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폐지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9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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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와 한계를 생각하며


C. S. 루이스 저, ‘인간 폐지’를 읽고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년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앞에 서서 비슷한 인상을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엄하다, 웅장하다, 압도적이다, 등의 표현은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실로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자신을 개미와 같이 작은 존재로 인지하게 되는 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타나 장엄한 자연을 보고 경탄하는 여러분에게 ‘그건 자연이 장엄한 게 아니라 실은 그렇게 느끼는 당신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이 질문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이 책은 루이스의 변증서로써 ‘순전한 기독교’의 1부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인간 본성의 법칙’, 혹은 ‘자연법’이나 ‘도덕률’이라고 부르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이고 선행적이며 범우주적인 법칙에 대해 루이스가 1943년 영국 더럼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옮겨놓은 글입니다.

객관적인 가치라는 게 존재할까요? 아니면 모든 가치는 주관적인 해석의 영역에 속하는 걸까요?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아니면 모든 법칙은 상대적이어서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정해지기 나름일까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법칙이라는 게 혹시 존재하진 않을까요? 모두 너무나 오래된 질문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정답이 존재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저는 이 부분에서는 루이스의 생각에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저 역시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이고 선행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학습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어쨌거나, 누구나 알고 있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우리 인간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한계랄까요?)까지도 저는 믿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년은 저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과 무관하게 인간이란 존재에게 있어서만큼은 압도적일 정도로 장엄하고 웅장하다고 생각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건 그것들이 가진 가치를 제가 알아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해석의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경외심이 들 만큼의 경탄이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의 솔직한 느낌은 존재론적인 사유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인 순간의 저의 반응인 것이지요. 이성을 훌쩍 넘어서는 영역의 일인 것입니다. 

이성을 훌쩍 넘어서는 영역의 일. 루이스는 이 일을 담당하는 기관은 뇌도 아니고 장도 아닌 가슴이라고 말합니다. 뇌는 지성을, 장은 본능을 가슴은 정서를 의미합니다. 이어서 루이스는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뇌나 장이 아닌 가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서라는 것의 의미를 한낱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상 정도로 치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게 사람을 사람다울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과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루이스는 상대주의에 천착한 교육 시스템은 가슴 없는 인간을 양산해 낸다고 주장합니다. 가슴이 없으면 뇌와 장만 남게 됩니다. 뇌를 가졌기 때문에 생각은 생각대로 하고, 장을 가졌기 때문에 행동은 본능에 따라 하게 되는 기형적인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생각과 행동이 연결되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서란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보다 지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역할도 하며, 본능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자들을 마치 스스로 인간이라는 존재 밖에 있는 인간이라고 여기는,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가슴 없는 인간으로서 모든 가치의 절대성을 부수고 상대화시킴으로써 절대적 가치에 순종하지 않고 그것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도 (위에서 언급한 도덕률 같은 절대적 법칙을 말합니다) 바깥으로 나가서 도를 믿고 그것을 순종하는 사람들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루이스는 이런 시도를 하는 작자들의 최종 정복은 결국 인간 폐지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으로서의 특권을 버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계속 가지고 싶어 하는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행동이며, 이는 성취되지 못할 불가능한 바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한계도 모르고 이성이 모든 것인 것처럼 지껄이다가 행동으로 옮길 땐 자기 본능에 따라 저질러버리는 가소로운 인간들의 모습인 것이지요.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자명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어떤 것도 증명될 수 없다고. 도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그리고 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가치가 실은 그 자체도 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도를 거부한다면 모든 가치를 거부하는 꼴이 된다고. 도를 수정할 수 있는 권위는 오로지 도 내부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고. 도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도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도를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만일 우리가 가치라는 것을 갖고자 한다면, 실천이성의 궁극적인 평범한 진리들을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도가 모든 가치 판단의 근원이자 유일한 원천이라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 폐지를 향할 뿐이라고. 

