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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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창백한 마음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 저, ‘창백한 말’을 읽고

첫 페이지만을 읽고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어느 정도 읽어본 시람에게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나는 이를 감히 축복이라 부른다. 운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오래토록 옆에 두고 자주 펼쳐보며 참조해야 할 작품이라고 믿게 된다. 독자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말이다. 너무 많이 봐서 닳게 될 경우를 대비해, 혹시라도 절판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미리 여러 권을 소장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추천사를 쓴 정지돈 작가가 인생 소설이라 하고 필사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아끼는 이유를 알 듯하다. 

처음 만난 사빈코프의 글은 혁명과 테러의 중심에 선 주인공의 일기 형식을 따르기 때문인지 무거웠다. 그의 글은 고독하고 외롭기도 했다. 이는 주인공이 이끄는 테러의 성격을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리더 위치에 서 있는 주인공 조지를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의 동료들만이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목숨을 걸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은 고독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장하기까지 하다. 소설이 끝날 즈음에는 다섯 중 셋은 목숨을 잃는다. 글이 고독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의 성격 탓일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일기이기 때문에 객관적 서술보다는 주관적 서술과 내면의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모든 페이지에 나타나는 화자의 내면은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고통스러울 때 소리 하나 지르지 않을 정도로 화자는 일반적인 감정 수준을 이미 초월한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살인을 왜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하는 여러 복잡한 내면의 갈등마저도 그는 이미 초탈한 듯했다. 이미 그에게 테러는 어쨌거나 실행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를 따르는 동료 넷의 목숨을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호함도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을 죽인 후 달라진다.

총독을 암살하는 계획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조지는 기쁘지 않다. 그의 삶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다른 타겟을 위해 암살을 계획하고 대의로 포장한 채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삶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했던 것일까. 목표 달성 후에 느껴지는 한없는 공허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총독 암살은 대의로 포장할 수 있다. 테러라는 말조차 반대편에서는 혁명의 씨앗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고자, 즉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살인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총독 암살이 성공리에 끝나고 작품 속 화자 조지는 연모하는 옐레나의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만다. 이유는 간단했다. 옐레나를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살인 후 조지는 괴리감에 괴로워한다. 총독 암살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괴로워하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 살인을 했지만, 그 사람만을 죽인 게 아니라 사랑도 죽였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 가서 그는 고백한다. 더 이상의 테러를 원하지 않는다고. 사랑도 필요 없고 나는 혼자라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별이 빛나기 시작하고 가을밤이 오면 나는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다. 나의 권총은 나와 함께 있다.”

대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적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똑같이 살인을 행한 조지. 그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나아가,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작품 마지막 문장으로 미루어 보아 조지는 아마도 가을밤에 홀연히 권총으로 자살을 실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의든 소의든 살인을 행하고 난 뒤 그는 결국 모든 걸 잃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마저 스스로 끊어야 할 만큼. 비록 살인자이지만 나는 조지에게 연민을 느낀다.

한 편의 소설이 남기는 흔적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가을밤마다 혹시 그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행여나 내게 깃들지 않길 나는 바라게 된다. 하늘도 창백하고 내 마음도 창백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빛소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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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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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저, ‘마음’을 읽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품은 자를 확신으로 이끌었다가도 이내 무지의 바다에 빠뜨려 당황스럽게 하며, 알아챈 자 역시 동일한 미궁에 빠뜨리고 마는 것.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이며 정체를 알 수 없어 그 존재 자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 그러나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제목이기도 한 바로 그것. 마음. 


읽는 내내 복잡한 마음이었다. 작품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작품을 읽는 내 마음만 복잡했을 뿐이다. 마치 확신과 무지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심정이었다. 나는 또다시 내 안에서 깊은 모순을 느꼈고, 죄책감을 느꼈으며, 속죄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낯설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뇌했고 아파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시기에 손에 쥐게 된 책이 ‘마음’이라니. 어쨌거나 나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뒤늦게 또 하나의 거장의 작품 세계로 입문하게 된 것이다.


