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형사 복음서 난제를 수사하다
J. 워너 월리스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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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워너 월리스 저, 새물결플러스 출판, “베테랑 형사 복음서 난제를 수사하다”를 읽고,


‘지식의 믿음’에서 ‘신뢰하는 믿음’으로.


"기독교인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기독교가 진리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당신의 신앙을 변호할 수는 있는가?"


어쩌다 보니 최근 세계의 도마 위에 오른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된 과학적인 (과학적이라 주장하는, 필자는 동의 못함) 증거 (결코 증거가 될 수 없는)를 들이대며 성경을 증명하려는, 가상하지만 헛된 노력을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모두가 기독교 변증가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짐 월리스는 다음과 같이 강하게 말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단순한 기독교인'인 것에 그치지 말고, 자신이 믿는 것과 자신의 신앙을 변호할 줄 아는 '주창하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지식의 믿음'에서 '신뢰하는 믿음'으로 두 번째 발걸음을 떼라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짐 월리스 역시 피상적인 '지식의 믿음'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원래 비기독교인이었다. 게다가 그의 직업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미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베테랑 형사였다. 그러므로 그의 성서에 대한 입장이나 기독교인을 향한 입장이 어떠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굉장히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었다. 그는 회의론자였다. 그 이유는 예수와 그의 행적을 사실로 기록한 복음서가 진정성을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예수의 탄생과 죽음, 그 사이를 이루는 공생애, 그리고 부활, 이 모든 기독교의 핵심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곳이 복음서이므로, 복음서의 진위 여부는 곧 기독교의 진위 여부와도 같다. 그러므로 복음서가 가짜라면 기독교는 거짓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날, 그에게 기독교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는 않았으나, 마침 그는 예수의 선한 삶에 대하여 배우려고 복음서를 읽던 중이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볼수록 그 내용이 진짜 목격자들의 증언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던 것이다. C. S. 루이스의 말마따나 복음서가 진짜 목격자들의 기록이고, 그래서 예수에 대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주장은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 그는 회고하기를 자신은 도저히 맹목적인 믿음의 도약은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적어도 증거에 기초한 합리적인 결정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를 가장 방해했던 염려는 사복음서에서 공히 등장하는, 예수가 행했던 기적의 사건들의 진위여부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물들어 있었던 철학적 자연주의 영향 때문에 초과학적인 기적을 도저히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그러한 생각 역시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되었고, 마침 자신이 베테랑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형사라는 직업정신으로 그는 형사사건의 목격자 증언을 검토하듯이 몇 주 동안 시간을 들여 복음서의 기록을 검토하기로 작정하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복음서가 목격자들의 기록임을 변증하기에 이른다. 그렇다. 이 책에는 복음서에 대한 그의 철저한 검토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덕분에 우린 이 책으로부터 전통적인 신학자나 목회자의 관점이 아닌 형사 (그는 전직 형사였지만 현직 기독교 변증학 교수이다)의 신선한 관점으로 변증한 복음서의 흥미진진한 변호를 엿볼 수 있다. 나아가 그의 합리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한 복음서의 변증을 통해 우리들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을 변호할 수 있는, '주창하는 기독교인'이 되는 기회를 이 책을 통해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저자의 복음서 수사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만,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1부에서 저자는 형사가 사용하는 수사 원칙 열 가지를 소개한다. 물론 모든 독자가 형사가 되기를 바라거나, 형사가 되어야만 자신의 본격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1부는 형사가 아닌 직업을 가진 우리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그 수사 내용을 좀 더 깊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쓰여진 것이다. 아주 상식적이고 누구나 흥미를 느끼고 이해하며 책장을 넘겨 나갈 수 있다.


