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법 - 엔도 슈사쿠의 행복론
엔도 슈사쿠 지음, 한유희 옮김 / 시아출판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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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를 넘어서는 인생 에세이

엔도 슈사쿠 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읽고

인생 사는 노하우, 인간관계 잘하는 법 등의 처세술을 적어놓은 자기 계발서 같은 책은 일찌감치 졸업했다. 진부한 원리를 마치 저자 혼자 알아낸 것처럼 호들갑 떨며 비결을 빙자하여 자기 자랑하는 꼴이 보기 싫었고, 거짓 겸손을 나름 우아하게 사용하며 토해낸 열변도 한낱 시공간에 제한된 특수한 상황 논리에 철저하게 좌우되는 단발적인 이벤트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은 책들도 있겠지만, 그런 걸 찾아내는 데에 나의 시간과 노력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읽을 것들은 언제나 넘쳐나 산을 이루고 있는데도 나는 그 높은 정상도 보지 못하는 저 아래 땅바닥에 붙어 있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 읽지 못할 책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자기 계발서는 읽어야 할 목록에서 가장 먼저 제거되었다. 후회는커녕 독서에 막 입문하여 자기 계발서 따위에 시간과 돈을 탕진하고 있는 사람에게 적극 권장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종류에 해당된다. 제목을 보라. ‘나를 사랑하는 법’. 그리고 부제도 마찬가지다. ‘엔도 슈사쿠의 행복론’. 책 표지만 보고도 가장 먼저 거르는 책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왜 이 책을, 비록 정독까진 하지 못했지만, 읽게 되었을까? 이유는 딱 하나.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은 총 셋인데, 모두 강렬한 인상과 진한 여운을 남기는 동시에 깊은 감동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침묵’, ‘침묵의 소리’, 그리고 ‘깊은 강’은 재독 리스트에 올라가 있으며, 한국 와서 재구입한 책에 속한다.


고백하자면, 이 책 ‘나를 사랑하는 법’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 중고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구입하다가 무료배송을 위한 금액이 조금 모자라 원래 계획에 없던 책들 중 한 권을 더 사고자 충동적으로 여러 책들을 훑어보다가 단지 엔도 슈사쿠라는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엔도 슈사쿠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그냥 줘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뒤에 번역자가 쓴 ‘옮기고 나서’에 내가 이 책을 읽고 받은 인상이 간결하게 적혀 있다. 다음과 같다. 


‘…인생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시중에 소개되고 있는 이와 비슷한 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엔도 슈사쿠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이 책 속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작가적 역량을 뒷받침해 주는 그만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단지 처세술이랍시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싸구려 자기 계발서가 아니다. 오히려 굴곡 많고 사연 많은 엔도 슈사쿠의 인생 여정을 절제된 톤으로 볼 수 있는 에세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어낸 사람, 전쟁 후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간 사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의 강권으로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 그러나 그것이 몸에 맞지 않은 양복임을 깨닫고 저항했던 사람, 그 저항의 방법이 옷을 벗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행히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본옷으로 재단하여 만들고자 시도했던 사람, 그렇게 하여 ‘침묵’이나 ‘깊은 강’과 같은 대작을 쓰게 되었던 사람, 엔도 슈사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 책에 쓰인 것과 비슷한 말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나는 엔도 슈사쿠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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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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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문학을 넘어 인간에 이르기까지


신형철 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는 믿음직한 나침반처럼 나는 독서와 독서 사이에 신형철의 글을 조금씩 꺼내 읽는다. 한꺼번에 다 읽기 아깝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랬다가는 나의 소화 능력을 초과하여 오줌만 노랗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것은 아끼고 싶은 법. 몇 꼭지씩 나눠 책과 책 사이에 읽자는 게 신형철의 글을 아끼는 나만의 방법이자 그의 글을 읽는 나만의 독법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완독하는 데에도 세 달 정도 걸렸다. 그 사이에 읽은 책도 족히 열 권은 넘을 것이다. 

