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5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가 주는 뜻밖의 위로


가즈오 이시구로 저,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을 읽고

몇 주째 지속되는 원인 불명의 불안 때문이었을까. 마침 읽고 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내 내면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운명을 믿진 않지만 운명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공간을 향유하는 공감각적인 독서는 종종 독자를 과도한 자기 주관으로 이끌곤 한다.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그로 인해 조용히 위로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주관적인 해석을 부정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위로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니까. 마치 운명처럼 알 수 없는 이유와 이해하기 힘든 과정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니까.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감정선이 있다면 불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겐 불안의 시기를 함께 했던 고마운 친구로 기억될 이 작품은 중간중간 전지적 작가 시점을 병행하는 듯한 부분도 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술된다. 중년 남성인 주인공 라이더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피아니스트다. 800 페이지를 가뿐히 넘기는 분량을 가득 메운 자잘한 모든 이야기는 유럽의 어느 이름 모를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현재 그는 여느 유명한 음악인들처럼 세계를 돌며 연주 일정을 소화 중이다. 

표면적으로는 목요일 밤에 있을 공연 중 피아노 연주와 짧은 연설이 그가 이 도시를 방문한 주된 이유다. 소설은 그가 며칠간 묵을 호텔에 발을 디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유명세에 걸맞게 누군가의 환대를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그 상황을 묘사한다. “나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심지어 프런트 직원마저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택시 운전사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라이더만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마저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장면인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부터 이러한 어긋남에 대한 묘사로 할애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이 작품에 흐르는 전체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압축된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어긋남’ 혹은 ‘미끄러짐’ 정도가 아닐까. 특히, 카프카의 ‘성’을 읽어본 독자라면 내가 그랬듯 이 작품의 주인공 라이더와 ‘성’의 주인공 측량기사 K가 중첩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K는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소설 끝까지 성 주위를 맴돈다. 마찬가지로 라이더 역시 일정에 있는 무언가를 실행하려고 할 때마다 그 도시에 거주하는 여러 사람들의 간섭과 사사로운 부탁 때문에 일이 계속 연착되고, 때론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일에 휘말리기도 하다가, 결국엔 자신이 이 도시로 온 주된 이유인 피아노 연주와 연설을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직면하게 된다. 닿으려고 하지만 닿을 수 없고, 계속해서 어긋나고 미끄러지기만 하는, 어찌 보면 마치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 같은 며칠 간의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이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는 이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중요한 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남는다.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의도적으로 주인공 라이더의 과거 기억 속에 있는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과 상황의 파편들을 이 도시의 사람과 사물을 통해 형상화해 놓는다. 라이더를 건망증이 심한 인물 혹은 단편적인 기억 상실증에 걸린 인물로 해석해도 무방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이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를 철학적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할 입장이다. 나는 그런 입장보다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나 사물들이 주인공의 기억 혹은 과거의 상처와 맞물려 망령처럼 되살아나 주인공을 괴롭히고, 주인공은 그 과정을 불완전하게 처리하며 변화를 맞이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입장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명확한 해설을 내놓지 않지만, 처음으로 만난 짐꾼이 알고 보니 장인어른이고, 그 짐꾼의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려 만나게 된 여자와 소년이 알고 보니 아내와 아들이며, 호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자니 갑자기 그 방이 자신이 어릴 적에 살던 집 안의 방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나, 주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이 과거에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는 사실 등, 자칫 어느 한 기억 상실증 환자의 섬뜩한 단편적인 이야기로 해석하는 입장을 고수하다 보면 이 작품은 3류 소설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괴기스러운 실험작 정도의 작품으로 폄하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배경들을 주인공 라이더의 기억과 맞물린 비유나 상징으로 보고 그에 따라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을 가한다면 비록 관념적이긴 하지만 오히려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줄어들게 된다. 물론 가즈오 이시구로가 자신의 철학을 문학적 장치인 소설로 구현하려고 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앞에 언급한 두 입장 중 어느 하나만 옳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독자인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카프카적인 어긋남과 미끄러짐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다. 답답하기도 하고 묘연하기도 하며 다분히 환상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제목과는 상관없이 적잖이 위로가 된 작품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황혼을 노래한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에서 느꼈던 그의 고유한 필체를 이 작품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전 작품을 읽기로 작정했던 이유는 그 필체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목적에서 어긋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어긋남 때문에 나는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매력을 느낀 그의 필체는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의 최근 작품인 ‘클라라와 태양’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도 공히 다뤄지고 있는 소재는 바로 기억이다. 황혼 3부작의 주된 소재가 기억이라고 할 수 있고, 전혀 다른 필체로 쓰여진 이 작품에서조차 기억이 중심 소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기억을 요리조리 요리할 수 있는 작가로 기억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하나의 필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배울 게 정말 많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제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이 몇 안 남았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프게 느껴진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7.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80748465303230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86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과 죽음, 신과 인간, 그 깊음에 대하여


