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그림자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는 용기).


황정은 저, ‘百의 그림자’를 읽고.


며칠 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편두통이 말끔히 사라진 오늘, 공교롭게도 날씨가 흐리다. 그림자 하나 생기지 않을 정도로 빛이 자취를 감췄다. 정오 즈음 되니 비도 추적추적 내린다. 모처럼 말끔한 머리로 맞이하는 간만의 흐린 하루. 밖을 나와 비 냄새를 맡으니 이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함께 젖어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의외로 안정감과 편안함까지 느껴진다.


N과 일대일 미팅 중이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그녀가 응답하는 사이, 난 오피스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랗고 투명한 창을 통해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조용히 비가 오고 있었다. 순간 뜬금없이 엄마 품에 안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수 십 마리의 마우스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어찌 보면 꽤 살벌한 (?), 미팅이었지만, 오늘 미팅이 내게는 그저 '따뜻한 비'의 기억으로 자리잡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엉뚱한 순간이 난 참 좋았다. 기억에 남는다. 전화를 끊고, “Is it raining?” 하며 N이 물었다. 그제서야 비가 내리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답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듯 그녀의 눈은 잔뜩 쌓인 서류에 머무르며 무언가를 계속 뒤적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아까부터 내리는 비를 모를 수가 있지? 하고 생각하면서 난 영락없이 쫓기는 과학자의 현장에서 잠시 벗어나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과학자이기 이전에 소소한 일상에 반응하고 있는, 인간인 나를 본 것이었다. 아, 이것이구나 싶었다. 문득 가슴이 따뜻해졌다.


우연찮게 오늘 집에서 들고나온 책이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였다. 얼마 전, 신형철의 추천 소설을 기회가 되는대로 읽어보려고 작정했는데, 이 책이 그 리스트 중 나에겐 두 번째 작품이었다. 어제 밤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겨우겨우 나를 다스려 중간 쯤에서 접고 잠을 청했다. 편두통에서 간신히 벗어난 참에, 괜한 객기를 부리다가 말짱 도루묵이 될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아마 한 번에 다 읽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늘 점심 시간,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먹먹해진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실 작정으로 내린 뜨거운 커피는 입도 대지 않은 채 책상 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간도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식은 커피를 죽 들이켰다. 작품해설을 쓴 신형철과 나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뭔가를 써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왠지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침내 거대한 암초와도 같은 서사를 알아채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때의 숨막히는 느낌, 떨리는 가슴, 가쁜 호흡으로 소설 속으로 본격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도 정말 매력적이지만 (이때는 시간이 책장 넘기는 것으로만 간다), 이 책처럼 거대 서사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아무런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서민의 일상을 조곤조곤 정직하고 사실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묘사하면서 인물의 내면과 외부상황을 진부하지 않고 긴장감 있게 풀어내며, 읽는 이로 하여금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켜서 거대 서사가 주지 못하는 큰 울림을 선사하는 방식도 놀라우리만큼 매혹적이었다. 보통 서사를 한바탕 읽어내고 나면, 비로소 긴장이 풀리면서 해소 단계에 접어들며, 가슴에는 커다란 주먹으로 한 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면, 잔잔한 묘사로 이루어진 책을 읽고 나면, 먹먹해지는 가슴으로 마지막 책장 덮기를 주저하게 되고, 급기야 아쉬운 듯 또 다시 훑어보게 된다. 이 책은 후자 스타일의 글쓰기에 있어서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황정은의 글은 뭔가 달랐다.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필체나 필력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내 좁은 눈엔 '한 강' 작가도 보였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보였으며 '주제 사라마구'도 보였다. 그러나 황정은 고유의 필체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살면서 이런 작가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특히 편두통의 그림자가 일어나 나를 떠났던 1월의 마지막 날, 이 책을 읽게 된 건 운명의 장난인 걸까.


