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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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짧은 책은 우리를 1세기 로마로 데려간다. 푸블리우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하여 우리는 브리스가 아굴라의 가정 교회를 방문하게 되고 그들의 삶의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아굴라를 인습에 매이지 않는 유대인으로 소개받은 푸블리우스는 아굴라가 자신이 알고 있던 유대인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아굴라의 과거 삶의 경험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동행했던 글레멘드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의미 있는 대답을 듣게 된다. 아굴라가 그 동안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인 이유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유는 글레멘드와 유오디아가 고린도에서부터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와 함께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새로운 관점은 예수 복음을 의미했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삶의 예배에 마침내 푸블리우스도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넘어 그것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좀 더 실제적이고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방인인 현재의 우리보다 유일신 하나님을 익히 알고, 로마에 속국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 중 하나였던 아굴라가 세계관의 변화를 겪고 이를 삶에서 반영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진정한 전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무릎이 탁 쳐졌다. 그 모습이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며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가며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평신도 전도자의 모습이라는 생각까지 진행이 되자 난 한동안 책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푸블리우스 일행이 브리스가 아굴라 집에 도착하여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즐기고 있는데, 아굴라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식사 준비를 하러 식당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푸블리우스는 이 분위기 전환을 예배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글레멘드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번에도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실제로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형식만 남은 가식적인 제사와 예배를 겨냥한 듯했다. 일상적인 삶 속에 스며들어 그것이 예배인지 삶인지 분간이 잘 안될 정도로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된 모습,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 할, 그리고 보여져야 마땅한 모습일 것이다.


한편, 이해하지 못해 브리스가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그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한 푸블리우스는 식탁에서 보통 최고 귀빈을 위한 자리에 앉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식사와 친교를 나누면서 그는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을 여러 번 포착한다.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가 신분상 차이가 분명히 나는 사람들을 맞이할 때 차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분상 식탁에서 그의 자리에 앉아야 할 아리스도불로와 그의 종 루시아와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모임의 모든 참석자들이 동일한 발언권을 가지고 열띤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광경에서도 푸블리우스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경험하게 된다.


식사와 교제 가운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던 성 만찬에서 푸블리우스는 예수 복음을 듣게 된다. 몸이 살려면 빵이 필요하듯 참 생명을 경험하려면 신의 독생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굴라는 이어서 그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얘기했고, 그분은 지금 모임에 함께 하신다고 기도했다. 푸블리우스는 아굴라의 기도 중 그 내용도 처음 듣는다는 이유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든 일이 바로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또 평범한 목소리로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하고 실제적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여태껏 생각하던 신에 대한 방식을 포함한 그 자신의 세계관과의 충돌을 한번 더 경험하게 된다.


아리스도불로의 종 루시아의 신분 해방에 대한 토론이 뾰족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무렵,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이 예전에 보낸 편지 속에 적힌 내용을 기억해낸다. 주인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종들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실제로 자유인임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였다. 덕분에 토론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대화가 바울의 판단 근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또한 푸블리우스조차 자신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이후에 진행되었던 순서에서도 푸블리우스는 자신이 짐작했던 종교적인 내용이라곤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친구 글레멘드 역시 아굴라처럼 자기 신이 마치 같은 방 안에 가까운 친구인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말투를 쓰며 기도하는 모습이나, 그 기도의 내용 중 '세상은 우리에게 온 신의 선물'이라는 말에서 또 한번 충격을 받게 된다. 너무나 당연시했던 것들이 모두 신의 손길에서 온다는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이 책은 푸블리우스의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처음 만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단지 첫 만남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세계관과의 첫 만남이며, 그로 인해 아무런 압력 없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변화의 기운이 싹트는 모습을 그리는 책이다. 푸블리우스는 책의 끝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상하게도 그들 (이미 예수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게 되고 삶에서 교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를 포함한 그 일행)에게는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들의 행동에는 틀림없이 실제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초청받은 다음 주 모임에 갈지 안 갈지 결정은 아직 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가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삶에 녹아 든 복음, 일상과 일치된 하나님나라,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현재 우리들의 예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가상의 이야기로 보여주며 이 책의 저자가 현재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난 제 2의 푸블리우스가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 아니 교회인 나 자신으로부터도 같은 메시지를 받길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것은 객체지향적인 전도 방법을 연구하거나,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커다란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열심을 내거나, 언제나 새신자 환영 코스프레하듯 가식적인 스마일을 지으려고 노력하거나, 마치 아무런 근심이 없는 척하며 가짜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신앙을 살아내는 것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말이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4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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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 이 땅에서 그분의 교회로 살아가는 길
윌리엄 윌리몬.스탠리 하우어워스 외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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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하우어워스 & 윌리엄 윌리몬 공저, 복있는사람 출판,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을 읽고.


