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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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시바타 쇼 저,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읽고.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그저 화려한 옷과 같다면, 그 옷을 벗게 되는 날, 나는 누구일까? 벌거벗은 몸으로 흙이 되는 날, 나는 무엇일까? 내가 부숴지고 갈아지면, 나는 과연 무슨 맛을 낼까?




죽음 앞에서 진지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음의 탄환은 단 한 번도 육체를 빗나간 적이 없다. 죽음은 궁극의 승리자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날만이 아니다. 우린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경험한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겐, 언젠가는 적어도 한 번 이상,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꺾이고 무너지고 부숴질 시기.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날 때다.




이 책,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서,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사노'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문득 마주한 생각 역시 죽음 앞에 선 자신의 모습에 관해서였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생각할까?' 그리고 그는 그 질문과 동시에 번개처럼 무서운 답을 스스로 한다. '나는 배신자다!' 그 이외엔 어떠한 답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홀로 외딴 산장을 찾아가 그곳에서 과량의 수면제에 몸을 맡긴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언저리, 제 2차 세계대전 직후다. 사노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로 진보적인 혁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메이데이 궁성 앞 광장에서 벌어졌던 시위 현장에서 경찰 진압대의 공격에 공포를 느꼈고 죽을 힘을 다해 그곳을 도망쳤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비록 대학에 진학하여 공산당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이어갔지만, 사노는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동지를 배신하고, 당을 배신하고, 자신을 배신해버렸던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괴로운 정신적인 이중생활의 시작이었다. 이는 결국 수 년 후 그를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실마리가 된다.




사노 뿐만이 아니었다. 이 책의 화자 후미오의 애인, 세쓰코 역시 사노가 남긴 편지를 읽고 동일한 질문 앞에 선다.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다행히 그녀는, 사노와는 달리, 죽음을 택하진 않았지만, 후미오와의 결혼도 취소하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의미를 묻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사노가 죽음을 상징했다면, 세쓰코는 삶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전후 세대가 겪은 가치관의 혼란을 보여준 작품이라면, 그 혼란은 각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갔으며 또 각 사람으로부터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켰음을 저자는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언가 죽음이 아닌 삶,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희망을 끝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린 각자의 죽음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지금 우린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무모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진 않을까. 한 번쯤은 자신을 죽음 앞에 세워두고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묻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노처럼 과거의 트라우마에 잡혀 현재를 저당 잡히고 미래까지 스스로 포기하는 인생이 아닌, 세쓰코처럼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현재 내가 가진 것들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 진정한 나는 빈손과 맨발로 죽음 앞에 서있는 벌거벗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묻는다. 나는 어떤 맛을 내는 사람일까? 인생을 살아가며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화하고 체화시켰을까? 그렇게 해서 내가 맺어온 열매는 과연 어떤 맛을 낼까? 내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른 생명에게 도움이 되는 자양분이 될 수는 있을까? 혹시 쓴 맛만 내는 건 아닐까? 유한함의 종착역인 죽음 앞에서 아직 붙들고 있는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이미 그런 계기들을 수없이 놓쳐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0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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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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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현실인 한국의 구조악: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고발/고찰하기.


정희진 저,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이 책은 비유나 상징이 아닌,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저자의 직접적인 해석과 더불어, 가부장제 문화에서 습관처럼 배제되었던 여성과 소수자의 시각을 되살려내는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정상적인’ 해석의 편협함과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드러내는 재해석 작업, 그리고 그로 인해 젠더나 성별 이슈를 넘어 인식의 모든 대상에 대한 대안적 인식론을 우리 모두가 가지기를 소원하는 저자의 한이 가득 담긴 글의 모음집이다. 실제 저자는 페미니즘을 ‘지식의 형성 과정, 권력의 작동 지형과 역사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학문이자 실천’으로 정의하며, 여성학이나 여성주의라는 명칭조차도 생물학적 여성에게 국한된 문제로 보는 협소한 관점을 지양한다. 단지 여성의 지위를 남성의 그것과 같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올려놓는 목적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보자는 것이 이 책에 흐르는 저자의 주된 메시지다.