소화 불량일 때 찾아 먹는 신뢰할 만한 소화제처럼 나는 쓰기 대비 읽기에 치우칠 때마다 신형철의 글을 찾아 읽는다. 능수능란하고 처세에 능한 수많은 어른들의 다양한 페르소나에 진이 빠질 때 때마침 눈에 들어온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것처럼 나는 읽기에 함몰되어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를 때마다 신형철의 글을 읽는다. 그러면 막혔던 관이 뚫리고 정상적인 흐름을 되찾는 것처럼 나의 읽기의 영점도 재조정되곤 한다. 이것저것 열 권이 넘는 책을 허겁지겁 읽을 땐 몰랐다. 흐트러지고 복잡해진 나의 방향을.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읽기를 넘어 쓰기에 대한 방향도 선명해진다. 

‘영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 평론.‘ 그러나 이 책을 설명하기엔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신형철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 다음과 같이 써야 한다. ’영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쓴 영화 평론.‘ 나는 영화 평론을 읽기 위해 이 책을 고른 게 아니다. 영화를 자주 보지도 않을뿐더러 영화에 대한 평론은 여태껏 한 번도 일부러 찾아 읽어본 적이 없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신형철의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영화 평론이 아닌 신형철의 글로써 이 책을 읽어서인지 나에게 이 책은 내가 읽은 신형철의 세 번째 책일 뿐이다. 참 아쉽게도 그의 저서는 몇 권 안 된다. 내가 읽지 않은 그의 두 저서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는 지금도 아주 느리게 아끼면서 읽어나가고 있다.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 평론 덕분에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과 영화의 닮은 점이 좀 더 명료하게 보이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야기다. 내러티브, 혹은 스토리텔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참고로, 2014년 10월에 초판 1쇄를 찍고 2015년 3월에 7쇄를 찍은 이 책은 2012년 여름부터 2014년 봄까지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신형철의 스토리-텔링’이라는 타이틀로 매달 연재한 글들을 주로 모아 엮은 것이다. 총 네 주제로 구성되어 있고, 각 주제는 다섯 꼭지의 영화 평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에도 나와 있지만, 네 주제는 다음과 같다. 사랑, 욕망, 윤리, 그리고 성장. 이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 네 주제는 영화의 고유한 주제가 아니라 문학을 포함하는 인간들이 만드는 모든 이야기의 고유한 주제라는 사실을. 인간은 사랑하고, 욕망하고, 윤리를 어기거나 지키거나 혹은 그러려고 혹은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고, 갖은 어려움을 경험하며 내적인 성장을 이뤄낸다. 문학이나 영화는 모두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것으로써 존재한다. 위의 네 가지 키워드는 인간사를 요약한 네 단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것이 이 책, 그러니까 ‘영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 평론’의 고유한 장점이라 생각한다. 거기에다가 신형철이라는 독보적인 존재가 쓴 글이라는 점은 이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것 같다. 영화를 넘어 문학을 넘어 인간에 이르는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나 ‘인생의 역사’에서도 그랬던 것 같은데, 이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도 첫 번째 꼭지와 두 번째 꼭지 (혹은 세 번째 꼭지까지)에서 나는 숨을 참을 만큼 깊은 울림을 느꼈다. 여기서 그 울림이 어떻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울림이라는 것이 신형철을 많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이유이자 신형철만이 해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여기선 그저 그가 늘 강조하는 ‘정확함’이라는 단어밖엔 표현할 수 없어 감상문을 쓰는 나로선 답답할 뿐이다. 
 
신형철은 한 꼭지를 쓰기 위해 같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봤다고 한다. 글 하나에 담긴 보이지 않는 애씀과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함’의 깊이와 예리함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혹은 다르게 보이는 것들로 인해 그의 글도 그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이 가해졌을 것이다. 한 달에 한 꼭지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신형철은 그렇게나 노력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싶다. 정확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시간과 마음과 행위들. 글을 대할 때 조금 더 진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확한 사랑, 정확한 글을 위해서.

