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향 특별 기념판 탕자의 귀향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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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되는 여정.


헨리 나우웬 저, '탕자의 귀향'을 읽고.


나이 마흔이 넘어 뒤늦게 헨리 나우웬을 만났습니다. 내게 다가온 그는 풍성하면서도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진솔하고 가감없이 드러내는 내면의 연약한 부분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을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거짓없이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수려한 필체에 빨려들어가면서도 그의 글을 읽고나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비단 그의 진솔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그의 진솔함에 예의를 갖춰 저 역시 진솔함으로 화답하면서 제 안의 난잡한 자기애와 쫓기는듯한 무질서한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쉼이 필요했던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 진솔함보다는, 돌아온 탕자인 작은 아들과, 비록 집은 나가지 않았지만 역시나 집으로 돌아와야 할 큰 아들을 넘어, 두 아들을 똑같이 사랑으로 대하며 언제나 기꺼이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되고자 마침내 마음을 다잡는 그의 의지가 저를 숙연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 역시 위로받고 사랑받는 아들의 입장을 넘어 위로를 베풀고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가 되고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란 어쩌면 아들보다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헨리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교수이자 영성가로서 고된 일정을 소화해내야 했던 시절, 그는 그 그림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리고 그만 그 작품 속의 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말지요. 돌아온 탕자가 지난날 자신의 모습과 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비록 풍성한 의미가 가득했던 일들을 해내왔지만, 터무니없이 분주한 일상을 살아내야 했고, 그러면서 내면적으론 은밀하게 갈급함이 조금씩 쌓여갔던 것입니다. 그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영혼의 안식을 얻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동료 덕에 러시아를 방문하게 됩니다. 거기엔 약 3년 전 자신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그 렘브란트 작품의 원본이 전시되고 있는 예르미타시 미술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윽고 그 작품을 직접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때, 그는 자신을 가득 채워왔던 내밀한 마음의 갈망을 충족시키게 됩니다. 책에서 그는 그곳에 간 것이 진정한 귀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기록할 만큼 그림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 자리를 내놓고, 지적 장애인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공동체 '라르쉬' ('방주'라는 의미)의 토론토 지점, '데이브레이크'에서 어색하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나서도 그는 늘 그 그림과 함께 했습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이 전해주신 이야기를 렘브란트가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한 장으로부터 헨리 나우웬은 깊은 통찰을 이끌어냅니다. 그 통찰은 복음의 정수가 집약되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오랜 시간 그 그림과 함께 했던 그만의 깊고도 깊은 묵상으로 말미암은 것이겠지요. 덕분에 저와 같은 독자는 이 책을 마주함으로써 그가 파놓은 깊은 우물에서 손쉽게 지혜를 길어다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의 소재가 되어준 렘브란트의 작품은 그의 삶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그려졌다고 합니다. 갖은 굴곡을 거치며 살아낸 삶의 종착역에서 그가 붓으로 담아낸 그 그림은 무르익은 인생의 원숙함이 그대로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수년에 걸쳐 이 그림과 함께 하며 렘브란트의 삶을 흡수했으며 그가 그린 그림 속의 주요 인물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흡수합니다. 책의 구조는 이러한 순서를 따르고 있지요. 그의 영적인 여정의 순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집을 나갔다 마침내 돌아온 작은 아들이 되는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마도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회심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즉 자기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집을 멀리 떠난 죄인의 모습과 같은 위치에 놓는 깨달음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것일 테니까요. 저 역시 렘브란트의 그림이나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저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항상 작은 아들의 위치에 대입시키곤 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것이 가장 편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회심기를 이야기할 때면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었는지 얼마나 악했었는지 얼마나 자기밖에 몰랐었던지를 언급하며 낮아진 자존감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하지요. 그러나 그 깊은 은혜와 사랑으로 아버지께 받아들여졌음을 감사하기만 하고 거기서 멈춘다면 그 삶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 티켓을 얻은 것에 있지 않고 실제로 삶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는데 방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헨리 나우웬은 큰 아들과 자신이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사실을 우연찮게 발견하게 됩니다. 허랑방탕한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전통을 지키며 집을 지키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마치 작은 아들인 것처럼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질투와 분노, 과민하고 완고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을 간직한 채 살아온, 삶의 한 꺼풀 아래에 고스란히 존재했던 큰 아들의 모습을 자신의 삶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큰 아들로 발전할 가능성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처음엔 은혜에 감격하며 경건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이 지속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감사와 은혜로 시작한 경건이 사적인 유익이나 안위만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기 일쑤이지요. 어느덧 작은 아들은 꼿꼿하게 서서 자신의 자리를 크게 확보하려고 애쓰는 큰 아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아들은 큰 아들의 산을 넘어야 하는 숙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헨리 나우웬이 이른 곳은 바로 아버지가 되는 여정입니다. 마흔을 넘기도록 이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설교나 여타 글에서 수십 번은 접했을 겁니다. 그러나 저자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아버지가 되라는 부르심을 인지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가 묵상하고 써놓은 이 책을 읽다보니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받아들여지길 바라거나 받는 입장을 넘어 주기를 늘 기쁘게 고대하며 준비되어있고 또 실제로 줄 수 있는 입장으로의 발전과정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성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을 넘어 일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넘어 아버지가 되는 여정과 같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구체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은 받는 입장만 고수해선 불가능하겠지요. 기꺼이 주려는 마음은 곧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사랑받기만 하려는 태도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회심하여 낮아진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기를 거쳐 그것이 교만과 위선으로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있으면서, 비록 많이 가지지 않았지만 서로 나누며 약한 자들을 도우며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영적인 여정 어딘가에 위치해있는 것이지요.