이미 치우친 배를 가운데로 맞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동안은 일부러 반대쪽으로 치우칠 필요가 있어서였을까. 개정증보판이라지만 여전히 2019년의 시각을 만족시킬만큼 충분히 업데이트되지 못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길들여진 가부장제라는 내 안의 색안경을 보호하려는 본능과, 또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안전한 유익을 여전히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나의 무의식 때문이었을까. 일관된 관심과 집중을 가지고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기는 힘들었다. 분명한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저자가 사례로 드는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내가 깊고 정확하게 알거나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나는 이 책을 깊이있게 공감하기엔 역량이 모자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 정치 사회적인 이슈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고 둔감했던 나의 성향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결과로 기득권 세력이 내어놓은 해석에 길들여져온 나의 안이한 태도가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나의 준비되지 않은 자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가진 색깔과 요지가 선명했음을 반증하는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책엔 여러 단편적인 글들이 모아져 있지만, 무작위로 아무 글이나 선택해서 읽더라도 저자의 메시지를 잡아낼 수 있을만큼, 저자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분명하다.


한편, 저자는 다양한 여성폭력을 다루는 데 있어서 문제의 심각성만 강조하면서 여성의 비참한 현실과 남성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밝힌다. 또한 그 문제들에 대해 대책을 논할 생각도 없다고 밝힌다. 다만, 한국 사회의 시각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 명의 독자로서 내가 느낀 저자의 스탠스는 충분히 여성이 당하는 모든 폭력의 심각성을 강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로 인해 여성이 여태까지 당해왔고 지금도 당하고 있는 비참한 현실과, 가해자인 남성의 비인간적인 습성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저자의 주된 비판이 실제론 이러한 폭로의 향연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경우, 여러 충격적이고 적나라한 사건 폭로에 정신을 빼앗기느라, 저자가 원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까지는 미처 집중을 하지 못했다. 참담한 뉴스를 보고 난 직후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깊이 생각해볼 만큼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한편으론, 저자가 매트릭스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아직도 가부장제라는, ‘정상적인’ 상황을 자처하는 매트릭스 안에 거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얼마나 마음에 커다란 상처와 아쉬움을 느꼈을지, 함께 아파하는 마음도 있었다. 허나, 다른 한편으론 동일한 메시지를 여러 구체적 사례를 동원하며 많이 반복해서 나열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회에 각인된, 거의 악마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며 폭력적이고도 차별적인 체계를 가능한 모든 형용사와 수식어구를 동원하여 적나라하면서도 고급스럽게 묘사하는 방법이 저자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과연 효과적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또한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비슷하거나 동일한 메시지를 그저 수평적으로 열거하는 방식이 과연 효과적이었을까, 혹시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는 충분한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이 책이 결국 얻어낸 건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독자들은 금새 저자의 통쾌하면서도 강한 표현에 면역이 되어 저자가 주장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진 않았을까, 등등의 여러 의문까지도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생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 번 쯤은 꼭 읽으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둔감하거나, 그래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아픈 진실들을 습관처럼 놓치며 살고 있는, 가부장적 남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단, 나처럼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에서 인간에 내재된 폭력과 악의 모습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어찌 할꼬?’ 하며 마음이 아파 가슴을 치는 부류의 사람들은 이 책이 결코 문학책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적나라한 현실보고서와 그 이면의 시선들을 발견하고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것들을 포괄하는 체제의 부조리 등이 궁금한 이들에겐 서슴없이 추천할 책이다. 호흡이 가빠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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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왕의 복음 - 당신의 삶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
스캇 맥나이트 지음, 박세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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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왕의 복음: 개인구원을 위한 천국티켓을 넘어서.


스캇 맥나이트 저, ‘예수 왕의 복음’ (새물결플러스 출판)을 읽고.


