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죄 -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올바른’ 믿음보다 신뢰를 원하는가?
피터 엔즈 지음, 이지혜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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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환대하기.


피터 엔즈 저, '확신의 죄'를 읽고.


의심은 예고도 없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간다. 사소하고 우연한 일상의 조각들도 모두 의심의 통로가 될 수 있기에, 우린 달갑지 않고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한 이 손님의 방문을 결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의심은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이다.


이 방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주무시지도 않고 성실하신 의심님의 공격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급이 차단된 채 안에서 곪거나 굶어서 자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불청객을 오히려 환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은 무너지는 것이 결국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버티는 동안은 자신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믿음의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전사로서 명예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끝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처절한 인지부조화와 복합적인 합리화로 가득 찬 위선적인 자기기만, 그리고 파멸이다. 이 결말은 이 책의 저자, 피터 엔즈가 정의하는 '확신의 죄'의 열매가 아닐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교회 목사의 진공 포장된 설교와는 너무도 다른 현실세계를 경험하면서 의심의 순간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반석과도 같았던 안전지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크레바스 바로 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의심의 씨가 우리 마음 밭에 싹을 틔우고 속수무책으로 자라나면서 그 동안 믿어왔고 확신해왔던 세계는 소리 없이 은밀히 함몰되기 시작하고, 이는 곧 내면세계의 비가역적 붕괴를 가져온다. 이 부분에서 피터 엔즈는 말한다. 퓨즈가 끊어지고 믿음이 멈추는, 이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순간들을 통과하도록 묵묵히 인도하신다고. 아멘. 그렇다. 의심은 신앙생활의 적이 아니라 주요 요소이며, 의심과 신뢰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비로소 예수를 닮는 삶을 현실에서 일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믿음과 의심, 그리고 알고자 하지 않는 지혜로움에 대한 책이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의 시작이요 과정이자 끝"이라고 한다. 그는 확신을 추구하고 고수하는 신앙생활의 위험을 간파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믿음은 올바른 생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역설하는데, 그는 이를 '확신의 죄'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태도가 '죄'인 이유는, 우리가 확신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실재이신 하나님을 지적인 영역에만 가두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우상 숭배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지에 대해선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불청객, 의심을 환대하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부분이라 쓰고 '모든'이라 읽는다)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신앙을 가지게 된 건 사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직관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이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어 회심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단 하나라도 존재했었다면, 그 많은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들은 모두 퇴색되어 버렸을 것이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며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연습을 하는 우리들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신비’ 이외에 적당한 단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신비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자 예수를 닮는 삶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내는 과정 또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뢰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이성이 우리를 배신해도 그대로 남아있는 신뢰. 그것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확신에만 가득 찬 믿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확신에 찬 신앙, 앞뒤가 딱딱 떨어지는 깔끔한 신앙,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은 우리 자아에게 모든 통제권을 재부여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역했던 죄인의 옛자아가 적절히 타협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타인들에게 가치를 두지 않는 나르시시즘으로 살아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유있고 인자하며 친절한, 모든 일상이 그저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신앙인들은 스스로 회심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만큼 비겁하거나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책에서 예로 드는 것처럼, 시편과 전도서, 그리고 욥기에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어쩌면 당돌하고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 구약 기자들의 솔직한 고백들이 많이 담겨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무사안일, 안빈낙도는 기도제목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구약 기자들이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나서도 결국엔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을 볼 때,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피터 엔즈가 말한 것처럼 “어쨌거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신뢰하는 삶이란 흔들리지 않는 독단적 확신을 넘어서 우리 삶에 지속되는 신비와 불확실성을 정상적인 신앙의 일부로 포용하여, 확신이 사라졌을 때에도 확실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하며, 우리의 이성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함으로 우리의 통제권을 일체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한 신뢰는 우리의 지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길들일 것이고, 의심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은 하나님이 보내신 신성한 손님이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9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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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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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백치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읽고.

