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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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인생을 훑다

신형철 저, ‘인생의 역사’를 읽고

평론이라고 하면 나는 왠지 경직되는 기분을 느낀다. 논문이라는 단어가 과학계에서 가지는 위상과 평론이 문학계에서 가지는 위상이 내겐 엇비슷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평론은 어렵게만 느껴지고, 고난도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시는 어떤가. 소설이 시보다 좀 더 대중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시는 이해하기 위해라기보다는 느끼기 위해 읽는다는 말까지 감안한다면, 나에겐 시 역시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저 너머의 무엇인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든 책은 무려 시에 대한 평론집이다. 시와 평론의 이중창이라… 이 둘의 무게만 생각하면 나는 압사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바로 이 책 저자의 이름이다. 신형철. 믿고 읽어도 되는 그 이름. 여전히 나는 시와 평론은 버겁다고 느낀다. 하지만 신형철의 이름 석 자를 신뢰하기에 나는 그의 신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구매하고 말았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는 시를 신형철은 인생에 빗댄다. 인생도 걸어감과 이어짐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별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우며, 그래서 불쌍하기도 하지만, 또 그래서 고귀하기도 한 우리네 인생을 다룬 작품들을 읽으며 인생을 공부해왔던 신형철은 2016년 한겨레에서 ‘신형철의 격주시화’로 연재했던 스물네 편의 글에 새로 쓰고 또 고쳐 쓴 글 몇 편을 더하여 이 책을 완성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는 그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 담긴 서른 편이 넘는 시들에 인생 그 자체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덕분에 독자인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그가 해석한 인생의 역사를 훑어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를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는 기회라니. 어떤가.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사실 나는 이 책을 펼치고 며칠을 뜸 들인 뒤에야 아끼던 선물 포장지를 뜯는 심정으로 프롤로그를 읽었다. 그 순간 신형철이 쓴 활자는 정확한 펀치가 되어 나를 정통으로 가격했고, 신형철 특유의 힘에 기분 좋게 압도당한 나는 전율했다. 


내가 뜸을 들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 기대가 과장된 나머지 혹시라도 실망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내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력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싶다. 그의 글쓰기는 내게 인문학의 포문을 열어주었고, 산문의 매력에 눈 뜨게 해 주었으며, 문학의 깊고 풍성한 맛을 볼 수 있게 해 준 시작점이 되었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마치 그를 잘 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나는 신형철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이 글은 딱 세 꼭지에 대해 짧은 감상평을 남기면서 전개해볼까 한다. 서른 편이 넘는, 인생을 담은 시가 소개되어 있지만,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혹은 내 인생과 강렬한 교감을 이루었던 세 편의 시라 해도 무방하다.


날 멈추게 하고 숨을 멎게 만든 프롤로그 제목은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이다. 무슨 말인가 갸우뚱하며 마지막 여덟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며 인식의 전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 새를 손으로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 | (26페이지에서 발췌)


이 문장을 읽자마자 내 생각은 아들과 단 둘이 살아냈던 지난 5년으로 돌아갔다. 나는 과연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아들을 잘 보호했던가,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책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 아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나는 과연 나로부터 아들을 보호했었는지, 너무 늦어버린 질문이지만, 묻게 된다. 보호자를 자처하고 감당했던 유일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어버릴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오늘 신형철의 통찰로부터 뒤늦게 알아채버린 탓이다.


감동은 1부 1장으로 연장되었고, 강력한 연타를 맞은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오래된 시인 ‘공무도하가’에 대한 신형철의 해석이다. 먼저 이 짧고 강렬한 시는 다음과 같다.


|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찌할꼬. | (32페이지에서 발췌)

신형철은 이 시에서 운명 혹은 숙명을 읽어낸다. 이 두 단어는 인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단어이지 않을까.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 인생에는 막으려는 힘과 일어나려는 힘이 있다는 것. 아무리 막아도, 일어날 어떤 일은 일어난다는 것. | (34-35페이지에서 발췌)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 꼭지를 마무리한다.

