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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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프리모 레비 저,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2차 세계대전’ 하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우슈비츠’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단어는 반지성적인 우생학에 기반하여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신봉했던 ‘히틀러’나 ‘나치’가 아닌, 그들에 의해 실행된 유대인 대학살, 이른바 ‘홀로 코스트’이다. 악의 발현, 아니 악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여전히 충분하지 못한 것 같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아닌, 그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희생당한 유대인들이 왜 나에겐 먼저 떠오르는 것일까. 유럽 각지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은 하루아침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보다 못한 고깃덩어리로 전락했고, 엄청난 수가 도살되듯 강제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나에게 아우슈비츠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피의 심연이다. 또한, 그곳은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가장 명징하게 보여준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그 아유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저자는 이를 ‘운이 좋아서’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이 책의 첫 문장 첫 단어로 등장한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의 귀중한 수기인 셈이다. 허구는 하나도 없다. 모두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다. 역사책으로 배우는 아유슈비츠 수용소의 역사적 존재와 기능을 거뜬히 넘어서 우린 죽음의 집, 비인간화의 집, 즉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실상을 이 책을 통해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저자의 절제된 필체는 애써 참았던 울분과 끝이 보이지 않는 허망함과 먹먹함에 끝내 불을 지르고야 만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깊은 절망이 덤덤하게 기술되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될 때 느껴지는 초탈함일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문자화 되면서 감정이 소진되어 버린 것일까. 아우슈비츠가 어떤 곳인지 이미 알고 있는 독자에겐 그 끔찍한 실상을 무신경한 것처럼 써 내려간 부분이 오히려 날카로운 비수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자신이 경험했던 실제 감옥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지만, 그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의 감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비록 도스토옙스키는 억울한 이유로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으나, 감옥은 어디까지나 감옥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감옥은 범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새 터전이다. 그러나 수용소는 범죄자이든 아니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 철저히 그 수용소를 짓고 사람들을 가두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다루는 인간 말종들의 적이라면 누구나 (특히 유대인들) 강제로 수용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혐오와 차별과 배제가 권력이라는 갑옷을 입고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르는 장소가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산둥 수용소’의 저자이자 저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제자였던 랭던 길키도 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거주할 때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수용소로 보내졌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산둥 수용소’ 작품 역시 그의 수용소 생활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수기인 셈이다. 그 작품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책의 부제가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라는 것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기인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와 비교하면 그 타격이 약화되는 감이 없지 않다. 철학과 신학에 기반한 엘리트 학자의 눈에 비친 수용소 사람들에 대한 분석이 위주가 되었다는 건 저자 랭던 길키에게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정신이 남아있었다는 반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의 경험은 보다 직설적이고 일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그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책의 제목이 ‘이것이 인간인가’이지만, 이성과 논리보다는 훨씬 더 깊고 인간의 중심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건드리며 독자 눈과 마음을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이 어떤 좁은 장소에 밀집되고 격리되었을 때, 그래서 장기간 외부와 차단되었을 때, 너무나 당연하던 의식주 문제가 죽고 사는 문제가 되었을 때, 과연 인간이 어떤 존재로 바뀔 수 있는지는 실화를 기반한 위의 세 작품 말고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100% 허구이지만 인간의 본성을 깊게 파고들어 그 민낯을 생생하게 까발린 역할은 위의 세 작품과 비슷한 정도로 톡톡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는 허구일 뿐이다. 

