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 에버그린북스 12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정확하고 아름다운 필체가 순수함을 담아낼 때.


막스 뮐러 저,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지난 주말도 가족과 함께 중고 서점에 들려 많은 책들에 둘러싸인 채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이런 생활도 벌써 수 개월째 지속하고 있으니, 어느덧 우리 가족의 일상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난 일상에 흩어진 행복의 조각을 찾는 듯한 심정으로 매주 이 시간을 기다린다.


늘 여러 책을 뒤적거리지만, 서점에 들어서서 항상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매주마다 새로운 책이 눈에 띄는데, 저번 주는 아주 오래된 고전 하나가 내 관심을 끌었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중학생 시절, 어머니 덕에 문학을 알게 되어 한동안 고전문학에 빠져있을 무렵 접했던 책 중 하나였다.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으로 이 책을 손에 잡은 순간 내 마음은 금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의 감수성이 단박에 되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주인공 여자가 아주 쇠약해서 결국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뿐이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던 시절,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애송이였던 내게 이 책이 남긴 흔적인 것이다. 하지만 약 25년이 지난 지금, 한 여자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던 한 중년 남성으로서, 곧 사춘기가 시작될 아들을 키우고 있는 마흔이 넘은 한 아버지로서, 그리고 세상살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나름대로의 높고 낮은 곳을 경험해본 한 인간으로서 난 이 책을 다시 읽어냈다.


줄거리 위주로 소설을 읽어내던 어린 시절을 지나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난 소설을 읽을 때면 작가의 필체를 통해 작가의 내면을 느껴보려 노력한다. 줄거리야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또 잊어버릴 테지만, 필체에 흐르는 작가의 마음을 공감한다면 그 작가의 혼을 조금이라도 흡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덟 꼭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아주 어릴 적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시간 순으로 구성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이야기의 진행과정에서 반전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남자가 소년일 때부터 사랑해온,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부잣집 소녀가 있다. 성인이 되고 타지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자아처럼 여길 정도로 그는 그녀를 늘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와 그녀와 재회를 하게 된다. 둘은 떨어져 지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서로를 인지했고,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여느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이미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설정이 되어 있었고 늘 침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주인공 남자의 사랑을 끝내 받아들이지만, 그 순간이 둘 사이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줄거리만 보자면 형편없는 소설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고전문학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던 이유는 결코 단순한 줄거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마흔이 넘어 글 읽고 쓰는 일에 관심이 많아진 내 눈에는 보였다. 그것은 작가의 필체에 있었다. 어쩜 이리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단어와 문장으로 한 단락 한 단락을 써냈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의 필체는 정확했고 또 아름다웠다.


신형철이 그의 신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나도 글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가 언급한 글짓기의 준칙 중 두 번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책이 바로 이 책,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신형철의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말,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 말, 그리고 '그런 문장은 한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말을 이 책은 모두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사랑'이 말하고자 했던 사랑은 소유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줄수록 풍성해지고 맑아지는 사랑일 것이다. 자신의 죽어감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기에 주인공 남자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이 내게 전달되었을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듯 사랑을 받아주고 인정해달라는 남자의 순수한 마음이 전달되었을 때도, 결국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서로 하나가 되었던 그 짧은 순간에 흘렀던 풍부한 감수성이 전달되었을 때도, 비록 결말을 충분히 예측한 이야기 전개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어린아이처럼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헤르만 헤세의 '게르트루트'가 떠올랐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그 장면들이 이리도 강렬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그 사랑의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결국 저자의 유려한 필체도 진정성 어린 순수함을 담아낼수 있었기에 비로소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을 자아내면서도 진정성 있고, 순수함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정확한 집을 짓듯 적당한 단어와 문장으로 쓰여진 책. 살면서 이런 책을 만나게 되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나도 언젠간 이렇게 누군가에게 행운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글을 쓸 수 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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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울다 - 상실을 통해 우리 영혼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개정판
제럴드 L. 싯처 지음, 이현우 옮김 / 좋은씨앗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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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공동체, 곧 사랑의 공동체.


제럴드 싯처 저,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읽고.