사영리식 전도의 목적은 영혼 구원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 결단을 위해 전도자는 피전도자를 설득해야 한다 (선포가 아닌 설득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설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에 따른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그래서?” 하는 무관심한 반응과 “정말?” 하는 관심의 반응이다. 물론 전도자는 후자의 반응을 기대한다. 일단 전도자는 피전도자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로 작정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상황이다. 시나리오대로 피전도자의 반응이 나와준다면,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 더 구원하는 셈이며, 교회로 돌아가 ‘영접시킨 영혼’ 수에다 한 칸 더 추가할 수도 있고, 어쩌면 ‘전도대왕’이라는 타이틀의 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전도대왕’의 경험이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피전도자의 반응이 후자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후자인 경우라면 무슨 말을 하든지, 혹은 안해도, 영접을 할 것이다). 보통 전자이거나, 얼굴엔 가느다란 웃음으로 위장한 채 대화가 빨리 끝나기를 고대하면서 가만히 듣고 있는, 소위 ‘아량 깃든 무반응’이 대부분이다. 어쨌거나, 전도자는 준비해온 게 있다. 이를 위해 떨리는 가슴으로 얼마나 부단히도 연습을 했던가. 피전도자의 반응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전도자는 끝까지 진행해야만 한다. 목적은 영접이다. 


두 번째, “그런데 당신은 죄인이다.” 

죄라는 정의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해석이 명확하지 않으며, 영적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개념이기 때문에, 이 두 번째 메시지를 듣는 사람은 어리둥절할 수 있다. 만약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 같다면, 그건 대부분 기독교에서 주로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과 같은 영적인 죄로써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도덕적 성찰로 비롯된 반응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가 왜 죄인이냐?”라며 기분 나빠하는 경우다. 생각해보라.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와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해서 어디 한 번 말해보라고 허락했는데, 뜬금없이 자기더러 죄인이라고 선포하니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 죄를 인간의 힘 (선행이나 봉사 희생 등등으로도)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니, 이건 완전히 자신이 구제불능이라는 말밖에 안 된다. 그러면 결코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전도자는 이런 경우를 당하면 감정이 울컥해지면서 계획했던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워진다. 죄의 개념을 이해시키고자 이런저런, 자기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설명을 피상적으로 해보지만, 화가 난 피전도자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하냐는 식으로 전도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앉아있다. 아, 이 난처한 상황. 이건 교회에서 배운 사영리식 전도 매뉴얼에 나와있지도 않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건 없다. 다행히 (?) 이런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첫 번째 메시지에서 반응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무반응’이다 (단, 아량은 점점 사라져간다). 그래서 전도자들 대부분은 계획했던대로 세 번째 메시지로 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다.


세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만이 죄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이다. 죄가 무엇이지 선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예수라는, 신이자 사람인 존재가 (우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아스가르드의 토르 같은 건가? 그러면 신화란 말인가?) 나타나서 자신의 죄문제를 이미 해결했다고 선포하니, 생각해보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그 죄가 뭐길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게 도대체 뭐길래, 모든 인간을 밑도 끝도 없이 구제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가. 그리고 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예수를 제시하니, 피전도자는 정말 황당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예수라는 존재가 누구이길래,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 건가. 이건 도대체 고마워해야만 하는 상황인가. 이렇게 머리가 온통 복잡해진 상태에서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할 무렵, 전도자는 슬그머니 네 번째 마지막 메시지로 넘어간다. 상투적인 사영리식 전도의 경우, 보통 이렇게 세 번째 메시지까지 이르면, 전도자의 경우는 지치고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끝가지 가보자는 마음가짐이 되고 (전도자는 피전도자가 큰 반대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흑암이 결박되었다거나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피전도자는 어여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이 된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동상이몽’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네 번째 메시지다. 이 말을 들으면, 아마도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교회 나오라는 말이었군’하고 생각하는 피전도자들이 많을 것이다. 예수 믿고 교회 나오라는 말을 하려고 앞의 세 가지 메시지를 성경구절까지 외우면서 장황하게 설파했던 거라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쉴 틈을 주지 않고 전도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기도를 따라해야 하는데, 따라하겠냐고 물어본다. 피전도자는 난감하다. 화를 낼 수도 없다. 무턱대고 영접기도라는 것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니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만약 안 한다고 하면 다음에 또 찾아오거나 귀찮게 할테니 그냥 따라해줄까 고민한다. 어떤 피전도자의 경우는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영접기도를 따라한다. 아니 따라해준다. 한 번 더 아량을 품고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해본 것이다. ‘만약 죄라는 것이 진짜로 있다고 치고 (비록 믿기지는 않지만), 그 죄를 전도자의 설명대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치며 (왜 해결 못하는지 이유는 모르면서), 예수라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가 어쨌거나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했다고 치면 (‘음… 땡큐일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공짜 천국티켓을 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든다), 그 영접기도인가 뭣인가만 따라하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고, 절대 그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강력하게 말하는데 (보이는가? 모든 게 가정이다. 복음 선포에 믿음이 생긴 게 아니라 전도자의 열심에 설득을 당해준 것이다), 밑져야 본전 아닐까?’ 그래서 영접기도를 따라해주겠다는 결단 (?)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웃픈 상황이 현장에서 항상 벌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실은 직간접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상황 중 추스린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알아챘겠지만, 그렇다. 나는 사영리식 전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에 공감을 한다면 (위의 장황한 글을 단숨에 읽어내려온 독자들 모두 포함), 아마도 당신도 비슷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봤거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해봤다는 뜻일 것이다. 


