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양장)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 옮김 / IVP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유진 피터슨 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IVP 출판)을 읽고.


정갈하면서도 뼈가 있고,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을 만난다는 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커다란 행운이다. 그 글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보석 같은 메시지를 들추어내어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때보다 더 큰 신선함과 놀라움, 그리고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을 조용히 전달해주는 글. 난 이런 글을 만날 때면 어느새 경건한 자가 되어 한층 더 낮아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마침내 나를 넘어서는 기로에 서게 된다. 벽을 뛰어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영문판, 원서 제목은 'Leap over a wall'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야 처음으로 만난 유진 피터슨의 저서,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은 내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다윗의 이야기가 주로 적힌 사무엘 상하서를 기본 틀로 하여, 유진 피터슨은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들어 익숙한 이야기에서부터, 비록 잘 알려져 있진 않으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에 이르기까지, 때론 상상력을 발휘하여 총 스무 개의 에피소드를 짤막하게 다시 들려 주며, 그것들이 가진 깊은 의미를 캐내어 현재 우리가 숨쉬고 있는 21세기로 소환해낸다.


2천 년이 훨씬 지난 다윗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걸어오는 말을 통해 저자가 소환해낸 메시지는 좌로나 우로, 혹은 도덕주의나 세속주의로 치우친 영성이 아니다. 제목이 분명하게 말해주듯, 그가 책에서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영성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밟고 있는 이 땅, 이 현실에 철저히 뿌리박은 영성이다. 눈물을 자아내고 적당한 반성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힘은 있으나 구름 속에 있어 손에 잡히지 않는, '영성'이란 탈을 쓴 막연한 '감상'은 결코 세상 속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이 될 수 없다.


다윗 이야기에는 우리가 흔히 정의하는 기적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으며, 저자는 다윗 이야기야말로 현실에 기반한 하나님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을 인식하고 올바른 영성을 기르는 데 적절하다고 말한다. 다윗은 제사장도 아니었고, 선지자도 아니었다. 그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위대한 사무엘이 방문했을 때조차 그의 앞에 데려오지 않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만큼 주목할 것 하나 없는 막내였고, 그저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는 평범했다.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독차지하지도 않았다. 그에겐 신비한 힘이 솟는 머리카락도 없었고, 기도할 때마다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도 없었다. 알고 보면 다윗은 그야말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일개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은 거룩한 성소나, 제사장들의 구별된 장소나, 기적을 일으키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신비한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나라는 우리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 실재하며 거기에 충만하게 임한다.


영성은 어떤 신비한 힘을 뜻하지 않는다. 영성이란 인간이 신격화되는 모습이 아닌, 가장 인간다워지는 모습에 있다. 그리고 이는 곧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모든 하나님백성이 지녀야 할 궁극적인 모습일 것이다. 원래 창조된 인간으로 회복되어지는 여정, 우리는 이를 성화 과정이라고도 하고, 영성이 훈련되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을 감히 일상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우리는 모두 천로역정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한 영성 훈련이란 우리의 힘을 키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어떤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쓰임 받는 깨끗하고 투명한 질그릇이 되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거기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만이 언제나 가장 우선시되는 현장이다. 그리고 그 현장은 바로 우리의 일상,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메시지일 것이다. 바로 그때 우린 현실에 가로막힌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우린 다윗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영성을 배우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벽을 뛰어넘는 현장은 곧 우리 자신을 뛰어넘는 현장이며, 사탄의 체제에 대항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땅을 일구는 현장일 것이다.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들의 일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 받고 나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계략으로 곤경에 처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갈 정도로 환란을 겪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늘 침묵만을 지키고 계신 것만 같다. 그 세력은 힘이 있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일 때도 많다. 때론 사탄의 체제 아래 놓여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질서를 지키며 연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정의와 공의의 기준조차 애매모호해질 때 쯤이면 우린 자신의 존재까지도 원망하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충동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지만,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문제들은 안팎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터진다. 승승장구할 때도 경험하지만, 바로 그때 유혹에 휘말려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셨고 또 계속해서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조차도, 죄와 악으로 가득 차 제거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조차도 모두 합하여 선을 이루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란을 이겨내는 묘안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부족함을 메우는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신뢰하며 소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부족함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일상이라는 인생 여정을 통하여 결국 우리가 얻는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영성이다.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하나님나라의 영성은 죄와 악으로 물든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다. 어두운 땅 속에 박힌 씨앗 하나가 발아하여 대지를 뚫고 나오는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그 견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 생명이 충만한 영성은 죄와 악으로 물든 현실이라는 대지를 뚫고 나와 바로 그곳에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만드는 힘이다. 후회와 미련, 원망과 절망으로 가득하고, 철저히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해 보이는 우리들의 현실 속에 깊게 뿌리내린 영성이야말로 생명이 있기에, 바로 그 생명은 하나님이기에, 마침내 싹을 틔우고, 그 대지를 뚫고 자라나 열매를 맺고,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다.


