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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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에 이끌리는가

슈테판 츠바이크 저, ‘감정의 혼란’을 읽고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에서 물어야 할 건 ‘언제’이다. 우리는 언제 이성적일까? 

우리는 생각한 대로 살아갈까? 아니면 살아왔던 대로 살아갈까? 이성은 습관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다면 왜 우리의 오늘은 과거의 지배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과연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말은 옳은 걸까?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시공간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건 이성이 아닌 듯하다. 우리의 세상은 늘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세상 뿐만이 아니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과 동의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존재이다. 고로 세상은 물론 사람도 이성의 지배를 받진 않는 것 같다. 영향을 끼칠 수 있을뿐 이성은 지배력이 약한 듯하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동물’, 혹은 ‘인간은 아주 가끔 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 혹은 ‘인간은 이성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으나 대부분은 그러지 않는 존재’라고.

한편 ‘저 사람은 감정적이야’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아마도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전제를 진리로 가정하기 때문에 생긴 반동적인 결과일 것이다. 틀린 전제에서 도출한 명제가 옳긴 어렵다. 그러나 저 명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감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정의 줄다리기에서 우리의 대부분의 일상은 과연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을까? 이성이 이기지 못하는 습관을 이루는 중추는 혹시 감정이 아닐까?

편하고 익숙한 것을 따라 살아가는 삶. 곧 습관이 지배하는 삶이다. 그것이 설사 어떤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수정되어야 한다고 이성적으로 판단이 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 이성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는다. 이성이 요구하는 것들은 도전으로 다가오고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하는 애씀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약간의 손해를 볼 뿐 살 만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군중에 묻혀 익명성에 따라 살아가는 구름처럼 허다한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나도 당신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편하고 익숙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성보다는 감정이 지배하는 행동 양식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이성을 따르면 더 건강하고 균형잡힌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데까지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나는 불편하고 생소한 삶 속으로 내 삶을 밀어넣고 싶지 않겠다는 최종 결정은 아무래도 감정의 영향 탓일 것이다. 일단 결정은 그렇게 해 놓고, 그것이 얼마나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틀리지 않은지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가 가진 이성이 가장 활발하게 작동하는 건 아닐까? 결국 이성은 감정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역할에 머물진 않을까?

물론 성급하게 일반화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며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감정적’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넘어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 감정적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일 수 없다. 감정은 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처럼 보인다. 인생의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을 살고 있는 내 눈에 비친 인간과 인간의 삶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이성이 아닌 감정이 지배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나는 감정의 누명을 풀어주고 싶어 진다. 이성이라는 가면 안으로 숨지 않고 솔직한 인간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다시 모든 것을 사유하고 해석하고 싶어 진다.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대전제에 저항하고 싶어 진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 주체할 수 없는 마음. 제어할 수 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욕망. 흔히 말하는 ‘운명’이라는 단어도 이성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도 언젠간 운명적인 만남이나 사건을 부딪히게 된다. 이성을 가뿐히 넘어서는 그 무엇. 머리를 통과하지 않고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시기를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도 한다. 이런 중요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무게중심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성으로 아무리 수긍해도 결국 나의 무거운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감정이 동반될 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종 이성의 수긍 없이도 감정의 동요만으로 우린 우리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첫 저서를 읽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전을 썼다고 해서 알게 된 작가이다. 그러고 보면 그를 알게 된 것도, 일차 저작을 읽고 나면 이차 저작까지 섭렵하고 싶어지는 내 욕망에 따른 결과다. 19세기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작가로 활동하다가 부조리한 세상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한 브라질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당대 최고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책 머리에 적힌 바에 따르면, ‘그의 작풍은 인간의 데모니슈, 즉 인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탁월한 심리묘사를 통해 그리고 있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이 작품 ‘감정의 혼란’ 역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고도로 지성적이지만 이성의 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과 충동에 이끌리는 인물들의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찾고 향유하려는 본능을 가진다. 심미적인 성향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일 것이다. 아름다움의 정의는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누구나 살다 보면 심미적 체험을 하게 되고 그것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는 점은 보편적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롤란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을 가서도 방탕한 삶을 살던 롤란트는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서 뜻밖에도 첫 번째 심미적 체험을 갖는다. 당시 그는 한 여자와 하숙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그 절제와 배려는 롤란트에게 감동을 불어넣는다.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뜻밖의 도약을 감행하게 된다. 향락에 찌든 자신의 방탕한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거기로부터 나와 정신적인 것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옮긴 학교에서 롤란트는 우연히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게 되고,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심미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 강의를 하던 교수의 진정성 깃든 열정이 롤란트의 눈과 귀를 열게 된다. 이후 그 교수와의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롤란트는 문학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든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에 의한 회심이 아니었다. 교수에 대한 순수한 흠모와 그 교수를 통해 보게 된 문학의 아름다움이었다. 학문의 문외한이었던 롤란트는 심미적 체험을 통해 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롤란트는 행복했다. 새로운 삶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하숙집까지 교수가 사는 집의 윗층에 얻은 후 그는 매일 같이 교수와 시간을 보낸다. 학문의 깊이와 넓이는 맛보게 된다. 

