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 유희 헤르만 헤세 선집 11
헤르만 헤세 지음, 박계수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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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탈리엔의 빛.


헤르만 헤세 저, ‘유리알 유희’를 읽고.


살아가면서 우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생을 마감할까.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알고 사랑하고 섬겼다면 그 인생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이 만남이고 만남의 가치가 양이 아닌 질에 있다면, 의미 있는 인생이란 깊이 있는 교제와 그 사람에 대한 깊고 풍성한 앎에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숨쉬며 서로의 이름을 알고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론 스킨십을 나누면서 오감을 길들이는 것이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반적인 방법이겠지만, 점점 각박해져 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자연에서 우린 더 이상 경이감을 느끼지 못하며, 날마다 편리해져만 가는 문명의 파도에 떠밀려가며 춤 추듯 살아간다. 사람을 직접 만나기 위해 시간을 약속하고 손목시계를 보며 기다리던 낭만은 간편한 스마트폰 덕분에 말끔히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화상전화의 발달로 인해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언제든 얼굴을 보며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낭만과 여유라는 틈새는 효율과 편리가 메워버린 것이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만나게 되었지만, 과연 우린 예전보다 사람을 더 깊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작년 말, 아내로부터 헤르만 헤세 전집을 선물 받아, 올 한 해 다 읽고 모두 감상문을 남기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나 나이 마흔을 넘기며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마음껏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글 읽기와 쓰기였다. 녹슨 고철이나 고인 우물처럼 정지해버린 나의 인문학적 소양을 소생시키고도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계획했던 검소한 방법은 몇몇 고전문학 작가들을, 할 수 있는 한도에서 깊게 만나보는 것이었다. 내게 평생 짐이 되어버린 안경을 쓰게 만들었던 추리소설을 탐독하던 중학생 시절, 어머니의 소개로 접한 첫 고전문학이 '데미안'이었다. 어느덧 25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첫 관문으로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내겐 적격이었다.


또한, 정신적인 전환기를 거치며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란을 경험했기에, 숙명적으로 나는 서로 다르면서도 상보적인 두 세계의 경계에 설 수밖에 없었고,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물음, 그리고 진리를 비롯한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고, 난 외로웠다. 응답되지 않은 무수한 질문들은 늪이 되어 나를 삼키기 시작했고, 나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내 자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치고 힘들었다.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의심의 숲을 지나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쳐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테지만, 지난한 이 시기가 쏘아대는 화살의 방향은 아무래도 외부보다는 내부를 향하는 법이고, 함부로 던져진 화살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다. 내 안의 자아는 그렇게 아파하며 치유를 소망했다. 다행히 반성과 성찰은 현미경과 같아서, 희미하기만 했던 자아에 대한 발견과 재발견, 그리고 하나인 것 같았던 자아가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선 아주 오래된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난 겨우 성장할 수 있었다.


헤세를 읽어낸다는 것은 헤세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두 세계의 존재와 그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넘어 공존과 화합에 이르기 위하여 끊임없이 내적 성찰을 거치며 성장해 나가려는 자아의 고뇌와 의지를 깊숙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렇다. 나는 헤세를 알도록 운명 지어져 있던 것처럼 헤세를 읽어냈다. 내 인생 전체를 봤을 때 헤세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건 참 다행이었다. 그로 인해 난 참 행복했으며, 내 마음은 감사함으로 충만하다. 많은 빚을 졌다.


두 세계는 자아의 서로 다른 외부 세계일 수도 있고, 한 육신을 공유하며 공존하는 서로 다른 두 자아일 수도 있다. 헤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헤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아의 성찰과 성장, 그리고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때론 상반된 두 자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독립된 두 인물을 창조해내기도 하고 ('수레바퀴 밑에', '게르트루트',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해당), 때론 서로 다른 두 자아가 한 인물 안에서 분열하도록 만들어 갈등을 넘어 통합으로 향하는 변증법적 자아성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페터 카멘친트',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 부분적으로 ‘크눌프’에도 해당). ‘유리알 유희’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담고 있다.


