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펭귄클래식 19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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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함과 알싸함의 공존.

이반 투르게네프 저, '첫사랑'을 읽고.

손님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난 어느 늦은 밤, 방 안에는 세 명만이 남았다. 적적함을 달래보고 싶었는지 느닷없이 집주인이 돌아가며 첫사랑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자기 순서가 다가오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먼저 자신은 말솜씨가 전혀 없다고 운을 뗀 뒤, 첫사랑 이야기를 말로 하는 대신 기억나는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다음 번 만날 때 읽어주겠노라고 말한다. 썩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두 주 뒤 보란 듯 그 약속을 지킨다. 이 책은 블라디미르가 쓴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회고록인 셈이다. 또한 실화에 입각한 저자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수기이기도 하다.

열여섯 살. 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선 나이. 블라디미르는 첫사랑을 경험했다. 그 낯설지만 압도적인 이미지. 순간이 영원이 되는 것만 같았고, 기꺼이 한 여자의 노예가 되리라 다짐까지 하며,  멈춰진 시간 속에서 폭풍처럼 뛰는 심장을 움켜잡던, 그러나 어느새 덧없는 바람처럼 흘러가버린 나날들. 그에게 첫사랑은 열정의 시작이었고, 동시에 고통의 시작이었다. 풋풋한 감성으로 덧입혀진 것만 같은 기억 속에는 너무나도 아프고 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억들까지도 공존하고 있었다. 

세밀한 감정까지 기억해내며 노트에 옮기기까지의 두 주 동안 과연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처음에는 아마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떤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으로 폭풍 같은 기억 속으로 돌아가 다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가슴 아파 울기도 하며 분노하기도 하고 자책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흘러가버린 세월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추억의 잔상이 전해주는 애잔함에 흠뻑 젖고는 다시 겨우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아, 그 기억을 일일이 들춰내어 글로 옮기기까지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나이다. 블라디미르의 첫사랑.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갓 성인이 된 나이. 그와는 다섯 살 차이. 블라디미르의 마음을 단번에 앗아간 그녀는 그녀를 추종하는 여러 명의 성인 남자들의 마음을 주무르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숭배하게 할 만큼 영악하고 조숙한 여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년이었던 블라디미르에게 지나이다는 성인들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문이기도 했다. 그에게 첫사랑의 이미지는 이성을 향한 호기심이나 동경과도 같은 낭만으로만 채색되지 않았다. 그의 첫사랑은 소년에서 어른으로의 변화를 겪는 시기와도 겹쳐졌다. 이러한 면에서 블라디미르는 아마도 통 종잡을 수 없는,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혼란스러움과 불안과 초조를 동반한 감정으로 그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첫사랑 기억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충격적인 실체와 대면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지나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지나이다를 한창 숭배하던 그 불꽃 같던 시절, 블라디미르는 불현듯 그녀의 마음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닐까 내심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내 자신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도 했으나,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은 아직 소년이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블라디미르는 다행히 적어도 돈키호테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여신과도 같았던 지나이다의 마음을 훔쳐간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가히 충격이었다. 어느 깜깜한 밤, 그녀의 창이 보이는 정원에 몰래 숨어있던 블라디미르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출현을 목격하게 되고, 당황하여 잠시 넋을 놓았다가 그녀의 방을 쳐다봤을 때 침실 안 불빛이 잠시 비쳤다가 커튼이 조심스럽게 창틀까지 내려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사랑이란 거구나, 했다. 마침 누군가의 폭로로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은밀한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자, 블라디미르는 왠지 모를 분노와 기사도 정신과 흥분이 마구잡이로 혼합되어 온전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충분히 버거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사를 감행하고 난 이후 다행히 블라디미르는 곁길로 새지 않고 원래대로 공부하여 대학까지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만난 지인 덕분에 몇 년 만에 지나이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결국 그는 그 기회를 일부러 놓쳐버리고 만다. 두려웠던 것이다. 용기가 안 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며칠 뒤 들은 소식은 그녀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후회했다. 쉽게 잊혀질 후회가 아닌 영원한 후회가 되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첫사랑의 풋풋함과 아픔의 공존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정도와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어수룩하고 부끄럽기만한 첫사랑의 기억. 할 수만 있다면 얼른 수정하고 싶은 마음이 돌연 들다가도,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게 아름다움이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건, 나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탓일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4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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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A. J. 크로닌 지음, 구혜영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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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HE CITADEL: 거대하고 견고한 구조적 악의 실체.

A. J. 크로닌 저, '성채'를 읽고.

이미 고전이 된 이 책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세한 줄거리를 파악하거나 상투적인 교훈 따위를 끄집어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대신, 제목이 가진 의미를 곰곰이 따져 물으며 책 전체에 깔려 있는 저자의 메시지와 이 책이 쓰인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일 것이다.

작은 글씨로 빼곡히 400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이 책에서 '성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본문은 단 세 군데다. 다음과 같다.

1. "...자네는 바빌론의 성채를 때려부수려는 거지. 나에게도 젊은 시절은 있었다네."
2.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인생이란 미지의 것에 대한 공격이며 격렬한 돌격전이라고 곧잘 말씀하시던 것 말이에요. 정상에 있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성채를 한사코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당신은 그런 기백을 가지셨어요."
3. "이윽고 그가 발길을 돌려 시간에 늦지 않도록 급히 나가려 할 때 보니, 눈 앞의 하늘에서 성채의 흉벽 모양의 구름이 뭉글뭉글 밝게 떠올라 있었다."

