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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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한강 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새와 눈, 밤과 바다, 나무와 뼈, 꿈과 환상, 그리고 불꽃. 죽음과 추위와 고통은 물론 고립과 단절과 공포까지 느껴지는 섬뜩함을 한강만의 지극히 절제된 필체로 가까스로 눌러 담은 소설. 자동적으로 이 작품은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년이 온다’를 떠올리게 한다. 감히 깊이를 따질 수 없는 그 작품을 통해 우리는 1980년 광주 학살 현장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고, 지울 수 없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었으며, 과거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지, 국가와 권력의 힘이란 어떤 것인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이르기까지 우린 눈을 감고 마음을 담아 깊이 고찰할 수 있었다. 단순히 읽고 공감할 뿐 아니라 간접 체험까지 할 수 있었던 그 작품은 역사 시간에 배웠던 단편적인 교과서 지식, 신문과 뉴스 기사를 통해 접했던 많은 정보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해냈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이러한 의미들을 고려하다 보면, 그녀가 그 작품으로 부커 상을 받았던 경사마저도 작은 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작가 한강은 소설 맨 뒤에 위치한 ‘작가의 말’에 썼다. 둔한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작품의 행간이 읽히는 것 같았다. ‘소년이 온다’에서 결핍된 그 무엇, 그것이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그리고 쓰고 나서도 지속적인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나서 악몽도 사라지고 고질적인 편두통 증세도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나는 그 치유의 힘이 곧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소년이 온다’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사랑으로 매듭짓고 승화시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랑은 모든 고통과 죽음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빛이자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 빛과 생명이 한강 작가를 괴롭히던 망령들까지도 멀리 쫓아버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읽고 나면 숙연해지는 두 작품 사이에 한강이 겪어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자리한다. 그것을 떠올리면 나는 1980년 광주와 1947년부터 제주에서 권력의 횡포와 무자비한 폭력으로 죽어간 영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 학살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학살 (제주 4.3 사건)을 고발하고 상기시키는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강의 몸과 마음을 통과한 진액을 통해서. 한강만이 해낼 수 있는 글을 통해서. 어쩌면 한강 작가도 운명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5월 광주’에 이은 ‘제주 4.3’도 그녀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는 운명 같은 예감을.

‘소년이 온다’와 달리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사건 자체와 독자 사이의 거리가 다르다. ‘소년이 온다’는 소년 동호를 통해 우리를 1980년 5월 광주로 곧장 인도한다. 이어서 동호 친구 정대의 혼을 통해 살육당한 주검들이 고깃덩어리처럼 매장되는 비인간적인 현장으로 우릴 안내한다. 5.18이 지난 5년, 10년, 20년 뒤에도 그때의 상처가 작별하지 않고 몸과 영혼에 그대로 남아 있는 실태를 동호와 함께 도청에서 도우미로 일했던 은숙, 진수, 선주의 눈과 입을 통해 우리에게 나지막이 들려준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살아남아 자기의 손으로 직접 아들을 묻은 동호 엄마의 사투리 독백은 5장까지 간신히 참아왔던 모든 독자들의 마음을 후벼 파고 무너지게 만든다. 그만큼 ‘소년이 온다’는 독자를 현장으로 불러들여 사건과 독자 사이의 거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의 목소리로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기술된다. 대학 때 만난, 제주가 고향인 친구 인선의 목소리를 통해 경하는 제주 4.3 사건 현장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얼마 전 치매로 생을 마감했던 인선의 어머니다. 인선의 어머니는 1947년 제주 4.3 사건이 발발할 때 십 대의 나이로 현장에 있었다. 가족 대부분이 학살당한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독자들은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경하, 인선, 인선의 어머니,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가 수집했던 옛 자료들을 통해 여러 단계를 거쳐가며 듣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사건과 독자 사이의 거리가 먼 편이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두 학살의 역사를 기술한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4.3 제주’가 ‘5월 광주’보다 훨씬 더 이전의 일이라는 이유도 한몫했을 테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는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랑’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작품 속에서 그 ‘사랑’은 주로 인선의 어머니를 통해 가시화된다. 어릴 적 인선은 어머니가 혐오스러워 가출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건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고, 제대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 가끔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들려준 무수한 이야기들을 인선은 모두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몰래 모아둔 여러 자료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대대적인 자료 수집을 실행한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던 인선은 그것으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지만 전체의 일부만을 담았을 뿐이다. 사건의 전말을 담기에는 영화라는 도구가 너무 가벼웠던 게 아니었을까. 오직 유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관심을 가질 뿐 그 누구도 과거 제주에서 있었던 그 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법. 당시 권력이 묻어두었던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사건은 5월 광주의 전신 이기라도 하듯 실로 지옥과도 같은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학살당한 수만 명의 사람들. 수만 구의 뼈들. 그 혼들까지.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으로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 끔찍했던 역사의 한 복판에서 인선의 어머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외삼촌의 생존 여부, 차후엔 그의 유골의 위치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끝내 그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서 인선의 어머니는 정신줄을 놓게 되어 치매에 걸리게 된다. 폭력과 횡포,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인선의 어머니. 신형철의 추천사는 옳다. 그녀의 삶은 곧 고통을 넘어 죽음이라는 최후의 적이 존재함에도 결코 작별하지 않고 작별할 수 없고, 대신 연약하지만 영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러고 보니 ‘소년이 온다’ 6장을 이루며 독자들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던 동호 어머니의 독백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둘은 다르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동호 어머니의 독백은 독립적인 한 사건과 그 순간이 가져온 상실과 슬픔으로 읽는 게 더 적합할 것 같기 때문이다. 대신 인선 어머니의 이야기는 삶 전체로 대변된다. 수십 년 그녀가 칠순이 넘어 치매에 걸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고 고군분투했던 살아있는 삶. 우리는 그 삶을 사랑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작가 한강 역시 그걸 바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린 그 사랑으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현재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대표적으로 세월호 사건 역시 우리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6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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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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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반음을 노래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저,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고