‘백치’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한영사전에선 ‘(informal) idiot, (offensive) moron, (offensive) imbecile’로 설명되어있다. 즉, ‘백치’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만약 누구든지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충분히 모욕적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설사 실제로 뇌에 의학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의학용어가 아니기에, 결코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는 단어인 셈이다.

‘죄와 벌’에 이어 이번에 읽은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소설 중 두 번째로 쓰여진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제목이 ‘백치’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찾아본 나로선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왜 그는 굳이 이런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했을까? (러시아어로 된 원제목 역시 같다)

그의 첫 장편소설인 ‘죄와 벌’의 경우, 책을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한 뒤에야 ‘죄’와 ‘벌’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말해 제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심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가 소설 전체에 깔려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많았다. 

반면, 이 책 ‘백치’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설의 초반부터 백치가 누구인지 공공연하게 드러나있을 뿐더러, 그 설정은, 다분히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새어버려 읽다가 자칫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책의 중간부분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심지어 반전 하나 없이 소설의 끝까지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치’가‘ 죄와 벌’보다 약 200페이지 더 길다.)

자정이 넘은 밤,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 숫자인 943 고지를 탈환한 뒤 책을 덮고, 나는 상하권 각각이 약 500페이지가 되는 묵직한 두 권의 책을 책상 위에 쌓아보았다. 한 손에 잡히지가 않는 이 두꺼운 책을 약 2주에 걸쳐 짬 날 때마다 읽어왔다. 무언가 해냈다는 약간의 뿌듯함도 느끼며, 모두 잠든 캄캄한 밤, 홀로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도스토예프스키는 1,000페이지에 달하고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이 장편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에서 ‘백치’로 설정된 주인공의 이름은 레프 니꼴라예비치 미쉬낀. 그는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서, 나이 스물 일곱의 젊은 공작이다. 그가 백치라고 불리는 상황은 내가 사전적 정의로부터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모욕적이진 않아 보였다. 공작 스스로도 그 사실을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간질병을 어릴 적부터 앓아왔다. 언제든 발작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 그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훌륭한 귀족이 공작을 돌봐주기 시작하면서 그는 간질병으로 인해 얻은 백치라는 딱지에서 조금씩 해방 받게 된다. 그는 최근 약 3년간 스위스에서 요양 겸 치료를 받다가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재정을 지원해줬던 귀족이 죽었기 때문이다), 반강제적으로 러시아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이 소설은 그가 러시아로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시작된다.

이 ‘기차 안’이라는 공간은 소설의 도입부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빠르펜 세묘노비치 로고진’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로고진은 공작과 같은 연령대였으나, 상인 집안 출신으로서 신분이나 교양, 혹은 배운 지식으로는 미쉬낀 공작과 비할 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 사는 눈치 만큼은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빨랐으며, 어떠한 일도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청년이었고, 게다가 곧 막대한 돈을 상속 받을 예정이었다. 

