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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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묵념.

 

한강 저,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작가 한강은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 그녀가 여전히 국민학생이었던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선 전두환의 지휘 하에 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5.18 민주화 운동, 광주항쟁이라고도 불리는 사태다. 한국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도 잊혀지지도 않을, 치명적이고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보다 30년 전에 벌어졌던 6.25 한국전쟁 역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적어도 그땐 민간인들을 학살할 목적으로 나라가 군을 동원하여 탱크를 앞세우고 총검을 휘두르진 않았다. 그러나, 믿을 수 없지만, 1980년 5월 18일은 그랬다. 군의 일방적인 살육 행위였다. 불의와 폭력과 탐욕이 인간을 지배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빼앗았으며, 약자들의 몸을 한낱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고, 인간 위에 마치 또 다른 인간이 있는 것마냥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가진 존엄성을 가차없이 폐기시킨 사건이었다. 실로 악의 발현이었다.

 

비록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광주에서 태어나 지금은 어느덧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작가 한강. 어릴 적부터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녀가 이 묵직하고도 비장한 침묵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광주학살을 전면적으로 다루며 책을 쓰게 된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학살의 희생자, 그 중에서도 ‘동호’란 이름을 가진, 당시 중학생이었던 한 작은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때 그곳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실상과 그 이후 30년이 넘도록, 아니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깊게 각인된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실상에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제 인물과 일대일로 대응하진 않지만, 실존했던 인물과 실제 벌어졌던 일이 작가의 상상력의 옷을 입고 깨어나 이 책이 되었다.

 

'소년이 온다'는 에필로그까지 합쳐서 총 일곱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화자와 주요 등장인물이 다르다. ‘채식주의자’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선보인 바 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장의 화자는 5.18 광주학살 현장에 있었다는 커다란 공통분모를 가진다. 그리고 모두 동호와 연결되어 있다. 아마 작가는 한 사람의 눈으로 감히 학살 희생자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아픔을 표현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어쩌면 무례하기조차 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지만, 비록 소설이지만, 가능한 허구적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도 살아있는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작가는 일부러 여러 사람의 눈을 통해 그 사건을 다룬 게 아니었을까.

 

작가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동호라는 소년을 입구 삼아 우리를 1980년 광주로 인도한다. 동호는 이미 단짝이던 친구 정대를 잃었다. 어느 날 들이닥친 계엄군의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폭력에 희생되었다. 동호는 정대의 죽음을 목격했다. 함께 손잡고 도망가다가 정대는 총을 맞고 길거리에 쓰러졌다. 동호는 그 손을 놓고 조금 더 도망가서 목숨을 구했다. 운 좋게 총알은 동호를 빗겨갔다. 하지만 동호는 길가에 숨어 정대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중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사건이었다.

 

살아남은 동호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였을까. 동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미 주검이 된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으고 유가족을 연결시켜주고 합동분향소와 추도식을 준비하는 도청을 자발적으로 찾는다. 이 책의 첫 장은 동호가 도청에서 자발적인 도우미로 참여하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추도식에서는 애국가가 제창되고 관은 태극기로 감싸여진다. 동호는 묻는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유가족들은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그렇다. 그것은 명백한 살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가 죽인 것이었다. 나라가 민간인을, 나라가 학생들을, 나라가 친구 정대를 죽인 것이었다. 동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쳐들어온 계엄군의 총칼에 동호 역시 죽음을 맞이했지만, 동호는 아마도 끝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진 못했을 것이다.

 

2장에서의 화자는 정대의 혼이 되어 살육 당한 주검들이 트럭에 실린 채 어느 산으로 고깃덩어리처럼 운반되어 일괄 매장되는, 비인간적인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 난 사실 숨 쉬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하루를 다른 책을 읽으며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아픔의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이 부분을 떠올리면 마음이 힘들다.