1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다음과 같다. 선입견을 버리고, 신뢰할 만한 증거를 선별해내고, 그것을 기반으로 귀추법을 이용하여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복음서를 읽어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저자의 수사 내용이 적혀있는 2부의 주제는, 복음서를 이루고 있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신뢰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형사답게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실제 법정에서의 상황, 즉 변호사와 검사, 피고와 원고, 그리고 증인과 배심원의 역할을 빗대어가며 복음서를 철저히 수사해 나간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낸다. 복음서는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신앙생활 중 적어도 한 번씩은 방황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자신의 믿음의 진정성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나 비기독교인들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추궁과 비판으로 이루어진 논쟁에 노출될 때, 기독교는 고사하고 자신의 믿음조차도 변호하지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믿음이 단번에 무너져 내림을 경험할 수도 있다. ‘지식의 믿음’이 가지는 한계인 것이다.


비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한 번씩은 기독교나 기독교인에 대해서 반감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나 기독교인에 대해서 검토를 진지하게 해보지도 못하고 거의 무조건적인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 적지는 않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지식의 믿음'은 비단 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비기독교인조차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반감과 혐오감이 어쩌면 비기독교적인 '지식의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인의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고 다분히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이며 기복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믿음에 머물러 있는 현상과 비기독교인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가지는 반감과 혐오감은 그 논리가 '지식의 믿음'이라는 맥락에서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독교를 변호하든지 거부하든지에 상관없이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읽어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내용일 것이다. 믿든지 안 믿든지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자신의 신앙이나 비신앙을 변호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기독교인은 저자의 도움으로 믿음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고, 비기독교인에게는 저자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수사 덕분에 기독교에 대한 이유 없는 반감과 혐오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7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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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 욥기 일상을 변화시키는 말씀 1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지음, 송동민 옮김 / 이레서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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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에게 이런 일이?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저,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를 읽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를 향한 신뢰,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자칫하다간 자신의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이 자신의 고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느껴지고, 자신만 숨 막히는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는 '욥기'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 가운데, 왜 욥이 고난 받게 되는지를, 욥기의 시작부터 우리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작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실제로 받았던 욥은 그 고난이 끝난 이후에도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욥은,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 영적 교만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마침내 대면하고 이를 회개하게 된다. 이후 욥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께선 욥에게 고난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다.


고난을 겪고 나서, 그 고난이 왜 자신에게 임했는지 정확히 알게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정말 그 직접적인 이유를 우린 알 수 있기나 한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서야 그 고난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극심한 고난 중에서는, 절망 가운데 깊이 빠져 있다가도 간헐적으로 온전한 분별력을 되찾기도 하고, 이내 다시 끔찍한 고통 속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사이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고난됨은 어쩌면 이러한 반복적이고 비생산적인 크고 작은 감정과 고통의 요동과, 그 때문에 늘 정체되어 수렁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우,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한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전보다 오히려 더욱더 힘든 내면 세계의 혼돈과 붕괴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는 그의 책,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에서, 욥기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로 빚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생각의 저변에 깔린 인과응보적인 논리를 물리치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대답만을 하신 사건에서도, 우린 죄와 고난의 인과적인 관계가 항상 성립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고 단정지어서도 안 된다. 답답하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모른다"거나 "context-dependent"하다는 것이 가장 '성경적'일지도 모르겠다.