남들 앞에서 내세워 보일 만한 건, 비록 몰락했지만, 그나마 귀족 출신이라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미쉬낀 공작과, 믿을 건 돈 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 같고 실제로 돈의 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살아가는 인간 로고진과의 대비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책에서 의도한 중요한 설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설정이 비록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할지라도, 이건 표면적이라고 봐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그러한 대비 이면에 더욱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신분이나 돈의 유무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차이는 다름 아닌, 공작이 로고진과는 달리 ‘백치’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로고진이라는, 즉 공작과 대비되는 인물을 통해 '백치'에 씌어진 부정적인 의미를 해체하고, 대신 순수한 인간성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과정을 통해 '백치'의 역설적인 승화를 이루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공작이 가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 그 때묻지 않은 감성과 지성. 비록 바보처럼 어수룩하게 보여, 소위 시대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경우'에 맞지 않는 말과 생각, 행동을 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상하다는 시선도 곧잘 받지만, 결국 사람들은 공작에게 찾아와 진심을 털어놓고 고민을 얘기하며, 공작이 사실은 전혀 백치가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임을 마음 속 깊이서부터 인정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 책을 읽고 어른들 (소위 상류계층의 사람들이나 지식인들을 모두 포함)의 지혜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다시 물어본다. 세상의 지혜는 그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나 온갖 미디어를 통하여 몇 수 앞을 내다보라고, 그래야만 남을 밟고 설 수 있다고 우리들을 부추긴다. 그러나 그 듣기 좋은 말들의 향연도 모두 이 세상이 피라미드 경쟁체제라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살아남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다. 내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시스템.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자가 과연 가장 강하거나 가장 지혜로운 자일까. 사람이 아프면 그것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거나 아무 계산 없이 도와주려는 마음이 고작 유아적인 행동으로 치부되고 말아야만 하는 것일까. 철저한 이해타산적인 계산을 진행하여 나 이외의 모든 타자를 내가 중심인 체스판 위에 올려놓고 넘어서거나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또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면서 은밀하게 타자를 속여서 이윤을 얻어내는 것이 과연 지혜자의 모습일까. 과연 시대의 '어르신'들이 공들여 쌓아놓은 'norm'에 따라, 그것의 도덕적 가치나 정의로움을 따져보지도 않고, 맞춰 살아가는, 소위 '처세술'이 지혜의 다른 이름일까. 만약 그것이 지혜라면, 어찌 지혜의 열매가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며 살인까지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행위를 낳는단 말인가. 그래 놓고도 과연 그것이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참지혜란 피라미드라는 사탄의 체제를 해체하고, 모함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며 나와 타자의 수직적인 위계를 무너뜨리는 나라에 있지 않을까. 

이 시대에, 시대가 정의하고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겐 참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는 지혜롭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보 같다고 무시 받고 천대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책의 '백치'처럼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로고진은 결국 '나스따시아 필리뽀브나 바라쉬꼬바'를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살인자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징역을 가게 된다. 주어진 로고진의 캐릭터를 고려할 때 그리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뜻밖인 첫 번째 사건은 공작이 살인자인 로고진을 나무라지도 않고 죽은 몸이 된 나스따시아와 함께 로고진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었다. 두 번째는 공작이 다시 백치가 되어 스위스로 보내지게 되는 부분이었다. 그는 스위스로 보내지기 훨씬 이전 상태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다시 스위스에서 공작의 치료를 맡은 슈나이더 교수는 공작의 지능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넌지시 알리기까지 했다.

첫 번째 사건은 공작의 순수함으로 설명이 대충 가능하다. 무리가 좀 있지만, 살인자까지도 품는 마음으로 해석도 가능하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어린애처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냥 얼어버렸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은 내게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참지혜로 대변되는 백치가 결국엔 참지혜인 척하며 지혜의 자리에 앉은 어른들의 norm에 의해 결국엔 꺾여버린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작은 예빤친 장군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주위 사람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었겠지만, 결국 공작은 희생당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백치가 모든 사람에게 전염이 되어 norm을 해체하길 바랐던 나의 소망은 굳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예수가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이나,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죽지 않고 뛰어내려 결정적인 순간에 상황을 단번에 전복시키길 기대했던 사람들의 바람과 한낱 같은 맥락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진행시키다 보니, 처음에 내가 물었던 질문, "왜 저자는 백치라는 제목을 사용했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래서 난 다시 묻는다. 과연 누가 백치였던가. 등장인물 소개에서도 버젓이 미쉬낀 공작이 백치라고 나와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저자 도스토예프스키가 파놓은 함정이 아니었을까. 공작이 아닌 나머지 모든 사람이 바로 진짜 백치 아니었을까. 

