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1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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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일탈: 지금 나는 어디에

파스칼 메르시어 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필연은 없다고, 모든 게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언젠간 운명 같은 만남을 갖기 마련이다. 지난주 목요일,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이 책은 그렇게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스릴 넘치는 현장감은 사전에 아무런 계획 없이 손에 붙잡히는 대로 책을 고르고 훑어보다가 마음에 꽂히는 문장이나 작가의 문체 등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구매할 때 최고조에 달한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작가, 평소에 즐겨 읽지 않는 현대문학. 이 두 가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난 일주일 남짓 나와 매일 동행하며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사건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믿기로 한다. 책을 다 읽고도 여전히 책을 도로 책장에 꽂아놓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전히 무언가를 알고 싶은 것처럼, 이제 막 다시 읽기 시작할 것처럼 망설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기가 못내 아쉽다. 책 표지 그림을 가만히 쳐다본다. 내가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인생이라는 기찻길의 한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 같다. 어딘가로 떠나려는 것인지, 어딘가로부터 도착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나는 그저 떠나가는지 다가오는지 모를 기차를 바라보며 서 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리스본. 이 책을 읽고 이곳에 대한 이상한 동경이 생겨 버렸다. 세계지도를 꺼내 리스본의 위치를 찾아본다. 대륙의 끝,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의 서쪽,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해안에 위치해 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서쪽으로 태평양을 끼고 있지만, 리스본은 서쪽으로 대서양을 끼고 있다. 언젠가 보스턴에서 바라봤던 동쪽 대서양의 이국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그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어떤 느낌일까. 한국에서 바라본 태평양과 캘리포니아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의 차이만큼일까. 땅끝의 나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사막의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대서양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문득 나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 편도 1,250마일을 가려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야 한다. 작품 속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5주 간의 포르투갈 여행의 시작과 끝을 기차로 장식했다. 의미심장한 일탈의 시작과 끝이 되어 주었던,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된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안내한 마법의 기차.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거리 기차 여행의 낭만을 떠올려본다. 즉흥적인 이끌림에 몸을 맡긴 채 홀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상상해본다. 그 외국어들은 과연 노랫소리로 들릴까.

비 내리던 어느 날, 수십 년 간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 정도로 익숙했던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낯선 한 여자를 운명처럼 만난다. 그는 고전문헌학 교수다. 여느 때처럼 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다리 중간에서 난간 위로 팔을 뻗치며 미끄러지던 순간 그레고리우스는 그녀가 뛰어내릴 거라는 본능적인 생각을 했다. 놀란 심정으로 그는 들고 있던 우산을 순간적으로 내던졌고 덕분에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책은 이미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사인펜을 꺼내어 그레고리우스 이마에 숫자를 몇 개 적었다. 전화번호를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데 마침 종이가 없기 때문이랬다.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걸어서 그가 강의하는 교실까지 들어와 잠시 앉아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조용히 빠져나가 떠나 버렸다. 그레고리우스는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그녀에게 모국어가 무엇인지 물었었다. “포르투게스.” 그녀의 답변이었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지상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였다. 하루 종일이라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마에 전화번호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의 인생에 깊은 창을 찔러 넣은 셈이었다. 아니, 그녀가 아니라 포르투갈어의 그 묘하고도 신비한 노랫소리 같은 발음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낸 것이었다. 수업을 마치지도 않고 그는 책과 가방을 그대로 교탁 위에 두고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용기가 생겼다. 그레고리우스는  57년 간 안정적이었던 학자로서의 삶을 이제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묘하게 섞인 기분을 느꼈다. 모든 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도 모두 새로운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찾은 에스파냐 책방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운명의 책을 만난다.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이었다. 제목은 ‘언어의 연금술사’. 마침 책방 주인은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알았다. 주인이 그를 위해 몇 문장을 읽어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글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이 달라진 그날 오전을 위해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책을 구입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책의 안 표지에 나온 저자의 사진을 보며, 이 포르투갈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고 움직이는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포르투갈에 꼭 가야 할 것 같은 운명을 느꼈다. 책방에 가서 포르투갈 어학 교재를 사고 공부를 했다. 책 일부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빠르게 진동했다. 교장 선생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메일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현금을 찾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모든 게 운명에 이끌리는 것 같았다. 일탈의 시작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레고리우스가 운명처럼 갖게 된 책의 저자 아마데우의 일생을 톺아보며 그 흔적을 좇는 여정이다. 아마데우는 이미 뇌출혈로 죽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마데우의 글은 그레고리우스가 가진 책 이외에도 이곳저곳에 많이 산재해있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일생을 좇는 여정은 그의 글을 좇는 여정이라 할 수 있고, 그 여정 가운데 등장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며 텍스트 이면에 있는 콘텍스트까지 읽어나가면서 글을 깊고 풍성하게 이해해나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아마데우의 가족과 친구, 연인 등의, 이제는 모두 죽었거나 노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나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포르투갈이라는 낯선 땅으로 이끌었던 그 운명 같은 만남의 주인공 아마데우의 삶을 추적해 나간다.

