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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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햇살에 비친 일상의 긴 그림자

가즈오 이시구로 저, ‘녹턴’을 읽고
비록 나지막하지만, 다섯 편으로 구성된 이 작은 단편집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 하나다. 다섯 내러티브, 다섯 내레이터, 그리고 한 명의 작가. 이 엄연한 사실을 주지하기라도 하듯, 다섯 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음색과 같은 톤으로 채색되어 있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목소리다. 묻히기 쉬운, 마치 읊조리는 듯한 그의 작은 목소리를 알아챈다는 것은 곧 이 작품을 제대로 읽어낸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 생각한다. 그렇다.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는다는 건 평범한 일상에 녹아든,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우수가 깃든,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안다는 것이다.
나의 가즈오 이시구로 전집 읽기의 마지막 정거장인 이 작품은 부제에서도 밝히고 있듯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이다. 때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통해, 때론 노래하는 사람, 때론 음악 감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다섯 가지 이야기는 모두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비춘다.
특히 내레이터가 음악가인 경우, 이야기는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의 삶을 조명한다. 여기서 무대 아래의 삶이란 쉬는 시간이라든지 휴일의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대 위에 오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음악인들, 다시 말해 유명인의 대열에 끼지 못한, 성공하지 못했거나 이미 그 시기를 놓쳐버린 음악인들의 일상을 통칭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이름을 알린 음악인보다는 그렇지 않은 음악인들이 현실에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이 작품은 대부분의 음악인의 현실적인 일상을 조명한다고 볼 수 있다. 무명 음악인의 평범한 일상의 단면을 정오의 강한 햇빛이 아닌, 비스듬히 비치는 늦은 오후의 햇살로 조명한다고나 할까. 그로 인해 생기는 긴 그림자는 작품을 읽고 난 이후에 남는 여운이 된다.
각 단편은 이렇다 할 위기나 사건의 부재 위에서 잔잔하게 진행된다. 비루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훌륭하다거나 특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고는 있어 특별한 어려움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정적이라거나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 충만함이나 성취감보다는 결핍과 공허가 일상을 가득 메우는 삶. 차라리 형편없는 실력의 음악인이었더라면 그들의 빈자리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으리라. 차라리 그들에게 여전히 젊음이 허락되었더라면 그들의 여백엔 적어도 우수가 깃들진 않았으리라.
절반도 남지 않은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음악인들. 한때 꿈이었던 삶을 뒤로하고, 여전히 미련을 가슴 한 편에 간직한 채 그 삶 근처에서 맴돌며 살아가고 있는 음악인들. 왜 나는 그들의 삶에서 내 인생을 읽어내고 아파하며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되는 걸까. 왜 나는 어느덧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내 나이를 곱씹으며 텅 빈 공간을 응시하게 되는 걸까.
밋밋하지만 그게 바로 내 삶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나는 조금은 우수에 차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는 그들을 향해 마음 담아 응원하게 된다. 무대 아래야말로 일상을 이루는 베이스캠프이며, 내가 나와 동지와 세상과 연대하는 곳 또한 다름 아닌 바로 이곳, 나의 허름한 일상임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견딤의 미학 가운데 성실히 오늘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동지들아, 화이팅.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57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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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 - 사도신경에 담긴 그리스도교 신앙 해설
김진혁 지음 / 복있는사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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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에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김진혁 저,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를 읽고