성채. 영어로는 Citadel. Wikipedia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A citadel is the core fortified area of a town or city. It may be a castle, fortress, or fortified center." 즉, 우리가 디즈니 영화 앞부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공주나 멋진 왕자가 살고, 하늘 위로 불꽃놀이가 펼쳐지며, 뾰족하고 높은 첨탑을 가진 '성 (castle)'과는 사뭇 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낭만적인 상상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측면, 즉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을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도 'The Castle'이 아닌 'THE CITADEL'이다. '성채'보다는 '요새'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비록 문학적 뉘앙스는 조금 떨어질지 모르나, 제목을 이해하기에는 좀 더 적절한 것 같다. 이를 조금 더 풀어서, '어떤 거대하고 견고한 벽 같은 존재', 혹은 '도저히 한 사람이나 소수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실체' 정도로 이해한다면, 적어도 이 책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앤드루 맨슨은 의사다. 저자인 A. J. 크로닌도 이 책을 쓰기 전 의사였다. 앤드루는 크로닌의 분신인 셈이다. 이는 이 책이 크로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리고 이를 제목과 연결시켜 이해해본다면, '성채'는 아무래도 일반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의사의 눈에 비쳐진 '의사 사회의 구조적 악' 정도의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엔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저자가 앤드루를 의사 자격을 갓 취득한 신참내기 의사로 등장시킨 이유 역시 '성채'의 거대함과 견고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당시 영국 의사 사회 내부의 보이지 않은 폐단을 고발하는 메시지를 과감하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앤드루는 성인이 되기 전 부모를 잃었다. 하지만 운 좋게, 빈곤하고 유망한 장학생에게만 지급되는 장학금을 (비록 의사 자격 취득 후 성실히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는 장학금이었지만) 받으며 의대까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다혈질의 스코틀랜드 남성인 그에게는 여전히 의사로서 순수하고 선한 동기가 살아있었으며,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정의감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한 번도 때를 묻혀보지 않은 백지와도 같이 나이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백지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장학금을 갚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그는 남 웨일스의 벽촌, 블레넬리까지 일부러 찾아왔다. 의사 자격증을 딴 지 얼마 안 되는 조수로서는 최고의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의사로서 일을 시작하게 된 첫 도시, 블레넬리에서부터 앤드루는 '성채'의 그림자랄까, 꼬리랄까, 아무튼 혼자의 힘으로, 혹은 순수한 의사의 동기만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폐단을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블레넬리는 탄광 도시이자 벽촌 중 벽촌이었기에, 그가 느낀 성채는 시골 마을이면 의례히 가지는 보수성과 빈약한 시스템 정도로 충분히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저자는 앤드루의 첫 직장을 블레넬리에 위치하게 했고, 마지막 직장을 런던 중심에 부유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 위치하게 했는데, 이러한 순서는 앤드루가 블레넬리에서 인지한 '성채'가 시골만의 문제가 아닌 가장 번화하고 발달된 도시 한복판에서의 문제와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성채'의 규모는 문명의 발달이나 사람들의 경제와 지식 수준에 따라 차이가 날지는 모르나, 그 속성과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이 작가 크로닌이 말하고 싶었던 중요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고로 악의 본질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앤드루의 두 번째 직장은 애버라로라는 고장이었다. 여전히 시골 마을이었지만, 블레넬리보다는 규모가 크고 거주 인구도 많고 좀 더 번화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앤드루는 또 다른 규모와 색깔의 '성채'와 맞닥뜨린다. 블레넬리와 애버라로에서 그가 공통적으로 대면한 '성채'의 속성은 돈과 권력이었다. 블레넬리에서 애버라로로 옮기게 된 이유도 앤드루의 금전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편, 애버라로에서는 돈 뿐만이 아닌 학위, 즉 명예의 힘을 인지하게 된다. 덕분에 그는 산골에 처박힌 시골 의사 직으로부터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영국 의학회 회원증을 따낼 수 있었고, 블레넬리에서부터 순수한 동기로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 온 진애흡입에 관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까지 따낼 수 있었다. '성채'의 진화는 그가 가졌던 백지의 진화도 유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자고로 한 사람이 타락하기 직전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높은 곳인데, 그 높은 곳에 아직은 기름칠이 덜 되어 있어서 미끄러지기 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미끄러워지기 위해선 불의와 위선과의 타협이라는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저자 크로닌은 단계적으로 앤드루를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유인하고, 그 높은 곳을 스스로 기름칠하게 만들어 미끄러져 넘어지도록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일터는 런던에 위치했다. 그의 박사 논문 덕에 정부의 전담 의무관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인맥까지 갖추기 시작했고, 지위는 물론 어느 정도 경제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성채'는 존재하고 있었다. 앤드루는 그곳에서 정부 관료 사회에 고여있던 폐단을 마주한다. 그리하여 표면상으로는 지극히 안정적으로 보이는 자리를 마다하고, 용기 내어 런던의 허름한 변두리 지역에서 개업을 한다.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 햄프턴과의 만남이 재기된다. 햄프턴은 이미 닳고 닳은 불의한 의사 사회에 우뚝 서 있는 성채에서 대활약을 하며 배를 불리고 있는 인간이었다. 소설 속에서 끝까지 선과 정의의 편에 서서 앤드루를 사랑하고 응원해 마지 않던 천사 같은 아내 크리스틴이 가장 못마땅해 하고 경계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축복 뿐만이 아닌 재앙도 언제나 어떤 만남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앤드루는 자신이 증오하고 기피했던 관료사회의 부패함, 즉 돈과 명예로 권력을 사들이고 불의한 일에 연루된 비슷한 사람들끼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안전지대를 만들어 은밀히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부류 속으로 점점 물들어갔고, 그 열매로 그는 점점 성공가도를 달린다. 반면, 아내 크리스틴과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에 아내는 적잖은 실망을 하면서도 끝까지 그를 사랑하고 믿어주었다. 아마도 아내마저 없었다면 앤드루는 파멸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아내의 기도가 이뤄진 것이었을까. 어느 날, 앤드루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불의의 현장에서 무고한 지인의 죽음을 방관하게 된다. 충분히 살 수 있는 환자였는데, 어처구니 없는 돌팔이 친구 외과의사의 짓으로 단 10분 만에 죽어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은 드디어 앤드루에게 양심에 가책을 가해왔다. 아니, 그건 벌써부터 왔었지만, 자신이 살인에 버금가는 짓을 저질렀다고 여겨지자 그는 그제서야 '제자리'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회심'은 곧장 아내 크리스틴에게로 돌아가는 길과도 같았다. 크리스틴은 기뻐했다. 그리고 그를 두 팔 벌려 맞아주었다. 둘은 물질적인 행복이 가져다 주는 족쇄로부터 비로소 해방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이 이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소설 같은 법. 저자는 아내 크리스틴을 죽음으로 내몬다. 아마도 앤드루에게 죄값을 치르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넣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엔 가톨릭 신앙이 녹아있다). 남편이 회심하여 집으로 돌아온 날, 기쁨에 못 이겨 허기진 남편을 위해 일부러 남편이 좋아하는 치즈를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비극이었다. 들것에 실려온 아내 크리스틴의 왼쪽 손가락에는 여전히 그가 좋아하는 치즈가 담긴 조그만 보퉁이의 끈이 휘감겨 있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길이 이렇게도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었을까. 앤드루는 완전히 얻어 맞은 것처럼 한동안 실성한 듯한 상태가 된다.