 

동호와 정대, 그리고 정대의 누나 정미는 학살 현장에서 죽었지만, 동호와 함께 도청에서 도우미로 일했던 은숙, 진수, 선주, 그리고 동호의 엄마는 살아남았다. 3장부터 6장까지는 살아남은 그들의 지속된 슬픔과 아픔을 각자의 눈과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5.18이 지난 5년 후, 출판사에서 박봉을 받고 일하던 어느 날 형사에게 끌려가 취조 당하며 뺨을 일곱 대 맞는 은숙의 현재와 과거 이야기가 3장을 이룬다. 4장은 5.18 10년 후의 이야기다. 진수와 함께 감옥 살이 하던 교대 복학생 남자를 통해 계엄군이 쳐들어와 살육하던 5.18 당시 현장과, 살아남았지만 빨갱이라는 딱지를 띠고 진수와 함께 감옥에 잡혀 들어와 가혹한 고문을 받았던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한 후유증을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그는 심지어 살아있다는 것이 치욕이라 느꼈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지독한 후유증은 그를 늘 현실에서 동떨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5장은 5.18이 지난 20년 후를 다룬다. 5.18 현장에 대한 증언을 해달라고 부탁을 받은 선주 내면의 이야기다. 그녀는 5.18 현장에서 어느 사복형사에게 배를 밟히고 옆구리를 차여 탈장된 채 응급실에 실려가 목숨을 건졌다. 그 경험 이후 그녀는 노조 운동에 앞장섰던 성희 언니와 다른 길을 택하여 한 발 멀리 떨어져 다소 안전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죄책감에 힘들어 한다. 6장은 사투리로 도배되어 있는 가장 짧은 글인데, 2장 만큼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살아남아 직접 손으로 아들을 묻은 동호 엄마의 독백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아픔을 말할 때 작가가 어머니의 입을 빌린 선택은 정말이지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고 명징한 방법이었다. 마지막 7장 격인 에필로그에서는 마치 한강 작가가 화자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와 배경을 보여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호는 이 작가가 서울로 이사오기 전 광주에서 살던 집으로 이사를 들어온 집의 아들이었다.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읽는 내내 힘들었다. 긴장과 집중과 몰입이 자연스레 되었고, 한 장을 읽고 나면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덕분에 한꺼번에 하루에 한 장 이상 읽지를 못했다. 이 책이 총 일곱 장이니까 일주일이 꼬박 걸린 셈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한강 작가의 섬세하고 정확한 표현력과 필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읽으면서 참 아픈 소설이었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 잔인했을 거란 생각을 하면 몸이 떨릴 만큼 두렵고 끔찍하다. 나 역시 어릴 적 '살인마 전두환'이란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한 번도 제대로 5.18에 대한 글은 읽어보지도 못했다. 내겐 그저 타인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이 책 덕분에 난 비로소 그들과 같은 국민이 되었다. 이제서야 그 희생자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더 진지하게 기리며 묵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의 뒤늦은 묵념을 사죄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91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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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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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흔적, 그리고 발현.


한강 저, ‘채식주의자’를 읽고.


폭력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문신처럼 영원히 남아 자신이나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야 만다. 다만 그 시기가 개인마다 다를 뿐, 뒤늦게 발현되는 형질을 가진 유전자처럼, 폭력이란 실체는 어떻게든 발현이 되어 결국은 그 파괴성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다. 영원불멸한 힘을 가진 것만 같은 치명적인 암세포처럼,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영혜에게 각인된 폭력의 흔적은 그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 느지막이 찾아온 어느 날 밤 그녀의 꿈에서 마침내 깨어났다.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그녀의 작품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2004년과 2005년에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그리고 ‘문학 판’에 독립적으로 실렸던 3개의 중편 소설이 한데 묶여서, 각각이 하나의 챕터가 되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들려주는 하나의 장편 소설이다. 3개의 이야기 모두 영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흥미로운 점은 각 이야기를 풀어가는 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이다. 그는 눈치보며 사는 적절한 기회주의자 같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보단 물질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있고, 별 특별할 것 없는, 이 시대에 부유하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직장인 중 하나로 표현된다. 그는 아내의 자해 사건 후, 별 미련없이 아내를 떠나 버리고, 그 이후로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남자의 캐릭터 덕분에 주인공 영혜의 그로테스크하다고 할 수 있는, 비정상적으로 상처입은 생각과 행동의 변화는 더욱 도드라진다. 아마도 작가는 영혜의 남편에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투영시켜 직접적인 관찰자로서 영혜의 변화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날 밤 나무처럼 서 있던 영혜를 직접 보게 하기 위해 우리를 고기가 가득한 냉장고 앞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어쩌면 영혜의 남편은, 폭력의 피해자를 들어주고 도와주진 못할망정 자신의 삶을 훼손시킨 가해자로 치부하는, 공감불능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도 어쩌면 모두 영혜의 남편인 셈이다. 당신은 주위의 상처입은 영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가족이 모처럼 모인 자리에서 또다시 폭력을 휘두르는 영혜의 아버지처럼 폭력의 피해자의 뺨을 때리진 않는가? 아니면 그런 폭력의 피해자가 재폭력을 당하는 순간에도 사회에 잘못 뿌리내린 관행이나 예절, 권위 따위에 짓눌려 입을 다물고 바라보고만 있진 않는가?