그는 지금도 사고 직후의 순간을 슬로모션처럼 기억하고 있다. 어두워진 시각, 가족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였다. 맞은 편에선 차량 한대가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커브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중앙선을 넘어 그가 운전하던 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는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마 영혼에 새겨졌을 정도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충돌 직후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네 살 난 딸과 어머니의 몸은 구부러져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즉사였다. 의식이 남아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찌그러진 창문을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차에서 빠져 나왔다. 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상실의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이 책이 쓰여진 직접적인 배경이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상처의 치유는 시간이 지났을 때 자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혹은 마치 남의 일을 쉽게 이야기하듯, 감쪽같이 잊어버리게 되는 거라고. 그때가 바로 완벽한 치유가 일어난 시기라고.


마음의 상처는 보통 상실과 고통에 기인한다. 상처가 길면 길수록, 또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은 우리 내면세계에서 트라우마로 자리잡고 우리를 깊은 상실과 고통에 길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길들여짐은 우리를 비가역적으로 바꿔 놓는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곁에서 늘 함께 하던 사랑하는 사람이 눈 깜짝할 순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단 1초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일상을 당연하다는 듯 함께 하던 사람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찌 우리의 남은 삶이 그 죽음 이전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는 상실과 고통이 오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게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치유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실과 고통을 가슴에 안고 아파하고 견뎌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과정 전체다. 치유는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끝이 없을지도 모르는.


또한 치유는 과거의 기억을 삭제하는 작업이 아니다. 중요한 건 현재다. 먼 미래에는 그 현재가 치유의 한 순간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흔히 사람들은 치유를 받아야 현재를 잘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현재를 잘 살아내는 것이 치유를 받아가는 것이다. 치유가 맺고 끊음이 분명한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기에, 상실과 고통으로 인한 아픔과 슬픔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들의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인생은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받고 또 치유 받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 제럴드 싯처에게 찾아온 날벼락 같은 상실은 그와 살아남은 그 가족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남겼다. 그에게 닥쳤던 그 상황에 우리 자신을 대입해본다면, 공감을 훨씬 넘어선, 가슴 먹먹한 그 무언가에 가슴이 저민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당한 엄청난 상실과 고통,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굴복하지 않았다. 상실 후 수많은 불경한 생각과 의심, 분노, 원망, 좌절 등의 극심한 고통의 단계를 지나오며, 그 모든 과정 중에 계셨던, 마치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상처에 굴복하지 않고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굴복하기로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는 맞은 편 차량의 운전자를 복수하고 싶은 마음, 그 사람을 그리고 그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도 넘어섰다. 그 상실로 인해 불쑥 와버린 모든 낯선 상황을 수많은 환멸과 증오의 기로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하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상실의 이전과 이후는 극명하게 달랐다. 완전한 치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책의 마지막에서도 여전히 자신은 상실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고, 그 상실에서 회복되지도 않았다고 고백한다. 여전히 아직도 자신의 삶이 지금과 달랐으면 하는 바람과, 아내와 딸과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하는 바람을 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변화했고 또 성장했다." 그리고 그는 상실 자체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도 예상할 수도 없지만, 상실이 왔을 때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는 전적으로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우리가 받는 은혜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상실을 당했을 때 흔히들 하는 첫 반응은 무시와 회피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상실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려는 마음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오히려 일부러 더 바쁜 일상을 만들어 상실로 인한 고통과 슬픔이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도록 엄연히 존재하는 상실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건강하지 않은 방법일뿐더러, 오래 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시하면 할수록 도망치면 칠수록 상실은 눈덩이처럼 더 커진 고통과 슬픔을 불러올 뿐이다. 저자는 여간 해선 겪기 힘든 커다란 상실을 당한 유경험자로서 상실과 고통에서 어떤 의미를 얻을 수 있는지,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본인의 깊은 슬픔에서 길어올린 지혜의 우물을 우리에게 내민다. 


