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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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읽기는 곧 작가의 삶


이승우 저, ‘고요한 읽기’를 읽고


‘생의 이면‘으로 처음 만난 이승우는 내게 이질감을 안겨주었던 작가다. 그의 낯선 문체, 이를테면 번복되고 되뇌고 산만하기도 하고 단정치 않고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그의 글쓰기가 거슬렸다. 안정효와 신형철이 말하는, 동시에 나도 지향하는, ‘정확한 글쓰기’와 대조되어 내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고요한 읽기’는 산문집이다. 소설에서 이질감을 주었던 이승우의 문체가 산문에선 의외의 매력을 띄고 내 앞에 나타났다. 잘 잡히지 않던 문장들이 그의 문체 덕에 더 잘 이해가 되었고, 단문들의 반복은 강화와 심화 효과뿐만 아니라 친절함과 다채로움까지 리드미컬하게 자아냈다. 이승우의 진면목을 나는 이제야 보게 된 것인가. 


이 책은 읽기가 읽기와 쓰기를 낳고, 그 읽기와 쓰기는 다시 읽기와 쓰기를 낳게 되는 필연적인 연쇄가 무한히 반복되는 여정을 성실히 먼저 걸어간 작가 이승우의 주옥같은 생각들과 말들을 담고 있다. 그의 치열한 읽기, 루틴이 된 삶으로써의 성실한 읽기, 그리고 그의 치열한 쓰기, 루틴이 된 삶으로써의 성실한 쓰기에서 길어낸 웅숭깊은 통찰을 오롯이 맛볼 수 있어서 나는 이 책을 엘에이에서 한국 가는 열세 시간의 비행 중 한 문장 한 문장 가능한 천천히 씹으면서 읽었다. 그의 번복되는 듯한 고유의 문체는 같은 문장 혹은 단어도 더욱 다채롭고 풍성하게 드러내어 혹시라도 있을 법한 오독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를 내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저자의 의도를 오해 없이 파악할 수 있었다. 나로선 지경이 확장되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고요한 읽기‘란 무엇일까? 강윤정 편집자가 선물한 이 낯설고도 정확한 제목 속의 ’고요‘는 단순한 적막 혹은 침묵이 아니다. 조용한 곳에서 독서하는 것이 고요한 읽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고요’는 집중 혹은 몰두를 뜻한다. 그러므로 ‘고요한 읽기‘는 ‘집중하는 혹은 몰두하는 읽기’이다. 집중하고 몰두하여 내면 깊숙한 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생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여 쓰기와 또 다른 읽기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것이다. 여기에 나는 작가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행위라는 점에서 ’도상’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싶다. 그러면 ’고요한 읽기‘는 독서라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쓰기는 물론 읽기와 쓰기 사이에 난 미세한 모든 시간과 공간까지도 침투하여 장악하게 된다. ‘고요한 읽기’가 마침내 작가의 삶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한 꼭지만 읽어도 이승우 작가의 내공이랄까 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이 한 권의 책은 그가 오랫동안 길어 올린 깊은 우물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어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 그가 본문으로 가지고 오는 여러 책들의 낯선 문장들이 그의 독특한 문체와 어우러져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었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떤 부분은 서평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문학에세이로 보이기도 하며, 또 다른 부분은 쉽게 잘 다듬어진 설교 혹은 철학/인문학 강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그야말로 다채로운 읽기와 쓰기에 관한 찐 에세이인 것이다. 진지한 독자라면, 혹은 작가라면 이 책을 꼭 한 번 손에 들고 읽길 추천한다. 


