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확한 단어, 정확한 문장, 깊고 풍성한 글


김소연 저, ‘마음사전’을 읽고

신형철은 글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하다고 했다.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했다. 정확한 문장은 단 하나의 문장이 존재한다고 했다. 좋은 글, 잘 쓴 글은 곧 정확한 글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유일한 문장들을 찾아내어 모아놓은 정확한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휘력이 관건이다. 많고 다양한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한다. 문장력은 그다음이다. 문장력은 글쓴이가 가진 어휘력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적은 어휘로도 간결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 하지만 입체적인 의미를 담는 장문의 글을 써낼 수는 없다. 간결함이 단조로움으로 수렴된다면, 그렇게 써진 글 역시 단조로운 글에 머물 뿐이다. 

신형철이 말한 대로 글짓기가 집 짓기와 같다면, 높은 어휘력은 다양한 건축 자재의 소유와 같다.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하지만 아무런 특징 없이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집보다는 아무래도 꾸밀 곳은 꾸미되 과하지 않고, 고유한 매력을 발산하면서도 단정함과 균형을 잃지 않아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것처럼 보이는 집이 아름답다고 말해야 한다. 높은 어휘력과 간결한 문장력은 단조로움이 아닌 깊음과 풍성함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단어들의 미세한 차이를 분별하여 그 단어가 가지는 적확한 의미를 명료하고 유려하게 밝혀주는 참 고마운 도우미를 우연찮게 만났다. 만남의 축복일 것이다. 이 책 ‘마음사전’의 저자 김소연 시인은 두루뭉술하게만 알고 있던 비슷한 의미의 낱말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고유한 옷을 입히는 작업을 시행한다. 정확한 문장이 정확한 단어들의 집합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 책의 도움으로 독자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어휘력에 분별력을 가하여 보다 정확한 문장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딱딱한 느낌의 ‘사전’이라는 단어와 ‘마음’이라는 따뜻한 단어의 절묘한 조합이다. 수십 가지가 훌쩍 넘는 마음의 낱말들을 하나씩 방문하여 고유한 색을 찾아준 저자의 노력이 알알이 담겨있다.

읽어나가다가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이 하도 많아 밑줄 대신 수줍게 체크 표시를 여백에 해두었다. 그래서 어떤 문장인지 명확하게 지칭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나중에 다시 들여다볼 때 그 페이지 전체를 다시 읽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충분히 좋을 것 같다. 그런 수고는 기꺼이 하고 싶다. 

몇 군데 특별히 마음에 와닿은 부분들을 발췌해본다. 이 책이 이런 내용이라는 것을 내가 허접하게 손을 대어 설명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다. 딱 열 문장이다.

1.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돈은 전혀 소중하지 않은 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다. 너무 중요한 나머지 소중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57p

2.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62p

3. 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 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63p

4. 동정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나 자신은 그것을 이미 갖고 있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느낀다면, 연민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나 자신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결핍감을 느낀다. 요컨대 동정은 이질감을 은연중에 과시한다면, 연민은 동질감을 사무치게 형상화한다. 66p

5. ‘외롭다’라는 말에 비하면, ‘쓸쓸함’은 마음의 안쪽보다는 마음 밖의 정경에 더 치우쳐 있다. 외로움은 주변을 응시한다면, 쓸쓸함은 주변을 둘러본다. 마음을 둘러싼 정경을 둘러보고는, 그 낮은 온도에 영향을 받아서 마음의 온도가 내려가는 게 바로 ‘쓸쓸함’이다. 92p

6. 허전함이 무언가를 잡았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손이라면,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보았던 손이다. 98p

7.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182p

8. 솔직함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정직함은 남을 배려하려는 것이다. 200p