다윗을 생각한다. 양치기에서 소년 영웅으로, 궁중 악사로, 도망자로, 작은 공동체의 리더로, 왕으로, 그리고 모든 힘을 내려놓고 무릎 꿇고 앉아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할 줄 알았던 하나님백성, 다윗. 다윗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인 나를 돌아본다. 내 현장을 돌아본다. 영성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 여정과 현재 나의 일상 속에 거하는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근력, 그 작은 몸부림. 나를 통해서도 누군가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꺾임조차도 생명의 빛에 의하여 굴절되어 무지개가 되고, 남에게 힘이 되는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4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완 윌리엄스 대표작 세트 - 전2권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제자가 된다는 것 로완 윌리엄스 신앙의 기초 3부작
로완 윌리엄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겸손: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로완 윌리엄스 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읽고.

 

진리처럼 믿어왔던 것들이 하나의 의견에 불과할 수 있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서있던 자리가 치우친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언젠간 그 시간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닫혀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꾹 잠겨있던 녹슨 눈과 거미줄 쳐진 귀가 마침내 열리는 순간, 누군가에겐 자신이 쌓고 지켜왔던 성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인생의 극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기꺼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겐 한동안 놓고 있던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삶을 재조정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대학생 때 교회를 잠시 떠나기까지 다녔던 여러 교회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다시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였다. 내가 배워서 알고 있던 기독교에 관한 모든 정보는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교단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내게는 오직 그곳에서 배워 처음 알게 되었던 지식이 기독교와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전부였다.

 

불행하게도, 별 문제가 없었다. 교회에서는 신앙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으로 통했다 (공부 잘하는 인간이 교회에 결석하지 않고 출석하며, 질문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기까지 하면, 백이면 백 신앙 좋다는 소리 듣는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지금도 그러리라는 데에 오백원 건다). 그러나 내게도 어느 날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그 일련의 과정이 처음엔 인생의 극소점을 넘어 최소점으로 다가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가 아닌 기회이자 발판으로 재해석되어지기 시작했으며, 나중엔 그때를 생각하면서 현재 내 삶의 키를 재조정하는 기억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때였다. 내가 알고 믿었던 것들이 가졌던 찬란한 유일성과 엄숙한 절대성이 깨어지게 된 건. 메커니즘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위치한 지점이 가운데가 아니라 상당히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름 좀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기독교 관련 지식들이 하나의 해석이나 주장에 불과한 게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주 작아졌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여러 교파가 기독교라는 지붕 아래 존재한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성공회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라고 이해하면 성공회를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내가 읽었던 신학책의 꽤 많은 저자들이 성공회 배경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번에 처음 접한 로완 윌리엄스 또한 성공회 소속 신학자이다. 그는 천 년 전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성 안셀무스 이후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지도자라는 평까지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을 가진 아주 짧지만 묵직한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요소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할 가장 핵심 요소 네 가지를 친절하게 풀어준다. 자상한 선생님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려주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세례와 성경, 성찬례와 기도, 이 네 가지에 관한 지식은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배워왔던 기본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또 한 번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 전부가 아니었고, 상당히 편향되어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도 신학적인 요소들이 매일 접하는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 거룩한 백성의 참 의미가 결코 어떤 위력을 행사하며 겉으로 드러난 집단이나, 저기 산 속에 따로 존재하는 은둔형 단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죄악과 혼돈이 가득하고 여전히 유혹이 넘쳐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그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요, 그 세상과 똑같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 세상 속에 존재하되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 연약하고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나도 용기 내어 몸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 세상 속에 존재하는 죄악과 혼돈을 피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맞서는 것, 그 삶을 기꺼이 끌어안는 것, 모든 사람을 섬기며 모든 사람에게 복이 임하길 간구하는 것, 그러나 위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것, 그래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도움을 구하여 우리가 쓰여지는 것, 예언자적인 사명으로 불의와 죄악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 상하좌우의 모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다리를 놓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더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고, 예전엔 몰랐던 많은 숨겨진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간다. 성공회 대주교의 글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모범답안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것 또한 만남의 축복이라 믿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운다는 것은 어느 정상에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만해지지 않기 위함이다. 세상엔 정말 탐험할 것이 많아 교만해진다는 건 곧 옹색함이요 게으름이며, 용기 없음일지도 모른다. 조만간 성공회 교회를 찾아 예배에 직접 참석해봐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4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길 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지음, 김유리 옮김 / IVP / 200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동체라 외롭지 않을 순례자의 여정.