인간 심리를 철학자나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들보다도 더 세밀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소설에 모두 녹여낸 도스토예프스키. 그 유명한 철학자 니체도 그를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고 고백하지 않았었던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을 좀 더 알아간다. 어떻게 인간 심리를 문학 작품에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그의 작품 중 읽을 책이 읽은 책보다 아직 훨씬 많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기대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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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의 기도 - 개정판
김영봉 지음 / IVP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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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 사귐이 있는가?

김영봉 저, '사귐의 기도'를 읽으며.

몇 달이나 꽂혀 있었을까. 며칠 전, 새롭게 읽을 책을 하나 고르려고 뻔한 내 책장을 찬찬히 훑는 순간, 이상하게도 내 눈은 김영봉 목사의 ‘사귐의 기도’에서 멈췄다. 예전에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이후 책장에 꽂아두고 한 번도 끄집어낸 적이 없던 책이었다. 항상 다른 책에 우선순위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나로선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던 경험이라, 책을 꺼내어 앞부분을 들춰보다가 순식간에 수십 페이지를 읽고 나서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잠시 책을 덮고 조용히 묵상하며 나의 내면세계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되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었을 무렵, 고질적으로 영과 육을 나누는, 공식화된 이분법에서 점점 벗어나면서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의 책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사적인 복음의 충만함이 결코 공적인 복음으로 자연스레 넘쳐 흐른다거나, 누적포인트 전환하듯 바꿀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신앙의 본질이자 전부라고 여겼던 '개인 영성'을 위한 책들과는 부지 중에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책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가진 복음이 오로지 개인적인 경건함과 성숙함만을 향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함몰되어, 내가 아닌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타자들을 돌아보는 눈을 다시 잃게 될까 두려웠고, 개인 간의 거짓과 위선이 아닌 구조적인 불의와 악습 같은 것들로부터 저항하는 마음 보다는 그저 참고 견뎌내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듯한 삶을 또 다시 맹목적으로 살아갈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것이다.

24시간 예수 바라보기로 대표되는 개인 영성을 강조하다 보면, 희생자의 희생과 견뎌낸 자의 수고함을 치하하고 박수를 보내는 일에는 게으르지 않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희생하고 견뎌내는 자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와 응원도 아끼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진 너무나 좋다. 그러나 그러한 불필요한 희생과 견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놓치기 쉽다는 점이 간과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체제로 발현하는 사탄의 모습을 대적하기는 커녕 용인해주는 꼴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사탄은 "영적"인 존재에 국한되어야 할뿐, 가시적인 체제로 드러나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한 신앙은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적극적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인 사회 참여 자체를 불경하게 여긴다거나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여기는 경향까지도 갖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개인은 피해자나 희생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어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시스템, 즉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인 부조리를 인정하고 합리화시켜 버리는 역할까지도 충실히 해낸다 (비록 뜻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오로지 개인의 평안을 더 도모하고 의지를 더 굳건하게 만들어서, 어쨌거나 그 역경을 견뎌내도록 개인을 유도한다. 또한, 세상은 장망성이기 때문에 그저 그런 시련 속에서 꾸준히 경건함과 성숙함을 도모하여 죽기까지 지속할 것을 가장 큰 사명이자 신앙의 유일한 지향점이라고 판단하도록 간접적으로 조장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으로부터 그렇게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구조를 인정하고 아무런 저항이나 참여를 거부하면서 개인의 영적 상태만을 돌보는 행위가 과연 신앙인의 참된 모습일까? 거짓과 불의에 분노하거나 저항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참고 견대내면서도 묵묵히 바보처럼 착하고 바르게 살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과연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일까? 과연 그 모습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원하시고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습일까?

머리가 커지면서 여전히 개인 경건과 성숙에 함몰되어 있는 목사들의 설교를 언젠가부터 더 이상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교만한 자로 낙인 찍고 속으로는 온갖 정죄를 단행하면서도, 겉으론 마치 사려 깊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곤 했다.