몇 주 후, 하루 정도는 쉬라는 교수의 말에 순종하며 교수를 만나기 이전으로 잠시 돌아간다. 책을 내려놓고 강으로 수영을 하러 나간다. 거기서 어쩌다가 날렵하게 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한 여자를 제치고자 힘을 다해 보지만 실패하고 마는 롤란트. 그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예전처럼 작업을 걸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일까. 그녀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다. 오늘도 저녁에 올 거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뿔싸. 그녀는 교수의 아내였던 것이다. 롤란트는 또 한 번 감정의 혼란를 겪는다.

그날 저녁 롤란트는 여느 때처럼 교수와 함께 저녁을 함께 하러 간다. 교수에게 어떤 비난을 들어도 좋다고 각오까지 했다.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교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렇잖아도 그에게 다정한 눈길과 보살핌과 가르침을 주었던 교수는 종종 그에게 쌀쌀한 태도를 보이는 등 롤란트가 느끼기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던 차였다. 또한 교수와 그의 아내 사이에 흐르는 벽 같은 단절에 이상함을 느끼던 차였다. 롤란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롤란트는 마치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어떻게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인가. 그동안 가장 다정하게 지내던 사람인 자기에게조차! 롤란트는 처음 교수에게 반하던 때와 정반대의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롤란트는 결국 일탈을 하게 되고 육체를 탐닉하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간다. 그리고 교수의 아내와 하룻밤을 같이 하게 된다. 

다음 날 롤란트는 죄책감에 온몸을 부르르 떤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한다. 그때 마침 교수가 갑자기 돌아온다. 차마 교수에게 자초지종을 직접 말할 수 없었다. 편지를 하겠다고 했더니 교수는 제대로 작별해야 한다며 대화를 하자고 한다. 롤란트의 마음은 이미 무너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온몸을 떨며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표정으로 드러내고야 말았다. 눈치를 챈 교수는 이것저것 묻다가 아내가 그 이유인지 묻게 되고, 롤란트는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야 만다. 놀랍게도 교수는 태연했다. 젊은이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롤란트는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 혼란스러움은 약과였다. 

교수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롤란트는 그날 밤, 교수와의 마지막 날 밤 듣게 된다. “나도… 나도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

교수는 어릴 적부터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는 지금까지 지킬 박사로 살 때는 저명한 교수로, 하이드로 살 때는 비밀스러운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어두운 거리를 다녀왔다. 그가 갑자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며칠간 떠났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교수에게는 롤란트가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나날들이 너무나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롤란트를 보호하기 위해 쌀쌀맞게 대하고 모진 말을 건네곤 했던 것이다. 자꾸만 터져나오는 자기 안의 하이드를 물리치기 위하여, 그 하이드로부터 롤란트를 보호하기 위하여, 오해 받을 것을 감안하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롤란트는 그렇게 다시 한 번 감정의 혼란을 겪게 된다. 