이 책은 '은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그렇다고 은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만도 없는 소설이다. 은교의 내러티브라기 보다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 같기 때문이다)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이다.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한, 40년 역사를 지닌, 오래된 전자상가의 철거가 이 소설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다. 화자인 은교와 그녀의 애인 '무재'는 둘 다 전자상가에서 일한다. 은교는 조그만 수리실에서 접수와 심부름을 맡고 있고, 무재는 트랜스를 만드는 공방의 견습공이다. 두 사람 모두 주류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성공의 피라미드와는 거리가 먼, 어찌 보면 사회적 약자 층에 속하는, 소시민이다. 황정은 작가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 (이를테면 금수저)의 눈이 아닌 은교와 무재라는, 99%의 서민들과 흙수저를 대변하는 두 평범한 소시민의 눈을 통해, 철거 상황에 처한 전자상가 안의 여러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사회의 현실을 나지막하게 고발한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소중한 서민들의 일상이 곧 철거될 오래된 전자상가를 대변한다면, 공원을 만들기 위해 철거를 요구하고 실행하는 집단은 효율적인 경제와 '모두'를 위한답시고 휘두른 권력이 선두가 된 국가의 체제 (알고 보면 '모두'는 99%를 배제한 1%의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을 의미할 것이다)를 대변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소설은 이 두 가지 세력의 피할 수 없는 사회적 대립을 강자가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보고한 글인 셈이다. 또한 역사라는 것도 일반적으로 강자나 승자의 과거에 대한 해석임을 감안할 때, 이 책은 그 이면에 가려졌던 눈으로 기록된, 서글픈 한이 서린, 아픈 기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담겨 있다고 난 생각한다. 이는 이 책이 나를 포함한 모든 독자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제목에 등장한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 '백의 그림자'에서의 백은 百, 일백 백자다 (白, 흰 백이 아니다). 즉, '백의 그림자'는 '하얀 그림자'가 아니라, '모두의 그림자'를 뜻하는 것이다. 사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난 이 소설이 좀 공포스럽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었다. 은교가 비 내리는 숲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장면이 이 소설의 시작인데, 이 장면에서 난 일종의 무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일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혹시 '죽음'의 복선은 아닐까, 결국엔 은교가 죽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은 단순히 '죽음'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비록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는 익숙하기라도 한 듯 다 알고 있는 현상일뿐 아니라 각별히 조심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일어난 그림자와 점점 더 자란 그림자를 따라가다가 죽음을 맞이한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은 오히려 한 인간이 맞닥뜨린 한계를 스스로 체감하고 자포자기하고 싶은 순간, 혹은 끝내 견뎌온 삶의 마지막 끈을 놓아 버릴지 아닐지 결정해야 하는 기로, 정도로 해석하는 게 저자의 의도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백의 그림자'라는 제목이 확 와 닿는다. 나도 절망 가운데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은 상실과 고통의 연속이며 슬픔과 견뎌냄의 순환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배경인 전자상가의 철거 상황을 놓고 볼 때,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하는, 그래서 그것이 그 한 사람의 전부가 될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란 현실 앞에서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의례히 상실과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생각해 보면, '백의 그림자'에는 역시 흙수저이며 소시민인 나의 그림자도, 우리 모두의 그림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은교와 무재는 죽지 않는다. 정말 다행이다. 둘 다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을 경험했고, 그때 서로의 혼이 나간듯한 모습도 목격했다. 그러나 어쨌든 둘은 그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았고, 절망과 상실, 아픔과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했다. 참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난 결말을 읽고 나서야 긴장했던 몸을 풀 수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고장 난 차를 놓아두고, 혹시나 도움을 청할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었다. 난 그것을 아주 용기 있는 결단이었고, 희망을 상징한다고까지 해석하고 싶다. 어두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죽음이 아닌 삶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고, 용기를 내어 전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림자도 (우리를 따라오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를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린 약자들이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으로 뭔가 잘못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은교와 무재로 대표되는 우리 '을'들은,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황에 노출되었지만, 소설의 결말에서처럼 결국은 이겨내는 것이다. 작가가 책의 마지막에서 직접 말하듯, 나 역시 은교와 무재가 어두운 섬에 하루 동안 갇힌 꼴이 되었지만, 두 사람 모두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한다. 건강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 역시 내 그림자가 일어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이런 상황 자체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는 무속과도 같은 가르침을 준수하고 말 것이 아니라, 그림자를 따라오게 만드는 결단과 행동을 할 수 있길 바래본다. 무재에게 은교가, 은교에게 무재가 있었듯, 그 어둠 속에서도 반드시 함께 할 동지와 손을 붙잡고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6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잊혀짐. (개인적 제목: 단문의 미학)


 


크리스토프 바타유 저,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원제: ANNAM)를 읽고. 




