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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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개인의 행복: 그 조건과 이유, 갈등과 균형에 대하여.


레프 톨스토이 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였다. 아직도 책상 위에는 쌓으면 하나의 큰 벽돌이 될 만큼 두꺼운 책 세 권이 층층이 놓여 있고, 눈 앞에 펼쳐진 흰 바탕의 워드 파일은 세 시간째 커서만 깜빡이고 있다. 무언가를 써야만 한다는 기분 좋은 의무감에 취해 있으면서도, 나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컴퓨터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다. 

마흔 언저리,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 여정에서 나는 꽤 많은 문학작품을 만났다. 그중 나를 꼼짝 못 하게 매료시킨 작품을 꼽아보면 그리 많진 않다. 모든 문학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사상과 정서를 담고 있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그 무언가를 깊숙이 건드려 독자를 읽는 내내 압도하는 작품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지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 그리고 제한된 시공간 및 언어에 필연적으로 갇힌, 그러나 탁월한 통찰력과 필체를 가진 작가 간의 운명적인 만남은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을 탄생시키기 마련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나는 나를 압도한 소수의 문학작품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이다.

문학고전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이름만 들어본 작품도 많다. 그 존재와 가치를 안다 하더라도 본인은 정작 읽어보지 않은 작품이 많다는 얘기다. 보통 이런 작품은 난이도보다는 분량에 의해서 결정된다. 읽고 싶은 충동과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만드는 상승효과도 책의 분량에 의해 쉽게 제압되고 마는 것이다. 분량은 곧 시간이고, 시간은 곧 여유이며, 여유는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좀처럼 만들어내기 어려운 물리적 투자로 이어지기에,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늘 희생당하며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스스로 희생하기는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은 이런 작품을 읽기 위해 자신의 며칠 안 되는 소중한 휴가를 사용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이런 작품은 또다시 책장의 한 구석을 묵직하게 차지한 채 마치 오래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처럼 마음의 부담거리로 남게 되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현대인의 서글픈 일상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읽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같은 이유였다.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그럴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하지만 올해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은 이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아내와 반강제적으로 떨어진 상황, 아들의 2주 겨울방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 휴가, 그리고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한 락다운. 손발이 묶인 것처럼 답답한 상황이 오히려 이런 대작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덕분에 1,600 페이지의 책을 5일에 걸쳐 읽어냈다. 시원하게 숙변이 제거된 듯한 해방감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다 읽고 나서야 고백하는 말이지만, 이 대작을 완독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위에 언급한 특수한 외적 환경이기보다는 이 책에 내재된 고유하고 압도적인 아우라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이 작품에 압도되지 않으면 다 읽어내기가 결코 만만찮은 작품이라는 의미도 되고, 누구든지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압도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의미도 된다. 대작을 맛보고 경건한 마음이 되어 답례로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느끼는 이 신성한 의무감을 나는 사랑한다. 이 기분을 허투루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 살면서 아주 드물게 마주치는, 예기치 않은 기쁨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조그만 감상문으로 이를 기념하기로 한다.

줄거리를 요약해 볼까, 인물 분석을 시도해 볼까, 아니면 작품 속에서 크게 대비되는 두 가정을 비교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머릿속이 가득 차기도 했었다. 그러나 책 뒤에 붙어있는 해설에서 “이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에 대해 연구된 저서와 논문만을 모아도 도서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는 부분을 읽고 나자마자 나는 어설픈 분석적인 접근은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건 그저 내가 느낀 바를 담백하게 적어 나가는 것밖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 가지 관점으로 내 감상을 간략하게 풀어볼까 한다. 하나는 ‘가정의 행복’, 또 하나는 ‘인간 (개인)의 행복’에 대한 관점이다.

1. 가정의 행복.

이 작품의 문학동네 번역본은 총 세 권으로 나눠져 있다. 1권은 1-2부, 2권은 3-5부, 3권은 6-8부로 각각 구성된다. 1권을 읽으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연애, 불륜, 갈등, 이혼, 파멸 등, 천박한 3류 소설에 어울릴법한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막장 드라마로 유명한 한국 사람 아닌가. 셀 수 없이 많은 드라마에서 이미 써먹을 대로 써먹은, 그래서 이젠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너덜너덜한 싸구리 연애소설에 나는 전혀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그 따위 책을 읽느라고 나의 귀중한 휴가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나 이 작품이 단지 톨스토이라는 거장의 이름값과 ‘안나 카레니나’라는 대작의 유명세만을 등에 업고 있는 ‘빈 강정’은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2권에 들어서자마자 속도가 붙었다. 가장 많은 분량 (약 600페이지)을 차지하는 2권을 가장 빨리 읽어버렸다. 그리고 3권 앞부분에서 잠깐 속도가 늦춰졌다가 중간부터 끝까지 다시 내리 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7부에서 느껴졌던 여러 불길한 조짐,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연상케 하는, 안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분열적인 독백을 읽고 있을 땐 나는 심장이 바싹 조여드는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쾅” 하고 실현되어버린 안나의 악몽, 안나의 죽음을 목도했을 땐 한동안 책을 덮고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어떤 거대담론을 논하지 않는다. 물론 역사와 1870년대 러시아 시대 정황을 숨김없이 드러내지만, 저자는 한층 눈을 낮추어 지극히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주제를 다룬다. 주제도 한 가지가 아니다. 오히려 백과사전식이랄까. 여러 가지 주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심 된 주제를 하나 꼽으라면, ‘가정’, 혹은 ‘가정의 행복’, 좀 더 풀면 ‘가정의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답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소설을 여는 첫 문장이 이 주제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소설 전체가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추측건대, 이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유명한 첫 문장을 들어본 사람은 꽤 많을 것이다. 문학동네 버전은 다음과 같다. 이어지는 문장은 출판된 여러 영문 번역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는 영문 번역 덕분에 이 문장의 의미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첫 문장의 해제라고 볼 수 있는 1,600 페이지의 방대한 드라마는 주로 두 가정을 비교하며 전개된다. 한 가정은 안나와 브론스키, 또 한 가정은 키티와 레빈이 주축을 이룬다. 전자는 공식적인 부부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인 결혼이 불가능하다. 알다시피 안나는 알렉세이라는 남편과 세료쥐아라는 아들이 있는 가정을 뒤로하고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브론스키와 결혼을 하려면 알렉세이와 먼저 이혼해야 한다. 그러나 끝내 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안나에겐 죽음이 이혼보다 먼저 찾아왔다) 후자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톨스토이는 이 두 가정, 조금 더 범위를 좁히자면, 전자의 안나와 후자의 레빈에게 초점을 맞춘다. 