고난의 원인 (Why)을 밝혀내는 것보다는, 어쩌면 그 고난으로부터 무엇을 (What) 얻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의 목적은 Why보다는 What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욥의 친구들은 모두 욥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 (Why)에 중점을 두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들은 모두, 순종은 복으로, 죄는 심판으로 인도한다는, 기계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었고, 그 방정식에 하나님을 대입하여 기계적으로 얻은 해와 욥의 상황이 일치하지 않음을 간파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그 친구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What)이 지닌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곧 하나님은 종종 예기치 못한 방식,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신다는 점 (What)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해법을 욥의 특수한 사례에 적용하려 했다. 마치 하나님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방정식에 갇혀 그 규칙대로 움직이는 존재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은 하나님 (What)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목적은 욥이 그분을 알게 되는 데에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것도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닌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저자 역시 Why가 아닌 What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광대하고 다양하며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쉽게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불가사의한 모든 것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불가사의는 우리의 이해를 넘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광대하고 경이로운 계획 가운데서는, 부당한 일들까지도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하나님은 그 일들까지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심지어는 이전보다 더 낫게 만드시기도 한다. 욥은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런 상황까지도 그분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고난도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과정의 일환일 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진리이겠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창조주인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는다면, 고난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하는 왜 (Why)의 질문 대신, 그 고난으로 인해 깨닫게 될 무엇 (What)에 좀더 초점을 둘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하며 과거지향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와 미래까지도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그 고난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그를 향한 신뢰와 소망을 가지고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내어 귀를 기울여 보자. 적어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욥의 친구들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을 순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또 맞이하게 될 고난에 대한 면역이나 근력도 생겨나기를 소망한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6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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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산책 - 바울을 사로잡은 복음의 능력
권연경 지음 / 복있는사람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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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수많은 로마서에 관한 책이 있음에도, 저자 권연경 교수는 거기에 또 하나를 추가했다. 바울의 복음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기본적인 이유 외에도,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를 현재 치우쳐진 교회의 모습에서 찾는다.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의 치우침이 필요한 법이다. 이 책은 그러한 균형을 잡기 위해 쓰여진 한 성경학자의 외침이다.


로마서가 바울 서신 중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복음을 가장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바울 서신들은 바울이 개척한 교회 내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면, 로마서는 그러한 '상황적 목회서신'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자신이 개척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자신과 무관한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바로 로마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를 쓴 이유를 직접 밝힌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때문이라고 말이다. 즉,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사도적 사역 수행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15장에 쓰여 있는 부분을 근거하여 저자는 로마서가 단지 복음을 설명하는 목적이 아닌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선교 계획의 후원을 받고자 로마 교회에 보냈던 조심스러운 선교 편지의 역할을 바로 로마서가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 공동체가 자신의 서반부 선교를 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보다 자기 소개하는 부분을 길게 잡는다. 일면식도 없던 교회 성도들에게 후원을 요청하는 바울을 상상해 보면, 조심스럽고 전략적일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지만,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객관적인 사도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바울은 자기 소개에 '변호'의 의미까지도 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복음 제시만이 자신의 복음과 자신에게 얽힌 오해들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다. 바울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바울의 고충 덕분에 21세기에 사는 우리들도 로마서를 통해 바울 복음의 진수를 강렬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로마서를 읽는 관점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때 그곳'의 컨텍스트를 아랑곳하지 않고 로마서를 '지금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읽는 행위를 저자는 '해석학적 우상숭배'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면서도 우리 교회가 무력한 것은, 어쩌면 이러한 자기중심적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로마서를 넘어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먼저 그 시대의 컨텍스트를 이해하고 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약과도 같은 거룩한 (? = 몽롱한 = 철저히 자기 안위적인 = 이기적인) 자아도취 성경읽기에서 결코 탈피할 수 없을 것이다.


로마서는 신학적이면서도 목회적인 논증이 주조를 이룬다. 문학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어렵더라도 바울의 논증을 따라가야만 바울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복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는 바로 '복음에 하나님의 의 (칭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복음을 능력이라고 칭한다.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성령의 역사가 주어져서 의의 소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며, 헬라의 그럴듯한 지혜조차도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여도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사용한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써, 바울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한마디로 '생명 창조의 능력'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 역시 '생명 창조의 능력'이었다. 생식적으로 죽은 자신의 늙은 몸을 살려 이삭을 낳게 한 것이나, 죽은 이삭을 다시 살려 내는 것이나 공히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사이의 연결고리 역시 한마디로 부활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믿을 때에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그 믿음은 곧 부활신앙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전제한다. 예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가 청산되었다면, 예수의 부활하심을 통해 우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


