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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공공성 - 구약으로 읽는 복음의 본질
김근주 지음 / 비아토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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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처음으로 공의 (쩨다카)와 정의 (미슈파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부분은 창세기 18장 1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는 한 사람, 아담의 반역으로 시작되어 죄악에 물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시고 보내시며 시작된, 소위 ‘하나님의 선교’에서의 핵심 포인트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보내시고 함께 하심은, 하나님을 믿으면 단지 높아지고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표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통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복의 목적지는 만민이지 아브라함이나 그 민족이 아니다. 즉,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그리고 신약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빠른 출세나 성공과 같은 사적인 욕망의 채워짐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증거가 결코 될 수 없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복음은 처음부터 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결코 사적인 소원성취나 문제해결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 복음은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가 아닐 뿐더러, 부적도 아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과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선택되었다는 점이 자칫 운좋게 선택받은 사람만 복을 받을 수 있고, 그 복을 받은 사람은 구원받게 되고 남은 인생은 어차피 장망성과도 같으므로 대충 고난과 핍박을 받다가 죽을 때 어딘가 있을 천국으로 건져지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한 사람과 한 민족을 선택하심으로 그 사람과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데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했고 만민 가운데 있으면서 만민과는 구별된 하나님백성이 되어야 했다. 그 하나님백성이 주어진 현재를 살아야 할 자세가 바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인 것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이며 그렇게 살아갈 때에 거룩함과 평안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거룩함과 평안함은 만민에게 보여지게 되어 있고 여호와를 높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백성의 선교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 인간과 대화하시고 함께하시며 일상 속에 깃든 우리들의 공의와 정의를 행함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김근주 (Keunjoo Kim) 교수님의 신간, ‘복음의 공공성’을 읽으면서, 창세기 18장을 다시 읽었다. 그러면서 눈여겨 본 부분이 있다. 공의와 정의가 첨 등장한 19절 바로 뒷 절인 20절에 곧바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죄악을 하나님께서 언급하신다는 점이다. 비신학자이고 성경 전체를 꿰뚫는 눈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단정짓긴 어려우나, 문맥상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는 사건에서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공의와 정의를 보길 원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소돔을 향해 중보하는 아브라함의 기도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롯이 나그네로 등장한 두 천사를 대접하는 모습에서도 공의를 발견할 수 있으며,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는 폭력적이고 자기 유익만을 위하는 소돔 사람들을 멸하시는 부분에서도 정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동성애가 죄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주요 성경본문이라는 점은 모두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렇게 배웠었다. 그러나 오늘 꼼꼼히 창세기 18장과 19장을 여러번 읽어봐도,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동성애가 죄라거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하셨다고 하는 해석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 지가 더 주요한 포인트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소돔과 고모라 전체 사건은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보여주시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만약 수능 언어영역이나 본고사에 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본문으로 던져주고 저자의 의도를 쓰라고 하는 문제가 나왔다면, 난 서슴치 않고 동성애 문제보단 나그네와 공의와 정의에 무게를 두고 답을 쓸 것이다.