Resident Alien.


A. 나는 Resident Alien이다. 미국이라는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 (resident)하고는 있지만, 나의 시민권 (citizenship)은 미국에 속하지 않는다. 현재 나는 외국인 (alien) 신분이다. 

B. 그리스도인은 Resident Alien이다. 세상이라는 곳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고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현재 모든 그리스도인은 외국인과도 같은 나그네 된 백성이다.


C. 나는 미국에 살지만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나의 충성은 미국을 향하지 않는다. 미국 역시 시민이 아닌 나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국에 영향을 받지만 주요 관심은 한국을 향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방식은 내가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D.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 시민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의 충성은 세상을 향하지 않는다. 세상 역시 시민이 아닌 그리스도인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세상에 영향을 받지만 주요 관심은 하나님나라를 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방식은 그리스도인이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에 비교한 육적인 ‘신분’과 영적인 ‘신분’의 차이 (A와 B)를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 비교한 ‘삶’의 차이 (C와 D)에 대해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짐작하건대 아마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를 고려하게 되고, 찔림을 받지 않을까 싶다. 머리로 이해는 되고, 또 그렇게 배웠고 심지어 가르치기까지 했었으나, 실제 자신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고 스스로가 판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문제다. 언젠가부터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삶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사적인 영역으로 감춰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암묵적인 관행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습성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복음이 아닌 거짓과 위선의 공공성을 낳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경솔하게도 이신칭의라는 말을 왜곡했고, 예수를 믿고 바뀐 신분에 의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자발적 순종’을 거부하는 데 엉뚱하게도 분별력을 동원했으며, 구원 받고자 하는 마음만은 그대로 남긴 채,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켰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신분'에 있을지 '삶'에 있을지 묻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우리는 은연 중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삶도 결코 따로 해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죄책감이 진하게 묻은 거짓된 정체성을 만들고 그 뒤로 비겁하게 숨어버렸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하나님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한낱 공과공부 책자에나 소개되는, ‘뻔한’ 지식으로 추락해버렸다.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겠지만, 평신도보다는 아무래도 이를 지속적으로 배우고 가르쳐야 할 선생들 (목회자와 신학자)에게 어쩌면 더 무거운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싶다.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먼저 알고 먼저 맛본 후 더 깊이 연구하거나 교회를 통하여 널리 가르치는 일만이라도 변질되지 않고 본래의 의미에 충실했다면, 기어이 평범성까지 획득해버린 오늘날의 영적인 재앙을 초래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선생들은, 교회뿐 아니라 모든 시공간에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 대신 예수에게서 뽑아낸 추상화된 관념들만을 가르치며 기독교를 지적인 문제로 변질시켰다 (계몽주의). 그들은, 좌로는 자유주의, 우로는 보수주의로 나뉘어 서로 적대시하기도 하고 때론 공존의 방향도 모색해 왔지만, 모두 사회윤리라는 면에서는 근본적으로 세상에 타협하고 심지어 부역하는 과업을 달성해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콘스탄틴주의). 또한 그들은 복음을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시켜 개인구원론이라는 우리 속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가뒀으며 (개인주의), 제국의 단맛에 길들여지지 말라고 설파하면서도 스스로는 그 단맛의 근원까지 독차지해버렸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선생들이 그렇진 않다는 점이다. 이 책의 공저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우리들의 선생 (각각 신학자와 목회자)이면서도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현대 교회와 목회에 대해 예언자적 메시지를 과감히 선포한다.