소설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메시지는 '성채'에 대한 고발이다. 작게는 그 당시 영국 의료 사회의 부패함을 적발하고 고발하는 것이겠고, 크게는 일반적인 구조적 악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적 악의 핵심은 돈으로 산 권력이다. 이는 이 책이 첫 출판된 1937년 당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채'는 시간이 갈수록 고도로 진화를 거듭했다. 82년이 지난 2019년에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는 오히려 거의 백 년 전에도 그렇게나 거대하고 견고한 구조적 악이 존재했음에 입을 쩍 벌릴 뿐이다.

한 인간의 백지와도 같은 순수함이 타락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회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여정이 이 책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상투적인 교훈 따위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내 눈에는 작가 크로닌의 서사와 묘사의 전개 방식과 어떻게 핵심 메시지를 이야기 안으로 자연스레 스며들게 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책을 소개해준 니콜 님에게 감사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6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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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황숙진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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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소수 이민자의 애환을 담아내다.

황숙진 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읽고.

비록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이 책은 미국 엘에이 한인들의 (나아가 모든 소수자의) 현실적인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때로는 소설이 신문보다 현실을 더 잘 반영하는 법이다. 무작위적이고 변화무쌍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이 기록되는 신문은 기사 거리가 될만한 것들을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기록한다. 그래서 그 사건/사고들에 관련된 사람들만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 시대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의 거대한 수레를 돌리고 있는 실제 주인공들은 대통령도, 정치가도, 사장들도, 혹은 범죄자들도 아닌, 바로 서민들이다. 이름도 빛도 없이 그늘에서 살아가는 서민들. 그 중에서도 머나먼 타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이 짙게 녹아 든 이 책과 같은 소설은 사람들의 주목에서 벗어나 있지만 우리네 삶의 현주소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소설이지만, 그래서 허구이지만, 자본이 만든 무대 밖에 있던, 현실세계의 주인공을 실제 삶의 주인공 자리로 불러내어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그래서 더욱 현실 아닌 현실인 것이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지명과 가게나 길 이름은 자칫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이 소설이 아닌 저자의 회고록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만큼 작가 황숙진의 실제 경험이 보이지 않게 묻어 각 작품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소설의 뼈대가 되었다. 허구도 너무 허구적이면 허구의 기능을 상실한다. 독자가 잠시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삶의 현실감이 긴장감과 함께 부여될 때 그제서야 허구는 허구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LA 타임즈와 같은 신문에서보다 LA의 삶을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홉 편의 작품에 (다는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소수자, 이혼, 돈,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그리움 등이다. 피라미드 시스템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이 곧 정의이고 이기는 것이 정의일 때가 부지기수다. 언제나 피해는 피라미드 저변을 받치고 있는 서민들, 그 중에서도 신분과 인종, 경제적 차별을 받는 소수자들의 몫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미국이란 나라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엘에이 다운타운에는 홈리스들이 넘쳐나며 미국 내 범죄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다. 한인타운은 바로 그 다운타운 옆에 위치한다. 이민 1세대와 2세대들의 삶의 터전이 된 그곳은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공감할 수 없는 애환이 있다. 말로 하기도 어렵고 기사로 쓰기도 어려운 그들의 애환이 궁금하다면, 난 이 책을 주저 없이 권하고 싶다. 

다음은 아홉 편의 각 작품을 간단히 요약하며 감상을 조금씩 덧붙인 글이다. 책을 선물해 주신 저자 황숙진 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미국인 거지
첫 작품으로 수록된 '미국인 거지'는 엘에이 한인타운에 거주하는 한 중년남성의 애환을 그려내고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은 2008년 재외동포문학상 소설 부문에서 입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주인공 '나'는 십 년이 넘도록 가게를 운영하며 악착같이 살아왔다. 그러나 아내는 유방암으로 죽었다. 딸도 집을 떠났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젊었을 적 한국에 있을 때엔 해병대에 자원하여 월남 전에도 참전했었다. 돈 때문이었다. 운이 좋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전쟁 후유증에 시달린다. 삶이 힘들어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냉장고에 붙어 있던 알코올 중독 재활센터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운명인가 싶었다. 손목을 그으려던 식칼을 내려놓고 전화를 걸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일자리도 구했다.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갱단들끼리의 총격전도 자주 벌어지는 우범지대에 위치한 리커스토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그리고 가게 앞에 늘 서있는 흑인 거지 '잭'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는 다른 거지들과는 달리 구걸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한때 부자였으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마약에 손을 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역시 월남전 참전 후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나'는 잭에게서 묘한 공감대를 느낀다. 어느 날 갱단의 총격전 때문에 잭이 머리에 총을 맞아 구급차에 실려간다. 그 때문일까. '나'는 일 년 만에 다시 술을 마신다. 그리고 잭의 발작은 '나'의 발작으로 전가되었다. 술에 취한 '나'는 다시 월남 전의 '나'로 돌아간다. 함께 일하는 씨씨를 위협하다가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에 맞은 건 씨씨였을까, '나'였을까. 싸이렌 소리가 나고 경찰이 구급침대를 들고 와 결박하여 구급차에 싣는 건 '나'였다. 