고요한 읽기는 읽기와 쓰기라는 연쇄의 무한반복을 불러오지만 궁극적으로 읽어내는 대상은 ‘나’라고 이승우는 쓴다. 가장 먼 존재자가 내 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허를 찌르는 논리로 책을 읽는다는 건 곧 나를 읽는 거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나를 읽어내지 못하면 제대로 읽기라는 행위를, 다시 말해 고요한 읽기를 수행하지 못한 거라고 읽었다. 여기서 이승우는 덧붙인다. 나만 읽어서는 나를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타자와 세상을 읽은 후에야 나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고. 전적으로 동의했다. 책을 읽는 이유,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상기할 수 있었고, 나를 초월하기 위해 나를 알아야 하고, 나를 알기 위해 타자와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논리에 전적으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를 읽어냈던가?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다행히도 그랬던 것 같다. 나 역시 읽기와 쓰기를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 중 하나로서 독자이자 작가인 나의 위상을 성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일상에 ‘고요한 읽기’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이승우 읽기

1. 생의 이면: https://rtmodel.tistory.com/1588

2. 사랑이 한 일: https://rtmodel.tistory.com/1628

3. 고요한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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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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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다 이야기꾼이 더 드러나는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 저, ‘일인칭 단수’를 읽고

1. 돌베개에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거기엔 어떤 공통된 정서가 흐르는 것 같다. 이 짧은 단편을 읽고도 동일한 걸 느꼈다. 몇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이를테면, 죽음, 문학, 환상, 섹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어설픈 남자 주인공 등이다. 언뜻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키워드들은 하루키의 사상 혹은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관념과 통속의 조화를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진하게 맛보았던 나는 하루키 역시 그만의 독특한 방식과 고유한 문체로 소설을 쓰는, 현대문학의 거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도스토옙스키와 비교하면 깊이랄까, 통찰이랄까 하는 측면에서 내게 하루키는 가볍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러나 하루키만이 그려낼 수 있다고 보이는 현대인의 몽환적인 정서는 무척이나 인상적인데, 어쩌면 이것이 하루키 팬들이 그에게 빠져드는 주된 이유이지 않을까 한다. 은근히 매력적이고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돌베개에‘라는 단편은 바로 이러한 하루키만의 고유한 정서가 고스란히 발현된 작품으로 보인다. 젊ㅇ 남자 청년과 그보다 몇 살 연상인 한 여자 사이의 짧은 인연, 하룻밤의 정사, 여자가 남긴 시, 그리고 그 시를 음미하며 그 여자를 궁금해하고 그저 일상을 또 살아가는 남자. 이것이 이 소설의 전부다. 줄거리랄 것도 없는 이 간단한 설정 만으로 자기의 색채를 또다시 그려낸 하루키라는 작가의 비범함과 그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2. 크림
이 단편 또한 한 어리숙한 남자 재수생이 겪은 불가사의한 사건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떤 교훈이랄까 메시지랄까 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한 채 끝나버리는, 역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이다. 

어릴 적 같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한 여자아이가 느닷없이 보낸 피아노 리사이틀 초대권을 받고 찾아간 콘서트장은 고베의 어느 깊은 시골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고 용돈도 털어 그 생소한 장소를 찾아갔지만, 거기엔 오래 사용하지 않은 듯한 건물이 자물쇠로 잠겨 있을 뿐이었다. 속았나 싶은 생각에 허탈해하며 되돌아오는 길에 잠시 공원 정자에 앉아 쉬는데, 공황발작 같은 게 찾아왔고 그 발작 가운데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그 마을 주민인 것 같은 어떤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 할아버지는 뜬금없이 중심에 여러 개인 원,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인생에서 공을 들여 가치 있는 것을 이루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된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까지 던지고는 주인공의 발작이 사라지는 순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이 작품의 키는 주인공이 자기 이야기를 아는 동생에게 들려주는 말 가운데 있는 것 같다. 우리 인생에는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뜨리는 사건이 가끔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주인공은 그럴 때마다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에 대해 생각한다고 한다. 자기 안에 있을 어떤 특별한 크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는 말과 함께.

3.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음악, 그중에서도 재즈 애호가로 널리 알려진 하루키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1955년에 사망한 찰리 파커를 8년 뒤인 1963년 어느 폐간된 대학 문예지에서 주인공의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살려낸 사건이 발단이다. 세월이 흐른 뒤 뉴욕의 어느 한 레코드점에서 자신이 상상했던 가상의 음반을 발견하는 환상 섞인 경험, 그리고 찰리 파커가 나오는 꿈을 꾼 경험을 흥미롭게 이야기해 준다 (역시 하루키는 재담꾼이다). 문예지에 실은 글과 똑같은 마지막 문장이 이 소설 마지막 문장으로 쓰인 걸로 미루어 보아 주인공의 뉴욕 경험이나 꿈 이야기 모두 허구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모두가 허구이고 이 소설을 읽은 나는 하루키에게 또 보기 좋게 낚인 걸지도 모르지만, 하루키가 찰리 파커의 알토 색소폰을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허구가 아닌 듯하다. 즉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꾼이 남는 작품.