아마데우는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아니, 언어 그 자체였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글쓰기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 속마음 등을 모두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탁월한 지력을 가졌던 아마데우도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한계에 속한 유한한 인간이었다. 문학자가 아닌 아버지의 뜻에 맞추기 위해 의사가 된 아마데우는 어느 날 독재 정부의 하수인 격인 멩지스를 죽을 고비에서 살려준다. 독재에 대항하는 포르투갈 국민으로서가 아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던 한 의사로서의 숭고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아마데우의 인생을 크게 한 번 뒤트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멩지스로 인해 고통받는 포르투갈 국민들의 설움과 고통을 외면하고, 오히려 독재 정권을 옹호한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아마데우는 속죄라도 하듯 독재 정부에 저항하는 운동에 발을 담그게 되고,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러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또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하며 아마데우의 삶은 점점 그를 내면으로 침잠케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침잠이 그의 글로 번역되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아무나 쓸 수 없는 글, 아마데우가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을 그는 그의 뜻밖의 인생의 심연에서 퍼올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의사가 아닌 문학가의 삶을 뜻하지 않게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왜 아마데우라는 사람에게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을까? 이방인에 불과한 아마데우라는 한 사람의 과거 흔적을 샅샅이 좇으며 그레고리우스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단순한 운명의 이끌림으로만 설명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바람처럼 왔다 가는 전율의 순간은 지속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런 자리로 내몰았을까? 모든 시간과 모든 돈과 모든 건강을 다 소진하면서까지 낯선 이의 삶의 흔적을 좇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의 공통점이 언어와 글쓰기에 기반한다는 점이 실마리가 될 수는 있을진 몰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남는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흔적을 좇아가는 과정에 일개 과학자에 불과한 나조차도 몰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의문은 더욱 진하게 남는다. 그저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운명을 목격하고 그것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여정에서 나의 공감을 샀나 보다, 하며 나는 석연치 않은 결론을 내릴 뿐이다. 어쩌면 그것을 알기 위해 나는 여전히 이 책을 책장에 꽂아 놓지 못한 채 이렇게 답례라고 하듯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 답을 모른 채로 덩그러니 그렇게.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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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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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창백한 마음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 저, ‘창백한 말’을 읽고

첫 페이지만을 읽고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어느 정도 읽어본 시람에게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나는 이를 감히 축복이라 부른다. 운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오래토록 옆에 두고 자주 펼쳐보며 참조해야 할 작품이라고 믿게 된다. 독자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말이다. 너무 많이 봐서 닳게 될 경우를 대비해, 혹시라도 절판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미리 여러 권을 소장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추천사를 쓴 정지돈 작가가 인생 소설이라 하고 필사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아끼는 이유를 알 듯하다. 

처음 만난 사빈코프의 글은 혁명과 테러의 중심에 선 주인공의 일기 형식을 따르기 때문인지 무거웠다. 그의 글은 고독하고 외롭기도 했다. 이는 주인공이 이끄는 테러의 성격을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리더 위치에 서 있는 주인공 조지를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의 동료들만이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목숨을 걸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은 고독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장하기까지 하다. 소설이 끝날 즈음에는 다섯 중 셋은 목숨을 잃는다. 글이 고독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의 성격 탓일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일기이기 때문에 객관적 서술보다는 주관적 서술과 내면의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모든 페이지에 나타나는 화자의 내면은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고통스러울 때 소리 하나 지르지 않을 정도로 화자는 일반적인 감정 수준을 이미 초월한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살인을 왜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하는 여러 복잡한 내면의 갈등마저도 그는 이미 초탈한 듯했다. 이미 그에게 테러는 어쨌거나 실행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를 따르는 동료 넷의 목숨을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호함도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을 죽인 후 달라진다.

