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쏜살 문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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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담아낸 목소리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을 읽고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집)

멜로디와 가사가 아무리 좋아도 적당한 목소리를 만나지 못하면 그 곡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같은 곡도 부르는 목소리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편곡과 개사 역시 곡을 다른 느낌으로 들리게 할 수는 있지만 목소리만큼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며 심금을 울리는 강력한 힘은 갖지 못한다. 우린 귀로는 멜로디와 가사를, 마음과 영혼으로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어떤 노래를  들을 때 마음에 감동을 느끼는 것도 목소리의 힘이 크다. 누가 부르느냐, 즉 곡 자체보다는 가수, 다시 말해 목소리가 곡의 전달에 있어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가사가 아닌 목소리에 집중한다. 텍스트로 된 가사가 아닌 다양하고 다채로운 목소리의 고유한 음색 (질)과 성량 (양)을 글로 담아낸다. 이것이 비밀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비법이었다. 정확한 문장을 고집하는 신형철의 글쓰기론으로는 도무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쓰기를 설명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는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노래의 중간쯤 가수가 우리에게 자신의 가슴이 찢어진다고 토로하는 순간이 나옵니다. 그 감정 자체와,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몹시 애쓰지만 결국 굴복하고 마는 저항 사이의 긴장 때문에 그 순간은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이 자리에서 제가 다른 많은 경우에도 가수들의 음색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랫말보다는 가수가 노래하는 방식에서 말입니다. 모두 알듯이 노래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는 헤아릴 길 없이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을 표현합니다. 여러 해에 걸쳐 구체적인 면에서 내 글쓰기는 여러 가수들, 특히 밥 딜런, ……, 의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뭔가를 포착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중얼거렸습니다. “아, 그래, 이거야. 이게 내가 그 장면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거야. 이것과 아주 비슷한 그 무엇이라고.” 내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수의 목소리 속에는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겨누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

목소리는 곧 사람이다. 이성으로 좀처럼 포장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자 깊은 영혼이 묻어 나오는 그 무엇이다. 그 시간 그 공간 특이적인 성질을 가지는 동시에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색도 담아낸다. 우리가 어떤 글을 읽고 말할 수 없이 묵직한 전율이나 울림을 느끼는 건 이성보다는 정서를 통해서다.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이성적이기보다는 정서에 호소하고 또 그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가. 그러므로 가사가 아닌 목소리를 텍스트로 담아낸 글이야말로 좀처럼 쉽게 설명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원제는 ‘My twentieth Century Evening and Other Small Breakthrough’인데, 한글 제목에서 Evening을 ‘저녁’으로 번역한 건 뭔가 어색하다. 20세기가 지는 시점, 그러니까 21세기를 맞이하기 직전의 시기를 의미하는 문학적인 수사로 읽는 게 자연스럽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에 어울리게 ‘황혼’이나 ‘저물 무렵’ 정도로 번역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6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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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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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이한 문장들로 이뤄진 결코 평이하지 않은 글

가즈오 이시구로 저,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읽고

매료되었던 작가의 또 다른 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 이 작품으로 가즈오 이시구로를 처음 만났다면 과연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조금은 낯선 인상을 받기도 했던 작품. 동시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다섯 편, ‘남아 있는 나날’, ‘클라라와 태양’, '나를 보내지 마’,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고 충분히 그에 대한 검증이 끝난 후에 접하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작품. 그러나 이전에 내가 읽은 다섯 편의 작품이 A+였다면, 이번 작품은 A- 정도로 여겨질 뿐, 여전히 A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를 매혹시킨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쓰기는 여전히 이 작품 안에도 살아있고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독자의 눈이 아닌 작가의 눈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맛은 내겐 또 다른 즐거움이다.