그렇다. 프리모 레비의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는 실화이며, 운 좋게 죽다 살아남은 자의 생생한 수기이며, 무엇보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간의 잔인함이 극대화된 장소로부터의 회고록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비록 살아남아 이 책을 쓰고 40년에 걸쳐 증언을 해왔지만, 그의 불안과 절망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깊어졌던 것 같다. 1919년생인 그가 68세가 되던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위에 언급한,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그 어떤 책들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까닭은. 살아남은 자의 자살. 한참 생각에 잠겼던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다. 그가 말하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비단 히틀러와 나치 세력들만을 향하지 않게 된다. 그가 자살을 선택했던 이유. 비인간화의 극치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냈던 생존자가 최후로 선택한 행동이 스스로 소중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니! 그리고 나는 히틀러와 나치를 넘어 프리모 레비까지 포함하여, 오늘 접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더 큰 범주에서 묻게 된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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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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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해도, 보지 못해도

한강 저, ‘희랍어 시간’을 읽고

불연속성, 불친절함,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의식 저 아래에서 퍼 올린 조각난 단상들,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드는 상처의 깊은 흔적과 그 기억의 파편들, 그것들을 활자로 대면하면서 생경하게 느껴지는 강한 이질감,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거부할 수 없는 불편함.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다. 때론 숨이 막혀서, 때론 내 심장이 귓가에서 하도 쿵쾅대서 잠시라도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어둡고 무겁다. 공간으로 말하자면 인적이 드문 시골, 시간으로 말하자면, 곧 해가 뜰 새벽 다섯 시 정도가 아니라 가장 어둡고 가장 적막한 새벽 두세 시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간 동이 트겠지만 당분간은 도저히 아무런 희망의 씨앗도 발견할 수 없는 시간. 밤이지만 최은영이 표현한 ‘밝은 밤’이 아닌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나는 감싸 지지 않을 슬픔과 치유되지 않을 상처로 어두운 절망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또한, 그녀의 작품들은 툭툭 끊어지는 불친절한 묘사들이 저마다 깊은 우물을 머금고서 활자화되어 있다. 정유정의 휘몰아치는 압도적인 서사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사보다는 묘사에 중점을 두고, 말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목소리를 부여하여 말하게 하는 정적인 작품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이 머금고 있는 그 어둡고 무거운 것들을 우리가 쉽게 내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것들은 한낱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고 말 법한 장치나 기법 정도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모든 독자들의 내면에,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내면 깊은 곳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인간 본성과 심리를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여주는 효과를 내며, 마치 분절된 꿈의 조각처럼, 그래서 날 것 그대로의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 탁월하다. 모든 사람들 안에 내재되어 있지만 한결같이 꺼내 보려 하지 않는 그 무엇. 어쩌면 한강 작가의 작품이 그 유명세와는 달리 읽기 어려운 건 '나'이지만 내가 아니고 싶은 혹은 '나'이면 안 되는 모습들, 그 부서지고 의도적으로 잊힌 모습들이 문득 우리들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희랍어 시간’을 읽는 동안 차라리 급박한 이야기의 전개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말을 잃은 한 여자와 서서히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 깊은 상처가 낸 치유되지 않은 두 과거와 그것들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두 현재가 희랍어 강좌를 매개로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야기. 생명과도 같은 안경을 떨어뜨린 밤, 말을 잃은 여자의 도움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따라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남자. 말을 잃었기에 몸을 움직여 기척을 내야 했고 남자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던 여자. 그날 밤 이 두 사람 사이엔 어떤 전류가 흐르고 있었을까. 남자의 작은 방 안에 흐르는 공기 속엔 서로에 대한 공감과 치유의 냄새가 섞여있지 않았을까.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시간은 어느덧 새벽 다섯 시가 되어 곧 동이 터오를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한강 작가는 둘 사이의 결말에 대해선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작품을 끝내버리지만, 나는 자연스레 바라게 된다. 서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아가 서로의 상처로 말미암아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치유가 되어줄 수 있기를. 여자는 말을 되찾고, 남자는 유전적인 시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빛을 볼 수 있게 되길.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설사 여자가 다시 말을 찾지 못해도, 남자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어도 서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현재의 삶에서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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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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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 아닌 밝은 밤

