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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양장본) IVP 모던 클래식스 9
짐 월리스 지음, 정모세 옮김 / IVP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회심을 경험했는가, 경험하고 있는가.


짐 월리스 저, '회심'을 읽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슬프게도, 이제 나는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회심을 경험한 건 아니라는 말에 동의한다. 물론 과거를 뉘우친 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예수를 믿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인간이기 때문이지, 예수를 믿기 때문이 아니다. 더구나 그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도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거나 작정해서 읽게 되었던 예수의 복음에 비추어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깨닫고 반성한 적도 있을 것이다. 깨끗한 거울에 비추면 얼굴에 묻은 얼룩이 보이듯,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자신이 그 동안 내밀하게 숨겨왔거나 의도적으로 무시 또는 회피해왔던 어두운 얼룩, 즉 자기중심적인 자기애나 위선 등의 직간접적인 죄악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과의 조우에서 아주 드물게 벌어지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러한 삶으로부터 돌아서겠노라 다짐한 뒤, 행동이 수반된 결단을 하게 되는 경우다. 흔히 우리는 이 순간을 회심이나 회개라는 단어로 무분별하게 표현하곤 하지만, 짐 월리스는 이 단계를 '회심'이 아닌 '회개'라고 구별한다. 회개는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회심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회심은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일 뿐,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어디인가로부터 (from) 어디인가로 (to) 돌아서는 커다란 흐름을 회심이라고 정의할 때, 회개는 '어디인가로부터' 돌아서는 (turning from) 첫 과정일 뿐이다. '어디인가로' 돌아서는 (turning to) 과정을 그는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즉, 회심은 회개와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방향성을 가진 긴 여정인 것이다. 이 책의 제목부터가 '회심'이라는 것과,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과제가 "우리의 역사적 상황에서 회심이 의미하는 바를 발견하고, 회심의 성경적 의미를 찾아내어 우리가 마주치는 역사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잡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정의하는 '회심'의 의미를 잘 숙지해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회심이다"라는 그의 절박한 외침을 한낱 잘못을 깨닫고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기특한 반성 정도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미래를 향한 비전과 구체적 방향성이 결여된 반성은 그저 의미 있는 인생의 한 점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런 수준은 감동적인 영화 한 편 본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회심을 말하고 있는 짐 월리스는, 그 긴 여정의 시작이며 이벤트성이 강한 '회개'보단,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구체적인 방향을 가진 '신앙'에 중점을 둔다.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가 말하는 회심이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말했던 '제자도'와 일맥상통함을 간파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구원 받는 순간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위 '칭의'의 순간이 아니라, (굳이 칭의와 구별하자면) '성화'의 여정에 있는 것이다. 물론 칭의와 성화를 나눈 것 자체가 신학적 장난질이라고 보는 나로선 그 구분에 더 이상 깊은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말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우리에게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것을 요구했다면, 짐 월리스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회심을 촉구한다. 둘은 서로 강조하는 면이 다르고 현실을 관찰하고 적용하는 부분이 다르다. 그러나 둘은 모두 예수와 하나님나라로 모인다. 그렇다. 제자도나 회심이나 결국은 깨닫고 반성하는 과거의 이벤트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기 쉬운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공적인 삶으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저서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과 제자도를 오해했다고 한탄하는 것처럼, 짐 월리스는 이 책에서 복음주의자나 자유주의자 할 것 없이 모두 시대를 향한 회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다고 말한다. 회심을 강조해왔던 미국 교회의 강점이 실제로는 회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터무니 없이 낮은 이해도로 말미암아 가장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며 그는 냉철하게 관찰 결과를 정리한다.


