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문제 믿음의 글들 189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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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통 이면에 계시는 사랑의 치료자 하나님의 손길.


C. S. 루이스 저, '고통의 문제'를 읽고.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피조물들의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이 물음은 하나님의 선함과 전능하심에 대한 의심을 유도하며, 신정론과 함께 아주 오래된 질문입니다. 루이스는 고통이 야기하는 이러한 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책, '고통의 문제'를 썼다고 합니다. 그의 날카로운 변증이 잘 드러나있는 이 책은 고통의 문제를 바로 다루기 위해 먼저 기독교의 기원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 설명에 이어 인간의 악함과 타락에 대하여 고찰한 후, 마지막으로 고통의 의미를 풀어주고 있습니다. 비록 술술 읽히진 않지만, 텍스트 속에 담겨있는 그의 명징한 논리는 이를 이해한 독자의 마음을 시원케 해줄 것입니다.


루이스는 서론에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부터 창조자의 선함과 지혜를 유추해 낸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불합리한 일이었을 것이며, 실제로 그런 일이 시도된 적 또한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피조물인 인간의 이해도에 한계를 설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가 지혜롭고 선한 창조자의 작품"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어쩌면 이성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 창조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인간, 즉 실제로는 날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실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의로운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비로소 '문제'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전능의 의미는 '아무말잔치'에서처럼 무의미한 단어들을 조합해 놓고 그 앞에 'God can'이라는 말을 붙인다고 해서 탄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루이스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며,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며, 이것은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에 따른 결과 및 전체 자연질서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한계인 동시에 그런 삶을 가능케 해 주는 유일한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연질서 및 자유의지와 맞물려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덧붙여, 피조물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이 개입해서 바로잡아 준다면, 자유의지를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과 다를 게 없다는 논리도 가능해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박탈하시면서까지 고통을 제거시켜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하나님의 선함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함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이 오해되어져 왔습니다. 루이스는 이 부분에서 "오늘날 하나님의 선함은 거의 예외 없이 사랑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제를 하나 제기하는데, 그것은 "우리 대부분이 이 문맥의 사랑을 친절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관심한 나머지 사심 없이 우리의 복지에 신경 쓰신다는 뜻이 아니라, 두렵고도 놀라우며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꾸벅꾸벅 졸면서 여러분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인 치안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서 여기 계십니다."


인간이 선하다면 위와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에 대해 별다른 이해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이용해버릴 만큼 악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를 동의하지 않는 루이스에게조차 인간의 악함은 그의 변증의 기본 전제로 깔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적 타락 교리를 받아들이건 말건 간에 인간은 악함은 기정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함의 이유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교리에 들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스스로 이런 모습을 초래했다는 교리입니다. 이 부분에서 루이스는 "인간의 타락은 단지 죄라는 획득형질을 얻은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코 만드신 바 없는 새로운 종이 죄로 인해 탄생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스스로 부패했으며, 따라서 지금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선이란 본질적으로 우리를 치료하며 바로잡아 주는 선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치료하고 바로잡는 부분에서 고통이 실제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고뇌, 시련, 역경, 곤란과 같은 의미인 고통은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에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해지고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피조물에게 합당한 선이며, 그것은 곧 자신을 창조자에게 양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악함은 죄를 낳았고 그 상태는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입니다. "하나님의 치료가 우리에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이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통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즉 "하나님의 메가폰으로써 고통이 혹독한 도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고통은 반역한 인간에게 개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습니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라는 기독교의 교리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유효한 진리입니다.


