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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ㅣ 헤르만 헤세 선집 6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남에게로 향하는 삶.
헤르만 헤세 저, '크눌프'를 읽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가?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눈 앞에 펼쳐지는 낯선 세상, 그리고 비로소 대면하는 익숙하고도 낯선 자아. 함께 떠난 여행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우린 혼자 떠난 여행에서 선물로 받아오곤 한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은 피부와도 같았던 견고한 보호막을 깨부수고 나오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엔 아픔이 동반되기 마련이며, 때론 그로 인해 깊숙하고도 치유되지 않을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대개는 상처가 아닌 치유로 수렴한다. 여행에서 돌아온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린 자신의 내면 세계를 한층 더 거짓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고, 한 단계 성장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홀로 여행을 떠난 자는 대자연이 주는 웅장한 침묵 속에서도 자기 안의 소란스런 여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소음을 느끼고, 광장의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도 기어코 자신의 내면으로 숨어들어가 고독에 잠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으로서, 홀로 떠난 여행자는 고독과 침묵 가운데 자신의 내면세계에서도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삶의 주인공 자리를 잠시 내어놓고 삶의 구경꾼으로서 자신의 삶과 그 삶을 이루고 있는 훨씬 더 큰 그림을 보게 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목이 곧은 우리들은 좀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놓지 못한다. 언제나 보이는 것은 부족한 것들과 더 성취해야 할 것들뿐, 만족이란 없다. 조금이라도 더 열정을 쏟아 부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여기서 멈추면 분명 무슨 큰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절대 멈출 수 없다. 무조건 전진이다.
그러나 인생의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러한 '계속 전진'형의 종말은 파멸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시 정지’ 버튼 없이 ‘재생’ 버튼만 눌러댄다면, 언젠간 배터리가 소모되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주인공과 관객의 자리를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변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야 할지 잘 분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높은 곳에 올랐을 때 가질 수 있는 성취감뿐만이 아닌, 이런 잠시 멈춤의 순간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망각의 동물인 인간의 삶에서의 풍성한 아름다움은 여러 '일시 정지'의 순간이 만들어내는 향연일지도 모른다. 기억해 내고, 곱씹게 해주어 잃어버릴 추억을 소화시키고 기념해 나가는 것이다.
소설의 장점 중 하나는 소설을 통해 이런 '일시 정지'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린 실상의 분별력을 얻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 낯섦이 허구와 실상을 관통하여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크눌프. 그는 방랑자다. 평생을 홀로 여행을 떠난 자다. 삶 자체가 여행이 되어버린, 잠시 멈춤의 시간이 너무 길어져 ‘일시 정지’가 아닌 ‘정지’의 삶이 되어버린 한 사람의 삶의 단면을, 난 올해 들어 여섯 번째로 읽은 헤세의 단편 소설, '크눌프'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한편으론 삶의 구경꾼이던 크눌프의 삶을 구경하는 이차적인 구경꾼으로서, 또 한편으론 방관하고만은 있을 수 없어 그의 삶에 녹아 든 아픔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공감하고, 미처 쓰여지지 않은 그의 삶의 여백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시에 그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독자로서 난 이 책을 읽어냈다. 이로써 나 역시 크눌프를 만나 일깨움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내게 다가온 크눌프의 삶은 ‘정지’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보다는, ‘정지’도 다른 차원에서는 하나의 ‘재생’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지’는 재생의 여집합이 아닌 또다른 세계일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정지’는 ‘재생’과 동등한 위상을 가지고 서로 공존과 공생을 하는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알려주었다. 그렇다. 크눌프의 삶을 통해 나는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소위 질서라고 믿어왔던 상하우열의 관계를 좌우평등의 관계로 바라볼 수 있었다.