읽는 내내 가슴이 미어졌다. 어느 부분은 구구절절 마음이 요동쳐서 더 읽고 싶지 않았다. 저자는 파도가 지나간 뒤의 잔잔한 물결처럼 담담한 어투로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에서 내 가슴은 더 저미었다. 그러나 저자에게 참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상실과 고통에 대한,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깊은 성찰 덕분에 나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많은 상실과 고통 속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인이 치유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가 공동체였다고 고백한다. '상처 입은 공동체'. 곧 사랑의 공동체. 모두 상실과 고통을 겪고 아파해보았던 사람들. 충분히 인생을 파괴할 만한 힘을 가진 그 상실과 고통의 잠재력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들.


나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가. 혹시 늘 상처 받고 아파하며 누군가의 도움만을 받길 바라는 어린애로 여전히 머물고 있진 않는가. 나도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어찌 남을 도울 수 있겠냐고 합리화 아닌 합리화를 해대며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기는 커녕 조소와 악한 통쾌함을 가슴 속에 숨기고 있진 않는가. 치유가 인생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또 다른 상처도 더해질 수 있다는 우리네 무작위적인 인생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가슴을 울리도록 보여줄 수 있는 건 바로 '상처 입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상실과 고통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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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 영성이다 - 영성 형성에 미치는 습관의 힘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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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습관을 지배하는 자.


제임스 K. A. 스미스 저, '습관이 영성이다 (원제: You are what you love)'를 읽고.


살아가면서 아주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관통하는 커다란 축복 같은 깨달음도 언제나 말초에 있는 손과 발까지 그 힘이 전달되지는 않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머리와 가슴을 통과한 대부분의 뜨거운 피는 손과 발까지 다다르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 운명을 맞이한다 (기억하라, 작심삼일. 우리의 오래된 벗 아닌가). 머리를 먼저 강타한 지성도, 가슴을 먼저 울린 커다란 감성도 모두 체내에서 흡수되지 못한 채 배설물로 폐기처분 되는 현상. 이 비극적인 악순환이 혹시 우리들 일상의 (혹은 영성의) 현주소는 아닐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새로이 깨닫고, 나아가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던 대상과 방식의 그릇됨을 반성하며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해도,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읽는 것과 번역하는 것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읽는 것이 지식을 습득하고 깨닫는 과정이라면, 번역하는 것은 그것을 직접 삶에서 살아내는 과정이다. 몸 안에 들어온 영양분을 세포에서 흡수하고 에너지로 전환시켜 건강한 몸을 유지하듯, 읽어서 들인 지식이나 깨달음을 행동으로 번역하여 다시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화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화만 해서는 우리의 몸과 우리의 삶은 현재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현상 유지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적인 변화를 주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 시기에는 앎과 행함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혼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변화 있는 삶을 원한다면 소화과정을 넘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체화과정'이다 ('성육신'이라고도 읽어보자. ‘습관’이라고도 읽어보자). 삶의 변화는 우리가 읽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해하고 깨닫고, 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살지 못하고 (비록 그렇게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자동적으로 몸에 익은 방식대로, 즉 관성대로 살아가는 존재다. 이런 특성을 가진 우리가 무언가를 삶에서 새로이 살아낸다는 것은 반드시 '습관화'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습관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행위는 아무리 그것이 의미심장하더라도 '일회성의 좋은 시도', 또는 '보기 좋은 쇼' 정도의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거기에 지속은 없다. 변화도 없다. 관성에 철저하게 지배 받는, 다시 말해 무의식과 본능에 의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생각건대, 이러한 삶은 아마도 인간이란 존재에게 주어진 삶은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에겐 관성을 넘어서는 힘이 가능하다. 비로소 변화를 가져오는 힘, 혁신의 힘. 그 힘은 관성을 넘어서는 관성, 제 2의 천성, 곧 습관이다. 그러므로 머리 끝부터 시작하여 가슴을 거쳐 손과 발까지 몸 전체에 따뜻한 피가 흘러, 쫓기거나 죽은 것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리드하고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특권은, 다시 말해 ‘기계적 일상’이 아닌 '창조적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특권은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닌 '습관을 지배하는 자'의 손에 있을지도 모른다. 습관은 지성과 감성보다 강한 법이다. 