저자 김진혁의 글을 처음 만난 건 그가 해제를 담당했고 칼 바르트의 절친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이 쓴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에서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이자 일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 책을 놓칠 수 없었다. 그 책을 통해 문학 속에 녹아든 신학을 맛볼 수 있었으며, 문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 아닐까 하는 현재의 내 지론에도 이르게 되었다. 특히 김진혁의 해제는 도스토옙스키를 해제한 투르나이젠에 대한 해제, 혹은 두 거인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해제라고 볼 수 있기에 제삼자의 관점에서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두 번째로 만난 책은 C. S. 루이스의 삶과 사상을 훑어보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상상력, 이성, 신앙의 조화를 촉구하는 ‘순전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물론 루이스의 작품도 대부분을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 김진혁의 글은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을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잘 정돈되고 겸손하며 잘 써진 글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나는 김진혁이 쓴 두 책에서 맛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는 그의 최신작인 이 책,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에서 정점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면 사도신경 주해인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은 부제에서도 밝히고 있듯 사도신경 그 자체에 대한 해설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기독교 신앙을 해설한다. 조직신학자이자 철학 박사 학위 소유자답게 저자 김진혁의 글은 사도신경의 각 조항에 담긴 교리를 신학의 언어만이 아닌 철학의 언어와 개념을 동원하여 설명한다. 신학에 철학까지 가세했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신학 책 한두 권이라도 읽어본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이 상당히 쉽게 써졌고 가독성이 높으며 저자의 철학적인 관점과 해석 덕분에 오히려 다른 신학 책보다 더 풍성하다는 느낌은 물론 그것이 만들어낸 깊이까지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2021년 우드베리 연구소에서 ‘선교 현장을 위한 기독교 교리 해설’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연속 강의를 보완하여 엮었다고 한다. 교리를 기본적으로 다루되 신앙의 실천적 지평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책 소개가 내 시선을 끌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사도신경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역사적, 교리적인 지식을 넘어서 전반적인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신비에 대해 다시금 묵상할 수 있었고,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어야 할 바를 핵심적으로 요약한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처럼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사도신경이 가지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통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전 생애를 걸겠다는 공동체적 고백이 역사와 전통과 함께 오롯이 담겨있다는 점은 여러 교단의 신학을 초월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 김진혁은 특정 교단 신학을 변증하듯 사도신경을 풀어내지도 않을뿐더러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개성 있는 생각과 주장을 조심하며 글을 써 나간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관심 있는 비기독교인이 읽어도 치우치지 않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처음으로 기독교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기독교인에게는 입문서로써 손색이 없을 것이다.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은 사도신경을 읽어 내려가는 순서를 따르며 기독교 교리와 전통적인 신앙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1부 하나님, 2부 예수 그리스도, 3부 사람, 4부 성령과 교회, 5부 죄 사함, 그리고 6부 종말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 등의 조직신학적 주제를 가볍게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유일신론, 삼위일체론에 대한 부분도 좋았지만, 성자의 자기 내어주심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읽어내는 전복적인 해석을 읽을 때 나는 묵직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창조와 새 창조의 대비가 아담과 그리스도로 표현되듯, 하와의 첫 불순종에 대비되는 마리아의 순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해석도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또한,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나 개척자가 아니라, 자신을 만드시고 자신에게 말을 건네며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반응함으로써 자아를 형성해 가는 존재”라는 문장을 읽을 땐 숨을 멈추고 책을 덮고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수동태적’ 존재”가 요구된다는 문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죄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궁극적인 기준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아니라 ‘성육신한’ 말씀이어야 한다는 문장 역시 나를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거룩함’이 요구하는 ‘구분됨’과 ‘보편성’이 빚어낸 ‘개방성’ 속에서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이를 현실화하는 선교적 공동체로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는 문장이나, “공동체에 현존하는 성령은 ‘다원성과 자율성’의 원천”이라는 문장을 접했을 땐 현재 한국 교회가 처한 암담함이 떠올라 가슴 한 편이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사건으로서의 구원과 과정으로서의 구원의 의미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수동적 위치에 처한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능동적인 태도가 요구된다는 부분에서 균형 잡힌 칭의의 논리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의 핵심 내용이 “죽음 이후 그리스도인이 경험할 진정한 피안은 단지 천국이 아닌 하나님 자체”라는 부분을 읽을 땐 전율이 돋았다. 부활과 영생 부분에 있어서도 삼위 하나님의 교제하는 삶에 영원히 초청되어 함께 누리는 것이 바로 그것의 의미라는 문장을 접하고 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이 책 덕분에 매주마다 참석하는 교회 예배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교리와 그 교리를 이루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점검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나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가 회복되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다. 아무리 문학 책이 좋지만, 신학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아닌가 싶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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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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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시로 번역하기


크리스티앙 보뱅 저, ‘환희의 인간’을 읽고

모든 단어와 문장이 반짝거리는 글. 크리스티앙 보뱅에겐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표현도 식상하다.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서 보뱅은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인다. 왜 여태까지 그를 몰랐을까. 이제서라도 그를 알고 그의 글을 읽게 된 걸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한편으론 두렵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작가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지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과연 내 삶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 것인가, 하고 묻게 된다. 괜한 죄책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나는 내가 모르는 작가들의 글을 찾아 나서는 글 사냥꾼이 되고 싶은가 보다.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며 문학을 가까이하게 되어 참 다행이다. 문학은 내 삶의 여백을 채운다.

