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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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경계에 서서.


J. D. 샐린저 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책 제목의 의미를 처음으로 눈치챌 수 있는 장면은, 주인공 ‘홀든’이 여동생 ‘피비’에게 선물할 레코드 음반을 사기 위해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걸어가고 있을 무렵 들려온 한 꼬마의 노래에서다. 그 꼬마는 “호밀밭을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을 부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지나가는 차들의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관통했고, 그 꼬마 부모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홀든의 귀까지 전달되었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잠입한 자기 집에서 피비를 깨워 얘기를 나누던 중, 좋아하는 한 가지만 말해보라는 피비의 질문에 홀든이 머뭇거리다가 답한 장면에서 비로소 그 뜻은 명확해진다. 다분히 문학적이고 순수하며 이상적인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홀든은 이미 여러 차례 퇴학이나 자퇴로 고등학교를 그만 둔 이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펜시’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이번에도 퇴학을 당했다. 이 책은 퇴학이 결정된 후, 아직 부모에게 공식적으로 통보되기 전의 며칠 간, 홀든이 학교를 먼저 떠나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방황 기간을 주로 다룬다. 홀든은 부모님이 공식적인 퇴학 통보를 받기 전, 그러니까 방학이 시작되기 전 집으로 들어간다면 받게 될 뻔한 의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홀든은 학교를 떠나 집이 있는 뉴욕으로 향한다. 호텔에서 머물며 그 시대 어른들이 하던 위선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에 그대로 노출된다. 이미 직간접적으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아직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홀든은 어른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대우받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어른처럼 술을 시켜서 먹고 싶고, 담배도 당당하게 피고 싶고, 여자와 섹스도 하고 싶어하는, 즉 고등학생이면 의례히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될 욕구를 충족하길 원했던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홀든이 원하는대로 거의 이뤄지지도 않았지만, 홀든이 보여주는 행동과 말들, 그 안에 흐르는 그의 생각의 흐름과 감정의 변화,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여 보여지고 들려오는 어른들의 행동과 말들을 보며, 난 지금도 거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저자인 샐린저가 하필이면 평범하지 않은 한 고등학생의 눈으로 그 당시 미국 사회 (이 책의 출판은 1951년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를 바라보며, 때론 직설적이고 때론 냉소적인 표현을 동원하여 미국을 그려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미국이 아닌 모든 기성세대에게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가식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제목에 힌트가 있다고 본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중간인,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으며, 어른들의 세계가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답습하려는 생존본능과 그것에 저항하려는 욕구 사이에 놓인 강을 아직 건너지 않은 한 청소년의 눈에 비쳐진 세계를 통해 샐린저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인 것이다. 이미 정립된 기성세대의 관점으로 봤을 땐 바보 같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홀든은 기꺼이 사랑스런 여동생 피비와 같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한다. 호밀밭은 낭떠러지와 닿아 있다. 그 낭떠러지는 아마도 기성세대가 정립한, 마치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이나 퇴폐적인 술집과 호텔 같은, 세상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마구 뛰어놀기만 할 뿐, 그 어린아이의 세계가 낭떠러지와도 같은 어른들의 세계와 맞닿아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중간인으로 나오는 주인공 홀든은 그 경계를 알고 있다. 강을 건너려고 시도도 해봤다 (홀든이 퇴학생으로 그려진 숨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홀든의 고백으로 보아선, 여느 청소년들이 가는 그 길을 가지 않고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남는 위대한 결단을 나중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공부도 잘 하고 잘난 학생들의 눈에는 자기애와 욕심에 눈이 멀어, 낭떠러지라는 실체가 그저 살아남고 밟고 일어서기 위하여 계속해서 올라가야 할 피라미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아주 평범하다고도 볼 수 있는 홀든의 눈에는, 오히려 두 세계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였고, 아이들의 세계가 가진 가치가 훨씬 더 소중하게 여겨진 것이다. 인생을 바쳐 보호하고 싶을만큼.