두 번재 이야기, ‘몽고반점’은 영혜의 언니, 인혜의 남편 관점으로 쓰여졌다. 영혜 남편과는 달리 인혜 남편은, 비록 경제적인 도움이 되진 못하지만, 월급쟁이 직장인이 아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다. 그가 가진 강박관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어느 날 아내로부터 들었던, 처제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손가락 크기만큼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묘하게도 그는 그 사실에 성적인 충동까지 느끼게 되고, 끝내 자신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영혜를 개입시킨다. 자해 시도 후 육신의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영혼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만 가는 영혜의 상태도 그에겐 별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건 후 영혜가 남편과 이별한 뒤 혼자 산다는 것이 그에겐 기회로 작용했다. 몽고반점으로 시작된 그의 비뚤어진 강박관념과, 그로부터 파생되어 자신의 예술가적인 관점과 교묘하게 결합된 그의 바람은 결국 영혜와 몸을 섞는 극단의 상황까지 연출시키게 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피카소의 그림처럼, 그의 비디오 예술 작품의 극단적인 독특함만으로 그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생각과 계획,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진, 그의 점진적이고 성실한 실천은 예술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영혜 남편과는 다른 인간의 또다른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몽고반점에서 시작된 그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미 상처받을대로 받은 영혜라는 존재까지도 이용해먹는, 비겁하고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이 별로 없고 일상과는 다른 그만의 섬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라는 점도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껍데기는 결국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치장하는 도구이자 변명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럴듯한 명목 하에 숱하게 저지르는 불의를 우린 얼마나 덮어버리고 모른 체해버리며 합리화시켜 버리는가? 그런 이기심과 위선의 행위들이 벼랑 끝에 한 손만을 걸치고 매달려 있는 영혼의 그 남은 한 손마저도 밟아버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가?


세 번째 이야기, ‘나무 불꽃’은 인혜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야기다. 영혜와 자신의 남편이 저지른, 겉으론 예술적일 수도 있겠지만 속으론 추하기만 했던, 그 사건은 그 동안 인내와 성실로 줄기차게 살아온 그녀도 버텨낼 수 없는 범위의 것이었다. 운명일까? 불행히도 그녀는 그 날, 그 사건 현장에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부른 구급대 인원이 들이닥쳐 두 정신병자를 호송하려는 순간 마주친 남편의, 오직 공포로 가득 찬 눈을 기억한다. 영혜와는 달리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유연한 처세술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비겁하게 불의와 폭력에 무릎 꿇은 침묵이 가져다 준 유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사건 이후 남편과 헤어지고 자신의 아이 덕분에 근근히 삶을 유지해오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영혜를 정신병원에 살도록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과 이 지경이 되도록 자신이 아무 손도 쓰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때문에 무너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셈이었다. 가장 가까웠던 남편도, 동생도, 동생 남편도 모두 자신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다. 왜 죽으면 안되냐는 영혜 앞에서 그녀는 그저 어릴 적 길을 잃어 숲을 헤맬 때 영혜가 집에 돌아가지 말자는 말을 떠올릴 뿐이다. 폭력이 가득하고 일상이 되어버린 그 집에 돌아가는 것보단 차라리 길을 잃고 헤매는 편이 더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한다. 영혜와 함께 길 잃은 그 날, 운 좋게 얻어탄 경운기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본, 저녁 햇빛에 불타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나무 불꽃은 또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책의 마지막 부분, 나무가 되어가는 영혜의 육신적 생명을 연장시킬 목적으로 강제로 음식을 식도로 집어넣으려 하는 과정 중 예기치 않게 진정제를 놓으려고 했던 간호사를 제지시키려고 시도하고 나서 더운 피를 토하는 영혜를 싣고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다. 어릴 적의 나무 불꽃이 폭력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면, 책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나무 불꽃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병원으로 긴급히 실려가는 장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나무 불꽃의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희생당하는 존재는 늘 그녀 자신이 아닌 영혜였다. 비록 예전과는 달리 가만히 있지 않고, 또 다른 폭력을 연상시키는 간호사의 행위를 제지시키려는 행동을 보였지만, 그녀는 결국 또 혼자 살아남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만약 남편과 영혜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랬겠노라고. 혼자 살아남은 슬픔. 그녀의 숙명인 것만 같다.


