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6
토마스 만 저자, 홍성광 역자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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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문의 몰락, 그리고 그것의 의미

토마스 만 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천 페이지를 빼곡히 수놓은 문자들은 무덤덤하게도 한 가문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1877년 열네 살의 나이에 티푸스로 죽은 마지막 아들 하노에 이르기까지, 사 대에 걸쳐 진행된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 작품은 하노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었던 1835년, 하노의 증조할아버지 요한 부덴브로크 1세의 말년을 비추면서 문을 연다. 

그들은 최근에 근사한 저택을 새로 구입했다. 경사였다. 사업이 잘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어떤 가시적인 열매는 이어지는 일의 내리막길과 종종 맞물리며 나타나는 법. 표면적으로는 기뻐해야 합당할 일 앞에서도 당사자들은 마음 어딘가에 어둡고 묵직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게 똬리를 틀고 있음을 느끼며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게 된다. 기쁨이라는 껍질을 벗기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먹어선 안 되는 몰락이라는 이름의 사탕. 작가 토마스 만은 소설의 첫 장면부터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이중적인 톤을 탁월하게 묘사하며 긴장을 유지한다. 따라서 독자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이게 경사인지 아니면 어떤 일의 복선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그랬다. 게다가 나는 어렵고 잘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조차 받은 나머지 잠시 다른 책을 손에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 작품의 부제 ‘한 가문의 몰락’를 다시 찬찬히 읽게 되었고, 갑자기 머리에 뭐라도 세게 맞은 것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가시적인 경사의 표면보다는 그 어두운 몰락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티 나지 않게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곤조곤 이런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기운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 기운의 정체는 알다시피 몰락이다. 이 책은 몰락의 냄새가 나는 작품인 것이다.

몰락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덴브로크 가문에 큰 재앙이 들이닥친 적은 없었다. 천재지변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삼 대에 걸쳐 가문의 사업을 장남이 성공적으로 계승했다. 요한 부덴브로크 1세, 그의 아들 요한 부덴브로크 2세, 그리고 그의 아들 토마스 부덴브로크로 이어지는, 규모가 꽤 큰 국가적인 사업은 큰 어려움 없이 사십 년 이상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아래위로 굴곡을 그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부덴브로크 가문은 파산에 이른 적도, 불법을 행한 적도, 불의한 일에 연루되어 큰 사기를 당한 적도 없었다. 작품의 마지막, 부덴브로크 가의 마지막 아들인 하노 부덴브로크의 죽음으로 인해 당시 살아남은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이전과는 다른 삶을 맞이해야 했지만, 그 누구도 빈손으로 거리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은 기존의 몰락이라는 이미지에서 거품을 다 빼고 남은 알짜배기 몰락이었다. 파산은 몰락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였다. 몰락의 기운은 부덴브로크 가에 조용히 숨 쉬듯 자연스럽게 찾아왔고 사십여 년 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성실하게 제할일을 다했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사업과 가문의 중추인 네 명의 부덴브로크를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감으로써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토마스 만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살아 숨 쉰다고 하는 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이자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두어 달 전에 읽었던 ‘토니오 크뢰거’에서 느꼈던 삶과 예술,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 가운데서 고뇌하는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 속에서도, 비록 ‘토니오 크뢰거’에서처럼 명징하지는 않지만, 다뤄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토니오 크뢰거’가 나오기 위한 전신이라 볼 수 있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 가문으로 대표되는 ‘삶과 시민성’, 어머니 가문으로 대표되는 ‘예술과 예술성’,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그래서 두 진영 모두에 속하면서도 모두에 속하지 못한 중간인으로 평생을 고뇌했던 토마스 만. 그가 ‘토니오 크뢰거’에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 ‘시민성과 예술성을 모두 겸비하는 인물’로 성장하도록 플롯을 짰던 것도 어쩌면 바로 전 작품, 즉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 자신이 그려놓은 몰락이라는 이름의 알을 깸과 동시에 그 세상을 파괴하고 마침내 새롭게 태어나고자 했던 그의 결연한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토니오 크뢰거가 있기 위해선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품 전체에 진하게 배인 몰락의 냄새에 취한 채 작품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잔상에 의지하여 괜스레 몰락의 한숨을 쉬거나 몰락의 입김을 불어낼 필요가 없다. 궁극적으로는 이것도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일부일 뿐이니까. 몰락은 몰락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작품에서 조화와 합일로 나아가게 되니까. 휴, 다행이란 생각이다.