제 안엔 여전히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자존감을 자랑으로 여기는 모순적인 겸양을 보여주길 아직도 종종 즐기며, 제 눈에 비쳐진 상대적으로 방탕한 이들을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감출 수 없을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이제 헨리 나우웬 덕분에 많은 것들이 정리되는 기분입니다. 방향이 조금 더 뚜렷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되어가는 길에 위치해있는 저 자신을 봅니다. 조금 더 성숙한 신앙인이, 믿음을 행동으로 번역하며 일상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7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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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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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누나가 들려주는 것만 같은 재미난 인류 이야기.


이상희 (이상희 (Sang-Hee Lee)) 저, '인류의 기원'을 읽고.


기원 논쟁처럼 다분야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아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화제 거리가 되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우주의 기원, 생명의 기원, 그리고 인류의 기원을 묻는 건 인간 역사에 있어서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을 질문이지만, 여전히 거기엔 답이 없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타당하게 설명이 가능한 가설이 있을 뿐이다. 그 가설은 신학적인 입장에선 믿음으로 불리기도 하고, 철학적인 입장에선 하나의 인식 체계가 되기도 하며, 과학적인 입장에선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기도 한다.


'인류의 기원'을 제목으로 하는 이 책 역시 인류의 기원을 알려주지 않는다.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고인류학자인 저자는 관찰, 비교, 분석 등의 과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밝혀진 굵직굵직한 여러 가설들을 재미있는 일상적인 소재를 동원하여 대중적인 언어로 친절하고 쉽게 알려주며 인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옆집 누나가 동네 친구들 모아놓고 옛날 이야기 들려주는 것만 같은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총 스물 두 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진 이 책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은 단편의 이야기들을 스물 두 번을 듣고 나면, 어느덧 인류의 기원에 대해 역사적으로 논의되어진 흐름을 대략 꿸 수 있다. 따분한 역사를 재미난 만화를 통해 배울 수 있었던 '먼 나라 이웃 나라'의 고인류학 버전이랄까. 책을 읽다 보면 진지해질 때도 있고, 가끔은 공포스러워질 때도 있으며, 또 웃을 수밖에 없을 때도 있는데, 그러는 와중에 전문적인 지식을 기본적으로나마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는 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효용일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3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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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시공 제인 오스틴 전집
제인 오스틴 지음, 고정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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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오만과 편견의 해체.