4. 위드 더 비틀스 
이 소설도 음악 애호가인 하루키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역시나 어리숙한 젊은 남자가 주인공인데, 고등학교 시절, 꿈인 듯 현실인 듯 기억에 남은 하나의 단편적인 장면을 소개하며 소설이 시작된다. 잘 알지 못하는 한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이 비틀스 앨범 (LP)을 들고 치맛자락을 날리며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는 장면이다. 이어지는 소설의 주된 이야기는 그 기억과는 별개로 진행되는데, 아마도 하루키는 과거의 기억을 그 장면처럼 아련하게 회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주된 이야기라고 해봤자 어리숙한 남자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 그리고 약속시간을 잘못 알고 찾아간 그녀의 집에서 예기치 않게 만나 뜻밖의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던 여자친구의 오빠 이야기가 전부다. 아니나 다를까 세월이 흐르고 남자 주인공은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도쿄에서 우연히 그 오빠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여동생이, 그러니까 우리 주인공의 첫 여자친구가 몇 년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그로부터 전해 듣게 된다. 기억은 날개를 날고 과거로 날아가 그녀와 헤어지던 날을 비춘다. 죽은 옛 여자친구의 오빠가 남긴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새겨졌을 듯하다. 죽은 사요코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에도 주인공을 가장 좋아했었던 것 같다는 말. 소설은 그 아련한 기억을 뒤로하면서 그렇게 끝이 난다.

5.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뭔지 몰랐다. 야구팀 이름이었다. 소설이 아닌 하루키 산문처럼 보이는 이 글은 하루키 본인이 주인공이다 (다른 작품도 하루키가 주인공일지 모르나, 이 작품엔 하루키라는 이름이 그대로 사용된다). 하루키가 왜 야쿠르트 스왈로스 팀을 응원하게 되었는지, 왜 그 팀의 홈구장인 진구 구장에서 팀이 이기든 지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유머를 섞어가며, 조금은 툴툴대며 써 내려간 글이다. 재미난 건 하루키가 엄청 유명해지기 전에 이 야구팀 경기를 보면서 끄적인 시들을 한데 모은 시집을 거의 자비출판 식으로 500부 찍었다는 사실이다. 300부는 팔리고 200부는 선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유명해지고 나서 그 시집은 희귀본이 되어 가격이 엄청 뛰어올랐다고 한다. 인생은 참 모를 일이다. 이 작품 덕분에 하루키가 야구도 사랑했고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 책 덕분에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라 작가 하루키를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6. 사육제
하루키의 클래식 사랑을 여과 없이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 속 주인공이 하루키 자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한 못생긴 여자와의 인연의 시작과 중간과정 및 끝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인데, 하루키의 여자에 대한 관점도 엿볼 수 있다. 우연히 콘서트장에서 친구 덕분에 만난 그녀는 클래식에 관한 취향이 비슷했고, 덕분에 둘이서 한동안 클래식을 같이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무인도에 들고 갈 단 하나의 클래식을 슈만의 사육제로 꼽는 두 사람은 사육제 마니아가 되어 우정을 발전시킨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로부터 소식이 끊기게 되는데, 주인공은 티브이에서 그녀가 사기범으로 체포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외면과 내면이 다른 우리 인간의 본성을 슈만의 사육제 연주에 빗대어 이야기하던 그녀의 이면에는 사기범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던 것일까? 주인공은 과거 어느 다른 못생긴 여자와 데이트했던 경험까지 소환하며 과거 회상을 마무리한다.