그는 복음주의권에서 자라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릴 적 역사적 실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진공 속 '구원'을 받았으며, 그때의 회심은 개인적이고 추상적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그는 교회 안에서의 그러한 개인적인 습관과 관행에 초점을 맞춘 회심이 아닌, 오히려 디트로이트에서 벌어진 인종주의의 잔혹한 실체와 대면하면서부터 좀 더 깊은 회심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한다. 사적인 복음, 그리고 사회성과 역사성이 결여된 진공 속 복음은 회개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이후에 반드시 찾아올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진정한 회심으로 이어지긴 어렵거나,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복음의 공공성이야말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보다 잘 녹아있는 부분이며, 복음이나 하나님나라, 그리고 교회라는 개념 자체도 원래부터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주어졌음을 상기할 때, 짐 월리스가 고백한 '깊은 회심의 시작'은 어쩌면 그가 경험한 '첫 회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들은 과연 진정한 회심을 경험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짐 월리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문제에 관심이 지대하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가 세상 속에 있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직접 살아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알다시피 그는 워싱턴 D. C. 에 터전을 잡고 있는 소너저스 공동체를 시작한 사람이다. 급진적인 복음의 실천가로서 그의 통찰은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되어 이 시대에 부의 축적과 평화를 위한 폭력의 이면에 놓인 미국과 부유한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찔림을 주며, 쓰지만 꼭 필요한 목소리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에서 제공되는 성경 해설과 시대의 분별은 모두 그가 소너저스 공동체로부터 나온 역사적 실체를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목소리에는 특별히 강한 어휘나 표현이 없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움직이고 깊은 울림을 주는 힘이 있다. 도저히 빨리 읽을 수가 없는 책이었다.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며 많은 묵상을 하면서 읽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81년에 출판된 초판이 아닌, 그로부터 24년 후인 2005년에 출판된 개정판으로 읽었다. 알다시피 저자의 통찰은 책상 위가 아닌 역사적이고 사회적 실체인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그리고 초판과 개정판 사이의 기간에는 9.11 테러가 있었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쟁점을 다룬 부분에 있어서 그는 개정판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 사이에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있었다면, 아마 개정판을 내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되어주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미국 기독교 우파의 움직임과 행태 이면에 놓인 타락은 회심을 더욱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을 막론하고 회심에 대한 신학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회심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예수의 제자도를 살아내기를 촉구한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회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풀어주는 1장 '부르심'을 지나면, 2장 '배반'을 맞이한다. 저자는 여기서 말뿐인 기독교, 공공성이 사라지고 자기중심적인 자기애를 옹호하며 복음을 사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 현대 그리스도인의 실상을 파헤친다. 구약 성경을 이루는 커다란 두 축인 정의와 공의가 사라져버린 일상, 예수가 증발해버리고 자본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기독교의 변질을 고한다. 그는 복음 전도에서 죄와 구원의 사회적 의미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참된 복음 전도는 개인사에 대한 회개뿐 아니라 우리의 집단적 역사에 대한 회개를 점화할 것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회심하는 것은 개인적 이기심과 문화적 무지를 모두 극복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 즉 가난과 폭력에 대해 그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내용을 이끌어와서, 그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회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우리는 여기서 짐 월리스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에 압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화두가 혐오, 배제, 차별이라는 죄악에서 돌아서서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는 것에 있다고 할 때, 가난과 폭력은 핵심적인 양날개를 이루는 직접적인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우리 시대에 성경적 회심이 회복될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를 결정할 중요한 요인들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3장 '불의'에서는 가난과 빈곤, 그리고 가난과 빈곤을 착취하여 반대급부로 축적된 부요함의 물리적 실체와 그 이면에 깔린 영적 실체를 진단 및 보고한다. 성경은 가난을 개인의 무능력이나 잘못의 결과가 아닌, 부요하나 완악한 자들의 억압으로 이루어진, 소위 '합법적인' 제도와 구조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본다. 성경은 자주 반복하여, 가난한 자들이 겪는 착취와 고통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를 맘몬에 대한 예배로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에 대한 무게중심은 가난한 자가 아닌 부요한 자에게 있는 것이다. 짐 월리스는 미국의 관대함과 자유주의적 국외 원조에 관한 모든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세계 자원의 흐름은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지극히 일방적으로 향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으며, 역사를 통틀어, 부유한 자들은 자신의 번영이 다른 사람의 빈곤에 기초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줘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언제쯤 가난한 자들로부터 빼앗기를 멈출 것인가?"라고 말하며,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문제라고 역설한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생활 기준으로 살 만큼 충분한 자원이 있다거나, 우리는 열심히 일한 데다 신의 은총을 받아서 부유하다거나, 가난은 가난한 자들의 실패 때문이라는 생각은 모두 가난한 자로부터 강탈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체제가 고안해 낸 무자비한 신화일 뿐이라고 그는 비판에 날을 세운다. 청지기의 책임을 부여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는 대신에 착취자가 되어왔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우리 시대의 회심은 가난한 자들을 해방하고 눈먼 자들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는 정의가 필요하고 부유한 자들에게는 시력 회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는 가난한 자들과 우리를 동일시하길 요구하며, 그들을 위한답시고 의도적으로 가난한 체한다거나, 그들에게 말하거나 가르치거나 심지어 일방적으로 도우려는 자세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그들의 말을 듣고 변화될 자리에 놓아두라고 제안한다. 가난한 자들의 존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으라는 것이다. 이 방법만이 가난한 자들에게 부유한 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라면서 그는 소저너스 공동체가 경험한 바를 증거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회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의 교제를 위해 우리 재물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전쟁과 폭력, 그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이룩한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실상에 대한 짐 월리스의 성찰은 제 4장 '위험'에서 잘 드러나있다. 전쟁과 평화라는 문제를 그는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닌 신학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전쟁과 평화는 완악한 마음에 기인하는 것이며, 성경적으로 말해서 완악한 마음은 고의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완악함에 대해 성경이 처방하는 해독제는 바로 회심이라고 역설한다. 결국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선악을 자신의 유익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마음껏 판단하는 행위는 소위 '원죄'라고 불리는 사건의 열매다. 그 열매를 따먹은 우리 인간들은 완악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었고, 폭력을 쉽게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해석을 전제할 때, 회심이 해독제라는 그의 말은 곧 회개를 시작으로 하여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이루어진 과정 중에 맺힐 열매라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서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만드는 자들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러므로 회심한 자들은 사적인 평안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평화를 만드는 자들로 알려져야 할 것이다. 짐 월리스는 이웃에 대한 긍휼의 갱신을 포함한 회심이야말로 평화로 가는 단 하나의 영속적인 길이라고 설파한다. 가난한 세상에서 회심이 가난한 자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듯, 폭력과 보복적 폭력의 세대에서 회심은 수많은 희생자의 인간적 실제성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각각의 경우 회심한 사람은 바로 인간 고통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자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회심한다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긍휼을 갖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곧 우리 마음에 자기자신만이 아닌 타인의 인간적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가난과 폭력에 대한 우리들의 물리적 영적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한 이후,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방향성을 인지하고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는 바로 공동체다. 제 5장 '비전'에서 짐 월리스는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교회가 교회되도록, 다시 말해, 말과 글만 앞세우거나 개인의 평안과 구원만을 추구하는 사적인 공간이 아닌, 그렇다고 정의를 부르짖거나 세상에 저항하는 행위만 강조하는 집회 공간도 아닌, 코이노니아, 곧 단순히 교회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제공하라는 부르심에 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가 교회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공동체의 성경적 정체성과 소명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체성과 소명을 깨달았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진 않는다. 생각과 성격이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간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이유만으로 교회의 역사는 배교한 교회로부터 참된 교회가 되겠다며 갈라져 나와 또 다른 배교한 교회의 유형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악순환의 구조를 이루어왔다. 새로운 교단과 분파를 만들어내는 것은 한계를 가지는 것이다. 짐 월리스는 여기서 교회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말하는 일에 더 힘을 쏟는다고 한다. 교회들에게 성경과 그들의 전통에 있는 갱신의 씨앗에 대해 짚어주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역사 한가운데서 예수를 높이는 데 실패하고 회중 가운데 분쟁만 일으켰던 이유를 사랑의 실패에서 찾는다. 올바른 것을 깨달아도 그것을 상대방을 향한 비난과 정죄의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다. 그는 성경의 예언자들이 신랄한 말을 쏟아냈음에도 그들은 그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면서, 교회를 향한 우리의 소망도 교회를 향한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용서와 겸손을 겸비한 예수의 사랑 말이다. 또한 급진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저 견디며 살아내는 것이 아닌 경축하는 일상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러기 위해선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의 활력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경축의 소망과 기쁨이야말로 우리의 저항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며, 세상과 반대로 사는 삶이 초래하는 냉소주의, 신랄함, 증오로부터 우리를 구해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전제될 뿐 아니라 경축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지속하며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짐 월리스는 그것이 바로 '예배'라고 답한다. 급진적인 복음의 실천가인 그가 내놓은 답이 '저항'이 아닌 '예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제 6장 '근원'에서 그는 예배와 저항의 관계를 나무 뿌리와 그 가지들의 관계에 비유한다. 회심은 언제나 우리의 뿌리, 곧 우리의 첫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함한다고 하면서, 회심에 대한 모든 시험은 우리가 누구인지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기억하는지 시험하는 것이라고 재해석한다. 예배는 우리를 망각에 빠지게 하는 모든 상황 한가운데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이며, 예배는 다름 아닌 우리의 뿌리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예배가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가난과 폭력에 휘둘리는 세상 속에서 거스르기는 커녕 함께 떠밀려가면서 세상과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가 없다. 회심도 그저 사적인 회개 정도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즉, 회개로 시작한 회심을 신앙으로 지속하며 하나님나라로 살아내기 위해서 예배는 그 모든 삶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하는 중에 우리는 정체성과 사명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공적 저항 활동이 사랑과 진리의 능력 가운데 뿌리를 두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예배는 우리의 목표가 비폭력적인 진리이지 권력이 아니라는 점도 기억나게 해주는 장소이며 우리 안에 있는 우상들에 직면하게 해주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주장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가장 깊은 의미의 회심은 예배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기쁨, 평화, 사랑 등의 성령의 열매로써 하나님백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가시적인 신앙공동체, 악과 불의에 저항하는 공동체, 그러나 기쁨과 찬양과 사랑의 경축을 지닌 공동체. 바로 교회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장인 7장 '승리'에서 짐 월리스는 진정한 회심을 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궁극적 승리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당연히 인간이 정의하는 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상징되는 예수의 승리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개인적 죄에서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권력에서 해방되게 한다. 그러한 권력들과의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 곧 그들로부터 도덕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진리는 부활로써 보증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의 정치적 입장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 정당성을 입증 받은 입장이었다고 하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실재를 믿는 것이 회심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사랑으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바보들의 존재. 바로 개별적인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의 가시적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짐 월리스는 경계에 선 그리스도인이다. 우익복음의 눈에는 급진적인 좌파로 보일 것이며, 좌익복음의 눈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우파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소저너스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살아내는 모습은 좌파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실제로 일상에서 쉽게 해내지 못할 삶이기에 그는 확실한 좌파다. 그러나 여전히 회심의 핵심을 회개와 신앙으로, 신앙의 핵심을 예배로, 예배를 통해 정체성과 사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직도 보수진영의 그물에서 허우적대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에 그는 우파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계선상의 위치가 어쩌면 오히려 그를 예언자적인 목소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익의 복음도 좌익의 복음도 아닌 하나님나라 복음. 짐 월리스를 통해 뭔가가 정리되는 기분이다. 말과 글이 언제나 몸을 앞서 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하나의 도전이 되어줌과 동시에 방향을 제시해 준 듯하다. 돌아서서 살아내는 하나님나라. 다시 가슴이 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4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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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믿음의 글들 240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웅깃’에서 ‘프시케’로 (각색한 신화에서 복음을 추출하다).