엔도 슈사쿠 저, ‘깊은 강’을 읽고

이 작품의 저자 엔도 슈사쿠는 ‘침묵’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침묵’에서 말하고자 했던 침묵의 의미는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독되었다. 작품 ‘침묵’은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오래된 난제 중 하나인 신정론을 떠올리게 하는데, 많은 독자들에게 침묵은 곧 ‘하나님의 침묵’으로써, 이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고통 앞에서도 선뜻 구원의 손길을 베풀지 않으시고 끝까지 침묵을 고수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로써 오해되었다. 아무리 작품이 저자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고, 독자는 제2의 저자라고 하지만, 독자에게 저자의 의도가 완전히 반대로 해석된다면 그건 실로 난감한 상황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오해를 바로 잡고자 ‘침묵’ 출간 26년 후인 1992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그 작품에 대한 해제로써 ‘침묵의 소리’라는 책을 펴낸다. 거기서 그는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언급한다. 작품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챕터라고 할 수 있는 ‘기리시단 (Christian의 일본어 음역)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에게는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히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본의 경우에는 아예 누락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챕터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믿음이 강한 (?) 자만이 아닌,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아 겉으로 보기엔 배교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소위 믿음이 약한 (?) 자들의 신앙에 대한 저자 엔도 슈사쿠의 숨은 메시지가 드러난다. 

후미에를 밟았던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했고 포교 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간교하고 교활한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던져주었던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써 로드리고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챕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이 간직했던 (혹은 회복되었던)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셈이다. 그러므로 작품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의 의도는 ‘끝까지 침묵하시는 매정하고 야속한 하나님’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침묵의 소리’라는 표현의 의미였다.

엔도 슈사쿠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와는 달리 일본의 문화와 정신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일본인들이 (혹은 조금 더 넓게 본다면 동양인들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시에 정통 기독교 (혹은 C. S. 루이스의 표현대로라면 ‘순전한 기독교’)의 정신 혹은 본질을 견지할 수 있는 기독교를 원했다. 이성, 논리, 합리에 천착한 교리 위주의 서양식 관점으로 해석된 기독교는 일본인 엔도 슈사쿠가 보기엔 ‘몸에 맞지 않는 양복’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과 고민은 아마도 엔도의 평생 숙제였던 것 같다. 1923년생이었던 그는 1966년에 ‘침묵’을 출간하고,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94년에 마지막 장편소설이었던 이 작품 ‘깊은 강’에서도 그의 그러한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심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엔 주요 인물 총 다섯 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남남이며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인도 단체 여행을 계기로 우연히 모두 만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다섯 명이 모두 저자 엔도 슈사쿠의 부분적인 분신이라는 점이다. 엔도가 경험했던 과거의 편린들이 각 인물들의 과거 흔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사람이라면 저마다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이들 역시 그랬다. 함부로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것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에 의해 영향받고 지배받는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과거 이야기들. 살다 보면 어떤 예기치 못한 시공간이 불현듯 찾아와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했던 그 이야기들을 꺼내놓게 될 때가 있다. 이들 역시 그랬다. ‘깊은 강’, 즉 인도에 위치한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에 흐르는 갠지스 강 앞에서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던 깊은 이야기들이 불거진다. 그 순간은 곧 자기 내면의 정직한 모습을 대면하는 순간이었고, 자기 자신이 조절할 수 없고 헤어릴 수 없는 그 무엇과 접촉하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깊은 강’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인간의 깊음과 그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의 깊음과 대면하는 곳.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엔도 슈사쿠의 깊은 고민의 열매로 직결된다. 특히 다섯 명 중 오쓰의 삶의 모습, 그의 말과 믿음과 행동에서 엔도의 메시지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오쓰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숙맥이라 오타쿠처럼 친구도 없고 홀로 진지한 철학, 신학적인 문제 (어쩌면 이는 우리 모두가 고민하는 삶과 죽음, 즉 인생의 문제로 해석 가능할 것이다)로 고민에 빠져 있다. 다섯 명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미쓰코는 주위 친구들에게 반쯤은 떠밀려 오쓰로 하여금 일탈을 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미쓰코에게 버림받게 된 오쓰는 그것을 계기로 신부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미쓰코는 오쓰를 신으로부터 훔치고 싶어 했고, 잠깐 성공한 듯싶었으나, 오히려 결국엔 신에게 더 가까이 가게 만든 결과를 내고 만 것이었다. 