"고통의 유익은, 고난 받는 당사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며 그의 고난을 목격한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의 선한 열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이용해 자신의 반역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구속되지 못할 이들에겐 응보적 결과로 지옥이라는 장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저주받은 자들로서 최후까지 반역에 성공한 자들이며, 영혼이 선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자기 포기의 영역에서 첫 단계조차 밟으려 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요구한 무서운 자유를 영원히 누린 결과 자아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축복받은 자들은 영원히 순종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영원무궁토록 자유롭고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끊임없이 자기 드림을 실행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타락으로 악해진 인간을 치료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스치는 곳에 인간의 고통이 발생합니다. 루이스에 의하면, "고통은 모든 악 중에 유일하게 살균 소독된 악입니다. 고통에는 그 본성상 증식하는 성향이 없으므로 고통이 끝났다면 자연스럽게 기쁨이 뒤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신뢰하고 그가 치료하시는 사랑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가 부수거나 파괴하는 것은 우리를 부수거나 파괴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합을 원하신다면, 고통 이면에 거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아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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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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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낸다는 것.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신성모독과 음담패설 등이 취미인 것 같은 망나니, 육욕에 충만하여 정신적 세계를 단박에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방탕한 이단, 말초적 쾌락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이 된듯한 그에게서 왜 난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떠올렸던 것일까. 성육신이야말로 그가 말로 주장하고 삶으로 보여주었던 것들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거룩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혹시 바로 여기에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숨은 역설이 담겨있는 건 아닐까?


'나'라는 화자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은 '조르바'이다. 이 책은 화자가 조르바를 만나면서부터 그가 죽기까지의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정신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와의 이별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친구는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책을 버리고 삶을 택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떠안고 친구는 카프카스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결국 그 친구는 동포를 구하고 나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비겁했던 것일까? 이별 장면에서 기억하는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 속에서 ‘나’를 송곳처럼 찔러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던 말은 ‘책벌레’였다. ‘나’는 그 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깊은 상처를 받았다.


‘나’는 결심했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남겨준, 크레타 섬에 위치한 갈탄광으로 향한다. 그러나 책과 집필도구는 챙겨서 간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것도 일생일대의 큰 결단이었다.


조르바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그 레스토랑에서 조르바는 운명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조르바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호탕한 기인이었다.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기로 작정했다. 마침 그는 탄광에서 광부로서의 경험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표현해도 조르바를 모두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그는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 이별했던 친구가 ‘나’에게 어떤 자극제 역할을 했다면, 조르바는 이미 그 길의 목적지에 도달해있는 사람이자 그 길의 완성인 것 같았다. ‘나’의 구원을 찾아나선 여정에서 그는 그 자체로서 답이었다.


400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와 함께 했던 시기에 대한 회고다. 책의 말미에서도 언급되지만, ‘나’는 조르바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다 기억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의 조르바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조르바로부터 뿜어져나오는 자유를 통해 성숙해지고 풍성해진, 어쩌면 그 많고 많은 책으로부터도 얻지 못했던 해방과 일종의 구원 과정에서부터 얻은 절절한 내면의 변화가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있다.


내가 이 광기어린 기인, 조르바와 화자인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생각났던 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중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나’에게 대입했다. 그리고 ‘나’의 눈으로 조르바를 보고 느꼈다 (저자가 ‘나’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건 아마 이 때문은 아닐까? 독자들이 그가 직접 겪은 조르바를 느껴보라고). 조르바는 슬플 때 소처럼 울 줄 알았고, 기쁠 땐 미친 놈처럼 춤을 출 줄도 알았으며, 영혼의 깊숙한 곳이 터치될 땐 산투르를 연주하여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크레타 섬의 주민들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워 죽여버린 과부를 보호하려 몸을 던졌던 유일한 인간이었으며, 그의 부불리나였던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 앞에서 유일하게 애도를 표하며 슬퍼했던 인간이었으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수도승들의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내어 조롱했던 대담하고 예리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밤하늘의 별과 포말로 부서지는 바다와 지저귀는 새소리와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도 예민하게, 마치 처음 그 창조물들을 대하는듯한 자세로 반응했던 인간이었다. 인생의 허다한 경험들을 뒤로 하고 그것을 내던져버리지 않고 그 속에서 진주를 찾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철학을 만들어내었던 인물이었다. 실로 그는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지식과 지혜를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체득하여 실제 삶을 살아내는 자였던 것이다.