7.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발 닿는 대로 여행하다 밤늦게 도착한 어느 시골에서 인적이 드문 한 허름한 온천료칸에 주인공 남자가 투숙하게 된 일화를 그린 작품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배경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도. 일본 온천이 등장하는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정서를 풍기는 것 같다. 

하루키는 여기에서도 환상적인 요소를 빼놓지 않는다. 주인공이 아무도 없는 온천물에 호젓이 몸을 담그고 있을 때였다. 문이 스르륵 열리며 한 직원이 들어왔다.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였다. 물이 괜찮냐는 둥 이것저것을 물어보기도 하며 나중엔 일을 마치고 주인공의 요구에 따라 병맥주 두 병과 간단한 안주를 들고 방으로 찾아와 진지한 대화도 나누게 된다. 어쩌다가 원숭이가 사람 말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을 수 있었던 주인공은 원숭이가 자신의 성욕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그동안 흠모하는 일곱 명의 여자 이름을 훔쳤다는 난데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간직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료칸을 나갈 때 확인한 바, 그곳에서는 병맥주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간밤에 원숭이와 나눴던 대화는 환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주인공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속에만 담아 두는데, 세월이 지나고 어느 날 동료인 한 여자가 전화하다가 자신의 이름을 종종 잊어버린다는 고백을 듣고 주인공은 그때 그 원숭이를 떠올린다. 

8. 일인칭 단수
여덟 단편이 실린 이 책의 제목으로도 선정된 마지막 작품은 가장 짧기도 하지만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하루키 자신으로 여겨지는 남자 주인공은 일 년에 고작 서너 번 정도 정장을 차려입는데, 문제가 된 그날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정장을 차려입었고, 차려입은 김에 산책을 나갔으며, 산책을 나간 김에 평소에 가지 않는, 멀리 떨어진 바를 찾는다. 적당한 조명과 적당한 음악이 독서하기에 적당했으나, 거기에서도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정장을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색함을 넘어 위화감을 불러올 정도로 괴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일행 없이 앉아 있던 한 중년 여성이 바에 들어오는 여러 손님들에 떠밀려 주인공 바로 옆으로 밀려오게 되었는데, 뜬금없이 그 여자가 주인공에게 가시 돋친 말로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얼굴을 자세히 봐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삼 년 전 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라면서 주인공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을 내던진다. 몇 마디 하다가 결국 주인공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하게 되는데, 그 여자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 진실을 폭로할까 두려워서였는지, 그 여자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판단해서인지 분별하지 못한 채 바를 나선다. 

밖으로 나온 주인공은 모든 게 바뀌었다고 느끼게 된다. 분명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는데, 그 여자를 만난 후에는 세상이 갑자기 흉측한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주인공은 자꾸만 그 여자의 말을 되뇌인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이성과 무관하게 뭔가 수상한 기분이 드는 날. 좋지 않은 예감으로 생각과 마음이 충만하여 무엇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일상적인 일들을 꾸역꾸역 진행해 보지만,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날.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드는, 불길함을 가시화시키는 계시 같은 사건. 그 사건이 어떤 내밀한 감정을 건드리게 되면 마치 어떤 예언이라도 적중한 듯 묘한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이성으로 낱낱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저 이런 감성으로 이 작품을,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을, 나아가 작가 하루키를 느끼게 된다.

마무리하며
엘에이행 비행기 안에서 크게 집중하지 않고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가독성 높고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별 일 아닌 일들을, 사소하디 사소한 감정선과 사사로운 일상의 조각들에 숨을 불어넣어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작가 하루키. 소설도 좋지만 그의 산문 혹은 에세이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장엔 그의 ‘잡문집’이 기다리고 있다. 하루키는 현대문학의 숲을 조망하기 의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작가일 것이다. 분명 배울 게 많은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도 작가로 성장해 간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하루키 읽기
1. 노르웨이의 숲: https://rtmodel.tistory.com/655
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https://rtmodel.tistory.com/820
3. 양을 쫓는 모험: https://rtmodel.tistory.com/1211
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https://rtmodel.tistory.com/1913
5. 일인칭 단수: https://rtmodel.tistory.com/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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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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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을 넓히는 작품을 만나다