평이한 문장들. 그러나 그 평이한 문장들이 모여 결코 평이하지 않은 글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힘이다. 정확한 단어 선별과 구성으로 집을 짓듯 글을 짓는 신형철의 글쓰기론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장들. 언젠가부터 나에겐 낯설고 매혹적인 세계로 다가왔고, 덕분에 나는 또 다른 선생으로부터 글쓰기를 배우게 되었다. 고급스럽지도 화려하지도 않을뿐더러 예리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들을 읽고 나면 나는 어느새 가랑비에 옷이 젖듯 어떤 우수에 온몸이 다 젖고 만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숨겨진 정서를 묵직하게 건드리는 힘은 문장의 정확함이나 예리함이 아닌 문장과 문장 사이에 깃든 작가의 정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작가와 독자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도 드러난 문장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문장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독특한 진정성을 맛보고 싶다면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권한다. 특히 황혼을 나지막이 노래한 세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을 먼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내가 지금 이렇게 내뱉는 독백이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유명한 셜록 홈스의 배경이 된 영국 런던이 이 작품의 중심 배경 중 하나였기 때문일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각 작품 속엔 주인공의 직업이 모두 다른데, 이 작품의 경우 조금은 엉뚱하게도 사설탐정이다. 주인공을 탐정으로 설정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의 과거를 좇아 나서는 한 사람, 그렇게 하면서 과거에 묶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심리를 그려내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이 작품 역시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언뜻 불완전하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서는 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연상되기도 한다. 또한, 제목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고아다.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부모 없이 영국으로 건너와 남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하고 탐정이라는 직업으로 살아가게 된다. 부모의 생사는 작품 끝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크리스토퍼는 부모의 생사를 모른 채 중년이 될 때까지 고아로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중에 부모의 생사를 알게 되고 나서도 그가 혼자라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평생을 고아로서 살아낸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탐정이면서 고아인 인물. 매듭지어지지 않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홀로 거대한 음모와 시대 상황 (제2차 세계대전 전후가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이다. 그러고 보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여러 작품이 그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을 맞서서 싸워내는 인물. 현실성이나 역사성을 따지기보다 우리는 크리스토퍼의 마음과 눈에 주목해야 한다. 화려하고 도도하게 보이지만 뭇사람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외면당하는 세라에 대한 크리스토퍼의 마음과 눈, 그리고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고아 소녀 제니퍼를 양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녀의 장래까지 아버지의 입장에서 신경 써주는 그의 마음과 눈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나지막이 읊조리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고아의 마음과 눈으로 본 세상과 타자, 그리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다른 고아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담기게 될 것이다. 나아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고아 처지에 놓인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묻게 될지도 모른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75920555786044
2. 클라라와 태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15671625144252
3. 나를 보내지 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79150188796395
4.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785763058135105
5. 창백한 언덕 풍경: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20726917972052
6. 우리가 고아였을 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61357717242305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6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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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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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의 선별과 압축을 통해 다시 만나는 도스토예프스키

석영중 저,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을 읽고

마음 담아 읽었던 작품들을 하나씩 꺼내 보며 회상에 잠기는 시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비밀의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은밀한 즐거움이다. 감동의 깊이와 세기는 배가되어 장기 기억으로 저장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감동의 각인,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깊은 만족감은 첫 방문이 아닌 재방문하는 성실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소중한 열매다. 뿐만 아니다. 처음 읽을 때 느꼈던 감동을 복기하는 경험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효과를 낸다. 반복, 심화의 효과도 있지만, 재발견의 기쁨도 있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경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전율과 함께 예기치 않게 작품 전체까지 재조명하게 되어 작품을 보다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또한 재방문할 때에만 보이는 것들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어떤 작품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증거는 어쩌면 재독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이 안타까운 부분도 존재한다.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던 아름다운 문장들도 인간의 망각을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무리 기억하고 싶어도 작품의 상당 부분은 잊히기 마련이다. 재방문은 우리에게 만족과 전율만이 아닌 당황스러움, 나아가 허망함까지 선사해주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망각은 자연스러운 친구가 되고, 가슴을 가득 채웠던 감동의 순간들은 안개처럼 사라져 급기야 읽기의 효율성과 유용성까지도 따지게 된다. ‘어떡하면 잘 기억할 수 있을까?’에서부터 ‘또 잊어버릴 텐데 읽어서 뭐하나?’ 싶은 생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방문 (책의 경우는 재독, 영화의 경우는 재시청)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라고 나는 믿는다. 좋은 작품은 소장하고 싶어 지고, 또 읽고 싶어 지며, 다른 번역본이 존재한다면 그것까지도 읽고 싶어 진다. 가끔 뭘 읽을지 망설일 때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이런 재방문은 언제나 마음 놓고 찾게 되는 안식처가 되어준다.  

