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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수업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양희송의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양희송 지음 / 복있는사람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작지만 겸손한 내러티브들의 향연.
양희송 저, '세계관 수업'을 읽고.
자신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오면서 심각한 모순이나 갈등에 부딪혔던 경험이 있다는 증거다. 세계관은 의식세계 이면에 존재하기에, 무엇이든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차원적인 세상에선 그 존재를 자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우린 숙명처럼 낯설고 불편한 세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 동안 별 문제 없었던 ‘나’만의 작은 세상에서 드디어 ‘너’와 ‘우리’, '그들'로 이루어진 큰 세상을 만나게 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뉜 채, 섞이지 않는 혼합물처럼 어쨌거나 다수와 함께 살아간다.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한 이 '다양성'이라는 무시 못할 변수를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 우린 비로소 ‘세계관’이란 실체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이러한 불가피한 충돌은 때론 한 사람의 인생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지금까지의 모든 기준이 무너져 내리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겐 아주 오래된 숙제가 마침내 풀리는 해방과 자유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자아인식'이 '나'가 아닌 타자를 만날 때에야 비로소 진행되는 것처럼, 세계관의 자각은 두 세계관의 충돌로 말미암아 시작되며, 그 충돌은 누군가에겐 두 번째 인생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의 사활은 새로운 세계를 과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옛 세계를 기꺼이 파괴할 수 있는 용기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듯,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하며, 저자도 간파했듯, 낯선 세계와의 조우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머리가 아닌 가슴, 즉 지식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길을 알려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은행의 위치를 기준으로 알려줄 수도 있고, 커피숍이나 편의점, 관공서, 아니면 특별히 크거나 화려하여 주변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잘 띄는 건물 위주로 길을 알려줄 수도 있다. 똑같은 길이라도 알려주는 사람 머리 속에 존재하는 지도 위에 어떤 건물이 표기되어 있는지에 따라 길은 다르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눈을 감고 어떤 길 위에 놓인 건물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 주위의 건물도 함께 떠올려보자. 모든 건물이 아닌 어떤 특정한 건물 몇 개만이 주로 기억이 날 것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었음에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을 발견할 때를 우린 종종 경험하지 않는가). 이러한 차이는 곧 세계관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동일한 세상을 바라보아도, 우린 모두 다른 눈으로 그것들을 인식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세계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세상과 '나', '나'와 '너'의 관계가 형성되며, 나아가 '나'의 정체성 또한 확립되기 때문이다.
우린 누구나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지금 21세기는 근대라는 시기를 지나 메타내러티브 (거대담론)가 해체되고 작은 내러티브들이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와 다양성을 이루고 있는 포스트모던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 시대다. 나는 세계관의 의미가 적어도 기독교인에게는 남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그저 많은 신 중 하나를 택하여 섬기며 나름대로의 구원을 찾는 여러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저 인간의 생활수칙이나 윤리규범 정도에 그친다면, 기독교의 유일성은, 이미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천천히 확산되고 있듯, 결국엔 퇴색되고 말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의미는 그것보단 더 크고 더 깊은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보는데, 난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때마침 '세속성자'의 저자이자 '청어람'의 대표, 양희송의 신간, '세계관 수업'을 만났다. 이 책에는 약 20년 간 쌓여온,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저자의 연구가 차곡히 담겨있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세계관이라는 주제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기본적인 개념에서부터 국내외 최근 연구결과까지 반영하여 정리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 한 권을 통하여 우린 저자의 인생이 담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통찰의 물을 마실 수 있다. 특히 나처럼 성공지향적인 가치관 (혹은 세계관)으로부터 하나님나라 중심의 가치관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며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위로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관의 개념과 이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1부 '세계관', 세계관이라는 각도에서 성경 본문의 내러티브를 해석해보는 2부 '성경', 세상살이에 상응하는 기독교 신앙의 재조정과 방향을 제안하는 3부 '현대'로 구성된 이 책은 순서에서부터 저자의 의도 (혹은 바람)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단지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개론서나 성경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는 방법서에 그치지 않는다. 대신, 현재 우리가 맞이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고 전개되어야 하는지, 실제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저자의 살아있는 호흡과 정성이 묻어있는 책이다. 어떤 철학적인 개념이나 방법을 넘어, 기독교 세계관은 실제 살아있어 기독교인과 함께 숨쉬며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는 기독교인의 눈이 되어주는 것이다.