| 상고시가로 함께 묶이는 ‘구지가’나 ‘황조가’와는 달리 ‘공무도하가’만이 언제나 나를 사무치게 한다. ‘나는 내 뜻대로 안 된다. 너도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우리 뜻대로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수천 년 전의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들어본 적 없는 그 먼 노래가 환청처럼 들린다. 나는 백수광부다. 나는 그의 아내다. 나는 곽리자고다. 나는 여옥이다. 나는 인생이다. | (36페이지에서 발췌)


‘머피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언제나 하려는 일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고야 만다는 것. 이는 신형철이 공무도하가에서 읽어낸 것과 다르지 않다. 시공간을 차치하고도 인생이란 그 누구에게도 비슷한 의미로 다가가는 그 무엇인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그 무엇. 마치 모든 게 정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보이지 않는 묵직한 실체. 나 역시 문학이라는 숲에서 거하길 즐기고 그 안에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열매 따먹기 좋아하는 이유도 어찌 보면 인생의 맛을, 그 깊고도 오묘한 맛을 더 알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내게 꽂힌 문장이 담긴 글은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꼭지다.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 131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

이 글을 읽고 잠시 멈칫했던 이유는 누군가를 증오할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증오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가장 증오한다. 그런 나로 살게 만든 당신을 나는 증오한다.’ |


사랑 대신 증오를 대입하고 나니 나는 글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 마음속에 사랑보다 증오가 더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를 사랑하든 증오하든 결국 나는 나 자신을 함께 사랑하고 증오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은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인간의 본성이랄지 운명이랄지에 대해서. 결국 인간은 전적으로 타자를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르시시즘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굴레일 수밖에 없는가, 싶어서 말이다. 


이렇게 세 꼭지에 대한 간단한 감상평을 남기고 나니 결국 나도 인생을, 그 역사를 잠시라도 훑은 기분이다. 착잡해지기도 하고 고요해지기도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젠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자 내일의 어제이므로. 시간이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내가 살아내야 할 순간은 오늘, 바로 지금만이 존재하므로. 


#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https://rtmodel.tistory.com/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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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전율을 느끼다

신형철의 신작, ‘인생의 역사’를 펼치고 며칠을 뜸 들인 뒤 나는 오늘 밤이 되어서야 아끼던 선물 포장지를 뜯는 심정으로 프롤로그를 읽어버리고 말았다. 신형철이 쓴 활자는 정확한 펀치가 되어 나를 정통으로 가격했고, 신형철 특유의 힘에 기분 좋게 압도 당한 나는 전율했다.

내가 뜸을 들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 기대가 과장된 나머지 혹시라도 실망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내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력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싶다. 그의 글쓰기는 내게 인문학의 포문을 열어주었으며, 문학의 깊고 풍성한 맛을 볼 수 있게 해 준 시작점이 되었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마치 그를 잘 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나는 신형철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날 멈추게 하고 숨을 멎게 만든 프롤로그 제목은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이다. 무슨 말인가 갸우뚱하며 마지막 여덟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며 인식의 전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새를 손으로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 (26페이지에서 발췌)

이 문장을 읽자마자 내 생각은 아들과 단 둘이 살아냈던 지난 5년으로 돌아갔다. 나는 과연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아들을 잘 보호했던가,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책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 아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나는 과연 나로부터 아들을 보호했었는지, 너무 늦어버린 질문이지만, 묻게 된다. 보호자를 자처하고 감당했던 유일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어버릴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오늘 신형철의 통찰로부터 뒤늦게 알아채버린 탓이다.