미쓰코는 오쓰를 골려 주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런 것들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남자들과 동침도 하고 몸을 망가뜨려가며 일탈을 감행하면서도 늘 마음 한 편에서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미쓰코로 하여금 대학을 졸업하고 세월이 흘러서도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오쓰를 신혼여행 중 불쑥 찾아가게 만든다. 미쓰코에게 오쓰는 자신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나 무언가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미쓰코는 이혼하고 나서도 자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프랑스를 떠나 인도 바라나시에서 거주한다는 오쓰를 찾아 나선다. 

오쓰는 프랑스까지 가서 신부가 되고자 애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논리, 이성,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점철된 서양식 기독교가 이질적으로 느껴져 도저히 양심 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유일신 사상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모든 것 안에도, 심지어 유대교도에게도 불교도에게도 힌두교도에게도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다. 가톨릭 교회는 오쓰를 당연히 이단적인 사상으로 물든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고, 그 결과 그에게 신부 자격을 부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쓰는 자신의 신앙관을 버리지 않고 신의 이름을 사랑과 동일하게 정의하면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 밖에 속하는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주류 교회 안으로 편입되지 못했지만, 어쩌면 오쓰야말로 교회 안에서 엄숙하게 무게를 잡고 경건한 척하는 성직자들보다 예수를 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쉽게 눈치챌 수 있듯이 저자 엔도 슈사쿠는 오쓰의 이러한 모습에 자신을 신앙관을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종착지이자 저자 엔도 슈사쿠의 메시지가 농축된 갠지스 강은 삶과 죽음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진 곳이다. 한쪽에서는 성스러운 그 강에 온몸을 담그며 입을 헹구고 나와 브라만 승려에게 축복을 구한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곳으로 죽으러 오는 많은 사람들의 시체나 화장된 재가 뿌려진다. 강에 둥둥 떠다니는 죽음과 새로운 생을 기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역설적인 장소가 바로 갠지스 강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작품의 제목 ‘깊은 강’의 의미도 곧 삶과 죽음을 모두 아우르는 가장 깊은 곳,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자칫 오쓰의 신앙관이 범신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한 것 같다. 저자는 오쓰로 하여금 직접 모든 것에도 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으로 해석해야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범신론은 모든 것이 신이라는 의미인 반면, 범재신론은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므로 그 모든 것 안에는 신이 내재하며, 모든 것의 여집합도 신 안에 존재하므로 신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오쓰의 여러 대사와 행동들을 종합해 보면, 그의 입장은 범신론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범재신론적인 신앙관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는 서양식 기독교관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신론과 대비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에 오쓰는 주류 교회 안으로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 엔도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서양 기독교의 편협함을 넌지시 짚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의 의미는 범재신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세상 모든 걸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피조물 안에 거한다는 생각,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들을 초월하시며 존재하신다는 생각. 과연 이런 생각이 정통 기독교에 반하는 것일까. 오쓰가 교회 안으로 수용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막연하게 ‘모든 것’ 혹은 ‘세상’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단지 타 종교인 ‘불교’나 ‘힌두교’라는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작품 속에는 뚜렷한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봄직한 주제 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덧붙여, 한 가지 꼭 일러두고 싶은 점은 이 작품이 종교적인 색채만을 띠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도입부부터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목을 집중할 수밖에 없을 간결하고 서정적이며 애잔함을 불러일으키는 필체로 쓰여있으며, 이런 필체는 소설 끝까지 지속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던지고는 있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써졌다고 봐야 한다. 신앙 서적도 신학 서적도 아닌 문학 서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자가 어떻게 소설을 구성했는지, 어떻게 사건과 상황을 묘사하고, 어떻게 서사를 이어가는지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누구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깊은 이야기는 종교를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가 아닐까. 빨려 들어가는 소설, 생각을 깊게 해 볼 수 있는 소설이 읽고 싶은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엔도 슈사쿠 읽기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7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자의 신앙공부 - 생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과 신앙 이야기
김영웅 지음, 신현욱 그림 / 선율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직업이 과학자인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경험과 사유를 풀어놓은 에세이입니다. 전문 과학서도, 전문 신학서도 아닙니다. 이 책은 과학자이면서도 신앙인일 수 있다는 사실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생물학자의 눈을 통해 본 신앙과 삶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닮은 듯 다른 우리 - 유전자, 센트럴 도그마, 인간다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김영웅 지음 / 선율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입니다. 그러니 생물학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전혀 몰라도 쉽고 재밌게 읽으실 수 있답니다. 일독을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의 산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17
토마스 만 지음, 윤순식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과 죽음과 삶의 역설