신형철은 평론가다.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하는 그의 글은 정확하고 예리한 칼이 되어 읽는 이의 머리와 가슴 깊숙한 곳까지 찔러 진지하게 생각하고 깊이 공감하게 한다. 하지만 그의 좋은 글이 내게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어려웠다. 독서량이 부족해서도, 독서 편식을 해서도, 또 분석적인 글읽기를 못해서도 아니었다. 매주 서점에 들를 때마다 신형철의 책을 집어 들고 한두 페이지를 정독해온 지도 벌써 여러 주다. 여전히 난 적응을 못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했다. 그의 신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끝에 보면, 그가 추천한 도서 목록이 나온다. 그가 직접 쓴 글 말고 그가 추천해 마지않는 글을 읽어보면, 내 문제를 푸는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가가 아끼는 책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그것들을 따라가다보면 신형철 글쓰기의 여러 프로토타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 중고서점에 들려 추천 리스트에 있는 모든 책을 검색했다. 운 좋게 두 권이 있었다. 이 책,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그 두 권 중 하나다. 




일견에도 아주 짧은 소설이다. 전체 분량도 짧지만, 한 챕터의 길이는 물론 한 단락의 길이도 짧다. 무엇보다 저자가 사용하는 문장이 아주 짧다. 그래서 다른 책에 비해 여백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은 시가 아닌 소설이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단편소설. 과연 이런 제한된 형식 안에 무엇을 담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출판되어 수많은 찬사와 함께 상까지 받았다 하고, 수 천 권도 넘게 읽었을 신형철에게 선택 받은 소수의 추천 리스트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에, 이 책은 분명 독특하고 고유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증거를 찾는 탐정이 된 기분으로 난 이 책을 읽었다. 




소설은 '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곱 살 나이의 베트남 황제가 프랑스 왕을 직접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농민 봉기로 말미암아 폐왕이 된 황제가 왕위를 되찾고 왕국을 구하기 위해 급히 아들을 프랑스로 보내어 원조를 요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황제가 프랑스에 도착한 건 이미 9개월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배를 타고 험난한 길을 왔기에 사실 살아있다는 것만해도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왕은 루이 16세, 때는 1787년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루이 16세는 물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곧 처형될 운명에 놓였던, 즉 프랑스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루이 16세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는 베트남을 도울 수가 없었다. 자국의 문제만으로도 버거웠던 것이다. 원조 요청이 거부되었지만 어린 베트남 황제는 그 상황의 진정한 핵심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폐렴으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어린 황제가 죽기 전 늙은 주교와 우연찮은 만남이 있었다. 비록 그는 그 만남의 의미를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만남은 이 책의 본격적인 이야기의 발단이 되었다. 왕의 권한이 아닌 그 주교의 권한으로 베트남에 선교사들을 소수의 군인들과 함께 두 배에 태워 파송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도미니크 수사를 비롯한 작은 무리의 수도사들과 다섯 명의 수녀들이 선교사 명단에 포함되어있었다. 