 

* 신형철 읽기

1.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1161

2. 인생의 역사: https://rtmodel.tistory.com/1525

3. 정확한 사랑의 실험: https://rtmodel.tistory.com/1654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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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도 믿음의 글들 24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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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관한 루이스의 생각

C. S. 루이스 저, ‘개인 기도’를 읽고

공동 기도가 아닌 개인 기도에 관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바라본 여러 의문점들과 그에 대한 루이스의 견해 혹은 믿음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다. 자칫 가르치려 드는 자의 강압적인 뉘앙스를 피하기 위해 루이스는 말콤이라는 가상 인물을 설정하고 그에게 편지로 답을 하는 방식을 취한 듯하다. ‘루이스가 메리에게’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볼 수 있지만, 말콤은 메리보다는 신학 혹은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이 많은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루이스의 답장은 기독교의 교리나 문화 혹은 세계관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보다는 좀 더 세분화되고 전문적이라 할 수 있는 깊이까지 나아간다. 이 책의 장점은 평신도 입장에서 개인 기도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는 점이지만, 이것은 또한 이 책의 한계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에 적힌 루이스의 대답이나 설명이 기독교의 공통된 입장이라기보다는 신학과 철학과 문학에 능통한 한 평신도의 입장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속한 기독교는 영국 성공회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특히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 천국의 모습이나 기도의 능력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루이스가 편하게 쓴 개인적인 의견 정도로 보는 관점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이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말콤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서간체 형식을 빌려 이 책을 쓴 이유일 것이다. 

루이스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둥, 루이스의 책을 읽으면 혼란이 온다는 둥의 의견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평신도가 마음껏 상상하고 의견을 내놓는 모습이 나에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묻지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익명성의 비겁한 무리보다는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루이스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루이스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당대와 후대 기독교인에게 남긴 건 실보다는 득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책에선 개인 기도 중에서도 청원 기도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을 이룬다. 전지하신 하나님에게 우리는 왜 청원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성만찬이나 몸의 부활 등의 성경적 지식과 교리에 이르기까지 루이스의 해박하고 일리 있는 친절한 설명을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밑줄 그으며 묵상할 만한 문장들도 많았다. 네 문장만 여기에 옮겨본다.

“균형 잡힌 마음상태는 기도로 구해야 할 축복 중 하나이지 기도할 때 입어야 하는 멋진 의상이 아니라네.”
루이스가 무심히 던진 이 문장을 읽고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아마도 자주 기도를 미루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는 나의 모습이 드러난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작은 일들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체면 때문일 듯싶네.”
이 문장 역시 읽고 나는 부끄러웠다. 기도를 어떤 어렵고 구별된 의식만으로 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와 기도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수 있었다.

“신비주의를 향한 나의 욕구는 물욕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사도 바울의 판단으로 보자면 ‘영’이 아니라 ‘육체’에 해당하네.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탐욕스러운 욕구가 있을 수 있는 거야.”
기독교는 신비하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위험하다. 나는 루이스처럼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면이 기독교의 중요한 부분이라 믿는다. 

“청원기도에 대해 너무 많이 쓴 것 같기도 해. 하지만 후회하지 않네. 그것이 올바른 출발점이거든.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도 하고. 나는 청원기도의 문을 지나지 않고서 더 높은 형태의 기도를 하거나 그런 기도를 논하려 드는 사람은 믿을 수 없네. 청원기도를 하지 않거나 경멸하는 것은 탁월한 거룩함의 표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하여 낮은 수준에서 만족한다는 표시일 수 있다고 보네.”
나는 이 문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솔직하게 나를 열고 어린아이처럼 간구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균형은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모든 신앙인에게 권하고 싶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도 좋아할 것이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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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여행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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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함일지도 모르는 긴장 섞인 서먹함