C. S. 루이스 저,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를 읽고.


난해한 이 소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유명한 그리스로마신화, ‘큐피트와 프시케’ 이야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루이스가 그 신화를 각색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에로스’로 알려진 사랑의 신 큐피트는 미의 여신 비너스 (헬라어로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어느 날 비너스는 인간들이 자신에게 경배하러 오는 발걸음이 갑자기 줄어든 원인을 알게 된다. 인간세상의 세 공주 중 막내인 프시케의 아름다움 때문에 인간들은 굳이 비너스를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비너스는 금새 질투와 분노에 휩싸였다. 그래서 아들인 큐피트에게 세상에서 가장 추한 존재와 프시케가 사랑에 빠지도록 화살을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큐피트는 프시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어머니의 명을 어기고 술수를 써서 인간들로 하여금 프시케를 희생제물로 바치게 만든 다음, 구해준 뒤, 밤마다 그녀를 찾아와 사랑을 나눈다. 


프시케는 두 언니가 보고 싶었다. 큐피트는 그녀를 믿고 두 언니와 만나게 해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너무도 행복하게 보여서 언니들은 프시케에게 질투까지 느낀다. 남편의 얼굴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프시케에게 등불을 주면서, 밤에 남편이 잠들었을 때 몰래 불을 밝혀 얼굴을 확인해 보라고 권한다. 절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말라고 했던 남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프시케는 그만 언니들의 요구에 응하고 만다. 그러나 괴물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언니들의 의혹에 동조한 것은 완전히 틀린 판단이었다. 잠들어있는 남편은 괴물이기는커녕 너무나 아름다운 남성이자 신이었던 것이다. 그때 등불에서 기름이 큐피트의 어깨로 떨어졌고, 그는 깨어나자마자 분노와 배신감에 자리를 뜬다. 죄책감에 프시케는 방랑을 시작하며 큐피트를 찾아 나선다. 결국 비너스에게까지 이 사실이 알려지고 프시케는 비너스의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게 된다. 불가능한 일임에도 여러 존재들의 도움으로 비너스가 내준 과제를 거의 완성하게 될 무렵, 마지막 과제에서 그녀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열어서는 안 될, 페르세포네로부터 받은 '아름다움의 묘약' 상자를 열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을 잃는다. 그때 큐피트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고, 곧장 제우스에게 날아가 프시케와 합법적인 결혼을 성사시켜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프시케는 신이 되고, 둘은 happily ever after 살았다는 이야기다. 


프시케의 철자는 Psyche. 영어로 "사이키"라고 읽는 이 단어는 마음, 정신, 영혼을 뜻하는 단어다. 우리가 심리학 (Psychology), 정신의학 (Psychiatry), 또는 정신병자 (Psycho) 등의 용어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접두어로도 쓰인다. 그렇다. 눈치 챘겠지만, 프시케는 '영혼의 신'이다.


루이스는 이 신화를 차용하여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왜 하필 신화를 이용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을까? 이 책을 읽고 해석하려고 시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의도는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루이스가 신화에서 각색한 부분이 어디인지 아는 것이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에서 직접 밝히듯, 루이스는 제물로 바쳐진 프시케가 큐피트에 의해 구해진 이후, 그리고 프시케가 두 언니들의 의혹에 넘어가기 이전, 잠시 동안 인간 프시케와 신 큐피트가 사랑을 나누었던 아름다운 궁전을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바꾸어놓았다 (신화에서는 보였다). 그리고 신화에서의 두 언니는 프시케 만큼은 아니지만, 아름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화자, 그러니까 맏언니인 오루알 공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추녀다. 신화에서는 두 언니가 큐피트에 의해 죽음을 면하지 못하지만, 이 책에서 두 언니는 죽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지만, 이 책에서의 중심은, 오루알 공주의 일인칭 시점으로 이 책이 구성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듯, 인간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루이스의 상상력의 무게중심은 오루알 공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은 신화를 각색했지만, 인간이 주인공이 되어버린 이야기인 셈이다.


불행하게도 이렇게 각색한 부분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 책은 여전히 난해하기만 하다. 우선 제목부터 착 와 닿지 않는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제목에서 과연 누가 이 책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을까. 혹시나 해서 영어 원문을 찾아봤다. 'Till we have faces'. 똑같았다. 허무했다. 그러나 포기하긴 일렀다. 나는 '얼굴'이라는 단어가 신화와 이 책에서 어느 부분에 등장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신화에서는, 큐피트가 프시케에게 자기 얼굴을 보지 말라고 부탁하는 장면, 그래서 프시케는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무슨 뜻이 있겠거니 하며 두 언니들의 의혹을 접하기 전까지는 남편의 얼굴을 감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이 내용은 이 책에서도 똑같다. 프시케는 오루알 공주를 만나고 등불을 건네 받은 뒤에서야 한 밤중에 불을 밝혀 큐피트의 얼굴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선 '얼굴'에 관계된 중요한 한 가지를 루이스가 추가시켜 놓았는데, 그것은 오루알 공주가 프시케를 두 차례나 만나고 난 후 궁전으로 돌아와서는 항상 베일을 쓰고 다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이 추녀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맨 얼굴로 다녔었는데, 그 날 이후 이 책을 회고록 형태로 쓰기까지 오루알 공주는 항상 베일을 쓰고 다니게 된다. 즉,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자기 얼굴을 숨기는 행위는 곧 자신의 신분이나 정체를 숨기는 행위다. 다시 말해, '얼굴'의 의미를 '정체성'이라고 해석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제서야 드디어 해석의 실마리를 한 가닥 잡았다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답해가는 과정,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가 누구신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해나가는 과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중추적인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해석은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해야, 이 책의 이면에 숨겨진 루이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의 말미에 가서 오루알 공주는 꿈과 이상을 보게 되는데, 여러 상징적인 사건들의 급전개가 펼쳐진다. 이 책을 난해하게 만든 주요인으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이상 중 하나가 '얼굴'에 관계된 것인데, 화자인 오루알 공주가 신들에 대한 고소장을 열두 번은 족히 반복해서 읽으면서 스스로 대답을 얻고 난 후, 그 깨달음을 고백으로 적어놓은 부분이다. 이 책에서 루이스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보여진다. 다음과 같다. "나는 신들이 우리에게 드러내놓고 말해주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 대답을 찾지도 못하게 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자기 중심에 무슨 말이 있는지 찾아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게 내 말의 의미입네 떠드는 소리를 신들이 뭐 하러 귀 기울여 듣겠는가?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이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 오루알 공주는 자신이 회색 산의 신인 '웅깃'이라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오던 차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얼굴이 없으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존재인 웅깃으로 인식하려던 차였다. 자신이 유일하게 신뢰하고 사랑했던 프시케와 바르디아, 그리고 여우 선생까지 잃은 이후, 그 동안 스스로는 사심 없는 '사랑'이라고 여겨왔던 믿음 혹은 신념이나 감정이,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욕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던 시기였다. 자신이 웅깃이라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웅깃처럼 추하다는 의미였다. 탐욕스럽고 피에 굶주렸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자신이 웅깃이라는 오루알 공주의 그 깨달음은, 소유하려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진리를 비로소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신들을 고소하다가 자신도 몰랐던 숨겨진 정체가 탄로나고 고소당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타락한 영혼을 맨 얼굴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여우 선생의 유령과 함께 여신이 된 프시케를 만나게 되고, 오루알 공주는 프시케에게 자신의 이기적인 사랑을 토로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런데 프시케는 저승의 여왕에게서 받아온 아름다움의 상자를 그녀에게 내민다. "웅깃을 아름답게 해 줄 아름다움을 가지러 먼 길을 다녀온 걸 알잖아요"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오루알 공주는 수면 위에 비친 두 명의 프시케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 중 하나는 놀랍게도 자신이었다. 이어서 신 중의 신이 나타나 오루알 공주에게 말한다. "너 또한 프시케가 되리라." 이 말을 듣고 오루알 공주는 꿈인지 이상인지 모를 상태에서 깨어난다. 그녀는 풀밭에 쓰러진 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다.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오루알 공주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나는 첫 번째 책을 신들에게는 대답할 말이 없다는 말로 끝냈다. 주여, 이제는 당신이 왜 대답지 않으셨는지 압니다. 당신 자신이 답이십니다. 모든 질문은 당신의 얼굴 앞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다른 무슨 대답을 들은들 만족하겠습니까? 다 말, 말뿐입니다. 다른 말들과 싸우기 위해 끌어내는 말. 오랫동안 저는 당신을 미워했고, 오랫동안 당신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는...."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 책의 화자, 오루알 공주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소유하려는 사랑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정체가 웅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신은 그녀가 웅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프시케임을 알려준다. 프시케를 통해 아름다움의 상자를 받아 아름다워지는 신비의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신화와는 달리 이 책에서의 상자는 프시케에 의해 몰래 열리지 않았으며, 그대로 오루알 공주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그 상자 덕분에 오루알 공주 역시 아름다워진다. 웅깃이 아닌 프시케로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오로지 프시케를 통한 신의 도움 덕분에. 마치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처럼.