일견에 안나와 레빈의 삶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치닫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부와 명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재력가이자 전도유망한 정치인 남편과 어린 나이에 결혼한 안나는 소설 처음부터 외적인 모든 걸 다 갖춘 채로 등장한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남자들을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남자는 결혼 유무를 떠나 고개를 돌려 다시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미모를 가진 여자로 그려진다. 반면, 레빈은 상류 사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 속에 만연한 허영과 허식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경계하고 있으며, 사교계 안에서 판에 찍은 듯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혼자 철학적으로 깊게 사유하길 좋아하고, 도시에서 흥청망청 불필요한 돈을 쓰며 시간을 축내는 생활보다는 시골에서 정직하게 땀 흘리며 노동하는 편을 선호하는 순진하고 우직한 남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상황은 점점 변해간다. 안나는 우연히 기차에서 브론스키를 처음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에게 모든 걸 다 제공해주고 안전한 요새가 되어주었던 가정을 등지고 도덕, 윤리, 그리고 당시 사회문화와 사교계 풍습의 따가운 시선을 과감하게 물리친 채 브론스키와 함께 떠나 단 둘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했던 사랑은 점차 집착이 되었고, 그녀가 추구했던 자유는 그녀를 더욱 구속하고 말았으며, 그녀가 남들 앞에서 자랑했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은 불행의 전초전일 뿐이었고 이는 곧 파멸을 가져왔다. 한편, 레빈은 용기 내어 키티에게 했던 청혼이 거절되자 잠시 좌절에 빠진 채 묵묵히 사유와 노동 위주의 생활에 침잠했지만, 곧 키티의 진심을 알게 되어 겸허한 자세로 결혼에 성공하게 되며 시골에서 이웃과 가족, 친지를 진심으로 도우며 소박하지만 단란하고 칭찬받는 가정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안나와 레빈의 대비는 가정의 행복이 결코 초기 조건만으로 단정 짓거나 예측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과정 속에 나타나는 역동적인 움직임의 총합임을 우리에게 조용히 일깨워준다. 

그러나 아무리 예측할 수 없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관건이라 하더라도, 소설의 결말까지 이어지는 전체 흐름에 기반할 때 아마도 저자 톨스토이는 자신의 첫 문장의 의미를 뒤집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불륜의 행각이 궁극적으로 안나와 안나 가정의 불행을 가져왔으며,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으나 그것을 이겨내고 정직함과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사랑이 레빈과 레빈 가정의 행복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첫 문장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불행한 가정이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 한 게 아니라, 불행으로 치닫는 가정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공식에 의거한 일정한 (고만고만한) 수순을 밟는 것처럼 소설의 결말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의 첫 문장 뒷부분은 “불행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한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 인간 (개인)의 행복.