습관의 힘을 재조명하여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기독교의 영성과 연관시킨 책이 있다. 바로 이 책,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제목의 책이다.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와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의 저자, 제임스 K. A. 스미스의 신작이다. 전작의 제목에서 보이는 '욕망'과 '상상'이라는 단어, 그리고 이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습관'이라는 단어에서 저자의 생각과 주장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 저자는 머리와 가슴이 아닌 손과 발, 그것도 사용해야겠다고 의도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움직여질 정도로 몸에 익은 손과 발이야말로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단순한 지성으로 환원하는 근대의 주지주의적 인간 모형을 한 문장으로 잘 나타내는  "You are what you think (당신이 생각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를 부인한다. 대신 "You are what you love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욕망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우리의 지성이 아닌 우리의 바람과 갈망과 욕망이 우리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우린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원하고 욕망하는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인간이란 무언가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면서, 기독교의 ‘제자도는 우리 마음을 정렬하는 방식,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거기에 주목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따끔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는 제자도를 일차적으로 교훈에 관한 문제로 -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대체로 지적 활동, 지식 습득의 문제인 것처럼 –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정보로 우리 지성만 채우시지 않고 우리 사랑을 빚으시는 선생’이라는 것이다. 즉, 기독교와 성경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배우고 알고 깨닫고, 과거에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반성과 회개로 통곡을 할지라도, 실제로 하나님나라를 바로 이 땅,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세계에서 살아내기 위해선 반드시 습관이라는 대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가나안에 진입한 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의 끝이 아니라, 거기에 이미 상주하고 있던 잘못된 습관과도 같은 거짓신들과 우상을 제거해야 하는 작업이 남아 있었던 것고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 책은 총 일곱 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간이 없다면 첫 장만이라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첫 장이 나머지 부분의 전제이자 총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난 첫 장을 읽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나 역시 지성과 감성의 새로운 유입을 추종하는 무리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을 다 읽고 통쾌한 느낌과 함께 뒤끝이 찝찝했던 이유는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나 역시 머리와 가슴이 손과 발과 따로 노는, 다분히 이중적인 삶을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조금은 위로가 되어주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올바른 것은 아니기에 나는 이 책에서 찔림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자신이 알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전적인 확신에 가득 차 다양성을 배제한 채 지성과 감성의 꼰대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돌이켜 낮은 자세로 눈과 귀를 열고 새로운 것들과 다양한 해석들을 접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이겠지만, 거기에서 오는 무너짐과 새로 세워짐의 희열에 만족하고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머리와 가슴만 뜨거워진 채 가만히 앉아서 유레카를 외치거나 눈물을 흘리고 마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개인뿐 아니라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 가정 및 세상에서의 예배 방식에서 역시나 무시되어왔던 습관의 힘, 즉 예전의 힘을 상기시키고 부각시키는 내용으로 충실하다. 저자는 책에서 직접 “이 책이 사랑의 예전적 형성에 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촉매제가 되길 바란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날마다 반복하는 의례를 문화적 실천으로, 즉 예전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하며, 죄 또한 개별적인 잘못된 행동과 나쁜 선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악덕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덕은 도덕적 습관이기에 죄는 관성의 영향 아래 놓여있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 곧 습관 바꾸기가 필요하고 우리의 사랑을 재형성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외친다. 또한 현대의 복음주의 예배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 종교개혁의 원인이었던, 각본에 따라 이뤄지는 자연주의와 예배자를 구경꾼으로 만드는 수동성을 흉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모름지기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지향을 재조정하시고 우리 욕망을 재형성하시고 우리 사랑의 습관을 바로잡으시는 무대라고 역설한다. 예배의 핵심은 ‘지성’이 아닌 ‘형성’이라는 것이다. 형식을 껍데기와 같이 하찮은 것이라고 배워온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주장이 처음엔 불경스럽게 느껴질지 몰라도, 책 초반부에 나온 인간의 본질을 묵상하고 습관의 힘을 깨달았다면,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예배의 형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저자가 간파한대로, 설득당하기보다는 감동받는 존재인 미적 피조물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예배가 이루어진 결과 탈육신 과정이 발생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예배의 핵심인 양, 마치 그런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인 양 여긴 결과 우리가 맞이한 기독교 신앙은 몸과 분리되어 (탈육신) 메시지로 요약되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사안으로 변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독교의 형태는 바로 (예전을 통하여) 재주술화된 기독교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앎과 행함 사이의 괴리감은 개인 영성과 공적 영성 사이의 괴리감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이 안다고 해서 안 만큼 많이 행하지 않듯, 24시간 하나님만 바라보며 개인 영성을 고양시킨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공적 영성으로 발전하진 않는다. 물론 많이 알려고 하는 노력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듯, 홀로 하나님을 독대하며 회개와 성찰을 하고 내면의 치유와 정함을 얻는 시간은 기독교 영성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지점에서 멈추고 자족하며 그것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신앙이다. 나는 복음의 공공성이 복음의 본질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개인 영성에 그치는 신앙은 원죄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자기애와 교만이 그 안에 숨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앎과 행함 사이에는 습관이라는 단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개인 영성과 공적 영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형태는 분명 예배라고 믿는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공동체와 함께 하는 예배. 개인 영성만을 고집하는 잘못된 습관을 바꾸는 유일한 공간.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며 뜨거워진 가슴으로 일상에서 작은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수 있도록 훈련받는 장소. 참 제자도를 실현하는 장소. 어쩌면 이것이 모든 가나안 성도와 세속성자들이 욕망하는 교회의 예배가 아닐까. 나도 다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지 않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7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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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상실과 믿음: 집으로.