9. 질투는 자기가 못 가진 것을 향해서만 생기는 감정이지만, 시기는 자기가 갖고 있으면서도 생기는 탐욕이다. 202p

10. 착함은 현상이고 선함은 본질이다. 착한 사람은 불의를 보고 화낼 줄 모르지만 선한 사람은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착함은 일상 속에서 구현되고, 선함은 인생 속에서 구현된다. 204p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모르던 단어는 없었지만 알고 있던 한 개의 단어가 여러 개로 불어난 기분이다.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저자가 궁금했다. 시인일까 싶어 저자의 이력을 찾아보니 역시 시인이다. 시인이 쓴 산문. 치명적인 매력이다. 나로선 언제나 반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마음의 낱말뿐만이 아닌 인생의 낱말들도 두루 살피고 있는데 유독 육아에 관련된 이야기가 빠져있다. 인생의 시간을 다루는 장에서도 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만 나와 있다. 사랑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연애와 이별에 관련된 낱말들로 가득 차 있다. '함께'를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책 전체의 행간에선 '혼자'인 저자가 읽혔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남는 여운도 조금 쓸쓸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새롭게 보이는 인생의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가능하다면 그것들이 추가되면 좋겠다 싶다. 2008년에 첫 출간되었으니 13년이 지난 2021년 현재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면 꼭 그 부분이 추가되어 좀 더 풍성하고 좀 더 따뜻한 느낌의 책이 되면 좋겠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좋지만 말이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2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11-07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뇌를 훔친 소설가 -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인간: 문학과 뇌과학의 접점


석영중 저, ‘뇌를 훔친 소설가’를 읽고
(책의 부제: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

석영중의 글쓰기는 그녀가 강연할 때 사용하는 말투가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자동 음성 지원이 되어 강연을 듣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빠진다. 그만큼 쉽고 매끄러운 글을 쓴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러시아 문학의 정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동시에 작품을 읽고 싶게 만드는 힘까지 구사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난해하고 전문적인 이야기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풀어줄 수 있다는 건 탁월한 전문성을 갖춘 여유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배울 게 많은 교수이자 작가다. 

유튜브에 올라온 몇 편의 강연을 나는 지난 2년 간 모두 챙겨봤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러시아 문학 전문가로서 석영중 교수는 지금도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번역가로도, 대중 강연자로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학자다. 1991년부터 교수 생활을 했으니, 96학번인 내가 이과를 택하지 않고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문과를 선택했더라면 아마도 나는 석영중 교수의 제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의 경제 사정이 좋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이과를 선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석영중이 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설이라고 볼 수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 특히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는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읽은 나는 이미 그녀의 작품을 모두 보관함에 넣어두고 책을 구매할 때가 되면 한두 권씩 사서 보고 있다. 이 작품 ‘뇌를 훔친 소설가’도 최근에 중고로 구입한 책이다. 제목만 읽으면 금방 와닿지 않지만, 부제를 보면 무슨 내용인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뇌과학 (신경과학)과 문학과의 접점을 찾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조명하여 인간을 보다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뇌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이 꽤 많이 등장한다. 문학 교수로선 결코 적지 않은 공부를 병행하며 이 책을 썼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해준다. 

언뜻 보면 뇌과학과 문학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석영중은 이 둘 간의 만남에서 접점을 찾아내고야 마는데,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이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뇌과학이나 문학이나 모두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상적인 인간에 대한 정보가 아닌 인간의 내면과 본성에 해당하는 부분을 비추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둘은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이 책은 총 네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목만 봐도 흥미를 끈다. 각각 흉내, 몰입, 기억과 망각, 그리고 변화이다. 나에겐 첫 번째 챕터인 ‘흉내’가 가장 인상적이었기에 여기에선 이 챕터만 짧게 언급하기로 한다. 저자는 '감정이입'이라는 문학적 용어와 '거울 뉴런'이라는 뇌과학적인 용어를 연결하여 설명한다. 푸슈킨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안나 카레니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등의 작품을 실례로 들며 모방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흥미진진하게 풀어준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대리만족 같은 현상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 현상이 실제로 거울 뉴런이 활성화되는 현상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직접 어떤 일을 행하지 않아도 문학 작품 속 등장인물의 행위를 보고 마치 자기가 한 것과 똑같은 양상으로 뇌가 활성화된다는 점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감정이입은 생물학적인 현상인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방의 순기능이 아닌 역기능, 예컨대 베르테르가 권총으로 자살한 장면을 많은 젊은 남성들이 현실에서 재현한 사건들을 목도할 때면 문학 작품과 인간의 뇌의 상호작용을 마냥 신기해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된다. 저자는 이런 부작용을 톨스토이가 언급했던 ‘감염’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문제까지 확장해서 언급하고 있다.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다소 진지한 이야기까지, 한 번쯤은 생각해봄직한 논의들을 일목요연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세 챕터 역시 비슷한 형식으로 쓰였다. ‘몰입’ 챕터에서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등을, ‘기억과 망각’ 챕터에서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을, ‘변화’ 챕터에서는 톨스토이, 고골, 체호프 등의 작가들의 여러 작품들을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뇌과학에 문외한인 문학 교수가 쓴 책이기 때문인지 생물학적인 사실을 언급할 때보단 문학적인 장면들을 언급할 때 저자의 내공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나처럼 생물학을 전공하여 대충의 과학적인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독자보다는 생물학에 문외한인 독자들이 읽으면 훨씬 더 흥미롭게 읽을 것 같다. 