동성애가 죄라면서 그들을 인격적으로도 무시하고 차별하고 악한 사람으로, 아니 인간 이하로 멸시하는 행위는,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또 성경을 근거로 해서 죄악시하는 행위에 대해선 난 동의할 수가 없다. 만약 중세시대였다면 지금처럼 동성애자들을 벌레 취급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동성애자들을 화형시키자고 주장하고도 충분히 남았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돔 사람들의 악함을 본다. 그들은 선과 악을 스스로 구분짓고 (이것은 소위 원죄사건이라 부르는 창세기 3장 사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라고 한다), 그 구분지어진 악을 제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판결권과 그 판결을 집행하는 집행권은, 미안하지만 당신들에게 없다.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건 당신들 자유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는 악하다고 난 생각한다. 그것은 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당신들의 실제 무게중심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악을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고 (제거할 권한도 능력도 없으면서), 당신들의 관점에서 본 악을 제거하여 당신들이 정한 선을 지키려는 행위에 있을 뿐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 중심의 자기애를 의미하는 원죄사건과 똑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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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우종학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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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크따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에서 박 기자와 한 교수라는 두 명의 가상 인물을 설정하고, 그 배후에서 모든 걸 조율했던 우종학 교수 (존칭 생략)가 그의 두번째 책, 과도기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무대 뒤에서 연극을 보여주며 간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다가, 이번엔 나이를 예측하기 힘든 동안의 (^^) 감독이 무대 앞에 나와서 직접 관중들과 만나며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작품을 설명하는 셈이다. 무크따를 읽는 독자는 한 교수가 박 기자에게 하는 친절한 일대일 과외에 동참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과학과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면, 기독교인들이나 심지어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무크따는 부담없는 입문서로써 적절하다. 반면, 과도기는 저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원하는 강의를 동영상이나 녹취록이 아닌 직접 강사를 코 앞에 두고 라이브 강의를 들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을 고화질의 멋진 천문학 관련 사진들과 함께 (심지어 올 컬러다!)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장감과 더불어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강사로부터만 자연스럽게 전해오는 진심어린 한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기 위해선 아무래도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는 이 책의 독자층으로서 적절할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과학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인의 바른 응답을 요구하며 기대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을 밝히고 그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했던 책이 무크따였다면, 과도기는 좀더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부터 쌓여온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는 것에 무크따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과도기는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에도 지속될 과학시대가 지속해서 던져줄 도전에 대해서 기독교가 어떻게 응답해야 올바를지 청사진을 넌지시 제시하기 때문이다. 과도기가 미래까지도 내다보며 기독교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이 고무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과학과 신앙에 얽힌 오해와 편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당분간은 미래에도 진행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것이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안타까운 현실을 다시 직시할 수 있었고, 나 역시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저자의 한을 공감할 수 있었다.

과도기의 목적은 21세기 과학이 기독교에 던지는 세 가지 도전을 검토하고, 이 도전들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고찰하는 데에 있다. 책의 기본적인 구조 역시 세 가지 도전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짜여 있다.

우종학 교수의 저서나 수많은 강연에서 일관되게 언급되는 중요한 견해 하나는, 성경과 자연이 하나님을 알려주는 두 가지 책이라는 것이다. 두 책의 저자는 동일하게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두 책이 말하는 내용은 결코 상충될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성경이 창조를 ‘누가’ 했는지를 밝히는 책이라면, 자연은 창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같지만, 책의 목적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는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전제가 될뿐 아니라, 과학과 신앙의 올바른 대화를 시작하는 데에 있어 아주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숙고해 둘 필요가 있다.