사사로움에서 미묘함을 잡아내어 과장하지 않고 감정의 반음을 이토록 절묘하게 표현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에 요즈음 푹 빠졌다.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치밀한 섬세함과 탁월한 절제미가 내재되어 있는 그의 글은 미풍처럼 스며들어 전체를 오롯이 감싼다. 반음이 내는 그 미묘한 느낌을 이렇게 산문으로 나타낼 수 있다니! 그 정교함에 나는 매 작품마다 혀를 내두른다. 글쓰기 선생이 한 명 더 생겼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작이다. 1982년에 출간되었으니 그가 서른도 되기 전에 쓴 작품이다. 이 사실은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한다. 이십 대의 감성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이 데뷔작을 시작으로 황혼을 나지막이 노래하는 그의 세 작품이 1989년까지 완성된다. 그는 ‘파리 리뷰’라는 잡지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 세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해 “같은 책을 세 번 썼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 작품 모두 “한 개인이 불편한 기억과 어떻게 타협하는지” 그려 내려고 했고, 특히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와 ‘남아 있는 나날’ 둘 다에서 “직업적인 면에서 소모적인 삶을 산 한 인간을 탐구”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나는 ‘옮긴이의 말’에 나온 바로 위의 두  문장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 편을 모두 읽었다. 운명을 느낀 사람처럼. 그리고 이 데뷔작을 다 읽은 오늘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전율이 돋았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이 작품 역시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처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원자폭탄 투하 전후의 일본을 주 배경으로 한다. 화자인 에츠코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분신이라도 되는 듯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했다. 두 번의 결혼, 세 번의 이별. 작품 속 현재는 첫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두 번째 남편도 죽은 지 몇 년이 흐른 시점이다. 에츠코는 현재 혼자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 니키가 적적하게 영국 시골에서 홀로 살고 있는 에츠코를 방문하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둘째 딸이 머문 짧은 기간 동안 산책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면, 어떤 한 여자아이가 그네를 타는 모습을 계기로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기억은 영국으로 이주하기 이전, 첫 번째 결혼을 하고 첫째 딸을 임신하고 있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 속의 주인공은 이혼한 첫 번째 남편도 아니고, 시아버지도 아니며, 자기 자신도 아니다. 사치코라는 여자와 그녀의 딸인 마리코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웃이었던 그들과 함께 했던, 그리고 아파트 창을 통해 창백한 언덕 풍경을 홀로 내다보던, 짧지만 강렬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에츠코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전쟁으로 남편과 사별한 이후 사치코는 딸인 마리코를 위한 삶을 개척하려 했지만 그 노력은 표면적일 뿐, 결국엔 자기 자신의 삶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 당시 에츠코는 그런 사치코를 응원해주기는 했지만 공감할 수도 마음 깊이 이해할 수도 없었다. 마리코에게 가장 적당한 장소인 삼촌 댁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사치코, 마리코가 싫어하는, 그러나 새로운 아빠가 될 수도 있는 술주정뱅이 미군 프랭크를 따라 미국으로 가기로 선택하는 사치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과의 짧은 인연이 끝나고 정작 사치코의 계획을 실행한 건 그녀가 되었다. 단지 미국이 아닌 영국이었을 뿐 에츠코는 이혼 후 영국인이었던 두 번째 남편을 따라 첫째 딸 게이코가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행을 택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영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게이코는 영국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이 작품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사치코와 마리코와 함께 했던 과거 회상은 궁극적으로 에츠코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는 것이었던 셈이다. 아마도 그녀는 첫째 딸 게이코의 자살에서 말 못 할 죄책감을 평생 가슴에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엔 공감도 이해도 하지 못했던 사치코의 이기적인 삶을, 그 모순된 삶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가 보란 듯 살아왔던 에츠코. 그녀의 상념이 가득한 회상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먹먹하게 만든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말은 옳았다. 황혼의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은 과거의 불편한 기억을 회상하며 자신이 원하진 않았으나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삶을 합리화하는 나약한 한 인간의 나지막한 읊조림인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잔잔한 물결이 만드는 파동을 증폭시켜 그 안에 깃든 본질을 발려내고 전체를 조망하게 만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 아직 나에겐 그의 작품이 네 편 남아 있다. 아껴서 읽어야겠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5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75920555786044