두께 (약 800페이지)에 압도당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던 건 어쨌거나 내겐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큼직한 내 손에도 묵직하게 잡히는 두께의 책을 일주일이 넘도록 시간을 들여가며 비로소 읽어냈을 때, 내게 남은 여운은 후련함이 아닌 아쉬움이었다. 800페이지가 오히려 짧게 느껴질 정도로 내 안의 나는 더 읽기를 갈구했다. 뜻밖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아직도 내 가슴 속엔 유리알 유희의 명인 자리를 내려놓고 마기스터 루디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카스탈리엔 밖, 즉 세상으로의 도약을 감행했던 요제프 크네히트와, 그의 마지막을 삼켜버린, 빙하가 만들어낸 그 고요한 호수가 잔상으로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했던 때는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여 아름답게 비치던 어느 스위스 산골의 이른 아침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마음은 아직 그곳에 머무는 듯하다. 호수가 차갑고 슬프다.


'유리알 유희'는 13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쓰여진 헤세의 마지막 소설로써, 그의 노벨 문학상을 결정짓게 만든 대작이다. 여기엔 그의 모든 작품이 다 녹아있기도 하다. 이 책을 그의 전집 중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던 이유는 적어도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을 모두 '유리알 유희' 안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물처럼 숨겨진 각 작품의 정수들이 이 곳에서 모두 한데 어우러져 그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혼자 몰래 마른 침을 삼키며 난 전율했다. 그렇다. 나는 그 전율과 함께 이 책을 읽어냈다. 각각의 작품에서 독립적으로 표현되어진 두 세계의 통합을 추구하는 헤세의 바람은, 그의 작품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땐 바로 이 책, '유리알 유희'에서 마침내 실현되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난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유리알 유희란 모든 학문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고, 고도로 발전된 어떤 기호와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비밀 언어로 표현되어지는 정신적 유희이다. 하나의 유리알 유희는 예를 들어, 천문학과 수학과 음악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총체적이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서양의 문화와 전통 뿐만이 아닌 동양의 지혜까지도 균형 있게 포함하고 있기에, 우린 유리알 유희를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높고 순수한 인간의 정신성을 대변하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을 그 목표로 하는 유희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유리알 유희는 현실에서 존재하진 않는다. 그저 헤세의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피부에 와 닿도록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책을 읽어도 도대체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리알 유희가 탄생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왜 헤세가 이런 상상력을 발휘했는지 조금은 더 이해를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직접 겪었던 헤세는 20세기를 인간의 정신성이 곤두박질친 시대로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순수한 정신적인 부분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된 특정 구역의 이름이 바로 '카스탈리엔'이다. 카스탈리엔은 타락한 정신성이 회복되어 이상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신적 유토피아인 것이다. 이곳은 세속적인 국가를 포함한 세상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면서 국가로부터 모든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세상 속에서 영재만을 발굴하여 데리고 온 후 그들에게 전 인생을 바쳐 오로지 순수 학문 연구를 수행하게 하고, 과거 수도원에서의 생활처럼 금욕적이고 경건하면서도 검소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구별되어진 작은 세상이다.