그렇다. ‘토니오 크뢰거’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토마스 만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중심 주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중심 주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삶과 예술,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생겨나는 이율배반성이다. 이것은 양부모의 혈통으로 대변되기도 하는 특징이기에 특별히 토마스 만에게는 존재론적인 모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깊은 고뇌를 어찌 공감할 수 있겠냐마는, 이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을 며칠간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맛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불어 마음 깊숙한 고뇌를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울 따름이며 진정 부러운 마음이 앞선다.

사람은 모두가 다르듯 삼 대에 걸친 부덴브로크 가의 사업을 대표했던 세 명의 부덴브로크들 역시 각자 개성이 강했다. 그러나 그 개성이라는 것도 그 시대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특히 상류층 가문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높지만 좁은 세상 속에 길들여진 구체제에 깊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 초반주에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하는 요한 부덴브로크 1세를 몰락의 전신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신은 아마도 몰락의 냄새조차 맡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고 합리적이었으며 자부심도 대단했다. 별 어려움을 모른 채 자식들에게 든든한 돈과 명예를 남기고 죽어간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이룩한 성공은 거침이 없었던 것 같고, 그건 다분히 시대의 조류를 잘 만났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하여, 요한 부덴브로크 2세는 그의 아버지가 가졌던 합리적인 시민성과 더불어 기독교 정신이 깃든 경건함이 가미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 경건함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다. 특히 군중이 귀족을 포함한 상류층에 대항하여 선거권에 대한 폭동을 일으켰을 때 그는 중재자의 역할을 해내어 폭동의 불씨를 사그라지게 만들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자신이 속한 신분의 특권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행해졌던 일이다. 그가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경건한 자였다면 신분제로 인한 차별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행보를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신분의 유지를 위해 끝까지 싸웠고 그 유지야말로 질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았던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어땠을까? 그는 일찍이 결혼 문제에서도 결혼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하는 게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을까?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규모 있는 사업에 대한 부담감이 막중했던 탓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는 마흔여덟이란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는데, 죽기 직전으로 치달을수록 그의 진정한 자아가 긴 잠에서 깨어 나와 그는 괴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른 나이부터 대학도 가지 않고 사업을 물려받아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일을 진행시켰고 시의원에도 당선되어 가문의 위상을 높였으며 할아버지가 구입했던 집보다 더 크고 으리으리한 집을 새로 건축하여 성공의 정점을 찍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간 진정한 자아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페르소나를 뚫고 나오게 되어 있는 법. 그 시기가 토마스 부덴브로크에게는 죽기 얼마 전이었을 뿐이다. 그는 마지막에 와서야 스스로를 성찰했다. 자신이 이룩해놓은 일들과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 모습이 모두 가면이자 연기인 것만 같다고 느꼈다. 회의가 몰려왔다. 비록 이튿날 다시 관성에 몸을 맡기듯 그동안 자신을 일구어왔던 시민성에 쉽사리 굴복을 당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저자 토마스 만은 이 부분을 중요하게 서술하고 있다. 마치 요한 부덴브로크 1세로부터 이어져온 몰락의 기운이 토마스 부덴브로크가 경험한 그 특별한 하루에서 마침내 분출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그 후 치통 때문에 발치를 하러 치과에 다녀오는 길에 쓰러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품위를 유지한답시고 외모 치장에 점점 더 시간을 할애하던 그였는데, 길거리에서 흉한 모습으로 고꾸러짐으로써 수치를 당했고, 그건 곧장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참으로 허망한 마지막이었다.