2. 클라라와 태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15671625144252

3. 나를 보내지 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79150188796395

4.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785763058135105

5. 창백한 언덕 풍경: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2072691797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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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핑 도스토옙스키 - 대문호의 공간을 다시 여행하다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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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라는 거대한 숲을 훑어보기 위한 좋은 지도

석영중 저, ‘매핑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부제: 대문호의 공간을 다시 여행하다)

어떤 작품을 읽고 한 번 매료되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어 진다.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두 명 이상 좋아하는 작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 작가의 작품들을 데이트하듯 하나둘씩 섭렵해나가는 즐거움은 오직 경험해본 자만이 아는 깊은 맛일 것이다. 나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런 작가 중 하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난 2년 간 나에게 깊은 독서의 맛은 물론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유까지도 가능하게 해 준 스승이 되었다. 아직 읽지 못한 (이라 쓰고 ‘데이트가 끝나버릴까 봐 의도적으로 읽지 않은’이라 읽는다),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작품이 여전히 여러 편 남아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큰 다행으로 여겨질 수가 없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그러니까 1차 자료를 섭렵해나가는 즐거움이 다분히 수직적이고 평면적이며 개인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면, 그 작가를 오랫동안 깊이 연구한 분들의 2차 자료를 읽는 즐거움은 마치 책을 혼자 읽을 때보다 벗들과 함께 읽고 나눌 때에야 느낄 수 있는 풍성함과 같은 맛을 낸다. 나는 주로 1차 자료를 먼저 읽는다. 2차 자료를 시작점으로 하여 작가의 작품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2차 자료를 쓴 저자의 관점 때문에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감상과 해석을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1차 자료를 어느 정도 읽고 나서, 비록 막연하더라도 작가에 대한 어떤 느낌이 생겼을 때 2차 자료를 접하게 되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다 깊고 풍성한 해석이 자아내는, 수평적이고 입체적인 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독서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나 유익한 정보를 알아내는 게 아니라 작가와의 일대일 만남이 주요한 목적이라 믿는다. 신뢰하는 어떤 사람과 깊이 교제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영감, 성찰, 성장, 성숙, 그리고 치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독서를 통해 이러한 소중한 열매들을 따먹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 특별히 도스토예프스키 전문가로 석영중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단연 최고이지 않을까 한다. 석영중 교수가 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2차 자료만 해도 지금까지 5권이 넘게 출간되었다. 학술적인 논문이 아니라 대중의 눈에 맞춘 책들이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은 사람이든 읽지 않은 사람이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이다. 나 역시 생물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연구한 내용을, 그 좁고 깊은 내용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수학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물리학을 충분하게 설명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마저도 재설명을 요하고, 그 설명을 하다 보면 또 다른 낯선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게 되는 식의 연쇄적인 난항을 성실하게 겪어내야만 비로소 그런 글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고 전문적인 내용을 쉽고 대중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 분야를 깊이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읽은 책 ‘매핑 도스토옙스키’ 역시 쉽고 재미있게 써진 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써지는 과정도 쉽고 재미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 것이다. 대중서를 집필하는 전문가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담아 보낸다.