크눌프는 고아도 아니었고,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가정에 불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지적인 면이나 감성적인 면에서 뒤떨어지는 아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라틴어 학교에 다닐만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성적도 좋았으며, 여러 방면에서 잔재주도 많아 친구들로부터 경탄과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보스가 아닌 부드럽고 겸손한 리더였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변이 없었다면 아마도 어른이 되어 큰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크눌프에게 작은, 아니 그에겐 인생 전부가 되었던, 이변이 생기고야 말았다. 라틴어 학교를 다닐 때였다. 2살 연상의 한 소녀가 그의 앞에 나타났고, 크눌프는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에 빠질만한 남자라면 적어도 라틴어 학교에 다녀선 안된다고 했다. 적어도 공립학교에 다녀 기술을 배운 사람이라야 된다고 했다. 학자나 교수 따위는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크눌프는 학교를 못 다니겠다는 말을 했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야단을 맞고 나서, 학교에서 쫓겨나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일부러 공부를 게을리하고 일부러 틀린 대답을 하며 수업이나 과제를 빼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원하는 공립학교로 옮기게 되었지만, 약속되었던 그녀의 사랑은 끝내 받지 못했다. 대신 은근히 경멸하는 듯한 눈빛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작업공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크눌프는 모든 것을 잃은 것만 같았다.
크눌프에겐 라틴어 학교보다 그녀와 연인 관계가 되는 것이 더 큰 가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철없는 십대들의 불장난 같은 거라 치부하고, 바보같은 짓을 하여 인생을 망쳤다고 하기엔 크눌프는 너무 가진 재능이 많았고 게다가 멋졌다. 그는 그 이후로 어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내게 인상적인 것은 떠돌이 크눌프를 만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었다. 그들은 모두 크눌프를 아꼈으며, 그에 대해 불쌍하다는 마음보단 약간의 동경과 함께 존경을 담아 보냈다.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돈과 권력은 차치하고서라도 크눌프에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집과 가정도 없었지만, 대신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의 존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치들을 떠올리게 해주었고, 그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다시 풍성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맞이했다. 똑같은 일상에 지쳐 인생의 무의미함을 맛보고 있을 가정에 며칠 간 묵게 된 크눌프는 그 가정에 다시 생기가 돌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대접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대접받는 그에게 고마워해야할 입장이 수시로 연출되기도 했다. 크눌프는 어쩌면 산소나 천사와도 같은 역할을 본인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눌프는 보통 사람들이 잃어버린지조차 잊어버린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자유'였다. 정착을 하고 소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려고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와 같은 삶을 살다가 자연스럽게 잃어버리게 된 자유로운 삶, 깊숙한 마음 한 켠에 먼지가 잔뜩 덮인 채 존재하고 있는 그 자유에 대한 동경. 그렇다. 크눌프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자유의 세계로부터 각박한 현실 세계로 파송된 일종의 전도자였던 셈이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잊혀진 자유의 가치를, 마치 오래전에 책갈피로 끼워두었던 만원 짜리 지폐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가 어느 날 우연찮게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쁜 심정으로, 발견했던 것이다. 잊어버렸던 '일시 정지'의 버튼을 다시 발견하고 지금도 누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오랜 방랑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크눌프는 결국 폐결핵에 걸렸고, 때마침 만난 의사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마지막까지 그가 선택한 곳은 병원이 아니라 길 위였다. 어느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크눌프는 죽음을 맞이했다.
재미있게도, 죽기 전 그가 믿었을지도 모를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크눌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후회와 원망을 토로했고, 하나님은 크눌프에게 그의 삶이 방랑으로 이루어져왔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으니 만족하기를 요구했다. 크눌프의 방랑과 그 동안 받은 조롱과 고통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진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리고 크눌프에게 있던 방랑벽도 하나의 특성으로 인정하시며 그 특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거라고 말씀하셨다. 크눌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한탄할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다고 인정과 고백을 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나의 정체성을 이루기도 하는 '기독교인'에 대해서,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서. 묘하게도 크눌프의 삶과 겹치는 게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저 주고 거저 받고, 내 것을 움켜쥐거나 내 것을 크게 부풀리려 하지 않고 남들과 나누는 삶, 비록 세상에서 정의한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삶, 비록 스스로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자 방랑자로서의 삶을 살아 가지만, 어느 곳에 가든지 환대를 받으며 오히려 환대를 해준 사람의 삶이 그를 만난 이후로 더욱 풍성해지는 삶, 그 풍성함을 보고 또다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다른 곳을 향해 미련없이 떠나는 삶. 오늘은 은혜로운 설교 말씀이나 감동을 주는 귀한 글보다 크눌프의 삶이 내겐 더 묵직하게 와닿는다. 나 역시 결국은 이방인이요 나그네란 사실을 다시 떠올린다. 안정된 정착을 구하는 삶보다 불안함을 각오하고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크눌프가 했듯 평생의 여행이 되더라도, 나를 떠나 남에게로 향하는 삶을 살고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9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