총독을 암살하는 계획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조지는 기쁘지 않다. 그의 삶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다른 타겟을 위해 암살을 계획하고 대의로 포장한 채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삶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했던 것일까. 목표 달성 후에 느껴지는 한없는 공허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총독 암살은 대의로 포장할 수 있다. 테러라는 말조차 반대편에서는 혁명의 씨앗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고자, 즉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살인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총독 암살이 성공리에 끝나고 작품 속 화자 조지는 연모하는 옐레나의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만다. 이유는 간단했다. 옐레나를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살인 후 조지는 괴리감에 괴로워한다. 총독 암살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괴로워하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 살인을 했지만, 그 사람만을 죽인 게 아니라 사랑도 죽였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 가서 그는 고백한다. 더 이상의 테러를 원하지 않는다고. 사랑도 필요 없고 나는 혼자라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별이 빛나기 시작하고 가을밤이 오면 나는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다. 나의 권총은 나와 함께 있다.”

대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적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똑같이 살인을 행한 조지. 그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나아가,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작품 마지막 문장으로 미루어 보아 조지는 아마도 가을밤에 홀연히 권총으로 자살을 실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의든 소의든 살인을 행하고 난 뒤 그는 결국 모든 걸 잃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마저 스스로 끊어야 할 만큼. 비록 살인자이지만 나는 조지에게 연민을 느낀다.

한 편의 소설이 남기는 흔적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가을밤마다 혹시 그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행여나 내게 깃들지 않길 나는 바라게 된다. 하늘도 창백하고 내 마음도 창백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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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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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저, ‘마음’을 읽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품은 자를 확신으로 이끌었다가도 이내 무지의 바다에 빠뜨려 당황스럽게 하며, 알아챈 자 역시 동일한 미궁에 빠뜨리고 마는 것.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이며 정체를 알 수 없어 그 존재 자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 그러나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제목이기도 한 바로 그것. 마음. 


읽는 내내 복잡한 마음이었다. 작품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작품을 읽는 내 마음만 복잡했을 뿐이다. 마치 확신과 무지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심정이었다. 나는 또다시 내 안에서 깊은 모순을 느꼈고, 죄책감을 느꼈으며, 속죄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낯설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뇌했고 아파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시기에 손에 쥐게 된 책이 ‘마음’이라니. 어쨌거나 나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뒤늦게 또 하나의 거장의 작품 세계로 입문하게 된 것이다.


정의하기가 까다롭지만 (불가능할지도), ‘마음’은 ‘심리’ 혹은 ‘인간의 본성’과도 중첩되며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는 본질 중 하나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생각과 마음’의 이분법을 들며 생각은 머리에서 마음은 가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생각이 머리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동의가 되지만, 마음이 가슴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동의가 되지 않는다. 생각과 마음이 과연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면에서도 나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관념적이라거나 추상적이라서, 마치 영혼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부정신학적인 방법을 차용할 수 있다면,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은 적어도 가슴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고. 


인간의 본성을 다룬 여러 천재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읽어왔지만, 단 한 번도 지겹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는 작가마다 다른 각도, 시선, 문체로 다양한 상황, 사건들을 다루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마도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신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묘연함이 가지는 매력이랄까. 안다고 여겼으나 알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 같은 힘이랄까. 글의 영원한 소재와 주제가 될 마음. 작가 정보를 간략하게 훑어보니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의 마음 (혹은 심리 혹은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대표작이라 불리는 이 책에서도 그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주력한다. 서사보다는 묘사에 치중한 작품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고 마음에 남았다. 아마도 한동안은 그러리라 생각된다. 그 때문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도 들여다보고 싶어 오늘 나는 여러 작품들을 찾아 보관함에 넣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두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1, 2부의 화자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아니 어쩌면 운명적으로, 3부의 화자인 ‘나’를 만나게 된다. 첫 문장을 “나는 그분을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로 시작하는 것만 봐도 이 작품은 1, 2부의 화자가 3부의 화자를 만나고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 형태를 띠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게다가 3부는 분량이 전체의 절반 정도 되는 데다 편지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 나쓰메 소세키 시선의 무게중심은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의 마음 위에 머문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1, 2부의 화자는 3부의 화자를 전면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공교롭게도 죽음이었다. 그것도 타살이 아닌 자살. 이 작품에서도 죽음 (자살)의 냄새는 진하게 배어있다. 선생님이라 불렸던 3부의 화자도, 또 그를 자살하게 만든 동기를 제공했던 과거의 친구 K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1, 2부의 화자가 적어도 이 작품 속에서는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 여겼다. 일본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번엔 또 누가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된다. 