유리알 유희는 바로 이 카스탈리엔 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즉, 타락한 인간 사회의 반동적인 힘이 끝내 다다른 지점에 바로 유리알 유희가 있는 것이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비록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내적 갈등을 겪다가 카스탈리엔 밖으로 나가게 되지만, 카스탈리엔 안에서 가장 존경 받고 영예로운 유리알 유희의 명인으로 성장했었다. 이 책은 요제프 크네히트의 성장기라고도 할 수 있고, 한 인간의 성장과 자아의 재발견과 성찰, 이어진 내면의 갈등, 그리고 마침내 갈등을 이겨내고 초월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크네히트는 세속적인 부와 명예, 그리고 그것들의 정반대에 위치한, 정신적이기만 한 모습까지도 모두 던져버리고, 보다 통합되고 완전하면서도 순수한 것을 향하여 홀로 꿋꿋이 전진하는 정신적 승리자였다. 그는 실로 세속적 세상도 넘어서고 정신적 유토피아, 카스탈리엔도 넘어선 조화로운 통합의 상징, '유리알 유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해 본 자에게는 중재자나 화해자로서의 역할이 암묵적으로 기대되는 법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현실에서 그들은 그 특권을 거부하고, 오히려 분노에 가득 찬 채 가장 효과적인 파괴자로 군림하거나 아니면 고독한 아웃사이더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은 한 세계를 넘어 두 세계를 모두 얻고 싶어하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남을 향한 삶으로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깊숙이 숨겨졌던 지배욕과 몰래 감추었던 나르시시즘의 본격적인 발아 시기와도 같다. 그 결과, 중재나 화해가 아닌 견제와 장악이 선택되고야 마는 이 비극은 과연 인간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양쪽 진영을 모두 알아 화합과 통합을 도모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른 극소수의 사람들조차도 결국에는 두 세계를 모두 파괴하거나, 두 세계를 모두 등지고 떠나 고독한 방랑자가 되어버리는 이유는 아마도 우린 인간 내면에 뿌리깊게 각인된 근본적인 죄와 악에서 그 답을 찾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특권의 자리에 가도, 범인의 자리에 머물러도, 우린 모두 ‘인간’으로서 같은 선상에 위치해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네히트는 파괴자도 아웃사이더도 아닌 길을 선택했다. 그 둘을 모두 내려놓았지만, 죽기 직전까지 그는 그 둘의 화합과 통합을 위한 소망을 놓지 않았다. 비록 육체적 죽음을 맞이했지만 말이다. 난 이 부분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구별되어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카스탈리엔은 한 땐 세상의 모든 정신적인 부분을 총괄하고 배포하며 타락한 인간의 정신성 회복에 앞장섰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갇힌 우물이 되어갔다. 어찌 보면 크네히트는 지진이 일어날 것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지하는 예민한 동물처럼 카스탈리엔의 몰락을 예감했던 것이다. 카스탈리엔은 우리 시대의 일부 종교집단이나 상아탑 안에 갇혀 국민의 세금만으로 자기 배를 채우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 특권층의 사람들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거나 정화하는 peacemaker 역할이 애초부터 주어졌지만, 그 안에서만 머물며 세상과 소통 없이 고상함만으로 안락하는 peacekeeper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의 거짓과 불의를 정화시키고 그 이전으로 회복시킬 공적인 사명을 담당해야 할 기관이 사적인 안위만을 취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린, 특히 기독교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들은 우리들의 카스탈리엔이 본질적 임무를 다하고 있는지 점검해야만 하고, 우리에게 크네히트가 준비되어 있는지 자문할 때다. 장망성은 세상보다 카스탈리엔에서 먼저 시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세상 속에 함께 존재할 때 카스탈리엔의 빛은 흐려지지 않고 밝게 빛날 것이다. 교회와 나그네 된 하나님백성의 바른 위치와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점검할 때다.


#김영웅의책과일상


1. 수레바퀴 밑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43022562409185

2. 싯다르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50722494972525

3. 게르트루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4071523637622

4. 페터 카멘친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9595666418541

5. 황야의 늑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93746594003448 

6. 크눌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04866382891469

7. 로스할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44402088937898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906654982712608

9. 데미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71433049568136

10. 유리알 유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61378043906966

11. 요양객: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13336575377776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0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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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우종학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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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크따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에서 박 기자와 한 교수라는 두 명의 가상 인물을 설정하고, 그 배후에서 모든 걸 조율했던 우종학 교수 (존칭 생략)가 그의 두번째 책, 과도기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무대 뒤에서 연극을 보여주며 간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다가, 이번엔 나이를 예측하기 힘든 동안의 (^^) 감독이 무대 앞에 나와서 직접 관중들과 만나며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작품을 설명하는 셈이다. 무크따를 읽는 독자는 한 교수가 박 기자에게 하는 친절한 일대일 과외에 동참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과학과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면, 기독교인들이나 심지어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무크따는 부담없는 입문서로써 적절하다. 반면, 과도기는 저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원하는 강의를 동영상이나 녹취록이 아닌 직접 강사를 코 앞에 두고 라이브 강의를 들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을 고화질의 멋진 천문학 관련 사진들과 함께 (심지어 올 컬러다!)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장감과 더불어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강사로부터만 자연스럽게 전해오는 진심어린 한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기 위해선 아무래도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는 이 책의 독자층으로서 적절할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과학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인의 바른 응답을 요구하며 기대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을 밝히고 그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했던 책이 무크따였다면, 과도기는 좀더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부터 쌓여온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는 것에 무크따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과도기는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에도 지속될 과학시대가 지속해서 던져줄 도전에 대해서 기독교가 어떻게 응답해야 올바를지 청사진을 넌지시 제시하기 때문이다. 과도기가 미래까지도 내다보며 기독교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이 고무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과학과 신앙에 얽힌 오해와 편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당분간은 미래에도 진행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것이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안타까운 현실을 다시 직시할 수 있었고, 나 역시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저자의 한을 공감할 수 있었다.