정의하기가 까다롭지만 (불가능할지도), ‘마음’은 ‘심리’ 혹은 ‘인간의 본성’과도 중첩되며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는 본질 중 하나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생각과 마음’의 이분법을 들며 생각은 머리에서 마음은 가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생각이 머리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동의가 되지만, 마음이 가슴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동의가 되지 않는다. 생각과 마음이 과연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면에서도 나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관념적이라거나 추상적이라서, 마치 영혼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부정신학적인 방법을 차용할 수 있다면,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은 적어도 가슴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고. 


인간의 본성을 다룬 여러 천재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읽어왔지만, 단 한 번도 지겹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는 작가마다 다른 각도, 시선, 문체로 다양한 상황, 사건들을 다루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마도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신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묘연함이 가지는 매력이랄까. 안다고 여겼으나 알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 같은 힘이랄까. 글의 영원한 소재와 주제가 될 마음. 작가 정보를 간략하게 훑어보니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의 마음 (혹은 심리 혹은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대표작이라 불리는 이 책에서도 그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주력한다. 서사보다는 묘사에 치중한 작품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고 마음에 남았다. 아마도 한동안은 그러리라 생각된다. 그 때문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도 들여다보고 싶어 오늘 나는 여러 작품들을 찾아 보관함에 넣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두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1, 2부의 화자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아니 어쩌면 운명적으로, 3부의 화자인 ‘나’를 만나게 된다. 첫 문장을 “나는 그분을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로 시작하는 것만 봐도 이 작품은 1, 2부의 화자가 3부의 화자를 만나고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 형태를 띠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게다가 3부는 분량이 전체의 절반 정도 되는 데다 편지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 나쓰메 소세키 시선의 무게중심은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의 마음 위에 머문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1, 2부의 화자는 3부의 화자를 전면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공교롭게도 죽음이었다. 그것도 타살이 아닌 자살. 이 작품에서도 죽음 (자살)의 냄새는 진하게 배어있다. 선생님이라 불렸던 3부의 화자도, 또 그를 자살하게 만든 동기를 제공했던 과거의 친구 K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1, 2부의 화자가 적어도 이 작품 속에서는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 여겼다. 일본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번엔 또 누가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된다. 


나쓰메 소세키는 선생님의 마음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다거나 파헤치지 않는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가능한 그대로 묘사하려 애썼던 것 같다. 시대가 지나도 인간의 마음은 마치 그대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레 시공간이 엄연히 다른 곳에 위치했던, 그것도 가상의 인물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장수 비결일 것이다. 어쩌면 스토리텔링 혹은 내러티브의 무게중심은 거대하거나 기발한 서사에 있지 않고 그 서사 가운데 서 있는 인간의 내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의 힘이다.


선생님의 마음을 한 단어로 집약시킬 수는 없겠지만, 부채감, 죄책감, 수치 등으로 해석한다면 모든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그가 이 작품의 3부를 이루는 생애 마지막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자살을 감행했던 이유 역시 이런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선생님은 막역했던 친구 K의 자살을 본인이 저지른 타살로 여기진 않았을까. K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하숙집 주인의 딸을 K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 발 앞서 결혼을 서둘렀던 선생님. 축복된 결혼식에서도 K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K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내에게 죽기 전까지 진실을 말하지도 못한 채 세상과 동떨어진 섬이 되어 평생을 살아갔던 선생님. 3부를 이루는 마지막 편지 안엔 모든 진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1, 2부의 화자는 이 세상에서 선생님의 진실을 알게 된 유일한 남자가 된 것이었다.


마지막 편지는 선생님의 독백이기에, 그리고 인생 전체가 담긴 막중한 무게 때문이라도, 독자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K의 자살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내가 발췌한 다음의 문장들만 읽어도 선생님의 마음을 살짝이라도 훑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네. 내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네.”


“나는 책략으로는 이겼지만 인간으로서는 패배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네.”