나쓰메 소세키는 선생님의 마음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다거나 파헤치지 않는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가능한 그대로 묘사하려 애썼던 것 같다. 시대가 지나도 인간의 마음은 마치 그대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레 시공간이 엄연히 다른 곳에 위치했던, 그것도 가상의 인물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장수 비결일 것이다. 어쩌면 스토리텔링 혹은 내러티브의 무게중심은 거대하거나 기발한 서사에 있지 않고 그 서사 가운데 서 있는 인간의 내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의 힘이다.


선생님의 마음을 한 단어로 집약시킬 수는 없겠지만, 부채감, 죄책감, 수치 등으로 해석한다면 모든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그가 이 작품의 3부를 이루는 생애 마지막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자살을 감행했던 이유 역시 이런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선생님은 막역했던 친구 K의 자살을 본인이 저지른 타살로 여기진 않았을까. K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하숙집 주인의 딸을 K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 발 앞서 결혼을 서둘렀던 선생님. 축복된 결혼식에서도 K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K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내에게 죽기 전까지 진실을 말하지도 못한 채 세상과 동떨어진 섬이 되어 평생을 살아갔던 선생님. 3부를 이루는 마지막 편지 안엔 모든 진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1, 2부의 화자는 이 세상에서 선생님의 진실을 알게 된 유일한 남자가 된 것이었다.


마지막 편지는 선생님의 독백이기에, 그리고 인생 전체가 담긴 막중한 무게 때문이라도, 독자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K의 자살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내가 발췌한 다음의 문장들만 읽어도 선생님의 마음을 살짝이라도 훑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네. 내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네.”


“나는 책략으로는 이겼지만 인간으로서는 패배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네.”


“내가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은 문구는, 편지 끝에 남은 먹물로 갈겨쓴 듯,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마지막 한 줄이었네.”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기만당했을 때 타인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만큼 나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은 완벽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 그런 믿음이 K의 일로 보기 좋게 무너지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을 때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네. 타인에게 등을 돌렸던 나는 곧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었고, 나 자신을 가둔 채 점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 변하고 말았네.”


“그럴 때마다 나는 웃기만 했지. 그러나 속으로는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슬펐네. 아니지, 이해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만들 용기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고 해야 옳을 것이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지. 나는 외로웠네. 나는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했네.”


“현실과 이상의 충돌, 그런 표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지만, K는 나처럼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네. 나 또한 K가 걸어간 길을 똑같이 걸어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거든. 나뭇잎을 소리 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욕망, 배신, 불신, 죄책감, 부채감, 고독, 그리고 자살. 이렇게 흘러가는 플롯에서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존재할까. 그럴 수 없기에 이런 문학 작품은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면서도 끊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읽히는 게 아닐까. 본질은 마음이다. 진정성 어린 마음. 모든 서사를 뛰어넘어 독자의 마음에 가 닿는 그 무엇. 밝음보단 어두움이 지배하는 작품이지만, 모든 인간의 마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가식적인 밝음을 만들어내어 보이는 것보단 어두움을 직시하게 만드는 방식이 주는 이 의외의 효과. 아, 인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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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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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선을 넘어선 자, 영점을 재조정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죄와 벌‘을 다시 읽고

5년 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으니 내 시선은 줄거리보다 등장인물에 더 오래 머문다. 게다가 지난 10개월간 독서모임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부터 출간순으로 한 달에 한 작품씩 읽어오며 도스토옙스키의 발전과정을 함께 해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더욱 친근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이 글에서 나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나 자신은 물론 인간을 보길 원한다.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이 글이 아니라 나의 초독 감상문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작품을 읽고 줄거리를 충분히 파악하고 작품에 흐르는 철학과 사상을 느껴본 분들을 위한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등장인물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라스꼴리니꼬프의 속성이기도 한데, 경우에 따라 다른 주변 인물들과 비교와 대조를 할 것이다.

