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묘한 심리, 덤덤하고 섬세하고 우아한 필체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나를 보내지 마’를 읽고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두 번째로 펴 든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읽기 전부터 개요는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이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 흔히 겪을 ‘놀라움’이 내겐 없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 인간들의 삶’이라는 기발한 공상과학적인 구도보다 나에겐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의 필체가 더 크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아닌 작가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 하나둘씩, 아주 조금씩 저마다 다른 작가의 고유함과 탁월함을 조용히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그것들을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남아 있는 나날’, ‘클라라와 태양’으로 이미 두 번이나 만난 가즈오 이시구로로부터 나는 작가의 내공이랄까 하는, 자세히 읽지 않으면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를 겉보기엔 무덤덤한 필체로 쓰인 것 같은 이 작품 ‘나를 보내지 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작가는 단 한 편의 작품만 읽어 봐도 감이 오는가 하면, 또 어떤 작가는 두세 편 읽어 봐야 제대로 감을 잡을 수가 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철저히 후자에 속하는 작가였다. 사람도 처음 만날 때 다 파악되는 사람보다는 두세 번 만나면서 조금씩 진국이 드러나는 사람이 더 매력적인 법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책 뒤에 있는 옮긴이의 말에서 나는 답을 발견한 것 같았다. 옮긴이 김남주가 쓴 문장이었다. 아래에 옮겨본다. 


“의도적으로 나직하게 읊조리며 감정의 골목골목을 찬찬히 답파하는 그의 문장은 ‘그랬다’와 ‘그랬을 수도 있다’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독자에게 환기해 주는, 요컨대 뉘앙스에 주목하는 섬세한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사건이나 정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정황에 관계하는 심리의 결을 고운 붓질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화자의 성격뿐 아니라 저자의 성격, 그리고 작품의 성격까지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성과를 거둔다. 오늘의 세계 문학을 이끌어 가는 우아함과 미묘함에 대해 알게 됐다는 독자의 고백을 저자에게 안겨 준, 우리가 왜 책을 읽는가 하는 물음에 값하는 작품이다.”


우아함과 미묘함. 심리의 결을 드러내는 고운 붓질. 나는 이것보다 내가 느낀 바를 더 잘 표현할 자신이 없다. 말문이 막혀 웅얼대는 사람에게 적절한 단어가 주어져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 작품은 언뜻 성장 소설로 읽힐 수 있다. 별다른 설명이나 뚜렷한 단서 없이 평범한 학교 생활이 책의 앞 절반 정도를 이루고 있으며, 동일한 등장인물들이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아주 간접적인 단서들이 숨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무턱대고 성장 소설로 읽다가 그 단서를 만나게 되면 아마도 독자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재해석을 가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일지도 모르겠다. 설마 하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감정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뜬금없이 눈앞에 닥친, 작지만 묵직한 단서 앞에 서게 될 때의 비장함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스토리텔링이 극적인 효과를 거두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구도를 위한 방법으로 이보다 더 효율적인 게 있었을까 싶다. 내가 보기에 가즈오 이시구로는 탁월하다.


그렇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복제 인간이다. 그들이 태어난 이유는 단 하나. 장기 기증이다.  (‘기증’이라 써놓고 ‘탈취’ 혹은 ‘강탈’이라고 읽는다). 장기를 가장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복제 인간 안이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즈음이면 궁금한 게 하나둘 생겨난다. 이들 복제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일까, 이들에겐 영혼이 존재할까, 이들의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 등등의 일련의 물음들이 답 없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게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선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지만, 철학적으로나 인문학적으로, 그리고 과학 윤리학적으로 충분히 깊게 생각해볼 만한 거리가 된다. 


이런 묵직한 주제에 더하여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필체에 반하게 되었는데,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섬세한 기법과 특별한 것 없이 아주 일상적인 소재들로 사람의 미묘한 심리를 탁월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 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제일 먼저 손꼽는 나로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색다른 표현 방법을 목도하곤 사실 조금 놀라워서 어안이 벙벙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차이는 아마도 앞서 언급한 ‘미묘함’이라 생각한다. 그 미묘함이 가진 섬세함을 표현하기에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덤덤한 필체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만난 행운이랄까.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 선물로 여겨진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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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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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악이 아닌 악과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

