에 그 증거를 유출한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이 유추가 사실이라면 이 작품은 정말 웃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다가 마지막에 그것을 빈 봉투에 담아 서로에게 가만히 보낸 행위 자체가 갖는 코미디 같으면서도 슬프기도 한 의미 때문이다. 


참고로 예브게니는 이반이 뾰뜨르에게 소개해준 청년이다. 그 소개 덕분에 예브게니가 뾰뜨르의 집에 눈치도 없이 너무 오래 거주하는 바람에 뾰뜨르가 이반에게 예브게니를 자기 집에서 나가게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가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추가적인 두 통의 편지의 발신인이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뾰뜨르는 자기 집에 오래 거주하던 예브게니가 자기 아내와 불륜에 빠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이반은 자기 아내가 결혼하기 전 예브게니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뾰뜨르와 이반은 애초에 진정 친한 관계였을까? 서로의 흠집이나 잡고 언제나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관계에 지나지 않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 두 사람 사이에 편지로 오고 간 다툼은 무의미했던 것 같다. 먼저는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아내의 행각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중간에 낀 예브게니만이 진정한 승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잘났다고 적절한 예의를 갖추며 떠들어대던 두 사람은 과연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비단 이 두 사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모두 적용되는, 숨기고 싶은 속성은 아닐까. 불필요한 다툼에 휘말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그리고 이 어리석음은 분열의 전 단계가 아닐까.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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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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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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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적 허구가 담고 있는 진실


마거릿 애트우드 저, ‘시녀 이야기’를 읽고

페미니즘과 디스토피아가 절묘하게 만난 수작, ‘시녀 이야기’.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를 처음으로 만난다. 거장의 필체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간결한 문장은 기본인 데다 풍성한 상상력, 깊은 통찰에서 우러나와 이성과 감성을 모두 깨우는 묵직한 음성, 그리고 티 나지 않고 날카로운 뼈를 감춘 채 정확히 급소를 찌르는 절제미까지. 압도적인 서사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그리 특별하지 않는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서 고수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단 한 권만 읽었을 뿐인데, 저자 이름이 가려진 숱한 글 속에서 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실로 놀라운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성과 별개로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한두 차례 그만둘까 생각도 했었다. 저자 특유의 절제된 문장으로 표현되는 여성들의 비참함 때문에 그랬고, 비록 허구이지만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 그리고 전체주의 사회의 뿌리 깊은 폭력과 거짓 영성 때문에도 그랬다. 남성이자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이 작품을 읽고 나처럼 불편해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싶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 이 작품은 ‘길리어드’라는, 쿠데타로 세워진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시녀’로 살아가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한 여성의 기록으로 읽히게 되어 있다 (시녀는 씨받이로 생각하면 된다). 작가의 탁월한 설계다. 작품 끝에 놓인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에 의하면 작품의 현재는 21세기 말이다. 본문에 해당하는 한 여성의 기록은 한낱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실제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는 과거 문헌인 셈이다. 물론 이 ‘역사적 주해’ 역시 소설의 일부이기에 모든 게 허구이지만, 저자는 일부러 이런 액자식 구성을 십분 활용하여 본문에 허구적 역사성을 부여하는 등 작품의 비중을 한층 높이는 효과를 톡톡히 해내고 있다. ‘시녀 이야기’ 본문만 읽고 작품을 다 읽었다고 생각한 독자들은 아마도 책 뒤에 부록처럼 붙은 ‘역사적 주해’를 접하고는 ‘의외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이 작품은 그저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 정도에 머물지 않고, ‘안네의 일기’처럼 한 역사적 인물의 실제 수기인 것 같다는 인상까지 받게 될 것이다. 허구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부록 같은 내용이 500 페이지의 긴 본문이 가진 뉘앙스와 가치를 배가시키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거장의 재간이랄까 솜씨를 충분히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 중반 무렵, 시대는 잦은 전쟁과 극에 다른 환경파괴 등으로 종말에 이른다. 이런 혼돈으로 생겨난 균열을 이용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체주의 국가가 바로 ‘길리어드’이다. 길리어드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묘사된다. 