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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특별 기념판 ㅣ 탕자의 귀향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6년 11월
평점 :
아버지가 되는 여정.
헨리 나우웬 저, '탕자의 귀향'을 읽고.
나이 마흔이 넘어 뒤늦게 헨리 나우웬을 만났습니다. 내게 다가온 그는 풍성하면서도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진솔하고 가감없이 드러내는 내면의 연약한 부분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을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거짓없이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수려한 필체에 빨려들어가면서도 그의 글을 읽고나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비단 그의 진솔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그의 진솔함에 예의를 갖춰 저 역시 진솔함으로 화답하면서 제 안의 난잡한 자기애와 쫓기는듯한 무질서한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쉼이 필요했던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 진솔함보다는, 돌아온 탕자인 작은 아들과, 비록 집은 나가지 않았지만 역시나 집으로 돌아와야 할 큰 아들을 넘어, 두 아들을 똑같이 사랑으로 대하며 언제나 기꺼이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되고자 마침내 마음을 다잡는 그의 의지가 저를 숙연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 역시 위로받고 사랑받는 아들의 입장을 넘어 위로를 베풀고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가 되고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란 어쩌면 아들보다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헨리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교수이자 영성가로서 고된 일정을 소화해내야 했던 시절, 그는 그 그림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리고 그만 그 작품 속의 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말지요. 돌아온 탕자가 지난날 자신의 모습과 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비록 풍성한 의미가 가득했던 일들을 해내왔지만, 터무니없이 분주한 일상을 살아내야 했고, 그러면서 내면적으론 은밀하게 갈급함이 조금씩 쌓여갔던 것입니다. 그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영혼의 안식을 얻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동료 덕에 러시아를 방문하게 됩니다. 거기엔 약 3년 전 자신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그 렘브란트 작품의 원본이 전시되고 있는 예르미타시 미술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윽고 그 작품을 직접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때, 그는 자신을 가득 채워왔던 내밀한 마음의 갈망을 충족시키게 됩니다. 책에서 그는 그곳에 간 것이 진정한 귀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기록할 만큼 그림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 자리를 내놓고, 지적 장애인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공동체 '라르쉬' ('방주'라는 의미)의 토론토 지점, '데이브레이크'에서 어색하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나서도 그는 늘 그 그림과 함께 했습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이 전해주신 이야기를 렘브란트가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한 장으로부터 헨리 나우웬은 깊은 통찰을 이끌어냅니다. 그 통찰은 복음의 정수가 집약되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오랜 시간 그 그림과 함께 했던 그만의 깊고도 깊은 묵상으로 말미암은 것이겠지요. 덕분에 저와 같은 독자는 이 책을 마주함으로써 그가 파놓은 깊은 우물에서 손쉽게 지혜를 길어다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의 소재가 되어준 렘브란트의 작품은 그의 삶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그려졌다고 합니다. 갖은 굴곡을 거치며 살아낸 삶의 종착역에서 그가 붓으로 담아낸 그 그림은 무르익은 인생의 원숙함이 그대로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수년에 걸쳐 이 그림과 함께 하며 렘브란트의 삶을 흡수했으며 그가 그린 그림 속의 주요 인물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흡수합니다. 책의 구조는 이러한 순서를 따르고 있지요. 그의 영적인 여정의 순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집을 나갔다 마침내 돌아온 작은 아들이 되는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마도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회심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즉 자기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집을 멀리 떠난 죄인의 모습과 같은 위치에 놓는 깨달음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것일 테니까요. 저 역시 렘브란트의 그림이나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저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항상 작은 아들의 위치에 대입시키곤 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것이 가장 편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회심기를 이야기할 때면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었는지 얼마나 악했었는지 얼마나 자기밖에 몰랐었던지를 언급하며 낮아진 자존감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하지요. 그러나 그 깊은 은혜와 사랑으로 아버지께 받아들여졌음을 감사하기만 하고 거기서 멈춘다면 그 삶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 티켓을 얻은 것에 있지 않고 실제로 삶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는데 방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헨리 나우웬은 큰 아들과 자신이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사실을 우연찮게 발견하게 됩니다. 허랑방탕한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전통을 지키며 집을 지키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마치 작은 아들인 것처럼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질투와 분노, 과민하고 완고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을 간직한 채 살아온, 삶의 한 꺼풀 아래에 고스란히 존재했던 큰 아들의 모습을 자신의 삶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큰 아들로 발전할 가능성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처음엔 은혜에 감격하며 경건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이 지속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감사와 은혜로 시작한 경건이 사적인 유익이나 안위만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기 일쑤이지요. 어느덧 작은 아들은 꼿꼿하게 서서 자신의 자리를 크게 확보하려고 애쓰는 큰 아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아들은 큰 아들의 산을 넘어야 하는 숙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헨리 나우웬이 이른 곳은 바로 아버지가 되는 여정입니다. 마흔을 넘기도록 이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설교나 여타 글에서 수십 번은 접했을 겁니다. 그러나 저자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아버지가 되라는 부르심을 인지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가 묵상하고 써놓은 이 책을 읽다보니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받아들여지길 바라거나 받는 입장을 넘어 주기를 늘 기쁘게 고대하며 준비되어있고 또 실제로 줄 수 있는 입장으로의 발전과정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성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을 넘어 일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넘어 아버지가 되는 여정과 같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구체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은 받는 입장만 고수해선 불가능하겠지요. 기꺼이 주려는 마음은 곧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사랑받기만 하려는 태도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회심하여 낮아진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기를 거쳐 그것이 교만과 위선으로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있으면서, 비록 많이 가지지 않았지만 서로 나누며 약한 자들을 도우며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영적인 여정 어딘가에 위치해있는 것이지요.
제 안엔 여전히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자존감을 자랑으로 여기는 모순적인 겸양을 보여주길 아직도 종종 즐기며, 제 눈에 비쳐진 상대적으로 방탕한 이들을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감출 수 없을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이제 헨리 나우웬 덕분에 많은 것들이 정리되는 기분입니다. 방향이 조금 더 뚜렷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되어가는 길에 위치해있는 저 자신을 봅니다. 조금 더 성숙한 신앙인이, 믿음을 행동으로 번역하며 일상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7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