웅깃에서 프시케로의 transformation. 나는 ‘얼굴을 찾는다’는 의미를 자신의 ‘죄된 속성을 진실되게 깨닫는다’는 뜻으로 해석해본다. 칼빈의 전적 타락 교리와도 어울리는 이 해석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타락하여 구제불능이라는 영적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만든다. 즉,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제목의 숨은 뜻은 ‘인간이 자신의 타락함을 진정으로 발견하기까지’라고 풀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회개 없는 구원은 값싼 은혜와도 같아서 화재 보험 같은 정도의 의미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달라스 윌라드가 말했던 ‘바코드 신앙’과도 일맥상통한다. 루이스는 신화를 각색한 이 난해한 소설을 통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진정한 회개를 매개하여 강조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의 정체성은 일차적으로는 웅깃처럼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백성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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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충직과 성실의 맥락.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자신의 소유가 아닌 집을 자신의 집보다 더 완벽하게 관리해야 하며,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보다도 집 주인을 더 우선시하여 섬겨야 하는 직업. 타인을 섬기도록 운명지어진 직업. ‘집사’라는 직업에 가장 어울리는 두 단어가 있다면, 충직과 성실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섬겨야만 하는 주인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거나,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게다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까지 있을 경우, 이런 주인을 섬기는 집사의 충직함과 성실함은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러한 맥락에서도 여전히 충직함과 성실함이라는 덕목이 ‘위대한 집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대한 집사라는 개념이 과연 상황에 독립적일 수 있을까.


이 책의 주인공은 평생 달링턴 경을 섬기며 그의 저택 (달링턴 홀)을 관리했던 총 책임자, 스티븐스 집사다. 그는 어릴적부터 집사였던 아버지를 통해 진정으로 위대한 집사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직접 보고 들으며 배웠던 사람이다. 그는 누군가에겐 위대한 집사의 자질일 수도 있는, 화려한 언변과 박학다식을 그저 집사의 부수적 능력으로 여기는 과감함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자질보다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충직함과 성실함에서 집사의 위대함과 품위를 찾는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시던 순간에도 집사의 본분을 다하느라 임종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아니 함께 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사람이다. 지독스레 충직하고 악착같이 성실했던 그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그때의 일을 회고할 때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불효가 아닌, 가족까지 희생하며 본분을 다했던 집사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기억한다. 그는 실로 자타가 공인하는 위대한 충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함도 주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냐에 따라 훗날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제아무리 자신을 스스로 높게 평가한다고 해도 결코 합리화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결국 집사는 주인의 그늘 아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장소는 영국, 때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국이 히틀러가 이끈 패전국 독일의 책임을 묻는 시기 즈음이다. 달링턴 경은 영국의 총리와 독일 대사를 자기 집으로 비밀리에 초대할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엘리츠 층이었다. 그를 모시던 스티븐스에겐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달링턴 경이 최후에는 그의 고고한 (그러나 나중엔 나이브했다고 판명이 나는) 영국인스러운 신사다움 때문에, 역사적으로 독일의 히틀러 편을 들어준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슈는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를 충직하게 모시던 스티븐스 집사는 마치 달링턴 홀과 함께 일괄처리되는 품목 중 하나인 것처럼, 미국에서 건너온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 경의 집사로 넘겨지게 된다. 이 책은 패러데이 경이 출장 가는 시기에 맞춰 스티븐스 집사가 주인의 휴가 제안을 기어이 받아들이고 일주일 간 자동차 여행을 떠나게 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티븐스 집사가 고심 끝에 휴가를 떠나기로 결정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예전에 달링턴 홀에서 총무직을 수행하다가 결혼 때문에 서부로 떠난 켄턴 양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달링턴 경의 몰락으로 인해 달링턴 홀은 이름과 규모만 유지된 채 예전의 명성을 모두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 스티븐스에겐 고작 몇몇 사람만으로 큰 저택을 관리하고 있던 어려운 시기였고, 인원 부족으로 여러 사소한 문제까지 터지고 있던 찰나였다. 마침 날아온 켄턴 양의 편지에서 스티븐스 집사는 그녀의 결혼이 거의 파경에 이르렀다는 것과 그녀가 다시 달링턴 홀로 복귀하고 싶어한다는 뉘앙스를 읽어낸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이는 그가 잘못 짚은 것임이 드러난다). 함께 일할 때 앙숙이기도 하면서 남녀 간의 묘한 감정까지 그녀로부터 받았던 기억은 좀처럼 떨어지기 힘든 그의 발걸음을 기어코 옮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언뜻 보면 이 책은 스티븐스 집사가 그의 일주일 간의 휴가 중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한 회고록이나 일기 정도에 불과하다. 잔잔한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을 겪으며 떠오르는 상념들, 그리고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추억에 잠기는 등의 자연스러운 삶의 사소로움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나날들을 보내고 이젠 인생의 저녁을 맞이한 한 인간의 삶을 조망하기에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듯하다. 게다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터라, 그가 내뱉는 독백이나 문득문득 떠오르는 상념들에 이어진 과거의 추억들은 모두 우리 개개인의 내밀한 일상과 그대로 이어져있어, 평소에 잔잔한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을 때 조용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날에 대한 후회와 합리화의 경계를 왔다갔다하며 자신의 과거를 곱씹는 건, 인생을 살며 낮은 곳을 지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집사로서의 품위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에게 있어 집사의 품위는 곧 충직함과 성실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믿었던대로 살아냈다. 나름대로 성공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주일 간의 여행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변호한다. 변호는 방어기작이기에 누군가의 공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를 공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미 몰락하고 생을 다했던 달링턴 경에 대한 무성한 소문만 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스티븐스가 자신이 평생 믿어온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합리화까지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그가 달링턴 경을 자신과 동일하게 여겨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의 명예가 곧 그의 명예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똑같은 논리로, 주인의 몰락이 곧 그의 몰락이가도 했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주인과는 달리,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은 새로운 주인을 모시는 집사였다. 몰락을 경험했지만 몰락하지 않은 중간 상태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믿는 품위가 텍스트라면, 그의 옛 주인의 평판은 컨텍스트다. 컨텍스트의 몰락은 텍스트의 독립성을 저지한다. 택스트가 가진 고유한 가치까지도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며, 때론 정반대의 평가까지도 마다해야만 한다. 어쩌면 틀린 컨텍스트에서 바른 텍스트는 해적선에 탄 성실한 해적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처럼 충직함과 성실함이 평범함의 옷을 입고 악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모습과 같을지도 모른다. 악의 평범성을 다시 한 번 힐끗 떠올리게 만드는 스티븐스 집사의 삶이 황혼 무렵 비스듬히 깊게 들어오는 햇살처럼 애처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해적선의 성실한 해적과도 달랐고, 아이히만과도 달랐다. 책을 끊임없이 관통하고 있는 그의 내밀한 독백이, 다행히도, 자랑과 거들먹거림이 아닌 후회와 합리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평생 믿어온 가치를 스스로 의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치는 다시 아로새기면 될 일일지도 모르지만, 지나간 인생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인생에는 저녁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녁이 인생의 끝은 아니다. 이번 여행이 그에게는 어쩌면 새로운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5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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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는 예배 -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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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단조로움 속으로 찾아온 예기치 못한 기쁨.