산타모니카의 기러기
이 작품에서 저자는 김숙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결혼 후 잘 나가는 남편의 조용한 외도로 반강제적이면서도 반자발적인 미국행을 택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딸아이의 교육이었다. 한국적인 삶의 습관을 벗어나는 게 어려워 선택한 곳이 엘에이 한인타운이었다. 직업도 없이 남편이 한국에서 보내주는 적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비자 문제와 운전면허증 때문에 영어학원에 등록해놓고 간신히 불법체류를 면하고 있었다. 남아도는 시간이 무료하여 한국의 시조를 배우는 시조토방에 취미로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만난 강사 강석진은 그녀에게 남자로서 접근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록 어린 딸아이도 금새 파악할 정도로, 그리고 외도하는 남편에게 직접 따지거나 화도 못 낼 정도로 바보 같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신까지도 그럴 수는 없었나 보다. 그러나 어느 날, 딸아이의 학교폭력사건이 터졌던 날, 그녀는 미칠 것 같은 감정에 홀로 산타모니카 피어를 찾는다. 자살 생각까지도 할 때 즈음, 그녀는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본다. 언젠가 시조토방에서 배운 이옥봉 시인의 시조에 등장했던 그 기러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강석진에게 편지를 쓴다. 인생이 슬프고 힘겹지만 마음을 굳게 먹겠다는 다짐을,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나 한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내가 달리기 시작한 이유
이번에 작가는 초등학생인 둘째 딸이 된다. 사람이 좋아 사업에서 망한 뒤 집에만 틀어박혀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아빠, 덕분에 생계가 어려워져 직접 일자리를 찾아나선 엄마, 그리고 철이 덜 든 사춘기 고등학생 언니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다. 이름은 체리, 그녀에게는 단짝인 알리사라는 두 살 어린 친구가 있다. 약물과다로 생을 마감한 엄마를 뒤로 하고 할머니와 꿋꿋하게 살아가는 작은 아이다. 알리사 엄마의 죽음은 체리가 처음 목격한 죽음의 실체였다. 이 작품의 저변엔 죽음이 잔잔히 흐른다. 하지만 생각이 깊은 초등학생 체리의 눈으로 본 삶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비록 작품의 끝부분에서 아빠가 한국으로 홀로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상황을 맞이했지만 말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슬픔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저자의 애환이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정제되고 절제되어 잘 그려져 있다. 체리가 달리기 시작한 이유는 울지 않기 위해서다. 멀리 떨어져있거나 설사 죽은 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뛰고 있는 자신을 뒤에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눈물도 흘리지 않아야 했고 씩씩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네타
주인공 영진은 어느 날 밤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오래 전 연락을 끊었던 친구 선우였다. 둘은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함께 예일대에 입학했다. 서로 주류사회에 들어가자고 화이팅을 했었다. 예일대 입학은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특히 아버지가 동네방네 자랑을 하실 만큼. 그러나 김치 냄새가 나는 영어실력으로는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영진은 졸업 후 꿈을 갖고 해오던 카피라이터 일에서 실패함으로써 선우보다 먼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에게 말하지 않고 엘에이로 돌아왔다. 가족까지 데리고 돌아온 그를 아버지는 수치스럽게 생각하셨고, 할아버지 건강 문제로 한국에 가신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선우는 월스트리트에서도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마치 자살 직전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것 같은 뉘앙스로 전화가 문득 걸려온 것이었다. 영진은 위급함을 느끼고 곧장 뉴욕으로 날아갔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우가 다니던 회사 부사장이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선우는 마이애미애서 실종되었다고. 그리고 그 이전에 돈을 횡령하여 도망쳤다고. 영진은 허탈했다. 선우가 자살했다는 정황이 그랬고, 자신이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이 그랬으며, 선우가 범죄까지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랬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영진은 선우를 우연히 본다. 선우는 카멜레온처럼 위장하여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고 영진은 이용 당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모네타, 즉 돈 때문이었다.

어느 장거리 운전자의 외로움
운 좋게 명문대를 졸업한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한 후 시애틀에서 조그만 마켓을 운영하며 아내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아내로부터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는다. 그녀는 주인공이 그녀의 명의로 돌렸던 집마저 팔아 버리고 그 돈을 다 챙겨서 얼굴 한 번 비추지도 않고 달랑 쪽지만을 남겨둔 채 떠나버린 것이었다.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여 뉴욕에 산다는 그녀를 찾아가 죽이려고도 시도했었지만, 이미 그는 그녀에게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져 있었기에 경찰에 체포되어 두 달이 넘게 감옥을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허망한 마음에 가게를 누나에게 넘기고 엘에이로 내려와 십 년이 넘도록 노가다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가고 있는 그였다. 어느 날 신문광고에서 "장거리 운전하실 분. 시민권자 환영"이라는 기사에 눈이 간다. 그는 엘에이도 벗어나고 싶었고 노가다도 때려 치우고 싶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전화를 걸어 구인광고를 낸 자를 직접 만나보니 그가 맡을 임무는 한국에서 건너온 밀입국자들을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 미국까지 불법으로 실어다 주는 일이었다. 한 사람 당 천 달러, 7인승 밴에 사람이 꽉 차면 한 달에 두 번만 해도 노가다 몇 달치를 한 번에 벌 수 있는 큰 돈이었다. 범죄에 가담하는 사실이 꺼림칙했으나 그에겐 돈의 유혹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는 마치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걸 도와주는 '코요테'처럼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몰래 사람들을 날라주는 코요테가 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의 첫 임무는 마지막 임무가 되어버린다. 밀입국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창녀라고 불리는 한국여성들이었다. 인신매매와도 같은 범죄였다. 그들은 돈이 필요해 그런 극단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모두 미국으로 입국시켜 룸살롱이나 마사지샵에 일하도록 계획되어 결국은 성매매에 이용되는 운명들이었던 것이다. 첫 임무가 시작되기도 전, 함께 일하게 된 이 부장의 지나친 변태 행위를 목격하곤 도저히 그를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에 취한 그를 때리고 결박한 후 여자들만을 데리고 미국으로 밀입국 한다. 여자들에게 자유의 몸을 허락해주는 동시에 그는 그 일에서 손을 떼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 가운데 수지라는 여자만은 자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래 계획된 라스베가스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빚진 돈이 있고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등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못해 그는 수지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라스베가스로 향하고, 거기서 돈을 도박으로 다 잃고, 수지와 작별을 한 후 쓸쓸히 엘에이로 돌아온다. 