좋아하는 작가와 그 작가의 작품들을 연구하고 해석한 2차 자료들은 재방문과 더불어 더욱 풍성한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특히 자신의 느낌이나 해석과 결이 같은 사람이 쓴 2차 자료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나 만나면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처럼 친숙한 반가움을 선사한다. 게다가 그 2차 자료를 쓴 사람이 학계로부터나 대중으로부터 대가로 공인된 사람이라면 그 책은 도무지 읽지 않을 방도가 없다. 이는 내가 석영중 교수가 쓴 도스토예프스키에 관련된 2차 자료들을 꾸준히 읽어나가는,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일차적인 이유가 된다. 

2021년 올해는 도스토예프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세계 각지에선 1821년 생인 도스토예프스키의 탄생을 저마다 다른 형태로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출간했던 ‘열린책들’에서는 200주년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대표적인 5대 장편소설을 한 세트로 구성하여 발간했으며, 석영중 교수에 의해 두 권의 2차 자료가 출간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작품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이다. – 다른 한 권은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인데 현재 책장에서 대기 중이다. 기대된다. Stay tune! –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고 연구한 석영중 교수가 선별한 200 장면과 그 장면들에 대한 석영중 교수의 다섯 문장 안팎의 짧은 해석과 통찰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중간에 삽화도 들어가 있고 여백이 많은 편이라 부담 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 200장면 선별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고 심오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서 반 페이지나 한 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는 장면들을 골라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러나 석영중 교수는 그것을 해냈다. 물론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 때문에 200장면이 누구에게나 명장면으로 동의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석영중 교수가 선별한 200장면을 하나씩 읽어나가다 보면 그 장면이 녹아든 작품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예전에 읽었던 감동과 전율을 다시 느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도움이 된다.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처럼 먹거리 상품을 한 입씩 조금 맛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한 단어나 한 문장, 혹은 한 장면으로 마음이 동하여 그 작품 전체를 읽게 되는데, 이 책은 그런 목적으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선별된 200장면보다는 그 아래에 달린 석영중 교수의 글이 나에겐 더 압권이었다. 대가의 안목과 오랜 연구로 압축된 진한 농도의 통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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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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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한강 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새와 눈, 밤과 바다, 나무와 뼈, 꿈과 환상, 그리고 불꽃. 죽음과 추위와 고통은 물론 고립과 단절과 공포까지 느껴지는 섬뜩함을 한강만의 지극히 절제된 필체로 가까스로 눌러 담은 소설. 자동적으로 이 작품은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년이 온다’를 떠올리게 한다. 감히 깊이를 따질 수 없는 그 작품을 통해 우리는 1980년 광주 학살 현장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고, 지울 수 없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었으며, 과거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지, 국가와 권력의 힘이란 어떤 것인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이르기까지 우린 눈을 감고 마음을 담아 깊이 고찰할 수 있었다. 단순히 읽고 공감할 뿐 아니라 간접 체험까지 할 수 있었던 그 작품은 역사 시간에 배웠던 단편적인 교과서 지식, 신문과 뉴스 기사를 통해 접했던 많은 정보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해냈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이러한 의미들을 고려하다 보면, 그녀가 그 작품으로 부커 상을 받았던 경사마저도 작은 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작가 한강은 소설 맨 뒤에 위치한 ‘작가의 말’에 썼다. 둔한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작품의 행간이 읽히는 것 같았다. ‘소년이 온다’에서 결핍된 그 무엇, 그것이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그리고 쓰고 나서도 지속적인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나서 악몽도 사라지고 고질적인 편두통 증세도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나는 그 치유의 힘이 곧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소년이 온다’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사랑으로 매듭짓고 승화시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랑은 모든 고통과 죽음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빛이자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 빛과 생명이 한강 작가를 괴롭히던 망령들까지도 멀리 쫓아버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읽고 나면 숙연해지는 두 작품 사이에 한강이 겪어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자리한다. 그것을 떠올리면 나는 1980년 광주와 1947년부터 제주에서 권력의 횡포와 무자비한 폭력으로 죽어간 영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 학살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학살 (제주 4.3 사건)을 고발하고 상기시키는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강의 몸과 마음을 통과한 진액을 통해서. 한강만이 해낼 수 있는 글을 통해서. 어쩌면 한강 작가도 운명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5월 광주’에 이은 ‘제주 4.3’도 그녀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는 운명 같은 예감을.