최은영 저, ‘밝은 밤’을 읽고

서양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며, 한국어로 소설 쓰길 갈망하고 또 실제로 준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 소설의 지형과 흐름을 대략적이라도 파악하는 일은 꼭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 작업을 2년째 틈나는 대로 해오고 있다. 그래 봤자 지금처럼 여러 가지가 제한된 환경에서는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 몇 개씩 읽어나가는 일에 불과하지만, 그런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낼 때마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주제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항상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남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고전을 좋아하고 그 깊은 맛을 사랑하는 내 취향 때문이리라, 하고 추측할 뿐이다.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나의 또 다른 취향 역시 그 시작이 무엇인지 언제부터인지 묘연하다. 아마도 번뜩이는 기발함과 빠른 속도보다는 뻔함 속에서 느리게 심오함을 이끌어내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알아채지 못하는 진리를 상기시키며,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특정한 서사를 통해 드러내어 넌지시 깊은 곳을 짚어내는 건 오로지 장편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최은영의 최신작 ‘밝은 밤’을 고른 이유 역시 이런 나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전의 반열에 올릴 정도의 무게는 아쉽게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처음 만난 최은영 작가의 스토리텔링과 필체는 다시 읽고 싶어질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일상에 녹아든 잔잔한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편안한 톤으로 3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작년에 이 작품이 큰 상을 받았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배경으로 묵직한 주제까지도 건드리고 있었고, 시대를 뛰어넘어 21세기 현재 우리들의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이를테면,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제강점기에서 6.25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을 다루는 동시에, 무려 4대 (증조할머니까지)를 넘나드는 두 가족 여성들의 상실과 아픔을 과하지도 않고 얄팍하지도 않게 세련된 필체로 조곤조곤 이야기해준다. 중간중간 멋진 문장들이 알알이 박혀있음도 이 작품을 챙겨봐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는 소수자의 무력함, 함부로 표출할 수 없이 속으로 묵혀야만 했던 그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참고 견디며 살아낸 눈물 젖은 수많은 나날들이 여성의 시선에 무게중심을 두고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성 독자임에도 나는 그 시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며, 시대적 한과 고질적인 인식론적 제도적 폭력의 힘을 재고해볼 수 있었다.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화자 지연 역시 여성이자 이혼녀이자 우울증 환자로서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일종의 미안함도 느꼈다. 그리고 전체 내용이 정적이고 우울한 편에 속하지만 그 분위기에 억눌리지 않고 삶을 개척해나가고 극복해나가는 등장인물들을 가슴 깊이 응원했다. 슬프지만 감싸지는 슬픔, 상처이지만 치유되는 상처, 밤이지만 어두운 밤이 아닌 밝은 밤. 제목의 의미를 알 듯하다. 상실을 바라보는 최은영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남성보다는 여성 독자들에게, 그리고 한국 역사를 잘 아는 한국인들에게 훨씬 더 큰 공감을 자아낼 작품이지만, 나는 남성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독을 권한다. 최은영 작가의 다음 작품이 장편이라면 꼭 챙겨볼 작정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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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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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평범성, 그리고 진정한 겸손함

카렐 차페크 저, ‘평범한 인생’을 읽고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평범하다’는 것은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는 뜻이다. 뛰어나거나 색다르다는 것은 비상하거나 특별하다는 의미로써, 그렇게 판단하기 위해선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평범하다는 의미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이를테면, 휴대폰 사용자가 평범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건 아주 최근의 일이고 (시대 영향), 한국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건 평범하지 않아도 미국에서 사용하는 건 당연할 정도로 평범한 일이다 (문화 영향). 평범하다는 건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평범함은 이렇듯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정의하기 나름일까? 모든 평범함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일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평범함은 존재하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인생에 대해서는 이런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의미 부여가 가능한 것 같다. 평범한 인생. 그러니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평범함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인생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른바 절대적 평범성. 묘하게도 이것이 내가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 카렐 차페크. 세계적으로 수많은 비범한 작가를 탄생시켰던 19세기 말에 태어나 1차 세계대전을 겪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체코 출신 작가다.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낸 장본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중 하나다. 그는 노벨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반파시즘 투사로 활동했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짧았으나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에 읽었던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탓일까.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완벽하고 신비한 세상이 아닌 우리의 사사롭고 부서지고 보잘것없는 일상, 즉 평범한 인생 가운데 거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밀하게 관찰하여 자기만의 색을 입히는 성찰을 통해 자신을 넘어서고 타자와 세상으로 나아가 모두를 관통할 수 있는 깊은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예술과 문학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 우연찮게도 나는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내겐 적시에 만난 보석 같은 작품이었다.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앞뒤 서너 페이지를 제외하면, 평범한 인생을 살다 간 한 철도 공무원의 자서전으로 읽히도록 의도된 단편소설이다. 정년퇴직한 주인공은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어느 날 자서전을 쓰기로 작정한다. 평소에 주위를 잘 정돈하는 습관을 따라 모든 것을 정리하고도 더 정리할 게 없을까 하다가 자기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기에 이른다. 