프롤로그만 읽었을 뿐인데 큰일 났다. 앞으로 서른 편의 시를 더 다루며 신형철은 매번 정확한 공격을 해 올 게 뻔한데,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다. 아, 마치 빈털터리가 된 기분이랄까. 그러나 이조차도 나는 황송한 마음이다. 오랜만에 문자의 폭격 다운 폭격을 받을 시간표가 왔고, 이는 (문학과 글쓰기 영역에서) 번데기로부터 성충으로의 변태 과정을 조금이나마 진척시킬 거라고 나는 강하게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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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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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내린 단비처럼 내게 다가온 글쓰기 선생님

안정효 저,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읽고

모든 글에는 글쓴이가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글의 뉘앙스가 달라진다. 글쓴이가 전면에 등장하여 자화자찬이나 연대기 형식의 지루한 자서전을 읊어댄다면 어떤 독자라도 반가워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글쓴이가 거의 드러나지 않은 채 정보만 건조하게 전달하는 글 역시 좋은 글이라 할 수 없다. 에세이의 경우엔 특히 더 그렇다. 글쓴이는 가능한 자신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수위를 지혜롭게 조절해야 한다. 자신만으로 도배해서도, 자신을 죽여서도 안 된다. 한 편의 짧은 글이 아닌 두꺼운 분량의 책이라면 이러한 수위 조절은 더욱 무시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지금까지 내 돈 주고 사서 밑줄 그으며 읽거나 서점에 들러 주의 깊게 훑어본 글쓰기 관련 책은 스무 권도 넘는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남은 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왜일까. 나는 그 이유를 앞서 언급한 글쓴이가 드러난 정도에서 찾는다. 어떤 책 (소수에 해당)은 저자의 유명도가 거의 전부인 경우였고, 또 어떤 책 (대다수에 해당)은 마치 ‘ctrl c & ctrl v’를 한 듯 저마다 비슷한 내용을 정리해놓은 경우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글쓴이가 과도하게 부각된 경우에, 후자는 글쓴이가 사라진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다. 독자로서 전자를 읽은 후엔 ‘저자가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라는 인상만이 남았고, 후자를 읽고 나서는 저자가 누구였는지조차 잊을 만큼 동일한 내용의 반복에 진저리를 치며 정독하지 못한 채 대충 훑어보다가 끝내 구입하지 않기로 결정하곤 했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선생이 가르치냐에 따라 학생의 반응과 흡수력이 달라지는 법이다. 이 논리는 앞서 말한 글쓴이가 드러난 정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유명한 선생의 가르침이 그저 그 선생의 영웅담 정도로 요약되는 경우, 그리고 어떤 선생이 가르쳤는지 모를 정도로, 나아가 강의를 듣는 것이 교재만 쳐다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르치는 주체가 증발된 경우가 각각 이에 해당된다. 요컨대 가르치는 선생과 학생 간의 거리, 그리고 저자와 독자 간의 거리는 가르침 혹은 책이 써진 목적 달성과 내용 전달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강의가 아닌 에세이 형식의 글쓰기 책인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이러한 거리가 절묘하게 맞춰진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덕분에 모든 글쓰기 책에서 동일하게 언급하는 항목들, 이를테면 ‘접속사 사용을 줄여라’, ‘~것 사용하지 마라’ 등의 식상하지만 동시에 기본적인 가르침도 내겐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나의 글들을 꺼내어 찬찬히 읽어보며 점검할 수 있었고, 매일 하는 글쓰기에도 적용하려고 실제로 노력하게 되었다. 나는 마치 글쓰기 책을 처음 읽는 아이가 된 듯한 기분까지 느낄 수 있었다. 이론을 현장에 적용하고 실천하기까지 나에겐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게다. 

이 책은 단순한 글쓰기 책이 아니다. 한 단계 더 세부적인 목적을 가진다.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글쓰기 기초에서부터 소설 한 편을 쓰기까지의 여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소설 한 편 쓰기를 평생 소원으로 여기고 있는 나에겐 이 책은 그야말로 ‘때마침 내린 단비’와도 같은 선물이었다. 

저자 안정효는 번역가이자 소설가이다. 평생을 읽고 번역하고 쓴 작가다. 1941년생이라 책에서 든 예문의 출처가 오래된 작품 위주이고, 그래서 1977년생인 내가 모든 글을 쉽게 공감하며 읽어내기엔 약간의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사소한 단점만 제외한다면 나에게 이 책은 최고의 글쓰기 선생 노릇을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덧붙여 나는 글쓰기 기술만 배운 게 아니라 이 책 덕분에 안정효라는 작가에 대해 신뢰를 가지게 되었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동안 미적대던 나의 습작 소설도 덕분에 조금이나마 진도를 더 내는 계기가 되었다. 약 한 달 가량의 정독 기간이 전혀 아까지 않은 책. 글쓰기를 시작하고 살짝 슬럼프에 빠진 동료들에게 조용히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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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중요하다 - 거룩하게, 가치 있게, 슬기롭게
폴 스티븐스.클라이브 림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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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인가, 하나님인가?