과도기의 목적은 21세기 과학이 기독교에 던지는 세 가지 도전을 검토하고, 이 도전들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고찰하는 데에 있다. 책의 기본적인 구조 역시 세 가지 도전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짜여 있다.


우종학 교수의 저서나 수많은 강연에서 일관되게 언급되는 중요한 견해 하나는, 성경과 자연이 하나님을 알려주는 두 가지 책이라는 것이다. 두 책의 저자는 동일하게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두 책이 말하는 내용은 결코 상충될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성경이 창조를 ‘누가’ 했는지를 밝히는 책이라면, 자연은 창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같지만, 책의 목적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는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전제가 될뿐 아니라, 과학과 신앙의 올바른 대화를 시작하는 데에 있어 아주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숙고해 둘 필요가 있다.


책이 쓰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저자의 목적과 의도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의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게 읽어야 그 책을 잘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부합하지 않게 책을 읽는 것은 독자들이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독자에 불과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책을 해석한다든가, 자신의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숨긴다면, 아마도 그 독자는 둘 중 하나다. 저자를 평가할 만큼의, 아니면 저자보다도 뛰어난 역량을 가진 존재이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는 자기중심의 비겁하고 이기적인 존재일 것이다.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의 우산 아래 모여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상식적인 경계를 무시하고 저자의 목적과 의도에 상관없이 독자인 자신들의 신념과 주장에 모든 것을 맞추어 왜곡해서 두 가지 책인 성경과 자연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오류를 범하는 그들의 의도가 처음부터 그릇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려고 했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신앙을 공격한다고 여긴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한 우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끼리 한 마음으로 되기 위하여 일종의 정신 교육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 수단으로써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든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도 않은 것들을 자신들의 사상에 맞추어 마치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과장해서 해석한다든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 슬그머니 무시하며 읽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잘못된 방법 때문에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되었고, 심지어 나중엔 자신들도 그 결과가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인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나름의 정당성 (아마도 기독교인 중 다수라서?)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잘못된 길을 고수하고 남들까지도 혹하게 만드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로 인해 처음의 의도 자체도 의심받게되는 자가당착의 모습까지도 보이는 것 같다. 분명 그들이나 나나 똑같은 창조주인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건 분명히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었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책에서도 우종학 교수는 누차 반복하면서 이 부분, 즉 책의 잘못된 해석방법을 강조한다. 창조과학이라는 우산 아래 모인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기독교인 그룹은 책에 잘 명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창조 방법에 대해선 성경은 별 관심이 없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대신 자연이라는 책은 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인간은 과학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자연이라는 책을 해석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사실이다. 과학 자체는 자연현상을 관측하고 실험하고 증명하면서 기존에 몰랐던 사실을 밝혀내는 역할을 한다. 과학은 또한 한계를 지닌다. 즉, 과학으로 밝힐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신의 존재 유무다. 과학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유신론/무신론의 오래된 싸움을 끝낼 해결사가 될 수 없다. 과학이 아직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과학이 밝힐 수 있는 영역 밖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립적이며 중립적일 수 밖에 없는 과학을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이 자신들의 공격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정도를 넘어선다.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군중몰이를 하는 것처럼 왜곡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 자체가 심히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중립적인 과학을 신앙과 적대시하며 마치 과학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와 모순되는 것처럼 느끼는 통념이나, 과학을 무신론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과학주의 무신론자뿐 아니다. 교회가 직면한,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도전은 바로 기독교 내부에 있는 근본주의/문자주의적인 방식에 길들여져 있고 이를 신봉하고 있는 무리들이다. 창조과학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마치 기독교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듯하다. 우주와 지구와 생명의 탄생, 그리고 진화를 설명하는 중립적인 과학의 증거들을 뭉뚱그려서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하고 반역하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죄악시하며, 눈과 귀를 닫고 등을 돌려 스스로 만든 그림자에 갇혀 그들끼리 소통하며 그들끼리 하나가 되기 위해 행하는 정신 교육이 내가 보기엔 정말 시대착오적이며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인 우종학 교수는 책에서도 여러번 말한다.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 대상으로 교회 내부에서만 배회하며 과학에 흠집이나 내지 말고 당당하게 링 위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붙자고 말이다. 과학자는 증거에 기반한 논리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창조과학자들이 지속해서 정정당당한 링 위의 결판을 피하고 여론몰이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내 생각에도 그들은 정말 박근혜 정부처럼 탄핵되어야만 할 것 같다. 진검승부를 피하고 언론이나 여론을 이용해서 일반인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마약과도 같고 종교와도 같은 방법으로 자기 편만들기나 하는 시대는 이미 탄핵되었다는 점을 그들이 바로 알았으면 한다. 나아가, 기독교를 지키려고 했지만, 탈기독교 현상을 그들이 부추기고 있다는 점도 꼭 똑바로 인지하고 그들의 방향에 수정을 가했으면 좋겠다.