나도 한 때 피비처럼 아이였고, 홀든처럼 중간인이었으며, 이젠 그 시기를 훌쩍 뛰어넘어 기성세대가 되었고, 피비와도 같은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일개 범인이다. 홀든과는 달리 난 경제적 배경이 전무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지만, 이렇다할 큰 어려움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물론 홀든을 통한 저자 샐린저의 관점이 녹아있는 책이겠지만, 난 홀든의 나이일 때 홀든이 했던 고민과 생각들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홀든보다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세상과 사회에 대한, 기성세대에 대한 부조리와 위선에 대해서는 그리 큰 의문을 가져보지도 않았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다가온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사적인 복음만을 강조했고, 이는 나의 내면의 평안과 생존과 번영만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들었다. 공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며 평안과 평화를 도모하는 세상이 허공에 뜬 이론이 되지 않기 위해선, 현재 내가 처한 좌표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고 적실하게 말이다. 이런 면에서 홀든은 나보다 훨신 나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미국 나이로 마흔 하나가 되어버린 나. 전체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아온 나. 몇 년 전에서야 홀든이 가졌던 생각들을 하게 되었던 나.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전진한다. 의로운 세상을 위한 삶을 살기를 도전한다. 꺼져가는 등불이나 상한 갈대와도 같은 자이지만, 결코 꺼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라는 소망을 가지고서.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받는 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바로 이런 세상이 샐린저가 홀든을 통해 꿈꿨던 세상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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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기독교 - 개정판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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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눈을 통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고찰하다.


강남순 저, '페미니즘과 기독교'를 읽고.


'결함이 있는 남성', '잘못된 남성', '악을 가져오는 위험한 존재'. 자,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렇다. 놀랍게도, 우리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아내, 우리의 딸,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 10달 간 머물렀던 자궁의 주인이자 우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바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어처구니 없는 여성에 대한 표현들이 어떤 정신병자에 의한 오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유명한 철학자와 신학자 (모두 남성이다), 각각 이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한 여성에 대한 이해였다. 누군가는 세 위인 모두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며 적당히 이해해보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질없는 시도다.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였던 마르틴 루터조차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 이후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았고, 또 다른 종교개혁가 존 칼빈도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신의 창조질서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굳이 수 세기 전에 이미 사라진 위인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그 어디나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위주로 된 문화 시스템들이 마치 물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소위 ‘자연스럽다’고 하는 많은 법과 규범, 질서와 체제, 그리고 문화를 바라보는 눈이, 사실은 색안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착용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 색안경이 우리 눈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전혀 이상함을 못 느낄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숨쉬듯 자연스러운 가부장적인 제도에 노출되는 우리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와 배제, 차별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우리 눈에 부착된 색안경을 인지하고 뜯어내는 작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이 시대의 키워드를 통해서 말이다.


강남순 교수의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나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나 강연 등을 부끄럽게도 여태껏 직접 접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수준의 책이다. 이 책에는 페미니즘의 간략한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가중시키고 대중화시켜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각인이 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가 페미니즘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다층적이고도 심층적인 대답을 찬찬히 해나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의외의 상황 파악에 섬뜩할 정도로 놀란 부분이 있다. 가부장주의적인 교육과 가치관의 내면화가 견고해질대로 견고해져 급기야 일종의 카르텔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가져다 주는 안정감에 익숙해진 존재가 남성 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여성 스스로도 자신의 해방을 위한 페미니즘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지도자를 선택할 때도 여성보다는 남성을 더 지지하고 신뢰하게 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대부분 피해자의 위치에 놓였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해방보다는, 비록 남성의존적이고 불합리하고 불의하더라도 그 상황이 가져다 주는 모종의 안정감에 길들여져버려 그 상황을 지속하길 원하게 되는,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난 이 부분에서 최근에 읽었던 모세오경 중 민수기 편이 생각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억눌렸던 노예체제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하기보다, 광야생활 중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기만 하면 차라리 그 노예 시절이 더 나았다고, 차라리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불평, 불만하는 상황과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인된 노예근성이 구원 받은 하나님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오랫동안 이어져온 가부장주의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여성들에게 각인된 억압근성이 여성 평등을 넘어 성, 인종, 사회적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의외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천부인권설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가 오히려 여성 혐오, 배제, 차별을 합리화시켜 버리고 남성우월주의를 마치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것처럼 만들어버린 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으로서 나도 수치를 느낀다. 먼 과거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성 차별은 존 파이퍼 같은 유명한 목사들에 의해서도 현재진행형으로 왕성하게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재미난 사실은, 이렇게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기독교 리더들도 자신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서의 근거는 그 자신이나 그가 속하고 자라온 교단이나 전통이 부여한 편향적인 해석에 불과할 뿐 하나님이 직접 지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해석을 진리로 착각하고, 또 전통성이 그것을 진리로 만들어줄 것처럼 여기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분명 반성과 회개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교적 남성우월주의가 진하게 묻어있는 기독교에 마음과 생각이 물들어있을 것이므로, 이 책을 꼭 한 번쯤은 읽어보길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본인이 은연 중 가지고 있을, 여성이 '자연스럽게' 배제된 기독교 신앙이 과연 진정한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과감하게 던져보길 바란다. 강남순 교수도 지적했듯,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양립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선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생각해야 비로소 본 질문에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영점 위치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페미니즘이 어떻게 생성되고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배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용도로도 읽힐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눈과 일체가 되어버린 가부장적인 색안경의 실체를 인지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찰해보며 스스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조금이라도 수정이 가한다면, 아마도 이 책의 저자, 강남순 교수의 목적과 바람이 절반 정도는 성취되지 않을까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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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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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김승섭 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많지 않은 분량에 훌륭한 가독성,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의 인품이 묻어나는 친절한 필체 덕분에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막히지 않고 책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술술 읽혔다고 해서 이 책이 가볍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책을 이루고 있는 이야기들은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책은 저의 공감을 넘어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전달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가 바라는 세상 사이에 나있는, 그 동안 잘 보이지 않았거나 어쩌면 아예 보길 원하지 않았던, 깊고 어두운 계곡을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가 이 땅에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제가 속한 사회가 아픔이 생겨도 깊은 흉터 없이 치유될 수 있을 만큼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저와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만큼 이 책은, 인간이라면 가져야 마땅할 보편적인 가치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후, 객관적인 자료를 모아 의미심장한 결과를 도출해내고,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해내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다시 점검하도록 도와주는, 한 마디로 이 시대의 훌륭한 자정작용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입니다.