토마스 부덴브로크의 죽음으로 몰락이 멈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몰락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십 대 청소년이 된 어린 아들 하노 부덴브로크의 죽음이 보란 듯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 대에 걸친 몰락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 대에 걸친 몰락을 따라가며 눈에 띄는 사실 한 가지는 점진적인 인물의 변화다. 저자 토마스 만의 의도가 느껴진다. 요한 부덴브로크 1세에게는 철학이랄까 예술이랄까 하는 자신을 성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들 요한 부덴브로크 2세에게는 그것이 기독교적인 경건함으로 메워지는가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가 구현한 시민성은 신분제 유지에 그치고 말았다. 토마스 부덴브로크에 와서는 꽤 다층적인 모습이 보인다. 작품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성이 표면적으로는 잘 구현되고 있었지만, 내면에서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토니오 크뢰거에게서 나타난 예술성이 토마스 부덴브로크에게서는 자신을 성찰하는 철학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예술이든 철학이든 시민성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건 고무적인 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물론 토마스 역시 결국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한편, 마지막 비운의 아들 하노 부덴브로크는 태생부터가 시민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토니오 크뢰거의 극한이 어린 나이에 투영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사업에는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학생 신분으로 당연했던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다. 아버지 토마스 부덴브로크에게선 냉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을 삶의 도피처로 삼으며 속으로 고뇌를 삼키다가 죽음과 화해를 해버린 인물이었다. 이렇게 보면 요한 부덴브로크 1세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성공을 견인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민성이라는 가치는 요한 부덴브로크 2세와 토마스 부덴브로크를 거쳐 하노 부덴브로크에 이르러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다. 하노 부덴브로크의 죽음이 조금 과하게 그려졌다는 인상이 강하긴 하지만, 토마스 만은 사 대에 걸친 가문의 몰락을 이러한 시민성의 소멸 (혹은 파멸)로 설명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과연 이 파멸은 그런데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시민성을 신분제나 특권 혹은 기득권과 같은 범주로 보고 예술성을 예술이나 철학 혹은 종교나 성찰과 같은 범주로 본다면, 토마스 만은 시민성에 저항하는 것이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인간 스스로의 성찰로 이어진다고 본 것 같다. 그가 고발하고 청산해야 할 대상은 시민성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질서 (?)였던 것이다. 사람을 옭아매고 가두어 옹졸하고 편협한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무언의 힘. 안정감과 특권의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그 무엇. 반면, 성찰로 이어지는 예술이나 철학은 보다 인간다운 그 무엇이며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대비된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토마스 만의 고뇌를 공감하게 된다. 그러한 고뇌 가운데서 이렇게 훌륭한 문학작품을 만들어낸 그의 예술성은 아마도 그가 마침내 얻은 자유와 승리의 열매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면 충분하지 않냐고, 되물으면서.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2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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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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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기억과 집착이 만든 섬


모니카 마론 저, ‘슬픈 짐승’을 읽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 낮은 곳에서 용기 내어 나선 길. 그 길 위에서 좋은 길잡이를 만난다는 건 반가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설 즈음, 마치 사춘기를 다시 시작하듯 발걸음을 뗀 독서 여정에서 나에게 신형철은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다. 약 2년에 걸쳐 그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추천한 작품 중 열 권을 읽어 오면서 어느새 내 안에선 조용히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겨 버렸고, 급기야 나는 책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추천도서 이외에도 그가 각 꼭지에서 다룬 작품 중 마음에 와 닿았던 것부터 하나씩 기회가 되는 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도 그 새로운 여정에서 만난 작품 중 하나다. 아마도 신형철이라는 길잡이를 못 만났다면 평생 내 손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형철은 1부 ‘그녀, 슬픔의 식민지’라는 꼭지에서 이 작품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자기 나이도 잘 기억하지 못할 만큼 처절하게 섬이 되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건 단순히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거나 기억상실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기억도 무한히 반복해서 되새기면 변형이 되는 법. 확실한 것은 점점 사라지고,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혹은 무엇이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 무엇이 일어나길 바랐던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묘연해지게 되는 것이다. 기억이 집착을 만나면 환영이 되는 이유도 아마 이런 기작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과거에 경험했던 불꽃같던 사랑을 조금씩 기억해낸다. 부정확하고 불연속적인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녀의 독백들. 기억의 파편 하나하나에는 슬픔이 진득하게 배어있고, 그 슬픔은 서서히 그녀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수십 년 전 이야기 속에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는 그녀. 집착이라는 소름 돋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할 만큼 그녀는 오늘도 프란츠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의 이야기가 처절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프란츠도 그녀도 각각 가정을 가진 상태에서 만나는 은밀한 관계였기 때문이고, 보다 거시적인 이유는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모두 ‘기이한 시대’를 거치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눠진 독일. 작가 모니카 마론은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다시 통일된 독일. 그녀는 한때 서독으로 이주해 있다가 통일이 된 이후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작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시대가 작가를 통과하면 작품이 되는 법. 그 ‘기이한 시대’를 모두 통과한 모니카 마론은 한 평범한 서독 출신의 남자와 한 평범한 동독 출신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그 기이한 시대가 남긴 흔적과 상처를 평범한 사랑과 집착, 불안과 기다림, 그리고 슬픔이라는 단어로 응축해낸다. 마치 거대한 역사가 결국 스며드는 곳도 바로 우리네 평범한 일상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작가는 소설 속의 ‘나’를 기이하지만 평범한, 그러나 처절한 슬픔 속에 잠기게 한다. 섬이 되게 한다. 신형철은 이를 ‘식민지’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말은 소설 속 ‘나’가 프란츠를 만나고 그녀 안에 꿈틀거리던 사랑을 해방시킨 말이기도 하다. 그녀가 프란츠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녀 안에 있던 사랑이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행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기이한 시대’가 끝나던 무렵이었다.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사랑을 죄수로 만들었고, 통일이 그 종신형 죄수로 하여금 감옥을 부수고 나오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방으로 인해 만난 사랑도 결국엔 헤어짐으로 끝나고, 그녀에게 남은 건 오로지 슬픔뿐이었다. 그녀는 책의 마지막에서 프란츠와 함께 누워있곤 했던 침대에 크고 작은 짐승들과 함께 눕는다. 그녀의 슬픔은 환영까지 불러온 것이다.