과학의 발전 속도는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그 증가하는 속도로 밝혀내는 사실 또한 가히 엄청나게 많다. 앞으로도 이런 흐름은 지속될 것이며 첨단과학이 일상이 될 정도의 과학시대를 살아갈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접하게 될 때 어떻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할 것이며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건강하게 지켜나갈지는 무척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나 역시 생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이 부분에 대해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한국에선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새물결아카데미를 축으로 한 운동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새물결플러스를 축으로 한 기독교 출판업계가 좋은 책을 출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에 있는 과학자 기독교인뿐 아니라, 세계에 흩어진 남은 자로서의 과학자 기독교인들까지도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를 내어 과거부터 누적된 과학과 신앙의 해묵은 편견이 깨어지고 서로간의 건전한 대화가 이루어져 보다 넓고 보다 깊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날을 고대한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2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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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다.


김근주 (김근주 (Keunjoo Kim)) 저, '복음의 공공성'을 읽고.


서론에서부터 김근주 교수는, 만약 기독교인들이 정치와 구별하여 개인의 영적 문제에 치중하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견해라고 명료하게 밝힌다. 특히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마치 영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과 다름 없는 한국 교회의 분위기는 이를 잘 뒷받침하는 듯하다.


정치 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만을 마치 복음의 전부인 듯 부각시켜, 다른 것들은 모두 영적이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 그 동안 많은 교회는 복음을 사적인 영역에 가두었고, 교인들에게는 바울의 칭의 개념만을 강조하여 개인구원론을 복음의 전부인 것마냥 가르쳐왔다. 그러나 바울의 칭의 개념은 바울이 읽고 묵상하며 깨달은 성경 말씀이 배경이 되었고, 그 성경은 신약이 아닌 구약이었다는 점을 우린 간과해선 안 된다.


또한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루면서 하나님나라를 전하는 책이다. 예수님이 어릴 적 공부하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으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하신 논쟁의 근거 역시 신약이 아닌 구약이었다. 예수님은 모든 구약이 말하는 약속의 성취셨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나라의 본체셨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수님을 다룬 사복음서나 바울이 쓴 서신들 모두 구약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을 이해하지 않은 채 복음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김근주 교수는 토로한다. 이 책의 부제가 '구약으로 읽는 복음의 본질'이라는 것이 명징하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책이 던지고 있는, 표지에도 적힌 큰 질문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제한되는가?" 복음의 공공성은 복음의 또 다른 부분 정도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이며 본질이라는 사실을 이 책 '복음의 공공성'은 말하고 있다.


평안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불의가 판을 치며,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사회와 국가에서 나 혼자 평안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복음은 결코 개인적인 마음의 평안함만을 가지도록 요구하거나, 윤리적이고 경건한 마음가짐만 강조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한마디로 복음의 목적은 개인의 구원이나 해탈에 있지 않다. 오히려, 예수의 탄생과 죽음이 로마와 유대인들의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듯이, 복음은 정치적으로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구조적인 악과 사탄의 체제에 예수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며, 그곳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복음의 시작과 목적과 방향, 모두가 공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 시대에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온 나라와 열방들, 그리고 창조 세계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앞서 경험하는 것이다. 즉 복음의 공공성은 창조 질서와 직접 연결이 되어있는 복음의 본질 중 하나이며, 이는 곧 구약의 복음이 지속해서 말하는 바와 일치한다. 저자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들이 구약을 무시한 채 신약만을 복음의 전부로 배우거나 이해해왔기에 비역사적인 개인 교훈집이나 경건 도서로 전락해 버린 것이라며 울분을 토한다.