시인의 입김이 녹아있는 에세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러나 결코 과하지 않은 단어의 선별은 글의 정확성은 물론 글의 아름다움까지 담아낸다. 그동안 꽤 많은 에세이를 읽어왔지만 대부분의 에세이는 감상적인 측면만이 강조된 채 정확성이 결여되어 아름다움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꽤 많은 경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내 마음에 남는 건 동정심이었다. 그런 글은 에세이라기보다는 호소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감정 팔이에 지나지 않는, 한두 페이지로 충분하지만 열 페이지로 늘여 쓴 글. 상투적인 비유와 자기 연민의 목소리가 진하게 묻어나 글 속에 타자나 삶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비추는 에세이는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독자에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보뱅의 글은 다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랄까. 그의 글은 독백으로 끝나고 마는, 그래서 저자의 목소리가 닿는 데까지만 영향력을 미치는 글에 속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오히려 소리 없이 멀리 퍼져나간다. 한낮에 외치는 고함소리가 아니라 어두운 밤 잔잔한 빛의 목소리로 독자에게 스며든다. 그렇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어둠을 마침내 극복한 빛의 은은한 목소리. 보뱅의 글이 삶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가 노래하는 삶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기쁨이 아닌, 죽음을 맛보고 그것을 극복한 눈이 깊은 지혜자의 순수한 기쁨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죽음 뒤에 맛보는 삶, 전쟁터에서 돌아온 자가 맞이하는 평범한 일상. 그렇다. 보뱅의 글은 부활을 담지한다. 삶을 다르게 보는 눈을 가지게 된 사람. 하필 그 사람이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보뱅인 것이다!

프랑스 저널 ‘렉스프레스’에 담긴, 이 작품에 대한 짧은 서평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 여기에 옮겨 본다. 다음과 같다.

| 크리스티앙 보뱅은 어떤 꼬리표로도 가둘 수 없는 작가이다.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첫머리부터 이런 문장을 제시하는 사람의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보뱅식 마법이 있다. 사소한 디테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선택된 단어, 어둠과 죽음 속에서도 이끌어낸 미소와 웃음으로 이루어지는 마법이.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의 작품은 그가 ‘멜랑콜리’라고 이름 붙인 천사와의 투쟁이다. 글쓰기 덕분에, 그는 그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우리 독자들은 그를 믿을 수 있다. |

일상을 시로 번역해내는 보뱅. 무광, 무채색의 평범한 일상에 빛과 색을 입히는, 환희의 인간, 보뱅. 그러나 그가 입히는 빛과 색은 어둠과 죽음을 통과한 깊은 물에서 길어낸 질료로 이루어졌다. 읽어 보라. 그리고 느껴 보라. 그 환희의 순간을. 그 깊은 기쁨과 깊은 순수함을. 그리고 그 가운데 숨어있는 지혜의 조각들을. 혹시 아는가. 당신의 일상이 함께 회복될 수 있을지도.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4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크리스티앙 보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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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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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결핍에서 영원한 충만함을


크리스티앙 보뱅 저, ‘그리움의 정원에서’를 읽고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책이다.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던,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한 여자, 지슬렌을 사랑했던 보뱅의 독백. 그녀를 만나고 그녀가 죽기까지의 16년 동안 보뱅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남자였다고 고백한다. 그가 온종일 하던 진짜 일은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독에 강했던 보뱅을, 오랜 기간 자족한 채로 조용히 혼자 지낼 수 있었던 보뱅을 유일하게 깨운 지슬렌. 보뱅이 가졌던 고독의 힘을 무너뜨리고 무장해제시켜 사랑이라는 세상의 문을 열고 자발적으로 들어가게 했던 그녀. 그는 감사한다. 이 생에 머무르며 현재라는 순간을 사용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바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보뱅은 지슬렌을 사랑했고, 지슬렌을 통해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슬렌이 죽은 후, 그녀가 없다는 결핍을 경험하면서 보뱅은 비로소 모든 곳에서 그녀를 보게 된다. 보뱅에겐 모든 것이었지만 시공간의 한 점에 불과했던 그녀는 육신의 죽음을 뒤로하고 여백이 되어 보뱅의 모든 곳을 채우게 된 것이다. 영원한 결핍이 만들어내는 영원한 충만함. 보뱅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움의 정원에서 마침내 사랑에 다다른 것이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보고, 그녀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듣는다. 보뱅에게 지슬렌은 비로소 삶 전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하다면 언젠간 반드시 겪게 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생각해본다. 나나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언젠가 맞이할 그 불가항력적인 시점을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과연 나도 사랑하는 사람의 여백이 만든 그리움의 정원에서 결핍이 아닌 충만함을 느낄 수 있을까. 지금, 여기에서 나는 더욱더 사랑하며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크리스티앙 보뱅 읽기