읽고 나면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비록 강하진 않지만 오래 남는 작품이다. 저자의 글쓰기에서 나는 저자가 처한 시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나를 통과하면서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고 책을 덮으며 조용히 생각하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6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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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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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프리모 레비 저,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2차 세계대전’ 하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우슈비츠’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단어는 반지성적인 우생학에 기반하여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신봉했던 ‘히틀러’나 ‘나치’가 아닌, 그들에 의해 실행된 유대인 대학살, 이른바 ‘홀로 코스트’이다. 악의 발현, 아니 악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여전히 충분하지 못한 것 같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아닌, 그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희생당한 유대인들이 왜 나에겐 먼저 떠오르는 것일까. 유럽 각지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은 하루아침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보다 못한 고깃덩어리로 전락했고, 엄청난 수가 도살되듯 강제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나에게 아우슈비츠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피의 심연이다. 또한, 그곳은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가장 명징하게 보여준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그 아유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저자는 이를 ‘운이 좋아서’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이 책의 첫 문장 첫 단어로 등장한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의 귀중한 수기인 셈이다. 허구는 하나도 없다. 모두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다. 역사책으로 배우는 아유슈비츠 수용소의 역사적 존재와 기능을 거뜬히 넘어서 우린 죽음의 집, 비인간화의 집, 즉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실상을 이 책을 통해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저자의 절제된 필체는 애써 참았던 울분과 끝이 보이지 않는 허망함과 먹먹함에 끝내 불을 지르고야 만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깊은 절망이 덤덤하게 기술되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될 때 느껴지는 초탈함일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문자화 되면서 감정이 소진되어 버린 것일까. 아우슈비츠가 어떤 곳인지 이미 알고 있는 독자에겐 그 끔찍한 실상을 무신경한 것처럼 써 내려간 부분이 오히려 날카로운 비수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자신이 경험했던 실제 감옥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지만, 그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의 감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비록 도스토옙스키는 억울한 이유로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으나, 감옥은 어디까지나 감옥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감옥은 범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새 터전이다. 그러나 수용소는 범죄자이든 아니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 철저히 그 수용소를 짓고 사람들을 가두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다루는 인간 말종들의 적이라면 누구나 (특히 유대인들) 강제로 수용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혐오와 차별과 배제가 권력이라는 갑옷을 입고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르는 장소가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산둥 수용소’의 저자이자 저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제자였던 랭던 길키도 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거주할 때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수용소로 보내졌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산둥 수용소’ 작품 역시 그의 수용소 생활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수기인 셈이다. 그 작품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책의 부제가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라는 것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기인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와 비교하면 그 타격이 약화되는 감이 없지 않다. 철학과 신학에 기반한 엘리트 학자의 눈에 비친 수용소 사람들에 대한 분석이 위주가 되었다는 건 저자 랭던 길키에게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정신이 남아있었다는 반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의 경험은 보다 직설적이고 일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그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책의 제목이 ‘이것이 인간인가’이지만, 이성과 논리보다는 훨씬 더 깊고 인간의 중심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건드리며 독자 눈과 마음을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이 어떤 좁은 장소에 밀집되고 격리되었을 때, 그래서 장기간 외부와 차단되었을 때, 너무나 당연하던 의식주 문제가 죽고 사는 문제가 되었을 때, 과연 인간이 어떤 존재로 바뀔 수 있는지는 실화를 기반한 위의 세 작품 말고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100% 허구이지만 인간의 본성을 깊게 파고들어 그 민낯을 생생하게 까발린 역할은 위의 세 작품과 비슷한 정도로 톡톡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는 허구일 뿐이다. 