내가 가진 신앙을 바라본다. 말과 글로 도배된 많은 부분들이 보이고, 거기로부터 깨닫고 기뻐하는 작은 몸부림조차 손과 발로 전달되지 않고 머리과 가슴에 갇혀버린 처량한 내 꼴이 보인다. 난 과연 왜 책을 읽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많은 깨달음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려는 결단으로 새로이 시작한 나의 삶과 신앙의 여정은 책 속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가졌고 유일하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라고 여겼던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이 여정 가운데 이 책을 만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매일 새롭게 도약하는 것이다. 신학책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에서 신학을 본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인간을 알게되고, 인간을 알게되면서 하나님을 본다. 살아낸다는 것, 머리와 가슴을 찔러 깊은 깨달음을 얻고 눈물을 쏟아낸다해도 일상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와 억눌린 자들을 돌보지 못한 채 고상한 교회 은어들을 사용해대며 까불어대고, 고작 한다는 신앙의 행위가 개인의 번영과 안녕만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과 악마가 하나라고 함부로 지껄였지만 일상적 삶에선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삶을 살아낸 (어쩌면 예수의 삶을 살아낸) 조르바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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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기쁨 믿음의 글들 196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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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를 넘어서는 은혜.


C. S. Lewis 저, ‘예기치 못한 기쁨 (원제: Surprised by Joy)’을 읽고.


기독교 변증가로 잘 알려진 C. S. Lewis의 삶이 온통 기독교적인 색채들, 이를테면 말씀 듣고 읽고 묵상하고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행위들로 가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허다한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던 그이지만, 실상 그는 목사나 신학자도 아닐 뿐더러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릴적부터 신앙심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태어나는 시대와 장소를 선택할 수 없었기에 북아일랜드의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을 뿐, 머리가 조금씩 크면서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1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대학으로 복귀한 몇 년 후 그는 유신론자가 되었고, 얼마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회심 이후 그는 끝까지 성공회 신자였다). 루이스가 57세가 되던 해에 (생을 마치기 6년 전) 출판된 이 자서전과도 같은 책은 이러한 그의 신앙의 여정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는 책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년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약 300페이지 안에 모두 담으려면 많은 내용을 빼야만 한다. 그러는 와중에 중요하다 생각되는 사건들은 강조도 해야 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한 형식으로 잘 짜여있다. 논리정연하면서도 문학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그의 필체는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예기치 못한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다.


학창 시절의 그는 마치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결코 무난하거나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릴적부터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에 푹 빠져 살아왔는데 (그는 북유럽 신화들을 비롯해 많은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기질은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것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인간이 모인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거기엔 계급 의식이 물들어있는 법이며, 일반적으로 그 안에선 진실을 은폐하거나 교묘하게 위장하는 방법을 통해 충분히 사교적이면서도 철저히 이기적인 속성을 겸비한 인간들이 지배층으로 군림하기 마련이다. 루이스가 다닌 학교의 분위기가 이 책에선 꽤 자세히 강조되어 있는데, 나에게는 그가 그 시절 적지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그 당시 계급적인 학교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진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분에게서 개인지도를 받으며 비로소 안정적으로 학문적 성장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책에서도 여러 번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를 사용하는 것을 봐도 그의 독특한 (이기적으로 보이면서도 남에게 해는 끼치지 않는, 즉 다분히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학습받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저 그렇게 주어진 모습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게끔 지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 그는 운동과 수학에 젬병이었으며, 오로지 앉아서 혼자 글을 읽고 쓰고 상상하고, 시간에 맞추어 적당한 산책을 즐기고 일찍 잠드는, 고독한 일상을 좋아했던, 천성적인 학자이자 작가였던 것이다.


어릴적부터 종종 그를 예기치 않게 찾아왔고 스스로 ‘기쁨’이라 불렀던 순간을 어른이 되어서도 늘 갈망하곤 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이후에 그는 그 ‘기쁨’을 어떤 하나의 마음 상태로 여기게 된다. 그 ‘기쁨’은 무언가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갈망 비슷한 것이었는데, 모태신앙으로 자라다가 염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고, 다시 어떤 절대적이며 정신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게 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 ‘기쁨’은 그 자체가 참 기쁨이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과,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그 ‘기쁨’이 바라고 가리키고 또 그 ‘기쁨’의 근원이기도 한 대상에 있다는 것을 그는 간파하게 된다. 참 기쁨은 우리 인간을 흥분, 고조시키며 환희로 다가오는 어떠한 감정이나 마음 상태에 있지 않다. 비록 그것이 평상시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의 실체는 참 기쁨의 흔적이며 껍데기일 뿐이다.