결혼을 경험해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결혼 전과 후는 엄연히 다르다. 외적인 부분은 물론이거니와 내적인 부분 역시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중 이 작품과 관련해서 ‘행복’이라는 관점으로 결혼 전후를 비교해보면 부인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정도의 차이’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전혀 상반되는 입장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가령, 불륜과 같은 사건이 개입될 때이다. 불륜이라는 단어는 결혼 전이 아닌 결혼 후에만 적용된다. 마음에 드는 매력적인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일 만큼 아주 근본적인 욕망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똑같은 행위가 결혼 후에 발생한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내려진다. 윤리, 도덕의 문제와 신뢰, 책임감의 문제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안나가 선택한 사랑과 행복이 궁극적인 파멸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그러나 저자가 안나를 죄인이나 악인으로 단정 짓고 벌하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 해나가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작품은 진짜 3류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안나의 괴로움과 내면의 갈등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유도한다. 결국 불행이 되어버린 행복(?)을 선택하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안나의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우리는 가없는 연민을 느끼며 자연스레 그녀의 내면에 젖어들게 된다. 안나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갈등과 혼란에 빠져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이 책의 독자들은 아마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안나의 자리에 위치시키며,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불륜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와 같이 안나의 내면에 우리가 깊이 공감하게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작가 톨스토이의 전적인 힘일 것이다. 거장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읽는 재미 또한 이럴 때 극대화된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알렉세이가 안나와 이혼을 하고 아들의 양육권까지 안나에게 넘겼다면 끝나는 문제 아니냐고. 그랬다면 안나는 이혼녀라는 타이틀로 인해 잠깐 동안의 수치만 견뎌내면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 톨스토이는 이런 면에서 명확히 선을 그을뿐더러 (생각해 보라. 불륜을 행한 아내에게 순순히 이혼을 허락하고 위자료도 주면서 아들 양육권까지 넘겨주는 남편이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은가), 남편 알렉세이를 기독교인으로 그리면서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자비와 긍휼을 안나에게 베풀며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에게 돌아올 기회를 허락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이 설정은 안나가 그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내렸던 그 불행한 선택이 도를 넘어서는 것이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의 그릇된 선택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마찬가지로, 안나를 결국 자살이라는 끔찍한 행위로 몰고 가는 구도에서도 저자는 안나의 선택을 결코 옹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죄와 같이 무겁고 어두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우린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안나와 대비되는 레빈이라는 인물은 아무 여자에게나 집적거리는 사교계의 흔한 남자들과는 남다른 생각을 가진 보기 드문 스타일의 소유자인데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표현할지도), 사랑과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레빈은 안나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한다. 저자가 소설 시작부터 안나는 모든 것을 가진 유부녀로 등장시키는 반면 레빈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미혼남으로 등장시키는 구도 역시 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가정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을 선택한 안나는 점점 모든 걸 잃게 되고, 함부로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한 여자만을 조심스럽게 사랑하는 레빈은 시간이 갈수록 의심 없는 사랑을 얻고 행복을 누리게 된다. 도덕, 윤리적인 문제가 안나로 인해 도드라졌다면, 신뢰, 책임감의 문제는 레빈으로 인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신론자였던 레빈은 소설 뒷부분에서 어릴 적부터 각인된 기독교적인 믿음이 자신의 이성을 넘어서는 영역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이유가 외적인 어떤 것, 이를테면 돈이나 명예를 위한 게 아니라, 내적인 어떤 것, 즉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영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한때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허무한 상념에 빠져 있기도 하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여러 철학책과 신학 책을 읽어오던 그였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레빈은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는 인간의 삶이라도 삶의 모든 순간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의심할 나위 없이 선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레빈의 깨달음을 통해 톨스토이는 아마도 ‘가정의 행복’이라는 관점보다는 ‘개인의 행복’, 아니 ‘모든 인간의 행복’, 즉 모든 인간이 진지하게 스스로 질문해서 얻어야 하는 답은 남녀 간의 사랑과 같은 인간적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존재와 선의 의미를 발견하며 인생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과 같은 인간 너머의 영역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해석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에서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로 제대로 들어와 보니, 마치 외경을 읽다가 정경을 뒤늦게 접한 경우와 비슷한 기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직구를 먼저 배운 이후에 변화구를 배우는 게 순서이고, 정석을 먼저 배운 이후에 지름길이라든지 응용 버전을 접하는 게 상식일 텐데, 나는 톨스토이 이전에 도스토예프스키를 먼저 접했으니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으로 말미암아 나는 톨스토이의 작품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부분에 조금은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고, 텍스트 이면에 흐르는 콘텍스트와 저자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는 주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익숙한 독자인 내 눈에 읽힌 톨스토이 고유의 필체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문장 몇 개를 소개해볼까 한다. 소설의 첫 문장이 소설 전체를 압축하듯, 이 문장들은 모두 각 꼭지를 여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작은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이 길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없다. 특히 자기의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살고 있는 것을 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307페이지)

“가정생활에서 무엇인가를 꾀하기 위해서는 부부 사이에 완전한 분열이나 혹은 사랑의 일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부관계가 애매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에는 어떠한 계획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싫증이 난 생활을 그대로 몇 해째 계속하고 있는 부부가 꽤 있지만, 그것은 모두 완전한 분열도 일치도 없기 때문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69페이지)

다음은 레빈이 스스로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이다. 톨스토이 자신의 깨달음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데까지 다다른 것은 과연 이성에 의해서였을까?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곧잘 들었던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나의 마음에도 꼭 맞았으므로 기꺼이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깨운 것은 누구였을까? 이성은 아니다. 이성은 생존을 위한 투쟁과, 자기 욕망의 만족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을 압도할 것을 요구하는 법칙을 일깨울 뿐이다. 이것이 이성의 결론이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성이 일깨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합리하니까.” (485페이지)

이렇듯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가정의 행복과 인간 (개인)의 행복 사이의 갈등과 균형, 그리고 각각의 참 의미, 목적, 이유 등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21세기 현재 우리들도 충분히 공감하고 또 실제로 겪고 있는 일들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대작은 모두 개별적인 어떤 평범한 사건을 통해 보편적인 무언가를 깊이 건드려서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 같다.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로운 한 해의 첫날, 나는 이렇게 평생의 숙원 하나를 푼다. 방대한 작품을 대할 때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이 감상문이 대작의 명성에 흠집 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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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꾼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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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지옥: 희망 없는 노예 된 삶.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노름꾼’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을 때마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심리에 대한 그의 탁월한 묘사 때문이다. 마치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본 것 같은 깊은 통찰은 그만의 고유한 필체까지 탄생시켰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열매를 깊게 한입 베어 물어 맛을 본 독자라면 그의 중독성 강한 필체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나 역시 그 마력에 기꺼이 길들여지기를 자처한 독자 중 하나로서 그의 작품세계를 2년째 여행 중이다.