김영하 저,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읽은 직후 우연찮게 손에 든 책이 하필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니! 살인자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일기 형식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접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 접점 말곤 전혀 다른 느낌이다. ‘종의 기원’에서는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한유진이라는 젊은 남성 내면에서 악의 발현과 진화를 현재 진행형으로 현장감 있게 관찰할 수 있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25년 전까지 숱하게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이었던 70세 노인이 알츠하이머에 걸려 망각의 강으로 빠져드는 과정과 망상의 난잡함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지키고 싶었던 사람을 죽이게 되는 과정을 목도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이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 안에서 일하는 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악보다는 그 악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사이코패스보다는 알츠하이머라는 설정이, 또한 젊은 남성보다는 노인이라는 설정이 사람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 정유정과 김영하는 제각기 작품의 성격과 목적에 부합하는 살인자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절묘하게 삼고 있는 것이다. 

두 작품 연이어 살인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소설이라는 장치가 선사하는 유일한 장점을 다시 깨닫게 된다. 소설이 아니면 어떻게 살인자의 마음을, 끔찍하지만, 따라가며 공감까지 할 수 있겠는가 싶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학과 철학에서 악의 문제를 종교적이고 관념적으로 연구한다 하더라도 소설이 주는 생생한 현장감은 결코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악은 관념으로 머물 때가 아닌 형체를 입고 발현할 때 비로소 악이라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발현의 통로는 사물이나 자연이 아닌 항상 인간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내가 조직신학의 인간론과 신정론을 공부할 때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을 때 인간의 본성과 악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현대 한국 소설가들의 작품을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 서너 편 정도씩 읽고 나면 한국 현대 소설의 흐름이 어느 정도 보일 것 같다. 정유정의 문장과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김영하의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한국 현대 소설을 읽고 나면 무언가 휑하다는 느낌에 젖는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전 문학에서 충만하게 채워지던 그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언젠가는 쓰게 될 내 소설의 스타일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 같아 나름 만족스럽긴 하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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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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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진화