이방인의 사도답게 로마서에 흐르는 바울의 논증 전체는 유대인-헬라인의 관계로 채색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애기다.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 어떤 사람도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우린 무할례자일 때 믿고 의롭다 함을 입었던 아브라함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바울은 구원이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지겹도록 반복, 강조한다. 이미 팽배했던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깨부수기 위함이었다. 구원은 율법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함에 있다.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아브라함의 후손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바울은 선민사상에 가득 찬 유대인들을 향해 날을 겨눈다. 구원받을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외면적 표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으로 뒷받침되는 내면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엮는다. 사랑이 수고로, 소망이 인내로 나타나듯, 믿음은 행위로 그 면모를 드러낸다. 믿음은 믿음의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행위 없이'라는 말과 연결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이들을 향한 바울의 대안은 율법의 폐기나 초월이 아니라 율법의 실천과 순종이었다. 이런 위선적인 유대인들의 문제점에 대해 참된 해결책으로 바울이 제시한 것은 바로 '마음의 할례'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바울이 역설한 복음의 핵심이었다.


바른 믿음이란 결코 모든 행위를 제거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순종, 즉 믿음이야말로 참된 순종을 가능하게 해주는, 즉 참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해답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신칭의' 즉 '행위 아닌 믿음'을 말해놓고, 이 믿음이 반드시 행위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건 논리적 모순일 수 있다. 그러나 믿음과 행위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배격한 율법의 행위란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의 부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만이 칭의의 참된 해답인 이유는 바로 믿음으로만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나는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말은 바울의 관점을 정확하게 요약한다.


그리고 칭의의 관건이 된 믿음은 부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부분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치를 DNA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우리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역설한다. 부활이 없다면 칭의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더 이상 죄로 하여금 우리를 다스리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 의미의 불가능성이지 현실적인 불가능성은 아니다. 우린 여전히 현실에서 죄를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죽음'이라는 것은 윤리적 명령과 결합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믿음은 이러한 현실에서 끊임없이 신적 현실을 선택하는 결단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하나님의 완벽한 계시였으나 바울은 진정한 해결책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해주는 능력은 있으나 결코 그 죄 자체를 해결할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에 대해 무기력한 존재다. 우리가 죄의 다스림 아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은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율법이 무기력하여 주범 된 죄의 공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믿음과 율법의 대립구조를 바울은 성령와 육체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육신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다. 칭의라는 법정적 선포는 성화라는 도덕적 변화를 반드시 수반한다. 성화가 없는 칭의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령이다. 복음의 핵심에는 성령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에게 세상에 없던 미래의 소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상속자 신분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홀로 모든 것을 우리와 상관없이 다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끊임없이 인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순종하도록 결단하게 만드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전시상황과도 같은 것이다. 성령의 인도와 역사는 결코 편하지 않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개념의 정의는 '육신의 자녀'에서 '약속의 자녀'로 재정의되었다. 민족적 혈통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 이스라엘 정체성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구원은 공평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이방인들이나, 복음에 불순종하여 이방인과 입장이 뒤바뀐 이스라엘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복음을 받았다고 해서 우쭐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두려움과 황송함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믿음의 순종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을 자르셨듯 이방인도 자르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도 아니고 이방인들만을 선택하신 것도 아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삶을 '살아 있는 제사'라고 표현한다. 제사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거룩해야 한다. 그 유일한 통로는 성령이다. 우리가 드려야 마땅한 예배는 주일날 뿐 아니라 평일의 일상 가운데에도 거룩함으로 나타나져야 한다. 이것이 합당한 예배다. 바울은 우리에게 마음의 갱신을 요구하는데, 이 말은 한마디로 생각을, 가치관을 바꾸라는 것이다. 산 제사가 되어야 할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은 곧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에 귀 기울이며 순종함을 결단하고 실행에 옮기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삶일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다.