이 책 전체에 흐르는 여러 상징적인 의미들은 폭력을 대변한다. 대표적인 것이 육식이다. 영혜는 고기를 즐겨 먹는 가족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릴 적 영혜는 그녀를 물었던 개를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끈으로 묶어 수바퀴를 돌며 잔인하게 죽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개로 만든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권위와 무력으로 지배했던 그녀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두 폭력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의미하며, 영혜의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각인되는 폭력의 흔적을 남기는 이유가 된다. 그녀가 채식을 선택한 표면적 이유는 그녀가 꾼 꿈이지만, 그 꿈은 그녀의 심연에 각인된 폭력의 흔적의 발현일 뿐이었다.


책을 덮고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영혜가 폭력의 피해자를 대변한다고 쳐도, 그녀의 반응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한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결국 폭력의 피해자가 자기자신에게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 같은 인상이 남는다. 자기파괴 역시 폭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혜도 중요하지만, 난 작가가 3개의 이야기의 시점을 달리하여 쓴 이유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나는 그것을, 이 책이 폭력의 피해자의 가슴 아픈 독백으로 남지 않고 그 주위 사람들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의 시선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려는 숨은 의도로 해석했다.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손과 발로써, 마음을 담은 관심으로써, 공감함으로써, 먼저 다다감으로써, 상처 입은 영혼들을 도와주는 것.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당부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6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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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민음사 모던 클래식 7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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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심리로 굴절된 인생, 절제로 표현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고

이 작품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마스지 오노는 한때 유명했던 은퇴한 화가로, 세계대전 중 아내와 아들을 잃은 후 포화에 부서진 호화로운 옛 저택을 손보며 살고 있다. 둘째 딸 노리코가 어느 명망 있는 집안의 아들과 맞선을 앞둔 어느 날, 결혼한 맏딸 세쓰코가 친정에 놀러 온다. 그녀는 맞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과거 일에 대해 미리 조치를 취해놓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오노를 은근히 압박한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둘째 딸의 혼삿길이 막힐 것을 염려하여 과거의 인물들을 한 명씩 찾아가기 시작하고, 그렇게 그의 과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에 스승의 순수 예술적 노선을 배신하고 전쟁과 천황을 찬양하는 그림을 제작하여 명예와 부를 누렸던 그에게 남은 것은 전범이라는 비난의 눈길뿐이다. 그는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 반성하는 한편 신념에 차 행동하고 성취를 맛보았던 경험에 대해 은밀한 자부심을 느낀다. |