얀 마텔 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고.

단 일주일 만에 토마스는 어린 아들과 아내, 아버지를 차례대로 잃는다. 이후 그는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뒤로 걷기 시작한다.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발하기 위해서다.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긴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반발밖에 없었다.

박물관에서 보조로 일하는 토마스는 어느 날 박물관에 기증된 유물들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성공회 기록 보관소로 파견된다. 거기서 그는 리스트에서 누락된 얇은 책을 발견한다. ‘율리시스’라는 신부가 쓴 일기였다. 그는 그 일기장에 곧 빠져들었고, 율리시스 신부가 포르투갈의 식민지 섬, '상투메'에 머물 당시 쓴 글에 매료된다. “이곳이 집이다. 이곳이 집이다.” 이 짧은 문장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독특한 스케치도 발견한다. 어떤 얼굴을 그린 것 같았는데, 몇 분만에 그는 그 눈에 깃든 슬픔에 빠져든다. 토마스 역시 커다란 상실감에 젖어있었기 때문일까. 어떤 공감대를 느껴서일까. 그는 그 일기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나온다.

아내가 죽을 당시 손에 꼬옥 들고 있었던 것은 십자고상이었다. 토마스는 그것을 빼내려고 했지만, 사지가 경직된 이후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상실로 인해 신앙적으로 표류하고 있던 그는 분노가 일었다. 십자고상을 노려보며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당신! 당신 말이야! 내가 당신을 상대해주지. 두고 보라고!” 그렇다. 그는 신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토마스는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에서 신부가 만든 어떤 종교적 조각품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의 흔적을 좇는다. 그 조각품은 스케치에서 본 눈을 가진 십자고상이 분명했고,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제였던 율리시스 신부가 노예들이 당하는 인권유린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잔학함과 악함을 보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품이었다. 기독교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십자고상이었다. 그 조각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토마스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아서 신이 자신에게 한 짓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숙부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이용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자동차가 희귀했던 시절, 토마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자동차를 몰며 별의별 고생을 다한 끝에 (죽을 위기도 넘긴다. 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부분에는 코믹한 부분도 나오고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부분도 나온다), 겨우겨우 목적지에 다다른다. 불행히도 예상했던 교회에서는 그가 찾던 십자고상을 볼 수 없었다. 낙담하던 찰나, 차를 운전하던 중 그는 어린 남자아이가 차 앞에 장난 삼아 매달려있는 줄도 모르고 출발하다가 그만 아이를 치고야 만다. 아이는 죽었다. 토마스는 뺑소니를 친다.