하나는 가부장제, 다른 하나는 근본주의 기독교. 조금 더 작품 속 상황을 잘 표현하려면 두 단어 앞에 ‘극단적인’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한다.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두 단어만으로도 길리어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길리어드는 여성에게서 거의 모든 권리를 빼앗았다. 여성은 소나 말, 혹은 노예, 혹은 쓰다 가차 없이 버릴 소모품처럼 남성들이 세운 체제에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살아가거나, 사람에게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이성과 감성을 거세한 채 한낱 아이나 낳는 기계 따위로 취급된다. 저항하거나 거역하면 곧바로 처벌이나 처형이 가해지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면 체제에 순응해야만 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과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것의,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차이를 철학, 신학적으로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 체제를 만든 구조적인 악의 존재와 그 타개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겠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의 극을 실현한 국가답게 길리어드는 다른 종교는 물론 다른 교단이나 교파까지 모두 교화해야 할 대상이나 적으로 간주하고 관리한다. 폭력과 압제로 기독교 정신을 지킨다니, 허구가 지나쳐도 너무 치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단순히 이런 생각을 내칠 수만도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처한 기독교의 현실이 길리어드의 그것과 비교해서 정도만 다를 뿐 본질은 비슷하다는 슬픈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폭력을 가장 잘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가 종교다. 이때 종교는 곧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되고 만다. 궁극적으로 개인이나 어떤 특정한 집단의 사익을 위해 이용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종교라는 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폭력이 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안녕과 평안만을 고려할 게 아니라 그 개인과 집단이 속한 더 큰 사회구조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소외된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와 같은 사회 약자층에 언제나 눈을 돌려야 한다. 내가 사탄이라도 개인을 일일이 건드리기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물인 국가나 사회를, 그리고 그 국가나 사회를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그들에게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어떤 정신 (이를테면 자본주의 정신)을 건드릴 것이고, 여성으로 대표되는 약자층은 언제나 짓밟아도 되는 것처럼 사회 분위기를 조장할 것이다. 그게 모든 자를 타락시키고 망하게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비록 시녀로 살다가 탈출한 한 여성의 수기로 읽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독자들은 비단 여성의 인권 정도에 머물지 말고 사회 모든 약자층까지 확장하여 이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군데군데 드러나는 간접적인 증거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길리어드는 미국을 지칭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작품이 쓰인 해가 1985년이니 당시 미국은 공화당 소속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을 시작했던 시기다. 예상컨대 마거릿 애트우드는 레이건 대통령의 초임 정권 하에서 길리어드를 본 것 같다.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가 판을 치며 파국을 맞이할 미국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예언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에 그녀의 예상의 정확도를 따질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이지만, 미국의 지성인 중 하나였던 마거릿 애트우드의 눈에는 미국이 길리어드로 발전할 조짐이 분명히 있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그런 일이 아직까진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았지만, 트럼프 정권의 끔찍했던 지난 5년을 떠올려볼 때 여전히 미국은 그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인문학자들이나 철학자들, 혹은 신학자들이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고찰하는 서적들이 출판계에서는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이 분석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안하는 책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의 단점은 주로 난해하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인내력이나 집중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혹은 그런 분야를 읽어온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라면 책 한 권조차 끝까지 읽어내기 어렵다. 이에 반하여 ‘시녀 이야기’와 같은 소설은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어렵지 않게 읽힐 수 있으며 자연스레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철학자와 신학자의 자아를 깨우는 역할을 해낸다. 문학이 가진 고유의 힘인 것이다.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의 조합이 어떤 일을 해내는지 궁금하다면 나는 이 작품을 망설임 없이 권한다. 