토마스 만 저, ‘마의 산’을 읽고

최근 입사 시험을 마친 한스 카스토르프는 고향인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스위스 고산지대에 위치한 도시 그라우뵌덴 다보스 플라츠로 향한다. 국제 요양원 ‘베르크호프’에서 폐병으로 요양 중인 사촌 요아힘 침센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그렇잖아도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한스는 마침 전지 요양을 하고 오라는 하이데킨트 박사의 조언을 마음에 두고 있던 차였다. 단 3주 예정이었다. 기분 전환도 하고 요양도 하고 오랜만에 사촌도 만나고 돌아와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3주라는 기간은 한스에게 아주 적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3주라는 시간은 마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점점 늘어나 7년이 된다. 당시 23세였던 한스는 30세가 되어서야 ‘마의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것도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1차 세계대전 발발 때문에.

약 1,50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은 말하자면 한스 카스토르프라는, 호감이 가지만 매우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한 젊은이가  뜻하지 않게 경험한 요양원 생활 이야기이자, 3주가 7년으로 늘어났던 ‘마의 산’ 위의 세상 이야기다. 머리말에서도, 소설의 도입부에서도, 그리고 소설 전체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시간에 대한 언급을 한다. 마치 시간이 이 소설을 집필한 중요한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머리말에서부터 토마스 만은 ‘시간이라는 비밀스러운 요소의 의문성과 독특한 이중성’에 대해 언급을 하고, 1장 ‘도착’ 꼭지에서는 다보스도르프 역에 도착한 한스를 마중 나온 요아힘으로 하여금 “3주란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 위의 세상에선 3주란 하루와 같은 거야. 사람들의 개념도 변해 버려”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다. 그 이후로도 소설 전체에 걸쳐 군데군데 마의 산 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기술하며 저자는 시간에 대한 언급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 작품의 전체 구성을 보면, 한스 카스토르프가 보낸 7년 중 첫 1년이 전체 분량의 약 삼 분의 이 정도를 차지하는데, 이것만 봐도 저자 토마스 만이 이 소설을 쓰면서 시간의 상대성, 즉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부각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제목 ‘마의 산’이 가진 마력이 어쩌면 시간에 관계된, 이를테면 시간을 다르게 지배하는 어떤 신비한 힘을 상징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간의 상대성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들여다보면, 작품 속 세상은 필연적으로 산 아래의 세상과 산 위의 세상으로 구분된다. 이 이분법적인 구분은 시간에 대한 상대성만이 아닌 소설 전반에 걸친 여러 상징적인 의미와 중첩된다. 이 감상문은 이러한 상징적인 구분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전개해나갈 것이다.