베트남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 베트남에 간신히 도착하고 나서도 여러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 프랑스에서도 마침내 대혁명이 일어났고 수도원도 혁명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파송기록은 불타버렸다. 베트남에서 살아남은 자들조차 조국으로부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잊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선 폐왕이 되었던 황제가 왕위를 되찾게 된다. 아들을 보냈음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던, 그리고 아들을 죽게 놔두었던 프랑스에게 분을 품은 황제는 자기 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와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모조리 죽여버린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 단 두 명이었다. 그들은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옮겼기에 운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벌써 결말에 이른다.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 저자는 이 두 사람으로부터 수사와 수녀의 타이틀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대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성직자가 아닌 인간이란 타이틀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들은 미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목숨까지 걸고 머나먼 땅까지 온 선교사였다. 생명의 위협이 있었던 여러 상황을 거쳐오면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선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와 사명감은 약해져갔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함께 잊어왔거나 아님 애써 무시해왔던 인간성은 뒤늦게 발아하기 시작했다. 생명처럼 아꼈던 성서와 교리문답으로 보내는 시간은 하나의 거추장스런 옷처럼 여겨졌고, 그들에게 현재 주어진 베트남이라는 이방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낙을 느끼고 누리기 시작했다. 수사와 수녀의 복장은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베트남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었고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선 그것마저도 번거로웠다. 비가 끊이지 않고 내리는 우기 한 가운데의 어느 날, 진흙이 흘러내리고 곧 무너질 수도 있는 움막 집에서 둘은 그동안 금기라고 여겼던 남녀 간의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 책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머나먼 베트남이란 나라에서 그들이 잊혀져가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베트남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였지만, 끝내 잊혀진 존재가 되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는 오히려 자신들의 조국 프랑스가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를 통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결국엔 죽어간 선교사들이 성직자 이전에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독교인인 나의 눈엔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따져보고 싶은 부분이 충분히 있을법한 내용이지만, 아름다운 소설은 아름다운 소설로 놔두기로 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다. 참고로 저자가 이 책을 썼을 땐 스물 한 살의 나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처녀작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짧은 문장들로, 마치 무관심하고 냉정한 인상까지 풍기는 듯한 필체로, 이 모든 서사와 묘사를 다룬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느낄 수 있는 묘한 감동도 이 때문일 것이다. 커다란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는 이 책에는 저자의 단문으로 된 필체가 오히려 아주 효과적이고 의외로 완벽한 궁합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짧다는 건 빈 공간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문장들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하는 신형철이 이 책을 추천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 책을 평가했다. 이젠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한다. 




“이 소설의 번역자인 김화영 선생의 말씀. ‘책을 다 읽고, 그 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그리고 번역을 하고 마침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적요함, 거의 희열에 가까울 만큼 해맑은 슬픔의 위력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읽은 지 십 년이 됐지만 나 역시 아직도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내 눈으로 읽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프 바타유는 신형철이 그의 책에서 말했듯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말을 충실하게 충족시키는 글쓰기를 해보인 것이었다. 짧지만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 좋은 글을 쓰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소중한 것을 배웠다. 단문의 미학을 느껴보고 싶다면, 난 이 책을 서슴없이 추천한다. 나도 여러 번 이 소설을 더 뒤적일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5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과향 가득한 투명한 달밤.


마루야마 겐지 저, ‘달에 울다’를 읽고.


시와 소설의 절묘한 조화. 읽는 내내 한 문장 한 문장에 감탄하며 그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시적 이미지와 소설적 내러티브에 심취해 가빠진 호흡과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기기조차 아쉬웠던 매혹적인 책. 이런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숨막힐듯 아름답고 푸르도록 서글픈 달빛과 그 투명한 달빛에 비친 사과향 가득한 조용한 시골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것만 같다.


오감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풍성한 필체를 단문만으로 해낸 마루야마 겐지. 난 어제밤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필체는 철저히 계산된 듯 정확하다. 글쓰기를 집짓기에 비유하는 평론가 신형철이 이 소설을 추천한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러나 정확함만으로 마루야마 겐지를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뭔가 더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아름다움.


정확하고 아름다운 필체가 만들어낸 시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시. 이 책 ‘달에 울다’는 이름도 밝히지 않는 한 남자의 독백이다. 사과나무 밭을 일구며 평생 시골마을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한 남자의 애잔한 이야기다.


그가 자는 방엔 병풍이 하나 놓여있다. 사계절이 그려진 묵화다. 그 묵화는 하늘과 달을 품고 있으며 물과 바람도 담고 있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자연에 거스르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남자도 있는데, 그는 법사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흠집 많은 비파를 켜며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법사다. 그는 주인공의 분신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 야에코이기도 하며, 때론 아버지, 때론 촌장이기도 하다. 법사는 주인공의 상상 속에 살며 그와 함께 늙어간다. 주인공은 평생 그 조그만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과나무를 일구며 단조로운 삶을 살아갔지만, 법사는 병풍 안에서 유유히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닌다. 법사는 주인공 내면을 반영하기도 하며 그것을 충족시켜주기도 하는 매개물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아마도 주인공에겐 유일한 평생지기 친구였을 것이다.


‘달에 울다’는 마루야마 겐지의 필체 그 자체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며 충만함을 유지하며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절제된 방식으로 조용히 지속해서 내뿜는 그의 글쓰기. 그를 만난 것은 나로선 굉장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배우고 닮고 싶은 글. 베껴 쓰고 싶은 글. 아, 언젠가 소설을 쓴다면 마루야마 겐지의 필체를 넘어서는 필체를 구사하고 싶다.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읽은 게 아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한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2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속성자 - 성문 밖으로 나아간 그리스도인들
양희송 지음 / 북인더갭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도 세속성자다.