참고로,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인 ‘증언들’이라는 작품이 2019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34년이란 긴 시간이 두 작품 사이에 끼어 있으니 후속작이 나온 시기 치고는 조금 생뚱맞은 감도 없진 않다. 그러나 2019년이 공화당 소속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시절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증언들’도 읽어봐야겠다.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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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남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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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한루프의 질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영원한 남편‘을 읽고


석영중 교수는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는 건 통속에서 심오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역시 통속이라는 입구와 '인간의 깊은 본성'이라는 출구로 이뤄진 길이 바로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으로 난 길이라 생각한다. 벽돌 같은 분량과 길고 복잡하고 낯설기까지 한 러시아 이름들, 그리고 종종 등장하여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장광설을 제하고 보면, 실제로 그의 작품이 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지극히 통속적이다 (그래서 결코 진입장벽이 높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정작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읽은 독자들은 한결같이 책을 덮고 나서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는데, 대부분은 그의 통찰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여 도스토옙스키가 지금도 우리에게 읽히는 이유다).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서 통속적인 주제라 함은 돈, 치정, 살인,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제목부터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이 작품에서는 살인을 제외한 (살인미수에 그치는 사건은 등장한다) 돈과 치정, 그중에서도 치정, 또 그중에서도 불륜이 이야기를 이끄는 입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아마도 나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회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영원한 남편' 역시 도스토옙스키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중편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둘째 아내 안나와 함께 한 약 4년 간의 유럽 여행 중에 쓰였다고 한다. 5대 장편에 속하는 '백치'와 '악령' 사이에 발표된 작품이다. 선금을 받고 돈에 쫓기다가 약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노름꾼'이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땐 그나마 심사숙고해서 쓴 작품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5대 장편의 무게와 비교할 땐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고,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읽으려는 의도가 없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은 두 중년 남성이다. 주인공인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벨차니노프, 그리고 그와 대립각을 세우며 소위 ‘영원한 남편’ 역으로 나오는 빠벨 빠블로비치 뜨루소스끼.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 그리고 그 가운데 묘사되는 심리 공방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나는 이 역시 도스토옙스키적인 설정이라 생각한다. 벨차니노프는 과거 T 시에 1년 간 머물 때 뜨루소스끼의 아내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 얼마 전 아내가 죽고 뜨루소스끼는 벨차니노프가 거주하고 있는 뻬쩨르부르그로 넘어왔다. 혼자가 아니라 그의 어린 딸 리자와 함께 말이다. 우연찮게 벨차니노프는 그런 뜨루소스끼와 마주치게 되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가 결국에는 그와 대면하게 되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그 당시 정부였던 벨차니노프는 합법적인 남편 뜨루소스끼를 대면하기가 거북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게다가 뜨루소스끼의 딸이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작품 마지막에 가서 확인도 하게 되는데, 그때 이미 리자는 병에 걸려 죽고 난 다음이었다. 


중요한 것은, 뜨루소스끼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벨차니노프에게 복수하기 위해 뻬쩨르부르그로 왔다는 사실이다. 비록 뜨루소스끼는 벨차니노프에게 접근하여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미지근하고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분열된 양상을 보이며 대했지만 말이다. 벨차니노프 입장에선 뜨루소스끼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뜨루소스끼의 의중을 정확히 몰라 그를 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뜨루소스끼 입장에선 벨차니노프 스스로 자기 아내와의 불륜 사실과 리자의 정체를 말해주길 기다리기도 하고 분노에 차서 죽이고도 싶었을 것이다. 작품 가운데 실제로 뜨루소스끼는 벨차니노프를 죽이려는 시도도 한다. 하지만 손에 상처를 내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벨차니노프는 덩치가 컸고 힘도 훨씬 세서 뜨루소스끼는 간단하게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벨차니노프의 신체적 강함을 차치하고서라도 뜨루소스끼가 벨차니노프를 다치게 할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일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먼저는 제목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의 이름 때문이다. 제목이 '영원한 남편' 아닌가. 그는 아내의 죽음 이후 벨차니노프에게 찾아가 자기가 청혼을 한 여자가 거주하고 있는 별장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그는 죽은 아내를 금세 뒤로하고 다시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이 되는 것이 이 자의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 만큼 나에게 뜨루소스끼는 공감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인물이다).

또한 벨차니노프와 뻬쩨르부르그에서 헤어지고 2년 후 우연찮게 다시 만났을 땐 실제로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편이 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그렇게 결혼한 뜨루소스끼와 그의 아내 곁에는 또 다른 남자가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그 다른 남자와 불륜 관계에 있었을 것이고, 합법적인 남편인 뜨루소스끼는 과거에 하던 대로 또다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아내를 가만히 놓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남편이라는 위치만을 법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신세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벨차니노프는 그 사실을 금세 간파했고, '영원한 남편'이라는 표현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뜨루소스끼라는 단어의 뜻은 '겁쟁이'라고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그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해낼 수 없지만 영원히 남편 자리를 꿰차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차럼 비굴하게 살아가는 남자. 이런 자가 그와 많은 부분에서 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벨차니노프를 쉽게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란 게 내 지론이다.  


서로가 서로의 심중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마치 떠 보려는 듯한 자세로 서로에게 가면을 쓰고 대하는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가소롭고 경박한지 느낄 수 있게 된다.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아 진실을 말해도 그것이 진실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느낄 수 있다. 벨차니노프의 우월감과 자기 만족감, 동시에 뜨루소스끼에게 느끼는 비밀스러운 죄책감과 리자의 죽음으로 인해 느끼는 좌절감. 그리고 뜨루소스끼의 열등감과 자기 비하, 동시에 벨차니노프를 향해 느끼는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벨차니노프에게 느끼는 사랑과 동경심. 이 두 사람의 심리 공방과 독백을 읽으며 나는 나를 보았고 인간을 볼 수 있었다.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내 안의 나.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본능과 나의 심리. 작품을 다 읽고 이렇게 감상문을 쓰며 이 소설의 작품성이 높지 않다고 평가하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또다시 도스토옙스키의 마법에 걸려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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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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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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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창백한 마음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 저, ‘창백한 말’을 읽고

첫 페이지만을 읽고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어느 정도 읽어본 시람에게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나는 이를 감히 축복이라 부른다. 운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오래토록 옆에 두고 자주 펼쳐보며 참조해야 할 작품이라고 믿게 된다. 독자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말이다. 너무 많이 봐서 닳게 될 경우를 대비해, 혹시라도 절판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미리 여러 권을 소장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추천사를 쓴 정지돈 작가가 인생 소설이라 하고 필사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아끼는 이유를 알 듯하다. 