먼저 시간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산 위의 세상은 산 아래의 세상과 달리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공간이다. 특히 저자는 4장에 가서 ‘시간 감각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는 독립적인 꼭지를 등장시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는데, 누구나 시간에 대해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하고 있는 생각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어 독자들은 큰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고 소화할 수 있다. 가령, 정해진 생활을 오래 계속할 때 느껴지는 무기력과 무감각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지루함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특히 지루함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 부분은 독자들이 잠시 멈춰서 책을 덮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거리가 될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린 보통 내용이 흥미롭고 참신한 경우에는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반면, 단조롭고 공허한 경우에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끼는데, 저자는 이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단조롭고 공허한 것들이 짧은 시간 동안 지속되면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면 오히려 그 긴 시간이 찰나처럼 혹은 무처럼 혹은 한 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혹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반복된 단조로움의 힘이랄까? 이는 산 아래 세상에 속했던 한스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길게 잡은 3주라는 방문 기간이 산 위의 세상에 속한 요아힘에겐 하루 혹은 아무것도 아닌 아주 짧은 시간으로 여겨지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반복되고 동일한 일상이 가까이서 보면 지루하게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단 한 점으로 보일 만큼 짧디 짧은 시간으로 비칠 수 있다는 얘기다. 단조로움과 지루함이 가지는 이러한 상반된 시간적 속성은 우리가 기분 전환과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일상에서 잠시 손을 놓고 휴가나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잘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는 3주가 7년이 되어버린 한스의 요양원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요양원 생활에 적응하느라 보낸 1년이란 기간이 소설 전체의 삼 분의 이를 차지한다는 점, 따라서 나머지 6년이라는 물리적으로 긴 시간이 소설의 삼 분의 일만을 차지한다는 점 역시 토마스 만의 시간에 대한 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익숙해지기 위해 적응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며, 익숙해지고 난 이후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빨리 간다는 사실을 소설 구성에도 그대로 적용한 셈이 될 테니까 말이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것, 무언가에 적응한다는 것, 그에 따른 우리들의 시간에 대한 상이한 감각. 우리의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이러한 생각을 떠남과 정착으로 구성된 우리네 인생으로 확장시켜 생각해본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로 살펴볼 상징적 대비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다. 산 아래의 세상은 우리 대부분이 속해 있는 세상으로써 삶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산 위의 세상은 공기도 희박하고 세균 수도 적고 사람 수도 적지만 요양원의 존재가 증명하듯 아픈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은 세상으로써 죽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인 세템브리니가 한스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산 위를 떠나 산 아래로 다시 내려가라고 강력하게 제안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삶과 죽음의 대비를 엿볼 수 있다. 세템브리니는 이탈리아인으로서 인문주의자이자 문필가다. 그 역시 폐병에 걸려 벌써 수년 간 요양 생활 중이다.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프리메이슨 단원이기도 한 세템브리니는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도 그려지는데, 그는 그 이후로도 한스에게 수 차례에 걸쳐 요양원을 당장 떠날 것을 제안한다. 그 이유는, 산 위의 세상은 죽음의 공간, 진흙탕 구덩이, 마녀 키르케의 섬이므로 오디세우스가 아닌 이상 산 위에서 무사히 지낼 수 없을 거라고, 머지않아 이성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돼지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순진한 한스를 일깨워주길 자처하는 교육자적인 마인드로써 세템브리니는 더 늦기 전에 한스가 자발적으로 죽음의 세상을 떠나 삶의 세상으로 내려가길 바랐던 것이다. 