저 역시 이 견해들이 굉장히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죄의식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을 포함한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루이스는 이 책에서 기독교 색채를 빼고 이야기를 진행했지만, 저는 루이스가 아마도 결국엔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관계, 즉 신론과 인간론으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년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을 떠올리면 아마도 제가 머릿속에 그린 장면을 공감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도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에게 남기신 일종의 흔적, 혹은 하나님의 형상 닮은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있는 그 무엇에서 찾고자 하는 제 모습을 떠올리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1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https://rtmodel.tistory.com/1658
16. 인간 폐지: https://rtmodel.tistory.com/1662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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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 결국 책을 사랑하는 일
오경철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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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사랑하는 책으로


오경철 저, ‘편집 후기’를 읽고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편집자의 일이 궁금했기 때문은 아니다. 물론 애정하고 신뢰하는 신형철의 추천사도 한몫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부제, ‘결국 책을 사랑하는 일’이 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알았다. 약간의 판단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그 착오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이 부제의 강세는 ‘책을 사랑하는 일’에 있지 않고 ‘결국’에 있다는 것. 둘째, ‘책을 사랑하는 일’은 ‘책 읽기를 사랑하는 일’과 다르다는 것. ‘책’은 ‘책 읽기’를 넘어서는 개념이었다. ‘책 읽기’는 ‘책’이라는 물건을 사랑하는 마지막 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은 읽히기 전에 기획되어야 하고, 저자에 의해 쓰인 원고를 편집하는 일련의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책은 읽히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팔려야 하는 목적도 가진다. 책은 내용적인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책 읽는 낭만적인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책을 만드는 지극히 현실적인 행위에 대한 이야기. 즉, 독자가 아닌 편집자의 생계를 포함한 실제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 수차례 길을 벗어나 보기도 하고, 곁길로 걸어보기도 하는 등 깊은 회의와 잦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책 만드는 일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 (사랑의 힘이 아니면 무엇이랴!). ‘결국 책을 사랑하는 일’로 회귀하는 이야기. 그 가감 없는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는 편집자다. 숱한 초보 편집자들에겐 기라성 같은 존재일 것이다. 노장이라고도 쓸 수도 있겠으나 베테랑이라고 읽는 게 적합한 편집자인 것 같다. 여러 출판사를 옮겨본 경험, 출판사를 그만두고 외주로 생계를 이어간 경험, 일인출판사를 차려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다가 다시 따박 따박 월급이 나오는 출판사로 복귀한 경험. 유명 작가들의 책들을 편집했던 경험. 과연 책이 될까 싶은 책들도 책으로 만들어봤던 경험. 수십 년간 이렇게 글로 다 써내지 못한 숱한 경험들을 거치며 탄탄한 내공의 소유자가 된 저자는 이 책에서 책 만드는 일에 대해 책 만들어본 자만이 말할 수 있는 말들을 길게 써내려 간다. 언제나 어느 분야나 한 분야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의 말은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분야를 지원하는 자들, 그 분야에 막 진입한 자들, 혹은 그 분야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자들이 자칫 가질 수 있는 오해, 편견, 환상 같은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그 분야를 제대로 알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편집자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초보 편집자로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분들이 있다면, 혹은 편집자로 일하다가 회의에 빠져있는 분들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책이라는 물건이 가지는 다층적인 의미와 그것을 만드는 일에 대한 담백한 현실적 삶을 직시하고 혹시라도 거칠지도 모르는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작은 판단 착오로 읽게 되었지만,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나도 어쩌다 보니 곧 출간될 책을 포함하면 세 권의 저서를 가지게 되는 작가인데, 이 책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역할과 의미를 조금 더 사실적으로, 그리고 무게감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을 저자로 만들어준 출판사 대표에게 숙연해진 마음으로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참 고맙습니다!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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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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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순정적인,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야’를 읽고