#예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2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비아 제안들 시리즈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 / 비아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넓은 지경의 신앙

마커스 J. 보그 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를 읽고
(책의 부제: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민족 삼아 열방에 복을 전하는 게 하나님 선교의 목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열방에 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지 못했다. 참 이스라엘로, 그리고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모든 약속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다. 예수는 왕이시며 주님이시다. 구원자이자 해방자이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점점 오해되고 있다.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보라. 예수의 복음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개인 영혼 구원 정도로 축소되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이야기는 물론 예수가 공생애 기간에 가장 강조하셨던 하나님 나라 사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믿음은 사영리 같은 교리에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 정도로 축소, 변질되었다. 그 결과 구원은 개인적 죄 사함 정도로 좁혀졌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상관없이 바코드가 찍힌 천국행 티켓이 구원의 전부로 전락해버렸다. 천국은 죽어서나 갈 수 있는 막연한 곳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믿음과 신앙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믿은 채 다른 것들은 모두 이단시하고 악마화하여, 열방을 위해 본이 되어야 하고 열방을 향해 뻗어나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갈수록 게토화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나 이단들 가리기에 열을 올리고, 형님 교단, 정통 교단을 자처하며 소위 순수한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데 열을 올린 한국 기독교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연 가지를 쳐내며 남은 순수 정통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아마 이젠 스스로도 그렇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울 것이다. 결국 어렵게 수호한 고요한 우물은 고인 물일 뿐이었다. 고인 물은 썩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결과가 현재 우리가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안타까운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다. 

성공회 소속 신약학자인 저자 마커스 J. 보그의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는 이러한 맥락에서 써진 책이다. 물론 미국 상황에 한정된 이야기이지만, 미국 기독교 우파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한국 기독교의 현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은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았다면 써지지 않았을 책이다. 즉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목소리에는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 잡고자 하는 소망이 진득하게 묻어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왜곡하고 잘못 이해하게 된 데에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인, 비그리스도교인을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 둘째는 이른바 ‘천국과 지옥’이라고 부르는 틀로 그리스도교 언어를 해석하는 것. 요컨대 ‘문자 주의’와 ‘천국과 지옥 해석 틀’에서 그리스도교 언어가 오해된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중심으로 해서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에 담긴 풍성한 의미와 지혜를 되살리고자 노력한다. 이 책은 일종의 ‘그리스도교 언어 입문서’로써 오해되고 왜곡된 언어들의 원래 의미를 되찾아주며 우리의 바른 이해를 돕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다. 구원, 성서, 하나님, 예수, 부활, 믿음, 신앙, 자비, 의로움, 죄, 용서, 회개, 거듭남, 승천, 재림, 천국, 삼위일체, 주기도문 등. 난이도는 전혀 높지 않다.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를 사용하여 술술 읽히도록 쓴 저자의 배려가 돋보인다. 읽어 나가다 보면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던 개념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깊고 풍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단초가 되어줄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그리스도교 신앙을 잘못 이해하고 곡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자 주의’와 ‘천국과 지옥 해석 틀’은 바로 그렇게 유창하게 그리스도교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서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묻는 대신 “저 언어가 ‘그때 거기’에서 그들에게 의미했던 바를 생각하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자 주의’를 넘어서자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문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적인 성경 해석은 반지성적이고 콘텍스트를 철저히 무시한 것이며 개인주의적인 욕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성경은 미지의 독자가 대상이 아니었다. 현재 우리에게 써진 게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상 독자였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써진 책이지만, 하나님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쓴 것도 아니며, 기본적으로 그들을 위해 그들이 쓴 책인 것이다. 즉 시공간의 한계를 가진 인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써진 콘텍스트를 이해하면서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적용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우리가 처한 콘텍스트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 플롯에 천착한 성경 해석은 여러 가지 많은 오해를 불러왔다. 그중 구원이라는 개념은 특히나 많이 왜곡되었다. 저자는 구원은 죽음 저편이 아닌 이편의 삶에서 맞이하는 변환을 뜻한다고 알려준다. 즉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과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모두 아우른다는 말이다.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성서에서 구원은 내세와 거의 관련이 없다. 구약성서가 다루는 거의 모든 세기를 통틀어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구원에 대한 이해는 ‘천국과 지옥’ 플롯으로는 백 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저자가 우스갯소리로 지적하듯이, 만약 기독교가 “언젠가 천국에 가려면 지금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고작 조건과 보상의 종교가 되어버릴 뿐이고, 전도와 선교는 협박이 되어버릴 뿐이다.