산 위의 세상이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는 장면은 세템브리니 한 사람의 철학에서만 드러나진 않는다. 이런 상징은 소설 초반부터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먼저 거의 항상 만원인 요양원에 들어오기 위해 대기 줄이 언제나 길다는 점은 곧 요양원에서 죽어나가는 사람 수가 그만큼 많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요아힘은 우스갯소리로 사람이 죽으면 요양원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그 시체를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썰매를 태워 산 아래로 내려보낸다는 말까치 서슴지 않고 한다. 게다가 한스가 처음에 배정받은 방은 공교롭게도 바로 이틀 전 미국 여자가 죽음을 맞이했던 방이었다. 죽음의 얼굴은 요양원 생활을 하는 여러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드러난다. 폐렴으로 3년째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차도가 없어 차라리 죽음을 원한다고 자조 섞인 말을 내뱉는 알빈 씨의 존재는 물론, 28호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후유스 소녀가 마지막으로 신부 앞에서 지른 비명 소리, 처음엔 두 아들 중 한 아들만 폐병에 걸렸지만 나중엔 나머지 하나마저 결국 폐병에 걸려 버려 좌절한 나머지 매일 어두운 옷을 입고 혼자 산책을 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둘 다입니다, 둘 다라니까요”라고 하소연을 하는 멕시코 여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니 실제로 주위에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그들이 쓰던 방이 비워지고 깨끗이 소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 선한 긍휼의 마음이 들어 죽음을 코앞에 둔 위독한 환자 방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위로를 건네고 또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한스 카스토르프, 그리고 나중엔 사촌 요아힘마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장면까지, 이처럼 소설 전체에 걸쳐 죽음에 대한 직간접적인 메시지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마의 산’ 위에 위치한 베르크호프 요양원은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는 동시에 온통 죽음으로 얼룩진 공간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져 빨리 흐르는 시간, 그리고 어두운 죽음의 세력이 실제로 조용히 힘을 떨치고 있는 공간. 과연 이 둘 간의 상관관계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산 아래의 세상에선 어떻게 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은 보통 읽기 지루한 구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작품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구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만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나로선 처음 읽는 토마스 만이라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물론 그 이유도 있을 테지만 그것보다는 전체 분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철학, 인문학적인 논쟁이 수십 페이지에 걸쳐 여러 차례 지속되는 장면에서 나는 여러 번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만연체의 번역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독자인 나의 부족한 철학, 인문학적인 소양이 이 작품을 깊이 읽어내는 데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 작품은 철학, 인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하고 역사적인 지식과 상식까지 두루 갖춘 독자가 읽는다면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나에게도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구간이 여러 번 등장했는데, 공교롭게도 한스 카스토르프가 클라브디아 쇼샤라는 러시아 여자에게 접근하는 과정,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도 그중 하나였다. 물론 3류 소설처럼 말초적이고 단순한 연애 사건을 다루는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스가 쇼샤 부인에게 처음 가졌던 감정은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예의에 어긋나게 문을 쾅 닫는 습관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매 식사 시간마다 천연덕스럽게 반복하는 유일한 여자가 바로 클라브디아 쇼샤였기 때문이다. 한스는 본능적으로 불쾌감과 혐오를 느꼈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언제나 놀랍고 또 예상할 수 없는 법. 한스는 쇼샤 부인의 외모로부터 어린 시절 자신이 동경했던 프리비슬라프 히페라는 소년에 대한 추억을 상기하게 되고 동질감을 느낀 나머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게 언제 이성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고 말하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한스가 쇼샤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모든 인간에게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마력의 시공간을 가진 ‘마의 산’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이 과정마저도 마법에 걸려 벌어지는 일처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템브리니로 대변되는 계몽과 이성에 반하는 쇼샤 부인은 감각적이고 본능적이며 개인적인 감정에 충실한 사랑을 대변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게다가 한스 카스토르프의 요양원 생활이 3주로 끝나지 않고 7년까지 연장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쇼샤 부인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성을 비웃고 조롱하는 동시에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것에 이끌리고야 마는 인간의 한계랄까 숙명이랄까 하는 것에 대한 저자 토마스 만의 숨은 메시지를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세템브리니와 쇼샤 부인의 대비를 이성과 감각으로 본다면,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대비는 웅변적인 인문주의와 문맹적인 야만성, 또는 친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 또는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자와 육체란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며 정신과 대립된다고 보는 이원론자, 또는 합리성과 건강을 중요시하는 성향과 병과 죽음을 찬양하는 성향 등으로 볼 수 있다. 나프타는 요양원을 나가 근처에서 하숙을 하게 된 세템브리니와 같은 집 다른 층에 사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세템브리니의 천적으로서 모든 논쟁에서 반대 입장에 서게 되는 또 한 사람의 지식인이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논쟁은 이 작품 전체를 읽어내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인데, 어지간한 철학, 인문학, 역사적인 지식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아무도 그 부분을 완전히 이해하고 책장을 넘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둘 간의 논쟁은 치열하고 심도 있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논쟁의 내용보다 중요한 건 그 논쟁에 참여하여 귀를 기울이며 듣고 가끔 참여하기도 하는 우리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입장과 변화이다. 세템브리니는 이성과 합리를 무자비하게 쳐부수는 나프타의 궤변으로부터 한스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쓴다. 모든 면에서 반대의 의견을 개진하는 나프타는 세템브리니에겐 천적인 동시에 악마의 화신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기를 향한 세템브리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긴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한스는 나프타와 세템브리니의 양 극단을 모두 옹호하지는 않으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각각의 단점과 결점을 파악하고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취할 것은 취하고 취하지 않을 것은 취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 저자 토마스 만의 핵심 메시지가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는 6장 ‘눈’ 꼭지에서 한스의 깨달음은 극에 달한다.