로마서를 여러 번 읽었었지만, 이번만큼 로마서를 깊게 이해해 본 적은 없었다. 번역 탓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마도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 책, '로마서 산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성경학자인 권연경 교수의 친절하고도 예리한 주석적인 글이 로마서를, 나아가 바울의 복음을,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1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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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 - 내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증거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지음, 정동섭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공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읽고.


사랑하는 아내와 키스를 하고 잠자리에서 빠져 나와 아들의 방으로 향한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들을 꼬옥 안아주며 볼에 뽀뽀를 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스킨십을 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사랑할 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다. 우린 인간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린 자칫 인간의 육신을 생각할 때면 제한 받고 통제 받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를 제한과 통제보다는 오히려 자유함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있고, 그 만짐으로 인해 사랑을 느끼고 비로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육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이는 곧 자유함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우리의 육체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어쩌면 천사가 흠모하는 인간의 본질은, 그들은 가지지 못했으나 인간만이 가질 수 있었던, 바로 우리 육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생명체를 연구하며 그 신비함에 깊이 경탄할 때가 많다. 특히,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정교하고도 완벽하게 디자인된 생명체의 신비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믿는 내가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창조자 앞에서 전적으로 겸허해 질 수밖에 없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생명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비밀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러한 신비가 가능한지 그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과학자로서 일상의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연구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새로운 비밀을 많이 밝히고 안다 하더라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오히려 더 알고 싶고 또 알고 싶을 뿐이다. 무한한 생명의 비밀 앞에서 과학자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칼 세이건의 제안에 따라 보이저 1호가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포착한, 희미한 푸른 점 (Pale Blue Dot)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폴 브랜드를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정형외과 의사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적인 사명을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고 한 평생을 보낸 평신도 선교사였다. 그런데 그의 선교지는 어떤 특정한 지역이기보다는 한센병과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었다.


문둥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은 자멸하는 병이다. 사지가 서서히 절단되고 코가 문드러지는 육신의 처참함을 동반하는 병이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한센병은 주로 신경 세포를 공격하여 감각을 차단시켜 버린다. 이것은 어느 날 손가락 하나가 잘려져도, 그들의 비극은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이기보다는 그 아픔을 전혀 못 느낀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폴 브랜드는 어느 날 그의 한센병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한센병의 무서운 결과는 환자들이 고통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이후 그는 한센병이 조직의 부패 없이도, 통증의 감각을 상실시킨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외과의사로서 한센병 환자들의 외과적 수술과 재활에 현격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로 그 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재활공동체를 운영하며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하는 사랑을 실천한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어느 날 필립 얀시가 아내의 벽장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한 편의 에세이를 읽고 난 후,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그 에세이의 저자였던 폴 브랜드를 직접 찾아가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느덧 기독교 작가로서 탄탄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필립 얀시이지만, 폴 브랜드를 만날 때만 해도 그는 이십대의 젊은 저널리스트였다. 폴 브랜드와의 만남은 필립 얀시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폴 브랜드가 죽고 나서 그는 회고한다. 폴 브랜드를 통해서 이론으로만 들었던 기독교적 삶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확신뿐 아니라, 겸손함을 잃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면서도 얼마든지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런 확신이 미약해질 때면 항상 폴 브랜드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린다고도 고백한다. 폴 브랜드는 필립 얀시에게 있어서 실로 거인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 출발하여 (1부), 이 책은, 골격을 유지해 주는 힘이 되는 '뼈' (2부), 다른 생명과 소통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 (3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들의 몸을 움직이는 신비한 메커니즘인 '동작'에 이르기까지 (4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들의 몸을 비유로 하여 실로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메시지를 담담히 선포한다. 바울 역시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인간의 몸과 각 기관을 비유했음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바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지체인 것이다. 폴 브랜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세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 우리들 각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라는 것이다.