“내가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은 문구는, 편지 끝에 남은 먹물로 갈겨쓴 듯,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마지막 한 줄이었네.”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기만당했을 때 타인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만큼 나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은 완벽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 그런 믿음이 K의 일로 보기 좋게 무너지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을 때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네. 타인에게 등을 돌렸던 나는 곧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었고, 나 자신을 가둔 채 점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 변하고 말았네.”


“그럴 때마다 나는 웃기만 했지. 그러나 속으로는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슬펐네. 아니지, 이해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만들 용기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고 해야 옳을 것이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지. 나는 외로웠네. 나는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했네.”


“현실과 이상의 충돌, 그런 표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지만, K는 나처럼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네. 나 또한 K가 걸어간 길을 똑같이 걸어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거든. 나뭇잎을 소리 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욕망, 배신, 불신, 죄책감, 부채감, 고독, 그리고 자살. 이렇게 흘러가는 플롯에서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존재할까. 그럴 수 없기에 이런 문학 작품은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면서도 끊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읽히는 게 아닐까. 본질은 마음이다. 진정성 어린 마음. 모든 서사를 뛰어넘어 독자의 마음에 가 닿는 그 무엇. 밝음보단 어두움이 지배하는 작품이지만, 모든 인간의 마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가식적인 밝음을 만들어내어 보이는 것보단 어두움을 직시하게 만드는 방식이 주는 이 의외의 효과. 아, 인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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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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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선을 넘어선 자, 영점을 재조정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죄와 벌‘을 다시 읽고

5년 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으니 내 시선은 줄거리보다 등장인물에 더 오래 머문다. 게다가 지난 10개월간 독서모임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부터 출간순으로 한 달에 한 작품씩 읽어오며 도스토옙스키의 발전과정을 함께 해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더욱 친근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이 글에서 나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나 자신은 물론 인간을 보길 원한다.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이 글이 아니라 나의 초독 감상문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작품을 읽고 줄거리를 충분히 파악하고 작품에 흐르는 철학과 사상을 느껴본 분들을 위한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등장인물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라스꼴리니꼬프의 속성이기도 한데, 경우에 따라 다른 주변 인물들과 비교와 대조를 할 것이다.

선을 넘어선 자

소냐의 집을 찾아간 날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 역시 똑같은 일을 했잖아? 당신 역시 선을 넘어선 거야. 넘어설 수 있었던 거지. 당신은 자기 몸에 손을 댔고, 스스로를 죽여 버렸어. 자기 생명을 말이야. 우리는 같은 길을 가야 해. 그러니 함께 갑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로부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 동질성은 곧 ‘선을 넘어섰다는 것’. 작품의 맥락을 볼 때 이는 ‘살인’을 뜻한다. 그러나 살인도 살인 나름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이 타자를 물리적으로 죽인 것이라면, 소냐의 살인은 자신을 정신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큰 범죄를 저지른 뒤 살아 있는 양심 때문에 정신적으로 쫓기는 살인자의 성급함일까? 그의 논리에선 비약이 감행된 객관성 상실이 확연해 보인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분석처럼 소냐에게는 치욕적이고 저급하고 세속적인 모습과 그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고결하고 성스러운 모습이 공존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부의 길을 선택한 소냐. 어쩌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자기 죽임’을 살인이라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음을 택하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예수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타자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을 감히 살인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제사로 쓰인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의 죽음은 모두를 위한 거룩한 희생이다. 소냐는 한 알의 밀알로서 가족을 먹여 살렸고, 나중엔 그녀를 잠시 오해하고 비난했던 라스꼴리니꼬프마저도 살려내는 역할을 감당한다. 소냐의 ‘자기 죽임’은 실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반면, 라스꼴리니꼬프의 노파 살인은 자기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을 죽이는 열매를 맺는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죽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이자 살인자의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분석은 반만 옳았다. 둘 다 ‘선을 넘어선 자’였지만, 소냐는 타자를 위해, 라스꼴리니꼬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소냐는 사람을 살리는 선의 열매를,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람을 죽이는 악의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각자 다른 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참고로, 끝내 자살을 택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기 죽임’은 소냐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차이 역시 자기를 위한 것인지 타자를 위한 것인지에 있을 것이다. 자기를 위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살은 라스꼴리니꼬프의 타살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 곧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일까? 라스꼴리니꼬프는 다음과 같이 자기가 소냐와 다름을 인정하게 된다.