그들이 파악하고 책 전반에 걸쳐 거듭 강조하는 교회의 문제점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콘스탄틴주의, 계몽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어버린 후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신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정치와 사회체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교회의 의미를 축소하는 대신 국가와 사회에 대한 참여와 봉사를 늘릴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양극화와는 별개로 보수주의나 자유주의 모두 제국의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나아가 그 체제를 지지하거나 보호하는 역할까지 교회가 해왔다고 이 책에서 두 저자는 냉철하게 진단하고 있다. 좌우할것 없이 전반적인 기독교 자체가 국가에게 귀속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콘스탄틴주의와 더불어 기독교는 합리성을 필두로 한 영적이거나 지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교로 타락한 모습까지 갖췄으며, 국가와 사회가 어떻든 개인만 구원 받는다면 기독교는 본연의 임무를 다한 것처럼 여기게 되는 형태도 띠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두 저자의 진단은 일차적으로 미국의 기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책을 죽 읽어내려가다 보면 한국의 기독교 역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박근혜 전 정부를 앞장서서 옹호하고 부역하고 신봉했던 기독교인들, 번영신학으로 점철된 여러 대형교회 세습을 합리화시키는 기독교인들,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여 목사의 위치를 준하나님급으로 격상시켜놓은 기독교인들, 그러한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이 왕인 것처럼 교인들에게 윤리적 범죄까지 저지른 일부 목사들, 이렇게 드러난 모든 현상을 되짚어볼 때 한국의 기독교도 사탄의 체제에 뿌리깊이 물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책은 위에 언급한 부인할 수 없는 문제점에 대해서 부인할 수 없는 해결책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교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교회 공동체가 본래의 정체성을 찾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원서 제목은 ‘Resident Alien’이고, 한글 번역본 제목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다), 이 책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를 주요 구절로 삼는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신분과 정체성을 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두 저자는 그리스도인을 나그네 된 거류민 (Resident Alien)이라고 인식할 뿐 아니라, 교회를 ‘식민지’라고 일컬으며, 식민지로 살아가는 일이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정체성도 중요하지만, 이 책은 그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 교회의 정체성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두 저자는 산상설교 자체도 개인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식민지에게 주신 말씀이라며, 식민지 시민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의 타협적인 사고를 거부하고 세상에 대항하는 문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존 하워드 요더가 말한 ‘고백 교회’를 모델로 제시하면서, 교회는 개인의 정신을 바꾸거나 사회를 변혁하는 데 주된 정치적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으로 하여금 만물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케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십자가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교회 공동체가 없이는 세상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고, 이 세상 속에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음도 알 수 없으며, 세상이 파괴되고 타락한 상태에 있고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에 관한 언어를 몸으로 살아내어 가시적인 교회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변혁하거나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에 힘쓰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의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유일한 공동체로서,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나라가 세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믿고, 제자도에 따르는 희생을 분명히 알고 기꺼이 그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요청은 안전함과 풍요로움을 제공했던 세상 시민권을 포기하는 대신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나그네 된 백성이 되어 교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식민지 삶을 공동체를 이루며 살라는 초청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의 지배체제에 순응하며 그곳의 가치체계에 의해 살아가고 있거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관념적으로만 해석하여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거나 좀 더 합리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거나, 복음의 공공성을 차치하고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복음으로 예수의 능력을 한정시켜 버리며 살아가고 있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두 저자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보자. 은연 중 세상과 타협하며 이중적으로 살아왔던 시간을 반성하고, 그 동안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렸던 개인과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며, 신분과 삶이 일치되는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7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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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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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랭던 길키 저,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출판)를 읽고,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존재의 심연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익숙하지만 낯선 자신의 벌거벗은 실체를 대면하는 시기다. 우리가 고난이라고도, 환란이라고도 부르는 순간이다. 소스라쳐 뒤로 물러서거나, 없는 것처럼 무시해버리지 않고, 이를 정면으로 맞설 용기만 있다면, 반드시 그 심연으로부터 우리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을 편리하게 만든 문명의 발달과 사회에 팽만한 구조적 악은 불행히도 우리가 그 순간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가 숨을 수 있는 여유까지도 충만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우린 좀처럼 그런 순간을 기회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 준비 없이 오는 것처럼, 고난 또한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어찌 보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우린 그 씀씀이를 관리할 수 있을 뿐, 정작 그 시간 자체를 조작할 수는 없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나는 그 경이로운 순간에도, 육신의 끝을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에도, 시계의 초침은 매정할 만큼 미동도 하지 않고 동일한 속도로 무한을 향하여 째깍째깍 달려간다. 시간 안에서 살고, 시간 안에서 죽는, 결국 우리 인간은 시간의 굴레 안에 묶여 있는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말, 이십 대 중반의 랭던 길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도 타지인 중국 산둥 (위현)에 위치한 수용소에서 일본인의 감시 하에 자칫하다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2년 반을 살아야만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미국 중산층에서 엘리트로 자란 그에게 있어선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시기일지도 모를 시간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 곳에서 그는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가 믿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민낯과 미래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깊이 고찰할 수 있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오래되고 낡아빠진 수용소에는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각계각층의 서구인 남녀노소들이 천 명이 넘게 모이게 되었고, 그들은 제한된 좁은 공간 안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종결을 기다리며 자신의 미래와 생명을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불편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용소에 집결한 모든 사람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도 인간임을 직시해야만 했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수용소라는 한 배를 탄 구성원은 모두 동일한 계급장을, 아니 계급장을 모두 뗀 체로 맨 몸으로, 맨 인간으로만 존재하며 대우받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사람은 물론이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버튼을 누르거나 레버를 당기거나 돌리기만 하면 물이 쏴하고 나오는 화장실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변을 보고 난 후 배설물을 치워주는 사람도 없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도 없었으며, 권위로 다른 사람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킬 수도 없었다. 더 앞서 있거나 더 위에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더 뒤쳐지거나 더 아래에 있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원점에 덩그러니 놓여졌던 것이다.