세포가 가장 세포다울 때는 하나의 세포가 주위의 세포와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이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충성하여 전체 몸이 정상적인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때다 (이것이 책의 목차가 1부 ‘세포’에서 시작하여 4부 ‘동작’으로 마치는 의미이다). 세포다움은 세포의 dependence에 있기보단 inter-dependence에 있는 것이다. 작은 하나의 완벽함보다는 연약한 하나일지라도 조화롭게 모여 큰 하나를 이루는 것에 바로 세포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의 본질이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에 비유한다면,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우리들이 자본주의적이고 성공지향적이며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에 묶인 채 개인의 번영과 안녕에만,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세포들이 모여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될런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포 중에서도 어떤 세포는 자신의 생명에만 연연하여 주위의 세포들과 전혀 소통하지도 않고, 자신이 전체 몸의 일부인 것을 망각한 채 몸에 충성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독립적으로 사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세포를 우린 암세포라고 부른다. 암세포는 자기중심의 원죄를 짊어진 인간의 이기적인 본질과도 너무나 닮아 있다.


필립 얀시를 통하여 폴 브랜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이지만, 똑같은 기능을 가진 클론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세포로 분화되어 있으면서도, 그래서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러므로 서로 연합하고 봉사하고 헌신하여 건강한 공동체 (교회)를 이루는 임무를 맡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을 둘러보면, 교회만큼 상이한 사람들이 모인 기관도 없다.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치체계나 기준으로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의 집합으로 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머리로 삼고 있는 존재라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연합함의 비밀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유사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폴 브랜드 역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합의 근거와 시작이 되어주는 다양성은 또한 우리들이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만남을 가질 때에도 하나님나라가 임한 사람이라면, 함께 한 몸을 이루는 세포요, 서로 공동체를 이뤄야 하는 존재임을 간파하며 결속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이유가 된다. 처음 보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이기에 금새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다른 기관을 이루는 세포이지만, 그래서 피부색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는 일부인 것처럼,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부다. 우리는 형제, 자매요, 가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게 남겨진 사명이요,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만족함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의 환희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랑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폴 브랜드는 암세포의 반항을 교회 내의 반란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월터 윙크가 간파한 것처럼 폭력이 신이 되어버렸고, 그 폭력으로 평화와 부를 얻어낸 미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서구 세계와 심지어 전 세계에 걸쳐 팽배해진, 자본주의 체제로 말미암은 부의 편재는 교회 안에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미국이나 영국의 세포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고 폴 브랜드는 목소리를 높인다. 이는 선민사상 속에 갇혀 있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과도 같을 것이며, 번영신학으로 점철된 대형교회의 리더들과 추종자들과도 같을 것이며, 기독교의 옷을 입은 이교도적인 기복, 무속신앙에 사로잡혀 개인의 안녕만을 추구하는 자들과도 같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서로 다른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고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정상적으로 움직인다는 상식을 통하여 폴 브랜드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부요, 그래서 조화롭게 연합해야만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책을 덮고 글을 쓰니 어두워졌다. 나는 곧 잠자리에 들어가 잠을 청할테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다시 사랑스런 아내의 키스와 사랑하는 아들의 포옹으로 내일을 시작할테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폴 브랜드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건강한 세포가 우리 몸을 이루고 있으며, 골격을 유지해 주는 튼튼한 뼈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가 내게 있음은, 그저 나 자신의 건강이나 내가 속한 가족 안에서의 소통만을 위한 것이 더이상 아님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야만 하고 충성해야만 하며, 나와 가족을 넘어선 모든 하나님백성들과의 연합을 생각해야 한다고 나의 온 몸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하나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좀 더 머리로부터 오는 시그널에 민감해져야 하고, 그 시그널에 우선순위를 두고 삶의 패턴과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지경이 더 넓혀질 시간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8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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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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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화인가, 순수함인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기적이 일어날 거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침묵’이라는 제목으로부터 이야기의 결론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긍정적일 수 없을 결론을 예측하며 난 책을 펼쳤다. 엔도 슈사쿠를 처음 만났다.