“아아, 우리는 서로 다른 부류의 인간이야! 나는 마음이 악해. 그러니 짝이 아냐! 나는 왜 여기 온 걸까!”

놀랍게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가 모순된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기처럼 폭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에서 소냐와의 근원적인 차이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한 문장이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어요?”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이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인 후 계획에도 없던 추가적인 살인의 희생자, 리자베따와 같은 유로지비였다. 유로지비는 존재 자체가 어쩌면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바보 혹은 백치이지만 성자처럼 고결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유로지비이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달리 소냐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소냐는 인간의 숙명적이고 존재론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이 세계관이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처럼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람이라 믿었고 그것을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산술적인 공리주의 따위에 생을 걸었던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에 관심이 있었을 뿐 인간 존재를 거뜬히 뛰어넘는 하느님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은 왜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내 결정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지요? 누구는 살아야 하고, 누구는 죽어야 한다고 심판할 권리를 누가 내게 주었나요?”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는 공히 선을 넘어선 자였지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인 차이를 인정하는지에 따라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또한 소냐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알고 있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스스로가 어떤 위치에 놓인 인간인지 테스트해보려 했던 자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나는... 더러운 여자예요. 나는 큰, 크나큰 죄인이에요! 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는 인간을 어떻게 분류하는지를 따지는 어리석은 땅의 질문에서 벗어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유한한 인간, 죄인인 인간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 세계관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우연에 이끌리는 자

재독 하면서 한 가지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의 힘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 도구가 될, 미리 점찍어 둔 도끼 대신 우연찮게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도끼를 비롯하여 그의 살인 시도는 수차례 좌절될 수 있었으나 그때마다 기적처럼 예상치 못한 길이 열려 결국 살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우연에 이끌리는 자라고 보았다. 살다 보면 우린 모두 이와 비슷한 순간들을 겪는다. 하늘이 돕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는 듯한 상황을 마주할 때면 평소에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운명적인 힘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도스토옙스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 과정에서 이러한 운명적인 우연의 힘을 등장시킨 것일까?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범죄는 보이지 않는 악마의 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그런 일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결코 저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연은 우연을 경험하는 당사자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법이다. 운명의 힘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하게 만든다. 소냐와 리자베따 역시 사람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가 이끌린 비가시적 존재는 그 정반대에 위치한 존재였을 것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 영적인 차원의 존재 말이다. 여기서도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죄와 벌이란?

재미있게도 라스꼴리니꼬프의 이성은 양심과 맞물려 잘 돌아갔던 것 같다. 스스로도 고백하듯 그는 미친 상태가 아니라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 후에도 그는 자신의 범죄를 숨기려는 마음과 자백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할 뿐 단 한 번도 정신줄을 온전히 놓은 적이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뇌에 휩싸였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실제로 이 작품의 커다란 중추는 살인 전과 후에 보이는 라스꼴리니꼬프 내면 변화의 추적이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이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계속해서 읽히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라스꼴리니꼬프 내면의 변화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 내면의 변화와 보편적인 인간 내면의 변화를 보는 것이다. 

이제 이 작품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죄와 벌이 무엇일지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두 사람을 죽인 행위만을 죄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모든 것이 허용되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 다시 말해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 즉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은 죄라기보다는 죄인의 가시적인 범죄 행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죄를 저지른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를 통한 갱생에 이르기 전까지의 삶 전체를 벌로 봐야 할 것이다. 고뇌에 찬 고립되고 단절된 삶 말이다.