죽음에 이르는 경기
이 작품의 시대는 미래다. 자본주의의 몰락을 코 앞에 둔 시점이다. 화자인 '나'는 기자다. 최근 사회부에서 경제부로 전속되었다. '나'는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밝은 미래를 자부하는 대부분의 학자들보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것의 몰락을 예견한 학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어느 날, 숙직하고 있는 새벽,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어떤 여자였다. 콜로세움이라는 레저와 주거 복합의 새로운 콘도미니엄에 있는 K2 선수들의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그녀는 대뜸 그곳에서 은밀하게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마침 '나'는 아담 스미스 300주년을 맞이하여 특집 기사를 쓸 계획을 하고 있던 차였다. 콜로세움 건립 등으로 갑부가 된 Lifjoy44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자본주의가 본인이 생각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기도 한다. 이어서 그는 자본주의를 낙관하는 프랭클린 교수와의 인터뷰, 그 반대를 예견하고 있으며 지금은 은퇴 후 엘에이 근교 시골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쩌라이 교수와의 인터뷰도 끝냈다. Lifjoy44와의 인터뷰 때 선물로 받은 콜로세움 평생 회원권을 사용하러 간 날 밤, 전화 속 그 여자가 찾아와 자신이 일하는 선수 식당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K2 경기에서 패배한 스모크 킹의 시체를 직원들이 들고 와 토막을 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숨을 죽이고 있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무음처리를 깜빡 했던 것이다. 스마트폰을 여자에게 넘기고 '나'는 달려나가다가 붙잡힌다. 정신을 차려보니 Lifjoy44가 눈 앞에 있고 권총을 들고 있다. 바로 그때 TV에서는 '나'가 찍은 동영상이 그 여자에 의해 배포된 탓인지 무장경찰들이 콜로세움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이 보인다. Lifjoy44의 총구는 결국 '나'가 아닌 자신의 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2038년 여름, 금리 0%를 기록하며 사실상의 자본주의, 즉 죽음에 이르는 경기는 종식된다. 

호세 산체스의 운수 좋은 날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국인이 아닌 멕시코인이다. 그는 불법으로 미국에 건너왔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엘에이에는 한국인만이 소수자가 아니다. 히스패닉이 수로는 한국인보다 많을지 몰라도 그들 대부분의 경제사정은 한국인들의 그것보다 못하다. 실제로 가게에서 단순노동을 맡고 있는 층은 그들이다. 한국인은 백인들에게는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은연 중에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에게는 우월감을 느낀다. 이 작품에서도 한인타운은 주인공 호세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으로 느껴진다. 미국에 온 지 이틀 만에 몇 십 달러 (멕시코에서는 적어도 한 달은 일해야 벌 수 있는 돈)를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틀 만에 그는 기습 단속을 나온 마약 단속반에게 마리오 일당과 함께 억울하게 체포되었고, 그의 밀입국 사실이 조사과정에서 밝혀져 멕시코로 추방되었다. 마치 실제 기록을 쓴 것처럼 구성된 이 작품 역시 소수자의 애환을 절절히 담아내고 있다. 소수자란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는 개념인 것이다. 주인공 호세의 미국에서의 이틀은 운수 좋은 날이자 경찰에게 체포된 날이다.