요양원을 떠나 근처에서 하숙을 하게 된 세템브리니, 사육제 기간 중 한스로부터 덥석 사랑 고백을 받은 다음 날 요양원을 떠나버린 쇼샤 부인, 그리고 완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로 복귀하여 남은 생을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산을 내려간 요아힘. 한스는 이 세 사람의 부재로 외로움을 느끼게 되자 요양원에서는 건강 상 금지된 스키를 몰래 배우고 타게 된다. 많은 연습 끝에 어느덧 자유로이 활주를 할 수 있게 된 어느 날, 한스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눈 덮인 높고 깊은 산속으로 혼자서 스키를 타고 오르고 질주한다. 가까웠던 세 사람이 모두 떠난 자리를 가득 채운 외로움은 그에게서 혼자만의 시간마저도 빼앗았다. 스키를 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날, 한스는 고독한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정적,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깊은 세계, 완전히 낯선 감정과 지극히 위험한 감정이 교차하는 세계, 완전무결한 자연이 주는 원초적인 공포를 느끼면서도 한스는 더 깊은 곳을 빠져들었다. 그러다 방향 감각을 잃고 길을 잃게 되는 한스. 생사를 오가며 간신히 어떤 고립된 헛간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다가 비몽사몽 간에 꿈을 꾸게 된다. 그 꿈은 한스에게 깊은 깨달음을 준다. 마의 산에 올라온 지 1년 정도 되는 지난 시절 동안 그를 스쳐 지나갔던 주요한 사람들과 사상들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정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세템브리니와 나프타가 나누는 논쟁으로부터 해방되는 기회를 맞이한다. 죽음과 삶, 병과 건강, 정신과 자연, 이런 것들이 마치 모순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논쟁하는 두 사람에게 동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 것들은 모순되는 게 아니었다. 죽음의 모험은 삶 속에 포함되며, 그런 모험이 없는 삶이라면 이미 삶이 아닐 거라는 결론에 이른다. 고귀함에 대해서도 인간만이 고귀한 것이며, 서로 대립된 생각 자체가 고귀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 대립보다 더 고귀하고, 인간이 죽음보다 더 고귀하며, 인간이 삶보다 더 고귀한 존재라는 결론을 맺게 된다. 한스의 깨달음은 다음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한스는 생사를 오가는 한가운데에서, 눈 덮인 높고 깊은 마의 산 위에서, 시간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온통 조용한 죽음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었다.