‘소년이 온다’와 달리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사건 자체와 독자 사이의 거리가 다르다. ‘소년이 온다’는 소년 동호를 통해 우리를 1980년 5월 광주로 곧장 인도한다. 이어서 동호 친구 정대의 혼을 통해 살육당한 주검들이 고깃덩어리처럼 매장되는 비인간적인 현장으로 우릴 안내한다. 5.18이 지난 5년, 10년, 20년 뒤에도 그때의 상처가 작별하지 않고 몸과 영혼에 그대로 남아 있는 실태를 동호와 함께 도청에서 도우미로 일했던 은숙, 진수, 선주의 눈과 입을 통해 우리에게 나지막이 들려준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살아남아 자기의 손으로 직접 아들을 묻은 동호 엄마의 사투리 독백은 5장까지 간신히 참아왔던 모든 독자들의 마음을 후벼 파고 무너지게 만든다. 그만큼 ‘소년이 온다’는 독자를 현장으로 불러들여 사건과 독자 사이의 거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의 목소리로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기술된다. 대학 때 만난, 제주가 고향인 친구 인선의 목소리를 통해 경하는 제주 4.3 사건 현장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얼마 전 치매로 생을 마감했던 인선의 어머니다. 인선의 어머니는 1947년 제주 4.3 사건이 발발할 때 십 대의 나이로 현장에 있었다. 가족 대부분이 학살당한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독자들은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경하, 인선, 인선의 어머니,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가 수집했던 옛 자료들을 통해 여러 단계를 거쳐가며 듣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사건과 독자 사이의 거리가 먼 편이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두 학살의 역사를 기술한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4.3 제주’가 ‘5월 광주’보다 훨씬 더 이전의 일이라는 이유도 한몫했을 테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는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랑’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작품 속에서 그 ‘사랑’은 주로 인선의 어머니를 통해 가시화된다. 어릴 적 인선은 어머니가 혐오스러워 가출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건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고, 제대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 가끔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들려준 무수한 이야기들을 인선은 모두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몰래 모아둔 여러 자료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대대적인 자료 수집을 실행한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던 인선은 그것으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지만 전체의 일부만을 담았을 뿐이다. 사건의 전말을 담기에는 영화라는 도구가 너무 가벼웠던 게 아니었을까. 오직 유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관심을 가질 뿐 그 누구도 과거 제주에서 있었던 그 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법. 당시 권력이 묻어두었던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사건은 5월 광주의 전신 이기라도 하듯 실로 지옥과도 같은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학살당한 수만 명의 사람들. 수만 구의 뼈들. 그 혼들까지.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으로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 끔찍했던 역사의 한 복판에서 인선의 어머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외삼촌의 생존 여부, 차후엔 그의 유골의 위치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끝내 그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서 인선의 어머니는 정신줄을 놓게 되어 치매에 걸리게 된다. 폭력과 횡포,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인선의 어머니. 신형철의 추천사는 옳다. 그녀의 삶은 곧 고통을 넘어 죽음이라는 최후의 적이 존재함에도 결코 작별하지 않고 작별할 수 없고, 대신 연약하지만 영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러고 보니 ‘소년이 온다’ 6장을 이루며 독자들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던 동호 어머니의 독백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둘은 다르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동호 어머니의 독백은 독립적인 한 사건과 그 순간이 가져온 상실과 슬픔으로 읽는 게 더 적합할 것 같기 때문이다. 대신 인선 어머니의 이야기는 삶 전체로 대변된다. 수십 년 그녀가 칠순이 넘어 치매에 걸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고 고군분투했던 살아있는 삶. 우리는 그 삶을 사랑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작가 한강 역시 그걸 바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린 그 사랑으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현재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대표적으로 세월호 사건 역시 우리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6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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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감정의 반음을 노래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저,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고