티시 해리슨 워런 저, '오늘이라는 예배'를 읽고.

- 부제: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늘 보던 일상, 늘 하던 일과, 지루하고 하찮아서 나 스스로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순간들. 아니, 그런 의미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반복적이고 타성에 젖어버려 기억에서 곧바로 삭제되고 버려지는 시간들. 하지만 내 하루를, 내 인생을 압도적으로 채우고 있는 그 기계적인 시간들. 때론 순식간에 우리를 다 커버린 어른으로 만들어 버리고, 때론 인생의 덧없음을 곱씹는 철학자나 그 이면에 놓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며, 때론 심리학자로, 또 때론 무면허의 상담가나 사설탐정으로 우릴 만들어 주기도 하는 그 숱한 시간들. 바로 일상의 다른 이름들이다. 나와 당신의 인생, 나와 당신의 하루, 그리고 나와 당신의 오늘. 


그러나 그렇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날, 심지어 일기장에 끄적거릴만한 내용조차 하나 없는 날에도, 갑자기 훅 들어오는 전율의 순간은 종종 나를 찾아온다. 믿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순간은 아까와 동일한 바로 그 시공간에서 일어난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순간. 가끔은 입을 쩍 벌리고 두 손을 위로 높이 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한없이 겸허하고 한없이 경건한 자가 되어, 경이감에 휩싸인 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순간. 원한다고 찾아오는 순간들이 아니기에, 내 의지와는 분명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만, 나는 내가 그 순간을 맞이하기 이전에 화학적이고 전기적이며, 또 육적이면서 영적이기도 한 어떤 것들이 상호작용하였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 신비라고 하자. 이런 신비로운 순간은 순식간에 나를 압도하여 내 입을 다물게 하고, 비상하게 돌아가던 내 논리와 비판을 멈추게 하며, 보이는 것들 이면에 놓인 세계를 보라고 말한다. 마치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을 엉뚱한 시간과 공간에서 엉뚱한 방법으로 찾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기억할 수조차 없는 오래 전, 마치 태곳적에 나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은,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나의 이성과 감성을 단숨에 제압해버리고 나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그 순간들. 아.. 어찌 이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왜 나는 그러한 비논리적인 순간들 한가운데서 내 안의 세포들이 모두 깨어남을 느끼고, 그제서야 비로소 계속해서 뛰고 있었던 심장을 느끼며, 그 심장을 통해 전신으로 따뜻한 피가 흘러감을 느끼는 걸까. 왜 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순간을 맞이할 때,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하고, 또 궁극의 답을 얻은 지혜자가 되는 것처럼 느끼는 걸까. 왜 난 그 순간 인생의 굴곡진 곡면의 순간기울기를 살아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걸까. 왜 난 그 순간 살아있음은 물론 행복까지도 느끼고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걸까. 나의 존재 이유와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내가 품어야 할 마음과 해야 할 일들이 왜 그 순간 선명하게 분별이 되는 걸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러한 순간을 맞이할 때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아, 하나님, 이렇게 훅 들어오시다니..."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순간들이 내가 성공을 거뒀거나 뭔가 특별한 일을 성취했을 때 찾아오지 않고, 따분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 가운데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서다. 그리고 분명하게 아는 것도 한 가지가 있는데, 이러한 예기치 않은 기쁨의 순간들을 내가 점점 더 기다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다림은 나에겐 하나의 소망이 되어, 하찮을 만큼 평범한 내 일상에 밝고 아름답고 따스한 평안의 빛을 비춘다. 그렇다. 어쩌면 이러한 예기치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한 번에 훅 들어오는, 항복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순간들이 있어서 사소한 나의 하루가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이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 당신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일상에서 마지막으로 가슴 설레어 본 적이 언제인가. 


습관처럼 길들여진 반복적인 삶의 패턴 한가운데에 신비가 있다. 그 신비는 발견하는 자를 행복으로 맞아준다. 누구든지 찾을 수 있지만, 누구도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그 순간들. 이 책은 우리가 누구나 경험하는 그런 사소한 하루를 특별한 (아니, 가장 평범하다고 해야 할까. 가장 평범해서 특별해져 버린 걸까) 시각으로 조명해준다. 부제인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에서도 간파할 수 있듯, 이 책은 하루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예전과 연결시켜 바라보며, 작은 순간들의 믿음과 자잘한 형태의 영적 성숙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잠에서 깨어 침대를 정리하고, 이를 닦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부터 끼니를 때우고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24시간을 이 책은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내밀한 관찰과 분석 및 해석은 그녀의 신학적 성찰로 승화되어 이 책을 잔잔한 한 편의 에세이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녀만의 수려하고 맛깔 나는 필력은 덤이다. 