사실 난 논리와 변증에 능한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무척 궁금했다. 그 과정 또한 논리정연하고, 누가 들어도 납득이 될만한 이유와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기대는 책의 말미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루이스 스스로 자기도 잘 설명할 수 없고 잘 모른다고 써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부분에서 실망감을 느꼈었지만 (사실 300페이지 분량의, 그것도 나와 별 상관없는 개인사를 읽어나가는 건 마냥 흥미진진하진 않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가장 큰 이유는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금 후 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무신론자에서 시작해 교회만 다니는 유신론자였다가 철이 좀 들어서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고, 그 과정을 지금까지 납득이 될만하게 설명한 사람은 간증 사기꾼 빼고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론 그동안에도 많이 생각해봤다), 그건 논리적이지 않았다고 말해야 가장 솔직한 고백이 아닌가 한다. 은혜는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정의했던 ‘기쁨’은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우리를 덮쳐오는 감정으로도 나타나고, 어떠한 지적인 깨달음을 얻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로도 나타나며, 아주 가끔씩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들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적과도 같아서 그 일련의 순간들과 사건들은 한결같이 모두 어떤 하나의 대상을 가르킨다. 바로 절대적인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되어주신 그 존재, 그리고 모든 열방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바로 그 존재,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인 것이다.


루이스 덕분에 나도 예기치 못한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이 기쁨에 국한되지 않고 난 내 일상에 일어나는 소소한 기쁨들의 근원을 더욱 앙망한다. 루이스라는 거장 덕분에 불필요한 곁길 하나를 걷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흡족하다. 그의 진솔한 회심기 덕분에 오히려 일방적이면서도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가 별 볼일 없는 내 삶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8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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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심엽 2021-04-30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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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새로운 시작.

무라카미 하루키 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두 명의 여학생과 세 명의 남학생. 언뜻 봐도 짝이 맞지 않는다. 남학생 하나가 남기 떄문이다. 또 하나, 공교롭게도, 다섯 중 하나만 자신의 이름에 색이 없다. 나머지는 모두 이름에 색을 의미하는 단어가 들어있다. 레드, 블루, 화이트, 블랙. 그러나 그의 이름에만 색이 없다. 그의 이름은 다자키 쓰쿠루. 색채가 없는 이름이다. 운명이었을까. 대학에 진학할 무렵, 다섯 명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고 유지되었던 도시 나고야를 떠나 그는 홀로 도쿄로 진학하게 된다. 그 결과, 나고야엔 다섯이 아닌, 넷이 남게 되었다. 그들이 대학교 2학년이 되기까진 공간만 떨어져있을 뿐 모든 게 똑같다고 여겨졌다. 방학 때 집으로 돌아오면 넷은 여느 때처럼 그를 반겨주었고, 마치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다시 다섯이 되었으며, 그래서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넷 중 하나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미안하지만 이제 더는 누구의 집에도 전화를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되어 유감이야.” 그는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스스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는 모호한 말밖에 없었다. 전화는 끊어졌고, 그 순간 하나와도 같았던 다섯은 넷과 하나로 분열됐다. 그리고 그 분열은 16년간 지속된다. 원인을 모른 채로. 아니, 원인을 알려고 하는 적극적인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로. 아니, 그런 시도조차 감히 할 수 없었던 채로.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중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손에 집어 들었던 건, 어쩌면 내 몸이 보낸 절박한 STOP 사인에 반응한 나의 구체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암묵적으로 내 몸이 보내온 일종의 신호를 나의 무의식이 해독한 뒤, 의식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나의 행동을 만들어낸 게 아니었을까.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기차의 엔진도 쉼이 필요하듯, 나의 머리와 나의 마음도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깊은 통찰로 인한 깨달음도 하루 이틀을 넘겨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면역이 생기는 법이다. 인간의 익숙해짐이란 교활한 돼지와도 같아서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단 몇 차례면 그새 다시 새로운 영점을 가지게 되고, 더 좋은 음식을 탐하기 마련이다. 마치 한 번도 좋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감사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늘 배고프고 불만에 가득 찬 채, 불평만 해대게 된다. 통찰이 성찰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이유다.