책 뒷면에 실린 요약문을 그대로 옮겨온 이유는, 먼저 나로선 줄거리를 이보다 더 잘 요약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고, 솔직히 그럴 필요도 못 느꼈으며, 무엇보다 이 작품은 줄거리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나날’로 내게 강한 여운을 남겼던 가즈오 이시구로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올 초 그의 신작 ‘클라라와 태양’을 통해서였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쉽게 드러나지 않고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다른 작가의 글에서는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그 무엇을 나는 그의 글에서 어렴풋이 포착했던 것 같다. 그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고, 실제로 그렇게 조금씩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클라라와 태양’에 이어 나는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고, 몇 달이 지난 오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라는 제목의 이 작품을 이틀에 걸쳐 읽었다. 이로써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네 편을 읽게 된 셈이다.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한 작가의 작품들을 하나씩 훑어볼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은밀한 기쁨과 무언의 확신이 이 책을 덮으면서 내 안에 조용히 스며들어왔다. 한두 권만으로는 좀처럼 읽어낼 수 없는 막연한 그 무엇이 어느 날 형체를 가지게 된 것처럼 선명해지는 느낌은 책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는 묘미이지 않을까 한다. 이제야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을 제대로 대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조금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리는 큰 그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책장에 꽂혀있는 그의 다른 네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이 작품에서 나는 ‘남아 있는 나날’에서 느꼈던 애잔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노년의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술 방식, 그 과정에서 조금씩 보여주는 화자의 감정과 심리의 미묘한 변화, 과거에 대한 참회와 합리화의 경계를 오가는 듯한 묘한 긴장감. 거기에 절제된 글쓰기까지. 나는 이런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 흐르는 작품의 깊은 맛을 느끼면서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어느새 화자가 되어 잔잔한 애수를 느끼며 먹먹한 가슴을 안은 채 나 자신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도 않아 일부의 독자는 아마도 이 작품의 맛을 밋밋하다거나 재미없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바로 거기에 가즈오 이시구로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이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삶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 및 심리를 조심스럽게 들춰내어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글. 이런 마법 같은 글의 위대성을 음미하고 싶다면,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글을 읽고 싶다면,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조용히 권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5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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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드리는 기도 - 삶의 어둠 속에서 믿음의 언어를 되찾는 법
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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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취약해도 되는 우리


티시 해리슨 워런 저, ‘밤에 드리는 기도’를 읽고

성공회 사제이자 작가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 티시 해리슨 워런은 2017년 아버지를 잃는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유산과 과다출혈로 응급실에 실려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상실과 고통과 슬픔으로 인생의 낮고 어두운 시간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견뎌낼 수 있었다.

밤과 같이 어둡고 외로운, 그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기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로 그녀는 밤기도를 든다. 밤기도를 드림으로써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고 견뎌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에세이인 동시에 성공회에서 사용되는 여러 기도서 중 특별히 밤기도 예식이 끝나 갈 무렵 나오는 한 기도문 (밤기도문)에 대한 해제다. 그래서 이 책을 보다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의 기도문을 먼저 마음 담아 읽을볼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다.

| 사랑하는 주님,
이 밤에 일하는 이, 파수하는 이, 우는 이의 곁을 지켜 주시고,
잠자는 이를 위해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소서.
주 그리스도여, 병든 이를 돌보소서.
피곤한 이에게 쉼을 주시고,
죽어 가는 이에게 복을 주시고,
고난을 겪는 이를 위로하시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뻐하는 이를 보호하소서.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아멘. |

이 책은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인 첫 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열두 장에서 저자는 위에 적힌 밤기도문의 각 구 혹은 각 문장을 자신의 살아있는 경험과 사유를 토대로 해석해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마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 여러 중독으로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며 견뎌냈던 경험이 있는 사람, 그 견딤의 시간 동안 무신론에 기반을 둔 철학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을 이뤄냈던 경험이 있는 사람, 그런 인고의 과정을 견뎌내면서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줄 알고 마침내 하나님과 타자와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비로소 모두를 존중하고 섬길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간 경험이 있는 사람. 티시 해리슨 워런은 사제와 작가라는 정체성만이 아닌,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 즉, 이 책은 누굴 가르치거나 단순히 책을 만들기 위해서 써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 그리스도인의 진정성 어린 고백이 담긴 글이다.

밤기도문을 읽어보면 처음엔 상투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내가 그랬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왜 그런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게토화 된 교회 용어에 익숙해져 버린 내 모습이 보였다. 영혼이 없는 감언이설로 도배하곤 하는 원만한 인간관계와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하면서도 그 목적은 나도 그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길 원하는 이기적이고 더러운 내 자아가 보였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흔해빠진 말에서 염증을 느꼈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나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다.

저자는 밤이라는 단어에서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뽑아낸다. 열두 장에서 다루는 밤기도문의 해제는 모두 인간의 취약함을 전제한다. 밤이란 취약한 시간이다. 밤은 대부분 자는 시간으로 이뤄지고 무장해제된 우리 자신의 민낯을 편안히 드러내는 시간이다. 방해받지 않고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장 취약한 시간, 우린 밤에 거짓 없는 우리 자신을 만난다.