이 작품 속에서 소개되는 이야기는 롤란트가 겪는 수 차례의 감정의 혼란을 위주로 전개된다.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노년의 교수가 된 롤란트의 기억에 선명하게 각인된 사건이 되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우리의 기억을 이루고 있는 중추는 이성이 아닌 감정, 그중에서도 감정의 혼란이 자리하고 있진 않을까.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때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기로, 때로는 한 사람과의 작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사건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그때 그때마다 이성 역시 한 박자 늦지만 활발하게 작동한다. 이미 벌어진 그 감정의 혼란이 가져오는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재해석하고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간의 본성 깊숙한 곳에 도스토옙스키와는 다른 결로 다가간 작가라는 생각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존재다. 인간은 신비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작가를 만남으로써 나는 인간이라는 한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깊고 풍성하게 알기 위한 좋은 길잡이를 하나 더 발견한 기분이다. 전작 읽기를 시도해야 할 작가가 또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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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 털보 과학관장이 들려주는 세상물정의 과학 저도 어렵습니다만 1
이정모 지음 / 바틀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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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고수의 생활 밀착형 과학 에세이

이정모 저,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을 읽고

생활 밀착형 과학 에세이다. 여기서 생활이란 정치, 문화, 사회, 경제가 섞여있는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을 말한다. 그래서 과학을 전공한 것과 상관없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은 누구나 경험하고 누구나 궁금해하지만 정확한 과학적 사실이 아닌 카더라 통신에 의한 미신, 무속, 관습, 편견으로 점철된 비과학적 지식을 타파하는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미신처럼 믿어왔던 오래된 오해가 풀리고 무속과 편견에서 벗어나 마침내 과학적 진리로 자유함을 얻는 기쁨도 만끽할 수 있다. 부디 이 책을 우리 시대의 고지식한 어르신들이 읽고 꼰대의 우물에서 벗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한다. 

덧붙여, 독자가 아닌 작가의 눈에 읽힌 이 책은 수십 편의 잘 써진 글을 읽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이 책의 저자 이정모는 글쓰기 고수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작가다. 같은 내용을 이런 식으로 써낼 수 있는 작가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내 마음속에선 존경심과 부러움이 일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살펴봐야겠다.

#바틀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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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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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270번째 감상문입니다. Yay!**

삶: 그림과 음악, 그리고 글

안드레이 마킨 저, ‘어느 삶의 음악’을 읽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글이 있다. 휘몰아치는 서사 위주의 (흔히 ‘페이지 터너’라 불리는) 작품을 선호하지 않는 나는 언젠가부터 문장이 갖는 무게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이 무게는 주관적인 해석의 산물이다). 문장의 무게는 그 문장이 담아내는 사건이나 상황의 무게에 있지 않고, 그 사건이나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글로 써내는 작가의 시선과 내면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일한 것을 보더라도 누군가는 기계적인 묘사에 급급한 글을 써내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그 ‘순간’을 담아내는 글을 쓴다. 여기서의 ‘순간’이란 공감각적인 통찰의 반영이며, 그래서 고유하고 정확한 글을 요구한다. 그것은 즉흥적이라기보다는 관찰과 성찰을 거친 진한 열매일 때가 많고, 작가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무엇인가가 마침내 그 상황으로 인해 표출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무게를 가지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는 그 작가만의 색 (사상이나 관점 혹은 세계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을 갖기 마련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는 말은 곧 그 작가의 시선과 내면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어떤 글을 읽고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자극적인 사건이나 충격적인 상황 등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나는 이런 글을 ‘가볍다’고 표현한다) 글과 거리가 아주 먼 작품을 만났다. 가만히 멈추게 하고 가끔 책을 덮고 허공을 응시하게 만드는 이런 작품을 나는 사랑한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짧은 작품. 다 읽고 나면 글이 아닌, 그림과 함께 음악이 남는 작품. 누군가에게는 무미건조하기만 할 텍스트가 독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또 ‘듣게’ 하는, 이 오묘한 작품. 기억이 가지는 특유의 흐릿함에 묻어가며 표현되는 주인공 알렉세이 베르그의 기묘한 삶은 읽는 이에게는 잔잔한 향수의 옷을 입고 있지만, 가히 절망적이고 치열했던 한 개인의 서사다. 