 

일반적인 소설가는 중요한 등장인물을 문제에 빠뜨리고 결국에는 구원을 베푼다. 위기 가운데 그 인물이 점점 무너져가는 과정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뒤, 절정에 이르러서는 무언가 묶였던 것이 풀리거나 어떤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을 통해 그 인물의 회복이나 새로운 삶을 다루게 된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소설의 전형적인 갈등 해소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변주라면 변주라 할 수 있고, 돌연변이라면 돌연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바로 여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이랄까 누구도 구현해내지 못했던 깊은 통찰력이랄까 하는 고유한 특징이 발현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추락할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낭떠러지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과연 어떤 생각에 잠겨 있을까. 만약 소설가가 등장인물을 이러한 위기 상태에 놓았다면, 그는 그다음 단계로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켜 나갈까.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그 등장인물이 자칫 죽을 수도 있는 마지막 한 발자국을 디디지 않고 돌이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비로소 긴장을 풀게 된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인물에게 기어이 한 발자국 더 가도록 만든다. 외부 상황이 아닌 그 인물의 내면을 끝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진창 속 바닥에서나 맛볼 수 있는 처절하고 자학적인 유머까지 곁들이면서 말이다.

 

독자들은 이런 뜻밖의 장면을 목도하면서 은밀한 공감을 하게 되는데, 이는 특히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느껴지는 역설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병적인 심리 상태의 극한을 전혀 고상하지 않은 언어로 여과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지막 한 발자국만 더 갔으면 떨어져 죽을 뻔했네’와 같은 정도의 갈등 해소를 통해 독자들에게 대리만족과 함께 적당한 교훈을 던져주는 방식이 아닌, ‘아니, 거기서 한 발자국 더 가면 어떡해! 진짜 죽으려고 그래?’와 같은 탄사를 독자들이 내뱉도록 하면서 숨죽이며 마지막 한 발자국을 디딘 소설 속 인물의 심리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방식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 적당히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내고 일상을 회복하는 적당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대할 때 이질감 혹은 천박함 같은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끝까지 읽어볼 가치나 동기를 발견하지 못한 채, 겉으로는 작품이 어렵다는 고급스러운 말로, 속으로는 뭐 이따위 작품이 다 있냐는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며 책을 덮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깊은 본성은 극한을 맛보거나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열린 아주 좁은 동굴의 심연과도 같은 법. ‘될 대로 되어라’, 혹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어’라는 식의 체념과 포기 그리고 운명론적이고 초월론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인간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그 인물을 정신병에 걸렸다거나 미친놈으로 치부하고 만다면, 우리는 결코 그 사람을 인간을 깊이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적어도 나는 내 주위에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결코 그런 사람에게 맡기면서 상담을 부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인간 심리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에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많은 부분이 투영된 인물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의 수기 형식으로 써진 중편소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 알렉세이는 노름꾼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일대기를 대충이라도 훑어보게 되면 그가 얼마나 돈에 민감한 사람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소설 원고 한 귀퉁이에 적힌 정체를 알 수 없는 많은 숫자들이 그가 선불로 받거나 빌리거나 갚아야 할 액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예가 될 것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헌사한 그의 속기사이자 두 번째 아내였던 안나를 만나기 전까지 도스토예프스키가 얼마나 도박에 심취해 있었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톨스토이와는 달리 귀족 출신도 아니고 평생 생계형 작가로 삶을 살아갔던 그가 돈에 쪼들리면서도 도박을 즐겼다는 점은 인간의 모순된 어떤 심리를 본인이 직접 경험했다는 말이 된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속기사인 안나를 만나고 처음으로 구술한 작품이며, 단 27일 만에 완성된 즉흥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시기는 ‘죄와 벌’을 완성하기 직전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 작품과 시기상으론 나란히 어깨를 올리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노름꾼의 모순된 심리는 노름꾼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노름꾼은 돈을 잃는다. 가끔 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잃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이러한 숙명적인 패턴을 잘 알고 있음에도 노름꾼들은 또다시 도박장으로 향한다. 백 분의 일 확률일지라도 자신이 그 일에 해당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알렉세이 역시 도박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 생리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무한루프에 갇히고 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직접 언급했듯이 도박장은 또 하나의 지옥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알렉세이의 도박에 대한 철학은 다음과 같다. 읽고 나면 ‘말도 안 된다’라는 즉흥적인 생각과 함께 조용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는 건 이런 일견 천박한 궤변처럼 보이는 문장들 이면에 놓인 의미를 읽을 줄 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도박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고 터무니없다는 고루한 생각,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런 생각이 더 우스운 것 같다. 도박이 다른 돈벌이 수단들보다, 예를 들어 장사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가? … 이문을 남기고 내기로 돈을 따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사람들은 룰렛판이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고 따내고 하는 셈이다. 이문을 남기고 일확천금을 얻는 것이 추악한 일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난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겠다. 내 스스로가 돈을 따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인지 몰라도, 도박장으로 들어섰을 때 내게는 그 모든 탐욕과 탐욕의 모든 추악함이 왠지 더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서로가 격식을 차리지 않고 흉금을 터놓고 솔직하게 대할 때가 가장 기분 좋은 법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스스로를 속인단 말인가? 정말이지 부질없고 생각이 모자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열린책들 판 25, 27 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다음은 주인공 알렉세이가 비장한 마음으로 도박에 임했음에도 계속해서 돈을 잃게 되었을 때의 심정을 표현한 문장이다. 노름꾼의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벼랑 끝에 서서 마지막 한 발자국을 더 디디게 되는 그 심리가 단적으로 잘 표현된 문장이다.