지금까지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중 가장 순정적이고, 가장 신파조에 가까울 정도로 통속적이며, 가장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답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평이한 소설이 아닌가 한다. 왜 그런고 해서 찾아보니,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1845년, 도스토옙스키가 24세가 되던 해에 대대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자신의 이름을 러시아 전역에 알리게 되는 작품 ‘가난한 사람들’이 발표되었고, 이 작품 ‘백야’는 1848년에 발표되었으니, 첫 소설 이후 3년 만에 쓰인 소설인 셈이다. 또한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시절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으니, 우리에게 알려진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으로 진화하기 전의 작품인 것이다. 약 10년간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견뎌내야 했던 시베리아 유형과 의무 군복무 기간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였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사례라 생각된다. 그가 길고도 깊은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과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비롯한, 소위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이라 일컬어지며 ‘인류의 자산’이라고까지 평가되는 대작이 탄생될 수 있었을까. 때론 원하지 않는 거대한 환란이, 비록 그것이 몸과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해도, 그것 아니면 결코 얻을 수 없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열매를 맺곤 하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환란에 마음 깊이 안타깝게 여기고, 또 이렇게 말하는 게 경솔하고 무례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넘어 그를 사랑하는 독자로서는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간질병을 얻고 평생 그것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지만, 그의 환란에 이런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게 된 독자는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리라. 그리고 이것은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때마다 겸허해지고 숙연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이 단편소설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가시적인 공통점은 가난과 사랑과 문학이고, 비가시적 공통점은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장광설 속에 숨어 있는 인간 본성과 심리에 대한 통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나’라고 소개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난한 사람들’의 남자 주인공 마까르 제부쉬낀의 캐릭터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나이 어린 한 여자를 순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이 그렇고, 그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닮았다. 나아가, 그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주인공이 비뚤어지지도 않고 끝까지 순정을 간직한다는 점도 닮았다. 이 정도면 한 가난한 남자의 순애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 가난한 남자와 한 가난한 여자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그린 이야기라면 3류 소설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류와 질적으로 다르다. 단순히 감성 팔이나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둔 하룻밤의 불꽃놀이 같은 이야기와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순애보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 이면에 흐르는, 적나라함과 통속이라는 탈을 쓴 인간의 본성 및 심리의 탁월한 묘사와 통찰에 맞춰져야 한다. 비록 가난하지만 무식하지도 무지하지도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도 가지고 있으며, 퇴폐적인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정도로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히지도 않아 자신의 현재 좌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주인공을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몽상가라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석영중 교수가 ‘작품 해설’에서 지적하듯이 그는 몽상가가 아니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약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몽상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결코 몽상가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소설 ‘분신’이나 1864년에 발표된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등장하는 주인공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작품 속 주인공은 정신병자이거나 정신병자에 가까운 인물로서 자기라는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사회와 단절된 채, 마치 지하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캐릭터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과 ‘백야’의 주인공이 긍정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라면, ‘분신’과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부정적이고 퇴폐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네 작품의 주인공의 장광설 속에 묻어나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심리는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옙스키 시선의 고유한 매력을 느낀다. 모든 인간은 이율배반적이라는 것. 그러나 아주 미세한 차이로 인해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네 인물 모두 가난을 공통점으로 가지기에 가난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은 인간 본성의 발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선행자도 될 수 있지만 범죄자도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캐릭터의 소유자의 생각과 행동에도 가볍지 않은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왜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야만 하는지를 말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짧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품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면 명백한 오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무래도 도스토옙스키의 정수는 5대 장편을 모두 아우르는 후기 작품들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여전히 도스토옙스키의 고유한 문체와 매력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그 맛을 보고 싶은 사람은 한두 시간 정도 시간을 내어 이 작품을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일부러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아껴두고 있다. 주로 단편과 중편들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이것들을 하나씩 읽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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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홍성사 믿음의 글들 176
C.S.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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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눈을 빌려 통찰해낸 그리스도인의 내면

C. S. 루이스 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고

나의 첫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도 ‘나니아 연대기’도 아니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였다. 감상문을 쓰기 훨씬 이전,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무리에 속해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들락거리며 그 안의 문화를 탐방하고 즐기고 있을 시기에 누군가가 권해줘서 읽었던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였다. 누가 권해줬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이 책만은 기억에 남았다. 단지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에게 쓴 편지 형식이 선보이는 신선함 때문만이 아니라, 악마의 시선으로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고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흘렀다. 나는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었다.

인상 깊었던 책을 재독할 때 느낄 수 있는 감동은 그 깊이와 너비가 처음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초독과 재독의 차이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공감할 수 없는 그 무엇에 속한다. 작품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그 작품을 읽는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초독과 재독의 차이는 그러므로 나의 성장, 성숙, 혹은 변화로 수렴된다. 