유진 피터슨 저, '한 길 가는 순례자'를 읽고.

'지금, 여기'를 누리는 종말론적 신앙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순례자들의 삶의 자세다. 결코 일회성 쾌락을 추구하는 관광객들의 그것이 아니다. 비록 종말론적 신앙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지만, 그 의미는, 과거로부터의 맥락이나 미래를 향한 소망도 없이 그저 오늘을 말초적으로 즐기자는 한탕주의와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오늘은 어제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왕이신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오시어 완전한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내일을 소망하는 간절한 현재다. 제자 된 그리스도인의 순례 여정에는 관광객들에게는 없는 목적지가 있다. 평생의 여정이 한 곳, 즉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다.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이것은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쓴 동기가 된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에서 인용한 문구다. 마치 관광객의 구미에 맞는 상품처럼 짜맞춰지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의 실태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그 종교 안에서 목적도 순종도 없이 즉흥적인 입맛만을 만족시키며 살아가는 현대판 그리스도인을 비판하면서, 제자와 순례자의 정체성을 띠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자세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기 위해서다. 첫 장에서부터 그는 예수의 제자도를 강조하며 따끔하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관광객의 자세로는 성숙할 수 없다."

이 책은 시편 120 - 134편, 흔히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라고 알려진 15편의 시편 본문을 골자로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깊은 기도 생활 없이는 결코 길고 긴 순종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과, 소개하는 15편의 시편 본문이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장기간에 걸쳐 그들의 모든 삶을 기도로 옮기고 또 그들이 기도한 그대로 살기를 배울 수 있는 주요 방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또한,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로 살기로 다짐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안내서와 지도로서의 실용성뿐 아니라, 여행 노래로서의 흥겨움까지도 겸비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우리들이 이 15편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로 다시 기도하길 권고한다. 

제자도를 다시 짚어주면서 시작한 이 책은 15편의 시편 본문에 각각 의미를 부여하며 한 편 한 편 묵상해 나간다. 15편에 해당되는 15개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각 장의 제목이다). 회개, 섭리, 예배, 섬김, 도움, 안전, 기쁨, 일, 행복, 인내, 소망, 겸손, 순종, 공동체, 송축. 이 단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한 길 가는 순례자의 여정에 있어 필수 코스 같은 인상을 준다. 회개로 시작하여 송축으로 끝나는 여정, 곧 예수의 제자 된 그리스도인의 인생이 아닐까. 비록 이 15편은 히브리 순례자들이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순서대로 불렀던 노래로 보이지만,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는 충분히 이 본문을 그리스도인의 인생 전체로 확장시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15개의 키워드 중에서 내게 가장 와 닿아 새롭게 깨달아진 단어는 '공동체'였다. 사적인 복음의 한계와 그 폐단을 절실히 알게 된 이후 복음의 공공성을 향한 나의 생각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었다. 이는 곧 하나님나라의 두 기둥인 정의와 공의에 대한 이해와,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윤리적인 측면에서 따져보게끔 만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분히 공동체적이지 못했다. 기독교에서 공동체가 가지는 의미를 모르지도 않았음에도, 나의 질문은 늘 개인의 윤리적 삶과 이웃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사랑의 실천 등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나는 언제나 홀로 고립되어 외로워하며 고뇌하고 있었다. 아마도 기존 장로교가 주축이 된 한인 교회 시스템 안에서 겪은 갈등과 상처가 한 몫을 톡톡히 담당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지만, 공동체와는 유리된 듯한, 이 모순적인 나의 삶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윤곽을 보다 명징하게 드러냈다.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결코 사적이고 비밀스런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또한, "성경은 고립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공동체의 일원이다. 창조는 공동체가 생기고 나서야 완성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고립된 개인들과 함께 일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항상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일하신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존재로 볼 때, 우리가 주고받는 관계는 훨씬 깊어질 것이다."

