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민음사 모던 클래식 7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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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심리로 굴절된 인생, 절제로 표현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고

이 작품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마스지 오노는 한때 유명했던 은퇴한 화가로, 세계대전 중 아내와 아들을 잃은 후 포화에 부서진 호화로운 옛 저택을 손보며 살고 있다. 둘째 딸 노리코가 어느 명망 있는 집안의 아들과 맞선을 앞둔 어느 날, 결혼한 맏딸 세쓰코가 친정에 놀러 온다. 그녀는 맞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과거 일에 대해 미리 조치를 취해놓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오노를 은근히 압박한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둘째 딸의 혼삿길이 막힐 것을 염려하여 과거의 인물들을 한 명씩 찾아가기 시작하고, 그렇게 그의 과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에 스승의 순수 예술적 노선을 배신하고 전쟁과 천황을 찬양하는 그림을 제작하여 명예와 부를 누렸던 그에게 남은 것은 전범이라는 비난의 눈길뿐이다. 그는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 반성하는 한편 신념에 차 행동하고 성취를 맛보았던 경험에 대해 은밀한 자부심을 느낀다. |

책 뒷면에 실린 요약문을 그대로 옮겨온 이유는, 먼저 나로선 줄거리를 이보다 더 잘 요약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고, 솔직히 그럴 필요도 못 느꼈으며, 무엇보다 이 작품은 줄거리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나날’로 내게 강한 여운을 남겼던 가즈오 이시구로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올 초 그의 신작 ‘클라라와 태양’을 통해서였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쉽게 드러나지 않고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다른 작가의 글에서는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그 무엇을 나는 그의 글에서 어렴풋이 포착했던 것 같다. 그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고, 실제로 그렇게 조금씩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클라라와 태양’에 이어 나는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고, 몇 달이 지난 오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라는 제목의 이 작품을 이틀에 걸쳐 읽었다. 이로써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네 편을 읽게 된 셈이다.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한 작가의 작품들을 하나씩 훑어볼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은밀한 기쁨과 무언의 확신이 이 책을 덮으면서 내 안에 조용히 스며들어왔다. 한두 권만으로는 좀처럼 읽어낼 수 없는 막연한 그 무엇이 어느 날 형체를 가지게 된 것처럼 선명해지는 느낌은 책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는 묘미이지 않을까 한다. 이제야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을 제대로 대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조금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리는 큰 그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책장에 꽂혀있는 그의 다른 네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이 작품에서 나는 ‘남아 있는 나날’에서 느꼈던 애잔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노년의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술 방식, 그 과정에서 조금씩 보여주는 화자의 감정과 심리의 미묘한 변화, 과거에 대한 참회와 합리화의 경계를 오가는 듯한 묘한 긴장감. 거기에 절제된 글쓰기까지. 나는 이런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 흐르는 작품의 깊은 맛을 느끼면서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어느새 화자가 되어 잔잔한 애수를 느끼며 먹먹한 가슴을 안은 채 나 자신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도 않아 일부의 독자는 아마도 이 작품의 맛을 밋밋하다거나 재미없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바로 거기에 가즈오 이시구로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이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삶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 및 심리를 조심스럽게 들춰내어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글. 이런 마법 같은 글의 위대성을 음미하고 싶다면,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글을 읽고 싶다면,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조용히 권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5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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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드리는 기도 - 삶의 어둠 속에서 믿음의 언어를 되찾는 법
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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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취약해도 되는 우리


티시 해리슨 워런 저, ‘밤에 드리는 기도’를 읽고

성공회 사제이자 작가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 티시 해리슨 워런은 2017년 아버지를 잃는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유산과 과다출혈로 응급실에 실려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상실과 고통과 슬픔으로 인생의 낮고 어두운 시간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견뎌낼 수 있었다.