스캇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이란 책을 읽고나서, 나의 이런 불경스런 (?) 생각이 전적으로 틀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그것이 가지는 무게에 비해 아주 단순하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종교개혁 즈음부터 시작해서 ‘구원의 문화’를 ‘복음의 문화’로 착각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본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초점을 둔다. 그 복음은 바울과 사도들의 복음이자,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복음이며, 또한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약속의 성취로서의 예수님 이야기다. 우리들이 흔히 복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구원의 문화’는 ‘복음의 문화’ 안에 속한 것일 뿐, 결코 ‘구원의 문화’는 ‘복음의 문화’와 똑같지 않다. 저자는 복음의 예수님을 요약해서, ‘왕이신 예수님’, 혹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메시아이며 주님이시다’라고 말하겠다고 한다. 왕으로서, 메시아로서, 주님으로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 혹은 해방자이시라는 것이다. 


조소 섞인 이 글의 앞부분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지 사영리식 전도방법이 잘못되었다거나 그것을 피상적으로 수정하자는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즉 사영리식 전도방법의 배경이 되고 근간이 되어온 기독교의 잘못된 문화를 꼬집고 싶었던 것이다. 스캇 맥나이트가 간파한대로, 복음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한 체계가 아니다. 사영리식 전도에서 말하는 복음이란 천국티켓용으로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값싼 구원, 오로지 죽은 이후의 사후세계가 지옥이 아닌 천국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안전한 보험과도 같은 복음은 결코 예수가 선포했고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믿고 전했던 복음이 아닐 것이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이유는 결코 영혼 구원을 충족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한 개인 영혼 구원을 넘어서는 더 큰 이야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에서 줄곧 이야기된 이스라엘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맥락이 없이 전해지는 사영리식 영혼 구원 방법은 허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런 영혼 구원에 초점을 둔 전도는 이 시대의 기독교가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거짓종교라는 탈을 쓰게 된 이유 중 분명히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우린 복음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인 것처럼 믿으면 꼬인 실타래는 더 꼬이기만 할 것이다.