선을 넘어선 자

소냐의 집을 찾아간 날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 역시 똑같은 일을 했잖아? 당신 역시 선을 넘어선 거야. 넘어설 수 있었던 거지. 당신은 자기 몸에 손을 댔고, 스스로를 죽여 버렸어. 자기 생명을 말이야. 우리는 같은 길을 가야 해. 그러니 함께 갑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로부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 동질성은 곧 ‘선을 넘어섰다는 것’. 작품의 맥락을 볼 때 이는 ‘살인’을 뜻한다. 그러나 살인도 살인 나름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이 타자를 물리적으로 죽인 것이라면, 소냐의 살인은 자신을 정신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큰 범죄를 저지른 뒤 살아 있는 양심 때문에 정신적으로 쫓기는 살인자의 성급함일까? 그의 논리에선 비약이 감행된 객관성 상실이 확연해 보인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분석처럼 소냐에게는 치욕적이고 저급하고 세속적인 모습과 그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고결하고 성스러운 모습이 공존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부의 길을 선택한 소냐. 어쩌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자기 죽임’을 살인이라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음을 택하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예수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타자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을 감히 살인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제사로 쓰인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의 죽음은 모두를 위한 거룩한 희생이다. 소냐는 한 알의 밀알로서 가족을 먹여 살렸고, 나중엔 그녀를 잠시 오해하고 비난했던 라스꼴리니꼬프마저도 살려내는 역할을 감당한다. 소냐의 ‘자기 죽임’은 실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반면, 라스꼴리니꼬프의 노파 살인은 자기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을 죽이는 열매를 맺는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죽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이자 살인자의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분석은 반만 옳았다. 둘 다 ‘선을 넘어선 자’였지만, 소냐는 타자를 위해, 라스꼴리니꼬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소냐는 사람을 살리는 선의 열매를,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람을 죽이는 악의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각자 다른 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참고로, 끝내 자살을 택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기 죽임’은 소냐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차이 역시 자기를 위한 것인지 타자를 위한 것인지에 있을 것이다. 자기를 위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살은 라스꼴리니꼬프의 타살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 곧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일까? 라스꼴리니꼬프는 다음과 같이 자기가 소냐와 다름을 인정하게 된다.

“아아, 우리는 서로 다른 부류의 인간이야! 나는 마음이 악해. 그러니 짝이 아냐! 나는 왜 여기 온 걸까!”

놀랍게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가 모순된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기처럼 폭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에서 소냐와의 근원적인 차이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한 문장이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어요?”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이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인 후 계획에도 없던 추가적인 살인의 희생자, 리자베따와 같은 유로지비였다. 유로지비는 존재 자체가 어쩌면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바보 혹은 백치이지만 성자처럼 고결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유로지비이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달리 소냐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소냐는 인간의 숙명적이고 존재론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이 세계관이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처럼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람이라 믿었고 그것을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산술적인 공리주의 따위에 생을 걸었던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에 관심이 있었을 뿐 인간 존재를 거뜬히 뛰어넘는 하느님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은 왜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내 결정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지요? 누구는 살아야 하고, 누구는 죽어야 한다고 심판할 권리를 누가 내게 주었나요?”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는 공히 선을 넘어선 자였지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인 차이를 인정하는지에 따라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또한 소냐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알고 있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스스로가 어떤 위치에 놓인 인간인지 테스트해보려 했던 자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나는... 더러운 여자예요. 나는 큰, 크나큰 죄인이에요! 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는 인간을 어떻게 분류하는지를 따지는 어리석은 땅의 질문에서 벗어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유한한 인간, 죄인인 인간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 세계관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우연에 이끌리는 자