“아주 평범한 삶에 대한 전기를 쓰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 항변을 한다. 평범한 삶에 대한 재고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재해석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삶은 여백, 즉 삶에서 영화를 뺀 나머지라는 생각과 맞닿아 있어 나는 꽤 흡족한 마음으로 공감하며 읽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그리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펜을 들고 자기가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전체 인생을 톺아보기 시작한다. 아, 인생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정리가 또 있을까!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보냈던 학창 시절, 철학 전공으로 대학을 지원했으나 갑자기 그만두고 시를 쓰다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철도 공무원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던 이십 대 시절, 성실함과 총명함으로 성공적인 철도 공무원으로 거듭나고 중간에 결혼까지 성공했던 중년 시절까지, 그는 그야말로 무난히 그의 평범한 인생을 빈 종이에 적어나간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써놓은 것들이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내면에 있던 여러 자아들이 내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평범한 인간, 억척이, 우울증 환자, 시인, 영웅, 낭만주의자, 거지, 은밀한 사람 등의 정체성을 가진, 그와 모든 인생을 함께 해온 여러 자아들의 익숙한 존재를 재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연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었던가, 한 자아가 일목요연하게 기술하는 인생이 과연 내 인생 전부를 말하는 것일까, 하고 그는 생각하게 된다.

여러 자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은 다중인격도 정신분열도 환각도 아니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인생 전체에서 겪는 가장 평범한 일이었다.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의 자아가 공존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많은 자아들을 조상들의 흔적과 연결시키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어떤 자아는 아버지의 모습인데 반하여 또 어떤 자아는 어머니의 모습, 또 다른 어떤 자아는 할아버지의 모습, 등등. 즉 ‘나’라는 한 사람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조상들의 일부의 총합 혹은 그것들이 여러 조합으로 모인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나’에서 끝나지 않고 ‘너’로 또 ‘우리’로,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는 ‘너’와 ‘그들’로 이루어져 있고, ‘너’ 역시 ‘나’의 일부가 들어가 있으며,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의 일부를 부분적인 공유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 혼자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가 ‘우리’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평범한 인생이고 우리 모두의 인생이자 절대적 평범성으로의 수렴인 것이다.

이율배반성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모순되고 말이 안 되는 모습들,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모습들, 일관성도 없고 즉흥적으로 마구 움직일 때가 많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습들,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은 어떤 한 사람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의 내면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일 것이다. 반면, 이렇게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자아들이 모두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 역시 간과하면 안 되겠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면 죽이지 않고 살릴 것이며 배제하지 않고 보듬으며 함께 가려고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타자를 차별, 배제, 혐오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개별자가 아니라 서로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생각을 흥미롭게 읽으며 나는 다시 나와 타자와 세상을 생각해본다. 그 관계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더욱 겸손해지려고 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평범한 인생은 겸손한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평범성은 닮은 듯 다른 우리를 인지하고 인간다움을 되찾아 나보다 남을 향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진정한 겸손함 일지도 모르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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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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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노래하는 예술