유전자의 기능을 생체 내에서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특정한 유전자를 제거해보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물처럼 공기처럼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나보면 그 공간이 가진 편협함과 가식과 위선으로 오염된 모습과 더불어 조금은 더 객관적인 위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안에서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고 거기에 맞는 설교를 공급받으며 살아갈 땐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순수함은 배타적인 분리의 칼이 되었고, 그들의 열심은 더 큰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게 막는 눈가리개가 되어주었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 칼과 눈가리개로 훌륭하게 무장한 인간이 사실 작금의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왔던 주된 세력의 실체 아닌가. 어쩌면 개독교라는 말을 잉태한 산모 역할을 담당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즉 개인 영성으로의 치우침은 초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하나님나라의 모습과는 (믿지 않는 자들이 봐도 충분히 알 만큼) 거리가 멀어지도록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개인 영성 훈련 관련 책들을 멀리하게 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정치학적인 인간사회라는 현장과는 무관한, 마치 진공 속과도 같은 공간에서만 이뤄질 것 같은 가르침들을 계속 그런 책들을 통해 공급받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르침들과 내가 일상으로 살아내는 현실과의 간극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고, 그 괴리감은 이내 내게 죄책감으로 작용했으며, 그 죄책감을 나는 또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부족해서 그렇구나.'라는 말로 어떻게든 이해하고 합리화하려는 나의 몸부림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약의 희년법은 사적인 복음보다는 복음의 공공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난이 되물림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법을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큰 두 기둥인 정의 (미슈파트)와 공의 (쩨다카)를 근간으로 하여,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헤세드)의 실현이 바로 희년법의 의미 아니었던가. 예수의 핵심 사상 역시 '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님나라'라고 나는 믿는다. 구약이 그저 배경이 되는 신약이 아닌, 구약을 전제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더 크고 풍성하며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하나님말씀이 바로 성경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 24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하는 데에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언제나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한 법. 24시간, 아니 25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한다고 해서 희년법과 같은 하나님나라의 법이 아름답게 표현된 실체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복음의 공공성을 함께 모여 추구하는 것이 타당한 수순 아니겠는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진행되고, 다시 난 책을 폈다. 그리고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또 다른 내 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공적 복음의 중요성을 외치는 것까진 좋지만, 내가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똑바른가 하는 질문. 억압받는 타자에게 자유가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들이 바라는 무수히 다양한 것들을 어떻게든 성취가 되게 해주려고 도와주는 일이 과연 복음의 전부인가 하는 질문. 아무래도 사회정의 실현과 약자들을 돕는 일 쪽으로 알아가다 보면, 삶이 무미건조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삶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고, 해서 뭐하나 하는 체념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게 인생이려니 하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인이 되어간다. 예수는 서서히 증발되고 예수가 했을법한 행위들만 남아 복음을 실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억압된 자가 해방되고, 가난한 자가 구제 받는 등의 일들이 일어날 땐 보람과 희열도 느끼지만, 그것 역시 여전히 억압받고 소외 당한 무수히 많은 약자들을 생각할 때면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그러면 감사와 기쁨은 순식간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내 삶을 다 바쳐도 구제하지 못할 약자들의 부르짖음 소리에 눌리고 만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이 아닌 예수의 공생애 기간 때의 행적들을 좇아 일상에서 실천하며 살아내려는 초기의 의도와는 달리, 그 끝은 여느 인간 지혜자가 도달하는 최종결론처럼 '삶의 무의미함'이 되어버린다.