이 책은 이미 여러 곳에 실렸거나 연재되었던 짧은 글들의 모음집입니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이면서 낱개로 있었던 글들이 각기 하나의 중요한 장기가 되어 살아있는 하나의 큰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부제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만 봐도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지요.


저자 김승섭 교수는 여러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사회역학자입니다. 사회적 원인으로 어떤 질병이 발생했다면, 아무래도 그 질병은 기득권 세력이 아닌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되기 마련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어두운 면에 달라붙어 기생하며 사회의 기득권을 누리면서 그 힘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탕진하는 자들에게 있어선, 서민들의 인권이나 복지 따위는 언제든지 희생해도 되는 가치일 뿐일 테니까요.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과 한을 마주하고 함께 하는 건 사회역학자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김승섭 교수는 시대에 부응하는 학자로서 한국 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책은 단적으로 이를 증명하는 셈이지요.


책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한국은 국가적, 사회적 재앙이나 재난에 대응, 대처하는 능력은 물론, 재앙과 재난 이후를 처리하는 능력까지도 현저하게 떨어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사례에 대한 저자의 연구 결과와 해석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제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과연 이 나라에 희망이 남아 있을까 하는 염려도 되었습니다. 비록 경제 성장을 단기간에 이룩해낸 국가이지만, 그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차별과 배제, 혐오와 낙인 찍기 등으로 심하게 얼룩져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똑같은 태양 아래이지만 사회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약자들의 아픔을 직시하고 공감하고 경청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들이기도 했고, 생명을 담보로 하기도 했던 불의한 폭력 앞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이기도 했으며, 사회에 암묵적으로 만연한 승자독식, 약육강식 체제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억눌린 자들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소수자이기도 했고, 참사 이후의 생존자들과 그의 가족이기도 했으며, 지금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고스란히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때로는 그들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민감한 질문까지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에게 부당하게 전가되었던 사회적 질병의 원인의 주인을 되찾아주고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동안의 많은 과거 사례들에서와 같이 보통 역사에 남지 않는 약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해두기 위해서는, 사실 그대로의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수 차례 거쳐왔기 때문에 이런 귀한 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돌 같은 마음을 가진 저에게까지도 전달되어 저로 하여금 사회 참여자로서 살아야겠다는 구체적인 다짐까지도 하게 만들었답니다.