책이 쓰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저자의 목적과 의도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의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게 읽어야 그 책을 잘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부합하지 않게 책을 읽는 것은 독자들이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독자에 불과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책을 해석한다든가, 자신의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숨긴다면, 아마도 그 독자는 둘 중 하나다. 저자를 평가할 만큼의, 아니면 저자보다도 뛰어난 역량을 가진 존재이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는 자기중심의 비겁하고 이기적인 존재일 것이다.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의 우산 아래 모여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상식적인 경계를 무시하고 저자의 목적과 의도에 상관없이 독자인 자신들의 신념과 주장에 모든 것을 맞추어 왜곡해서 두 가지 책인 성경과 자연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오류를 범하는 그들의 의도가 처음부터 그릇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려고 했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신앙을 공격한다고 여긴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한 우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끼리 한 마음으로 되기 위하여 일종의 정신 교육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 수단으로써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든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도 않은 것들을 자신들의 사상에 맞추어 마치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과장해서 해석한다든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 슬그머니 무시하며 읽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잘못된 방법 때문에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되었고, 심지어 나중엔 자신들도 그 결과가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인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나름의 정당성 (아마도 기독교인 중 다수라서?)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잘못된 길을 고수하고 남들까지도 혹하게 만드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로 인해 처음의 의도 자체도 의심받게되는 자가당착의 모습까지도 보이는 것 같다. 분명 그들이나 나나 똑같은 창조주인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건 분명히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었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책에서도 우종학 교수는 누차 반복하면서 이 부분, 즉 책의 잘못된 해석방법을 강조한다. 창조과학이라는 우산 아래 모인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기독교인 그룹은 책에 잘 명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창조 방법에 대해선 성경은 별 관심이 없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대신 자연이라는 책은 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인간은 과학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자연이라는 책을 해석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사실이다. 과학 자체는 자연현상을 관측하고 실험하고 증명하면서 기존에 몰랐던 사실을 밝혀내는 역할을 한다. 과학은 또한 한계를 지닌다. 즉, 과학으로 밝힐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신의 존재 유무다. 과학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유신론/무신론의 오래된 싸움을 끝낼 해결사가 될 수 없다. 과학이 아직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과학이 밝힐 수 있는 영역 밖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립적이며 중립적일 수 밖에 없는 과학을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이 자신들의 공격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정도를 넘어선다.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군중몰이를 하는 것처럼 왜곡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 자체가 심히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중립적인 과학을 신앙과 적대시하며 마치 과학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와 모순되는 것처럼 느끼는 통념이나, 과학을 무신론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과학주의 무신론자뿐 아니다. 교회가 직면한,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도전은 바로 기독교 내부에 있는 근본주의/문자주의적인 방식에 길들여져 있고 이를 신봉하고 있는 무리들이다. 창조과학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마치 기독교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듯하다. 우주와 지구와 생명의 탄생, 그리고 진화를 설명하는 중립적인 과학의 증거들을 뭉뚱그려서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하고 반역하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죄악시하며, 눈과 귀를 닫고 등을 돌려 스스로 만든 그림자에 갇혀 그들끼리 소통하며 그들끼리 하나가 되기 위해 행하는 정신 교육이 내가 보기엔 정말 시대착오적이며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인 우종학 교수는 책에서도 여러번 말한다.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 대상으로 교회 내부에서만 배회하며 과학에 흠집이나 내지 말고 당당하게 링 위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붙자고 말이다. 과학자는 증거에 기반한 논리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창조과학자들이 지속해서 정정당당한 링 위의 결판을 피하고 여론몰이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내 생각에도 그들은 정말 박근혜 정부처럼 탄핵되어야만 할 것 같다. 진검승부를 피하고 언론이나 여론을 이용해서 일반인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마약과도 같고 종교와도 같은 방법으로 자기 편만들기나 하는 시대는 이미 탄핵되었다는 점을 그들이 바로 알았으면 한다. 나아가, 기독교를 지키려고 했지만, 탈기독교 현상을 그들이 부추기고 있다는 점도 꼭 똑바로 인지하고 그들의 방향에 수정을 가했으면 좋겠다.

과학의 발전 속도는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그 증가하는 속도로 밝혀내는 사실 또한 가히 엄청나게 많다. 앞으로도 이런 흐름은 지속될 것이며 첨단과학이 일상이 될 정도의 과학시대를 살아갈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접하게 될 때 어떻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할 것이며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건강하게 지켜나갈지는 무척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나 역시 생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이 부분에 대해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한국에선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새물결아카데미를 축으로 한 운동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새물결플러스를 축으로 한 기독교 출판업계가 좋은 책을 출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에 있는 과학자 기독교인뿐 아니라, 세계에 흩어진 남은 자로서의 과학자 기독교인들까지도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를 내어 과거부터 누적된 과학과 신앙의 해묵은 편견이 깨어지고 서로간의 건전한 대화가 이루어져 보다 넓고 보다 깊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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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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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고도를 기다리며" "데미안"을 넘어 "좁은문"을 지나 "토지"를 밟고나오자 "설국"이었다.
(그 유명한 책의 첫 문장을, 한 달간 내가 읽어온 문학 작품의 순서대로 패러디해봤다. 의미없음.)