처음 만난 사빈코프의 글은 혁명과 테러의 중심에 선 주인공의 일기 형식을 따르기 때문인지 무거웠다. 그의 글은 고독하고 외롭기도 했다. 이는 주인공이 이끄는 테러의 성격을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리더 위치에 서 있는 주인공 조지를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의 동료들만이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목숨을 걸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은 고독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장하기까지 하다. 소설이 끝날 즈음에는 다섯 중 셋은 목숨을 잃는다. 글이 고독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의 성격 탓일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일기이기 때문에 객관적 서술보다는 주관적 서술과 내면의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모든 페이지에 나타나는 화자의 내면은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고통스러울 때 소리 하나 지르지 않을 정도로 화자는 일반적인 감정 수준을 이미 초월한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살인을 왜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하는 여러 복잡한 내면의 갈등마저도 그는 이미 초탈한 듯했다. 이미 그에게 테러는 어쨌거나 실행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를 따르는 동료 넷의 목숨을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호함도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을 죽인 후 달라진다.

총독을 암살하는 계획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조지는 기쁘지 않다. 그의 삶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다른 타겟을 위해 암살을 계획하고 대의로 포장한 채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삶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했던 것일까. 목표 달성 후에 느껴지는 한없는 공허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총독 암살은 대의로 포장할 수 있다. 테러라는 말조차 반대편에서는 혁명의 씨앗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고자, 즉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살인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총독 암살이 성공리에 끝나고 작품 속 화자 조지는 연모하는 옐레나의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만다. 이유는 간단했다. 옐레나를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살인 후 조지는 괴리감에 괴로워한다. 총독 암살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괴로워하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 살인을 했지만, 그 사람만을 죽인 게 아니라 사랑도 죽였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 가서 그는 고백한다. 더 이상의 테러를 원하지 않는다고. 사랑도 필요 없고 나는 혼자라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별이 빛나기 시작하고 가을밤이 오면 나는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다. 나의 권총은 나와 함께 있다.”

대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적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똑같이 살인을 행한 조지. 그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나아가,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작품 마지막 문장으로 미루어 보아 조지는 아마도 가을밤에 홀연히 권총으로 자살을 실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의든 소의든 살인을 행하고 난 뒤 그는 결국 모든 걸 잃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마저 스스로 끊어야 할 만큼. 비록 살인자이지만 나는 조지에게 연민을 느낀다.

한 편의 소설이 남기는 흔적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가을밤마다 혹시 그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행여나 내게 깃들지 않길 나는 바라게 된다. 하늘도 창백하고 내 마음도 창백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빛소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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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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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저, ‘마음’을 읽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품은 자를 확신으로 이끌었다가도 이내 무지의 바다에 빠뜨려 당황스럽게 하며, 알아챈 자 역시 동일한 미궁에 빠뜨리고 마는 것.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이며 정체를 알 수 없어 그 존재 자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 그러나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제목이기도 한 바로 그것. 마음. 


읽는 내내 복잡한 마음이었다. 작품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작품을 읽는 내 마음만 복잡했을 뿐이다. 마치 확신과 무지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심정이었다. 나는 또다시 내 안에서 깊은 모순을 느꼈고, 죄책감을 느꼈으며, 속죄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낯설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뇌했고 아파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시기에 손에 쥐게 된 책이 ‘마음’이라니. 어쨌거나 나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뒤늦게 또 하나의 거장의 작품 세계로 입문하게 된 것이다.


정의하기가 까다롭지만 (불가능할지도), ‘마음’은 ‘심리’ 혹은 ‘인간의 본성’과도 중첩되며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는 본질 중 하나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생각과 마음’의 이분법을 들며 생각은 머리에서 마음은 가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생각이 머리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동의가 되지만, 마음이 가슴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동의가 되지 않는다. 생각과 마음이 과연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면에서도 나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관념적이라거나 추상적이라서, 마치 영혼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부정신학적인 방법을 차용할 수 있다면,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은 적어도 가슴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고. 