재독 하면서 한 가지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의 힘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 도구가 될, 미리 점찍어 둔 도끼 대신 우연찮게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도끼를 비롯하여 그의 살인 시도는 수차례 좌절될 수 있었으나 그때마다 기적처럼 예상치 못한 길이 열려 결국 살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우연에 이끌리는 자라고 보았다. 살다 보면 우린 모두 이와 비슷한 순간들을 겪는다. 하늘이 돕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는 듯한 상황을 마주할 때면 평소에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운명적인 힘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도스토옙스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 과정에서 이러한 운명적인 우연의 힘을 등장시킨 것일까?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범죄는 보이지 않는 악마의 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그런 일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결코 저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연은 우연을 경험하는 당사자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법이다. 운명의 힘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하게 만든다. 소냐와 리자베따 역시 사람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가 이끌린 비가시적 존재는 그 정반대에 위치한 존재였을 것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 영적인 차원의 존재 말이다. 여기서도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죄와 벌이란?

재미있게도 라스꼴리니꼬프의 이성은 양심과 맞물려 잘 돌아갔던 것 같다. 스스로도 고백하듯 그는 미친 상태가 아니라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 후에도 그는 자신의 범죄를 숨기려는 마음과 자백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할 뿐 단 한 번도 정신줄을 온전히 놓은 적이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뇌에 휩싸였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실제로 이 작품의 커다란 중추는 살인 전과 후에 보이는 라스꼴리니꼬프 내면 변화의 추적이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이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계속해서 읽히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라스꼴리니꼬프 내면의 변화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 내면의 변화와 보편적인 인간 내면의 변화를 보는 것이다. 

이제 이 작품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죄와 벌이 무엇일지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두 사람을 죽인 행위만을 죄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모든 것이 허용되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 다시 말해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 즉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은 죄라기보다는 죄인의 가시적인 범죄 행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죄를 저지른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를 통한 갱생에 이르기 전까지의 삶 전체를 벌로 봐야 할 것이다. 고뇌에 찬 고립되고 단절된 삶 말이다.

이런 해석에 기댈 때 나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바로 나 자신이고 우리 모두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처럼 가시적인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죄인일 수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을 재독 하면서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 사상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매춘부를 통해 구원에 이르고 마는 살인자의 이야기. 잘못된 선을 넘어선 자가 영점을 재조정하는 이야기. 거룩한 생명의 빛은 바닥 같은 인생을 사는 두 사람을 통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다. 어쩌면 바닥이라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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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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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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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최은아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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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도 있었을 체스 한 판


슈테판 츠바이크 저, ‘체스 이야기’를 읽고


우둔해 보이고, 이마가 넓으며, 어느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시키는 일을 제외하고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방에 앉아 있는 게 전부여서 도대체 커서 무슨 일을 할 수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아이가 있었다. 도나우강에서 돛대도 없는 작은 배를 운항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슬라브 남부 출신 선장의 아들이었다. 그는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후 어느 착한 신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신부는 그를 교육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그의 무능력과 무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졌다. 어느 날, 신부가 지방경찰과 체스를 두고 있는데, 그 소년은 말없이 그들 옆에 웅크리고 앉아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체스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화가 한 통 걸려오고 신부는 자리를 일어나야만 했다. 끝내지 못한 체스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바로 그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부를 대신하여 체스를 두다가 열네 번 체스 말을 주고받은 후 소년은 지방경찰을 이겨버리고 만다. 나중에 신부가 돌아와 소년과 겨루었지만 같은 결과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이가 체스 천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미르코 첸토비치. 한때 세계 체스 챔피언을 거머쥐었던 인물의 이름이다. 