거칠어진 손
주인공 '나'는 하얀 손을 가진 대학생이다. 집안 사정이 힘들어 스스로 대학을 휴학하고 아버지가 몇 십 년간 했던 노가다를 시작했다. 몇 달 만에 그의 손은 여느 노가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손으로 변해갔다. 그는 익숙해지는 일에서 만족감도 느꼈지만, 동시에 공부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양의 고된 일을 맡게 된 '나'는 늘 함께 일을 하던 최 선생님도 불평하며 돌아가버린 후 혼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처리해버린다. 그 하루 동안 '나'는 생각이 정리되면서 내면의 전투를 드디어 끝낸다.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전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게 먹게 된 것이었다. 하얀 손은 자신에게 더 이상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다.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주위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날이 '나'에게는 노가다의 마지막이자 유학 생활도 마지막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노가다라도 하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살 계획을 마친다. 거칠어진 손의 자아를 마침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오래된 기억
마지막 작품인 '오래된 기억'은 저자의 삶의 흔적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허구이지만 허구만은 아닌, 그 어느 경계에 서있는 저자의 모습이 잔잔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한강의 '소년이 온다', 마치 이 두 작품이 심층에 녹아 있으면서도 저자만의 독특한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탄생한 작품인 것만 같다. 참고로, 이 단편소설은 2013년 재회동포문학상 소설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광주대학살이 벌어졌던 1980년, 주인공 환길은 대학생이었다. 지금은 오십 중반에 이른 중년의 남성이다. 아내와는 이혼을 했고, 큰 딸은 시집을 갔으며, 작은 딸은 대학에 가느라 집을 떠났다. 그래서 환길은 외톨이다. 이혼 후 정리가 어느 정도 되자, 환길은 늘 해오던, 한국에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남은 인생을 한국에서 보낼 가능성도 열어둔 상태라 그것도 점검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삼십 년 만에 찾은 한국은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미국 엘에이 한인타운에 거주하면서 늘 한국 뉴스를 놓치지 않던 그였지만, 실제로 그가 다니던 대학과 고향을 방문했을 때 직접 피부로 느꼈던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미국에서의 삶이 늘 겉돌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낼 만큼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래서 반대급부로 오래된 기억 속에 더욱 아름답고 아련하게 자리하고 있던 한국을 방문했었지만, 정작 그가 느낀 건 또 다른 맛의 이질감이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모두 고향을 느끼지 못하는 경계인이자 주변인,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의 슬픈 정체성을 가진 이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 환길이다. 이 작품 속에는 두 시공간이 동시에 흐른다. 젊었을 때의 환길과 현재 중년의 환길이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환길은 고등학생 때부터 서울 생활을 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도 가담했으나 과외 학생이었던 영선과의 육체적 접촉으로 인해 생긴 아이로 말미암아 미국행이 결정되었었다. 영선과의 결혼은 결국 파혼을 맞이했고, 현재의 환길은 흰 머리가 생긴 중년남성이 되어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이었다. 예정보다 일찍 엘에이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환길은 자신의 과거로의 여행이 끝났음을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 서서 아름다운 인생의 의미를 물을 것이다. 이민자의 애환은 경계에 서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4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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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밑에 헤르만 헤세 선집 2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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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스를 죽였는가.


헤르만 헤세 저, ‘수레바퀴 밑에’를 읽고,


밤 9시가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혼내주기 위해 아버지는 오랜만에 분노의 회초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같은 시간, 아들은 멀리서 이미 주검이 되어 차디찬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억압의 상징인 수레바퀴 밑에서 기어이 한스는 죽음을 맞이했다.


한스 기벤라트는 재능있는 아이였다. 시골 마을에서 유일하게 주 시험에 응시하여 차석으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영예를 누릴만큼. 한스의 합격은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학교 교장의 명예였으며, 마을 목사의 자부심이었다. 한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그는 주위의 칭찬과 격려에 순응적이었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며 성공의 피라미드에 오르는 꿈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과도한 공부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일상을 빠른 출세를 위한 준비 과정과 맞바꾸는 그들의 친절한 손길에 그대로 순종했고 또한 증폭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선순환의 효과가 한 영혼의 파멸을 가져다 줄지는 그땐 아무도 몰랐다.


한스의 짧은 인생은 초창기에 터보 엔진을 장착한 로케트와 같았다. 가파르게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경쟁자 하나 없는 블루 오션을 누리기도 했다. 아주 총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빨리 올라가면 빨리 내려오는 것일까. 한스의 표면적인 오르막길의 끝은 신학교 입학 후 첫 학기에 불쑥 찾아와 버렸다. 수도원 침실을 같이 사용하는 친구 헤르만 하일너를 만나고나서 부터였다.


헤르만 하일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체제에 비판적으로 저항하는 시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신학교에 들어올만큼 인재였지만, 학업에 매진하는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았으며, 한스 이외에는 친구도 없이 홀로 어둑한 연못 근처에 앉아 시를 읊거나 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체제의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하는 반항아적인 그의 내면에 있던 불안한 정서는 급기야 그로 하여금 퇴학 처분을 받게 만든다. 그가 강제로 떠나게 되자, 유일하게 그와 함께 일탈을 일삼아 문제아로 낙인 찍혔으며 학업에서도 멀어질대로 멀어진 한스 역시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고 요양 차원에서 집으로 보내진다.


한스의 귀가는 한스에게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아버지의 망신이었고, 학교 교장의 명예 실추였으며, 마을 목사의 수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사적이고 고급스럽게 그 감정들을 잘도 숨겼다. 그들 중 한스의 실패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으며, 곧 자살할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가득차게 되자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자살을 계획하면서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과 눈짓과 몸짓에 초연할 수 있었으며 묘한 환희까지 느꼈다. “두고 보라지. 다들 깜짝 놀랄 일이 생길테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비록 어린 시절 짝사랑했었던 소녀 에마와의 재회로 뒤늦게 찾아온 주체하지 못할 사랑의 충동을 느끼며 한스는 마치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에마는 말도 없이 고향으로 떠났다. 비록 어린 시절 평범한 아이들처럼 말썽부리며 뛰어놀던 장소에도 직접 가서 그때의 향수에 젖어도 보았지만, 그곳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만큼 자신이 커버렸다는 사실을 한스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실망을 숨기는 것이 마치 아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이자 사랑인 것처럼 여기는듯한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한스는 견습공으로서 일을 시작한다. “어찌 된 일이야? 네가 철물공이 된거니?”, “주 시험에 합격한 기계공이군!”과도 같은 조롱에도 별 대꾸하지 않을 각오가 된 것이었다. 이미 한스는 자살 충동에 흥분하는 시기를 지나 몽롱한 나른함과 나태함으로 이루어진 체념의 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듯한 기분도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무 빨리 늙어버린 탓이었다.


나중에 저자 헤르만 헤세의 연보를 보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스와 하일너는 각각 헤세의 분열된 자아다. 헤세 역시 어릴 적 인재였고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쫓겨났다. 견습공으로서도 일해보았다. 아버지와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즉, 헤세는 자신의 실제 내면 세계를 기반으로 삼아 창작과정을 추가하여 이 소설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책이 헤세의 자서전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책을 덮자 마음이 무거웠다. 이미 중학생 시절에 한 번 읽었기 때문에 한스의 죽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난 끝까지 그의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다. 특히나 그의 죽음의 상세한 과정과 설명이 책에 부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나의 허무함이 배로 커져버렸었다. 한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믿는 유일한 구두장이 플라이크 빼고는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버지도, 학교 교장도, 그리고 마을 목사도. 아무도.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건 그들이야말로 수레바퀴를 돌리는 장본인이었다는 점이다. 한 어린 영혼을 처참하게 파멸로 이끈 수레바퀴를 그들은 그들의 공명심으로 성실하게 돌려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스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죽음으로 응답해야 할만큼 말이다.