밤과 같이 어둡고 외로운, 그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기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로 그녀는 밤기도를 든다. 밤기도를 드림으로써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고 견뎌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에세이인 동시에 성공회에서 사용되는 여러 기도서 중 특별히 밤기도 예식이 끝나 갈 무렵 나오는 한 기도문 (밤기도문)에 대한 해제다. 그래서 이 책을 보다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의 기도문을 먼저 마음 담아 읽을볼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다.

| 사랑하는 주님,
이 밤에 일하는 이, 파수하는 이, 우는 이의 곁을 지켜 주시고,
잠자는 이를 위해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소서.
주 그리스도여, 병든 이를 돌보소서.
피곤한 이에게 쉼을 주시고,
죽어 가는 이에게 복을 주시고,
고난을 겪는 이를 위로하시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뻐하는 이를 보호하소서.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아멘. |

이 책은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인 첫 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열두 장에서 저자는 위에 적힌 밤기도문의 각 구 혹은 각 문장을 자신의 살아있는 경험과 사유를 토대로 해석해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마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 여러 중독으로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며 견뎌냈던 경험이 있는 사람, 그 견딤의 시간 동안 무신론에 기반을 둔 철학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을 이뤄냈던 경험이 있는 사람, 그런 인고의 과정을 견뎌내면서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줄 알고 마침내 하나님과 타자와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비로소 모두를 존중하고 섬길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간 경험이 있는 사람. 티시 해리슨 워런은 사제와 작가라는 정체성만이 아닌,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 즉, 이 책은 누굴 가르치거나 단순히 책을 만들기 위해서 써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 그리스도인의 진정성 어린 고백이 담긴 글이다.

밤기도문을 읽어보면 처음엔 상투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내가 그랬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왜 그런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게토화 된 교회 용어에 익숙해져 버린 내 모습이 보였다. 영혼이 없는 감언이설로 도배하곤 하는 원만한 인간관계와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하면서도 그 목적은 나도 그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길 원하는 이기적이고 더러운 내 자아가 보였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흔해빠진 말에서 염증을 느꼈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나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다.

저자는 밤이라는 단어에서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뽑아낸다. 열두 장에서 다루는 밤기도문의 해제는 모두 인간의 취약함을 전제한다. 밤이란 취약한 시간이다. 밤은 대부분 자는 시간으로 이뤄지고 무장해제된 우리 자신의 민낯을 편안히 드러내는 시간이다. 방해받지 않고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장 취약한 시간, 우린 밤에 거짓 없는 우리 자신을 만난다.

밤기도는 바로 그 시간을 열면서 드리는 기도다. 여러 중독에 빠져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많다. 술과 담배와 마약과 섹스와 도박만이 아니다. 중독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영화, TV, 게임 등 우리에게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친숙한 것들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 우린 저마다 다른 양상으로 어느 정도 이런 것들로 인해 중독되어 있기도 하다.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은 모습들, 가장 사적이고 가장 솔직한 모습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시간, 밤. 밤기도로 밤의 문을 연다면 얼마나 나의 일상이 변화될 수 있을까, 하고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이 밤기도는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주께 간구하는 기도다. 우리 주위에는 밤에 일하는 이도 있고, 파수하는 이도 있으며, 우는 이도 있다. 잠자는 이, 병든 이, 피곤한 이, 죽어 가는 이, 고난을 겪는 이, 고통에 시달리는 이, 그리고 기뻐하는 이까지, 저자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길 빈다. 그리고 이렇게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를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사랑에서 찾는다. 그 사랑에 의지할 때에만 모든 취약한 사람들 (모든 인간들을 대변하는 표현이라 읽을 수도 있겠다)을 위해 마음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가 된다.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 책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하루 만에 다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내용은 전혀 없지만, 이 책을 가득 매우고 있는 평이한 문장들은 무게를 가지고 힘을 가진다. 좋은 글이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표현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인 법이다. 나는 이 책을 일주일 넘게 밤마다 천천히 조금씩 읽어오면서 저자와 공감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예의인 것 같았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특히 저자의 글은 묘한 설득력이 있어서 뻔하다고 여겼던 진실들을 재조명하여 숨은 의미를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글에 매료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메말라 있는 내 마음에 단비가 내리고 얼어버린 내 마음에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뭄이 끝나고 해빙을 맞이한 나는 이 책과 저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센 척하고,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척하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로 돌아가는 시간. 밤마다 우리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취약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취약해도 된다고. 단,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한다면 말이다. 

#IVP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5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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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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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이고 또 사적이기도 한 에세이


황정은 저, ‘일기’를 읽고


지난 사흘간 드문드문 고요한 시간이 날 때마다 황정은의 첫 에세이집 ‘일기’를 조금씩 읽었다. 덕분에 내가 아는 일기와 에세이의 경계가 조금 흐릿해졌다. 일기는 사적인 (private) 이야기, 에세이는 개인적 (personal)이지만 사적이진 않은 이야기로 나는 이 둘을 구분해왔다. 일기는 공개하기 어렵고 공개할 필요도 없으며 애초부터 공개를 목적으로 써지는 글이 아니지만, 에세이는 공개성이라는 측면에선 개방된 글이라고 이해해왔다. 말하자면 일기는 자기 자신 이외엔 독자가 없는 반면, 에세이는 처음부터 공개되어 독자들에게 읽힐 목적을 암묵적으로 띠고 있는 글이다. 그래서 에세이에는 일기와는 달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이 자연스레 붙게 된다. 