슈테판 츠바이크 저, ‘과거로의 여행’을 읽고

한 남자가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그가 부인이라 부르는 한 여자를 만나 함께 기차를 타고 하이델베르크를 향한다. 두 사람 사이엔 애틋함일지도 모르는 긴장 섞인 서먹함이 감돈다. 이 묘한 감정은 사랑, 열정, 초조, 혼란, 그리고 자제가 낳은 열매이자 이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유지되는 감정선이다. 약 십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헤어지기 직전 금지된 사랑을 막 시작했었다. 그러나 남자의 멕시코 장기출장 때문에 둘은 반강제적으로 헤어져야만 했고, 마침 유럽에서 터진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별의 기간은 더 길어졌었다. 유일하게 둘을 이어주던 편지까지 전쟁 때문에 불가능해지면서 남자의 마음에선 점점 여자가 잊혀갔다. 남자는 멕시코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는다. 세월이 흘러 전쟁이 끝나자 남자의 마음속엔 다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 한동안 잊었던 여자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2년 뒤 남자는 업무회의차 베를린을 찾게 되고, 여자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의 남편이자 남자의 보스였던 사람은 이미 죽었고 여자는 혼자였다. 둘은 과연 십 년 전 못다 한 사랑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인가. 스포를 하지 않기 위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생략하기로 한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남자는 겸연쩍은 마음으로 잡은 호텔방에 간신히 부인과 함께 들어가지만 이내 답답함을 느끼고 탈출하듯 산책을 나와 회상에 잠긴다. 십 년 전 여자가 읽어주던 시가 떠올라 남자의 기억의 저장고를 열어젖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 시는 예언과도 같았다. 다음과 같다. “얼어붙고 눈 내린 옛 공원에서 두 그림자가 과거의 흔적을 찾고 있구나.”

막 불이 붙었지만, 장작개비 하나 태우지 못했던 금지된 사랑이 십 년이라는 기간을 통과하며 어떻게 변모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슈테판 츠바이크는 단지 그 변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순간순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감정선에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결과보다는 과정이랄까.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도 알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을 갖는 작품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미완성이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은, 독자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남자와 여자의 그 애틋하고도 서먹하고 도무지 어찌할 바 모르는 그 묘한 감정선을 함께 타며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미완성 이야기로 완성을 이룬 것이다.  

어찌 보면 삼류 연애소설 같은 냄새가 살짝 풍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이 작품은 너무 우아하다. 상상할 수 없는 시공간과 상황 속으로 나를 데려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힘. 나는 다시 한번 겸허한 마음으로 슈테판 츠바이크 앞에 서게 된다. 그의 전 작품을 읽을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귀재임이 틀림없다.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빛소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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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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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된 욕망

오노레 드 발자크 저,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을 읽고

단편소설을 즐기지 않는다. 급작스런 이야기 전개로 말미암아 증폭되는 주해와 해석의 간극 앞에서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현대소설을 즐기지 않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재치와 기발함보다는 진부할 정도로 상투적인 (뻔한) 주제와 이야기 전개를 선호하는 나는 빛바랜 상투성에서 감춰진 보석과도 같은 진리를 재발견하고 독자의 마음과 생각을 환기시키는 것이 문학이 해낼 수 있는 힘이라 믿는다. 

이런 나로서는 이 책에 담긴 두 단편을 읽긴 했으나 제대로 읽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맥락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단편소설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지고야 마는 사건이 과연 무엇을 상징 (의미)하는지 나는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 할지도 모르겠다. 나완 달리 단편이 주는 그 끊김에 오히려 매력을 느끼고 즐기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녹색광선에서 2019년에 출판한 첫 책에 담긴 발자크의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은 모두 인간의 내재된 욕망을 다룬다. 전자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영생에 대한 욕망을, 후자는 살아 숨 쉬는 미술 작품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을 보여준다. 영생에 대한 욕망은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 숨 쉬는 회화에 대한 욕망은 예술가만이 공유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는 예술가가 아닌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이 작품에서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감상문에서는 한 작품씩 짧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영생의 묘약‘
주인공 돈 후안은 호화로운 저택에서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부잣집 아들이다. 어느날 파티가 한창일 때 임종을 맞이하게 된 아버지 옆에서 돈 후안은 아버지로부터 최후의 부탁을 듣는다. 마지막 숨을 거두자마자 작은 천연 수정 병 안에 든 물로 온몸을 닦아달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돈 후안은 한참을 망설였다. 시간이 흐르고 장례를 준비하러 온 모든 사람들을 내보내고 돈 후안은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실행에 옮겨보기로 한다. 온몸이 아닌 눈 하나만 닦아보자고 생각했다. 시체의 오른쪽 눈꺼풀을 살짝 닦자마자 아버지의 눈이 뜨였다. 돈 후안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하셨던, 계속 살 거라는 둥, 자신이 신이라는 둥,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수정 병 안에 든 물은 영생의 묘약이었던 것이다.