그렇다. 프리모 레비의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는 실화이며, 운 좋게 죽다 살아남은 자의 생생한 수기이며, 무엇보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간의 잔인함이 극대화된 장소로부터의 회고록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비록 살아남아 이 책을 쓰고 40년에 걸쳐 증언을 해왔지만, 그의 불안과 절망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깊어졌던 것 같다. 1919년생인 그가 68세가 되던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위에 언급한,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그 어떤 책들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까닭은. 살아남은 자의 자살. 한참 생각에 잠겼던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다. 그가 말하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비단 히틀러와 나치 세력들만을 향하지 않게 된다. 그가 자살을 선택했던 이유. 비인간화의 극치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냈던 생존자가 최후로 선택한 행동이 스스로 소중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니! 그리고 나는 히틀러와 나치를 넘어 프리모 레비까지 포함하여, 오늘 접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더 큰 범주에서 묻게 된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돌베개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1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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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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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해도, 보지 못해도

한강 저, ‘희랍어 시간’을 읽고

불연속성, 불친절함,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의식 저 아래에서 퍼 올린 조각난 단상들,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드는 상처의 깊은 흔적과 그 기억의 파편들, 그것들을 활자로 대면하면서 생경하게 느껴지는 강한 이질감,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거부할 수 없는 불편함.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다. 때론 숨이 막혀서, 때론 내 심장이 귓가에서 하도 쿵쾅대서 잠시라도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어둡고 무겁다. 공간으로 말하자면 인적이 드문 시골, 시간으로 말하자면, 곧 해가 뜰 새벽 다섯 시 정도가 아니라 가장 어둡고 가장 적막한 새벽 두세 시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간 동이 트겠지만 당분간은 도저히 아무런 희망의 씨앗도 발견할 수 없는 시간. 밤이지만 최은영이 표현한 ‘밝은 밤’이 아닌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나는 감싸 지지 않을 슬픔과 치유되지 않을 상처로 어두운 절망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또한, 그녀의 작품들은 툭툭 끊어지는 불친절한 묘사들이 저마다 깊은 우물을 머금고서 활자화되어 있다. 정유정의 휘몰아치는 압도적인 서사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사보다는 묘사에 중점을 두고, 말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목소리를 부여하여 말하게 하는 정적인 작품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이 머금고 있는 그 어둡고 무거운 것들을 우리가 쉽게 내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것들은 한낱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고 말 법한 장치나 기법 정도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모든 독자들의 내면에,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내면 깊은 곳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인간 본성과 심리를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여주는 효과를 내며, 마치 분절된 꿈의 조각처럼, 그래서 날 것 그대로의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 탁월하다. 모든 사람들 안에 내재되어 있지만 한결같이 꺼내 보려 하지 않는 그 무엇. 어쩌면 한강 작가의 작품이 그 유명세와는 달리 읽기 어려운 건 '나'이지만 내가 아니고 싶은 혹은 '나'이면 안 되는 모습들, 그 부서지고 의도적으로 잊힌 모습들이 문득 우리들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희랍어 시간’을 읽는 동안 차라리 급박한 이야기의 전개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말을 잃은 한 여자와 서서히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 깊은 상처가 낸 치유되지 않은 두 과거와 그것들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두 현재가 희랍어 강좌를 매개로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야기. 생명과도 같은 안경을 떨어뜨린 밤, 말을 잃은 여자의 도움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따라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남자. 말을 잃었기에 몸을 움직여 기척을 내야 했고 남자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던 여자. 그날 밤 이 두 사람 사이엔 어떤 전류가 흐르고 있었을까. 남자의 작은 방 안에 흐르는 공기 속엔 서로에 대한 공감과 치유의 냄새가 섞여있지 않았을까.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시간은 어느덧 새벽 다섯 시가 되어 곧 동이 터오를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한강 작가는 둘 사이의 결말에 대해선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작품을 끝내버리지만, 나는 자연스레 바라게 된다. 서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아가 서로의 상처로 말미암아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치유가 되어줄 수 있기를. 여자는 말을 되찾고, 남자는 유전적인 시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빛을 볼 수 있게 되길.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설사 여자가 다시 말을 찾지 못해도, 남자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어도 서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현재의 삶에서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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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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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 아닌 밝은 밤