 

“이쯤 해서 자리를 떴어야 했는데 나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운명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또 그녀를 혼내 주고 약 올려 주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걸 수 있는 가장 많은 돈, 4천 굴덴을 걸었지만 잃고 말았다. 그러고는 흥분한 나머지 남아 있던 돈을 모두 걸었는데 또 잃고 말았다.” (열린책들 판 44 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이어지는 문장은 반대로 알렉세이가 엄청나게 돈을 따내기 전의 심정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부분이다. 운명론적인 생각은 예상 건대 모든 노름꾼들이 거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이따금 정말이지 이상한 생각이, 얼른 보기에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결국에는 그런 생각이 실현될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만일 그런 생각이 강렬하고 열정적인 소망과 합쳐지게 되면 때로는 그것을 숙명적이고 피할 수 없는 어떤 것, 예정된 어떤 것으로, 또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기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예감의 결합이라든지, 예사롭지 않은 의지의 강화, 그리고 자신의 상상에 의한 중독이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이.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 밤 내게는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열린책들 판 200 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소설의 마지막 부분, 시간이 흐르고 알렉세이는 한때 그가 시기하기도 했던 영국인 미스터 에이슬리를 우연히 만나고 그로부터 뼈에 사무칠 만한 말을 듣게 된다. 다음과 같다.

 

“당신은 삶을 거부했고, 자신과 사회의 이익도 거부했고, 시민과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도 거부했고, 자기 친구도 거부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어쨌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따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목표들도 단념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추억까지도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전 당신이 삶의 치열하고 힘찬 순간들을 살아가던 때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자신이 가졌던 훌륭한 인상들을 당신은 모두 잊어버렸어요. 이제 당신의 꿈과 절실한 희망이란 고작 홀수와 짝수, 검은색과 빨간색 그리고 가운데 열두 숫자들 같은 것들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어요.” (열린책들 판 253 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그러나 불행히도 알렉세이는 그 당시 여전히 도박장에서 삶을 탕진하고 있었다. 그가 직접 선택한 도박이었지만, 그가 도박을 삼켰는지, 도박이 그를 삼켰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그는 이미 헤어 나올 수 없는 도박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도 그는 단 1 굴덴으로부터 1백70 굴덴을 따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기억을 핑크빛으로 채색하면서 그의 현재 노예 된 삶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내일 다시 도박장을 향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현한다. 그리고 소설은 끝이 난다.

 

도박에서는 단돈 백 원에서 시작하여 백만 원을 따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문은 과연 어떤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가기 마련일까. 알렉세이 역시 어마어마한 돈을 따내고 황당한 결정을 내린 뒤 그 돈을 짧은 시간 동안 탕진해버리는 모습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잊지 않고 보여준다. 자기 얼굴에 땀을 흘려서 버는 정직한 돈의 가치와 일확천금을 노리며 오로지 운에 기대어 기대하는 돈의 가치. 그 가치는 비단 돈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 나아가 한 가정의 삶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알렉세이의 마지막 모습에서 우린 과연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희망이란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지옥일 테니까.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분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17746821603406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17986684912752

10. 노름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7547675916374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4?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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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그리스도인 - C. S. 루이스를 통해 본 상상력, 이성, 신앙
김진혁 지음 / IVP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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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위한 다리.

 

김진혁 저, ‘순전한 그리스도인’을 읽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인간의 불완전성을 단박에 증명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나마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신비한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육체에 갇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을 인지하고 알아가는 과정도 우리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상력은 이미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암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이성과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는 신비한 능력, 상상력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심인물인 루이스를 설명하기에 없어서는 안 될 키워드가 됩니다.