양희송 저, '세속성자'를 읽고.




'가나안 성도'에 합류한 지 반 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어느 특정한 제도권 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채 여러 교회를 방문하며 사뭇 다른 예배 스타일을 접하기도 하고, 주일성수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 물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일요일을 보내기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그러니까 1980년대 중반부터 교회라고 불리는 잘 지어진 독립된 건물에서 거의 매주 일요일, 상당한 시간을 보내온 나로선, 또한 한때는 교회오빠였고, 성인이 된 이후엔 차세대일군이나 리더로 불렸던 젊은이였으며, 나중엔 안수집사직까지 제의 받았던 나로선, 교회를 스스로 걸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시간만 생각해도 30년이란 세월은 교회 생활이 내 삶의 일부가 되기엔 충분했었다.




이 책에서 저자 양희송 청어람 대표는 '세속성자'라는 새로운 단어를 제시한다. 낯선 단어이지만 자크 엘륄도 오래 전 그의 책 제목으로 사용했던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세속성자'라는 형용모순의 의미를 이 책 제목으로 사용하면서까지 굳이 다시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거룩함의 역설을 통해 진정한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다시 묻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세속적이란 게 무엇인지도 다시 진지하게 돌아봄으로써,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다 더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세속이라는 말과 성자라는 단어의 역설적인 대비를 통해, 비단 가나안 성도만이 아닌 제도권 교회에 출석하든 하지 않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세상 밖이 아닌 세상 속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중간기의 하나님나라를 살아내고자 고군분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다시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이 책은 성찰과 그것으로부터 끌어낸 예언자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교회 안에서 보나 밖에서 보나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고작 신대원 몇 년 졸업한 뒤 마치 자기들이 갑자기 성도들의 영적인 아버지나 유일한 제사장으로 승격된 것처럼 (스스로 그렇게 믿으며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목사들도 허다하다!) 특권 누리기를 거듭해왔다. 무지한 교인들을 이용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가며 자신의 부와 명예, 혹은 성적인 욕망 같은 파렴치한 사리사욕을 채워왔다. 집권당과 언제든 결탁할 준비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 성경을 요리조리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해석해대며 교인과 교회를 어지럽혀왔다. 최근 몇 년간 언론을 통해 보도된 한국 교회, 특히 한국 교회 목사들의 실태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낯이 뜨거워 도저히 끝까지 기사를 보거나 들을 수 없게 만들었다. 거룩함과 구별됨을 그렇게나 강조해놓고 그 누구보다도 세속적인 일들을 자행해온 그들이었다. 이 모두는 정말 부끄럽지만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국 교회의 민낯인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각성과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여전히 실권을 잡고 있는 한국의 극우 보수세력에는 역부족이다.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함께 가야 할 공동체로서 한국 교회를 도저히 생각하지 않을 순 없지만, 그것보다 먼저 각 개인이 깨어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비롯하여 해야 할 일들과 살아내야 할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답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개인이 깨어날 때에야 비로소 이 책에서 말하는 세속성자의 역할이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개신교는 신앙을 개혁했다는 의미의 개신교 (改新敎)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신앙이란 의미에서 개신교 (個信敎)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사제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적인 신분이라는 깨우침을 우린 다시 기억해야 한다. 매개자를 통해야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여겼던 중세의 잔재에서 과감히 벗어나야만 한다. 그래야 세속성자의 참 의미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잇는 매개자를 자처했지만 스스로 타락해버린 목사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왔던 거룩함과 세속성에 대한 의미도 재정의되고 재구별되어야 한다. 교회 안과 밖을 더 이상 성과 속 내지는 거룩한 하나님나라와 타락한 세상으로 구분하는 사람은 21세기 현재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건 참 다행이기도 하지만, 이걸 사실로써 깨닫기까지 우린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러므로 제도권 교회 안에서 여전히 전통적인 예배 방식을 따르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스럽고, 나를 포함하여 제도권 교회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하나님을 다시 제대로 알길 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기를 외로이 지나고 있는 가나안 성도들은 마치 더렵혀졌다거나 타락했다고 여기는. 이른바 성속이원론에 입각한 어처구니 없는 논리는 파기해야 마땅할 것이다. 문제는 제도권 교회를 출석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교회가 유일한 희망이라는 말은 거부하기 힘들고 나도 그렇게 아직은 믿지만, 이때 교회라는 개념은 제도권 교회를 지칭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변하듯이, 성과 속의 이분법을 넘어, 성벽 바깥의 신앙을 상상하며 담대히 바른 기독교를 실현해내고자 우리 모두는 각자 세속성자가 되길 다짐해야 할 것이다. 주일을 세속적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종교생활을 위한 주말 영성이 아닌,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낼 수 있는 주중 영성을 추구하고, 일과 쉼, 노동과 놀이를 제대로 포괄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멋진 세속성자가 되자. 아니, 우린 이미 세속성자다. 이 정체성을 깨달았다면 이제 교회생활만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그것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그렇게 살아내자. 용기를 내자. 함께 하는 공동체와 함께.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0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편사색 믿음의 글들
C. S.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시편 읽기를 위한 또 하나의 좋은 가이드.