밤기도는 바로 그 시간을 열면서 드리는 기도다. 여러 중독에 빠져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많다. 술과 담배와 마약과 섹스와 도박만이 아니다. 중독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영화, TV, 게임 등 우리에게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친숙한 것들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 우린 저마다 다른 양상으로 어느 정도 이런 것들로 인해 중독되어 있기도 하다.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은 모습들, 가장 사적이고 가장 솔직한 모습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시간, 밤. 밤기도로 밤의 문을 연다면 얼마나 나의 일상이 변화될 수 있을까, 하고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이 밤기도는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주께 간구하는 기도다. 우리 주위에는 밤에 일하는 이도 있고, 파수하는 이도 있으며, 우는 이도 있다. 잠자는 이, 병든 이, 피곤한 이, 죽어 가는 이, 고난을 겪는 이, 고통에 시달리는 이, 그리고 기뻐하는 이까지, 저자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길 빈다. 그리고 이렇게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를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사랑에서 찾는다. 그 사랑에 의지할 때에만 모든 취약한 사람들 (모든 인간들을 대변하는 표현이라 읽을 수도 있겠다)을 위해 마음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가 된다.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 책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하루 만에 다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내용은 전혀 없지만, 이 책을 가득 매우고 있는 평이한 문장들은 무게를 가지고 힘을 가진다. 좋은 글이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표현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인 법이다. 나는 이 책을 일주일 넘게 밤마다 천천히 조금씩 읽어오면서 저자와 공감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예의인 것 같았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특히 저자의 글은 묘한 설득력이 있어서 뻔하다고 여겼던 진실들을 재조명하여 숨은 의미를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글에 매료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메말라 있는 내 마음에 단비가 내리고 얼어버린 내 마음에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뭄이 끝나고 해빙을 맞이한 나는 이 책과 저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센 척하고,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척하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로 돌아가는 시간. 밤마다 우리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취약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취약해도 된다고. 단,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한다면 말이다. 

#IVP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5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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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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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이고 또 사적이기도 한 에세이


황정은 저, ‘일기’를 읽고


지난 사흘간 드문드문 고요한 시간이 날 때마다 황정은의 첫 에세이집 ‘일기’를 조금씩 읽었다. 덕분에 내가 아는 일기와 에세이의 경계가 조금 흐릿해졌다. 일기는 사적인 (private) 이야기, 에세이는 개인적 (personal)이지만 사적이진 않은 이야기로 나는 이 둘을 구분해왔다. 일기는 공개하기 어렵고 공개할 필요도 없으며 애초부터 공개를 목적으로 써지는 글이 아니지만, 에세이는 공개성이라는 측면에선 개방된 글이라고 이해해왔다. 말하자면 일기는 자기 자신 이외엔 독자가 없는 반면, 에세이는 처음부터 공개되어 독자들에게 읽힐 목적을 암묵적으로 띠고 있는 글이다. 그래서 에세이에는 일기와는 달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이 자연스레 붙게 된다. 


제목을 일부러 ‘일기’라고 한 이유를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 갈 수 있도록 ‘일기’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과 함께 하는 내내 공개를 목적으로 써진 황정은의 에세이가 아닌 비공개를 조건으로 단 황정은의 일기를 읽는 것만 같은 비밀스러움을 느꼈다. 특히 후반부에 가선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다는 기분 (죄책감이랄까)이 들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넘어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일들까지도.


나는 가만히 마음에 담기는 에세이를 읽고 나면 먹먹해지는 가슴을 안고 며칠 동안 그 기분에 취해 지내기도 하는데, 적어도 그 기분은 에세이를 쓴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기분은 황정은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컸다. 그냥 안아주고 싶었다. 작은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조그만 응원이 될 수만 있다면, 하고 바랐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문득 찾아오는 기억의 조각들로 인해 끝내 아물지 않는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혼자 아파하고 그 상처를 만든 상대를 원망하는 데에 집중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더 공감하고 함께 하려는 작은 사랑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들. 이 책 덕분에 황정은도 이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황정은이라는 한 개인을 넘어, 비록 소수이지만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부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며 앞으로도 글을 계속 써주시길.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4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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