수용소 생활 전의 재력과 권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원점에 놓여졌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전쟁으로 인한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된 입장 덕분에, 수용소 사람들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더욱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룰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인본주의자들이 주구장창 얘기하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진보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같은 고난을 받는 상황에서 생기는 특별한 공감능력과 인간이 가진 도덕성과 합리성만으로는 문제의 발생을 모면하기엔 부족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넘어서는 보다 강력한 힘이자 인간 존재의 심연에 각인된 ‘이기심’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표현형이기도 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자기의 유익에 의거해서 판단해 버리는 이기심. 랭던 길키 역시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을 통해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죄’야말로 본질적으로 이 책의 주제라고 말이다. 그는 또 말한다. 수용소 경험을 통해 배운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회에서 통용되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이다. 마침내 서로 이웃을 보면서 그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인간인지와 관련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책은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고찰을 수용소 생활 초기부터 했던 것은 아니다.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중국에 왔었고, 철학이나 종교적인 믿음에 관련된 영적인 삶이라는 것의 우월성을 신뢰하고 있었던 그는 수용소 초창기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이 물질적이고 정치적임을 간파했고,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철학이나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경험과 기술이라는 결론을 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적이고 무한한 문제 해결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진짜로 필요한 도움이며, 종교나 철학은 오직 선호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할 뿐,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간 낭비라는 확신도 그는 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기술적인 지식과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결국은 도덕적이거나 영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기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인격의 실패로 인해 야기되었다. 도덕적인 건강함이 없다면, 물질적인 공급이나 혜택이 결여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 랭던 길키에게는 수용소 생활에서 배운 가장 깊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점철된 행동을 과감하게 하게 되며, 이후에 그 행동을 하게 만든 실체인 이기심을 합리화한다. 교육을 많이 받고 존경을 받던 사람이라면, 혹은 선교사나 목사와 같은 사람이라면 다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랭던 길키가 목격한 바로는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더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화했다고 한다. 위선을 행해서라도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까지도 인간은 비밀스럽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와 자기 소유를 사랑하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과 그 이기심을 치장하려는 위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실재를 전제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 아니면 의지을 이용한 스스로의 힘으로 선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인간 내면에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며 선한 모습, 즉 희망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발현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인간의 이기적인 본 모습, 즉 끊임없는 자기 사랑을 사실로 인정하는 대신, 그러한 자기중심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반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모습일 것이다. 진짜 신앙은 자신이나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됨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랭던 길키의 머리를 어지럽혔던 문제, 인간의 도덕적 삶의 딜레마를 풀어준 가장 심오한 해답이기도 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옷으로 우리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입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옷은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무게를 자각하고 있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옷이 몸과 하나가 되어 분리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정작 인간이란, 외압에 의해 억눌려진 상태가 되어야만 껍질을 벗고 실체를 드러내는 존재인 것일까? 그러나 그래서 그 외압도 결국에는 인생의 필요악임을 깨닫고 또 다시 불분명한 미래로 겁 없이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


책을 덮고도 여전히 많은 생각이 내 마음과 생각에 충만하다. 인간으로서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칼빈이 그의 5대 강령에서 말한 인간의 전적 타락을 거짓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수용소라는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되게 된다면, 아니 수용소가 아닌 나의 일상적 삶에서도 자주 드러나는 나의 이기심과 위선의 모습에서도, 나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말문이 막히고 무릎이 꿇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래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를 더욱 감사함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귀한 경험이기도 했다. 인간의 실존적 자아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해 알고 싶어 액면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난 이 책을 서슴없이 추천하고 싶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6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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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형사 복음서 난제를 수사하다
J. 워너 월리스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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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워너 월리스 저, 새물결플러스 출판, “베테랑 형사 복음서 난제를 수사하다”를 읽고,


‘지식의 믿음’에서 ‘신뢰하는 믿음’으로.