인간의 본성을 다룬 여러 천재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읽어왔지만, 단 한 번도 지겹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는 작가마다 다른 각도, 시선, 문체로 다양한 상황, 사건들을 다루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마도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신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묘연함이 가지는 매력이랄까. 안다고 여겼으나 알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 같은 힘이랄까. 글의 영원한 소재와 주제가 될 마음. 작가 정보를 간략하게 훑어보니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의 마음 (혹은 심리 혹은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대표작이라 불리는 이 책에서도 그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주력한다. 서사보다는 묘사에 치중한 작품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고 마음에 남았다. 아마도 한동안은 그러리라 생각된다. 그 때문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도 들여다보고 싶어 오늘 나는 여러 작품들을 찾아 보관함에 넣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두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1, 2부의 화자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아니 어쩌면 운명적으로, 3부의 화자인 ‘나’를 만나게 된다. 첫 문장을 “나는 그분을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로 시작하는 것만 봐도 이 작품은 1, 2부의 화자가 3부의 화자를 만나고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 형태를 띠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게다가 3부는 분량이 전체의 절반 정도 되는 데다 편지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 나쓰메 소세키 시선의 무게중심은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의 마음 위에 머문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1, 2부의 화자는 3부의 화자를 전면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공교롭게도 죽음이었다. 그것도 타살이 아닌 자살. 이 작품에서도 죽음 (자살)의 냄새는 진하게 배어있다. 선생님이라 불렸던 3부의 화자도, 또 그를 자살하게 만든 동기를 제공했던 과거의 친구 K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1, 2부의 화자가 적어도 이 작품 속에서는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 여겼다. 일본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번엔 또 누가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된다. 


나쓰메 소세키는 선생님의 마음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다거나 파헤치지 않는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가능한 그대로 묘사하려 애썼던 것 같다. 시대가 지나도 인간의 마음은 마치 그대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레 시공간이 엄연히 다른 곳에 위치했던, 그것도 가상의 인물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장수 비결일 것이다. 어쩌면 스토리텔링 혹은 내러티브의 무게중심은 거대하거나 기발한 서사에 있지 않고 그 서사 가운데 서 있는 인간의 내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의 힘이다.


선생님의 마음을 한 단어로 집약시킬 수는 없겠지만, 부채감, 죄책감, 수치 등으로 해석한다면 모든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그가 이 작품의 3부를 이루는 생애 마지막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자살을 감행했던 이유 역시 이런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선생님은 막역했던 친구 K의 자살을 본인이 저지른 타살로 여기진 않았을까. K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하숙집 주인의 딸을 K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 발 앞서 결혼을 서둘렀던 선생님. 축복된 결혼식에서도 K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K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내에게 죽기 전까지 진실을 말하지도 못한 채 세상과 동떨어진 섬이 되어 평생을 살아갔던 선생님. 3부를 이루는 마지막 편지 안엔 모든 진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1, 2부의 화자는 이 세상에서 선생님의 진실을 알게 된 유일한 남자가 된 것이었다.


마지막 편지는 선생님의 독백이기에, 그리고 인생 전체가 담긴 막중한 무게 때문이라도, 독자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K의 자살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내가 발췌한 다음의 문장들만 읽어도 선생님의 마음을 살짝이라도 훑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네. 내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네.”


“나는 책략으로는 이겼지만 인간으로서는 패배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네.”


“내가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은 문구는, 편지 끝에 남은 먹물로 갈겨쓴 듯,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마지막 한 줄이었네.”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기만당했을 때 타인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만큼 나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은 완벽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 그런 믿음이 K의 일로 보기 좋게 무너지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을 때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네. 타인에게 등을 돌렸던 나는 곧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었고, 나 자신을 가둔 채 점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 변하고 말았네.”


“그럴 때마다 나는 웃기만 했지. 그러나 속으로는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슬펐네. 아니지, 이해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만들 용기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고 해야 옳을 것이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지. 나는 외로웠네. 나는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했네.”


“현실과 이상의 충돌, 그런 표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지만, K는 나처럼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네. 나 또한 K가 걸어간 길을 똑같이 걸어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거든. 나뭇잎을 소리 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욕망, 배신, 불신, 죄책감, 부채감, 고독, 그리고 자살. 이렇게 흘러가는 플롯에서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존재할까. 그럴 수 없기에 이런 문학 작품은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면서도 끊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읽히는 게 아닐까. 본질은 마음이다. 진정성 어린 마음. 모든 서사를 뛰어넘어 독자의 마음에 가 닿는 그 무엇. 밝음보단 어두움이 지배하는 작품이지만, 모든 인간의 마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가식적인 밝음을 만들어내어 보이는 것보단 어두움을 직시하게 만드는 방식이 주는 이 의외의 효과. 아, 인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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