C. S. 루이스 저, '시편 사색'을 읽고.


유진 피터슨의 '한 길 가는 순례자'처럼 이 책 역시 시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저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 느낌입니다. 위에서 아래가 아닌 바로 옆에서 말을 건네는 느낌이랄까요. 아무래도 저자가 목사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그 차이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화자와 청자의 거리가 좁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그렇습니다. 저자인 루이스도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비전문가가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쓴 글입니다. 루이스의 명성에 비하면 겸양의 뉘앙스가 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책을 쓴 이유는 독자와 같은 학생으로서 '의견 교환'을 하려는 것이지, 선생으로서 강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목사의 설교나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의 경직된 자세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은 흐트러져도 될 것 같고 정장이 아닌 편안한 차림으로 저 앞이나 위가 아닌 그저 옆을 바라보면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면 되니까요.


루이스의 책을 여러 권 읽다 보니 한 가지 요령이 생겼습니다. 루이스의 필체에 익숙해지려면 다른 책들을 읽는 속도보다 조금은 빨리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존대어를 사용한 번역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루이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조금 빨리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용이 결코 쉽지도 않고 편안한 필체도 아니기 때문에 저 역시 처음에는 집중해서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한 번 읽는 것보단 빨리 두 세 번 읽는 편이 루이스를 읽기에는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루이스가 하고 싶은 말이 어떤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겠지요. 맞습니다. 루이스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숲을 먼저 명확히 인지한 다음 나무의 설명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루이스가 친절하게 전해주는 이런 저런 비유를 섞은 나무 설명을 듣다가 정작 그 안에 담긴 핵심 메시지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영국성공회 신자로서의 루이스가 그의 다른 저서에서보다 더욱 두드러진 느낌입니다. 비록 그가 교파 간에 논쟁이 되는 문제들은 피하려고 애썼다고 이 책의 앞부분에서 밝히고 있지만, 여러 시편에서 그가 사색하고 해석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부분 (특히 마지막 장, '시편에서 두 번째 의미들'에서)에선, '우리의 기도서' 같은 성공회 신자가 아니라면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와는 달리 기독교를 변증하는 내용이 아니라 성경의 시편을 해석한 뒤 본인의 묵상을 나누는 내용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가 속한 배경이 묻어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겠지요.