이 책은 나에겐 약 1년 전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이후 석영중 교수가 쓴 두 번째 2차 자료였다. 제목 ‘매핑 도스토옙스키’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에 입문해보고 싶다면 나는 무엇보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을 시작점으로 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직접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는 독자가 생긴다면 아마도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커다란 숲을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지도다. 

이 책이 갖는 장점은, 여기엔 석영중 교수가 책상에 앉아 연구한 도스토예프스키만이 아닌,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경험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밝히듯 그녀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과 유럽에 아홉 차례 다녀오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거의 모든 흔적을 답사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장소에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끊임없이 유랑했다. 덕분에 그가 단 몇 달이라도 거주했던 셋집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은 대부분이 도스토예프스키 기념관으로 바뀌어 있거나 그를 기념하기 위한 현판이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러시아가 자랑했고 자랑하고 자랑할 세계적인 대문호인 것이다. 석영중 교수의 여행 에세이 형식까지 갖추고 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마치 방대한 시공간을 여행한 느낌이었다. 사업차 가는 여행도 아니고, 휴가를 즐기기 위해 가는 여행도 아닌, 오로지 도스토예프스키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느끼고 더 알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진 여행. 수십 년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구해온 석영중 교수에겐 얼마나 가슴 벅찬 나날들이었을지 제삼자인 내가 잠시만 생각해도 감격스럽다. 

석영중 교수는 이 책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다루진 않는다. 어떤 작품은 간단하게 제목만 언급하거나 한두 문장으로 넘어가는가 하면, 또 어떤 작품은 몇 장에 걸쳐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다. 그러므로 이 책을 조금이나마 깊게 이해하고 싶다면, 혹은 석영중 교수의 감상과 해석을 보다 깊게 공감하고 싶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대표하는 다섯 편의 장편소설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이후 썼던 ‘죽음의 집의 기록’, 그리고 ‘지하로부터의 수기’, ‘노름꾼’, ‘작가 일기’ 등의 작품들을 읽고 이 책을 접하면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가 일기’를 제외하곤 모든 작품들은 읽어서 그런지 석영중 교수가 곳곳을 방문하며 남긴 짧은 감상들에 나는 공감을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두 번째 아내이자 그의 주요 작품들이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었을 인물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가 쓴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도 읽고 싶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 바로 옆에서 살며 동반자가 되어주었던 그녀의 회고록을 읽는다면 또 다른 모습의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5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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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21-12-09 17: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Youngwoong Kim 2021-12-10 02:0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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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묵념.

 

한강 저,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작가 한강은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 그녀가 여전히 국민학생이었던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선 전두환의 지휘 하에 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5.18 민주화 운동, 광주항쟁이라고도 불리는 사태다. 한국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도 잊혀지지도 않을, 치명적이고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보다 30년 전에 벌어졌던 6.25 한국전쟁 역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적어도 그땐 민간인들을 학살할 목적으로 나라가 군을 동원하여 탱크를 앞세우고 총검을 휘두르진 않았다. 그러나, 믿을 수 없지만, 1980년 5월 18일은 그랬다. 군의 일방적인 살육 행위였다. 불의와 폭력과 탐욕이 인간을 지배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빼앗았으며, 약자들의 몸을 한낱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고, 인간 위에 마치 또 다른 인간이 있는 것마냥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가진 존엄성을 가차없이 폐기시킨 사건이었다. 실로 악의 발현이었다.

 

비록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광주에서 태어나 지금은 어느덧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작가 한강. 어릴 적부터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녀가 이 묵직하고도 비장한 침묵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광주학살을 전면적으로 다루며 책을 쓰게 된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학살의 희생자, 그 중에서도 ‘동호’란 이름을 가진, 당시 중학생이었던 한 작은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때 그곳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실상과 그 이후 30년이 넘도록, 아니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깊게 각인된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실상에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제 인물과 일대일로 대응하진 않지만, 실존했던 인물과 실제 벌어졌던 일이 작가의 상상력의 옷을 입고 깨어나 이 책이 되었다.