무분별하게 부당한 희생을 당한 약자들이 자꾸만 생겨나는 원인이 사회구조적 이유라면, 이를 역으로 생각할 때, 그 사회공동체의 건강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치유책이 될 것입니다. 저자는 심장병 발생이 유난히 적었던 로세토 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확신,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함께 해줄 것이라는 확신은 기꺼이 힘겨운 삶을 꾸려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292 페이지)"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얼마나 거대하고 또 중요한지에 대해서요. 당신에게도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 우리의 공동체는 안녕하신지요? (295-296 페이지)" 저도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어떤가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김승섭 교수는 말합니다. "우리 이기심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요. (297 페이지)" 그렇습니다. 사회역학자인 저자는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물으면서, 그 사회구조 이면에 놓인 원인의 원인을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공동체,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며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공동체, 약하고 가난한 자나 억눌리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구제 받고 신원 받는 공동체, 기득권을 내려놓고 서로 나누고 돕는 공동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참으로 인간다운 공동체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결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일개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이 책에서 꿈꾸는 정의로운 건강이 회복되는 공동체가 바로 구약이 끊임없이 말하는 공의와 정의가 행해지는 하나님나라와도 많이 닮았다는 점을 발견하며, 아픔이 길이 될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눈과 귀를 열고 이웃들에게 더욱 사랑을 실천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승섭 교수님. 약자들의 아픔을 눈물로 보게 해주시고 신앙을 넘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알게 해주셔서요. '나'를 넘어 '남'을 향하는 삶을 살도록 저도 열심히 노력할게요.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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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객 을유세계문학전집 20
헤르만 헤세 지음, 김현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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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이 아닌 화음.

헤르만 헤세 저, ‘요양객’을 읽고.

저자인 헤세 스스로가 ‘가장 개인적이고 진지한 책’이라고 평가한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닌 그의 자전적 수기다. 또한 이 작품은 대대로 한국에서 헤세 전집 (선집 혹은 콜렉션)을 출판했던 성창 출판사, 선영사, 민음사, 현대문학 모두 그들의 전집 목록에서 제외시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헤세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연이 아닌 이상 아마도 처음 듣는 제목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나도 작년 현대문학판으로 헤세 선집을 다 읽고난 이후, 헤세를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읽고 싶은 미련과 갈증이 남아 일부러 그의 연대기를 추적하여 모든 작품 목록을 조사한 뒤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나 전집 목록에서 제외된 작품들을 모아 틈이 날 때마다 읽어오고 있었다. ‘요양객’도 그 중 하나다. 