루이스는 우리들이 시편을 읽을 때 무엇보다 시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시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에 몸을 주는 하나의 작은 성육신'이라는 멋진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만 해도 시편을 가끔 읽을 때면 산문 형태로 써진 내러티브를 읽어나갈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자세로 대하거든요. 운문을 가진 형태로 시편을 대하는 것이 아마도 시편 저자의 바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각 언어에 따른 번역에 따라 시의 운율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평행법'과 같은 시적 기술은 번역에 상관없이 어느 나라 말이든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시편을 시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아직 시편의 맛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저에게는 아주 좋은 조언이 되었습니다. 내년에는 유진 피터슨과 C. S. 루이스가 조언해준대로 시편을 즐겨보기로 다짐해봅니다. 성경이 가진 문학성을 즐길 수 있다면 성경을 더 맛있게 달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루이스는 시편에서 말하는 흉악스러운 단어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우리들과 나눕니다. 이를테면, '심판', '저주',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들입니다. 시편을 몇 번이라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테지만, 많은 시편에서 시편 기자는 성난 고소인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의로운 재판관으로 상정을 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바라는 마음이 전제가 되어 있는 내용이 의외로 많은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처럼 자신을 법정의 피고석에 배치해두는 형사재판에서나,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원고석에 앉아 있는 민사재판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바른 심판을 소원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약하고 힘없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과 해방을 받을 것이고, 불의를 행하며 갑질을 한 이들은 처벌을 받고 배상을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심판뿐만이 아닙니다. 시편에는 보란 듯이 악인을 향하여 분노를 솔직하게 표출하며 가끔은 속물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 중 하나인 23편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배 아프게 만들어야 비로소 자신의 행복이 완전해진다고 고백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루이스는 잊지 않고 한 가지 조언을 합니다. '어쨌든 성경에 나오는 것이니 시편 기자의 복수심도 분명 선하고 경건한 것이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이지요. 다만, 그 분노의 원인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분노 후 복수심을 품는 것은 죄이지만, 시편 기자의 솔직담백한 분노와 복수심의 표현은 적어도 복수심을 품는 사람들이 그러한 죄의 유혹을 느끼는 것 이하의 수준으로는 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거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마치 하나님도 악인이 시편 기자의 바람대로 복수를 당하는 것을 기뻐할 줄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고 지적해줍니다. 하나님은 의인뿐 아니라 악인이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원수들의 죄에 대해서는 시편 기자들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가차 없는 적대감을 갖고 계십니다. 죄인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말입니다.


알다시피 구약성경에는 신약성경과는 달리 내세에 대한 믿음이 거의 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저 죽은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내세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을 중심에 둔 신앙에 뒤따라오는 필연적인 결론 같은 거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사실 천국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지 않고 지옥이 그분과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 곳이라면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믿음은 해로운 미신에 불과하다고 일축해버립니다. 내세에 대한 바른 믿음은 하나님을 생각의 중심에 둔 상태에서만 확고하게 유지되는 것이지요.


이어서 루이스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에 대해 해석을 하며 예배를 이야기합니다. 루이스에게 시편의 가장 큰 가치는, 다윗이 춤추게 만든 즐거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이 표현되어 있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자주 행하게 되는 마지못한 예배 참석과 힘없이 처진 형식적인 기도 생활입니다. 종교적인 요소와 단순한 축제적인 요소의 구분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결국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는 놀라우리만큼 강력하고 활기 있고 용솟음치는 무언가가 표현되어 있다고 합니다. 선의의 시기심으로 바라보게 되는, 우리 자신도 거기에 감염되기를 바라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지요. 저 역시 예배가 한낱 종교의식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재미있는 부분도 나오는데, 그것은 루이스가 처음 신앙에 끌리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신앙을 갖고서도 꽤 오랫동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신앙인들의 귀 따가운 소리가 늘 걸림돌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누군가가 자기를 찬양하면 무언가를 그 댓가로 해주겠다고 한다면, 지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콧방귀를 끼거나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고 비웃거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언젠가부터 하나님은 찬양 받을 자격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찬양 받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입법자로서 우리에게 찬양을 명령하시는 분이라는 사실까지도요. 또한, 찬양은 그저 찬사나 경의를 표하는 데 쓰이는 것만이 아니라, 기쁨이 자연스럽게 넘쳐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까지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라 똑같은 하나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영화롭게 할 것을 명령하심으로써 자신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다고 역설합니다. 찬양이 세속화되고 하나의 형식이나 순서에 지나지 않는 수준으로 전락한 우리 시대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임을 다시 고백합니다. 진정한 기쁨으로, 그분을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삶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있다는 믿음의 선진들의 고백에 아멘으로 저도 화답합니다.


시편을 통해 노래도 할 수 있고 기도도 할 수 있다고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좋은 방법들만을 숙지하고 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저도 내년에는 시편을 묵상하고 사색하며 노래와 기도를 맛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좋은 가이드를 만난 축복의 마침표는 가이드가 먼저 경험했고 전수해준 노하우를 실제로 체험하는 순간에 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시편을 운율이 있는 시로 읽어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하나님나라의 거대한 두 기둥인 정의와 공의를 맛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7. 시편 사색: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816749868369777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4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