이런 해석에 기댈 때 나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바로 나 자신이고 우리 모두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처럼 가시적인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죄인일 수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을 재독 하면서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 사상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매춘부를 통해 구원에 이르고 마는 살인자의 이야기. 잘못된 선을 넘어선 자가 영점을 재조정하는 이야기. 거룩한 생명의 빛은 바닥 같은 인생을 사는 두 사람을 통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다. 어쩌면 바닥이라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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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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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최은아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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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도 있었을 체스 한 판


슈테판 츠바이크 저, ‘체스 이야기’를 읽고


우둔해 보이고, 이마가 넓으며, 어느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시키는 일을 제외하고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방에 앉아 있는 게 전부여서 도대체 커서 무슨 일을 할 수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아이가 있었다. 도나우강에서 돛대도 없는 작은 배를 운항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슬라브 남부 출신 선장의 아들이었다. 그는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후 어느 착한 신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신부는 그를 교육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그의 무능력과 무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졌다. 어느 날, 신부가 지방경찰과 체스를 두고 있는데, 그 소년은 말없이 그들 옆에 웅크리고 앉아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체스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화가 한 통 걸려오고 신부는 자리를 일어나야만 했다. 끝내지 못한 체스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바로 그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부를 대신하여 체스를 두다가 열네 번 체스 말을 주고받은 후 소년은 지방경찰을 이겨버리고 만다. 나중에 신부가 돌아와 소년과 겨루었지만 같은 결과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이가 체스 천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미르코 첸토비치. 한때 세계 체스 챔피언을 거머쥐었던 인물의 이름이다. 


바로 그 미르코 첸토비치가 세계 챔피언이 되어 현재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있다. 우연히 그 배를 탄 슈테판 츠바이크인 듯한 화자는 그가 몹시 궁금했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폐쇄적이고 미성숙하고 체스 밖에 모르는 그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묘안을 생각해 낸다. 배 한 편에서 체스를 두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궁극적으로 미르코의 발걸음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작전은 성공한다. 미르코가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한 미지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미르코와 대비되는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인 이 인물은 오스트리아 출신이자 정부 인사에 깊숙이 관여했던 변호사였고, 나치가 강제수용소 대신 그로부터 비밀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게슈타포의 군사사령부로 쓰였던 한 호텔 방에 감금했던 자였다. 그 호텔 방은 책, 신문, 종이 한 장, 연필 한 개 없이 문 하나, 침대 하나, 안락의자 하나, 세면대 하나, 창살이 있는 창문 하나밖에 없는 완벽한 진공상태의 공간이었다. 게슈타포의 심문은 참을 만했으나 호텔 방 안에서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위의 시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심문받는 날, 그는 운 좋게 게슈타포의 옷에서 책 한 권을 훔쳐 방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책은 소설이나 에세이가 아닌 150편의 챔피언 시합을 모아 둔 체스교습서였다. 체스에 관해 상식 이상 관심이 없던 그는 풀뿌리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책을 보고 또 본다. 모조리 다 외우고, 머릿속으로 혼자 체스를 둘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말이다. 덕분에 게슈타포의 지속적인 심문에도 온전히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내면의 붕괴를 겪게 된다. 그는 흑을 잡은 자아와 백을 잡은 자아로 분열되어 서로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애써야 했고, 동시에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 급기야 정신분열 증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으로 실려가게 된다. 그는 병원에서 착한 의사를 만났고, 그 덕분에 오스트리아 추방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 화자와 미르코와 같은 배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 역시 체스판에 기웃거리다가 화자가 속한 팀이 미르코에게 막 지고 있을 무렵 기막힌 훈수를 두었고, 덕분에 화자 팀은 게임에서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미르코를 체스판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 화자는 이 미지의 인물에게 관심이 갔고, 미르코와 시합해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일 수 있다는 운명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그를 찾아가 미르코와의 대결을 부탁한다. 딱 한 판 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말이다. 그는 자기가 과거에 병원으로 실려갔던 원인, 즉 정신분열증, 공황, 극심한 스트레스 등에 다시 노출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합의를 하고 다음 날을 기약한다.