또한 복음의 공공성은,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을 통해 발현되는 증거인,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과도 곧장 연결된다. 남에게로 향하는 삶,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이웃 사랑, 나를 넘어서 열방을 위해 쓰임 받는 삶, 하나님을 닮는 거룩한 삶,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개념이 바로 복음의 공공성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사적인 복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번영 신학보다도 더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원죄의 흔적이 만들어낸 거짓 묻은 복음일지도 모른다. 톰 라이트가 말한 빈 망토와도 같은 복음의 변질과 왜곡, 바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다.


보수, 진보를 떠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겨 듣는 말씀인 마태복음 6장 33절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에서의 '의'가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을 불러 명령하셨던 정의와 공의를 현실 세계를 살면서 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린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는 삶이 사적인 복음보다는 공적인 복음에 무게중심을 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더 이상 이 구절이 개인의 윤리와 경건을 요구하는 말씀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근주 교수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의 의미 자체가 단수가 아닌 복수,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이라는 근거를 들며, 우리 신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길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적일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출발부터가 공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타락이 기술된 창세기 3장에서도 김근주 교수는 복음의 공공성을 찾는다. 뱀의 유혹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기애를 충동질하여 함께 해야 할 사람들과 창조물들과의 관계를 파괴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공동체의 삶, 즉 공적인 삶을 무너뜨린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기 유익에 따라 선악을 마음대로 판단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사리사욕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버렸으며, 이는 곧 공적 삶의 파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공적 삶을 지향했고, 인간의 죄는 그 공적 삶을 파괴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에서 말하는 사탄의 실체와 그의 목적과 패턴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창세기를 훑어가며 공적인 복음의 속성을 들춰낸다. 하나님의 선교, 복음의 시작인 아브라함의 선택과 부르심은 아브라함 가문만이 아닌 열방이 복을 받기 위함임을 볼 때도 우린 복음의 시작부터가 사적인 유익의 충족이 아닌 공적인 속성을 띠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창조-타락-새창조의 맥락이 모두 복음의 공공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복음의 반대말은 사리사욕일지도 모르겠다.


아브라함 뿐만이 아닌 창세기 후반부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 속에서도,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삶을 가르치는 레위기 19장에서도, 구조적인 조정으로써 가난의 대물림을 없애며 온갖 질곡와 멍에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선포를 의미하는 희년법이 설명되는 레위기 25장에서도,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와 그일라 전투에서도, 우상숭배가 보여졌던 구약 여러 본문에서도, 그리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기록된 역사서에서도, 마지막으로 이사야를 중심으로 여러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회개를 선포했던 여러 예언서에서도, 김근주 교수는 공적인 복음의 본질을 낱낱이 파헤쳐 우리에게 조근조근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인 속성을 가지는 복음이 신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배경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렇게 저자의 구약을 죽 훑어가며 들춰내는 팩트 체크를 통해 우린 복음의 공공성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고, 그 동안 사리사욕을 위해 복음을 내면화하기에 급급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해준다.


책을 읽어오며 수 차례, 아니 수십 차례 저자의 숨막히는 구약 해설을 통해 압도당한 독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에 이르러, 공적 복음의 본질이 '이웃 사랑'으로 압축된다는 사실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그랬듯 말이다.


하나님나라가 어떤 곳인지 이 책을 읽고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이웃 사랑이라는 의미가 이젠 다르게 다가온다. 다분히 막연했던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 어떤 것인지 좀 더 선명해졌다. 죄와 사탄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상숭배의 숨은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좀 더 명확해졌다. 그 동안 이 책 저 책 읽어오며 산재되어있던 지식의 파편들이 복음의 공공성이란 개념에 의해 하나로 모아지는 느낌이다. 김근주 교수의 이 책 '복음의 공공성'을 보수와 진보를 떠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이 책을 통하여 숨겨졌고 잊혀졌던 복음의 본질을 뒤늦게나마 발견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나라 공동체가 곳곳에서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03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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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그날처럼 - 어느 치과의사의 일터신앙 이야기
이철규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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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읽는 속도에 비해 3배 정도 느리게 읽었다. 그만큼 책을 꼭꼭 씹어가며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은 꼭지는 평균 2-3페이지 정도로 짧고 쉽게 쓰여져 있고, 공감이 가는 글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져 페이지를 휙휙 넘기려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책을 가만히 덮고 묵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쉼호흡을 하고 책을 폈다. 저자의 삶에 녹아 있는 하나님나라를 충분히 느끼고 싶었고, 가능한 많은 것을 배우고 내 삶에 적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자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여겼다.