제인 오스틴 저, ‘오만과 편견’을 읽고.


오만함은 숨겨진 나르시시즘의 발현이자, 타자에게 비쳐진 나르시시즘의 거울상이다. 인간의 자신감은 자주 도도함으로, 도도함은 오만함으로 진화한다. 건강하지 못한 자기애의 표출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감 상실을 거쳐 자기비하로 치닫는 경우 역시 또 다른 자기파멸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신감을 가지고 또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 겸손한 자신감이 오랫동안 디디고 서있을 자리는 너무나도 좁다. 게다가 그 좁은 길 양쪽으론 파멸의 강이 버젓이 흐른다. 우린 과연 살면서 발을 헛디디지 않고, 파멸의 강에 익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릴 적부터 대접받아왔고, 대접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성인의 경우, 게다가 사교성까지 부족할 경우, 타인으로부터 오만함의 명예를 입을 가능성은 현저히 높아진다. 그러나 이때, 오만과는 다른 어떤 한 힘이 위력을 떨칠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편견이다. 


편견에게 있어 오만함만큼 적당한 파트너는 없다. 결국 오해로 판정될 주관적 선입견은 차후에 발생하는 많은 증거들의 선택과 조작, 인멸을 유도하며, 나아가 편견은 자신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며 또 적극 수호하게끔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사람이 오만하다는 편견을 가지게 될 경우, 그 편견의 눈에는 오만함을 뒷받침하는 증거만이 보이게 된다. 또한 오만의 눈에도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편견의 존재가 결코 탐탁지 않다. 오만과 편견 사이에는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른다. 그 강의 존재는 서로를 더욱 증폭시켜 궁극적인 자폭을 유도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뜻밖의 사건은 발생하고야 말고, 그 사건은 삶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온다. 인생이 신비인 이유는 어쩌면 예상 밖의 일들이 만들어내는 향연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이 그렇다. 오만함의 역을 맡았던 '다아시'와 편견을 맡았던 '엘리자베스' 사이에도 처음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깊고 넓은 강이 흘렀다. 그러나 그 어두운 강에도 서광이 찾아왔다. 엘리자베스를 가득 채웠던 다아시를 향한 혐오는 결국 오해로 인한 편견이었음이 밝혀지고,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베넷 가 모두에게 오해되었던 다아시의 오만함의 실체는 겸손한 자신감과 깊은 이해심을 동반한 자상하고 사려 깊은 배려심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둘 사이엔 진정한 사랑이 흘러 들어 결국 둘은 하나가 된다. 


이 책은 오만과 편견의 악한 파트너십이 점차 상쇄되어가는 아름답고 놀라운 과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쓰여진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고 우아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많은 남성 작가들이 쓴 내러티브와는 또 다른 신선한 느낌을 준다. 나는 이 책을 많은 남성 독자들에게 특별히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는 누구에게라도 존재할 오만과 편견이 깨어지고 그 자리에 진정한 사랑이 잦아들길 바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4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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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영향력 - 선교적 삶과 비즈니스 선교
김진수 지음 / 선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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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영향력: 소금의 바른 존재감 드러내기.


김진수 (Jinsoo Kim) 저, '선한 영향력'을 읽고.


책을 덮고 조용히 내 가슴을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소금인가? 맛을 잃진 않았는가? 아니면 너무 강한 맛을 내어 음식 맛을 버리고 있진 않는가?”