우리는 모두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 의식을 되찾는다. 나 같은 경우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빠로서, 그리고 한 명의 생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더 깊고 더 실제적인 정체성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다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매일 아침 세례받은 자들로서 잠에서 깬다." 구약의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구원해주시고 보호해주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성공회 사제로서 저자는 예배당에 있는 세례반을 지나갈 때 손가락을 살짝 담근 뒤 성호를 긋는 행위가 기억의 행위임을 알려준다.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으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 덕분에 받아들여졌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모든 정체성을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내려놓았다가 다시 하나씩 주워 입게 되는 아침 시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사랑받은 자요, 용서받은 자요, 받아들여진 자라는 것을.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는 또 다시 단조로운 일상으로 남겨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오늘을 구별해 주셨다는 것을. 오늘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시간이라는 것을. 다시 시작할 날은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남편, 아빠, 과학자의 정체성보다 더 소중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21세기를 들어 스마트폰은 버젓이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스마트폰 의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에 잠들기 직전, 그리고 하루 중, 예전 같으면 소위 '심심했을' 짬 시간의 모든 조각조각들 가운데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는 단짝은 스마트폰이 되었다. 스마트폰 덕분에 테크놀로지가 하루 중 비어있는 모든 순간을 채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야금야금 우리의 습관을 형성해간다. 저자가 간파한 것처럼, 정말 마치 지루함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과 두려움 때문인 것일까. 어느 사순절 기간, 그녀는 스마트폰을 침대 곁에서 치워버리고, 대신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정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생각과 묵상,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 것 아닌 그 행위 덕분에 얻은 유익을 나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작은 혼란 속에서 작은 질서를 만들어 내는 일. 어질러진 집 안에 하나의 작은 공간, 질서가 잡힌 사각 공간이 생겼다. 신비롭게도 이 사각형은 나의 어지럽고 산만한 정신 안에도 작고 질서 잡힌 공간을 만들어냈다." 제임스 스미스의 '습관이 영성이다'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표방하는 세계관이나 특정 문화와는 상관없이, 검증되지 않은 매일의 습관들로 형성되어져 간다. 그녀 역시 이 통찰을 적극 동의하며 반복되고 단조로운 일상의 순간들이 가지는 의미에 신학적 성찰을 가한다. 반복성은 믿음의 리듬을 반영하는 것이며, 우리를 성숙시키는 훈련의 장은 바로 매일의 일상, 그 단조로움 안에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따끔하게 우리에게 도전도 가한다. 크고 즐겁고 극적이고 충격적인 것을 열망하는 문화에서, 침묵과 반복의 공간이 있는 삶을 일구는 것은 믿음의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나는 바로 그것이 일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작은 저항이라 믿는다. 거창한 대의를 위한 거창한 저항이 아닌, 아주 작고 작은 저항. 누군가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혁명을 원한다. 아무도 설거지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깨달음처럼 나 역시 기독교 신앙의 일상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묵상하게 되었다. 아무리 혁명을 원하고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을 원해도, 설거지를 배우지 않고는 그것들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어진 3장에서는 이 닦는 사소한 행위에서 '유지와 보수'라는 저자의 신학적 성찰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불가피하게 단순한 유지 보수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며, 유한한 육체에 갇힌 우리 인간들의 한계와, 그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또 예배하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저자는 그녀의 묵상을 조곤조곤 나누어준다. 특별히, 인간의 제한된 육체 안으로 들어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복음을 머리만이 아닌 몸으로도 믿는다는 것에 대한 것의 의미와, 이성적으로 바르게 믿는 신앙을 넘어서는, 즉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예배의 실천에 대한 의미를 묵상한다. 몸과 기도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나도 존경하는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을 인용한다. "바닥에 엎드리지 않고도 기도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무릎 꿇는 법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교회의 제도로서 기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려면 몸을 구부리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기도의 몸짓과 자세를 배우는 것은 기도를 배우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참으로 몸짓이 기도다." 몇 달째 나 역시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면서부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땐 누구나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남도 속이고 나도 속이는 그 교묘한 위장의 순간의 단점은 수명이 짧다는 것이다. 문제는 생기게 되어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린 진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모든 순조로움이 멈추고, 통제력, 여유, 특권이 사라지고, 대신 궁핍함, 죄성, 신경증, 연약함이 순식간에 드러난다. 4장에서 저자는 바쁜 순간, 열쇠를 잃어버리는 사건을 통해 우리가 정말로 은혜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길을 잃었고 깨어진 존재였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분의 용서와 죄사함과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도와준다. 바로 회개와 믿음의 반복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속되는 일상의 리듬이자 호흡과도 같다는 것이다. 열쇠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사건들이 우리의 성숙과 성화를 위한 기회라는 신학적 성찰을 저자는 전혀 고리타분하거나 가르치려는 듯한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조용히 아주 설득력 있게 풀어준다. 이 책을 읽는 묘미일 것이다.


5장에서 저자는 먹다 남아서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타코 수프를 먹는 행위에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요소, 즉 말씀과 성례전을 성찰한다. 두 가지 모두 음식처럼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요소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행해야 할 일 가운데서 어떤 특별하거나 거창한 행위가 아닌, 굳이 식사라는 평범한 행위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반복적 일상에 깃든 신비를 읽어낸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식사는 너무나도 평범하여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기억에서 곧장 사라져버리는 보통의 식사가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했다는 사실은 우리도 부인할 수 없다. 그 반복적이고 때론 지겹게까지 느껴졌던 식사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예배에서 말씀과 성례전 역시 매 주일마다 반복되는 (적어도 성공회 예배에서는 참이다) 순서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실제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그 조용하고 기억에 남지 않는 행위들이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주며,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먹인다고 말한다. 흥분, 모험, 흥미진진하거나 충격적인 영적 경험 등을 파는 많은 현대 기독교 예배는 우리를 금방 목이 타는 영적 경험의 소비자로 전락시키지만, 말씀과 성례전이 중심을 이루는 기독교 예배는 우리의 정체성이 소비자가 아닌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역설한다. 전통적인 예전 안에 깃든 신비를 조금 맛본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6장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는 평화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사실, 나도 다를 바 없다. 나는 '아내에게 큰 소리치고 말과 글이 앞서는 몽상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큰 이념을 표방한다 해놓고서도 여전히 우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사로운 다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과의 다툼에서 저자는 '평화의 인사 건네기'와 '평화를 이루는 일상의 일'에 대해 묵상했던 것을 우리에게 나눠준다. 가장 가까운 이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면서도 세상을 위한 급진적 사랑을 부르짖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묵과하고 막연한 다수의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큰 소리치는 이들.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한 이러한 우리들의 현실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름 없고 그 자체로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평범한 사랑이 바로 땅 위에 존재하는 평화의 실체이며 일상에서 통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그리고 다음을 믿으라고 권한다. 믿는 것이 신앙의 행위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분의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 그렇다. 내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소한 평화의 몸짓이 세상의 우주적 평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믿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이메일을 싫어한다. 이메일은 그녀를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실패자라고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메일 확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거룩한 임무라고 고백한다. 노동하는 것과 예배하는 것, 즉 일과 신앙 혹은 삶과 신앙의 조화에 대한 저자의 성찰이 여기 7장에서는 소개되어 있다. 일과 성취감을 우상으로 여기는 것에 저항하면서도, 우리의 일 안에서, 우리의 일을 통해 직업적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일하는 삶을 기도의 형태로 살아내도록 도와준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특히 베네딕트회 영성의 특징을 잘 대변해주는 로렌스 형제의 예를 들면서 말이다. 성과 속을 구별하는 것에 길들여진 보수 신앙인들은 마치 목회자가 시장에서 반찬 파는 직업을 가진 서민보다 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목회자 스스로도 교회에 관계된 일이 아닌 일을 할 때면 마치 세속적인 일을 한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도 믿는다. 거룩하다고 규정해놓은 일을 해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로서 성실히 일에 임하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일에 임한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거룩한 일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저자가 싫어하는 이메일 확인 작업에서도 그녀는 거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혹은 속되다고 단정했던 일에서 우리는 거룩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일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이 우리의 직업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직업을 통해 행하고 계신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장에서 저자는 시간 통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나눈다. 우린 모두 우리의 시간을 우리가 통제하며 산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은 반복된 습관과 무의식의 세계가 깊숙이 침투해있음을 알 수 있다. 통제는 보통 실행을 의미하지 기다림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 저자는 교통 체증 가운데 모든 것이 묶여있는 경험으로부터 인내와 소망을 읽어내고 그 인내와 소망은 부활에 근거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중간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작전 개시일과 전승 기념일 사이의 삶으로 비유한다. 이미 가졌다 함도 아니고 아직 얻지 못했다 함도 아닌, 언제나 길 위에 서서 기다리고 인내하고 소망하는 순례자.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중 하나임을 믿는다.