이럴 때면 난 늘 해독제로써 누군가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접한다. 보통은 읽는 것으로 의외로 많은 문제가 해결되곤 한다. 정갈한 문장으로 가득 찬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이에 아주 적합한 소재다. 비록 소설이지만,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일상적인 이야기.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엔 자유와 여유가 깃든다. 타자를 공감하는 일은 언제나 나 자신의 세상에 갇히는 위험에서 빠져 나오거나 미연에 방지해주는 좋은 해독제가 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하나와도 같았던 다섯 명의 공동체에서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배제 당한 뒤 수개월 간 죽음에게 온통 마음과 생각을 빼앗겼다. 그러나 어느 날 꾼 꿈을 계기로 그는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한층 성숙하고 새로운 자아로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여전히 그때의 일이 마음의 걸림돌이었다. 다행히도, 사라를 만난 후 그 응어리는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16년이나 지난 현재, 쓰쿠루에게서 여전히 어딘가 묶여 있는 듯한 모습을 간파한 사라는 그에게 네 명의 이름과 기본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쓰쿠루가 감히 용기내지 못했던 일들을 수 일만에 해낸다. 현재 그들이 사는 곳과 일하는 곳, 가정의 현황 등의 정보를 알아내어 그에게 내민다. 그 다음은 쓰쿠루의 차례였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들을 만나보기로 작정한다. 이 책의 절반 이상은 그와 한 명씩 만나는 그들 간의 재회를 통해 그때 그 일의 진상과 그 진상 이면에 감춰졌던, 지금은 세상에 없는 다섯 중 하나, 시로의 마음에 생겨났던 상처를 가늠하며 자신이 왜 배제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해나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고야는 물론 핀란드까지 직접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게 되는 쓰쿠루. 거기엔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사정이 있었다. 그가 배제되어야만 했던 이유. 그 정황. 비록 못내 아쉬운 부분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시로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기에, 쓰쿠루는 살아남은 셋과 회포를 풀며 정면으로 과거에 맞서서 16년 간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앙금으로 남아있던 문제로부터 비로소 해방 받게 된다. 물론 이때의 해방이란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잘려나간 것들을 보내주고 틀어졌던 마음을 바로잡으며 서로 간의 오해를 해결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때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던 그 무언가가 어느 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쑥 잘려나가게 되는 경험. 그 경험이 남긴 흔적, 죽음의 냄새까지 맡을 정도로 깊숙했던 마음의 상흔.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 이런 미해결의 문제들을 한 두 개씩 가슴 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 석연찮은 일의 잔재들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고 꼿꼿이 남아서 어느 순간 그때와 비슷한 정황에 처해질 때마다 유령처럼 불쑥 나타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진 않는가.

한편, 사라와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 그렇게 형편없을 만큼 불공평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떠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를 찾아주는 사람도 있다. 아픔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아픔을 치유해주는 사람도 있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는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 참 고마운 사람. 그건 분명 은혜일 것이다. 언제나 구원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다. 자꾸만 안으로 침잠하려는 자아에 거스르는 희망의 빛. 진정한 새로운 시작은 과거의 유령으로부터 피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서 매듭을 지을 때 시작되는 게 아닐까. 단순히 그 일이 생기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치유와 회복은 '과거의 나'가 아닌 '현재의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마음 속 교통 정리랄까. 조그만 상처에도 필요없이 부풀어오른 딱지를 제거하는 작업이랄까. 외부의 도움으로 인해 과거의 자아와 마주하여 치유를 받고 현재를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의 평범한 이야기. 이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양장본인 이 책을 감싸고 있는 컬러풀한 껍데기를 벗기면, 무채색의 하드커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알고 보니 그는 색채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색채가 없었던 게 아니라, 색채를 가진 이들과의 진정한 교류를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 관계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다면, 그 어떤 아름다운 색채도 무채색으로 변색되어 버리지 않을까. 색채가 있든 없든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 사라를 만나고 쓰쿠루는 그제서야 그런 관계를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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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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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파괴된 관계에 구원이 임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죄와 벌'을 읽고.