약삭빠른 돈 후안은 부활한 아버지의 눈을 리넨 천으로 짓이겨 죽여버린다. 이후 효심 깊은 아들로 추앙받게 되었고, 영원히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돈 후안은 지혜가 생겼는지 세상의 모든 원리를 꿰뚫게 된다. 예순 살이 되고 스페인에 정착한 그는 결혼하고 아들 펠리페를 갖는다. 시간이 지나고 돈 후안도 노쇠해진다. 임종을 맞이할 즈음이 되어 아들 펠리페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언젠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 부탁을 말이다. 물론 펠리페가 자기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여러 수사들과 거짓말을 동원하면서.

아들 펠리페는 돈 후안과 달리 효심 깊고 순종적이었다. 아버지의 부탁대로 실행에 옮긴다. 밝은 달빛 아래 충실히 시체의 얼굴을 닦았고, 이어서 오른팔을 적시자마자 젊고 억센 아버지의 팔이 펠리페의 목을 졸랐다. 유리병이 떨어졌고 액체는 다 증발해버렸다. 돈 후안은 얼굴과 팔 하나만 부활한 불완전한 영생체가 된 것이었다. 머리 좋은 사람답게 산루카르 수도원장은 이 기적을 이용해먹기로 결심했고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예식을 보러 온 모든 사람들 앞에서 무신론자 돈 후안의 머리는 조롱과 저주의 말을 쏟아내며 몸에서 툭 떨어져나와 신부의 머리를 물어뜯는다. 수도원장이 숨을 거두는 순간 돈 후안의 머리는 외친다. “바보 같은 놈. 자, 말해보시지, 신이 있다고?” 그리고 책은 마무리된다. 영생을 욕망했던 자의 최후는 우스꽝스럽고 괴기스러운 머리와 한쪽 팔, 즉 불완전한, 아니 어쩌면 존재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법한 존재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2. ‘미지의 걸작’
이 작품에서 초점이 맞춰지는 인물은 프렌호퍼 선생이다. 그는 다른 두 인물, 포르뷔스와 푸생과는 달리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발자크가 예술가의 내재된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한 천재 화가이다. 프렌호퍼 선생은 이미 노인이며 세상에서 아무 화가도 할 수 없는, 회화 속 인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기법에 능통한 자였다. 그는 십 년 전부터 그려왔던 한 여인에 대한 그림이 있다고 했다. 그 그림은 그림을 넘어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그리고 프렌호퍼의 애인이자 프렌호퍼 자신만의 창조물이자 소유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기간 애를 썼고, 그러면서 그 작품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비밀 (미지의 걸작)이 되었다. 그는 끝내 만족하지 못했다. 여전히 생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프렌호퍼에게 부족한 것은 실제 모델이었다.

어쩌다 프렌호퍼와 포르뷔스 사이에서 끼게 된 푸생은 애인에게 프렌호퍼 선생님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그냥 모델이 아니라 누드 모델이었다. 다른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이었다. 푸생과 그의 애인 질레트는 헤어질 수 있는 위험을 감지했고 그것을 감수해야 했다. 질레트는 푸생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도 생각했다. 프렌호퍼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푸생과 질레트는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질레트를 보고 프렌호퍼는 십 년간 숨겨오며 은밀한 관계를 가졌던 그림 속의 여인 카트린 레스코를 공개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포르뷔스와 푸생은 잔뜩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렌호퍼가 아끼는 여인이 그려진 그림이라 하는 화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실물처럼 그려진 한쪽 발을 제외하고는 여러 선들과 색들만이 빈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렌호퍼는 혼자서 광기에 찬 채 ‘무’에서 ‘완전’을, 그리고 ‘생’을 마음 속에서 그려내고 그것을 실제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그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어느 한 천재 화가의 환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프렌호퍼는 다음날 자신의 모든 그림을 불태우고 자기 자신마저도 죽음으로 내몬다. 

이 두 작품의 공통된 소재이자 주제는 인간의 내재된 욕망이지만, 발자크는 단지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부질없고 불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쩌면 발자크는 이 두 단편소설을 통해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에 대해 일종의 경고를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돈 후안도 프렌호퍼도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 후안과 프렌호퍼는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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