왜 난 하나님을 향한 여정, 곧 순례자의 길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소망을 가지고 홀로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고 여겼던 것일까. 왜 난 나도 모르게 고독한 철학자나 구도자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홀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여겨왔던 것일까. 분명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봐도, 신약의 초대교회를 들여다 봐도, 모두 혼자가 아닌 공동체가 존재했고, 하나님은 늘 그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셨는데도 말이다. 

물론 일대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인의 삶에서 체험하는 것과, 그 체험과 어제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약속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례들과의 공통점을 발견해내는 것, 그리고 본인의 삶에서 세상의 삶과 예수의 삶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믿음과 결단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공동체의 뒷받침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언제나 함께 떠올려야 한다. 혼자서는 넘어질 수 있다. 낙망할 수 있다.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라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소망이 증폭된다. 먼 길을 갈 때 혼자 운전하는 것과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운전하는 것의 차이와도 같다. 약한 개인이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안전하며 견고해질 수 있다. 서로를 향한 의지, 이는 곧 신뢰에서 오며, 그 신뢰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사랑이 이웃사랑으로 전환되는 경험이다. 또한 순례의 여정을 지속할 때 닥쳐올 어려움을 서로를 의지하며 이겨낼 때 우리는 공동체의 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도움을 인정하며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웃사랑이 하나님사랑과 다르지 않은 이유다.

한 길 가는 순례자. 처음에는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독한 길처럼 여겨져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함께 가는 길이라 생각을 확장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 길 가는 순례자는 단수이자 복수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도 있고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도 있는 것이다. 후자를 좀 더 생각하게 되니 참 힘이 된다. 유진 피터슨이 바랐던 것처럼 내 삶 속에서도 복음이 살아 있기를 소원한다. 깨어있는 순례자, 그리고 그 순례자들의 공동체. 구약의 히브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먼 길을 떠나는 그 길을 상상해본다. 거기에는 개인이자 공동체인 그리스도인이 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3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묵시 :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유진 피터슨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묵시와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다.


유진 피터슨 저,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을 읽고.


때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운 압축성과 설명할 수 없는 깊음이 진득하게 글에 배어있어,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생각의 묵직한 파편들을 그대로 떠안은 채 그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한 챕터 한 챕터를 천천히 읽어오면서 느꼈던 감동과 깨달음이 여전히 범람하여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막상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할 말을 잃고야 만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을 유진 피터슨이라는 신뢰할만한 눈을 통해 다시 느껴볼 수 있었다. 비록 아직까진 요한계시록에 대해 내게 먼저 들어간 잘못된 편견과 착각들이 바른 이해보다 내 안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 책은 내게 그것들을 무력화시키고 해방시켜주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해주었다. 마침내 드러날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함께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귀결되는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견지하기로 마음을 다잡는 하나의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유진 피터슨은 요한계시록이 우리를 각성시켜주는 힘을 가진다고 말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 읽는 책이 아니라 상상력을 소생시키고자 읽는 책이라고 말한다. 사도 요한의 묵시는 시인의 언어를 구사하여 오래되어서 무뎌진 진리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어 진리를 진리답게 우리에게 다시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새롭게 깨어있도록 도와준다.