그는 아이를 죽였다는 이유 때문인지, 뺑소니를 쳐서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인지, 몸의 상태가 지극히 나빠진다. 구토가 쉴새 없이 나오려 한다. 어느 작은 교회를 우연찮게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토마스는 그렇게 찾길 원했던 십자고상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신의 아들은 사람이 아닌 침팬지였던 것이다!

작가는 1부를 이루는 토마스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끝을 맺고 2부를 시작한다. 독립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1부를 읽었다면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부에서 토마스가 죽인 아이의 엄마, 마리아가 최근에 죽은 남편의 시신을 들고 병리학자 에우제비우를 찾아와 부검을 요청하고, 실제로 부검이 진행되는 장면이 2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부검 결과, 놀랍게도 죽은 남편의 배 안에서는 한 마리의 침팬지와 죽은 아들이 들어있었다. 마리아는 그제서야 말한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그리고 그녀는 옷을 다 벗고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부탁해요.” 에우제비우는 그녀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아듣고 실과 바늘로, 부검이 끝나면 늘 그랬듯, 메스로 가른 시신의 모든 부분을 능숙하게 봉합한다.

에우제비우 역시 최근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그녀의 이름 역시 마리아였다. 사실, 죽은 아이의 엄마 마리아가 찾아오기 직전에 아내 마리아의 환영이 다녀갔었다. 늦은 밤 홀로 작업에 여전히 몰두해있는 그를 찾아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 복음서의 비교를 통한 놀랄만한 해석을 늘어놓고 자리를 떠난 직후였다. 아내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에우제비우는 갑작스럽고 괴기스러운 부검 의뢰를 받고 계획에도 없던 일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두 마리아 모두 환영이었을까? 어떻게 죽은 사람 몸 안에 침팬지와 아이가 들어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있는 여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에우제비우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까? 이런 온갖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은 궁금증이 최고점에 오를 무렵, 작가는 슬그머니 2부를 끝내고 3부로 넘어간다.