최은영 저, ‘밝은 밤’을 읽고

서양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며, 한국어로 소설 쓰길 갈망하고 또 실제로 준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 소설의 지형과 흐름을 대략적이라도 파악하는 일은 꼭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 작업을 2년째 틈나는 대로 해오고 있다. 그래 봤자 지금처럼 여러 가지가 제한된 환경에서는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 몇 개씩 읽어나가는 일에 불과하지만, 그런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낼 때마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주제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항상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남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고전을 좋아하고 그 깊은 맛을 사랑하는 내 취향 때문이리라, 하고 추측할 뿐이다.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나의 또 다른 취향 역시 그 시작이 무엇인지 언제부터인지 묘연하다. 아마도 번뜩이는 기발함과 빠른 속도보다는 뻔함 속에서 느리게 심오함을 이끌어내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알아채지 못하는 진리를 상기시키며,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특정한 서사를 통해 드러내어 넌지시 깊은 곳을 짚어내는 건 오로지 장편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최은영의 최신작 ‘밝은 밤’을 고른 이유 역시 이런 나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전의 반열에 올릴 정도의 무게는 아쉽게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처음 만난 최은영 작가의 스토리텔링과 필체는 다시 읽고 싶어질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일상에 녹아든 잔잔한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편안한 톤으로 3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작년에 이 작품이 큰 상을 받았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배경으로 묵직한 주제까지도 건드리고 있었고, 시대를 뛰어넘어 21세기 현재 우리들의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이를테면,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제강점기에서 6.25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을 다루는 동시에, 무려 4대 (증조할머니까지)를 넘나드는 두 가족 여성들의 상실과 아픔을 과하지도 않고 얄팍하지도 않게 세련된 필체로 조곤조곤 이야기해준다. 중간중간 멋진 문장들이 알알이 박혀있음도 이 작품을 챙겨봐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는 소수자의 무력함, 함부로 표출할 수 없이 속으로 묵혀야만 했던 그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참고 견디며 살아낸 눈물 젖은 수많은 나날들이 여성의 시선에 무게중심을 두고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성 독자임에도 나는 그 시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며, 시대적 한과 고질적인 인식론적 제도적 폭력의 힘을 재고해볼 수 있었다.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화자 지연 역시 여성이자 이혼녀이자 우울증 환자로서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일종의 미안함도 느꼈다. 그리고 전체 내용이 정적이고 우울한 편에 속하지만 그 분위기에 억눌리지 않고 삶을 개척해나가고 극복해나가는 등장인물들을 가슴 깊이 응원했다. 슬프지만 감싸지는 슬픔, 상처이지만 치유되는 상처, 밤이지만 어두운 밤이 아닌 밝은 밤. 제목의 의미를 알 듯하다. 상실을 바라보는 최은영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남성보다는 여성 독자들에게, 그리고 한국 역사를 잘 아는 한국인들에게 훨씬 더 큰 공감을 자아낼 작품이지만, 나는 남성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독을 권한다. 최은영 작가의 다음 작품이 장편이라면 꼭 챙겨볼 작정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0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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