한스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세템브리니와 나프타 말고도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인 7장에서야 등장하는 민헤어 페퍼코른이라는 네덜란드인을 꼽을 수 있다. 페퍼코른은 잠시 요양원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쇼샤 부인과 어느 날 함께 불쑥 찾아온 사람인데, 그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토마스 만은 이 인물을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물로 그려 놓는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가 사상과 논리에서 한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면, 페퍼코른은 삶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군중을 휘어잡을 줄 아는 몸짓과 손짓과 표정을 자연스럽게 동원하여 사람들을 압도했다. 페퍼코른 앞에서 두 교육자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이 지껄이기만 하는 난쟁이 수다쟁이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고, 두 논적의 불꽃 튀는 논쟁은 페퍼코른 앞에서 불가사의하게도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페퍼코른은 지배자의 영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역자는 페퍼코른을 ‘스케일이 큰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한스는 자기가 사랑했던 쇼샤 부인을 독차지해버린 페퍼코른을 증오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가 가진 고유한 스케일에 매료되고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스는 마음속으로는 두 교육자보다 페퍼코른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디오니소스적인 니체의 생의 철학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한 인물 페퍼코른을 소설 속에서 저자가 등장시킨 순서가 흥미롭다. 이 작품을 한스의 성장과 변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가장 핵심 된 부분은 아무래도 앞에서 언급한 6장 ‘눈’ 꼭지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 전체의 약 삼 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게끔 하면서 페퍼코른을 주요 인물로 삼는 7장을 마지막 장으로 삼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이는 약 2년 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스따브로긴의 고백’으로 알려진 ‘찌혼의 암자에서’ 챕터를 읽을 때를 불현듯 생각나게 하는데, 그 이유는 소설이 마치 두 축으로써 애초에 계획했던 소설과 나중에 수정을 가한 소설이 혼재하는 듯한 인상을 ‘마의 산’ 7장을 읽으면서 받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악령’의 주인공은 스따브로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나중에 표뜨르를 주인공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난 이후 전면 개정을 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토마스 만이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소요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토마스 만 역시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에서 가했던 개정 혹은 수정을 ‘마의 산’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원래 의도였든 나중에 수정을 가했든 상관없이 토마스 만이 페퍼코른을 ‘눈’ 꼭지 다음에 등장시킨 이유는 아무래도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를 통해 얻게 된 한스의 깨달음이 완전하지 않으며 오히려 쉬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은근히 보여주기 위했던 게 아닌가 싶다. 정신적인 깨달음만으로는 진정한 삶을 살아내는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깨달음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스는 페퍼코른을 만나고 나서 그의 큰 ‘스케일’에 압도되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멍청함과 영리함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의미로서의 ‘인물’이고, 이 불가사의함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멍청함과 영리함보다 더 긍정적인, 최고로 긍정적인, 삶 그 자체처럼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가치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삶의 가치이며, 진지하게 따져 볼 만한 가치입니다.” 즉, 한스는 논리와 이성으로 점철된 깨달음도 결핍을 가지며, 그 결핍은 삶에 대한 긍정, 즉 디오니소스적인 인물 페퍼코른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채워질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면에서 보면 토마스 만은 한스를 통해 인간으로서 온전한 깨달음은 이성과 논리를 양 날개로 삼은 정신적인 깨달음과 함께 삶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생의 철학을 겸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페퍼코른의 뒤늦은 등장으로 인한 난점을 이런 식의 해석으로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또다시 막다른 골목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온전함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은 한스가 결국 향하는 곳이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상징되는 마의 산 위의 세상에서 내려와 결국 한스가 나아간 곳이 삶이 아닌 죽음의 현장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아마도 저자 토마스 만의 숨은 의도를 잘 드러내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해석에서 ‘마의 산’은 끝내 죽음이라는 이미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한스에게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준 산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의 철학을 몸소 보여준 페퍼코른은 자살로 스스로의 생을 마감했고, 나프타는 세템브리니와의 결투 끝에 결국 자신의 머리를 쏘며 죽고 말았으며, 그보다 일찍 폐병으로 먼저 죽은 사촌 요아힘, 페퍼코른의 자살 사건 이후 떠나버린 쇼샤 부인까지, ‘마의 산’ 위의 세상은 한스의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이렇게 온통 죽음으로 얼룩져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죽음을 맞이했던 1차 세계대전 발발과 맞물리는 소설의 결말. 토마스 만은 왜 한스에게 이러한 결말을 맞이하게 만들었을까. 과연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러한 역설로 그는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의 산’의 의미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곱씹어보면서 이런저런 해석을 가해보는 건 이 작품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책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들이 은근히 기대가 된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7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