 

'소년이 온다'는 에필로그까지 합쳐서 총 일곱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화자와 주요 등장인물이 다르다. ‘채식주의자’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선보인 바 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장의 화자는 5.18 광주학살 현장에 있었다는 커다란 공통분모를 가진다. 그리고 모두 동호와 연결되어 있다. 아마 작가는 한 사람의 눈으로 감히 학살 희생자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아픔을 표현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어쩌면 무례하기조차 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지만, 비록 소설이지만, 가능한 허구적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도 살아있는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작가는 일부러 여러 사람의 눈을 통해 그 사건을 다룬 게 아니었을까.

 

작가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동호라는 소년을 입구 삼아 우리를 1980년 광주로 인도한다. 동호는 이미 단짝이던 친구 정대를 잃었다. 어느 날 들이닥친 계엄군의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폭력에 희생되었다. 동호는 정대의 죽음을 목격했다. 함께 손잡고 도망가다가 정대는 총을 맞고 길거리에 쓰러졌다. 동호는 그 손을 놓고 조금 더 도망가서 목숨을 구했다. 운 좋게 총알은 동호를 빗겨갔다. 하지만 동호는 길가에 숨어 정대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중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사건이었다.

 

살아남은 동호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였을까. 동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미 주검이 된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으고 유가족을 연결시켜주고 합동분향소와 추도식을 준비하는 도청을 자발적으로 찾는다. 이 책의 첫 장은 동호가 도청에서 자발적인 도우미로 참여하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추도식에서는 애국가가 제창되고 관은 태극기로 감싸여진다. 동호는 묻는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유가족들은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그렇다. 그것은 명백한 살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가 죽인 것이었다. 나라가 민간인을, 나라가 학생들을, 나라가 친구 정대를 죽인 것이었다. 동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쳐들어온 계엄군의 총칼에 동호 역시 죽음을 맞이했지만, 동호는 아마도 끝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진 못했을 것이다.

 

2장에서의 화자는 정대의 혼이 되어 살육 당한 주검들이 트럭에 실린 채 어느 산으로 고깃덩어리처럼 운반되어 일괄 매장되는, 비인간적인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 난 사실 숨 쉬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하루를 다른 책을 읽으며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아픔의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이 부분을 떠올리면 마음이 힘들다.

 

동호와 정대, 그리고 정대의 누나 정미는 학살 현장에서 죽었지만, 동호와 함께 도청에서 도우미로 일했던 은숙, 진수, 선주, 그리고 동호의 엄마는 살아남았다. 3장부터 6장까지는 살아남은 그들의 지속된 슬픔과 아픔을 각자의 눈과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5.18이 지난 5년 후, 출판사에서 박봉을 받고 일하던 어느 날 형사에게 끌려가 취조 당하며 뺨을 일곱 대 맞는 은숙의 현재와 과거 이야기가 3장을 이룬다. 4장은 5.18 10년 후의 이야기다. 진수와 함께 감옥 살이 하던 교대 복학생 남자를 통해 계엄군이 쳐들어와 살육하던 5.18 당시 현장과, 살아남았지만 빨갱이라는 딱지를 띠고 진수와 함께 감옥에 잡혀 들어와 가혹한 고문을 받았던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한 후유증을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그는 심지어 살아있다는 것이 치욕이라 느꼈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지독한 후유증은 그를 늘 현실에서 동떨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5장은 5.18이 지난 20년 후를 다룬다. 5.18 현장에 대한 증언을 해달라고 부탁을 받은 선주 내면의 이야기다. 그녀는 5.18 현장에서 어느 사복형사에게 배를 밟히고 옆구리를 차여 탈장된 채 응급실에 실려가 목숨을 건졌다. 그 경험 이후 그녀는 노조 운동에 앞장섰던 성희 언니와 다른 길을 택하여 한 발 멀리 떨어져 다소 안전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죄책감에 힘들어 한다. 6장은 사투리로 도배되어 있는 가장 짧은 글인데, 2장 만큼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살아남아 직접 손으로 아들을 묻은 동호 엄마의 독백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아픔을 말할 때 작가가 어머니의 입을 빌린 선택은 정말이지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고 명징한 방법이었다. 마지막 7장 격인 에필로그에서는 마치 한강 작가가 화자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와 배경을 보여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호는 이 작가가 서울로 이사오기 전 광주에서 살던 집으로 이사를 들어온 집의 아들이었다.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읽는 내내 힘들었다. 긴장과 집중과 몰입이 자연스레 되었고, 한 장을 읽고 나면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덕분에 한꺼번에 하루에 한 장 이상 읽지를 못했다. 이 책이 총 일곱 장이니까 일주일이 꼬박 걸린 셈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한강 작가의 섬세하고 정확한 표현력과 필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읽으면서 참 아픈 소설이었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 잔인했을 거란 생각을 하면 몸이 떨릴 만큼 두렵고 끔찍하다. 나 역시 어릴 적 '살인마 전두환'이란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한 번도 제대로 5.18에 대한 글은 읽어보지도 못했다. 내겐 그저 타인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이 책 덕분에 난 비로소 그들과 같은 국민이 되었다. 이제서야 그 희생자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더 진지하게 기리며 묵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의 뒤늦은 묵념을 사죄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91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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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폭력의 흔적, 그리고 발현.