누구의 입도 빌리지 않고 직접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일기처럼 혹은 회고록처럼 기록한 수기이기 때문에 그가 이 작품을 가장 개인적이고 진지한 책이라고 평가했던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금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이 책에서 일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헤세의 목소리에서 ‘유리알 유희’의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황야의 늑대’에 등장한 하리 할러의 고뇌가 느껴지는 듯 했으며, ‘싯다르타’에서의 싯다르타의 번뇌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모든 피조물에는 조물주의 흔적이 남는 것일까.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그렇게 듣고 느꼈던 것은 그들 모두가 헤세가 창조해낸 그의 분신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헤세는 조물주로서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또 고유한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을 창조해내고, 분열된 자아를 대입시킨 뒤 서로를 대립시켜서 갈등을 유도해내곤 했지만, 그것의 목적은 결코 분열 자체나 분열로 인한 혼돈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분열을 넘어선 합일이었다. 성장을 통한 실현이었다. 헤세는 모든 작품에서 각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분열된 자아의 변증법적 성장을 통하여 합일을 추구하면서 우리에게는 다양하지만 결국 하나인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합일성. 이 단어는 헤세의 사상을 한 번에 정리해주는 단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헤세는 서양 철학과 심리학은 물론이며 동양의 여러 종교와 사상까지도 흡수했던 작가였다. 그는 전업 작가였지만,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으며, 방랑자이자 은둔자이기도 했고, 또한 구도자였다.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 인도의 '우파니샤드'에도 몰두했었으며, 중국의 '논어'와 '맹자'는 물론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서평을 쓸 만큼 도가 사상에 대해서도 심취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불교의 열반과 노자의 도가 결국엔 같은 것이라고 여겼으며,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도가 사상이 한데 잘 어우러진 그의 정신세계는 '싯다르타'에서 특히 잘 표현되어있다. 그는 힌두교의 아트만과 기독교의 은총을 동일시하기도 했으며, 자아의 의미와 본질은 자아를 도외시한 채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 내면으로 향하는 도정에서부터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든 만유를 조화롭게 일치시켜 합일성을 지향하는 것만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일견에는 양극으로 분열된 것처럼 혼돈으로 보이나, 그것들은 결국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며 조화로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거대한 실체로 보았던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다양한 종교와 사상도 아마 헤세에게 있어서는 합일성이라는 단어로 이해되고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헤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는 특징인 ‘자아의 분열과 대립을 통한 성장’의 목적지는 바로 합일성을 추구하는 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었으며, 그때서야 비로소 자아의 실현도 가능한 것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헤세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작품에서보다 헤세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시민적 삶과 예술가적 삶의 양극 사이에 놓인 긴장 가운데 부유하며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십 대 중반,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헤세는 신경통과 통풍에 시달리며 스위스 바덴이라는 도시로 요양을 가게 된다. 그곳은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작가가 아닌 환자로서 수동적인 일과를 따르며 살게 되는데, 육신의 고통과 더불어 그에게는 정신적인 퇴행을 경험한 순간으로 기록될 뻔하기도 했던 기간이었다. 특히나 고독한 은둔자 스타일이었던 그가 도처에서  치료와 요양을 위해 찾아온 다양한 환자들과 집단 생활을 하며 정해진 일과표를 지켜가며 하루를 살아내는 것은 그에게는 예술가적인 삶에서 벗어나 시민적 삶을 맛보는 일방적이고도 낯선 경험이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헤세는 예술가적인 정신을 고수하려고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혼자 한적한 곳을 찾아 사색에 잠기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움직일 때마다 쑤셔오는 허리와 다리를 붙잡으며 온천욕을 해야 했고,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다녀야 했으며, 기름진 음식을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먹어야 했고, 유쾌하지도 않은 쇼를 함께 보거나 도박과 게임을 하며 사람들과 부대껴야 했다. 그의 옆방에서 거주했던 어느 네덜란드 사람에 대한 그의 기록을 보면, 헤세 역시 여느 평범한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하고 고뇌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어떤 인간미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나중에 그는 그런 시민적인 삶에 길들여져갔고, 그 삶에서 흥도 느끼는 등 본래의 그가 추구했던 것들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아내면서 그는 끊임없이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요양소에 머무는 기간이 끝나갈 무렵, 양극으로 분열된 두 가지의 삶을 완전히 단절시키거나 대립시키지 않고, ‘합일성’의 개념으로 정리를 하며, 그러한 긴장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자신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직접 요양소에서 겪은 경험 속에서도 양극으로 분열된 두 가지의 모습을 조화롭게 하나로 일치시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작가란 언제나 그러한 도정 가운데 있는 구도자임을 시인하게 된 것이었다. 다음은 그의 정리된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선율과 반대 선율이 항상 들리고, 그래서 모든 다채로움에는 항상 합일성이 병존하고, 모든 익살에는 항상 진지함이 병존하는 단원과 문장을 쓰고 싶다.”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작가 헤세. 그의 깊은 사색과 통찰은 언제 만나도 내게 영감을 준다. 다시 만나 반가웠다. 언젠간 그의 모든 작품을 읽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1. 수레바퀴 밑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43022562409185

2. 싯다르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50722494972525

3. 게르트루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4071523637622

4. 페터 카멘친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9595666418541

5. 황야의 늑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93746594003448 

6. 크눌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04866382891469

7. 로스할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44402088937898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906654982712608

9. 데미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71433049568136

10. 유리알 유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61378043906966

11. 요양객: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13336575377776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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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초월한 공동체 믿음의 글들 353
최종원 지음 / 홍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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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공부로 더욱 풍성한 하나님나라를!


최종원 저,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를 읽고.


역사가 돌고 돈다고 하는 건 단순히 동일하거나 비슷한 일의 반복 재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은 인간의 거시적인 패턴이다 (이런 면에서 역사는 인간의 집단 심리를 연구하기에 아주 좋은 데이터베이스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주로 승자에 의해 기록되어지는 역사이고, 비록 각기 다른 사회 구조와 사상과 문화 배경을 가진 공동체에서 기록되어졌다 해도, 각 역사에는 고유의 흐름이 있고 스토리가 있으며, 또 거기엔 패턴이 존재한다. 