 
정유정 저, ‘종의 기원’을 읽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존재할까? 사람을 그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선한 사람은 선한 행동을,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행동은 생각과 마음에서 기인하므로 선한 행동은 선한 생각과 선한 마음에서, 악한 행동은 악한 생각과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사람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일까? 아닐 것이다.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보는 건 인간의 본성을 전혀 모르거나 인간관계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유아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율배반성, 모순, 예측불허성과 같은 단어들이 존재하는 이유,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 심리학과 정신분석학과 범죄학이 대두되고 발전한 이유,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대를 초월하여 지속해서 읽히는 이유 역시 인간의 본성은 함부로 정의할 수 없으며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과 악의 대립이 창작의 영역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되는 이유도 여전히 인간의 본성은 신비의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자신이 좋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싫기도 하는, 인간은 요컨대 결코 어떤 하나의 딱지를 붙여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휘몰아치는 필체를 구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정유정은 이번에도 인간의 악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시나 섬뜩하다. ‘7년의 밤’에서 오영제로, ‘28’에서 박동해로 분한 악이 ‘종의 기원’에서는 한유진으로 분한다. 한유진의 악은 오영제와 박동해의 그것보다 더 강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한유진은 박동해와 오영제보다도 어리다. 오영제는 가정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고, 박동해는 군대를 다녀온 청년이었다. 한유진은 태생부터 사이코패스로 등장한다. 악의 발현도 훨씬 이르다. 한유진은 일찍이 9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른다. 대상은 친형이었다. 소설 속 현재는 한유진이 26세로 그려지는데, 분량의 대부분은 한유진이 전혀 모르는 여자 한 명과, 엄마, 이모를 며칠 사이에 간단히, 깔끔하게 다 죽여버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할애되어 있다.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은 독자가 한유진을 그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한유진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통찰할 수 있는 렌즈로 작용한다. 특히, 간질인 줄 알고 평생 약을 먹고 살아왔는데, 실제로 그 약은 간질이 아니라 그의 안에 내재하는 사이코패스의 발현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는 설정은 한유진의 분노를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어릴 적 세계적인 수영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던 그의 삶을 망가뜨린 장본인은 약이었고, 그 약의 정체를 속여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조절했던 모든 기획은 정신과 의사였던 이모와 엄마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가장 포식자에 해당하는 부류에 속한 한유진을 사회에 무해한 존재로 평범하게 키우기 위한 이모와 엄마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이 갔지만,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평생 먹은 약의 정체와 자신의 실제 상태를 모른 채 살아온 한 인간의 비애를 생각하면 그것 역시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사이코패스와 악을 과연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사이코패스 역시 한 인간이라서 인권과 인격이 있기 때문에 동물처럼 애완동물처럼 취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소설 속 플롯은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사람을 어떻게 가정과 사회에서 대우하고 보살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경고장으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7년의 밤’이나 ‘28’에서와는 달리 ‘종의 기원’은 한유진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 3인칭으로 존재하던 악의 실체가 1인칭, 그것도 1인칭 관찰자도 아니고 급기야 1인칭 주인공 자리로 등극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살인자의 독백이나 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이는 정유정이 인간의 탈을 쓴 악의 실체를 소설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하고 애를 썼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쨌거나 작가의 일종의 분신이기 마련이기에 이 작품을 쓰면서 얼마나 정유정이 악의 모습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노력했을지 생각하면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악은 진화한다. 적어도 정유정의 작품 세계에서는 분명한 것 같고, 그녀가 작품 후기에서 밝히듯 그녀 역시 이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한유진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통해 악의 화신을 불러내어 우리 모두 안에 조금씩은 존재할 악함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끔찍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유정의 작품에 매혹되고 단숨에 읽어내고야 마는 우리들은 어느 정도 우리 안에 내재하는 오영제와 박동해와 한유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유정은 한유진의 내면세계를 두 가지 방법으로 기술한다. 하나는 일기와도 같은 실시간 독백이다.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한 인간임을 강조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도 잘 녹아 있다. 한유진 역시 갈등하고 고민하고 걱정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 회상이다. 약과 발작, 그리고 의도적 망상 때문에 불완전한 과거 기억을 완전한 기억으로 짜 맞춰가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긴장과 스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추적해가는 과정, 그에 따라 한유진의 마음과 생각이 변모해가는 과정에서는 애처로움까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공감은 한유진이 순간 저질러버리는 범행으로 인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지만 말이다. 한유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고 마는 그 본능은 현실세계에서 살인자의 주도면밀함으로 나타난다. 독자의 입장에선 기겁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에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두세 시간이면 아마도 다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가는 사람이 사이코패스 살인자라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임팩트가 있는 작품인데, 작가가 정유정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종의 기원’은 정유정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악함에 대한 사유 또한 해볼 수 있는 기회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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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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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많은 펠리시아를 생각하며.


윌리엄 트레버 저,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고.

아일랜드 출신 소녀 펠리시아는 어느 날 그녀에게 성큼 다가온 한 남자 조니 라이서트와 사랑에 빠진다. 스스로도 볼품없는 외모를 가졌다고 여기던 그녀였기에 펠리시아의 눈은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의 천박함을 꿰뚫어 볼 만큼 밝지 못했다. 조니는 그저 펠리시아를 갖고 논 건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짧은 만남이 한 여름밤의 불장난으로 끝났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흔적을 남겼다. 펠리시아의 몸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생명의 씨앗을 남기고 말았다. 

어린 펠리시아에겐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펠리시아는 할머니의 돈을 훔쳐 가족 몰래 영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뒤 대범하게도 행동에 옮겨버린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조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이 아빠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라 믿었던 불장난을 현실에서 연장하고 싶었던 한 순진한 소녀의 몽상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펠리시아는 조니가 아닌 어떤 다른 남자가 다가왔어도 똑같은 결과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세상사를 전혀 몰랐던 펠리시아는 쳇바퀴 도는 지긋지긋하고 궁핍하고 수렁과도 같았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나, 한 세계를 탈출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땐 진실의 옷을 입은 거짓을 잘 분별해내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펠리시아에게 있어 조니는 그저 때마침 열린 하나의 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펠리시아는 그걸 운명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온몸을 던졌지만 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펠리시아의 여정은 낯선 영국 땅에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시작부터 비극이었는데 끝까지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펠리시아는 조니를 끝내 찾지 못한다. 대신, 운명의 장난인 걸까. 펠리시아에게 친절을 베풀며 다가온 한 낯선 남자와의 인연이 시작되는데, 그는 불행히도 연쇄 살인범이었다.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이는 영국 남자 힐디치. 그는 이미 과거에 여러 여자를 유인해서 들키지 않고 살인한 경험이 있었다. 펠리시아는 그에게 굴러들어 온 다음 타깃이었던 것이다. 물론 결말에 가서 힐디치는 펠리시아를 죽이지는 못한 채 자살을 택하고 말지만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뒤끝이 개운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99퍼센트가 끝이 날 즈음에야 저자가 말하려던 메시지가 수면 위로 드러나서 맥이 빠진다는 기분도 들었다. 중요한 것에 비중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비중의 불균형이랄까. 작품 뒤에 달린 해설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그 선함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노숙자와 같은 약자와 소수자들 사이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그러나 힐디치 역시 아주 평범한 사람 중 하나로 설정해놓은 건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선함뿐만이 아닌 악함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닌 악함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여느 작품에서와는 달리, 어떤 특별한 계층의 이야기가 아닌 아주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이야기가 일상에 녹아든 작품인 것이다. 