한강 저, ‘채식주의자’를 읽고.


폭력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문신처럼 영원히 남아 자신이나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야 만다. 다만 그 시기가 개인마다 다를 뿐, 뒤늦게 발현되는 형질을 가진 유전자처럼, 폭력이란 실체는 어떻게든 발현이 되어 결국은 그 파괴성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다. 영원불멸한 힘을 가진 것만 같은 치명적인 암세포처럼,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영혜에게 각인된 폭력의 흔적은 그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 느지막이 찾아온 어느 날 밤 그녀의 꿈에서 마침내 깨어났다.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그녀의 작품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2004년과 2005년에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그리고 ‘문학 판’에 독립적으로 실렸던 3개의 중편 소설이 한데 묶여서, 각각이 하나의 챕터가 되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들려주는 하나의 장편 소설이다. 3개의 이야기 모두 영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흥미로운 점은 각 이야기를 풀어가는 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이다. 그는 눈치보며 사는 적절한 기회주의자 같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보단 물질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있고, 별 특별할 것 없는, 이 시대에 부유하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직장인 중 하나로 표현된다. 그는 아내의 자해 사건 후, 별 미련없이 아내를 떠나 버리고, 그 이후로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남자의 캐릭터 덕분에 주인공 영혜의 그로테스크하다고 할 수 있는, 비정상적으로 상처입은 생각과 행동의 변화는 더욱 도드라진다. 아마도 작가는 영혜의 남편에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투영시켜 직접적인 관찰자로서 영혜의 변화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날 밤 나무처럼 서 있던 영혜를 직접 보게 하기 위해 우리를 고기가 가득한 냉장고 앞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어쩌면 영혜의 남편은, 폭력의 피해자를 들어주고 도와주진 못할망정 자신의 삶을 훼손시킨 가해자로 치부하는, 공감불능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도 어쩌면 모두 영혜의 남편인 셈이다. 당신은 주위의 상처입은 영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가족이 모처럼 모인 자리에서 또다시 폭력을 휘두르는 영혜의 아버지처럼 폭력의 피해자의 뺨을 때리진 않는가? 아니면 그런 폭력의 피해자가 재폭력을 당하는 순간에도 사회에 잘못 뿌리내린 관행이나 예절, 권위 따위에 짓눌려 입을 다물고 바라보고만 있진 않는가?


두 번재 이야기, ‘몽고반점’은 영혜의 언니, 인혜의 남편 관점으로 쓰여졌다. 영혜 남편과는 달리 인혜 남편은, 비록 경제적인 도움이 되진 못하지만, 월급쟁이 직장인이 아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다. 그가 가진 강박관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어느 날 아내로부터 들었던, 처제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손가락 크기만큼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묘하게도 그는 그 사실에 성적인 충동까지 느끼게 되고, 끝내 자신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영혜를 개입시킨다. 자해 시도 후 육신의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영혼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만 가는 영혜의 상태도 그에겐 별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건 후 영혜가 남편과 이별한 뒤 혼자 산다는 것이 그에겐 기회로 작용했다. 몽고반점으로 시작된 그의 비뚤어진 강박관념과, 그로부터 파생되어 자신의 예술가적인 관점과 교묘하게 결합된 그의 바람은 결국 영혜와 몸을 섞는 극단의 상황까지 연출시키게 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피카소의 그림처럼, 그의 비디오 예술 작품의 극단적인 독특함만으로 그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생각과 계획,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진, 그의 점진적이고 성실한 실천은 예술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영혜 남편과는 다른 인간의 또다른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몽고반점에서 시작된 그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미 상처받을대로 받은 영혜라는 존재까지도 이용해먹는, 비겁하고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이 별로 없고 일상과는 다른 그만의 섬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라는 점도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껍데기는 결국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치장하는 도구이자 변명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럴듯한 명목 하에 숱하게 저지르는 불의를 우린 얼마나 덮어버리고 모른 체해버리며 합리화시켜 버리는가? 그런 이기심과 위선의 행위들이 벼랑 끝에 한 손만을 걸치고 매달려 있는 영혼의 그 남은 한 손마저도 밟아버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가?