1부에서 저자는 세계관의 개념과 이론을 간단하게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다양한 세계관을 낳는 "삶의 다양성을 대면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원초적인 태도는 겸손함"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은 이런 의미에서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자기 확신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겸손과 경청의 자세로 드러나는 관점이라고 덧붙인다. 이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자세를 가르쳐주는 듯하다. 기독교의 '원죄' 개념을 '자기애' 또는 '교만'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른 '겸손'이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결코 진리를 수호하고 퍼뜨린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교만'이 아닌,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겸손'의 관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최전선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맞닥뜨린 삶의 현장, 일상이라고 난 생각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은 '작지만 겸손한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내러티브적 접근' 방법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논한다. 이야기 형태로 세계관이 유지, 공유, 확산된다고 보는 '내러티브적 접근'은 네 가지 간단한 질문 -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를 통해 해나감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 예로 이 책의 2부는, 구약에선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 신약에선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이야기를 톰 라이트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읽고 해석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신화냐 아니냐를 떠나 창세기가 쓰여졌던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 팽배했던 세계관과의 충돌로 (특히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해석할 수 있으며, 역사적 예수의 행적 또한 유대-팔레스타인의 지배적 세계관과의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우리의 삶 또한 내러티브의 장 위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우리 자신이 속한 이야기를 제대로 갖지 못한다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또한 우린 삶의 내러티브를 어디서 구할지 묻는 것이 가장 절실한 시대적 질문이며, 이런 점에서 교회의 비극은 성경 내러티브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죽은 말씀으로 여겨지고 있을 때라고 말한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기독교가 개독교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교회가 성경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수용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성경 읽기와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인을 대량생산하듯 양산해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저자는 '성육신적 성경 읽기'를 제안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를 통하여 육신이 되었듯, 우리가 자신의 몸에 성경의 이야기를 새겨 넣고, 그것을 현장에서 살아내고자 고투하는 가운데 자기 몸에 체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간파한대로, 성경의 말씀이 살아서 성도들의 삶에 실제로 적용되는 것을 보기 전까지 결코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 삶의 내러티브를 일차적으로 성경에서 구하고, 각자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간직한 채 각자의 내러티브의 창의적 재현과 변형과 복귀로 표현되어지는 삶을 지향할 때 기독교 세계관은 비로소 그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기독교 세계관은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합 가능할까? 3부에서는 이러한 부분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비를 통하여 장단점을 살펴보며 기독교 세계관의 위치와 방향을 논한다. 저자는 개성이 강조되는 작은 내러티브들이 들려지는 이 시대에 필요한 기독교 세계관 논의는 새로운 문법과 언어로 예수의 이야기를 써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옛 관점과 해석에 갇히지 말고 성경을 다시 읽고 예수를 다시 이해하려고 할 때,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면모가 부각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신론과 유신론 같은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그 관점이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결과물처럼 그저 가장 강력한 거대담론으로 자리매김하여 사람들에게 강제성을 부여하는 역할만을 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은 오히려 흐려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독교인들이 일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며 만들어내는, 작지만 겸손한 내러티브들이 이곳 저곳에서 꽃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필요한 기독교 세계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도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면서 단지 착하게 살라거나 서로 사랑하라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표층적인 메시지 ('메시지'라 쓰고 '메아리'라고 읽는다)에 머물지 않고, 한 사람의 세계관을 재건할 수 있는 심층적인 메시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어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born again (거듭남)’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3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