이 책은 요한계시록의 강해가 아닌 저자의 묵상이자 강의록이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이 무슨 내용인지 조목조목 풀어주는 방식이 아닌, 요한계시록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일상의 구체적인 언어를 통하여 풀어주는 방식을 취한다. 요한계시록 본문의 순서를 따라가되, 그 본문들이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을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해석하여준다. 유진 피터슨은 현실에 기꺼이 몸담고 있으면서 현실을 품고 현실을 리드하는 영성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사도 요한을 신학자이자 시인이자 목회자로 해석하여 소개하는 대목에서 나는 동일한 해석을 유진 피터슨에게도 적용되어야 함을 간파했다. 그 역시 하나님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진지하게 연구하는 신학자이고, 철학자의 조심성과 도덕주의자의 진지함을 충분히 넘어서는 호탕함과 대담성을 겸비하여 능숙하고 정확하게 상상의 언어를 사용하기에 부족함 없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시인이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 생활이 모든 삶의 중심이 된다는 확신을 품고 성심껏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과 기쁘게 대화하는 목회자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통해, 내게는 무겁고 무섭기도 했던 요한의 묵시가 내가 속한 현실 속으로 과감히 끌어들여지는 것을 감사하게 즐길 수 있었다.


여러 챕터에 걸쳐 계속해서 강조되어지는 단어 중 하나는 '예배'였다. 예배는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몰입하는 행위이자, 우리의 방향을 하나님 중심으로 재정립하게 해주는 행위이다. 그래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중심적 행위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현실을 등한시하고 영과 육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세계에서의 예배는 인간의 사적인 유익처와 도피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하지만 예배를 비활동적이며 세상사에 비추어 볼 때 부조리하다고 판단한 나머지 예배를 그만두고 세상에 무언가 즉각적인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예배를 그만두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서 인간이 행하는 일로 초점을 바꾸어 예배를 변질시키는 사람들 역시 삶의 방향을 잃었다는 측면에선 마찬가지다.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삶이 예배라는 말을 오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을 소멸해서도 안되며, 예배가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말 뒤에 숨어 은밀히 영지주의적인 안위만을 구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배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거룩하셨듯 거룩하도록 일상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일 것이다.


또한 원제목, 'Reversed thunder (역전된 천둥: 기도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때 일어났던, 요한계시록 8장에 기록된, 하늘의 침묵의 이미지가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말을 경청하시는 하나님이 언제나 동일하신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경이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시고 들으시고 직접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행동과 말이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존엄성을 얻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 창조주이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믿는다. 온 맘 다해 찬양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Revelation 1:8)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5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J. D. 밴스 저, ‘힐빌리의 노래’를 읽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공감할 수 있다. 크든 작든 공통된 경험이 없다면, 상호 간의 소통은 어렵기 마련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으로라도 독자가 저자를 공감하지 못하면, 독서 자체는 노동이 되어 버리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특히 그 책이 회고록이라면 더욱 그렇다. 공감 없이 끝까지 읽어내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을 읽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한 백인 남성의 인생을 공감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긴 하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짧은 시간 끝까지 읽어내도록 만들었을까?


내게 있어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근교다. 쉐이커 하이츠라는 도시에서 입주자의 약 90퍼센트가 흑인으로 구성되었던 한 오래된 아파트에서 3년 반을 살았다.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국에 남아 바로 옆에 위치한 인디애나주에서도 1년 반을 살았다. 의도치 않게 나의 7년의 미국 생활 중 5년을 소위 미드웨스트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살게 되었던 셈이다. 힐빌리의 애환을 담은 이 책이 외국인이자 아시안인 내게 많이 공감되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은 백인이 전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흑인들이 메우고 있었다. 히스패닉이나 나와 같은 아시안은 드물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오하이오주 미들타운과 켄터키주 잭슨은 내가 5년간 살았던 곳과 불과 차로 두세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특히 저자가 인생 대부분을 살았던 미들타운의 분위기는, 실제로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로선 머리 속으로 그려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같은 러스트 벨트에 속한 지역에 살면서 수 차례 차로 오가며 그곳들의 냄새와 분위기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20세기말, 과거엔 미국의 대표적 공업 지대로 번영을 누렸지만,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몰락한 지역을 러스트 벨트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인적이 드물고 폐허들이 산재해있는 지역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느꼈던 그 특유의 적막함과 암울함을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 지역에서 주유소에 들려야 할 때면 난 잔뜩 긴장을 하곤 했었다. 눈이 풀린듯한 사람들이 흑백을 가리지 않고 도처에 있었는데, 그들이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되었을 거라는 나의 직감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곳은 빈곤과 약물 중독이 다반사인 곳이었다.