"기독교인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기독교가 진리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당신의 신앙을 변호할 수는 있는가?"


어쩌다 보니 최근 세계의 도마 위에 오른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된 과학적인 (과학적이라 주장하는, 필자는 동의 못함) 증거 (결코 증거가 될 수 없는)를 들이대며 성경을 증명하려는, 가상하지만 헛된 노력을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모두가 기독교 변증가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짐 월리스는 다음과 같이 강하게 말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단순한 기독교인'인 것에 그치지 말고, 자신이 믿는 것과 자신의 신앙을 변호할 줄 아는 '주창하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지식의 믿음'에서 '신뢰하는 믿음'으로 두 번째 발걸음을 떼라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짐 월리스 역시 피상적인 '지식의 믿음'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원래 비기독교인이었다. 게다가 그의 직업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미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베테랑 형사였다. 그러므로 그의 성서에 대한 입장이나 기독교인을 향한 입장이 어떠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굉장히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었다. 그는 회의론자였다. 그 이유는 예수와 그의 행적을 사실로 기록한 복음서가 진정성을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예수의 탄생과 죽음, 그 사이를 이루는 공생애, 그리고 부활, 이 모든 기독교의 핵심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곳이 복음서이므로, 복음서의 진위 여부는 곧 기독교의 진위 여부와도 같다. 그러므로 복음서가 가짜라면 기독교는 거짓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날, 그에게 기독교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는 않았으나, 마침 그는 예수의 선한 삶에 대하여 배우려고 복음서를 읽던 중이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볼수록 그 내용이 진짜 목격자들의 증언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던 것이다. C. S. 루이스의 말마따나 복음서가 진짜 목격자들의 기록이고, 그래서 예수에 대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주장은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 그는 회고하기를 자신은 도저히 맹목적인 믿음의 도약은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적어도 증거에 기초한 합리적인 결정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를 가장 방해했던 염려는 사복음서에서 공히 등장하는, 예수가 행했던 기적의 사건들의 진위여부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물들어 있었던 철학적 자연주의 영향 때문에 초과학적인 기적을 도저히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그러한 생각 역시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되었고, 마침 자신이 베테랑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형사라는 직업정신으로 그는 형사사건의 목격자 증언을 검토하듯이 몇 주 동안 시간을 들여 복음서의 기록을 검토하기로 작정하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복음서가 목격자들의 기록임을 변증하기에 이른다. 그렇다. 이 책에는 복음서에 대한 그의 철저한 검토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덕분에 우린 이 책으로부터 전통적인 신학자나 목회자의 관점이 아닌 형사 (그는 전직 형사였지만 현직 기독교 변증학 교수이다)의 신선한 관점으로 변증한 복음서의 흥미진진한 변호를 엿볼 수 있다. 나아가 그의 합리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한 복음서의 변증을 통해 우리들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을 변호할 수 있는, '주창하는 기독교인'이 되는 기회를 이 책을 통해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저자의 복음서 수사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만,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1부에서 저자는 형사가 사용하는 수사 원칙 열 가지를 소개한다. 물론 모든 독자가 형사가 되기를 바라거나, 형사가 되어야만 자신의 본격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1부는 형사가 아닌 직업을 가진 우리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그 수사 내용을 좀 더 깊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쓰여진 것이다. 아주 상식적이고 누구나 흥미를 느끼고 이해하며 책장을 넘겨 나갈 수 있다.


1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다음과 같다. 선입견을 버리고, 신뢰할 만한 증거를 선별해내고, 그것을 기반으로 귀추법을 이용하여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복음서를 읽어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저자의 수사 내용이 적혀있는 2부의 주제는, 복음서를 이루고 있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신뢰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형사답게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실제 법정에서의 상황, 즉 변호사와 검사, 피고와 원고, 그리고 증인과 배심원의 역할을 빗대어가며 복음서를 철저히 수사해 나간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낸다. 복음서는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신앙생활 중 적어도 한 번씩은 방황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자신의 믿음의 진정성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나 비기독교인들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추궁과 비판으로 이루어진 논쟁에 노출될 때, 기독교는 고사하고 자신의 믿음조차도 변호하지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믿음이 단번에 무너져 내림을 경험할 수도 있다. ‘지식의 믿음’이 가지는 한계인 것이다.