얼추 파악했다고 생각한 스토리, 난 그것이 책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내심 어떤 사건을 기대했고 그러는 와중에 긴장까지 했다. 어떤 복선이 그려지지 않나 싶어 작가가 묘사하는 자연의 풍경이라든지 여자들의 행동과 말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사건도,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렇게 밋밋하게 책은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추운 날 겨울, 휑하니 스쳐지나 가버린 기차처럼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 맛본 "설국"은 그렇게 내게 왔다가 가버렸다.

한참 동안 책 앞 표지를 바라보며 "설국"이 남긴 잔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책 제목이 왜 "고마코"나 "요코", 아니면 "게이샤"가 아니라 "설국"인지 알 것 같았다. 내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책의 스토리가 아니었고 눈의 나라, 설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descriptive하기만 한 책도 아니다. 잔잔한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이상한 사람", "싫어요", "가세요", "어머"를 연발하는 고마코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와 묘하게 반대 이미지를 가지는 듯한 요코의 모습도 하얀 눈 고장에서의 찬 기운과 나도 한번 들어가고픈 여관 온천의 더운 증기와 함께 떠오른다. 책의 끝부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듯한 요코의 모습에서조차 작가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죽음도 그냥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단편들일 뿐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가 다시 도쿄로 돌아가서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고마코와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 지에 대해서도 별 말이 없다. 그저 일상이다. 그렇다. "설국"은 그렇게 일본의 눈 고장에서의 일상을 허무하리만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남은 여운은 글이 아니라 그림에 가까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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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피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허명수 옮김 / IVP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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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를 읽고.

평소 같았으면 방금 읽은 책의 잔상에 의지하여 노트북 앞에 앉아 감상을 써내려 갔을 것이다. 그러나 어젠 그러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어젯밤,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는 내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잔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랬는지 밤엔 불쾌한 꿈을 꿨다.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오늘을 맞이했다). 어떤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아니었고, 교훈을 얻을만한 잠언집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설국"이 남겨준 것처럼 그림 같은 이미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복잡하지도 않다. 등장인물은 박경리의 “토지”에 비하면 그 수가 십분의 일도 안되었고, 책에서 설정한 시공간의 단순함, 결코 많지 않은 대화, 그리고 불과 200페이지 정도의 분량 때문인지 플롯 자체도 단순했다. 그러나 기승전결이 분명하지 않았을 뿐더러, 인물들 사이의 갈등 구조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은 다른 책을 읽었을 때와 달리 복잡하기만 했다. 왜 그랬을까?

이 책은, 읽는 내내 느껴지는 묘한 긴장이 있다. 이는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을 읽을 때와는 다르다. 사건 전후를 관찰하여 단서를 찾아내고 또 그 다음을 예측해 나가며 과연 내가 맞을까 틀릴까 하는 기대와 조바심이 전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예측 자체를 거부했거나, 예측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나에겐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무섭다는 표현도, 기괴하다는 표현도 이 책의 느낌을 표현하기엔 적당하지 않다. 책 소개에 사용된 단어가 그나마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로테스크. 그렇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던져주는 책이다.

총 14장으로 쪼개져 있는 전체 스토리는 장과 장 사이의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스토리도 잘 연결이 되는 편이다. 그러나 그 어떤 장도 내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주지는 않았다. 매 장마다 남는 알듯말듯한 그 찜찜함은 뭔가 나중에 큰 사건이 일어날 복선 같기도 하고, 큰 사건이 터지기 직전과 같은 폭풍 전 고요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지속되다가 책은 마지막에 주인공을 죽이고서야 끝이 난다.