사사로움에서 미묘함을 잡아내어 과장하지 않고 감정의 반음을 이토록 절묘하게 표현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에 요즈음 푹 빠졌다.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치밀한 섬세함과 탁월한 절제미가 내재되어 있는 그의 글은 미풍처럼 스며들어 전체를 오롯이 감싼다. 반음이 내는 그 미묘한 느낌을 이렇게 산문으로 나타낼 수 있다니! 그 정교함에 나는 매 작품마다 혀를 내두른다. 글쓰기 선생이 한 명 더 생겼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작이다. 1982년에 출간되었으니 그가 서른도 되기 전에 쓴 작품이다. 이 사실은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한다. 이십 대의 감성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이 데뷔작을 시작으로 황혼을 나지막이 노래하는 그의 세 작품이 1989년까지 완성된다. 그는 ‘파리 리뷰’라는 잡지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 세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해 “같은 책을 세 번 썼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 작품 모두 “한 개인이 불편한 기억과 어떻게 타협하는지” 그려 내려고 했고, 특히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와 ‘남아 있는 나날’ 둘 다에서 “직업적인 면에서 소모적인 삶을 산 한 인간을 탐구”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나는 ‘옮긴이의 말’에 나온 바로 위의 두  문장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 편을 모두 읽었다. 운명을 느낀 사람처럼. 그리고 이 데뷔작을 다 읽은 오늘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전율이 돋았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이 작품 역시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처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원자폭탄 투하 전후의 일본을 주 배경으로 한다. 화자인 에츠코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분신이라도 되는 듯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했다. 두 번의 결혼, 세 번의 이별. 작품 속 현재는 첫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두 번째 남편도 죽은 지 몇 년이 흐른 시점이다. 에츠코는 현재 혼자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 니키가 적적하게 영국 시골에서 홀로 살고 있는 에츠코를 방문하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둘째 딸이 머문 짧은 기간 동안 산책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면, 어떤 한 여자아이가 그네를 타는 모습을 계기로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기억은 영국으로 이주하기 이전, 첫 번째 결혼을 하고 첫째 딸을 임신하고 있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 속의 주인공은 이혼한 첫 번째 남편도 아니고, 시아버지도 아니며, 자기 자신도 아니다. 사치코라는 여자와 그녀의 딸인 마리코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웃이었던 그들과 함께 했던, 그리고 아파트 창을 통해 창백한 언덕 풍경을 홀로 내다보던, 짧지만 강렬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에츠코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전쟁으로 남편과 사별한 이후 사치코는 딸인 마리코를 위한 삶을 개척하려 했지만 그 노력은 표면적일 뿐, 결국엔 자기 자신의 삶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 당시 에츠코는 그런 사치코를 응원해주기는 했지만 공감할 수도 마음 깊이 이해할 수도 없었다. 마리코에게 가장 적당한 장소인 삼촌 댁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사치코, 마리코가 싫어하는, 그러나 새로운 아빠가 될 수도 있는 술주정뱅이 미군 프랭크를 따라 미국으로 가기로 선택하는 사치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과의 짧은 인연이 끝나고 정작 사치코의 계획을 실행한 건 그녀가 되었다. 단지 미국이 아닌 영국이었을 뿐 에츠코는 이혼 후 영국인이었던 두 번째 남편을 따라 첫째 딸 게이코가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행을 택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영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게이코는 영국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이 작품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사치코와 마리코와 함께 했던 과거 회상은 궁극적으로 에츠코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는 것이었던 셈이다. 아마도 그녀는 첫째 딸 게이코의 자살에서 말 못 할 죄책감을 평생 가슴에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엔 공감도 이해도 하지 못했던 사치코의 이기적인 삶을, 그 모순된 삶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가 보란 듯 살아왔던 에츠코. 그녀의 상념이 가득한 회상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먹먹하게 만든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말은 옳았다. 황혼의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은 과거의 불편한 기억을 회상하며 자신이 원하진 않았으나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삶을 합리화하는 나약한 한 인간의 나지막한 읊조림인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잔잔한 물결이 만드는 파동을 증폭시켜 그 안에 깃든 본질을 발려내고 전체를 조망하게 만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 아직 나에겐 그의 작품이 네 편 남아 있다. 아껴서 읽어야겠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5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75920555786044

2. 클라라와 태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15671625144252

3. 나를 보내지 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79150188796395

4.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785763058135105

5. 창백한 언덕 풍경: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2072691797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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