9장에서는 개인영성, 즉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개인의 회심과 영적 성장에만 배타적으로 치우친 복음주의권 문화에 일침을 가하며, 저자는 기독교가 개인영성 뿐만이 아닌 한 민족을 부르시고 형성하시고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면서,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의미를 성찰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지 않았으며, 그분은 추종자들과 단지 개인적 관계를 추구하지 않으셨음을 저자는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교회의 죄와 실패 안에서 어두움과 추함을 보는 그녀는 또한 하나님은 죄인들 한가운데서 구속과 회개와 변화를 가져오실 수 있다는 빛나는 소망도 본다. 그리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짚어준다. 손이 몸의 일부이듯, 나 역시 교회의 일부라는 것. 즉 내가 교회 안에서 죄를 볼 때, 나도 그 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 나도 교회의 깨어짐에 한몫 거들고 있다는 것. 이 찔림에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이야기했듯, "우리가 함께 온전함을 이룰 때까지 우리 중 누구도 온전함을 이룰 수 없다." 아멘.


10장과 11장에서는 각각 차를 마시고 쉼을 얻는 시간과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 대한 저자의 성찰을 만날 수 있다. 쉼은 연습이 필요하다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일상에 깃든 아름다운 작은 순간들에 주목하여, 그것들이 맞닿아있는 신성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우리들에게 제안한다. 쉼과 잠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의 단조로운 일상을 찾아오는 예기치 못한 기쁨. 그 기쁨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임재. 나도 그 기쁨을 맞이하는 순간뿐 아니라, 그 기쁨을 마음 설레며 기다리는 시간에서도 저자처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5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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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악령과 인간의 본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령’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악령’은 누가복음 8장 32-36절로 운을 띄우며 대단원의 막을 올린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열린책들’ 판에 나온대로 공동번역을 따랐다.


|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 (악령)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마귀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락으로 도망쳐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마귀 (악령)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마귀 (악령) 들렸던 사람이 낫게 된 경위를 알려주었다. |


본문에 등장하는 ‘마귀’라는 단어는 성경 번역에 따라 ‘귀신’이라고도 표기된다. 영문으로는 ‘demon’ 아니면 ‘devil’로 번역된다. ‘열린책들’에서는 소설의 제목이 지닌 의미를 살리기 위해 ‘마귀’에 ‘악령’을 병기했다. 나 역시 이 감상문에서는 ‘악령’이라는 단어로 통일한다. 참고로 이 작품의 러시아 원서 제목은 ‘Besi’, 영문 제목은 ‘The possessed’, 'Demons', 혹은 ‘The Devils’이다.


성경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악령의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악령의 존재방식과 힘, 그리고 이를 호령하고 제어하는 예수의 권세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 의거하면, 악령은 바이러스처럼 숙주를 필요로 하며, 숙주를 옮겨 다닐 수 있다. 숙주는 사람일 수도 돼지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악령의 존재방식과 힘, 즉 사람을 홀리고 장악하는 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혼란과 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전파 및 확산하는 일, 그리고 사람을 궁극적 파멸로 이끈 뒤 자신은 살아남아 또 다음 기회를 노리는 힘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이 책의 감상문을 작성해보고자 한다.


처음엔 단순한 궁금증이 있었다. 왜 이 성경본문인가? 그저 악령이 등장하기 때문인가? 악령이 등장하는 본문은 여기 말고도 다른 복음서뿐 아니라 사도행전에도 나오는데 왜 하필 이 본문인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답을 얻지 못했다. 마지막 페이지인 1097 페이지에 도달하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건만, 게다가 읽었던 곳을 읽고 또 읽고 하면서 다른 책보다 더 힘들게 읽어냈건만, 나의 이해는 여전히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틈틈이 읽고 생각하며 머리 속에서 재구성해보던 중, 어제 밤에야 비로소 실마리가 잡혔는데 그것은 전율과 함께 내게 갑자기 다가왔다. 계속 봐서 식상해진 글이 여태껏 숨겨왔던 의미를 마침내 드러낼 때 느낄 수 있는 그 소름 돋는 전율.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이 성경본문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용기가 났다. 이 성경본문으로 이 대작을 조금이나마 풀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작품은 감상문을 쓰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작품이라서, 어떻게 써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고, 그래서 그냥 포기할까 여러 번 고민했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누가복음 인용 용도와 목적을 중심으로 해서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풀어가다 보면, 비록 졸작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대가의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 Possessed: 먼저, 소위 ‘귀신 들렸다’라든지, ‘귀신에게 홀렸다’, 혹은 ’사탄에게 잡혔다’라고 표현되곤 하는 악령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다. 이 소설의 컨텍스트에서 악령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첫 번째 숙주 관점에서 접근해본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1869년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한 달간 주로 뻬쩨르부르그와 스끄보레쉬니끼 등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안똔 라브렌찌예비치'라는 사람이 기록한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연대기적 회고록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시점이 평범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소설 전체에서 볼 때,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는 소설의 화자가 실제 말도 하고 사건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는 인간 관찰자가 맞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전지적 작가 입장도 취하기 때문이다.


방대한 이 책의 본문은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라는 인물의 짧은 연대기로 시작한다. 소설 전체에서 스쩨빤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으로 등장하지만, 화자는 일부러 그의 젊은 시절을 간략히 연대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소설의 서론을 대신한다 (이 소설의 화자 안똔은 스쩨빤의 가장 친한 젊은 벗이다). 왜일까? 왜 스쩨빤의 과거가 이 대작의 서론으로 자리잡아야만 했을까? 스쩨빤은 중요 인물이긴 하지만, 주요 사건을 일으키거나 상황의 전면에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기력이 쇠한 노인네 아닌가). 화자가 밝히고 있는 이유에도 특별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그저 뜬금없이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최근에 일어난 아주 이상한 사건을 기술하기에 앞서 약간 멀리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말을 하며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뿐이다.


나는 여기서 화자가 아닌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이 소설을 악령의 존재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서론은 악령의 기원이라든지 아직 땅 속에 묻힌 채 발아를 기다리고 있는 악령의 씨앗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누가복음 본문에서 악령이 처음엔 돼지가 아닌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듯, 스쩨빤도 이 소설의 컨텍스트에 있어서는 악령 들린 첫 번째 숙주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장장 천 페이지를 넘는 이 대작의 서론이, 조금은 뚱딴지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스쩨빤 한 사람의 전기로 대체되어야만 했던 게 아니었을까. 악령의 존재와 그 미미한 시작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 본다. 19세기 러시아 철학과 사상은 1840년대와 1860년대로 구분지을 수 있다고 한다. 뚜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1840년대 세대를 ‘아버지 세대’로, 1860년대 세대를 ‘아들 세대’로 나눈다. 역사를 이분법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경솔한 시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구분이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는지 여부를 떠나, 두 세대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이 가시적이자 상징적이었다고 보았다. 1840년대 러시아에는 서구의 자유주의가 물밀듯 들어와 있었다. ‘인텔리겐찌야’라고 불리는 러시아 특유의 지식인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는데, 각각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로 양분되었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스쩨빤은 1840년대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서구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입만 열면 프랑스어를 남발했고, 러시아 역사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현실감을 상실한 이상주의자로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1821년생이며 1881년에 타개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두 세대를 모두 직접 함께 한 장본인으로서, 이 소설의 주배경이 알렉산드르 2세가 1861년에 시행한 농노 해방령이 발효된 후 민중의 분노가 극에 치달았을 1869년인 것을 감안하면, 아버지 세대의 결코 안정하지 않았던 서구 자유주의의 급기류가 아들 세대로 하여금 결국 피를 흘리게끔 만든 악령의 씨앗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즉, 1860년대 말에 있었던, 혁명이란 옷을 입은 광기 어린 폭동을 일으킨 아들 세대에게 안착한 악령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저자는 고발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마치 악령이 사람에서 돼지로 옮겨간 것처럼 말이다.