비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한 번씩은 기독교나 기독교인에 대해서 반감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나 기독교인에 대해서 검토를 진지하게 해보지도 못하고 거의 무조건적인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 적지는 않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지식의 믿음'은 비단 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비기독교인조차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반감과 혐오감이 어쩌면 비기독교적인 '지식의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인의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고 다분히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이며 기복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믿음에 머물러 있는 현상과 비기독교인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가지는 반감과 혐오감은 그 논리가 '지식의 믿음'이라는 맥락에서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독교를 변호하든지 거부하든지에 상관없이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읽어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내용일 것이다. 믿든지 안 믿든지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자신의 신앙이나 비신앙을 변호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기독교인은 저자의 도움으로 믿음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고, 비기독교인에게는 저자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수사 덕분에 기독교에 대한 이유 없는 반감과 혐오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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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 욥기 일상을 변화시키는 말씀 1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지음, 송동민 옮김 / 이레서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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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에게 이런 일이?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저,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를 읽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를 향한 신뢰,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자칫하다간 자신의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이 자신의 고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느껴지고, 자신만 숨 막히는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는 '욥기'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 가운데, 왜 욥이 고난 받게 되는지를, 욥기의 시작부터 우리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작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실제로 받았던 욥은 그 고난이 끝난 이후에도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욥은,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 영적 교만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마침내 대면하고 이를 회개하게 된다. 이후 욥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께선 욥에게 고난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다.


고난을 겪고 나서, 그 고난이 왜 자신에게 임했는지 정확히 알게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정말 그 직접적인 이유를 우린 알 수 있기나 한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서야 그 고난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극심한 고난 중에서는, 절망 가운데 깊이 빠져 있다가도 간헐적으로 온전한 분별력을 되찾기도 하고, 이내 다시 끔찍한 고통 속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사이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고난됨은 어쩌면 이러한 반복적이고 비생산적인 크고 작은 감정과 고통의 요동과, 그 때문에 늘 정체되어 수렁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우,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한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전보다 오히려 더욱더 힘든 내면 세계의 혼돈과 붕괴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는 그의 책,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에서, 욥기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로 빚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생각의 저변에 깔린 인과응보적인 논리를 물리치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대답만을 하신 사건에서도, 우린 죄와 고난의 인과적인 관계가 항상 성립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고 단정지어서도 안 된다. 답답하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모른다"거나 "context-dependent"하다는 것이 가장 '성경적'일지도 모르겠다.


고난의 원인 (Why)을 밝혀내는 것보다는, 어쩌면 그 고난으로부터 무엇을 (What) 얻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의 목적은 Why보다는 What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욥의 친구들은 모두 욥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 (Why)에 중점을 두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들은 모두, 순종은 복으로, 죄는 심판으로 인도한다는, 기계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었고, 그 방정식에 하나님을 대입하여 기계적으로 얻은 해와 욥의 상황이 일치하지 않음을 간파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그 친구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What)이 지닌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곧 하나님은 종종 예기치 못한 방식,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신다는 점 (What)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해법을 욥의 특수한 사례에 적용하려 했다. 마치 하나님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방정식에 갇혀 그 규칙대로 움직이는 존재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은 하나님 (What)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목적은 욥이 그분을 알게 되는 데에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것도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닌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저자 역시 Why가 아닌 What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광대하고 다양하며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쉽게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불가사의한 모든 것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불가사의는 우리의 이해를 넘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광대하고 경이로운 계획 가운데서는, 부당한 일들까지도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하나님은 그 일들까지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심지어는 이전보다 더 낫게 만드시기도 한다. 욥은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런 상황까지도 그분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고난도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과정의 일환일 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진리이겠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창조주인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는다면, 고난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하는 왜 (Why)의 질문 대신, 그 고난으로 인해 깨닫게 될 무엇 (What)에 좀더 초점을 둘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하며 과거지향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와 미래까지도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그 고난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그를 향한 신뢰와 소망을 가지고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내어 귀를 기울여 보자. 적어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욥의 친구들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을 순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또 맞이하게 될 고난에 대한 면역이나 근력도 생겨나기를 소망한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6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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