숙청 대상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도망치던 그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피아노 연주가 계획된 이틀 전이었다. 그는 부모님이 잡혀가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고 본능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피아니스트로 살 수 없게 된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베르그. 그는 전쟁 중 죽은 어떤 군인의 정체성을 입고 그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행복했던 그는 전쟁의 참사로 인해 구부지고 터지고 꺾인 시체들 위를 걷게 된다. 그러한 기구한 나날들을 뒤로하고 어느날 피아노 앞에서 그는 그동안 숨어지내던 자신의 경계를 풀어버리는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피아니스트의 정체성이 자유함과 함께 분출한 순간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고, 그 치열하고 허망했던 시절을 이 책의 화자에게 들려준다. 

깊은 겨울날 우랄 지방의 어느 기차역에서 우연히 듣게 된 알렉세이 베르그의 삶. 그의 삶은 그림이었고 또 음악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화자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 그림도 음악도 눈보라에 휩싸인 채 조용히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지난 밤의 꿈처럼 화자의 글을 매개하여 들려온 어느 음악가의 삶. 어느 삶의 음악. 책을 덮고 사뭇 숙연해진 나는 글에 감사하게 된다. 베르그의 그림 같은, 음악 같은 삶을 존재하게 해준 화자의 글에 감사를 표하게 된다. 나도 그런 소중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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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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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충실한 설명, 여백의 부재

이승우 저, ‘생의 이면’을 읽고

너무 늦게 읽은 탓일까, 아니면 아직도 이 책을 이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일까. 몇몇 지인들에게 인생의 책으로 꼽히곤 하는 이승우의 ‘생의 이면’을 마침내 다 읽었지만, 나는 이렇다 할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기대가 컸던 탓일지도 모른다. 실망이 큰 걸 보면 말이다.

작가의 기독교 세계관이 녹아든 이 작품이 내게는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니,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한국적인 기독교 문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듯 싶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한국 기독교에 대한 실망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정도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뉘앙스가 반영된 문학이 내겐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만 더 강화시킨 것 같은 기분도 들어 괜히 모래를 씹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 작품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지 못한, 보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작가의 문체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 속에는 내가 실제로 밑줄을 그은 문장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문장들을 비롯해 다른 문장들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표현들로 이뤄져 있다고 느꼈다. 여백의 미학이랄까, ‘표현하지 않음의 표현함’이랄까 하는 신비가 부족한 것 같았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더 큰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그렇게 세세하고 친절하게 다 설명해주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사람 내면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정신분석학자처럼 통찰해내어 문장으로, 때론 통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탁월하게 풀어내는 필력은 훌륭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이승우는 ’너무 친절했다.’ 마치 생의 ‘이면’을 ‘표면화’해버린 느낌이다. 비록 작품 속에는 여러 장치를 동원해 작가가 직접 드러나지 않게 해놨지만, 내 눈엔 그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독자로서만이 아니라 작가로서도 이 작품을 읽었기 때문인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사항 때문에 나는 이 작품 속 줄거리 속으로 온전히 빠져들지 못했으며, 그 결과 실컷 무게만 잡았을 뿐 변죽만 울리는 꼴이 된 듯한 허무함과 아쉬움에 속을 달래야 했다. 이 작품을 ‘인생의 책’이라고 꼽거나, 이승우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감상문이 불편하게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만 이 글이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라는 점을 감안해주길 바랄 뿐이다.  