스캇 맥나이트는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진단/폭로하면서, 참 복음이 무엇인지 (앞서 언급했듯, 참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해결로서의 예수님 이야기이다) 신약성경,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밝힌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는 사람도 왕왕 있었다면서, 그 사람이 가졌던 근본적인 문제점은, 복음을 개인적, 실존적, 사적인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만 이해할 뿐, 이야기 문제, 즉 메시아 해결책을 찾아 헤매던 이스라엘 이야기의 결말로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 계획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를 알게 하는 복음을 더 많이 선포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바울은 이신칭의를 말했지만, 바울이 이해한 복음은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바울의 복음은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맥락으로 하는 사도적 복음이었다. 단지 성금요일 이야기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계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그 다음, 이런 웃지 못할, 구원이 복음을 압도하게 된 현실의 메카니즘을 밝힌다. 과거의 어느 지점에선가 이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지점을 종교개혁 시기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특정한 두 개의 문서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판단한다. 루터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와 칼빈주의/개혁파 진영의 제네바 신앙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조항의 목차를 구원과 이신칭의에 관한 항목으로 바꾸면서 ‘복음의 문화’가 ‘구원의 문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칭의의 문화’로 변형되었다고 말한다. 종교개혁에서 복음 이야기나 신조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모든 것의 순서를 재배치함으로써 복음 이야기가 구원 이야기라는 새로운 틀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복음주의, 특히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에서는 (장로교가 압도적인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 복음주의 중 극우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종교개혁의 구원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재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또한 ‘복음이 구원으로 축소되고 구원이 개인적 죄사함으로 축소된 것을 죄 관리의 복음’이라고 부르면서 강력하게 비판했던 달라스 윌라드의 말을 인용하면서, 복음 이야기가 복음의 창백한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초점을 맞췄지만, 바울은 적어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는 칭의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과거에는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는가?’ 혹은 ‘예수님은 칭의를 선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저자는 간파한다. 복음은 하나님나라나 칭의라는 단어만으로 정의할 수 없으며, 그 두 용어보다 더 큰 개념이라고 말한다. 복음이란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 안에서 마무리되었다는 선언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셨는가?” 혹은 “예수님은 자신에 관해 선포하셨는가?” 만약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예수님도 복음을 선포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을 다르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저자는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 본다. 그는, 복음은 하나이며,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것이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바울과 베드로가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서 설교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앞서 지적했듯, 종교개혁 시기 이후 기독교의 변천과정에서 구원이 복음을 압도한 점진적인 사건인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 가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행전의 복음전도는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이 구원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선언하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이자 주님으로 고백하라고 촉구하는 반면, 우리의 복음전도에서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한다.’ 다시 이 글의 서두로 돌아가 저자의 주장과 맞춰보면,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전도는 누군가로 하여금 결단하게 만드는 데 몰두하는 반면,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제자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는 점을 간파해낼 수 있다. 결단에 초점을 맞추는 복음전도는 복음의 의도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제자 삼기를 목표로 하는 복음전도는 서두르지 않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단은 제자의 삶을 살게 하는 핵심 요소가 아닌 것이다. 사실 태극기 부대를 앞세운 극우 세력의 기독교인들이 결단이라면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있는 분들 아니겠는가. 중요한 건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어떻게 세상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정체성을 깨닫고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느냐,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내느냐 하는 것이다. 즉 종말론적 신앙관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서 새하늘과 새땅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말하는 제자의 삶과도 같을 것이다.


나 역시 저자처럼 복음의 문화가 복원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복음이 값싼 천국 가는 티켓 정도로 추락한 현실이 슬프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복음을 끌어안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의 문화는 교회의 문화이며, 그것은 곧 앞서 내놓은 제안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복음의 문화로 변화되는 교회의 문화다.’ 그렇다. 예수님의 전체의 삶을 이스라엘 이야기와 연결하고 그것의 완성 내지는 성취라고 보는 큰 이야기 (big story)를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복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그 이야기가 곧 구원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며, 우리들 역시 그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음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구원의 문화가 아닌 복음의 문화가 회복된 교회를 꿈꾼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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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고백록 현대지성 클래식 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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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믿음의 조화로 온전한 신앙을.


레프 톨스토이 저, '고백록'을 읽고.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성을 향한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성에 천착한 사람은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엄연한 질서를 가지고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의 또 다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언젠간 대면하게 된다. 반대로, 이성을 배제한 믿음만으로 무장한 사람 역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믿음인 줄 알았던 것의 실체가 자신의 미련한 고집이었음을 언젠간 발견하게 되고, 그 고집으로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며, 사람들로부터는 오히려 무분별하다거나 ‘나누는 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어 맹목적인 사회악으로 자리매김하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성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인생을 마치고, 또 누군가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이성으로 생을 마감한다. 믿는 자들의 눈으로 보면, 전자는 ‘회심’, 후자는 ‘변심’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의 시선으로 볼 때, 전자는 그저 정신 줄을 놓았다거나 나약해졌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고, 후자의 경우는 뒤늦게 철이 들었다는 말을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에 불만을 느낀다. 꼭 나눠야만 하는가. 어느 한 쪽을 택하면 나머지 하나는 폐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둘 다 가질 순 없는 것인가.


나는 그리스인이 아닌 일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또한, 지니게끔 되어있는, 마치 바른 가지가 바른 열매를 맺듯) 성숙한 인격과 성품을 ‘이성과 믿음의 조화’에서 찾는다. 치우치지 않는 신앙 역시 이러한 바탕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삶과 신앙의 조화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실질적인 일상을 살아가며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요소이리라 믿는다.