다음 날, 미르코와 미지의 인물과의 대결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세계 챔피언 미르코는 이 인물에게 패배를 경험한다. 미르코는 한 판 더 두자고 제안한다. 이 미지의 인물은 본인이 딱 한 판 만이라고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덥석 그 제안을 승낙해 버린다. 그러나 그다음 판에서 미르코의 느리디 느린 게임 진행 속도 때문에 조급해진 그에게는 과거의 정신분열증과 공황 증상이 온몸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화자는 그에게 게임을 그만두라고 조용히 말한다. 다행히 그는 화자의 말을 받아들이고 유유히 자리를 떠난다. 체스판 앞에 남은 최후 승리자 미르코는 여전히 느리지만 떠난 인물의 체스가 꽤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고 아마추어치고는 비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인 것 같다고 여유 있게 칭찬한다. 그리고 작품은 끝을 맺는다.

 

마무리랄 게 없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으로 끝을 맺는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닌 '노벨레'라는 형식으로 쓰였다고 한다. 노벨레는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신기한 사건을 간결한 묘사방식으로 재현한 비교적 짧은 산문 또는 운문 형식'이다. 해설에 적힌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이 작품이 비로소 손에 잡혔다. 작품의 줄거리를 충분히 파악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은 제2의 저자인 독자의 재량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말을 100퍼센트 수긍하진 않는 나는 여전히 저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왜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사건을 허구를 가미하여 글로 남긴 걸까?


작품이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미지의 인물의 등장으로 미르코가 곤란함을 느끼게 된 장면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승리자는 여전히 미르코라는 사실에 이 작품의 방점이 있는 것 같다. 미지의 인물은 세계 챔피언에게 잽 한 방을 먹여 아주 잠시 충격을 줄 수는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승리자의 위치에 서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여유롭게 보일 정도로 느릿느릿한 미르코의 행동 앞에서 초조하고 긴장하여 다시 과거의 정신분열과 공황을 경험하게 되면서 서둘러 기권으로 게임을 포기해야 했다는 점에 나는 주목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강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도 세계 챔피언에게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에 저자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다. 


나치의 영향력을 피해 브라질로 망명해 1942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모습을 이 미지의 인물에게 투영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미르코는 나치이자 히틀러의 분신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못내 아쉽다. 몇 년만 더 기다렸다면 그 강력했던 히틀러가 먼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실을 뉴스로 알게 되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독자들은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 츠바이크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 체스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게임에서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체스를 두는 사람이 먼저 죽어버리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츠바이크에게 말해주었더라면! 아쉽고, 또 아쉽다.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는 건 인류의 큰 손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세창미디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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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 - 30년, 10,950일, 38권의 기도일기
이화정 지음 / 선율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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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무게와 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는 책


이화정 저,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을 읽고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얻고 또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였다. 이화정 목사의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을 숨 가쁘게 내리읽고 이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 까닭은 저자의 고백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맥락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엄마의 일기는 내가 쓴 박사 학위 논문보다 더 신학적이고 내가 한 어떤 설교보다 목회적이고 내가 한 어떤 기도보다 영성 깊다고 자부할 수 있다. 복음의 씨앗은 이렇게 이름 모를 섬마을의 한 여인으로부터 심겨졌다. 그렇게 민들레 홀씨처럼 무릎으로 살아갔던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심은 복음의 씨앗이 이 땅 곳곳에 퍼져 나갔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모든 것과 비교한 반면, 이화정 목사는 엄마의 일기를 박사의 논문, 목사의 설교, 영성가의 기도에 비교한다. 그러나 요지는 같다. 그리스도 예수가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라면, 엄마의 일기가 그 어떤 전문가의 글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두 고백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 (그것은 곧 예수로 수렴한다)를 발견한 자의 고백인 것이다. 그 진심이 여과 없이 전해져 나는 마음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책 한 권 읽은 게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깊이 느꼈다. 예수를 느꼈다. 그것은 책 백 권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게였다. 열 권을 더 주문했다. 소중한 분들께 선물할 생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는 바울의 고백을 머리로만 알고 온전히 가슴으로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화정 목사의 고백 앞에서도 같은 심정이 된다. 지금 나의 믿음과 지금 나의 신앙과 지금 나의 영성으로는 이 위대한 고백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그러나 이 고백이야말로 이 책에 담긴 ‘엄마의 일기’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는 책. 가슴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순차적으로 울리는 책.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무엇인지, 어떠해야 하는지, 또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나아가 현재 나의 신앙을 돌이켜 볼 뿐만 아니라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신앙의 전통이랄까 전달이랄까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하지 못하는 기도의 본질을 간접적이지만 먼저 보고 듣고 느낀 뒤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책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전부 다 밑줄을 그을까 봐 밑줄 긋기를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래도 꼭 표시해 두어야 할 부분 중 한 군데를 옮겨 본다. 다음과 같다. 