나 역시 직장 현장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하나님백성으로서 늘 신앙과 일치하는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인간으로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심정이리라 생각한다. 늘 마음 한 켠에 부담처럼 존재하면서도 딱히 정답이 없는 문제처럼, 아마도 나를 포함한 모든 하나님백성들에게 이 문제는 일종의 아킬레스건 같은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맹목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여정에 접어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인간의 존재와 창조의 섭리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점점 더 깊게 만드는 추진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에 뾰족한 정답이 있다고 말하진 않는다. 삶과 신앙의 일치는 공식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은 그러한 문제가 하나님백성의 삶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치과 의사라는 컨텍스트에서 작성된 하나의 모범 답안 정도가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찾아 오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과 생각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를 따스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책을 관통하는 큰 물줄기가 있다면 그것은 저자의 신학적 배경의 중추를 이루는 요한 계시록에 의거한 종말론적 삶과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 “오늘을 그날처럼”도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미래의 관점으로 현재는 사는 것. “여기서 (Here)” “지금 (오늘, Now)” 자신의 일상적 삶이 “거기서 (There)” “그날 (Then)” 완성될 하나님나라에 속함을 드러내는 것. 바로 하나님백성이 추구해야 할 사명이자 삶과 신앙의 방향일 것이다. 신앙과 일치된 삶은 바로 여기에서 근거한다.


저자의 진료실에 찾아온 하나님의 통치가 저자의 삶 전체에 임하게 되는 과정은 성령의 내주, 인도하심에 의한 점진적인 변화 (연속성)와 순간순간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은 은혜 (불연속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그의 삶에 개입하심을 (결국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실 수 있도록 그의 삶의 쓴 뿌리들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 고난으로 다가왔으나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일련의 과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연습을 지금도 부단히 해나가며 그의 삶 전체가 변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동의하게 될 것이다. 아, 역시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다. 저자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요, 동시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큰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 저자보다도 그의 안에 있는 예수님이 보인다. 내 안에도 같은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무뎌졌던 내 맘을 다시 감사함으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음을 물론이고, 나아가 나도 내 현장에서 믿음을 살아내는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신앙과 일치하는 삶이란 일회성의 사건이 아닐 뿐더러 그 결과를 우리의 삶에서 오감으로 늘 체감할 수 없기 때문에 자칫 그런 삶을 추구하면서 낙심할 수 있는데, 저자 역시 그런 과정을 겪어가며 하나님나라를 살아가고 있음을 보고 적지않은 위로가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연습이라는 평상시 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명제가 한번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난 답이 없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인해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믿음과 생활은 하나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는 문장이 맘에 꽂혔다. 사랑 없는 배려는 통제나 이해 타산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역으로 배려 없는 사랑 역시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는 말도 전적으로 동의가 되었다. 또한 미덕과 성품의 근육을 훈련해 강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당면 과제라는 사실도 아멘으로 화답했다.