회심이란 단순히 이성을 버리고 믿음을 선택한 행위를 말하는 것일까. 이성을 져버린 믿음이 과연 참 믿음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회심은 이성과 믿음에서 조화를 이루어 그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둘 다 취한 상태이지 않을까. 이성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이며, 맹목적인 믿음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 역시 이성적인 판단만이 아닌 믿음의 판단을 포함한다. 둘은 상호 보완해가면서 온전한 신앙을 이루어내는 것이지, 결코 그 어느 하나를 버리거나 배제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서로를 적으로 보는 시선이 그대로 살아있는 한 결코 건강한 신앙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의 고백록을 읽어보면, 부와 명예와 지성의 끝에 서있는 한 인간이 신앙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 그리고 그 신앙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집안 내력으로 정교회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벌써 그는 신앙과 삶의 간극을 목도하고 껍데기 뿐인 신앙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으며 결국 신앙을 멀리하게 된다. 인생의 의미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와 정체성에 대해서, 사적인 호기심을 넘어 인간 전체로까지 범주를 확대하여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며 신학적인 고민을 하면서 거의 일평생을 보낸다. 톨스토이는 태생부터 귀족 출신이었기에 자신의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면서도 많은 돈을 남길 수 있을 만큼 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작가로서, 그리고 지성인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명예와 존경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어릴 적부터 가져왔던, 내면의 목소리에 그는 끝내 답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가 착안한 것은 신앙인의 도덕적인 불완전함이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일상적인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꼴을 목도한 후, 톨스토이는 그 문제의 답이 도덕적인 완전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도덕적 완전함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이내 모든 것에서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다시 자기자신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또 다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유명하고 더 중요하며 더 부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뀌었다. 


청년 시절부터 톨스토이는 성공한 작가가 되어 일찌감치 부와 명예를 안고 지성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여파로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으며, 오히려 그가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고, 그 자리를 모든 비열한 욕망으로 지켜내는 모습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인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회고록에서, 자신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기만 하면 너무나 끔찍해서 소름이 끼치고 역겨워진다고 고백한다. 사회적인 출세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으며, 세상의 성공이 아닌 도덕적인 완전함과 선함을 위한 인생관을 내심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기득권이 주는 근사한 매력과 유익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끊임없는 괴리를 느끼며 두 영역으로 분리된 삶을 그는 거의 평생 동안 살아갔다.


이러한 이중적인 삶이 과연 톨스토이만의 전유물일까. 앞서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꿈꾸며 작은 실천으로 일상을 살아내려는 나의 고민과 몸부림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진 않을까. 또한 이 글에 공감을 하며 종말론적 신앙관을 가지고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기도제목이 아닐까. 이러한 괴리를 인지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의 눈은 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감긴 채, 알고 보면 지극히 사적인 안위만을 추구하며 정의와 공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작디작은 자기만의 왕국의 평화만을 고수하려는 peacekeeper의 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톨스토이가 청장년 때 내린 결론은 인생의 무의미함이었다. 그것은 그의 이성을 매개로 한 모든 학문적인 연구에서 도출된 믿음직한 결과였다. 형이상학적인 추상 학문도, '어떻게'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는 자연 과학도 모두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어차피 죽음으로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학문의 도움만이 아닌 종교의 도움으로도, 그리고 그 시대에 알려져 있던 현인들의 인생관에서도 그는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의 삶은 정지했고, 삶은 무의미하기만 했다. 그러한 굴레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탈출구는 자살밖에 없었다.


자살만이 해답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러나 그는 자살을 감행할 결심을 할 수 없었다. 혹시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신앙으로 돌아온다. 지식인들과 현자들이 이성에 기초해서 제시한 지식은 삶의 의미를 부정했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류 전체는 삶의 의미가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성에 기초하지 않는 지식, 그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던 그것은 바로 '신앙'이었다. 하나님과 도덕적 완전함, 그리고 삶에 의미를 부여했던 '신앙'으로, 평생의 시간을 들여가며 결국 그는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똑같은 자리였지만, 이번엔 그가 바뀌었다. 전에는 신앙의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반면, 다시 돌아온 시점에선 그것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거의 평생을 들여 이렇게 저렇게 인생의 답을 찾는 구도자로서 '방황'을 했던 기간이 준 선물일지도 몰랐다. 다음은 톨스토이가 자살 충동에서 드디어 벗어나게 된 깨달음을 고백한 부분이다. 