 

상상력 없는 이성, 혹은 상상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이성은 독단의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성의 목적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을 관찰, 표현, 비교, 분석하여 어떤 명제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가슴 깊은 곳의 공허함을 인지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채울 수는 없을 것이며, 저 너머를 이루고 있는 비명제적 지식에 대해서 꿈꾸거나 생각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소망이 사라진 삶을 잠시만 생각해 보더라도 그곳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고 예측 가능하며 신마저도 수학적으로 사유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끔찍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의식 세계가 무의식 세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비하면 정말 티끌 같이 작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작디작은 이성의 왕국이 인간과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거나 주장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인간에게는 상상력이 주어졌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불완전성이 불평, 불만의 이유가 아니라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첫 인간이 그랬듯,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독단에 빠진 채 모든 선과 악을 자신의 유익에 따라 판단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니까요. 상상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성과 상상력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신앙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깨달아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택한 방법은 수만 가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짐 월리스에 따르면, 회심은 회개와 다릅니다. 어디인가로부터 (from) 어디인가로 (to) 돌아서는 커다란 흐름을 회심이라고 정의할 때, 그는 회개는 ‘어디인가로부터’ 돌아서는 (turning from) 첫 과정일 뿐이고, ‘어디인가로’ 돌아서는 (turning to) 과정은 신앙이라고 정의합니다. 진정한 회심이란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는 회개를 거친 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회개 후 실제로 발을 내딛는 행위와 그 여정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회심을 했다는 그리스도인 중에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삶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회심이 아닌 회개만을 경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회심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어떤 특이적인 사건이 아닌 새로운 방향성이 생긴 삶을 살아내는 운동성을 가진 긴 여정과도 같으니까요. 즉, 진정한 회심은 회개의 순간이 삶으로 녹아들어 신앙을 지속하고 있을 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김진혁은 루이스가 세 번의 회심을 경험했다고 적습니다. 제가 볼 때, ‘세 번의 회심’이라는 표현보다는 ‘세 단계의 회심’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전자는 마치 동일한 회심을 세 번 반복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후자로 표현할 때 비로소 저자가 말하는 바, 즉 상상력의 회심, 이성의 회심, 그리고 신앙의 회심, 이렇게 세 단계를 거친 회심을 통해 루이스가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회심기가 축약된 그의 회고록 ‘예기치 못한 기쁨’을 보면,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웬 회심? 하면서 의아해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소년 시절 무신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배교를 행했던 것이죠. 이는 태어날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지게 되는 신앙이 그 사람의 평생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루이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침례교단이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요. 루이스 스스로도 자신이 무신론자가 되었던 계기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어떤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 아니라, 10대 초반 그의 배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저자가 간파한 대로,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 기숙학교 내 비합리적인 분위기에서의 생활 등이 얽히고설켜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그의 배교를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을 객관적 대상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 혹은 취향이라고 여기게 되면서 그는 무신론으로 이끌려 갔다.” 아주 간결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단순히 세상의 많은 신에 대한 해석 중 하나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모든 것의 중심사상이 되는 것이니까요.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되는데 어찌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자 김진혁이 언급한 ‘세 단계의 회심’에서 중요한 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루이스가 머리가 크면서 신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는 무신론자가 되어버렸고, 그가 다시 역사에 길이 남을 기독교 변증가, 아동 문학 작가, 혹은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작가 등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진정한 회심의 과정이 있었을 테고, 그 과정이 세 단계로 이뤄졌다는 해석에서 저는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으로 선정된 ‘순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회심 과정의 윤곽을 잡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저자가 파악한 세 단계가 순서대로 밟아져야 진정한 회심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전도나 선교라는 명목으로 교회 주보를 돌리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행위, 혹은 사영리 같은 영접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전도지를 돌리면서 달달 외운 대로 전도대상자 앞에서 떠드는 행위의 방향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회심자를 탄생시키는 데 얼마나 기여를 할지 의문이 들기도 했거든요. 혹시 상상력의 회심, 이성의 회심의 단계 없이 곧장 신앙의 회심만을 강조하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앞의 두 단계를 빼먹은 신앙의 회심만으로는 불신자들 영접시킨 횟수는 증가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회심자, 다시 말해 진정한 그리스도인 혹은 예수의 제자를 찾아내고 돕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짐 월리스의 정의를 다시 한번 빌리자면, 회개에 그친 ‘무늬만 회심자’를 양산하는 전도가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는 상상력과 이성의 회심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상상력 따위는 이성이 작동하는 데에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상상력이란 저자가 표현한 대로 경험의 지평에 속하는 현실의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보이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전달하는 힘을 가지지요. 우리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찌 감히 인정하고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떠올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연한 질적 차이가 존재하는 한,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흔적을 더듬어 알아가는 과정이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진 사명이자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무수한 사건 중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의 상상력 없이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사건일 것입니다. 루이스는 성육신 사건을 두고 신화 같아 보이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 사건 때문에 역사적 이성과 신화적 상상력 사이에서 굳이 양자택일할 필요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성육신 사건은 신화가 역사가 되어버린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신화라는 단어에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화의 개념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겪었던 시대, 바르트에 의한 신정통주의의 등장으로 자유주의에 큰 폭탄이 떨어져 하나님의 내재성보다는 초월성을 다시 강조하던 시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등장과 그에게 영향을 받은 불트만에 의한 성경의 비신화화 작업이 행해지던 시대를 함께 살아내며 낭만주의를 옹호하고 알레고리를 사랑하며 비신학자로서 순전한 기독교를 변증하고 내러티브를 이용해 상상력의 회복을 통해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지향한 루이스가 가졌던 신화의 개념과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인트는 신화에 있지 않고 상상력에 있다는 것이죠. 