제목을 일부러 ‘일기’라고 한 이유를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 갈 수 있도록 ‘일기’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과 함께 하는 내내 공개를 목적으로 써진 황정은의 에세이가 아닌 비공개를 조건으로 단 황정은의 일기를 읽는 것만 같은 비밀스러움을 느꼈다. 특히 후반부에 가선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다는 기분 (죄책감이랄까)이 들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넘어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일들까지도.


나는 가만히 마음에 담기는 에세이를 읽고 나면 먹먹해지는 가슴을 안고 며칠 동안 그 기분에 취해 지내기도 하는데, 적어도 그 기분은 에세이를 쓴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기분은 황정은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컸다. 그냥 안아주고 싶었다. 작은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조그만 응원이 될 수만 있다면, 하고 바랐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문득 찾아오는 기억의 조각들로 인해 끝내 아물지 않는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혼자 아파하고 그 상처를 만든 상대를 원망하는 데에 집중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더 공감하고 함께 하려는 작은 사랑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들. 이 책 덕분에 황정은도 이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황정은이라는 한 개인을 넘어, 비록 소수이지만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부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며 앞으로도 글을 계속 써주시길.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4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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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와 인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2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비룡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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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궁핍과 허무, 그리고 인생의 의미


존 스타인벡 저, ‘생쥐와 인간’을 읽고

이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는 첫 페이지로 돌아가야 했다. 거기에 적힌, 이 책을 여는 제사 (題詞)를 다시 읽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두 문장을 천천히 다시 읽고 나서야 나는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제사는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의 ‘생쥐에게 (To a Mouse)’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저자가 선정한, 다소 엉뚱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 제목의 출처를 알 수도 있는 시이기도 하다. 다음과 같다.

“하지만 생쥐야, 앞날을 예측해 봐야 소용없는 건 너만이 아니란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일이 제멋대로 어그러져, 고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 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하잖니!” 

이 짧은 시구를 읽고 나서 즉각적으로 들었던 느낌은 허망함 내지는 허무함이었다. 모든 계획이 무의미한 것 같고, 인생 전체가 운명이란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굴러가는 것 같아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무력함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작품 전체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진하게 녹아있다. 비극일 수밖에 없는 약간의 희극적인 요소까지 포함하면서.

이 작품은 우화다. 우화치곤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이 작품이 어떤 교훈을 던져주기 위해 창조된 허구라고 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우화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실제 있었던 사건에 허구를 가미해 쓴 팩션 (팩트 + 픽션)이 아니라 저자 존 스타인벡이 당대 시대상을 풍자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1937년에 출간되었으니 이 책은 미국의 경제 대공황 시기 중에 쓰였고 출간된 것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격의 두 떠돌이 일꾼, 조지와 레니는 그 당시 경제적인 상황은 물론 그 시대에 진하게 배어있는 허무와 절망 등의 암담한 분위기를 삶 자체로 보여주는 대리자 역할을 한다. 

생쥐와 달리 인간은 미래를 알길 원하고 소망을 갖길 원한다. 인간은 존재를 묻는 유일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의 본성이 지독한 시대적 궁핍함 때문에 장기간 충족되지 못한 채 겨우 하루 먹고살 수 있는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으로 치닫게 된다면 과연 그 사람은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게 될까. 집을 잃은 생쥐와 같은 꼴로 바뀌지 않을까. 생쥐 입장에선 자신의 본성을 충족시키는 인생이겠지만, 사람에겐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앗아가는 인생이지 않을까. 여유롭진 않지만 그래도 내일을 계획할 수 있고 앞날을 어느 정도 전망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내게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불평 거리를 안고 살아가는 나 자신이 오늘따라 많이 부끄럽다.