| 내 안에서 어떤 음성이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 없이는,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을 찾는 삶을 찾아라. 하나님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내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환해졌고, 그 이후로 그 빛은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 


20세기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도 그의 저서,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자신의 진정한 회심을 이성과 논리로 변증하지 못했다. 톨스토이 역시 이 책 '고백록'에서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두 인물이 신앙을 멀리하게 된 이유는 달랐고, 다시 신앙을 회복하게 된 길도 달랐다. 하지만 공통점은 모두 철저하고 치열한 이성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 그러나 결국에는 그 이성을 버리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 덕분에 절박함을 가지고 원래 그들 자신이 서있었던 신앙의 자리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내가 앞서 언급한 질문과 고민의 관점에서 해석해보자면, 두 사람 모두 마침내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성이 전혀 필요 없다거나, 이성이 믿음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만 쓰이고 최후에는 버려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성과 믿음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어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성품을 발현케 하는 것이다.


진지한 고민의 과정에 진입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응원한다. 피터 엔즈의 통찰에 의해서도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의심의 숲을 지나야만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지식과 믿음, 그리고 그분을 향한 신뢰와 순종이 이루어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일 뿐이다. 다만,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말에 솔깃해져서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늘 깨어있도록 성령께 간구하자.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이루며, 그 열매로 삶과 신앙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구하고 순종하자. 바로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일상, 하나님나라!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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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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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소중한 일상의 무게.


제임스 설터 저, '가벼운 나날 (Light years)'을 읽고.


하루 24시간 전체가 ‘해피아워’에 속한 것 같은 삶. 눈을 떠도 감아도 언제나 햇살은 오후 서너 시 무렵의 기울기로 비스듬히 들어와 그들의 가벼운 삶을 비추었다. 느지막한 태양은 그들의 시간을 유난히 느리게 만들었고, 가시적인 재앙과 사건 사고는 그들을 모두 빗겨가는 것 같았다. 입을 옷은 넘쳐났고, 먹을 것도 풍족했으며, 그들이 사는 집은 거의 매일 손님들을 맞이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었다. 아이들은 예쁘고 예의 바르게 자랐으며, 그들은 부모로서의 자리 또한 훌륭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그러나, 신비로울 정도로 우월했던 그들의 삶이 가져다 준 안정감은 점점 나른함이 되었고, 식상해진 나른함은 기어이 권태를 불러왔으며, 권태는 인생의 중력을 거슬러 모든 나날들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삶은 점차 무게를 잃고 공중에 흩뿌려졌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그림 같은 그들의 삶 속에 무언가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어쩌다가 ‘가벼운 나날’이란 유리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었을까.


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썼다.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수시로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피학적 쾌감 때문에 나는 그만 진이 다 빠져버렸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난 책의 삼분의 일 정도 읽었을 때 벌써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공감하기 싫거나 두려운 부분을 공감할 수밖에 없을 때 조용히 찾아오는 불가항력적인 탈진을 느끼면서. 나의 깊은 한숨은 이미 책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예전에 읽었던 긴 장편소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백치’, 혹은 헤세의 ‘유리알유희’보다 분량이 적은 이 책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숨이 된 허무함을 절망이라는 날숨으로 화답해야 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매일 책갈피로 표시된 부분을 펼 때마다 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러고도 미처 몇 십 페이지도 못 읽고 다시 닫아야만 했다. 준비운동이 부족했던 탓일까. 아니다, 그건 영원히 부족할 것이다. 삶을 다 아는 한이 있더라도. 착잡했다.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그림 같은 감옥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일상을 잃어본 사람은 일상의 의미를 안다. 인생을 저울에 올리면 대부분은 일상의 무게일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일상을 빼고 남은 찌꺼기를 잘 포장한 것을 영화라고 부른다. 평범한 일상은 위대하다. 평소엔 느끼지 못하는 그 무게.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그 무게. 하지만 그 무게의 표면적인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해져 기억조차 나지 않는 기계적인 나날들의 연속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 날들이 사라져버리면, 그제서야 뒤늦게 자신의 인생에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텅 비어버린 삶의 껍데기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이러한 일상을 거의 완벽하게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잃은 삶보다 더 큰 구멍이 난 듯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허영심. 아마도 허영심일 것이다. 아내 네드라와 남편 비리의 내밀한 허영심, 그리고 큰 딸 프랑카와 작은 딸 대니에게도 전염된 그 허영심. 오후 서너 시 경의 따스하고 나른한 햇살은 그들의 창자 속에 있는 허영이라는 풍선을, 개구리가 든 냄비의 온도를 조금씩 높이듯, 아주 천천히 부풀게 했다. 그들의 나날들이 가벼워졌던 건 태평성대로 포장된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무게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 없이 조금씩 부푼 허영이라는 풍선을 삼킨 사람들의 결국이 마침내 가시적으로 나타나 ‘가벼운 나날’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데다 지적이기까지 했던, 그러나 책임감을 상실한, 그 위험한 자유를 갈망했던 네드라. 그 갈망은 자기연민조차 사라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본능적인 자유 추구는 결국 파멸을 가져왔다. 그녀는 어느 날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께 살기가 불가능해. 네 눈엔 안 보이나 봐. 그를 사랑해. 너무 좋은 아빠야. 하지만 끔찍해. 설명이 안 돼. 가루가 되는 것 같아. 할 수 없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리는 거야. 그냥 가루 먼지가 되는 것 같아." 이미 오랫동안 진행된 생각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무서워하는 유일한 건 '평범한 삶'이라는 두 단어야."