찌는 듯이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해질 무렵,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미 수십 번이나 머리 속에서 계획했던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사전 답사를 가는 길이다. 대상은 전당포 주인이자 고리대금업자였던 한 노파였고, 살인 도구는 도끼가 될 예정이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감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가난했다. 돈이 없어 다니던 대학도 휴학했다. 그가 사는 숨막힐 듯 작은 방은 이미 월세가 많이 밀려 있다. 잘 먹지도 못해 건강도 나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사전 답사 다음 날, 때마침 배달된 어머니의 편지에서 그는 여동생이 돈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듣게 된다. 그는 여동생이 자신에게 돈을 부쳐주기 위해 일부러 희생하려 한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고, 즉시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마음이 들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모든 게 돈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사전 답사를 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살인을 망설이고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나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살인은 반드시 실행에 옮겨져야 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고독한 이상주의자이자 몽상가였다. 주위와 단절된 채 관 같은 작은 방에 틀어박혀 생각만 해댄 지 벌써 한 달째였다. 그가 가진 해괴망측한 사상은 자신을 포함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단번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였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돈을 많이 가진 극소수의 이 (lice) 같은 인간들을 제거하여 그들이 가졌던 많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설프게 산술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본성 (특히 양심의 존재)을 깊이 고려하지 못한 심각한 오류에 불과했다. 이론적으로 아무런 결함이 없더라도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순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인간에게도 살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은 여기서 또 한 번 큰 오류를 범한다. 살인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과 비범인 (초인)으로 나누는 이론을 믿기 시작한다. 살인을 하기 위해선 범인이 아닌 비범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같은 극소수의 사람만 해당되는 비범인.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범인들에겐 모든 것이 허용되며, 심지어 사람을 죽여도 죄를 짓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는 묻는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 영웅이 된 자들이 과연 죄인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칭송 받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이 만약 여기에서만이라도 멈춰줬더라면 아마도 살인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신이 비범인에 속할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모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참으로 불행하게도, 그는 이를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계획했던 대로 살인을 저지른다. 운이 잘 따라주어 살인 현장에 이르기까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계획했던 도끼를 구할 수 없어 잠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지만, 신기하게도 아주 우연찮게 다른 도끼를 손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 참으로 기막힌 순간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운명인 것만 같았다. 자신이 비범인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는 한 사람을 더 죽여야만 했다. 예정에도 없었던 그 무고한 희생자의 이름은 리자베따, 전당포 주인의 여동생이었다. 분명 그녀는 그 시간에 다른 곳에 있어야 했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라스꼴리니꼬프는 노파를 죽이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언제나 우연을 끌고 들어오는 법. 그녀의 약속이 바뀌었었는지, 도끼에 찍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있는 언니를 발견한 채 어느새 방 한 가운데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서 있는 것이었다. 리자베따는 언니에게 학대 받던 가난한 백치이자 유로지비 (holy full, 바보성자)였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녀의 언니인 전당포 주인을 죽여서라도 보호하고 도와주고자 했던 부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그녀까지 죽여야만 했다. 유일한 목격자이기 때문이었다. 비극이었다. 이 의도치 않은 두 번째 살인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적 오류가 무고한 피를 흘림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기도 했다.