처음 읽는 윌리엄 트레버. 필체가 예사롭지 않다.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하며 독자로 하여금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만드는 묘한 힘을 아주 잘 구사한다. 우아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다분히 비현실적인 이야기 소재로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지루함 없이 진행시키는 필력 또한 탁월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작품 마지막에 가서 노숙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삶에 임한 평안함에 익숙해지는 펠리시아의 모습에서 나는 결연함과 동시에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살해당하지 않은 것보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펠리시아,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도 존재할 펠리시아를 생각하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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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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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이란?

가즈오 이시구로 저,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인간은 특별할까? 다른 생물체에 비해, 다른 동물들에 비해 과연 무엇이 특별한 걸까? 특별하다면 그 특별함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기인한 걸까? 아니면, 철학적 혹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걸까? 인간의 특별함은 이미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사회정치학적으로 수없이 다뤄진 주제이고, 지금도 여전히 이에 대한 논쟁이 그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면, 아직 이렇다 할 답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상과학에서나 상상할 수 있었던 클론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것들이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는 추세도 있기에 이런 현상은 계속 지연되고 지연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우린 끝내 답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이런 논쟁을 역사적으로 지속하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특별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나 싶다.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묻고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자, 즉 현존재라고 정의했다. ‘모든 인간은 의미 중독자’라는 우스갯소리는 결코 우습게 넘길 말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은 소위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부르는 ‘숨 쉬고 먹고 자고 싸고 성장하고 번식하는’ 행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이다. 따지고 보면 자살이라는 행위를 범하는 유일한 존재자 역시 인간이기도 하다. 이 역시 의미를 묻고 찾고 따지는 인간의 속성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인간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여느 생명체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기독교 신학적인 관점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로써 특별하다. 인간만이 창조주로부터 그 타이틀을 부여받았다. 창조세계를, 즉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를 다스리고 관리하고 섬기며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신적 대리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어떨까? ‘종속과목강문계역’과 같은 전통적인 생물 분류도에서나, 다윈의 진화론이 반영된 계통 분류도에서나 마찬가지로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로 정의된다. ‘DNA 변이에 의한 다양성’이라는 진화의 좁은 관점으로만 보면 인간이 가장 진화한 생명체라고 단박에 정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진화에 있어서 최상위권에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며, 모든 동물과 식물을 먹이로 삼을 수 있고, 그것들을 함부로 파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생태계에서도 인간은 도구의 사용과 탐욕으로 꼭대기를 차지한 지 오래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누가 지구의 주인일까?”라는 질문 앞에서 당당하게 “인간”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한낱 산업혁명 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개척은 파괴가 되었고, 발전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터전의 상실을 가져왔다. 생물학적인 인간의 특별함의 근거를 크고 발달한 뇌와 고등한 지능에서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이 마음껏 사용된 결과들의 부정적이고 추악한 꼴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인간의 특별함이 무슨 가치가 있었는지 우린 조용히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쓰임새가 악의 도구로도 이용된 듯하지만 어쨌거나 인간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고도의 지능을 소유한 생명체이다. 얼마 전부터 ‘뇌과학’이라는 학문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아진 이유도 전혀 낯설지만은 않다. 모든 세상은 뇌로 조절하거나 만들어내는 현상일 뿐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주장도 있고, 영혼마저도 뇌의 부산물이라는 유물론적인 주장, 프로이트가 밝혀낸 무의식의 영역도 뇌세포의 기능을 밝혀내면 모두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의 주장까지 인간의 뇌는 알려진 것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여전히 많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인간의 특별함’을 ‘인간의 우월함’이 아닌 ‘인간의 인간다움’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인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생물학적으로도 공인된 인간의 뇌의 우수성을 전제할 때 우린 뇌가 작동하고 영향을 미치는 크게 두 가지의 영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이 그것이다. 이성은 논리, 합리성 등을, 감성은 감정, 공감 능력 등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IQ가 모든 것인 것처럼 여겼던 시절이 지나고 EQ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것도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똑똑하기만 해선 인간이 인간답다고 말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널리 퍼진 결과였다. 문학적인 표현까지 들어서 ‘메마른 사람’이라느니 ‘냉혈한’이라느니 하는 단어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어느새 인간다움의 정의를 이성의 작용만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감성의 영역으로 확대시켜 이성과 감성 간의 조화로써 설명하려고 애쓰게 된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은 이러한 ‘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소설의 허구적 장치를 활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클라라는 AF (Artificial Friend)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로봇이다. 가게에 가서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으며 각 AF마다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서 구매자의 기호와 요구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언젠가는 곧 닥칠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클라라의 시선을 통해 독자들이 인간을 한 걸음 떨어져서 객체화시켜 바라보게 만든다. 말하자면 인간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같은 시스템 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화자가 아닌 로봇 화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인간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모습들, 혹은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모습들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읽힌,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공감력’인 것 같았다. 단적인 예로 클라라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버전의 AF와 클라라가 속한 버전을 비교하는 대화를 들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새로 나온 B3가 인지 기억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공감력이 좀 부족한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렇다. 클라라는 다른 AF 보다, 심지어 기술적인 면에서 더 완성도 높게 제작된 B3 레벨보다도 공감력에 있어서는 월등했던 로봇이다. 로봇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클라라는 사람의 내면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분석할 줄 안다. 무엇보다 사람을 공감할 줄 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독특한 캐릭터인 클라라를 통해 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공감력에 있다고 넌지시 짚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또한 클라라를 구입한 조시 엄마의 계획은 클라라를 조시의 대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조시는 아팠다. 언니처럼 곧 죽을지도 몰랐다. 그때를 대비해 조시 엄마는 클라라로 하여금 조시의 모든 것을 배우고 복제하길 바랐던 것이다. 행동이나 표정뿐만이 아닌 마음 씀씀이 마저도. 