기독교 예수의 의미를 상식적으로나마 모르는 사람은 아마 이 책을 이해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예수를 깊이 알고 있는 사람조차 이 책을 이해하기에 힘들어 하긴 마찬가지일 것 같다. 뭔가 숨겨져 있는 의미를 완전히 찾아내려고 맘먹는다면 말이다. 이 책에는 기독교에서 정의하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개념이 바닥에 깔려 있다. 그 개념을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독자들에게 기괴한 느낌의 답 없는 수수께끼를 툭 던져놓는다.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 자기 몸을 희생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없앤 존재 정도로 그려져 있다. 심각한 기독교의 교리나 사상을 적어도 나는 이 책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지속적으로 맡은 것은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진하게 가미된 광신적인 냄새였다. 그것은 무지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았고, 영과 진리의 밸런스가 깨어진 채로 감각적이고 주관적인 종교로 그려져 있었다. 사기도, 절도도, 폭력도, 살인도, 그리고 자학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의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차원까지 깊숙이 새겨진 그 어떤 힘이었다.

주인공인 헤이즐 모츠는 진리가 없다는 게 진리라며,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전한다며, 죄와 구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며, 정통기독교에서 말하는 사상에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그것이 자신을 이끌고 가는 힘이 될 정도로 그에게선 중심사상이 되어가지만, 자신이 어릴 적에 각인된, 순회 설교자였던 할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에서 그는 끝내 벗어나지는 못했다. 전하는 내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으나, 결국 할아버지가 했던 방식, 차 옆에 서거나 위에 올라 순회 설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나마 그리스도인 예수를 전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를 전하기 시작했고, 신성모독이야말로 진리로 가는 진정한 길이라고까지 설파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맹인이 보지 못하고 절름발이가 걷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죽은 채 있는 교회의 성도이자 목사입니다.”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 궤변인가.

그는 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기꾼 설교자가 그의 외모를 모방하여 예수가 아닌 새로운 선지자로 사람들 앞에 세운 폐결핵 환자를 계획적으로 뒤쫓아 죽이고야 만다. 이 장면에서 더욱 간담이 서늘하게 느껴졌던 까닭은 그에게서 일회의 망설임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차에 깔려 죽어가는 그 폐결핵 환자에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내가 못 참는 것 두 가지가 있어. 진짜가 아닌 사람과 진짜를 흉내 내는 사람. 방금 당신이 당한 것을 피하고 싶었다면 나를 절대로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그리고 그는 차 범퍼에 묻은 핏방울을 태연하게 헝겊으로 닦은 뒤 마을로 돌아가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완전 싸이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그러나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차가 폐차 직전까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고속도로에서 만난 또 다른 느낌으로 폭력적인 순찰 경찰관에 의해서 그의 차는 마침내 파괴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차가 없는 헤이즐 모츠는 걸어서 마을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생석회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눈을 멀게 할 작정으로 사온 것이었다.