#비룡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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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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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일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토니 모리슨 저, ‘빌러비드’를 읽고

지울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애를 많이 쓰면 끝내 치료할 수 있을까? 마침내 지워버릴 수 있을까? 아니면, 일찌감치 지우길 포기하고 안고 가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그 상처로부터 해방받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 상처가 ‘과거’라면 ‘현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미래’는? 끝까지 칼을 갈고 눈에 불을 켠 채 지울 수 없는 과거와 싸우면서 복수하듯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아무리 처절했다 하더라도 과거 따윈 잊어버리고 현재를 새롭게 살아내야 할까?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현재는 무슨 의미를 지닐까? 과거가 없는 사람처럼 현재를 살아내는 건 가능한 일일까? 설사 의도적인 기억상실증 환자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현재는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렇게 과거를 잊은 현재는 과연 해방받고 자유로운 삶일까? 혹시 그 현재야말로 과거에 묶여있다는 직접적인 증거 아닐까? 어떻게 해야 아픈 과거에서 해방받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지울 수 없는 과거는 단지 잊고 안 잊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깊은 상처를 남긴 과거는 망각으로 지울 수 없다.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지우는 건 잊는 게 아니라 이겨내는 것이다. 이겨내는 것은 과거에 묶이는 게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며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흑인들이 백인들로부터 받은 지울 수 없는 과거의 깊은 상처도 마찬가지다. 결코 망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잊으려는 온갖 노력, 혹은 잊지 않고 어떻게든 분노를 간직한 채 복수를 위해 백인들을 응징하려는 노력으로는 어쩌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일처럼 여기며 넘어가서도, 혹은 마치 그 일들이 지금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매여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비단 흑인들의 뿌리 깊은 차별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다. 과거의 깊은 상처를 다루는 문제는 곧 미래로 이어질 현재를 살아내는 시작점과 동기와 방향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 (Beloved)’를 읽었다. 450 페이지에 달하는 묵직한 분량은 수년간 많은 장편소설과 고전문학으로 맷집이 다져진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인 토니 모리슨조차 직접 경험하지 못한 19세기 미국에서 자행되었던 ‘공식적인’ 노예제도, 그리고 그로 인해 흑인들이 일방적으로 당한 ‘합법적인’ 차별을 21세기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한국인인 내가 깊이 공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얕은 공감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힘들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혹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등 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는 거대한 폭력을 다루는 작품을 읽을 때마다 동일하게 겪는 난항이었다. 시간과 공간과 문화가 전혀 다른 독자인 내가 이 정도였으니, 이 작품을 직접 읽은 흑인들이나 미국인들, 혹은 여러 소수자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 마음이 무너졌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흑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가 생채기를 내며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허투루 읽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급한 마음이 들어도 예의를 갖춰 소중한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시종일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이것이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은 흑인 노예제로 인한 깊은 상처를 저자의 유려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지만, 그게 이 작품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저 사라진 과거와 그 상처 받은 영혼들을 위한 묵념을 하게 만드는 수준을 훌쩍 초월하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은 흑인들의 아픔을 말하지만 그것을 미화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으며 살아왔던 흑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차별받고 억압받고 노예로 사는 삶의 일상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렇게 드러내는 이유가 흑인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강조하는 데에 있기보다 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에 있는 것이다. 사건이 아닌 사람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역시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고 백인들을 향한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들로부터 억압받던 흑인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월한 인간이 열등한 인간을 억압한 게 아니라 동등한 사람이 동등한 사람을 차별했던 역사가 곧 흑인들이 겪어냈던 과거라고. 과거의 상처로 인해 아파하고 분노하기 전에 그 과거의 실체를 정확하게 봐야 한다고. 그래야 그 과거를 이겨내고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살아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목숨 건 도망에 기적적으로 성공한 세서. 그 도망의 길 위에서 태어난 아이 덴버. 간신히 도착한 124번지. 어느 날 세서를 잡으러 124번지를 찾은 백인 노예 주인, 학교 선생. 세서는 자기 자신은 매질과 강간을 당하고 더럽혀져도 자신이 낳은 네 아이만은 그렇게 살도록 놓아둘 수 없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빠른 판단을 내리고 즉시 행동에 옮긴다. 직접 아이를 죽이는 일이었다. 세서는 아이들이 길러진 후 비인간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자기 손에 죽는 게 낫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톱으로 여자 아이의 목을 썰었다. 아이는 죽었다. 나머지 아이들도 죽이려 하던 찰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차단되고 세서는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녀가 행한 일은 과연 살인이었을까? 살인이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은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가 재구성한 이야기다. 실제로 유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 곧 사물이었으므로 그 사건을 살인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그 일을 행한 노예 (마거릿 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딜레마인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재판은 이 논쟁 때문에 이례적으로 길어졌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고도 한다. 실제 사건에서 결국 마거릿 가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노예로, 즉 재산 혹은 사물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명백한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이 아닌 일이 되어버린, 이 기막힌 사건. 그러나 작품 속에서 토니 모리슨은 세서를 사람으로 인정받게 만든다.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풀려나게 만든다. 대신, 출옥 후 세서의 상태와 행동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뿐만이 아닌 다른 여러 흑인들의 삶도 보여주지만, 작가는 세서의 삶에 가장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세서이기도 하지만, 소설에 흐르는 전체 서사가 세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세서는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세서에게 ‘스위트홈’에서 같이 노예로 살았던 폴 디가 찾아온다.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음을 다시 놓아도 되나, 하는 마음까지 들던 찰나, 서커스 구경을 하고 124번지로 돌아오던 날, 집 앞에 한 흑인 여자 아이가 자고 있었다. 빌러비드였다. 덴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았다. 그녀는 엄마가 톱으로 죽였던, 이제는 살아 돌아온 언니라는 것을. ‘빌러비드’는 사실 돈이 없던 세서가 자기가 죽인 딸의 비석에 새긴 유일한 문구였다. 세서는 그 짧은 단어를 새기기 위해 돈이 없어 반강제적인 강간을 선택했다. 그 짓을 한 번 하게 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비문을 새겨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덤 속에 있던 아이가 버젓이, 비록 모르는 사람의 몸을 입었지만, 환생한 것이었다. 세서도 나중에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서가 그녀에게 가진 건 오로지 죄책감이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저지른 살인이었지만 죄책감을 떨칠 순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빌러비드는 그 죄책감을 이용해 세서를 옥죄기 시작한다. 마치 죄인의 죄를 잡고 협박하여 꼼짝없이 자기의 졸개로 부리는 불의한 인간처럼. 이때 작가는 마치 제삼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덴버를 이용해 이런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 끝을 맺게 만든다. 덴버에게는 도약이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난날 자기 아이를 죽였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빌러비드는 사라진다. 124번지에 쥐도 새도 모르게 찾아왔던 것처럼 124번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떠나 있었던 폴 디가 돌아오고 세서와의 새로운 삶을 기약하는 모습으로 작품은 마무리가 된다.