3부 역시 연결점을 가진다. 3부의 주인공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고 캐나다에서 상원의원으로 일하는 피터라는 포르투갈인 1.5세 남자와 ‘오도’라는 이름을 가진 침팬지이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 때문인지, 피터는 상원의원직이 그저 직분일 뿐이다. 어느 날 오클라호마로 출장을 갔을 때 우연찮게 만나게 된 한 마리의 침팬지를 구입하게 되고, 그는 안락한 모든 삶을 정리하고 오도와 함께 그가 태어난 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좌충우돌하며 도착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그는 오도와 함께 살 집을 하나 구하게 되는데, 그 집은 마침 2부에서 등장했던 마리아의 집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터가 마리아의 남편 카스트로의 손주였던 것이다. 캐나다에서 걸려온 아들의 전화에서 그는 말한다. “이곳이 집이야. 이곳이 집이야.”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피터는 정말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침팬지와 함께. 그리고 어느 날 오도와 함께 산책을 나갔을 때, 그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전경이 다 보이는 높은 바위 위에서 오도와 함께 전설의 이베리아 코뿔소를 목격하고 조용히 최후를 맞이한다.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 죽은 아이와 그 집안, 그리고 침팬지와 침팬지의 십자고상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공통점 두 가지가 더 있으니, 그것은 바로 ‘상실’과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1부의 토마스도, 2부의 마리아도, 3부의 피터도 한결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들 모두 상실로 인한 빈자리를 메우려는 듯, 어떤 믿음에 의지하여 무언가를 찾아 나섰다. 그것을 작가는 이 작품에서 ‘집’이라고 표현한 게 아닐까 한다. 세 가지 이야기의 제목에서 ‘집’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1부: 집을 잃다. 2부: 집으로. 3부: 집) 이를 뒷받침하며, 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이 ‘집’이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믿음’을 통한 구원과도 같은, 어떤 바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상실로 인해 생겨난 빈 공간을 각자의 독특하고 다른 모양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다다름으로써 메워가는 여정으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실은 여러 모양으로 발현되는 법이다. 토마스에게서는 신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으로, 마리아에게서는 죽은 아들과 남편과의 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터에게서는 아내의 부재에도 여전히 쫓기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픈 마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발현은 모두 일차적으로는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토마스는 결국 십자고상을 찾아내고야 말았고, 마리아는 원하던 재회를 맞이했으며, 피터는 오도와의 단순하고 원시적인 삶 속에서 평화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상실감이 과연 메워졌을지는 끝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피터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린아이를 죽임으로써 타자에게 큰 상실을 안겨준 결과를 낳았고, 마리아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으며, 피터 역시 아들과 누이를 남기고 먼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쉬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선 작가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변주를 들려주었지만, 결국은 하나의 곡을 연주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상실을 개념화하거나 공식화하여 상실을 겪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상실 그 자체에 대해서 함부로 규정짓지 않으려고 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실이란,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으며, 그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는 또 다른 상실을 낳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이야기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집이라는 단어의 추상화로 인해 인간이란 언제나 무언가를 상실하고 또 그 빈 공간을 메우려고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잃고 메우고, 그러다가 또 잃고 또 그것을 메우려고 하고... 이러한 윤회적인 운명 속에 인간이 놓여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건대, 만약 네 번째 이야기가 존재했다면, 제목은 1부의 제목과 같이 ‘집을 잃다’이지 않을까. 마치 돌고 도는 고리처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일 것이다. 나는 이 판타지적이고 미스터리하면서도 아름다운 책을 통해, 희미하지만 하나의 묵직한 메시지를 건져본다. 상실과 그에 반응하는 인간, 그리고 그 상실을 메우려고 본능적으로 어떤 형태의 믿음을 통해서든지 그것을 메우려고 발버둥치는 존재, 그러나 그러다가 또 다른 상실을 맞이하고야 마는 존재, 결국 상실을 늘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 또한, 상실이 각 사람에게서 다른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을 통해서, 내 주위에 상실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조금은 더 넉넉하게 바라보고 공감하며 위로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그래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구원을 기대하는 것을 난 끝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1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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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일상 -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라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오현미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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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일상의 조각을 찾아서.


프레드릭 뷰크너 저, ‘주목할 만한 일상’을 읽고.


내가 만약 신이었다 하더라도 진리처럼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가장 높은 곳이나 가장 빛나는 곳이 아닌 오름직한 곳, 먼지가 끼고 빛이 바래 손님을 맞이할 때면 늘 분주하게 빗자루질과 걸레질을 해야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우리들의 ‘일상’ 가운데 감추어두었을 것이다.


버젓이 존재하지만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의 향연. 뒤돌아보면 또 놓쳐버린 아쉬움으로 가득 찬 기억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 매일 우리들을 찾아오지만, 마치 투명인간처럼 우리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 소중한 시간들. 늘 높고 빛나는 특별함만을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무시나 희생을 당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어 한층 낮은 자세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마치 자신의 인생을 재방문하듯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을 발견한 소수의 무리들에게는 항상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되어주는 삶의 터전. 비록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아무나 볼 수 없고, 또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삶의 조각들. 이는 곧 신비,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일 것이다. 눈이 깊고 겸손한 자들에게 이런 소중한 가치가 먼저 발견되는 이유를 자연의 이치와 신의 섭리에서 찾는 나는 지나친 착각에 빠진 것일까?


이 책의 저자 프레드릭 뷰크너는 일상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목하라고 외친다.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우리들의 삶이 있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 우리들의 현재가 살아 숨쉬는 곳, ‘지금, 여기’의 무대, 즉 우리들의 일상을 알아채고 느끼고 누리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 우리 서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좀 더 예민해지고, 그 사실을 좀 더 의식하고, 그 사실에 좀 더 민감해지십시오!”


그렇다. 우리가 제한된 육신에 갇혀있음에도 영원한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 현장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다. 우린 일상을 정직하게 대면함으로써 우리가 한계를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역설적인 해방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그 안에 각인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노래할 수 있다. 뷰크너는 이러한 성경적 신앙이 가리키는 신비, 즉 우리가 흙과 별에서 온 물질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표를 지닌, 거룩한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 가장 깊은 신비라고 덧붙인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일상에 주목하는 행위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비유한다.