우익의 복음에 천착한 삶에서 염증을 느꼈지만, 좌익의 복음에 길들여지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몸부림에서는 허무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결국 그 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을까. 예수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존재 자체가 나와 함께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하나님과의 사귐이 내게 있는가. 그것으로 나는 기뻐하는가. 감사해 하는가. 혹시 그것 없이 내가 참여하고 도운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함으로만 나의 훈장을 하나씩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썩어질 면류관을 난 사모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예수의 사상과 행적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명분 하에 결국 내가 했던 건 예수를 증발시키고 나의 행위만을 남기는 짓을 하진 않았을까.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계된 모든 질문의 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거룩한 시간과 공간. 그래서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웃을 향한 사랑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는가.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이 책을 가능한 천천히 읽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의 내용보다는 이러한 질문으로 묵상하며 성찰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좌우에 치우친 복음이 아닌 하나님나라 복음.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지만, 언제나 이런 점검을 하며 앞길을 내디딜 수 있기를.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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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는 바울 - 바울의 역사와 유산에 관한 소고
존 M. G. 바클레이 지음, 김도현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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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이해하기에 좋은 길잡이.


존 M. G. 바클레이 저, '단숨에 읽는 바울'을 읽고.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사탕을 준다고 해서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네 식구였던 우리 집은 전세에 단칸방이었다. 사탕 같은 간식은 내겐 아주 귀했다.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난 그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친구는 얼마 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대로 교회 다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가문에서 처음으로 소위 '예수쟁이'가 탄생한 것이었다. 동시에 내겐, 이젠 30년이 넘는, 하나님을 향한 굴곡진 여정의 시작이었다. 사탕 하나로 이 기나긴 여정이 시작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내가 다니던 교회 (예장 합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선 성경 퀴즈대회를 자주 했었다. 학교에선 주관식 수학 문제의 답이 대개 '0' 아니면 '1'이었듯, 교회에서 치러진 주관식 성경퀴즈의 답은 십중팔구 '하나님' 아니면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그 범접할 수 없는 이름에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올렸던 이름이 있었으니, 구약에선 '다윗', 신약에선 단연 '바울'이었다.


어릴 적 내가 알던 바울에 대한 지식은 아주 단편적이었다. 신약에서 편지를 가장 많이 쓴 사람, 사도행전의 주인공 (?),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사울'에서 이름이 바뀌었던 (?) 사람. 이제는 이런저런 공부로 인해 이러한 지식이 부정확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땐 혼자 따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서 주워들은 지식이 전부였던 터라, 나의 성경 지식은 그 당시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들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내가 알던 바울은 그 정도가 다였다.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단편적이기만 했던 지식의 파편들. 이성적인 이해를 거치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시도하면 불경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냥 무턱대고 믿으라고 강요 받았고, 오히려 그것이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고 배웠던 그 시절. 이는 아마 그 당시 한국 기독교 신앙의 단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씁쓸함이 남는다.


바울을 더 정확하고 더 깊게 알고 싶었던 건 솔직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믿었던 나의 기독교 신앙은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서른 후반 즈음에서야 힘겹게 맞이한 가치관의 변화 시기에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어 나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를 지나오며 난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순 없겠지만, 이러한 방법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충분히 인생을 다시 보게 만들고 제대로 살아내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성의 영역이 인간이란 존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것은 그 빙산의 일각이라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회개나 거듭남, 그리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하여 마침내 얻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역시 이 빙산의 일각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정확한 지식은 하나님나라와 예수의 복음을 더욱 풍성히 알고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제목부터가 맘에 쏙 들었다. '단숨에 읽는 바울'. 그렇잖아도 이철규 원장님이 작년 엘에이 방문하시며 쓱 건네주셨던 '하나님의 비밀' (그레고리 K. 비일, 벤저민 L.. 글래드 공저, 새물결플러스 출판)도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고, 예전에 큰 맘먹고 구매했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저, IVP 출판)도 마찬가지 상태라, 난 이 두 책을 책장에서 볼 때마다 뭔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약 150 페이지의 짧은 이 책으로 이제 겨우 그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두 책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처럼 신학적인 전문지식이 전무한 사람에게 이 책은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바울을 감히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바울의 '역사'와 바울의 '유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울을 읽어나간다. 1부 '역사'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바울의 위치와 의미를 읽어낸 뒤, 바울의 편지들과 그것들이 가지는 역사적 정황들을 살펴본다. 이어서 자신을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으로 소개하는 바울과, 유대 전통에 비쳐진 그의 모습을 읽어낸 이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로마 제국에서 가졌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묘사한 이미지와 사람들에게 인식된 이미지들을 비교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바울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울이 유대인이었고 지성인이었으며, 돈을 버는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다메섹에서 그가 계시라고 부르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되었고, 예수가 정말 주님이라는 확신을 얻은 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으며, 그 사건을 통해 바울은 그의 삶과 그의 충성심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는 삶의 대전환을 경험했다는 것도 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남긴 유산의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남긴 유산은 무수히 다양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장들을 낳았다는 사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만이 아니라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아는 바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이러한 단편적인 바울에 대한 지식은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학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바울 신학의 다양한 해석이었다. 작년 권연경 교수님께서 참석해주셨던 독서모임에서 '로마서 산책'과 '행위 없는 구원?'을 함께 읽고 직접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끝내 말끔히 풀리지 않았던 부분은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학 문제처럼 문제가 하나 있으면 하나의 답이 존재할 거라는, 다분히 단순 무식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기독교 신학을 무분별하게 접하고 있던 시기라, 내게 있어 '해석'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또 하나의 낯선 세상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2부 '유산'에서 저자는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연구했던 여러 신학자들의 해석으로부터 바울의 유산을 찾아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와 칼뱅의 사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니체를 비롯한 다수의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왔는지 저자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준다. 