폴 스티븐스, 클라이브 림 공저, ‘돈은 중요하다’를 읽고




돈은 신이 아니지만 신과 같은 지위와 능력을 가진다.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대부분의 문제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돈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넘어 마치 구원자의 자리까지 꿰찬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오늘날 현실이다. 




월터 윙크는 그의 탁월한 저서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진짜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폭력’ 임을 간파해내며 사람들 인식 저변에 깔린 ‘구원하는 폭력에 대한 신화’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구원이 마치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막강한 힘 (이라 쓰고 무력, 폭력, 권력이라 읽는다)에 달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폭력의 신적인 힘을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이란 이름의 종교가 가져온 구원의 열매는 무엇인가. 전쟁 결과 나타난 표면적인 결과는 평화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폭력으로 이룩한 평화라니.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을 사용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니. 그렇다. 오늘날 초강대국이자 세계 경찰국가인 미국의 성공은 폭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룩한 세계평화로 인해 그들이 취한 이득은 다름 아닌 경제력이다. 미국의 성공은 군사력뿐만이 아닌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며, 이 두 힘은 서로가 서로를 증폭시키고 견고히 한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이 된다. 폭력과 돈은 소규모 조직폭력배에서부터 초강대국 미국에 이르기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구원하는 폭력’에 이은 ‘구원하는 돈’이라는 신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둘은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최종 심급은 자본이라고 했던가. 권력과 자본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욕망하는 궁극의 힘인 듯해 보인다.




이렇듯 신적인 자리에 오른 돈이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기독교와 만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에 대해선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함축적인 문장으로 표현 가능하다. “두 신, 돈과 하나님 중 어느 신을 섬겨야 하는가?” 이 질문은 비단 비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타의 공인을 받은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살 수는 있어도 돈의 능력을 믿지 않고는 살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셀 수 있는 돈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지만 돈은 믿지 않는다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돈을 벌고 사용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이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돈은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취급되어야 하는 걸까.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 듯한 이 책은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돈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돈은 어디서 왔는지, 기독교인이 돈과 맺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일터 신학자로 잘 알려진 폴 스티븐스와 립 인터내셔널 CEO이자 폴과 같이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에 소속된 클라이브 림이 같이 쓴 책이다. 두 저자는 각각 서양과 동양, 그리고 유복하게 자란 사람과 가난하게 자란 사람을 대변한다. 1, 2 장에서 짤막하게 소개하는 두 개인사를 읽고 나면, 상이한 문화 혹은 상이한 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돈은 인생의 목표이자 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문젯거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3장에서는 폴과 클라이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돈의 정체를 물으며 그것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돈은 물물교환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하는 인류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돈은 처음부터 중립적이기는커녕 종교적, 영적, 정치적인 맥락에서 탄생했으며 성전에서 하나님께만 드려지도록 구별된 존재였다. 돈은 원래부터 거룩한 속성을 띠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참이라면, 오늘날 돈은 에덴동산에 지어진 처음 인간이 그러했듯 과거 어느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저자는 성경에 따르면, 구약 시대에 언급되는 부는 대부분 복으로 제시되는 반면, 신약 시대의 부는 상대적으로 문젯거리로 더 많이 다루어진다고 밝힌다. 시대가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일어난 돈의 타락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돈은 이미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타락의 부작용은 성속 이원론으로 이어졌다.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난해한 이유는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돈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고 속되었으니 절대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되는 걸까. 세금만 황제에게 내고 십일조와 기타 헌금만 하나님께 드리면 되는 걸까. 저자는 이 말씀이 구약이나 그리스 철학, 혹은 동서양의 문화 차이 등에 기반한 성속 이원론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타파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앙과 삶의 철저한 통합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다. 성경은 돈이 물질적 은혜와 영적 은혜를 하나로 묶고, 물질적 영역과 영적 영역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황제는 분리되지도, 하나로 합쳐지지도 않지만, 돈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의 기원에 거룩함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4장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다.