감칠맛 날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가 전체 소설의 약 1/6에 해당되는 내용을 살인 동기 위주로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마지막 장,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80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소설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추는 살인사건 이후부터 자백하기 전까지의, 약 2주 간에 걸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이 얽히고 설킨 실타래라고 볼 수 있다. 그 복잡한 실타래는 모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되어 주인공의 불안하고도 혼란스러운 심리 변화를 적나라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탁월한 도구가 되어준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러시아 특유의 등장인물의 다채로운 이름과 짧은 시간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의 맞물림, 그리고 등장인물의 화려하고 긴 언변에 휘둘려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소설의 마지막까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읽는 내내 잠시도 엉덩이에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인간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만큼 탁월한 작가가 또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책의 본론 부분이야말로 과연 진미였다. (사실 이 부분은 내가 중학생 시절 너무 지루해서 미처 다 읽지 못하고 포기했던 부분이다. 나도 ‘언젠가 한 번은 '죄와 벌'을 읽어야지’ 했던 많은 독자들처럼 이 부분에서 길을 잃고야 말았었다.) 다시 말해, 죄를 저지른 이후 그 죄를 자백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이 이 소설의 핵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죄와 벌'을 읽어냈다고 하는 건 이 부분을 얼마나 소화해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자백할 때도, 또 자백한 이후 시베리아에서 1년 간 감옥 생활을 할 때조차도 사실 그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지 못했었다. 비록 양심이란 것이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직접 깨닫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분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죄를 자백한 이유는 그저 그 편이 더 유리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 뒤에 덧붙여진 짧은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라스꼴리니꼬프는 구원에 이른다.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을 깨닫고 난 이후였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친 이후, 그는 단절되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열게 되어,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환희의 순간이었다. 소냐도 라스꼴리니꼬프의 내적변화를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그는 마침내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죽여 이중적인 생활을 해왔던 소냐, 그리고 타인을 죽이고 자신도 죽여서 정의도 자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단절과 소외, 괴로움과 고독 속에서 딴 세상을 마치 벌을 받듯 살아왔던 라스꼴리니꼬프, 두 사람 모두에게 그 구원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주위 환경이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얼어붙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마음엔 처음으로 기쁨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남아있는 7년이란 감옥생활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고난 가운데에도 분명히 존재할 사랑과 희망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구원은 철저히 외부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책을 통해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도 양심도 돈도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과연 열매를 맺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소냐의 사랑이 차디차게 얼어붙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마음을 마침내 녹여냈던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자유를 찾았으며, 바닥에서 하늘을 맛본 자였다.


책을 덮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구원의 감격이 밀려왔다. 읽는 내내 긴장을 동반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더럽고 추한 인간의 본성에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 역시 그러한 인간이란 사실에 처절한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책 속에 나온 죄도 벌도 모두 나를 빗겨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겉으론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나도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았고, 모든 것이 인과응보대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서로 죽고 죽이는 추악한 인간의 삶 속에도, 한 줄기 구원의 서광이 비취게 되면, 동일한 환경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며, 그 동일한 환경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타락에서 구원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결말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신학서적에서도 잘 그려지지 않는 기독교적인 구원이 오히려 이런 문학 작품에서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놀라웠다.


인간은 소원을 성취하고 싶어하며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 인간만이 가진 이성은 이때 강력한 힘이 되어주지만,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성이 아무리 옳고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이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파괴하는 방향으로 쓰이게 될 땐 이성조차 죄가 된다. 살인은 명백한 죄다. '죄와 벌'은 살인이 피해자만이 아닌 살해자 역시 결국엔 살해한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보여주었다. 살인은 타자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본질적으로 이중살인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한, 조금 더 넓은 해석을 적용해보자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살인이지만, 관계를 죽이는 것도 살인이라고 볼 수 있다. 관계의 단절과 고립, 파괴를 야기하는 모든 행위가 살인에 해당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인을 저지르고 난 이후 라스꼴리니꼬프의 삶은 죽음보다 못한 죽음의 삶이었다. 그건 죄에 대한 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관계의 죽임이 죄라면 그 죽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벌이다. 이런 이유로 구원은 관계 속에 임한다. 막히고 끊어지고 파괴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소냐의 사랑이 없었다면 라스꼴리니꼬프의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라스꼴리니꼬프의 구원이 가능했던 것은 소냐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냐의 사랑을 드디어 느끼고 그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사랑해준다는 것, 이는 언제나 우리에게도 구원의 빛이 임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은 구원의 통로로써 진정한 은혜이자 선물이다. 글을 마치며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관계 속에서 사랑을 주거나 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관계는 살아있는가.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1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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