책 중간 즈음에 소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알던 얘기지만 선한 영향력이라는 컨텍스트에서 읽었을 때 새롭게 다가왔다. 때론 몰랐던 것이 아닌 이미 알고 있던 것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추출해낼 때 갑절의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번이 그랬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음식은 맛을 내지 못한다. 반대로 소금이 강한 맛을 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싱거워도 짜도 음식은 제 맛을 낼 수 없다. 소금은 음식이 필요로 하는 만큼 적당히 들어가 음식 고유의 맛을 살려야 한다. 소금의 존재감은 음식에서 소금 맛을 내게 될 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소금 자체의 맛은 사라지고, 음식에 스며들어 음식과 하나가 되어 음식 본연의 맛을 내도록 도와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늘 소금은 음식 옆에 있으면서 음식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쓰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이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선한 영향력'의 실체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외딴 산 속이 아닌 세상 가운데 존재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어두움이 존재하기 때문에 빛이 필요하고, 음식이 부패하지 않고 제 맛을 내기 위해 소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현실에서의 빛과 소금들은 너무나도 다르다.


어두움과 함께 있어야 할 많은 빛들은 이미 자칭 빛들로 가득한 조명상사 안에 바글대고 있다. 빛들끼리의 교류에만 머물며,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적인 안위만을 간구한다. 어두움을 이기기 위해 갑이 되어 다스리고자 한다. 어두움은 빛이 피해야 할 대상이자 빛을 공격하는 대상으로 오인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어두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빛은 빛끼리 있다가 소멸된다. 선한 영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금은 어떠한가. 소금을 자처하여 썩어가는 음식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많은 경우 정체성이나 사명을 잃어버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반면, 음식 맛이 소금 맛이 될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어 선전하기 좋아하는 경우도 많다. 두 경우 모두 소금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된다.


자신이 소금임을 아는 정체성 인식, 음식을 부패하지 않고 제 맛을 내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명 인식, 이 두 가지를 모두 했다고 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럴싸한 이론적인 구호만으론 어림도 없다. 현실은 소금으로 하여금 음식 옆에 대기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필요할 때 언제든 음식에 뿌려지도록, 그래서 소금 맛은 사라져도 음식 맛이 살아날 수 있도록 요구한다.


선교지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인과 현지 상황과는 별 상관없이 마치 '따로국밥'처럼 섬으로 홀로 거룩하게 존재하거나, 현지인과 현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온 진공 속 프로그램으로 선교를 달성하려고 노력한다. 안타까운 이 두 경우 모두 소금이 음식에 제대로 녹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현실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자는 음식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곁에서만 고결하게 서성이고 있는 경우가 되겠고, 후자는 음식 맛을 소금 맛으로 만들어버린 원맨쇼의 경우가 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소금은 소금으로 존재할 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소금은 음식에 스며들어 음식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소금은 음식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금의 숙명이자 존재감의 발현이다. 스며드는 것, 바로 선한 영향력의 시작이다.


저자인 김진수 장로는 자신을 선교사 모자를 쓰지 않은 선교사라고 말한다. 그는 신학교 배경이 없을 뿐더러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해당되는 후원 교회도 없고 파송되지도 않았다. 그는 캐나다 서부에 위치한 인디안 원주민들을 위하여 소금이 되기로 한 귀한 평신도 선교사다.


후원 교회나 후원금이 없이도 선교가 지속되는 이유는 그가 자비로 시작한 비지니스 덕분이다. 그는 이미 창업에 성공해본 유경험자다. 실수나 실패를 포함한 과거의 모든 점들이 이어져 하나의 선이 만들어지는 기적을 맛보고 있는 자이며, 그 과정 자체가 곧 선교라고 믿는 자다. 그 선들은 머지않아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말하는 비지니스 선교는 ‘선교로써의 비지니스 (BAM: business as mission)’이다. 기존에 있던 ‘선교를 위한 비지니스 (BFM: business for mission)’가 아니다. 둘은 큰 차이가 있다. BFM의 경우, 비지니스는 선교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다. 비지니스에서 얻어낸 결과물, 즉 물질적인 열매가 선교를 위해 쓰여지는 구조다. BAM에서는 비지니스의 결과 뿐 아니라 모든 시작과 과정 자체가 선교다. 소금으로 비유를 하자면, BFM은 소금이 들어가 만들어낸 음식으로 얻은 수입으로 선교를 하는 것이고, BAM의 경우는 소금이 음식 옆에 내팽겨치지 않고 음식의 신뢰를 얻으며 대기할 수 있게 되는 과정부터 서서히 음식에 스며들어가는 과정 모두가 선교와 동격이 된다.