이 책은 헤세의 자서전을 읽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헤세의 목적은 분명 거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어떻게 하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가 헌신하며 도왔다고 생각하면서, 한 어린 영혼을 공식적이고 효과적으로 파멸시킬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지름길을 제시하며 거기에 강렬한 비판을 가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미 고고하게 확립된 체제와 규범, 그 배후에 숨어서 실리를 취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본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실하게 지속해서 돌려야만 하는 수레바퀴. 그렇다. 수레바퀴는 겉으로는 건실하게 보이는 사악하게 획일적인 프레임의 중추다. 그것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프레임에 순응적이지 않은, 즉 창의적으로 탁월하거나 아니면 부족하고 약한 이들을 규격화시키는 힘이다. 한스는 그 수레바퀴로 만들어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개성이 넘치며 제각기 다른 영혼들이다. 결코 획일화될 수 없는 존재다. 공장의 규격화된 부속품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의 교육 제도를 포함한 수많은 체제와 규범들을 보면 공장과 다름 아니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가 잠정적인 프로크루스테스일지도 모른다. 한때 스스로는 그 프레임에 저항했으나 결국 순응해버렸고 이젠 남들까지도 자로 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각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소통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아름다움은 세상에선 그저 비효율적인 잡음에 불과하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수레바퀴는 그렇게 우리들로부터 인간다움과 낭만을 앗아갔다.


죽은 한스를 생각한다. 그는 바로 우리일 수도 있고, 후대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자녀일 수도 있단 말이다. 떠밀리며 사는 삶엔 소망이 없다.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시대에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난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끽끽대는 기계소리를 거부한다. 두 번째의 한스가 나오지 않도록 우리가 나서야 할 차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4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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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선집 3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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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찾는 구도자.


헤르만 헤세 저, '싯다르타'를 읽고.


평일에 팔다리가 피곤해질 때까지 일을 한 사람들에게 휴일은 더욱 축제처럼 느껴진다. 일상을 잃어본 사람은 일상의 위대함에 전율하기 마련이다. 순식간에 망각은 착각이 되고, 착각은 깨달음이 된다. 보람과 성취감, 그리고 경이감, 이름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된 행복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이런 소중한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우리를 찾아왔다가, 아쉬워할 새도 없이 순례자처럼 사라져 버린다. 깨달음은 어느새 착각으로, 착각은 다시 망각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 인간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진리를 찾기 위한 인간의 역사는 곧 철학과 신학의 역사다. 진리가 본질적인 가치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인간은 그것을 찾기 위해 모든 방법으로 모든 곳을 뒤졌다. 누군가는 피안의 세계에서, 누군가는 차안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았다. 누군가는 사유만으로, 또 누군가는 감각만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진리가 사물의 배후에 있다고 하여 눈에 드러난 현상계를 무의미하고 우연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경멸했으며, 또 누군가는 사물들 속에 진리의 본질과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진리를 찾기 위하여 자아를 벗어나고자 온갖 힘을 다했지만, 누군가는 외부가 아닌 오히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했다. 과연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에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진리가 어디에 있든, 진리를 찾기 위해 진지한 발걸음을 내딛는 모든 구도자에겐 그 과정 자체가 인생 전체를 의미할 만큼 절박하고 의미심장할 것이다. 구도자는 그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설 때도 있을 것이며, 고뇌와 희열의 경계에 서서 번뇌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조차 망각과 착각, 그리고 깨달음의 변증법적인 고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불교의 윤회 사상이 어쩌면 이런 인간의 행로를 잘 설명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여기, 한 구도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싯다르타.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위대한 현인이자 사제, 브라만의 우두머리로 자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탁월함은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정신적 만족도, 영혼의 안정도 얻지 못한 채 불안해했다. 그의 진리를 갈구하는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늘 고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고행과 명상 등으로 해탈에 이르려는 사문들의 일행에 합류한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래서 자신을 초탈한 경지에서 경이의 세계와 접하는 것이었다. 타고난 재능과 뛰어난 학습능력으로 그는 몰아와 침잠을 익혔다. 단기간 내에 사문들 중에서도 탁월함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3년 뒤 사문 생활도 접기로 결정한다. 몰아의 경지에 이를 줄 안다 해도, 매번 또다시 자아로 되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러한 윤회로부터 고뇌를 느꼈다. 이런 것들이 그저 자아라는 고통에서 잠시 동안만 벗어나게 해주는, 마치 잠시 동안만 의식을 마비시키는 것과 같은 미봉책으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원했던 해탈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문들의 방법으로는 결코 열반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사위성에서 부처인 고타마를 직접 대면하면서 싯다르타는 그 동안 자신이 추구해왔던 소망, 즉 스승의 가르침을 매개로 해탈에 이르려는 마음을 접게 된다. 스승으로부터 배우려고 했던 것, 그러나 그들이 도저히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자아를 벗어나 아트만과 브라만을 추구했지만, 그러다가 자기 자신까지도 잃어버렸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그는 결단한다. 앞으로는 자기 자신한테서 배워서 자기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자신의 비밀을 알아내겠다고. 싯다르타는 자기 내면으로 향하는 도정에 들어선 것이었다.