최진영 저, ‘구의 증명’을 읽고


기발한 발상, 기구한 사건, 독특한 전개. 고전문학과 구별된 현대문학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는 나는 개인적으로 진부하리만큼 뻔하디 뻔한 이야기 속에서 빛바랜 진리에 다른 빛을 비춰 재발굴해 내는 고전문학을 선호한다. 그런 이유로 한국 현대문학은 즐겨 읽지 않는 편이다. 상상력을 키우고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을 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구도 혹은 설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 내지는 서론만 거창하다가 본론은 흐지부지해지는 상황을 자주 유도해서 소탐대실을 초래하는 걸 자주 봐왔고, 또 그런 작품들에 대한 실망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만나는 작가 최진영의 작품 ‘구의 증명‘을 읽고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선입견이 나의 편견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며 여러 작가와 작품이 떠올랐다. 환상적인 요소가 삽입된 부분들(죽은 구가 자기 몸을 먹고 있는 담이를 바라보며 독백하기도 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구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장면들)과 구의 죽음으로 극도의 슬픔을 느끼는 담이의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들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죽은 혼이 화자로 등장하는 장면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담이가 이모와 각별한 관계에 처하게 된 설정에서 읊조리는 독백은 양귀자의 ‘모순’ 속 안진진을 자연스레 소환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런 상황이나 설정만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나는 최진영의 문체로부터 예사롭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구의 시체를 앞에 두고 초현실적인, 어쩌면 지독히 현실적일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진 담이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려내는 부분은 한강의 문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이런 인상들 덕에 나는 최진영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나의 편협한 시선에 대폭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요컨대 나의 독서 여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띨 작품을 어쩌다 만나게 된 것이다.


현대문학답게 이 작품이 강렬한 주목을 끌게 만든 건 부모가 진 빚의 무게 때문에 살해를 당해 길바닥에 죽어 있는 구의 시체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끌고 와 정성스레 씻고 소독한 뒤 하염없이 슬픔에 빠진 담이 구의 살을 먹는 장면일 것이다. 사망신고도 하지 않고 시체를 먹는다는 설정이 엽기적이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며 구와 담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텍스트로 쓰이지 않은 콘텍스트를 읽어 내면 그런 담의 행동이 비로소 이해가 되고 공감하기에 이른다. 엽기적인 장면이 지독한 상실과 애도의 현장으로 바뀌게 되는 이 부분, 즉 기묘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 슬픔을 극대화시킨 후 독자 모두를 애도의 현장으로 불러 모은다는 점에서 나는 저자의 저력이랄까 내공이랄까 하는 힘과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의 노른자 부위가 아닌가 한다. 


책을 다 읽고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구는 무엇을 증명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충분히 작품을 이해했다고 여겼건만 제목이 낯설게 느껴지다니.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었다. 하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고 나서는 더한 기분을 느낀 적도 있었기 때문에 제목이 와닿지 않는다고 해서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기에는 억지스러운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넘어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작품을 뒤적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십 분이 지나도 유레카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다만, 희미하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구가 증명한 것은 담이를 향한 구의 사랑이고, 구가 증명한 방법은 구의 죽음이었다는 것. 즉 구의 증명은 자신의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되면, 담이가 죽은 구를 먹는 행위도 구의 증명에 대한 화답이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심쩍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나의 작품 이해도의 최선이기에 작가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이대로 그냥 두기로 한다. 


책장을 뒤져보니 ‘단 한 사람’이 보인다. 몇 달 전 최진영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구의 증명’과 함께 사두었던 것 같다. 조만간 읽어볼 예정이다. 주목할 만한 한국 작가가 생겨서, 현대문학에 대한 시선이 달라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내 지경도 넓어진다.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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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 한정원의 8월 시의적절 8
한정원 지음 / 난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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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함과 고요함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고독과 외로움

한정원 저,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을 읽고

두 번째로 만나는 한정원의 에세이다. 정갈한 문장들이 다시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긴다. 시끄러웠던 내 마음도 마침내 고요다. 