 

최근에 출간된 이정일의 저서에서 강조되듯 저 역시 문학이 우리의 신앙을 더 깊게 만들어준다고 믿습니다. 이 역시 상상력이라는 기반된 일이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상상력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아니 그 이전에 인간에게 허락된 보석 같은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이성에 천착한 인간에게, 혹은 이성을 신앙의 대척점에 놓고 신앙만을 강조하는 인간에게 상상력은 예기치 못한 멋진 다리가 되어 둘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루이스의 삶과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 책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전보다 더욱 풍성해지길 소망합니다. 다시 한번 상상력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시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7. 시편 사색: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816749868369777

8. 순례자의 귀향: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4795460524929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85915451453208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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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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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 통속과 심오의 혼종, 돈의 위력.

 

석영중 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읽고.

 

2년 넘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오면서 나에게 각인이 될 만큼 강한 흔적을 남긴 그의 인상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의 심연을 파헤친 심오한 심리학자의 이미지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성과 속이 함께 하는 인간의 이율배반성은 그의 모든 작품 안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어쩌면 너무나 천박해서 감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인간의 바닥 심성까지 있는 그대로 표현된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 어느새 자신 안에도 동일하게 내재된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인지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톨스토이 역시 인간 본성을 깊이 들여다본 혜안을 가진 거장이었지만, 그가 탁월한 교훈을 던져주는 훌륭한 설교자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실적인 여러 등장인물들의 말, 사상, 삶의 민낯을 조명함으로써 인간 본성의 다채로운 심연을 누구보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낸 르포트타주 기자이자 그렇게 눈에 보이는 처절한 현상들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연결시킨 심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현실성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이고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중 몇 편을 직접 번역하기도 한 석영중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서 지금도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러시아 문학을 읽고 그들을 가르친다. 이 책에서도 저자의 오랜 기간에 걸친 깊은 연구와 풍부한 경험이 맛깔나게 잘 어우러져있다. 문어체보다는 구어체 위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읽다 보면 마치 직접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저자의 강의 몇 개를 이미 유튜브를 통해 들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저자의 목소리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유튜브 강의 도중 평소 내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좌우지간”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 단어가 자주 등장해서 현장감이 더욱 잘 느껴졌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저자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3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지만, 아주 재미있게 이 책을 금방 다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작년 말 한국에 잠시 방문했을 때 대전 시청 근처에 위치한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었다. 보관함에 늘 저장되어 있던 책이었는데, 실물을 서점에서 영접했고, ‘달러’가 아닌 ‘원’으로 구매한 나의 첫 중고책이 되었다. 알라딘 엘에이 지점과 비교해서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매장 규모는 아직도 내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뛴다. 사정상 두 시간 정도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시간만 있었다면 아마 나는 하루 종일 점심까지 기꺼이 거르면서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국 거주자로서 가장 그리운 한국 생활 중 하나가 나에겐 바로 서점이다.

 

이 책은 ‘가난한 사람들’, ‘미성년’, ‘도박꾼 (노름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렇게 일곱 작품을 다룬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돈’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그의 작품 세계를 해부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행해진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만을 감상하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텍스트 이면에 존재했지만 내가 몰랐던 콘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어서 아주 유익했던 책으로 기억이 될 듯하다. 작품이 아닌 저자를 이해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의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문학을 전공한 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앞서 언급했지만, 내게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본성을 가장 깊고 예리하게 작품 속에 담아낸 작가이다. 너무 심오해서 감히 함부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아우라를 가진 작가인 것이다. 그러나 저자 석영중은 ‘돈’이라는 키워드로 대표적인 일곱 작품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조명하고 해석해낸다. 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그리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돈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고상한 이미지보다는 속물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속물적인 이미지와 내게 각인된 심오한 심리학자의 이미지가 동일인물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표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은 이토록 통속적인 소재로부터 세기를 뛰어넘는 철학과 사상과 예술을 빚어냈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아니, 그건 돈이라는 소재 자체가 가장 통속적인 동시에 가장 철학적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페이지에서 발췌)

 