인간은 각자가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 모여 이룬 공동체나 국가적인 차원에선 그 다양한 개성이 소멸되거나 말살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성의 수와 편차는 개개인의 차원에서와는 달리 집단적인 차원에서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인간으로 이루어진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공동의 이익이라는 명목 하에 행해지는 집단 이기주의를 앞장서서 실현하려는 집권 세력이 있기 마련이며, 이들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거부하여 반대하는 세력도 있기 마련이다. 집권 세력은 그들이 가진 힘과 정치를 동원하여 반대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교화하거나 소멸하려고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한다. 때론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때론 실패를 거듭하기도 한다. 반면, 이에 반하는 소수의 세력(들)은 때가 되었을 때 집권 세력의 불의와 만행을 고발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그들과 직간접적으로 싸우게 된다. 갑과 을의 관계가 자명해지고, 승자독식의 체계가 당연시되며, 선과 악의 기준은 카멜레온처럼 그때그때 바뀌어간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운명은 언제간 끝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영원히 지속되는 제국이나 국가는 없었다. 이들은 생명체와 같아서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이다.


역사는 어느 한 순간도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 유일성을 가지지만, 그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건들을 모두 모아 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 커다란 패턴이 보인다. 이는 지금도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고 있을 역사의 한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지나온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갈 뿐이지만, 과거의 연장선에 있으며, 쉬지 않고 미래를 갉아먹는 현재의 톱니바퀴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하나로 꿰뚫는, 비록 가늘지라도, 여러 개의 패턴을 인식하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오늘이라는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겐 분명 지혜자의 선물이 될 것이다.


언제 봐도 어지러운 한국 교회의 상황은 갈수록 그 수위를 더해가는 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교회에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는 마지노선의 주장도 이젠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병폐가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와 우상이 되었고, 이는 여러 대형교회의 목사들을 포함하여 허다하게 많은 점잖은 교인들을 맘몬의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세습이 상습이 되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소견대로 정한 선과 악의 기준에 어긋날 경우, 비교적 힘이 약한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그 상대를 이단으로 낙인 찍는 일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피 흘리기에 발 빠르고, 언제나 상석에 앉아 수근대기를 좋아하는 작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에서 언제나 존재해왔다. 


정통성을 지킨다는 명분 하에 저지르는 그들의 많은 만행들이 모두 역사에 기록되고 있음을 그들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교회사에서 이미 오래된 패턴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들의 영악함이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에 대해서도 그들은 숙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럴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정작 역사를 공부해야 할 이들은 늘 공부하지 않는 선생 자리를 꿰차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역시 역사가 보여주는 한 패턴일지도 모르겠다. 악은 진부한 법이다.


이런 판국에 최종원 교수를 통해 초대교회사를 들여다보게 된 것은 시의 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한국 교회를 고민하며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역사는 파멸의 패턴도 보여주고 생성과 회복의 패턴도 보여준다. 한국 교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멀찌감치 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나는 후자이길 소망해 마지 않는다. 회복 이전 응당 있어야 할 아픔이 크지 않길 바란다. 아물지 않은 상처는 암으로 발전할 뿐이다. 


저자의 일관된 목소리 중 하나는, 교회 역사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의 형성 과정의 기록이 아닌, 세상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있었던 상호작용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학자 배경이 아닌 역사학자 배경의 저자가 교회사를 연구하고 정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읽게 해주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진 큰 강점이다. 기존의 교회사를 바라보는 각도와 안경을 바꿔 다시 읽는 방법으로 쓰여진 이 책은 그야말로 교회의 역사를 교회 밖에서 보다 공정하게 바라본 중요한 기록이라 생각한다. 나처럼 교회사에 대해 책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좋은 교회사 입문서가 되리라 확신한다.


교회사에서는 정통이라 자처하는 주류 교회가 스스로 반성을 거치는 정화 작용을 통해 본질을 회복하고 변화를 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예언자적인 목소리들은 있어왔다. 그들은 수도원 운동의 모습으로도 존재했고, 어떤 기독교 학파의 모습으로도 존재했었다.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한국 교회도 역사적인 정통과 이단의 이분법을 넘어서 다양한 목소리들을 경청하고 공감하여 교회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온전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원해본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더욱 낮은 곳으로 움직여야 하고 다름을 틀림으로 만들지 않아야 하며 타자를 관용하는 모습으로 더욱 풍성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5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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