몸도 마음도 분주한 일정이었다. 부산을 오가는 열차 안에서 가쁜 숨을 돌리기 위해, 벌써 반년간 가방 속에 잠자고 있던 이 책을 꺼내 들었다. 

8월 1일을 여는 첫 에세이부터 할 말을 잃었다. 시인의 낯선 문장들은 그림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고, 그 그림에선 오래 묵은 향이 났다. 몸은 낯설지만 마음은 익숙하고 편안한, 오래된 숲의 향이었다. 나는 시인과 함께 숲 속에서 죽비 소리와 시시오도시 소리를 들었다. 사찰에서는 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던, 평상시에는 들리지 않던, 고요의 소리들도 들을 수 있었다. 잊고 있던 마음의 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전작 ‘시와 산책’은 휑할 만큼 고적하고 아름다운 에세이였다. 모든 문장이 빛났다. 그러나 나는 그 빛나는 문장들에 묻어있는 고독과 외로움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책 내용이 아닌 저자의 문체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시인 한정원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이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 나는 생각한다.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한 계절‘은 그 생각에 힘을 더 실었다.

정갈한 문장들이 자아내는 고요한 빛이 좋았다. 모든 걸 멈추고 눈을 감아야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고, 큰 숨을 들이마신 뒤에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좋았던 정갈함과 고요함이 지나가고 내 마음엔 휑한 느낌이 남았다. 고독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지막 느낌이 쓸쓸함이라는 것. 시인 한정원의 에세이가 갖는 위험한 중독성이다. 그러면서 ’시와 산책’까지 다시 책장에서 꺼내드는 나를 나는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지금은, 그냥 그렇게, 나를 내버려 두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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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헤르만 헤세 선집 6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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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과 떠남의 경계

헤르만 헤세 저, '크눌프'를 다시 읽고

7년 전 크눌프는 산소, 천사, 혹은 닮고 싶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달랐다. 내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회한 크눌프는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자유'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보다, 드러나지 않은, 혹은 드러낼 수 없었던 그의 삶의 여집합이, 그 여백이 훨씬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가 애써 채워 온 삶이 아닌 그가 끝내 채우지 못했던 삶에서 나는 깊고 깊은 외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크눌프에게 동경이 아닌 강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은 정착과 떠남의 무한반복을 살아간다. 정착은 안정을 선사하지만 그 안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주 올무로 바뀌곤 한다. 떠남은 불안을 야기하지만 그 불안은 종종 삶을 환기시켜 다시 자유를 동경하게 만들곤 한다. 정착이 오래되면 늪이 되고, 떠남이 지속되면 방랑이 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둘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 작품 속 주인공 크눌프는 후자의 삶을 지속했다. 소설이라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잠시 내려놓기로 한다. 허구라도 방랑자의 삶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7년 전에 나는 크눌프를 가끔 만나곤 하는 그의 숱한 친구 중 하나였다. 크눌프의 삶 자체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 그의 삶이, 아니 나를 방문한 크눌프 덕분에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더 중요했다. 크눌프를 만나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반겼는데, 그를 환대하는 일을 즐거움과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 주객이 전도되는 듯한 묘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크눌프의 인품을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프직묳ㄱ나도 그랬던 것 같다. 방랑자 크눌프 덕분에 정체되어 있던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었고, 잊고 있던 자유와 내적 성장에 다시 눈을 돌려 갈망할 수 있었다. 꺼져가던 가슴 깊숙한 곳의 그 무엇이 다시 깨어나 숨쉬기 시작한 기분을 느꼈다. 방랑자 크눌프가 왜 그렇게 사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삶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내 삶의 활력소이자 영감의 공급처였던 것이다. 

이번에 크눌프를 다시 만난 나는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인생을 조금 더 살아봐서 그런 걸까? 나는 크눌프를 반기던 친구의 관점이 아닌 크눌프에게 나 자신을 더 투영하게 되었다. 그의 방랑벽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크눌프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외롭고 쓸쓸한 모습으로 홀로 노쇠해 가는 한 남자로 보였다. 그의 마지막이 담긴 장면을 수차례 읽었다.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졌고, 그의 마지막이 마치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몰입해서 읽었다. 아,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 과연 행복과 만족을 얻었을까?