토마스 만 저,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 유럽 예술의 흐름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시기는 ‘데카당스’라는 단어를 빼곤 설명할 수 없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가지는 불어로써 ‘쇠락’ 혹은 ‘퇴폐’를 의미한다. 프랑스 예술가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데카당스 예술은 관능이나 도취를 일삼는 탐미주의 혹은 세기말적인 그로테스크 예술 양식과 맞닿아 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삶에 대한 강한 반감, 삶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는데, 삶 자체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에 데카당스 예술은 삶과 인간 모두에 반하는 사조, 그래서 삶과 예술을 분리시킨 예술로 이해하면 되겠다. 생의 철학, 힘에의 의지,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주의: 수동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절대 아님) ‘아모르 파티’를 주창했던 니체가 이러한 데카당스를 비판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토마스 만은 작가, 즉 글을 읽고 쓰는 예술가로서 삶과 예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하면서 삶을 살아낸 장본인 중 하나다. 그의 초기작인 이 작품 ‘토니오 크뢰거’는 삶과 예술의 경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둘 다 속하길 원하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고뇌가 담겨있다. 작가 토마스 만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진하게 녹아있는 단편소설이기도 하다. 

토니오 크뢰거는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작가 토마스 만의 고뇌가 함축적으로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크뢰거’라는 성은 명문 가문 출신을 상징하는 데 반하여 ‘토니오’는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며 상류층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아버지로부터 명문가적인 피와 어머니로부터 남국적인 예술가의 피를 물려받은 인물로 그려진다. 상류층 자제로 (토니오 크뢰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영사였다) 태어난 토니오 크뢰거에게 전자는 삶과 인간을 대변하고 후자는 예술과 정신을 대변한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며 깊이 사랑하기도 했던, 그러나 어느 이상 가까이할 수 없었던 파란 눈의 친구 한스와 멀리서 동경했던 금발 머리의 잉에는 상류층 자제들의 전형적인 삶을 살아내는 (‘순응하는’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여자 친구이자 화가인 리자베타는 한스와 잉에의 대척점에 놓인, 그러니까 삶과 동떨어진 채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전형적인 예술가로 그려진다. 그리고 중간에 낀 토니오 크뢰거는 두 진영 모두에게 온전히 속해있지 않으면서 두 진영 모두 사랑하며 그 안에 온전히 속하길 갈망하는 경계인인 것이다. 

이 작품은 토니오 크뢰거의 성장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토니오 크뢰거는 남다른 속성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삶에 순응하지 못했다. 그는 남몰래 시를 썼다. 왜 자기는 친구들과 다를까, 하고 고뇌했다. 그리고 그 고뇌는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 예술가는 어떤 학습에 의해서 길들여진다기보다는 타고난다는 뉘앙스로 충분히 읽힐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남다른 길을 걸었고 성인이 되어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점점 더 심화되었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삶과 예술, 이 둘은 분리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그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고향을 방문하게 되고 이국 땅을 여행하면서 그는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쩌면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예술가, 그리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예술가가 되길 다짐하게 된다. 생동하는 예술은 삶을 떠나서는 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게 된다. 이는 서두에 언급했던 데카당스 예술 사조에 대한 강력한 반기이자 변증법적 성장의 열매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잘 와닿지 않는 고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예술가들의 마음을 잘 대변하여 전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고뇌가 아닐까 한다. 나 역시 읽고 쓰는 일을 사랑하는 한 작가로서 토니오 크뢰거의 다짐을 조용히 응원하고 지지하게 된다. 화려하고 아름다우나 죽어있는 예술은 진정한 예술이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 일상을 배제한 채 환각으로만 보일 수 있는 예술은 우리의 삶을 오히려 파괴할 뿐이니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의 사사로운 일상 가운데 거할 테니까. 그것을 발견하여 관찰하고 성찰하고 통찰해내는 자가 바로 예술가일 테니까.

#김영웅의책과일상
#민음사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0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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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되신거 정말 축하드립니다 *^^*

Youngwoong Kim 2022-03-09 02:53   좋아요 2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