바로 그 미르코 첸토비치가 세계 챔피언이 되어 현재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있다. 우연히 그 배를 탄 슈테판 츠바이크인 듯한 화자는 그가 몹시 궁금했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폐쇄적이고 미성숙하고 체스 밖에 모르는 그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묘안을 생각해 낸다. 배 한 편에서 체스를 두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궁극적으로 미르코의 발걸음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작전은 성공한다. 미르코가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한 미지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미르코와 대비되는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인 이 인물은 오스트리아 출신이자 정부 인사에 깊숙이 관여했던 변호사였고, 나치가 강제수용소 대신 그로부터 비밀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게슈타포의 군사사령부로 쓰였던 한 호텔 방에 감금했던 자였다. 그 호텔 방은 책, 신문, 종이 한 장, 연필 한 개 없이 문 하나, 침대 하나, 안락의자 하나, 세면대 하나, 창살이 있는 창문 하나밖에 없는 완벽한 진공상태의 공간이었다. 게슈타포의 심문은 참을 만했으나 호텔 방 안에서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위의 시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심문받는 날, 그는 운 좋게 게슈타포의 옷에서 책 한 권을 훔쳐 방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책은 소설이나 에세이가 아닌 150편의 챔피언 시합을 모아 둔 체스교습서였다. 체스에 관해 상식 이상 관심이 없던 그는 풀뿌리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책을 보고 또 본다. 모조리 다 외우고, 머릿속으로 혼자 체스를 둘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말이다. 덕분에 게슈타포의 지속적인 심문에도 온전히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내면의 붕괴를 겪게 된다. 그는 흑을 잡은 자아와 백을 잡은 자아로 분열되어 서로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애써야 했고, 동시에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 급기야 정신분열 증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으로 실려가게 된다. 그는 병원에서 착한 의사를 만났고, 그 덕분에 오스트리아 추방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 화자와 미르코와 같은 배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 역시 체스판에 기웃거리다가 화자가 속한 팀이 미르코에게 막 지고 있을 무렵 기막힌 훈수를 두었고, 덕분에 화자 팀은 게임에서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미르코를 체스판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 화자는 이 미지의 인물에게 관심이 갔고, 미르코와 시합해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일 수 있다는 운명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그를 찾아가 미르코와의 대결을 부탁한다. 딱 한 판 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말이다. 그는 자기가 과거에 병원으로 실려갔던 원인, 즉 정신분열증, 공황, 극심한 스트레스 등에 다시 노출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합의를 하고 다음 날을 기약한다.


다음 날, 미르코와 미지의 인물과의 대결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세계 챔피언 미르코는 이 인물에게 패배를 경험한다. 미르코는 한 판 더 두자고 제안한다. 이 미지의 인물은 본인이 딱 한 판 만이라고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덥석 그 제안을 승낙해 버린다. 그러나 그다음 판에서 미르코의 느리디 느린 게임 진행 속도 때문에 조급해진 그에게는 과거의 정신분열증과 공황 증상이 온몸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화자는 그에게 게임을 그만두라고 조용히 말한다. 다행히 그는 화자의 말을 받아들이고 유유히 자리를 떠난다. 체스판 앞에 남은 최후 승리자 미르코는 여전히 느리지만 떠난 인물의 체스가 꽤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고 아마추어치고는 비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인 것 같다고 여유 있게 칭찬한다. 그리고 작품은 끝을 맺는다.

 

마무리랄 게 없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으로 끝을 맺는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닌 '노벨레'라는 형식으로 쓰였다고 한다. 노벨레는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신기한 사건을 간결한 묘사방식으로 재현한 비교적 짧은 산문 또는 운문 형식'이다. 해설에 적힌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이 작품이 비로소 손에 잡혔다. 작품의 줄거리를 충분히 파악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은 제2의 저자인 독자의 재량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말을 100퍼센트 수긍하진 않는 나는 여전히 저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왜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사건을 허구를 가미하여 글로 남긴 걸까?


작품이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미지의 인물의 등장으로 미르코가 곤란함을 느끼게 된 장면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승리자는 여전히 미르코라는 사실에 이 작품의 방점이 있는 것 같다. 미지의 인물은 세계 챔피언에게 잽 한 방을 먹여 아주 잠시 충격을 줄 수는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승리자의 위치에 서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여유롭게 보일 정도로 느릿느릿한 미르코의 행동 앞에서 초조하고 긴장하여 다시 과거의 정신분열과 공황을 경험하게 되면서 서둘러 기권으로 게임을 포기해야 했다는 점에 나는 주목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강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도 세계 챔피언에게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에 저자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다. 


나치의 영향력을 피해 브라질로 망명해 1942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모습을 이 미지의 인물에게 투영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미르코는 나치이자 히틀러의 분신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못내 아쉽다. 몇 년만 더 기다렸다면 그 강력했던 히틀러가 먼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실을 뉴스로 알게 되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독자들은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 츠바이크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 체스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게임에서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체스를 두는 사람이 먼저 죽어버리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츠바이크에게 말해주었더라면! 아쉽고, 또 아쉽다.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는 건 인류의 큰 손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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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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