세 번째 이야기, ‘나무 불꽃’은 인혜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야기다. 영혜와 자신의 남편이 저지른, 겉으론 예술적일 수도 있겠지만 속으론 추하기만 했던, 그 사건은 그 동안 인내와 성실로 줄기차게 살아온 그녀도 버텨낼 수 없는 범위의 것이었다. 운명일까? 불행히도 그녀는 그 날, 그 사건 현장에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부른 구급대 인원이 들이닥쳐 두 정신병자를 호송하려는 순간 마주친 남편의, 오직 공포로 가득 찬 눈을 기억한다. 영혜와는 달리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유연한 처세술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비겁하게 불의와 폭력에 무릎 꿇은 침묵이 가져다 준 유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사건 이후 남편과 헤어지고 자신의 아이 덕분에 근근히 삶을 유지해오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영혜를 정신병원에 살도록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과 이 지경이 되도록 자신이 아무 손도 쓰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때문에 무너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셈이었다. 가장 가까웠던 남편도, 동생도, 동생 남편도 모두 자신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다. 왜 죽으면 안되냐는 영혜 앞에서 그녀는 그저 어릴 적 길을 잃어 숲을 헤맬 때 영혜가 집에 돌아가지 말자는 말을 떠올릴 뿐이다. 폭력이 가득하고 일상이 되어버린 그 집에 돌아가는 것보단 차라리 길을 잃고 헤매는 편이 더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한다. 영혜와 함께 길 잃은 그 날, 운 좋게 얻어탄 경운기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본, 저녁 햇빛에 불타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나무 불꽃은 또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책의 마지막 부분, 나무가 되어가는 영혜의 육신적 생명을 연장시킬 목적으로 강제로 음식을 식도로 집어넣으려 하는 과정 중 예기치 않게 진정제를 놓으려고 했던 간호사를 제지시키려고 시도하고 나서 더운 피를 토하는 영혜를 싣고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다. 어릴 적의 나무 불꽃이 폭력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면, 책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나무 불꽃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병원으로 긴급히 실려가는 장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나무 불꽃의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희생당하는 존재는 늘 그녀 자신이 아닌 영혜였다. 비록 예전과는 달리 가만히 있지 않고, 또 다른 폭력을 연상시키는 간호사의 행위를 제지시키려는 행동을 보였지만, 그녀는 결국 또 혼자 살아남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만약 남편과 영혜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랬겠노라고. 혼자 살아남은 슬픔. 그녀의 숙명인 것만 같다.


이 책 전체에 흐르는 여러 상징적인 의미들은 폭력을 대변한다. 대표적인 것이 육식이다. 영혜는 고기를 즐겨 먹는 가족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릴 적 영혜는 그녀를 물었던 개를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끈으로 묶어 수바퀴를 돌며 잔인하게 죽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개로 만든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권위와 무력으로 지배했던 그녀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두 폭력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의미하며, 영혜의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각인되는 폭력의 흔적을 남기는 이유가 된다. 그녀가 채식을 선택한 표면적 이유는 그녀가 꾼 꿈이지만, 그 꿈은 그녀의 심연에 각인된 폭력의 흔적의 발현일 뿐이었다.


책을 덮고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영혜가 폭력의 피해자를 대변한다고 쳐도, 그녀의 반응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한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결국 폭력의 피해자가 자기자신에게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 같은 인상이 남는다. 자기파괴 역시 폭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혜도 중요하지만, 난 작가가 3개의 이야기의 시점을 달리하여 쓴 이유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나는 그것을, 이 책이 폭력의 피해자의 가슴 아픈 독백으로 남지 않고 그 주위 사람들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의 시선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려는 숨은 의도로 해석했다.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손과 발로써, 마음을 담은 관심으로써, 공감함으로써, 먼저 다다감으로써, 상처 입은 영혼들을 도와주는 것.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당부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36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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