2. Moving to enter: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죽지 않고 영원한 악령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다. 말하자면 두 번째 숙주 관점에서 풀어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미처 다 읽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 책의 창작 배경이 그 유명한 '네차예프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임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급진적 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네차예프는 1869년 모스크바에서 '민중의 복수'라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조직원 중 하나였던 '이반 이바노프'라는 사람이 그의 방법론에 반대를 하며 조직을 탈퇴하려고 하자, 네차예프는 동료 4명과 함께 이바노프를 살해해 버린다. 이 사건은 그 당시 러시아에 팽만했던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필두로 했던 극단적이고 광적인 혁명 운동을 상징하며, 혁명 세력의 비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건을 접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정치 풍자적인 내용의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었고, 그만의 독특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며 또 심리학적이기까지 하면서 야생마처럼 결코 다듬어지지 않은 그만의 총천연색 필체가 가미되어 이 책 '악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실제 작품 안에서도 '네차예프 사건'은 거의 그대로 모방된다. 소설의 절정 부분에 나오는 일련의 흉측한 범죄 중에서도 정점을 찍는 사건으로 등장하는데, 살해 수단이 총이었다는 것, 살해 장소가 인적이 드문 연못 근처였다는 것, 시체를 연못에 빠뜨려 유기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진상이 다 밝혀졌다는 것까지 모두가 동일하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는데, 나는 이 차이점에 착안하여 저자의 숨은 메시지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네차예프 사건'에서는 범죄를 주동한 네차예프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고 이후 종신형으로 대체되어 투옥 8년 만에 병사했다는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 소설에서 네차예프 역을 맡았던 '표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 (스쩨빤의 성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 표뜨르는 스쩨빤의 아들이다)는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공범과는 달리 홀로 잡히지 않고 도주하여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표뜨르는 표면적으로는 네차예프처럼 혁명을 일으키길 원하는 자처럼 그려진다. 적어도 그가 입김을 지속적으로 불어넣고 있는 조직원들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네차예프와의 공통점은 아마도 공모하여 살인을 주도했다는 점 빼고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네차예프는 당대 유명했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의 지원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조직을 결성하는 등 실제 혁명을 일으키려는 자였지만, 표뜨르의 경우는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뤄내자고 하는 겉으로 포장된 선전과는 달리 실제로는 혁명이 아닌 혼란만을 야기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적인 지원자도 없었고, 훈련 받은 적도 없었으며, 실재하는 조직조차도 없었다. 오로지 거짓과 위선으로 무장하여 경솔하고 간사하며 비열하고 뻔뻔하며 무례하기까지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인조라는, 실재하지도 않지만 조직원들은 실재하는 것처럼 믿는, 오합지졸 같은 조직을 충동질하여 계획한 범죄를 깔끔하지 못한 방식으로 기어이 저지르고야 마는 악령의 실체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죽거나 파멸 당한 자가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를 제외한 악령의 두 번째 숙주는 누가복음 본문의 돼지 떼가 몰살당한 것처럼 모두 희생당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어쨌거나 표뜨르 개인의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저질러졌던 것이다. 그렇다. 그건 혁명이 아니라 범죄였다. 그 범죄는 혼란이었다. 불이 났고 폭동이 일어났고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혼란 야기는 충분히 성공했다. 마치 마귀새끼 한 마리가 분탕질을 해놓고 도망친 것처럼, 마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들고 저 혼자만 내뺀 것처럼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표뜨르를 살려두었을까. 아마도 악령의 존재방식에는 절대 끝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악령의 불멸성을 말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저 잠복기와 휴지기, 그리고 활동기가 구분될 뿐 악령의 존재 자체는 그 어떤 모습으로든 영원하다는 것을 상기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3. Spiritual existence: 또 다른 축,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해본다.


여태까지 이 소설의 주인공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본문의 악령의 존재방식에 착안하여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표뜨르와 5인조로 대표되는 아들 세대로의 악령의 숙주 이동은 그 자체로써 독립적이고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이 구조로만 이루어졌다면, 그리 난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표뜨르를 주인공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스따브로긴이라는 인물을 대신 등극시켰다. 그는 이 때문에 작품을 전면 개정하는 수고를 더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 작품은 두 개의 축을 가지게 되었다. 두 축은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복합적이고 더 심층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가져왔는데, 어쩌면 이것이 이 작품을 대작으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일명 스따브로긴으로 대표되는 두 번째 축은 악령의 존재방식이라기보다는 악령의 습성 내지는 성품을 말해준다고 나는 보았다. 그는 비록 어릴 적 스쩨빤의 영향을 잠시 받은 적이 있고, 해외에 머물 때 표뜨르와도 관계를 잠시 맺었지만, 다분히 독립적인 이미지로서 이 소설의 저변에 흐르는 모든 어두운 힘의 움직임에 우월한 입지를 선점하며 관여되어 있다. 심지어 그는 저열한 모습으로 혼돈을 불러일으킨 악령의 행동대장 표뜨르가 선택하고 유일하게 우상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야심찬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스따브로긴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우월함과 언제나 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초월적인 이미지, 일탈을 일삼고 나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언제나 고독과 우수에 차 있는 그의 이미지는 신비하게까지 느껴졌으며, 표뜨르를 포함한 주위 모든 사람들이 스따브로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나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건의 전면에 나서서 악령의 더러운 손과 발 역할을 했던 사람은 표뜨르였지만,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더라도 모든 사건의 배후에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사람은 스따브로긴이었다. 어쩌면 표뜨르는 스따브로긴 한 개인 안에 들어있던 악령을 외부에서 증폭시킨 역할을 담당했던 건 아니었을까. 악령의 이동이 아닌 악령의 영향력을 저자는 스따브로긴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굳이 숙주를 이동하는 수고로움 없이도, 거짓과 위선과 사리사욕에 눈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마치 악령이 거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악령의 힘을 묘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표뜨르를 움직인 건 어쩌면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이동된 악령이 아니라, 그 악령을 섬기면서 그에 의지하여 표출하고자 애쓴, 한낱 가련한 인간의 탐욕이 아니었을까.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악령은 어쩌면 어떤 초월적인 인격을 가진 제 3의 영적 존재가 아니라, 탐욕과 거짓과 위선과도 같은 인간 스스로의 내밀한 본성일지도 모른다는 걸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인간의 참담한 실체, 그 어두운 심연의 그림자를 가감없이 이 소설 속에서 보여준 건 아니었을까.


악령의 존재 유무를 논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나는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고 싶다. 악령을 원망의 대상이나 핑계거리로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말이다. 악령을 탓하는 행위가 당면한 문제의 이면에 있는 영적 실체를 인지하여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 꿇고 마음을 낮추는 자세를 가져온다면 좋겠지만, 탓하는 그 행위에서만 머물며 마치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상황을 초래한다면 악령의 존재를 차라리 부인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악령 탓만 하는 행위 자체가 악령이 가장 원하는 것일지. 그게 바로 악령일지.


한 달간 이 책을 읽어나갈 때도 도스토예프스키만의 독특한 필체 덕분에 정신이 없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정신 없기는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의 그 길고 긴 이름은 부수적인 스트레스일 정도다. 워낙 방대하고 심층적인 소설이라 해석 자체가 어려웠다. 아직도 난 이 작품을 얼마나 소화했는지 감도 잡을 수가 없다. 역사에 길이 남을 니체를 포함한 철학자들 뿐만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자, 신학자, 그리고 기타 여러 사상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이나 ‘백치’와는 또 다른 맛의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렇게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조잡한 리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나의 글이 기라성 같은 이 작품에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7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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