책을 덮고 잠시 먹먹한 기분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왜 나는 크눌프에게서 동질감을 느꼈을까? 한 때 부러워하기도 했던 그가 왜 이번엔 안아주고 싶은 인물로 보였을까?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고 했다. 아마도 이 이유인 듯싶다. 내가 7년간 서 있는 장소가 달라진 것이다. 7년 전 나는 인생의 가장 낮은 점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인생은 겹겹의 우물이지만, 그 시기에 나는 내 인생 가장 커다란 우물을 탈출하고 있었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졌고, 모든 게 달라 보였다. 타자의 힘으로 간신히 구원을 받고 낮아질 대로 낮아진 마음이 되어 구원받은 은혜와 감사에 충만했던 시기였다. 나는 누군가를 구원하는 자의 위치가 아닌 구원을 받는 자리에 나 자신을 놓아두었기에 자연스레 크눌프를 구원받는 자가 아닌 구원을 베푸는 자로 인식했던 것 같다. 초독 감상문에 내가 크눌프의 이미지를 산소, 천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묘사했던 것도 다 이런 이유였다. 

그때의 관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때보다 조금은 더 성장하고 성숙해진 나는 그때 나의 관점에서 약간의 과장과 약간의 편향성을 느낀다. 높은 마음보다 낮은 마음이 좋지만, 너무 낮은 마음은 객관성 상실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그랬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크눌프는 물론 나 자신조차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 같다. 왜 그땐 크눌프가 그렇게 커 보였던 걸까? 똑같은 나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이렇게 신기해한다. 

다시 만난 크눌프는 내 머릿속에서 꽤나 왜소하게 그려졌다. 그랬더니 헤세가 묘사한 그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읽혔다. 깔끔하고 신사적인 모습으로 보였던 그가 결벽증을 보일 만큼 불필요한 자기 관리를 하는 자로 느껴졌다. 남들에게 친절하고 유쾌한 기분을 선사하는 그였지만, 스스로는 언제나 결국 혼자 남겨진 채 지독한 쓸쓸함을 맛보아야 했던, 조금 과장하자면 광대와도 같은, 자로 느껴졌다. 나는 그 모습으로부터 모순을 느꼈고 자유가 아닌 타성에 젖은 가식도 느꼈다. 말하자면 작품 속 현재의 크눌프는 과거의 방랑자 크눌프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젊은 때의 방랑은 이십 대의 방황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서도 그 방랑을 지속하고 있다면 그 방랑은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 나이에 걸맞은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일종의 구속을 택하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젊을 때 쫓던 자유와는 다른, 구속 가운데 느낄 수 있는 자유를 택하고 누려야 나이가 바로 중년이지 않나 싶다. 인생의 후반전이 전반전의 연장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인지라 나는 크눌프의 삶이 초지일관 방랑자로 남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나 보다. 그래서일까? 그가 십 대 시절 한 소녀에게서 받았던 상처가 애절하면서도 씁쓸하게 다가왔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꼭 그래야 했던 걸까, 하는 질책이 내 안에서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다. 

다시 짚지만, 이 작품 속 현재는 죽기 직전의 크눌프이다. 젊은 방랑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크눌프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일까? 왜 헤세는 중년의 방랑자 크눌프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내가 이번에 느낀 대로, 단순한 자유가 아닌 시기에 맞는 자유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후반전을 전반전의 연장전으로 만들고 있는 한 사람의 안타까운 현재를 그려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삶이 크눌프의 경우엔 '떠남'으로 보였을 뿐, 어쩌면 '정착'만을 고집하며 크눌프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적용할 수 있진 않을까? 작품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과 만족에 이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오십이 다 된 내 눈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크눌프과 그의 친구들은 양극단에 치우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상황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정착과 떠남, 그 어느 하나에 매몰되지 않는 삶을 소망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삶을 동경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정착의 시기에는 거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인생의 맛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길 바란다. 언제 다시 떠나야 할지, 언제 다시 정착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바라게 된다. 아니,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가능 속에 지혜라는 열매가 숨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열매에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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