대신 저자는 구원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귀양살이에서의 귀환’, ‘위험에서 구출됨’을 뜻한다고 정리해준다. 즉 구원은 새로운 삶,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핵심 주제인 하느님과 언약 맺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은 해방과 변환을 이야기한다. 또한 넓은 차원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개인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다. 성서에 나타난 구원의 정치적인 의미는 두 부분, 정의와 평화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에서 가장 중시하는 정의는 경제 정의다. 가난한 자과 헐벗고 굶주린 자가 구약과 신약에서 끊이지 않고 언급되고 하나님 백성들이 도와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레위기 19장의 거룩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희년의 의미까지도 경제 정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들 말고도 위에서 언급한 리스트에 나온 단어들의 개념 바로잡기가 책의 끝까지 지속된다.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기독교라는 우물에서 평생 자라오면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 우물이 전 우주라고 철저히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도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예수와 예수의 죽음, 부활에 대한 꼭지를 읽을 때면 아마도 거부 반응이 심할 분들도 왕왕 있으리라 예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해석에 대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달고 있으며, 그것을 유일한 해석이라고 강조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경을 넓힌다는 차원에서라도 이 책은 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기독교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해온 분들에겐 필독을 권한다. 기독교라는 큰 우산에서 한국 기독교가 속한 교파나 교단이 얼마나 지엽적인지 알게 되는 기회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2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묘한 심리, 덤덤하고 섬세하고 우아한 필체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나를 보내지 마’를 읽고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두 번째로 펴 든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읽기 전부터 개요는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이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 흔히 겪을 ‘놀라움’이 내겐 없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 인간들의 삶’이라는 기발한 공상과학적인 구도보다 나에겐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의 필체가 더 크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아닌 작가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 하나둘씩, 아주 조금씩 저마다 다른 작가의 고유함과 탁월함을 조용히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그것들을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남아 있는 나날’, ‘클라라와 태양’으로 이미 두 번이나 만난 가즈오 이시구로로부터 나는 작가의 내공이랄까 하는, 자세히 읽지 않으면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를 겉보기엔 무덤덤한 필체로 쓰인 것 같은 이 작품 ‘나를 보내지 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작가는 단 한 편의 작품만 읽어 봐도 감이 오는가 하면, 또 어떤 작가는 두세 편 읽어 봐야 제대로 감을 잡을 수가 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철저히 후자에 속하는 작가였다. 사람도 처음 만날 때 다 파악되는 사람보다는 두세 번 만나면서 조금씩 진국이 드러나는 사람이 더 매력적인 법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책 뒤에 있는 옮긴이의 말에서 나는 답을 발견한 것 같았다. 옮긴이 김남주가 쓴 문장이었다. 아래에 옮겨본다. 


“의도적으로 나직하게 읊조리며 감정의 골목골목을 찬찬히 답파하는 그의 문장은 ‘그랬다’와 ‘그랬을 수도 있다’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독자에게 환기해 주는, 요컨대 뉘앙스에 주목하는 섬세한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사건이나 정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정황에 관계하는 심리의 결을 고운 붓질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화자의 성격뿐 아니라 저자의 성격, 그리고 작품의 성격까지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성과를 거둔다. 오늘의 세계 문학을 이끌어 가는 우아함과 미묘함에 대해 알게 됐다는 독자의 고백을 저자에게 안겨 준, 우리가 왜 책을 읽는가 하는 물음에 값하는 작품이다.”