네드라는 이 책의 중심인물이다. 말하자면, 바이러스의 첫 감염자와도 같았다. 인생에서 일상의 무게를 가볍게 여겼으며, 그것을 등진 채 무책임한 자유를 추구했다. 그것이 바이러스 감염 징후였다. 작가 설터가 묘사한 부분 중 네드라를 가장 잘 대변한 문장은 내게 있어서 다음과 같다. "그녀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이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충분히 행복하고도 남을 삶을 허투루 날려버린 죄인에 대한 묘사다.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허망하고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 그녀의 삶에는 감사가 없었다. 아픔과 슬픔이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그녀를 빗겨갔기 떄문이었을까.


그녀의 딸이 성인이 된 이후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비롭네요. 정말 멋진 삶을 살았네요. 너무나 우월한. 그러나 당신의 삶은 무의미해요. 왜냐하면 그 안에 고통이 없어요. 이따금씩 약간의 슬픔마저 없는 삶이란 결국 뭘까요?"


네드라는 사십대에 죽었다. 찾아온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사실 나도 네드라의 죽음에 전혀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마음 한편에선 인과응보라며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고자 하는 내밀한 욕구가 꿈틀거림을 느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던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죽기 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은 작가 설터가 그녀를 묘사한 부분이다. 그녀가 세속적인 만족을 추구하며 그것이 자유라고 믿어온 삶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기 얼마 전의 상태를 묘사한 부분이다. 아마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이 부분에 담겨 있지 않을까 한다. "하루하루, 고열같이 솟구치는 감정이나 만족감뿐 아니라 허망함과 공포까지 재료 삼아 그녀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갔다. 나는 고독의 공포를 넘어섰다고, 그건 초월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흥분이 되었다. 나는 그 위에 있고 가라앉지 않을 거야. 이 굴복이, 이 승리가 그녀를 더욱 강하게 했다. 마치 하위 단계들을 다 지나 삶이 마침내 가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된 것 같았다. 바보 같은 희망과 기대, 꾸민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할 때도 있었다. 이 행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찾아나서 얻어낸 성취였다. 그보다 못한 것은, 그것이 비록 대체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모두 포기하고 얻은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재앙을 당하여 아파하고 죽어간 숱한 사람들의 절망과 네드라를 위시한 이 가족의 허망함을 저울에 달면 무게는 어느 쪽에 더 나가게 될까. 물론 바보 같은 질문이다.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나처럼 이런 어리석은 비교를 시도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가벼운 나날과 무거운 나날이 가지는 무게에 대한 철학적인 비교를 말이다.


네드라를 형상화한 것만 같은 이 책의 표지를 매일 보며 이 책을 거의 한 달에 걸쳐 읽어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밀레의 만종을 떠올렸다. 곧바로 인터넷에서 그 그림을 찾았다.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깊은 위로를 얻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감과 또 하루가 주어졌다는 감사함이 있는 삶. 그런 일상을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내며 행복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5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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