뿐만 아니다. 저자는 ‘백치’를 다루는 6부에서도 해학이 묻어나는 통쾌한 문장을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정말 맞다 싶었다. 통속과 심오의 혼종! 이를 가능케 만든 돈! 탁월한 분석, 해석,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소설은 독특하다. 가장 통속적인 이야기들이 가장 심오한 주제와 어우러져 오늘날까지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다. 통속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특성 덕분에 그의 소설은 시공을 초월한다. 그러니 돈의 부족이야말로 이 놀라운 혼종의 예술품을 탄생시킨 장본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235페이지에서 발췌)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계형 작가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돈에 쫓기며 살았다. 단 한 번도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써본 적이 없다. 언제나 작품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선불로 받고 그 선불의 노예가 되어 작품을 써내야 했던 작가였다. 거기에다 두 번째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도박에 중독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단순히 돈과는 인연이 없었던 작가 혹은 불운의 사나이 정도로 조금은 측은한 심정을 가지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원고료와 인세로 받았던 돈의 액수는 요즈음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버는 돈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돈에 항상 쪼들렸던 이유는 전적인 그의 소비 습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책임져야 했던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간 비용, 무분별하게 지출되었던 자선 비용, 남들에게 베풀었던 과도한 선물 비용, 게다가 도박 비용까지… 알고 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수입은 충분했지만, 지출에 대한 철학이랄까 규칙이랄까 하는 것들이 체계적으로 잡혀있지 않아 늘 돈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두 번째 아내 안나를 만나고 나서 난잡하던 지출이 정리가 되었고 비로소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얼마 안 되어 생을 마감하고 만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는 거의 평생 돈에 쫓기며 살다 간 작가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마냥 비판, 비난만 하지는 않는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두둔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처해서 형편이 어려운 친지들을 경제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사람들을 절대 지나치지 않았다고 한다. 행여 주머니에 돈이 없을 땐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들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로 돈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은 연민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그들을 도왔던 천사였던 셈이다. 물론 자신의 경제 사정을 좀 잘 살핀 뒤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더 좋았을 법했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 덕분에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인간 대 인간으로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작품이 아닌 작가를 이해하는 시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작품에는 작가의 사상, 정서 등의 흔적이 담기지 않을 수 없지만, 결코 작가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래서 작품을 접하기 이전에 작가의 부정적인 측면을 먼저 알게 된다면, 그것이 선입견이 되어 작품 감상을 방해할 수도 있다. 오류인 줄 알면서도 한 번 착용한 선입견이라는 렌즈는 좀처럼 벗어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뒤늦게 읽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일곱 작품을 직접 다 읽기 전까지 일부러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책의 경우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기 전에 읽어도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일곱 작품을 읽지 않은 채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잘 공감할 수 없거나 깊게 이해하지 못한 채 저자 석영중의 해학과 위트가 묻어나는 현실감 있는 글쓰기를 즐길 기회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적극 추천하고 싶다.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분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17746821603406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17986684912752

10. 노름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7547675916374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94599463918140

#예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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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커버 특별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관조적 문체의 명암.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주말 내내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작품이다. ‘어제’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인상 깊게 읽었던 작가였기 때문에, 언젠가 중고서점에서 작가의 이름만 보고 구입했던 책이었다. 약 600 페이지에 달하는데, 시간을 달리하며 독립적으로 출판된 세 편의 단편소설이 한데 묶여있는 형태다. 등장인물은 물론 작품 속 시공간도 서로 겹치거나 연결되기 때문에, 이 책을 펴낸 까치 출판사가 이렇게 세 편을 각각 1, 2, 3부로 구성하여 전체가 마치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보이도록 기획했던 의도도, 개인적으로 약간 억지스러움을 느끼긴 했으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 세 편의 단편소설은 따로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어 판매되기도 한다.

 

'어제’를 읽으면서 느꼈던 인상이 이 작품에서도 느껴졌다. 좀 더 확장되고 심화되어 있을 뿐이다. 책 뒤에 딸린 해설에서 작가는 이 작품에는 자신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소설화되어 많이 담겨있다고 쓴다. 그 자서전적인 이야기란 그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직접 겪어냈던 2차 세계대전, 헝가리 반체제 운동 등 동유럽 역사가 그대로 관통하는 거대 서사의 조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분위기는 전쟁 가운데 벌어진 민간인들의 참혹한 일상생활, 전쟁이 서민들에게 남긴 여러 구체적인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둡고 우중충해서 염세적으로도 보이지만, 종종 해학이 적절히 뒤섞여 있어 소설 속 참혹한 삶도 나름대로 감정 소모를 덜하면서 관조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어제’를 읽으며 매력적이라 여겼던 작가의 독특하고도 드라이한 문체의 기원을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제삼자라는 인상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어느 정도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지만, 작품을 되씹으며 감상문을 써야겠다는 강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작품은 내 안에서 깊은 공감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역시 작가의 문체 때문인 것 같다.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가 자주 사용하는 방식, 즉 작품 속에서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심리학자가 되어 등장인물의 내면을 기술하는 방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의 행동이나 말을 제삼자의 눈으로 기술할 뿐이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뜻밖의 섬뜩한 행동이나 말을 하게 될 땐, 작가가 아무런 부연설명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작품 속 사건의 전후관계만으로 내용의 흐름을 눈치채가며 이해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고스란히 떠맡아야 한다. 600페이지 분량의 글을 모두 그런 식으로 읽어나가다 보니, 3부에 도달해서는 나도 뭐가 뭔지 헷갈려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이 작품은 독자가 해석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유로움이 조금 지나쳐 결국 독자의 방황으로까지 자연스레 유도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1, 2, 3부는 내용이 연결되면서도 모순된다. 아마 다른 독자들도 3부에 와서는 나처럼 방황하거나, 중도에 책을 덮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만의 독특한 관조적 필체가 단편일 땐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장편의 경우 오히려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물론 작가가 이 점을 당연히 알고도 일부러 그 시대의 모순된 상황과 혼란을 글의 형식과 글쓰기 필체로써 드러내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조금 아쉬운 감을 느낀다. 조금은 더 등장인물의 내면까지 들어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랬다면, 이 작품은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더 읽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 작품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에게도 더 깊은 공감을 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아고타 크리스토프 읽기.

1. 어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052606641450764

2.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932687956775957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8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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