우아함과 미묘함. 심리의 결을 드러내는 고운 붓질. 나는 이것보다 내가 느낀 바를 더 잘 표현할 자신이 없다. 말문이 막혀 웅얼대는 사람에게 적절한 단어가 주어져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 작품은 언뜻 성장 소설로 읽힐 수 있다. 별다른 설명이나 뚜렷한 단서 없이 평범한 학교 생활이 책의 앞 절반 정도를 이루고 있으며, 동일한 등장인물들이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아주 간접적인 단서들이 숨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무턱대고 성장 소설로 읽다가 그 단서를 만나게 되면 아마도 독자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재해석을 가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일지도 모르겠다. 설마 하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감정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뜬금없이 눈앞에 닥친, 작지만 묵직한 단서 앞에 서게 될 때의 비장함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스토리텔링이 극적인 효과를 거두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구도를 위한 방법으로 이보다 더 효율적인 게 있었을까 싶다. 내가 보기에 가즈오 이시구로는 탁월하다.


그렇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복제 인간이다. 그들이 태어난 이유는 단 하나. 장기 기증이다.  (‘기증’이라 써놓고 ‘탈취’ 혹은 ‘강탈’이라고 읽는다). 장기를 가장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복제 인간 안이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즈음이면 궁금한 게 하나둘 생겨난다. 이들 복제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일까, 이들에겐 영혼이 존재할까, 이들의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 등등의 일련의 물음들이 답 없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게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선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지만, 철학적으로나 인문학적으로, 그리고 과학 윤리학적으로 충분히 깊게 생각해볼 만한 거리가 된다. 


이런 묵직한 주제에 더하여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필체에 반하게 되었는데,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섬세한 기법과 특별한 것 없이 아주 일상적인 소재들로 사람의 미묘한 심리를 탁월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 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제일 먼저 손꼽는 나로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색다른 표현 방법을 목도하곤 사실 조금 놀라워서 어안이 벙벙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차이는 아마도 앞서 언급한 ‘미묘함’이라 생각한다. 그 미묘함이 가진 섬세함을 표현하기에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덤덤한 필체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만난 행운이랄까.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 선물로 여겨진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1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악이 아닌 악과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

김영하 저,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읽은 직후 우연찮게 손에 든 책이 하필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니! 살인자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일기 형식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접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 접점 말곤 전혀 다른 느낌이다. ‘종의 기원’에서는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한유진이라는 젊은 남성 내면에서 악의 발현과 진화를 현재 진행형으로 현장감 있게 관찰할 수 있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25년 전까지 숱하게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이었던 70세 노인이 알츠하이머에 걸려 망각의 강으로 빠져드는 과정과 망상의 난잡함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지키고 싶었던 사람을 죽이게 되는 과정을 목도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이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 안에서 일하는 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악보다는 그 악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사이코패스보다는 알츠하이머라는 설정이, 또한 젊은 남성보다는 노인이라는 설정이 사람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 정유정과 김영하는 제각기 작품의 성격과 목적에 부합하는 살인자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절묘하게 삼고 있는 것이다. 

두 작품 연이어 살인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소설이라는 장치가 선사하는 유일한 장점을 다시 깨닫게 된다. 소설이 아니면 어떻게 살인자의 마음을, 끔찍하지만, 따라가며 공감까지 할 수 있겠는가 싶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학과 철학에서 악의 문제를 종교적이고 관념적으로 연구한다 하더라도 소설이 주는 생생한 현장감은 결코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악은 관념으로 머물 때가 아닌 형체를 입고 발현할 때 비로소 악이라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발현의 통로는 사물이나 자연이 아닌 항상 인간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내가 조직신학의 인간론과 신정론을 공부할 때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을 때 인간의 본성과 악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현대 한국 소설가들의 작품을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 서너 편 정도씩 읽고 나면 한국 현대 소설의 흐름이 어느 정도 보일 것 같다. 정유정의 문장과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김영하의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한국 현대 소설을 읽고 나면 무언가 휑하다는 느낌에 젖는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전 문학에서 충만하게 채워지던 그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언젠가는 쓰게 될 내 소설의 스타일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 같아 나름 만족스럽긴 하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1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