J. D. 밴스는 힐빌리다. 힐빌리는 러스트 벨트에 살며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러스트 벨트는 미국의 북동부 지역부터 중서부 지역까지 관통하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특히 중서부 지역에 집중되어있다. 이를테면,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오하이오와 켄터키, 그리고 웨스트 버지니아와 인디애나가 이에 속한다. 저자는 힐빌리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전형적인 힐빌리로 살았지만, 대부분의 힐빌리들이 밟는 전처를 밟지 않고, 오히려 그 저주의 사슬을 끊고 나온 몇 안 되는 힐빌리 중 하나다. 1984년생인 그는 이제 자신이 힐빌리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그 가운데서도 존재했던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운명적인 여러 만남들의 도움으로, 수재들도 들어가기 힘든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해냈고, 중산층 이상의 부류에 속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수직 신분상승을 기적적으로 이뤄낸 경우인 것이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을 '더럽게 운 좋은 개자식'이라고 표현한다. 힐빌리다운 걸걸함이 단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의 대부분은 저자의 가족사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과 때론 지겹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아마 내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감동을 주는 부분도 많다. 저자의 경험과 식견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 힐빌리들의 삶은 소외되고 고립되어 마치 저주의 쇠사슬로 스스로가 꽁꽁 묶어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었다. 가난이 실제로 대물림되고 있었고, 약물 중독과 폭력, 불륜, 가정 파탄, 그리고 저학력 역시 마치 그들의 전통인 양 자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거나 오히려 더 증폭되고 있었다. 스캇 펙은 아마도 이러한 저주의 고리에서부터 악을 진단해낼지도 모른다. 저자도 간파하고 있듯이, 힐빌리들의 그러한 삶은 정부의 문제도 사회 시스템의 문제도 아니었다. 주된 원인은 그들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놓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그들 내부에 있는 듯했다.


저자 역시 어린 시절 충분히 불행했다. 굳이 조부모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그의 엄마는 간호사 자격증을 딸 정도로 재능이 있었으나, 허구한 날 남자를 바꾸었고 마약에 중독되어 폭력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일으켜 범죄기록이 많은 여자였다. 저자는 이 때문에 자신의 라스트 네임에서 혼란을 느꼈고, 실제로 엄마에게서 살인을 당할 뻔한 위기도 모면했던 적이 있다. 더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힐빌리들의 많은 가정이 부모 둘 중 하나는 약물 중독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고, 불륜과 폭력, 가정 파탄이 그들의 일상처럼 되어있었기 때문에 저자의 어린 시절의 삶이 특별하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갇힌 세상 속에서 그들은 국가와 정부를 탓했고, 사회 시스템을 탓했다. 누군가의 경제적 도움이 주어지면 그 돈으로 마약이나 알코올을 구입하는 데 탕진했다. 아이들은 버림받은 거나 다름 없었고, 한 부모 가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총체적인 난국을 맞이한 힐빌리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구조적 모순 속에서 여전히 하층민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자신의 가정이 여느 힐빌리 가정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비록 엄마가 마약 중독이었지만, 외할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이 그에게 그나마 안정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었으며, 친 누나의 엄마 역할과 이모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 우물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해병대 지원과 제대로 삶의 규모를 배우게 되었고, 오하이오 주립대를 우등생으로 단기간에 졸업하면서 점점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장악해 나가게 되었으며,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 졸업하면서 운명적인 멘토와의 만남과 평생 반려자와의 만남으로 완전히 힐빌리의 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으로는 상류층 사회에 속해있지만, 여전히 힐빌리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어릴 적 각인되었던 힐빌리들의 결코 좋지 않은 문화가 가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힐빌리와는 정반대의 문화 속에서 자라난 아내와 그 가정 덕분에 그는 점점 치유되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방인인 내 안에도 힐빌리가 살고 있음을 느낀다. 화통 삶아먹은 듯 소리칠 때나, 내게 불이익을 준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나, 괜한 자존심에 주위의 시선을 왜곡하여 내 안에 갇혀 웃음을 지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힐빌리의 피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공감하며 읽어내려간 주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그를 규정지을 수 없길 개인적으로 바란다. 그래서 그의 개척이 힐빌리들에게 메시지가 되어 그들에게 각인된 저주의 DNA를 치유할 수 있는 메신저가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이방인인 내 안에도 존재하고 있을 힐빌리도 깨끗이 치유되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7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