#문이당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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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하려던 말들 - 예수의 비유에 관한 성서학적·철학적 사색
김호경 지음 / 뜰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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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가 담고 있는 깊고 풍성한 진리의 말씀 맛보기

김호경 저, ‘예수가 하려던 말들’을 읽고

문장은 짧고 간결하며 거침이 없다. 그래서인지 힘이 느껴진다. 읽고 나면 마음도 시원해진다. 권력 혹은 재력의 눈치를 보느라 어중간한 경계에 서 있는 문장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극단적인 주장을 펴지도 않는다. 단호한 문장들 뒤에 묻어나는 저자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지 않고 끝까지 차분함을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호소력이 짙다. 이 책은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진리로 둔갑한 비진리의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급진적인 진리를 말하던 그 누군가를. 예수다. 예수일 것이다. 저자의 글은 어딘지 모르게 예수의 말과 닮았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들은 많은 비유로 이루어졌다. 일상을 소재로 하지만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오묘한 비유다. 전복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지 비유. 읽고 또 읽어도 그때마다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 비유. 나는 바로 여기에 예수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누구나 들을 수 있지만 아무나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의 말들. 누구에게나 귀가 있지만, 진짜 귀가 있는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 그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말들. 예수는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제목 ‘예수가 하려던 말들’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 김호경은 이 책에서 많은 비유들로 이루어진 예수의 말들이 가진 참 의미를 풀어준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신학 석/박사 학위를 소지한 신약학 교수답게 글을 풀어나가는 기술이 예사롭지 않다. 신학이 가지는 필연적인 딱딱함이 문학적 내공으로 인해 부드러워졌다고나 할까. 여느 신학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가독성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도 쓸 수 있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수준의 묵상이나 성찰의 에세이도 아니다. 열아홉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각 장은 충분히 훌륭한 한 편의 설교로 읽힐 수 있을 정도의 깊이를 가진다. 각 장은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비유를 하나씩 다룬다. 독립적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순서대로 읽길 권하고 싶다. 책 전체에 걸친 논리와 이야기의 전개가 여러 장에 걸쳐 통합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신학만이 아니다. 저자는 각 장에서 다루는 예수의 비유에 적합한 철학적인 개념을 하나씩 소개하며 예수가 하려던 급진적인 말들의 의미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풀어준다. 이를테면, 1장에서 저자는 회개를 설명하면서 후설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중지’를 소개한다. 회개는 여태껏 몸담아온 세상의 당연함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회개는 회심의 시작이다. ~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8장에서는 들뢰즈의 ‘리좀’을 설명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중앙집권적 체계가 아닌 ‘천 개의 고원’으로 이루어진, 개별적인 모든 존재의 차별 없는 존엄성이 보장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한편, 13장에서는 아렌트가 발견하고 정리한 개념인 ‘악의 평범성’을 소개하며, 저자는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악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통찰해 낸다. 이외에도 저자는 베이컨, 레비나스, 소크라테스, 니체 등의 철학자가 정립한 핵심 개념들을 쉽게 풀어주면서 예수가 비유로 말한 메시지들의 의미를 해석해 준다. 문학과 신학과 철학의 하모니. 수작이다. 

사복음서를 지금까지 수십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말씀들이 있다는 건 언제나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나의 부주의함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개별적이고 상황적인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가 말한 비유들이 가지는, 신비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고유한 힘 때문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금은 더 정리된 기분이다. 물론 저자의 해석 역시 진리가 아닌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해석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된다. 다음에 사복음서를 읽을 때 다시 들춰보며 내 부족한 신학적 지식과 좁은 생각 때문에 해석에서 제자리 걸음하거나 방황할 때 길잡이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뜰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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