책을 읽고, 바울처럼 파다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쟁을 몰고 다닐 인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사실 바울이 직접 썼다고 인정되는 일곱 편의 서신 (더 많은 서신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 이상 일곱 편의 편지를 통해서만 바울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에서도 그는 상반되거나 모호한, 어쩌면 이중적일지도 모르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게다가 바울이 쓴 것은 신학 전문서적이 아니라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떤 특정 대상을 향해 쓴 편지이기에, 이 편지만을 가지고 바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바울 서신의 저작설에 관한 다툼도 꾸준히 있어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강조하듯, 신학의  문외한인 내게도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고 익히 알려졌던 바울의 사상을 확고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고 그것을 찾으려는 방식보단, 각 시대와 정황에 흐르는 맥락에 합당하게 본문과 꾸준히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능성을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탐색하는 방식이 더 올바를 것이다. 바울이 끼친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지만, 바울 역시 예수의 복음을 해석한 사람이며,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살아낸 사람이기에, 그의 사상이 성경을 읽는 하나의 눈을 열어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복음이거나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늘 염두해야 할 것이다. 


다시금 바울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도 아닐 뿐더러, 율법을 지키기는 커녕 율법을 다 알지도 못하는, 일개 이방인에 불과한 나에게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역할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를 박해했던 그도 부르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인간의 자격이나 가치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이 왜 비유대인들의 세계로 퍼져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여전히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이지만, 그의 소명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야훼의 종의 사명처럼 분명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열방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열방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어지는 거대한 선상에 나의 작은 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감사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5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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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뿌리
한나 앤더슨 지음, 김지호 옮김 / 도서출판100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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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뿌리.


한나 앤더슨 저, '겸손한 뿌리'를 읽고.


하나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을 닮고, 또 닮으려고 노력하며, 실제로 닮아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과정에 죄가 개입했다는 사실도 우린 익히 알고 있다. 인간의 타락이 묘사된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인간은 뱀의 거짓말에 마음이 동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긴다. 모든 짐승 중 가장 간교한 뱀은 선악과만 따먹으면 인간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뱀 덕분에, 자신은 피조물이면서도 조물주와 같아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하나님을 닮는 정도가 아니라 같아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은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소위 '원죄' 이야기다.