“부모는 아이들의 거울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부모의 신앙을 보고 배운다. 그런데 부모의 신앙은 별로 배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문제를 풀기는 참 쉽지 않다. 아무리 힘들어도 매일 기도하는 부모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부모님, 이웃을 사랑하고 어려운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 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솔직히 이런 말은 교회 설교나 신앙 서적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적힌 문장이 특별한 이유는 지식 전달의 목적으로 가르치는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기도가 삶이었고 삶이 기도였던 한 어머니의 삶 전체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한 뒤 그 기도의 열매이자 그 기도의 수혜자로 은혜를 입은 아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백이기 때문이다. 말의 힘은 그 말을 이루는 문자가 아닌 그 문자가 가리키고 그 문자가 비롯된 살아있는 증거로 말미암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반응이겠지만, 나의 신앙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아브라함 자리로 부름 받은 내게는 기도의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내가 내 자녀를 위한 기도를 게을리해도 되는 면벌부가 되어주진 못할 것이다. 독서와 묵상과 글쓰기를 하며 생각날 때마다 자녀를 포함한 가족과 지인들을 위해 잠깐 기도하는 것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기도의 대부분이다. 이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각심이 들었다. 땅에 떨어지지 않는 기도, 응답되는 기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리고 신앙생활이 그저 지적 만족이나 취미 생활로 전락한 게 아니라면 결코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기본 생활 중 하나가 바로 기도라는 사실을 나는 그 어떤 신학책이나 그 어떤 설교보다 더 명징하게 깨닫게 되었다. 내 아들을 위하여, 내 부모를 위하여, 내 아내를 위하여,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에 더 힘써야겠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림돌 같은 게 있긴 하다. 마흔이 다 되어갈 때 다시 회심하면서 깨달았던 것과 대립되는 부분이 있어서다. 기도와 공부의 이분법 속에 나는 꽤 오래 갇혀 있었던 것 같다. 기도만을 강조하는 신앙생활의 단점이랄까 어두운 면이랄까 하는 것이 정치 혹은 경제적인 것과 맞물릴 때 효과적인 악의 통로가 되는 모습을 많이 보고 직접 체험도 해봤기 때문일까. 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기도보다 더 우선순위에 놓고 그동안 몰랐거나 무시했거나 알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제대로 알고자 많이 애를 써왔다. 성경을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 성경만 읽는 게 아니라 신학서적도 병행하면서 공부에 더 중점을 두는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어딘가에 치우쳐 있기 마련이고, 치우친 걸 깨닫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면 그 반대쪽으로 어느 정도는 치우칠 시기가 필요한 법이기 때문이다.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정’의 단계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진행하다가 상처를 받았고, 여러 복합적이고 개인적인 일들로 ‘반’의 단계에 머물다가, 이 책 덕분에 마침내 ‘합’의 단계로 진입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다. 기도와 공부는 영과 육처럼 분리된 게 아닐 것이고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처럼 나의 기도와 나의 공부는 함께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에겐 정말 시의적절한 책이었다. 이화정 목사의 어머니의 기도는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도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덕분에 나의 신앙생활은 한 단계 더 진화한다. 감사한 마음이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선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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