1. 작은 파티 드레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pfbid0vikaUguyAZ36eBTvy7XEb9CXNTCErkoWdQx6HrS3AKo34rDmwD24Wma3HqrnEP8vl

2. 그리움의 정원에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pfbid0VZbWpquBDgP1CpnnEBKz4ojrmGhnxRBaq3vKbVJMqc4fnM8k7zPtq5fZeU875Uhrl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46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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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 문학 읽는 그리스도인
이정일 지음 / 예책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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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인생과 신앙의 반려자이자 도우미


이정일 저,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를 읽고


이 책은 전작 (이정일 저,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과 맥을 같이 한다. 저자의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오랜 신앙적 경험을 토대로 문학이 인생과 신앙에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차근차근 친절하게 들려준다. 전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특정한 아홉 편의 문학 작품을 선정하여 그것들을 중심으로 각 장을 구성한 것이다. 


놀랍게도 선정된 아홉 작품은 모두 현대 문학에 속한다. 가장 오래된 작품이 원서로는 1995년 작이다. 현대 문학보다 고전 문학을 더 사랑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지만, 고전을 잘 읽지 않는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춘 저자의 배려가 느껴져 나의 실망은 쉽게 누그러질 수 있었다. 또한 이 사실은 저자가 끊임없이 문학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문학에 대해 조곤조곤 풀어주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저자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공부는 언제나 힘이 있는 법이고 마땅히 칭찬받아야 한다.


문학 박사이자 목사인 저자의 정체성은 이 책을 관통한다. ‘문학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니. 내가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프로 과학자이자 아마추어 문학도,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저자의 세계관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전작에서도 들었던 인상이 이 책에서도 지속된 것을 보면, 저자가 쓴 두 책은 출판사의 기획 의도에 맞춰 써낸 것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된 열매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즉, 이 책은 저자의 생각이 아닌 삶을, 좋은 제안이 아닌 실제 증거를 담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문학과 인생과 신앙, 이 셋의 하모니와 시너지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고 저자와의 소통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다. 누군가는 이 문장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라면 성경을 읽어야지 문학을 왜?, 라는 의문 아닌 의문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다. 이 문장의 방점은 “더”에 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다.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만이 아닌 문학 읽기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함’이라는 디모데후서 3:16-17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나 역시 저자의 메시지에 100% 공감한다. 우린 문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성경을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만 읽어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도 된다. 이는 사실이다. 실제로 성경을 제대로 읽게 되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 모순된 부분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애써 이런 불편한 사실들을 외면하려고 하지 않는 솔직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만 읽어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우리에게 목회자나 신학자와 같은 성경 선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그들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만 읽으면 된다고 경솔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거나, 읽어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문자적으로 수동적으로 읽었거나, 아니면 그저 목사들의 설교에서 인용되는 제한된 본문 정도만을 알고 자신이 성경을 읽고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의 성경 읽기 방법이 늘 우리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말씀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의심하고 질문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끊임없는 흔들림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자. 하나님을 정말 신뢰한다면 우리가 의심과 질문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비치는 과정에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런 면에서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도 크게 무리가 없지 않을까.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성경 읽기와 의심과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 중 성경 선생 역할을 훌륭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 신앙의 성장과정 중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가 육의 양식으로 밥을 매일 먹듯 영의 양식으로 성경을 매일 읽는다면, 우린 자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목회자나 신학자를 찾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풀리지 않고 누적된 여러 문제로 인해 해소되지 않은 답답함을 가진 채 살아가는 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일상이지도 모른다. 바로 이때다. 일상 속에서 언제나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도구.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선생이 되어줄 수 있는 문학. 저자는 책에서 지속적으로 말한다. 문학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충실한 반려자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도록 돕는 훌륭한 도우미라고. 여전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은 독자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예책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4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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