5장에서는 돈보다 더 큰 개념인 자본을 언급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간략히 살펴보면서 그것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고찰하고, 그것의 한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오늘날 가장 큰 하나의 종교로 등극한 듯한 자본주의는 세상 모든 사람이 들이마시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좋든 싫든 우리들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잘하기 위해, 저자는 자끄 엘룰의 주장을 빌려와 개인적 성찰을 통해 돈을 늘 그에 합당한 자리에 두고, 돈을 다루는 것과 관련해서 일관성 있게 행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금은 두루뭉술한 마무리지만, 엘룰의 주장은 이 책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저자 역시 자본주의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성속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 6장에서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돈의 구속 가능성을 보여준다. 착한 주인과 불의한 청지기의 대립 구도로 흔히 알려진 이 난해한 비유에 저자는 전복적인 해석을 가한다.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 사회에서 고리대금업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악한 사람은 청지기가 아니라 오히려 남들에게 돈을 빌려준 뒤 높은 이자를 받아내며 이득을 취했던 주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되면 채무자들이 내야 할 돈을 깎아주었던 청지기는 악한 주인이 행한 불의를 바로잡은 용기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 전복적인 해석은 곧바로 이어지는 누가복음 16장 9절의 예수님의 말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를  한결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돈을 써서 우정을 사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돈을 써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 백성들이 어떻게 돈을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힌트가 된다.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에 천착하고 그것을 숭배하게 되면 모든 것이 물질화, 상품화, 비인격화되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돈을 소유하고자 했던 욕망의 끝엔 돈의 소유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다. 저자는 7장에서 이러한 돈의 사회적 가치와, 돈이 각기 다른 맥락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8장에서 다시 청지기 개념을 주목한다. 6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8장의 소제목 “결국 누구의 돈인가?”는 저자의 결론과 맞닿아 있다. 그 결론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주인이시다. 즉, 돈의 주인도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청지기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맡김 받은 존재다. 셋째,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인은 돈을 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웃을 돕기 위해 돈을 사용해야 한다. 의무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감사에 의해서. 그리고 저자는 청지기 역할은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제자도의 온도계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의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며, 어려운 이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이분법으로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나눔과 구제와 기부 등 일련의 행위로 구성되는 사랑의 실질적 표현일 것이다.




9장에서 저자는 번영신학의 기원과 폐단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번영신학은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짐은 물론이며, 물욕과 자기애를 거짓 거룩함과 거짓 사랑으로 포장하여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열망을 낙관주의, 출세, 물질주의, 웰빙과 결합시켜 만들어낸 빛살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거기엔 돈만 있을 뿐 예수님은 없다. 구원하는 돈의 신화만 있을 뿐 구원자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없다. 그리고 ‘나’만 있을 뿐 타자는 없다. 이 시대 기독교의 위태로운 입지 역시 번영신학의 여파라고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이고, 어쩌면 이는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번영신학에 천착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돈을 신으로 받드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여기서 해방받아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10장에서 저자는 이 책의 결론에 다다른다. 예수님은 영원히 지속되는 부를 묘사하면서 두 가지 수수께끼 같은 표현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 그리고 ‘하늘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두는 것.’ 예수님이 조금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며 저자는 하늘에 투자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우리의 양심, 즉 통일된 시각을 갖는 것. 이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전부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써, 즉 우리 육신의 삶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림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도를 든다. 둘째, 하나님 나라 세계관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방식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융합시키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즉, 성속 이원론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하늘에 투자하기 위해 행할 수 있는 네 가지 구속적 행동을 언급한다. 첫째, 돈을 관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즉, 나눔이다. 둘째, 가난한 이들을 도움으로써. 즉, 자선과 구제다. 셋째, 주님을 위해 주님 안에서 행한 일을 통해. 이는 성속 구분을 떠나 행하는 모든 돕는 일과 관리하는 일을 지칭한다. 넷째, 이 생애에서 그리고 다음 생애에는 더욱, 우리의 궁극적인 보물은 그리스도다. 바울도 고백했듯 우리의 가장 큰 재산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누리라는 말이다. 책의 마지막 단락에서 저자는 “나는 여러분의 삶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투자하라고 여러분을 초대한다”라고 말하면서 책을 마친다. 