결국 생석회를 눈에 발라 자기 눈을 못 쓰게 만들고 맹인이 된 헤이즐은 고행의 길을 스스로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게 된다. 이 갑작스런 행동의 변화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가했던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던 자동차가 어이없는 경찰관의 폭력으로 인해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여관집 여주인의 질문에 그는 그저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신발 안에 작은 돌을 일부러 넣어두어 보이지도 않는 길을 걸어갈 때조차 발에서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며, 가슴에는 철사를 휘감아서 그 뾰족한 부분 때문에 피가 나게까지 했다. 그는 살인을 하기 전에는 예수가 아닌 새로운 선지자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설교했으나 결국 그 자신이 스스로 피를 흘리는 고행을 함으로써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 대가를 치른다고 하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정말 그로테스크한 느낌이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가 읽으면서 느끼고 상상했던 것만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 깊은 뜻을 파악하길 바랬던 것일까. 과연 헤이즐 모츠는 구원을 받았을까. 그가 활동했던 그 마을의 광기어린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헤이즐은 그저 광기어린 싸이코 집단의 일부, 그러니까 대표성을 띠는 한 사람이진 않을까. 그리고 그가 설파했던 그리스도 없는 교회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그 시대적 상황을 대변하는 신비주의적이고 광신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이해할 수 없고 말이 별로 없는 어둡고 칙칙한 흑백으로 만들어진 유럽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종교적인 색채가 가해진 새롭고도 낡은 스타일의 그로테스크를 느껴보고 싶다면 난 자신 있게 이 책을 권한다. 그러나 어떤 교훈을 얻고 싶거나 정해진 범위 안의 답에 만족하고 그것 때문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물론 내가 피카소의 그림을 피카소의 그림으로 느끼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수준이 저렴해서 이런 감상을 끄적거리는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별로 권하고 싶진 않다. 나처럼 불쾌한 꿈을 꾸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내일부턴 좀 개운하고 밝은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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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ax 2019-11-29 0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이리뷰를 읽으면서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도 잘써진 리뷰가 없을 정도로 글을 잘읽었습니다. 오히려 책을 쓰셔도 될듯한 작가로서의 자질이 보이네요. 이 책을 읽어볼까하는 망설임을 주며, 찜찜한 글을 통해 마음이 무거워지는 하루가 되지 않기 원하네요. 좋은 책이라 소개되어 읽고 싶었는데 일단 밝은 책을 읽고 더 읽고 시간되면 봐야겠네요.

Youngwoong Kim 2019-12-08 10:13   좋아요 1 | URL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과찬 감사합니다.
 
즐거운 나의 집 - 개정판
공지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공지영 저,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을 읽었다. 21세기 현재, 나와 동시대를 살며, 같은 하늘과 같은 해와 달을 보며 아침과 밤을 맞이하는, 게다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의 글이어서 그랬는지, 문학 고전을 읽을 때나 신학이나 철학 책을 읽을 때와는 책이 성큼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결코 크진 않았지만, 소신이 뚜렷한 움직임이었다고 해야 할까. 공감해 달라고, 감동해 달라고, 아니면 교훈을 발견하라고, 은유 속에 숨겨놓은 깊은 뜻을 찾아내라고 하는 요구도 없었다. 그냥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마치 그 어느 것보다 내가 더 공감할 거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랬다. 정말 그랬다. 별 생각 없이도 뭘 말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이 책은 그냥 일상의 한 토막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어느 가정에서 일어나는 딱히 특별하지도 않은 일들이다. 이혼을 세 번이나 한 여자가 엄마로 등장하지만, 책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화자는 위녕이라는 딸이다. 작가는 위녕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다분히 여성스러운 색채가 진하지만, 담담히 그려낸다. 우리 시대에서 일상 속에 깊숙이 만연해 있는 암묵적이고 구조적인 부조리로 책 곳곳에 은근히 드러내기도 하고, 또 그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상처도 받고 아파하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가족의 의미와 사랑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견뎌내고 극복해내며 그 일상을 다시 성실히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다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책이 남겨 준 잔상을 음미하려니 내 얼굴에선 웃음이 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내가 이 책을 공감하며 위로도 받았다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곧 흩어져버릴 잔상을 붙잡아 두려고 노트북에다가 글을 써내려 가고 있지만, 확실히 다른 책과는 다름을 또 느낀다. 분석할 차가운 머리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읽고 반응할 (때론 눈물도 함께 흘릴) 따뜻한 가슴만 있으면 된다.

왜 이 책이 따뜻할까 생각해 보니, 요즘 있었던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와 어쩌면 내게 부족했던 사랑이나 어떤 감정 같은 것이 이 책을 다른 책보다 더 가깝게 느끼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위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나의 집", 내겐 때맞춰 찾아온 고마운 선물 같은 책이다. 추천해 주신 ByungJoo Kim 집사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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