본질적인 것이 늘 피안에 있다고 여겨왔으나,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더 이상 피안이 아닌 차안의 세계에 머물렀다.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도 않게 되었고,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삶을 시작한다. 예전엔 경멸했었던 현상계의 일부가 되었다. 사유만이 아니라 감각도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다. 더 이상 외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내면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던 탓일까. 강을 건너고 도시에 이르러 그는 카말라라는 고급 창녀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그 동안의 삶과는 정반대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사색과 기다림, 그리고 단식이었던 그가 점점 세속적으로 변해갔다. 쾌락과 탐욕, 나태함의 노예가 되었다. 부에 대한 욕망이 생겼으며 기어이 도박꾼까지 되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황금 새장 속에서 죽은 새를 집어 던지는 꿈을 꾸게 되는데, 그 순간 그는 그가 던진 새와 함께 자기 내부에 있던 선과 그 밖에 가치 있는 것들까지도 송두리째 내던진 기분을 느낀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 덕분에 감각만으로 이루어져왔던 그 동안의 삶의 유희가 끝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과감히 그의 장원과 도시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에 건넜던 강가에 이르렀고 자신에 대한 실망과 인생의 부질없음을 놓고 자살을 생각한다. 그 순간 완성을 의미하는 ‘옴’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육신을 소멸시킴으로써 안식을 찾으려는 어린애 같은 욕망만이 크게 자라나버린 자신의 모습에 개탄한다. 그는 옛 자아는 죽었고 새로운 자아가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기쁨을 느꼈다.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강가를 나머지 인생의 출발점으로 삼게 된다. 거기엔 바주데바라는 뱃사공이 있었다. 예전에 그 강을 건너 도시로 갈 때 도와주었던 뱃사공이었다. 싯다르타는 그와 함께 동고동락을 하게 되며 자연, 특히 강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다.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고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모습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을 띤다. 아래를 향해 나아가고, 가라앉고, 깊이를 추구하는 강물처럼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함께 깨달음과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고타마의 입적이 다가와 전국에서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왔다. 그 행렬 가운데에 카말라가 있었다. 이미 화류계를 떠나 불제자가 되었었던 카말라는 혼자가 아니었다. 싯다르타의 아들과 함께였다. 불행히도 카말라는 강가에서 뱀에 물려 죽게 되고 아들만 남아 싯다르타가 바주데바와 함께 키우게 된다. 아들이 나타나고부터는 싯다르타 자신도 완전히 어린애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 인간 때문에 고민하고, 한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빠져 정신을 잃어버려 바보 천치가 된 것이었다. 그러한 맹목적인 사랑이 일종의 번뇌요,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란 사실을, 그것이 윤회이자 슬픔의 원천이자 시커먼 강물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것이며 자신의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방지고 불손한 아들은 돈을 훔쳐 달아난다. 


아들로 얻은 상처는 싯다르타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하지만 그 상처 덕에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전보다 덜 현명하고 덜 오만해졌다. 대신 전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각이나 통찰이 아니라 오로지 충동이나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들의 삶에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낄 줄 알게 되었다. 아직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허영심, 탐욕 등 우스꽝스러운 특성들이 이해가 되었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그는 그런 것들이 있기에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것들이 있기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엄청난 고통을 겪고, 엄청난 고통을 견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 각각의 열정과 행위들에서 생명, 생동감, 불멸의 브라만을 보았다. 드디어 싯다르타는 완성의 경지에 접근하게 된 것이었다. 얼굴에는 깨달음의 평온이 피어났다. 


현인으로 소문난 뱃사공, 싯다르타를 만나보러 고타마의 제자가 되었던 옛 친구 고빈다가 찾아온다. 그는 여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순례의 길에 있었다. 기이한 인생을 살아온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나눈다. 고빈다는 그렇게 말하는 싯다르타에게서 평화를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른 모습을 보았다. 다음은 싯다르타의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한 혐오를 그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을 내가 소망하고 상상하는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기꺼이 이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 죄악을 저지르고 관능적 쾌락과 허영심에 빠졌으며,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에 빠져야 했네. …(중략)... 사물들이 환영이건 실재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네. 내게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네. 세상을 깔보지 않고,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의 마음, 외경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할 뿐일세.” 


소설 ‘싯다르타’는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밑에’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발견하고 성찰하고 실현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소설들을 읽는 독자인 우리들은 ‘싯다르타’의 싯다르타가 되기도 하고,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되기도 하며, ‘수레바퀴 밑에’의 한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저자 헤르만 헤세의 자아의 반영이었다. 소설이란 영역이 100 퍼센트 상상과 허구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창작의 시작은 저자,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자아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인도 선교사 가문에서 태어난 헤세는 일찍이 인도에 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도가 사상이 핵심적으로 이 책을 이루는 사상이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인 내가 읽었을 때 이 책은 기독교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헤세는 어떤 특정한 종교를 필두로 하여 진리를 찾을 수 있다거나 자아실현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헤세는 종교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자아실현의 완성은 종교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진리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은 ‘싯다르타’와 ‘데미안’, 그리고 ‘수레바퀴 밑에’를 읽고 나서 내게 비슷한 잔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인간의 다른 이름을 ‘진리를 찾는 구도자’라고 언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헤세는 인간의 본능과 존재의 이유와 가치에 대해 자신의 인생을 매개로 하여 깊게 성찰한 소설가이자 철학자, 그리고 심리학자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재미있게도 나는 제목부터 불교의 이미지가 진득한 이 책 ‘싯다르타’를 읽으며 기독교인이 살아내야 할 바른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싯다르타가 마침내 이른 결론 (내가 그대로 인용한, 싯다르타가 고빈다에게 한 말)에서 특히,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그의 말이 핵심이 되겠다. 물론 도가적인 향이 물씬 풍겨 마치 은둔자의 삶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자의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은혜 중 은혜는 나 같은 자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받아 주신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행해야 하는 삶의 자세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헤세의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새해가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12권 중 벌써 2권을 먹어 버렸다. 데미안은 작년에 읽었으므로 9권밖에 안남은 셈이다. 속도를 조금 늦춰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5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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