저자도 책에서 썼듯이, 돈에 관련된 이야기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목장이나 구역 모임, 혹은 개인 간에서도) 들어보기 힘들다. 책에 써진 바에 따르면, 서양의 경우 서로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어도 수입과 지출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돈에 관련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비밀스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밀스러움은 돈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책의 제목은 ‘돈은 중요하다’이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인 이 문장이 제목으로 충분히 채택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러한 암묵적인 비밀스러움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중요하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라고 말해야 할지 순간 갈등을 거치게 되는 그리스도인이 많으리라 예상한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암암리에 돈을 섬기고 있진 않은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때다. 그리고 저자의 바람대로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돈을 포함하여 우리 모든 것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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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녕 - 눈물 나고 실수 많은 날들에게
김주련 지음 / 선율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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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처럼 다가온 위로와 격려

김주련 저, ‘안녕, 안녕’을 읽고

“안녕”으로 시작해서 “같이 밥 먹어요, 우리”로 끝나는 책. ‘어서 와, 여기 네 자리가 있어’라고 말하는가 하면, ‘말없이 들어주는 말들’로 읽는 이를 가만히 안아주는 책. 아무 걱정 없다며 허세 부리지 않고 ‘걱정이 있지만, 지낼만해’라고 말하면서 읽는 이가 주눅 들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책. 이밖에도 제목만 읽어도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는 열다섯 꼭지의 짧은 이야기가 그림책만이 할 수 있는 여백의 힘을 빌려 가볍고도 묵직하게 독자의 마음에 가 닿는다. 특히 시와 에세이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한 글을 좀처럼 당해내지 못하는 나에게 이 책은 습기를 많이 먹어 무거워진 마음 빨래를 보송보송하게 말려주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미풍처럼 다가왔다. 한국 와서 처음으로 동네서점에서 구입한 책이라 그런 걸까. 출판사와 서점 주인장뿐 아니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저자의 마음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고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열매 가운데에는 지식과 정보도 있지만 위로와 격려도 큰 몫을 차지한다. 지식과 정보는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위로와 격려는 다르다. 전문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일방적으로 전달될 수도 없다. 위로와 격려는 대화와 공감이라는 깊은 우물로부터 길어 올린 소중한 열매이며, 오직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자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귀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받은 선물도 바로 ‘위로와 격려’였다. 가깝게는 이 책 저자로부터, 멀게는 이 책에 소개되는 여러 그림책 저자들로부터, 그리고 모든 거리와 시간을 감싸며 초월하시는 그분으로부터 나는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성서유니온 대표이자 이 책의 저자 김주련은 자칫 텍스트가 가질 수 있는 폭력성과 빡빡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책이 가지는 위압감을 잘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슴에 한 아름 안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림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도구로 다른 저자들의 글을 활용하는데, 그 글은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어른들의 책이 아니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진 그림책이다. 글이 아닌 그림, 텍스트 사이의 여백이 아닌 그림 안에 깃든 풍성한 여백이 이 책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다. 지식과 정보가 아닌 상상력과 경이감이 함께 어우러진 그림책만의 여백이 뜻밖의 위로와 격려를 전달한다. 여러 그림책의 메시지들이 모여 저자만의 묵상, 사유, 경험, 기도를 통과하며 비로소 숙성된 글 모음집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 책에 소개된 그림책 리스트가 나와있다. 세어 보니 마흔넷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마흔네 권의 그림책을 도서관에 가서 하나씩 다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바쁘고 피곤한 현대인의 일상 속에 미풍처럼 스며든 이 책이 모든 독자들 마음에 가 닿아 평안의 통로가 되면 좋겠다.

#선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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