공평과 정의를 비롯한 모든 성서적 가치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어 현존하는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왔다. 종말론적 윤리가 제거된 인간의 종교성은 결국은 소비주의와 신분 상승의 도구 외에 다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말에도 깊숙히 찔림을 받았다. 또한 종교와 생활로써의 기독교는 있을지 몰라도,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신앙으로써의 기독교는 찾아볼 수 없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복음의 공공성을 묵상하고 있는 요즈음 이철규 박사님의 “오늘을 그날처럼”은 내게 적시에 온 단비와도 같았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라는 답의 힌트를 크리스토퍼 라이트로부터 배웠고,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김근주 교수님으로부터 배웠다면, 이철규 박사님은 나에게 그 배움이 이론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현장에서 구현되어짐을 보여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나도 과학자라는 컨텍스트에서 하나의 실례가 되고 싶다.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행운으로 말미암는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직한 성실과 일상에서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그저 과학자의 삶에도 적용하는 일이 내가 할 몫이다. 그 열매가 어떻든 옳은 과정을 밟기를 다짐한다. 그 과정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과학자. 바로 내가 되길 간구한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4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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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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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짧은 책은 우리를 1세기 로마로 데려간다. 푸블리우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하여 우리는 브리스가 아굴라의 가정 교회를 방문하게 되고 그들의 삶의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아굴라를 인습에 매이지 않는 유대인으로 소개받은 푸블리우스는 아굴라가 자신이 알고 있던 유대인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아굴라의 과거 삶의 경험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동행했던 글레멘드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의미 있는 대답을 듣게 된다. 아굴라가 그 동안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인 이유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유는 글레멘드와 유오디아가 고린도에서부터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와 함께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새로운 관점은 예수 복음을 의미했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삶의 예배에 마침내 푸블리우스도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넘어 그것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좀 더 실제적이고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방인인 현재의 우리보다 유일신 하나님을 익히 알고, 로마에 속국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 중 하나였던 아굴라가 세계관의 변화를 겪고 이를 삶에서 반영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진정한 전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무릎이 탁 쳐졌다. 그 모습이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며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가며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평신도 전도자의 모습이라는 생각까지 진행이 되자 난 한동안 책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푸블리우스 일행이 브리스가 아굴라 집에 도착하여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즐기고 있는데, 아굴라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식사 준비를 하러 식당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푸블리우스는 이 분위기 전환을 예배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글레멘드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번에도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실제로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형식만 남은 가식적인 제사와 예배를 겨냥한 듯했다. 일상적인 삶 속에 스며들어 그것이 예배인지 삶인지 분간이 잘 안될 정도로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된 모습,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 할, 그리고 보여져야 마땅한 모습일 것이다.


한편, 이해하지 못해 브리스가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그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한 푸블리우스는 식탁에서 보통 최고 귀빈을 위한 자리에 앉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식사와 친교를 나누면서 그는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을 여러 번 포착한다.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가 신분상 차이가 분명히 나는 사람들을 맞이할 때 차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분상 식탁에서 그의 자리에 앉아야 할 아리스도불로와 그의 종 루시아와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모임의 모든 참석자들이 동일한 발언권을 가지고 열띤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광경에서도 푸블리우스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경험하게 된다.


식사와 교제 가운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던 성 만찬에서 푸블리우스는 예수 복음을 듣게 된다. 몸이 살려면 빵이 필요하듯 참 생명을 경험하려면 신의 독생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굴라는 이어서 그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얘기했고, 그분은 지금 모임에 함께 하신다고 기도했다. 푸블리우스는 아굴라의 기도 중 그 내용도 처음 듣는다는 이유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든 일이 바로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또 평범한 목소리로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하고 실제적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여태껏 생각하던 신에 대한 방식을 포함한 그 자신의 세계관과의 충돌을 한번 더 경험하게 된다.


아리스도불로의 종 루시아의 신분 해방에 대한 토론이 뾰족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무렵,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이 예전에 보낸 편지 속에 적힌 내용을 기억해낸다. 주인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종들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실제로 자유인임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였다. 덕분에 토론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대화가 바울의 판단 근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또한 푸블리우스조차 자신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이후에 진행되었던 순서에서도 푸블리우스는 자신이 짐작했던 종교적인 내용이라곤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친구 글레멘드 역시 아굴라처럼 자기 신이 마치 같은 방 안에 가까운 친구인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말투를 쓰며 기도하는 모습이나, 그 기도의 내용 중 '세상은 우리에게 온 신의 선물'이라는 말에서 또 한번 충격을 받게 된다. 너무나 당연시했던 것들이 모두 신의 손길에서 온다는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이 책은 푸블리우스의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처음 만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단지 첫 만남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세계관과의 첫 만남이며, 그로 인해 아무런 압력 없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변화의 기운이 싹트는 모습을 그리는 책이다. 푸블리우스는 책의 끝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상하게도 그들 (이미 예수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게 되고 삶에서 교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를 포함한 그 일행)에게는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들의 행동에는 틀림없이 실제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초청받은 다음 주 모임에 갈지 안 갈지 결정은 아직 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가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삶에 녹아 든 복음, 일상과 일치된 하나님나라,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현재 우리들의 예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가상의 이야기로 보여주며 이 책의 저자가 현재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난 제 2의 푸블리우스가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 아니 교회인 나 자신으로부터도 같은 메시지를 받길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것은 객체지향적인 전도 방법을 연구하거나,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커다란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열심을 내거나, 언제나 새신자 환영 코스프레하듯 가식적인 스마일을 지으려고 노력하거나, 마치 아무런 근심이 없는 척하며 가짜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신앙을 살아내는 것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말이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4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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