언젠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묵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한 과정이 곧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메시지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궈낸 어떤 큰 성과가 필요하신 분도 아닐 뿐더러 그런 것들보단 우리가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더 큰 관심이 있으시다고 믿는다. 우리의 목적 성취도 그분에게는 동일한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사는 삶은 어떤 특정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가 되는 이유도 된다.


나도 소금으로써 녹아들고 스며들길 원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정직하게 신뢰를 얻으며 음식을 위해 기꺼이 쓰임받는 하나의 소금이 되길 원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3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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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언어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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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관의 유쾌한 공존.


프랜시스 S. 콜린스 저, '신의 언어'를 읽고.


군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던 나는 그 해 제대를 했다. 2000년도는 내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하나의 작은 이정표가 되어주었지만, 인류 역사에서는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진 놀라운 해였다. 세계적으로 10년이 넘게 투자된 Human Genome Project가 완성되던 해였기 때문이다. 그 해엔 네 종류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전체 약 30억 개 길이의 인간 유전체 서열이 모두 밝혀졌음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공개되었다. 우리 몸의 설계도 초안이라 할 수 있는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 지도가 드디어 처음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 유명해진 제임스 왓슨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Human Genome Project를 끝까지 이끌었던 책임자로서 2000년 6월 백악관에서 열렸던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성을 축하하며 선포하는 감격적인 자리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옆에 서있던 사람의 이름은 프랜시스 S. 콜린스였다. 그는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전문 과학도서도 아니고 신학도서도 아니며 자서전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진솔한 목소리가 곳곳에 잘 침투되어있어 이 모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책이다.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Human Genome Project를 이끈 과학자로서,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를 거쳐 나와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아내며 유신론적 진화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과학과 신앙 사이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하고 답을 해온 선배로서의 프랜시스 콜린스를 우린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논리정연하면서도 진정성이 여과없이 드러난 필체는 덤이다.


생물학자인 나에게 그의 목소리는 이 분야를 앞서간 그 어느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호소력이 있었다. 진지하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모두를 포함해서, 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그의 진솔한 내러티브는 분명 하나의 빛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어두웠던 부분을 밝혀줄 것이다.


그가 이끈 프로젝트가 역사상 처음으로 밝혀낸 것은 인간의 모든 염색체의 뼈대가 되는 DNA의 염기서열이다. 그는 이를 감히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다.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관여하여 어렵사리 밝혀낸 그 암호와도 같은 염기서열은 분명 현대과학과 지성이 일궈낸 쾌거일진데, 그 프로젝트 리더가 자신의 입으로 그 암호를 ‘과학의 언어’가 아닌, 종교적 색채가 단박에 드러나는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린 과학과 신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제목만 곰곰히 씹어봐도 우린 그 안에서 과학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잡음없이 공존하며 더욱 풍성하게 서로를 강화시키고 성숙시키며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생물학적 진화를 정의할 때 필수요소인 DNA 변화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진화를 엄연한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 진화의 정교한 메커니즘이 다름 아닌 신의 창조방법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렇다. ‘유신론적 진화’라는 말이 주는 불완전한 뉘앙스 때문에 책에서 ‘바이오로고스’라 칭하자고 제안까지 하는 그의 관점을, 나도 한 명의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받아들인다.


엄연한 과학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화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만 하면 알러지 반응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여기거나, 진화나 과학을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거나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말해주고 싶다. 과학과 신앙은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으며, 그 유쾌한 공존이야말로 원래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고.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6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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