“렘브란트의 눈으로 보고, 바흐의 귀로 듣고, 외피 아래 무엇이 있든 그것을 꿰뚫어 보는 엑스레이의 눈으로 보십시오!”


그리고 예술과 신앙은 아주 흡사한 목표를 향해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면서, 성경적 신앙은 다른 뭔가를 말하기에 앞서 우리의 일상에서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방식대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시공간이 다름 아닌 우리들의 일상이기에, 그 한 가운데 멍하니 서서 일상을 놓쳐버리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 밖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자라면, 그리고 개인구원론만 강조되고 사적인 복음이 부끄러움 없이 정당화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복음의 공적인 본질을 알아차린 자라면, 일상의 의미를 결코 ‘반복', ‘타성’, 혹은 '장망성'이라는 단어에 종속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와 교차하는 시공간이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말이다.


세상은 우리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곳이다. 저자는 세상에 주목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목한다는 것, 마음을 쓴다는 것, 눈을 뜨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두는 것을 뜻합니다.”


이어서 가장 으뜸 계명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서 그 둘은 똑같은 일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가까운 이웃의 얼굴을, 하도 자주 보기 때문에 실존에서 배제시켰던 그들의 얼굴을 주목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가장 가까운 이웃을 향해 우리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구체적인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계명과 같은 거대담론만을 외치는 관념론자들은 그들의 머리는 뜨거울지 몰라도 손과 발은 차가운 법이다. 사랑의 이해와 깨달음이 차가워진 손과 발까지 따뜻한 혈액이 되어 전달되기 위해서도 우린 먼저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상이 소중하고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이유는 거기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뷰크너는 모든 예술 중에서 스토리텔링 예술보다 더 성경적 신앙의 본질에 기본이 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성경이야말로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적 의미에서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비단 한 사람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뷰크너가 간파했듯, 우린 모두 개성을 가진 독립된 존재이지만, 어떤 차원에서는 결국 우린 모두 같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타인의 내러티브에서 자신의 내러티브를 읽어내는 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하는 작업이며, 그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디엔에이를 읽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정말 매혹적인 일이다. 성경을 읽어가는 과정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거대 서사에 감동을 받고 그것이 던져주는 큼직한 메시지에 마음이 움직이는 단계를 지났다면, 이제 나아가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일상이다. 거대 서사를 이루는 것도 결국 작은 일상들이라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나의 작은 일상의 이야기와 성찰, 그리고 그 작은 그릇에 담긴 하나님의 디엔에이 조각을 읽어내는 소소한 작업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정직하고 치열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주목할 이유를 잃어버린 나의 일상을 돌아본다. 아, 우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가는 걸까? 매순간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린 모든 순간을 마치 흐르는 물에 종이배를 떠내려 보내듯 그냥 흘려 보내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선 어느새 둔해져버린 알아챔의 근력을 다시 키울 필요가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아무나 사용하지 못하는 힘. 조금은 더 낮은 자세로, 조금은 더 감사한 마음으로, 잠시 멈추어 숨을 가다듬고 창조세계를 바라보자. 그리고 귀 기울여보자. 경이감은 최고의 도우미가 될 것이다.


지나갔던 과거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모두 우리 영혼을 내려놓고 안식을 취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를 누리는 일은 현재 나의 작은 일상을, 반복되어 지겨워졌던 그 보잘것없고 누추하기만 한 일상을 낯설고 새롭게 보는 작업이 수반된다. 우리는 이제 선택할 수 있다. 아니, 원래 그럴 수 있었다. 한 장인 것만 같았던 카드는 실은 두 장이었다. 우리는 지나치지 않고 멈출 수 있고, 흘려보내지 않고 경이감에 찬 채 사랑스럽고 겸손한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바라볼 수 있으며, 내려두었던 영혼의 이어폰을 다시 꽂고 귀 기울여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아름다운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마침내 우리도 자연세계의 일부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6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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