빌러비드가 어떻게 환생한 아이일 수 있느냐, 그게 가능한 얘기냐, 진짜 사람 맞냐, 환각 아니냐, 등의 질문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빌러비드가 실제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폴 디는 의심 없이 진짜 사람이었지만 그가 진짜 사람이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토니 모리슨은 폴 디를 세서의 미래로, 빌러비드는 세서의 과거로 설정한 듯하다. 세서는 과거의 깊은 상처를 지우고 싶었다. 적어도 자녀에게 전달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빌러비드와 함께 하는 삶은 과거에 묶인 채 죄책감에 쌓여 남은 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대변한다. 반면, 폴 디와 함께 하는 삶은 과거의 상처를 이겨내고 그것을 시작점으로 하여 새로운 현재를 살아내는 방법을 말한다. 빌러비드가 사라지고 세서가 폴 디와 함께 하는 삶으로 작품이 마무리되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세서를 끝까지 응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마칠 수 있었다. 

폴 디와 함께 하는 삶에도 자주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나 (빌러비드가 나타나) 힘든 나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겨냈다고 생각할 때 즈음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날도 종종 생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를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고 그 사건 때문에 가지게 된 분노와 원망, 죄책감 등에 사로잡혀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것보단 건강한 삶이라 믿는다. 우리 대부분의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잊으려는 노력도 간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겨내는 방법은 잊는 노력도 포함할 테니까. 그러나 잊으려는 노력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과거의 망령은 언제든 되살아나 우리를 습격할 테고,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은 망각이라는 효과적인 방법도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세서는 곧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 역시 저마다 다른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과거에 묶일 것인지, 그 상처를 이겨내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우린 선택해야 한다. 부디 모든 사람이 세서처럼 후자를 선택할 수 있길 바라본다. 해방과 자유는 과거를 잊는 행위가 아닌 이겨내는 행위에서 시작될 테니까.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4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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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1-07 11: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Youngwoong Kim 2021-11-07 1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