죄가 '자기애'라는 정의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해석이 아닐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자기애는 곧 교만, 그리고 자기중심적 세계관과도 직결된다. 타자를 배제하는 마음과 행동, '남'을 죽여서라도 '나'를 살리려는 의지와 실천, 타인을 그저 자기 주위에 존재하는 도우미 아니면 훼방꾼으로 제멋대로 판단하고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등은 모두 자기애,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발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과 반대되는 개념인 '겸손'이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클 수밖에 없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말 안에도 이미 겸손이 전제가 된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넘어서 '남'을 향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요약은 저자가 서문에서 우스갯소리로 한 말처럼, 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는 하나님이 아니야." 그렇다. 이는 내가 서두부터 창세기 3장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 닮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한 인간의 도약. 원죄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곧 겸손과 교만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겸손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도록 지어졌으나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의 제목, '겸손한 뿌리'의 속뜻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던 근원으로 올라가야 그와 반대되는 겸손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책의 저자는 버지니아 산골에서 사역하는 한 목사의 아내이자, 남편의 목회를 돕는 사모, 그리고 세 자녀의 엄마인 '한나 앤더슨'이다. 처음 만나는 그녀의 글에서 나는 어떤 편안한 끌림을 느꼈다. 잔잔한 에세이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주로 그녀의 원예 이야기를 통해 얻은 겸손함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다. 그녀가 밝히는 이 책의 목표는 '불안과 동요 가운데 교만이 스스로 드러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겸손이 스트레스와 성과와 경쟁이 반복되는 굴레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녀는 이 책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의 성공과 인정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요구한다. 자신의 한계와 맞서 싸우기를 요구한다. 열정과 노력이면 누구든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하는 자기계발에 관계된 책이나 강연은 또 이 세상에 얼마나 허다한가. 그러나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살면서, 심지어 경쟁에서 이겨 승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조차도 마음 속에는 걱정과 두려움을 대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난 생각한다. 한계를 뛰어넘으면 해결될 것 같고, 좀 더 높이 오르면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한계를 뛰어넘으면 또 다른 한계를 마주하며, 좀 더 높이 오르는 일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높은 자리가 우리를 유혹하는 법이다. 교만한 존재에게 만족과 평안은 없다. 그들에게 사랑이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상살이에 환멸을 느끼고 종교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세상 모든 염려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하여 세상을 등지기도 한다 (기독교인 중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여전히 이분법적인 사고체계에 갇힌 채 피의 피라미드를 끊임없이 오르는 자들에 대한 반동적인 세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잠시 세상을 떠난 듯해 보일 때조차도 어떡하면 더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으로 그 반동적인 세상에서 승자가 될지 고민한다. 그곳에서도 피라미드를 구축하기에 발 빠른 것이다. 저자 또한 이러한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박함을 추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겸손한 사람이 된다거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소박함이 모두 우리의 교만과 자기의존을 숨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인다. "겸손해지려는 시도조차도 빠른 시간 내에 교만에 물들 수 있다." 즉, 겸손이란 결국 어떤 인간의 행위로 표현되어지지만, 그 행위 자체가 겸손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겸손의 뿌리가 중요한 이유다. 겸손한 뿌리는 역시 하나님과 인간 존재의 경계와 위치를 정확히 아는 지혜와 그 지혜에 따른 순종에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겸손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이야기해준다. 영혼 없는 '좋은 말 대잔치'처럼 그저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는 덕담이나 지침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어떤 큰 사건 (이를테면 세상의 큰 성공이나 큰 실패)을 겪고 나서 크게 깨달은 폭풍과도 같은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그녀의 깊은 묵상과 함께 길어낸 지혜의 말들이다. 거짓 겸손의 여러 모습을 예리하게 간파하면서도 그녀는 그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묵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어느새 높아진 자아의 위상을 다시 겸손하게 낮추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잔잔한 그녀의 필체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엄마의 손길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 속 교만까지도 수치심을 이겨내고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리라 생각한다. 세상살이와 인간관계, 교만과 겸손, 그리고 그것들이 뿌리 박고 있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3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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