과연 어떤 특정한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공감력이 뛰어난 클라라라고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한 영역의 일일 것이다. 작품 속에는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도 등장하고 절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도 등장한다. 이들의 갈등 구조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클라라는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스포를 하고 싶지 않아 힌트가 될 만한 대사를 아래에 적어본다. 조시 아빠의 대사다. 

“너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니? 신체 기관을 말하는 건 아냐. 시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인간의 마음.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만약에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조시를 제대로 배우려면 조시의 습관이나 특징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어?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아?”

아래 역시 조시 아빠의 대사다. 

“하지만 네가 그 방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또 다른 방이 있다고 해 봐. 그리고 그 방 안에는 또 다른 방이 있고. 방 안에 방이 있고 그 안에 또 있고 또 있고. 조시의 마음을 안다는 게 그런 식 아닐까? 아무리 오래 돌아다녀도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 또 있지 않겠어?”

공감력에 탁월했던 클라라의 결정은 의미심장하다. 공감을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해서 결코 그 사람과 똑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특별함은 고등한 뇌 덕분이라고 생물학적으로 말할 수 있고, 뇌가 작동하는 두 가지 영역 중에서도 감성적인 측면, 즉 공감력에 인간의 인간다움이 심겨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 개인은 탁월한 인간다움으로도 결코 복제할 수 없다는 것. 모든 인간은 고유한 존재라는 것. 가장 인간다운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감력을 넘어서는 인간의 고유한 개별성. 저자는 바로 여기에 인간의 특별함 내지는 인간다움이 숨어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나의 두 번째 책의 두 번째 문학 파트너로서 당당하게 후보로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생물학적인 측면에 상응할 문학작품으로 ‘클라라와 태양’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전 작품 ‘나를 보내지 마’도 읽고 나서 천천히 결정해야겠다. 인간의 뇌, 이성과 감성, 지능과 공감력. 흥미로운 글이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0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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