이 책에서의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의미한다. 고난과 역경 한 가운데 놓인 하나님의 백성을 기적을 일으켜 구해주는, 영화나 소설 속의 슈퍼 히어로나 마법사 하나님이 아닌, 17세기 일본, 천주교의 박해 중심에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시고 묵인하시는 하나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죽음도 무릅쓰고 극심한 고통을 담대히 선택한 자신의 백성들 앞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끝까지 침묵만을 지키셨다.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실화와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소설이다.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포르투칼 신부가 일본에서 박해를 받다가 결국 배교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줄만큼 소설적인 요소보다는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드리고 신부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편지조차도, 덕지덕지 찢어지고 빛바랜 모습으로 어느 박물관엔가 보관되어 있을 법한 기분도 들게 만든다. 그만큼 이 책은 소설이지만 아주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글쓰기로 쓰여진 이 책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그저 공감이 된다. 때로는 의심으로,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적의에 가득 찬 채 하나님께 따지고 원망하며 화를 내 본 우리 자신들의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상기시키게 만든다. 이 책은 비록 지금으로부터 4세기나 차이나는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일본이란 낯선 곳에서 벌어진 일을 그려내고 있지만, 21세기 현재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이 여전히 똑부러지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가슴이 한없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바로 시공간과 사건을 초월하여 동일한 결론을 모두 경험하고 그것이 마음 속에서 끝내 대답되지 않은 채 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뿌옇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침묵하심에서 하나님의 동일하심을 찾는 건 신자로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이야기의 플롯은 예수의 수난 과정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여기엔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개인적으로 나는 그 의도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의 죽으심 때에도 철저하게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이지 않겠냐는 추측에서 찾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침묵을, 여전히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더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드리고 신부를 예수에 대치시키고, 로드리고 신부를 돈을 받고 판 기치지로를 예수를 은 30냥에 판 유다에 대치시킨다. 또한 관리들에 의해 조롱당하는 장면이나, 감옥을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귀를 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취조당하는 과정에서 오늘 밤 반드시 배교할 것이라는 통역의 말에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키는 것까지도 모두 예수의 수난 과정 중에 있었던 여러 가지 장면들과 겹쳐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읽는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받으셨던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도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닮은 부분이 여럿 있다 하더라도 큰 차이점도 있다.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처럼 극심한 육체적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고, 최후의 죽음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는 끝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자신의 발로 직접 밟고 배교했다. 마치 예수의 말 그대로 닭 울기 전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박하고도 극단적인 상황을 통하여 엔도 슈사쿠는 우리에게 묻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답은 책의 결말에도 주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열려져 있는 질문인 것이다. 통역이 계속해서 지껄였던 ‘형식적’으로만이라도 배교를 하라는 말이 귓전에 남아 있다. 단지 성화를 밟는 행위가 과연 신앙을 져버리게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 수 있을까? 로드리고 신부는 기도를 하며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신부가 들었던 그 음성이 내겐 끝내 소화되지 않을 음식처럼 목에 걸려있다.


갈릴레오가 자신이 주장해 온 지동설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자기 스스로 구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을 거론할 때면 모든 사람이 갈렐레오를 떠올리는 것처럼, 어쩌면 성화를 밟고 배교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여러 신도들의 목숨까지도 살린 로드리고 신부의 행위는 결국 예수 믿는 신앙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실제적으로 일본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진 않았을까? 아니면, 신부가 만약 신도들의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과감하게 선택했었다면, 자신 앞을 먼저 간 배교의 스승, 페레이라 신부도 끝내 회개하고 다시 순교하며 신앙을 순수하게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이 책이 전달해 주는 우울함은 그 힘이 무척이나 강력하다. ‘합리화’하는 행위와 ‘순수한’ 신앙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재정의해보는 기회가 된 건 좋은데, 내 안에 남아 있는 이 찝찝함은 어쩐단 말이냐!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8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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