약 20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나의 신앙은 과연 얼마나 성장, 성숙했을까. 초등학생 (그 당시 언어로는 국민학생) 3학년 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입었던 기독교의 옷을 나는 대학 1학년 때 거의 1년간 벗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해 말, 어떤 예기치 못한 만남이 주어졌고, 마음에 묵직한 이끌림이 있어 나는 다시 교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미국 가기 전까지의 내 신앙은 두 번째 신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정의 정점이었던 20대 중후반, 나는 이 책 덕분에 루이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나의 첫 저서 ‘과학자의 신앙공부’에서도 썼지만, 지금 현재 나의 신앙은 세 번째 여정에 속한다. 아무런 배경도 도움도 없던 미국에서 나는 처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절하게 인생의 낮은 점을 경험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중심으로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까불어대고 있겠지만, 그 낮은 점을 통과하며 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숱한 말들을 꺼내어 놓을 수 있겠으나, 단 한 문장으로 이 시기의 열매를 표현하자면,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이후 나는 뿌리 깊은 의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수많은 의심이 기반이 된 질문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단면을 하나 더 알아간다는 의미일뿐 ‘그리스도인’을 나는 당당하게 나의 정체성 중 하나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잡하게 주절거린 것 같다. 여하튼 이 작품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초독과 재독 사이의 기간은 숫자로 따지면 약 20년에 해당되지만, 질적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이전과 이후로 표현할 수 있다. 가치관, 세계관의 전환을 경험하거나 마침내 깊은 우물 밖으로 빠져나온 자의 눈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읽어냈을까.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초독 때 느꼈던 낯섦과 놀라움은 약간 줄어든 반면 (재독이므로 당연한 결과이리라), 루이스의 치밀하고 정확한 표현의 탁월함에 감탄하는 정도는 더 커진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인생과 신앙에서 거대한 변화를 겪어낸 나의 변화 만큼일 것이다. 인생과 신앙 생활에서 나는 사람들의 비열함과 비굴함과 비겁함을 보고 경험했으며, 거짓과 위선과 자기 합리화의 추함도 보고 경험했다. 20대 땐 전혀 몰랐거나, 알아도 표면적인 수준밖엔 알지 못할 것들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한 가지 좋은 점은 인간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을 수 있다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의 한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스크루테이프가 간파해 낸 인간 내면의 심리와 본성에 대한 묘사를 별 거리낌 없이 맞장구칠 정도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크루테이프의 진단과 통찰 중 밑줄 그은 부분이 많으나 몇 가지만 짚어 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1.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다.
>>> 초독 때는 깊이 공감할 수 없던 문장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젠 그럴 수 있다. 

2. 내가 맡은 환자 중에는 아내나 아들의 영혼을 이해서는 열렬한 기도를 쏟아 놓다가도, 진짜 아내나 아들에게는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곧바로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무척 길이 잘 든 인간들이 있었다.
>>>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부끄럽지만 너무나 진실인 인간의 이중성. 영과 육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작자치고 행함이 깃든 믿음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신앙은 이론적이고 관념적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판사 역할을 자처한다. 정죄와 비난의 눈으로 자기가 아닌 모든 사람을 바라본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자들이 악마가 원하는 이상형 중 하나라는 루이스의 통찰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3.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지적으로 가장 뛰어났던 이반 카라마조프의 신앙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인류를 사랑할 마음은 있지만, 주위에 있는 한 이웃을 사랑할 마음은 없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사랑. 사랑이란 내가 아닌 남을 향하며 서로를 성장시키고 서로를 살리는 기적 같은 힘일진대, 이러한 사랑은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자기애의 거울상일 것이다. 루이스도 동일한 지점을 통찰해낸 것 같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웃 사랑은 인류라는 거창한 개념이 아닌 한 사람이라는 실천 가능한 대상에게 하는 마음과 행위일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도 이러한 것이었다. 

4.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 세상과 믿음을 목적과 수단 관계로 여기는 교인들이 허다하게 널려 있다는 점은 나도 지난 20년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들에게 만약 그리스도나 기독교보다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들은 큰 갈등 없이 그것을 선택해버릴 것이다. 믿음이 수단으로 존재하는 한 그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다.

5. 원수가 인간 영혼 하나를 제 것으로 확보하기 위해 꼭대기보다 골짜기에 더 의존한다는 걸 알면 아마 좀 놀랄 게다. 원수가 특히 아끼는 인간들은 그 누구보다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다.
>>> 은근히 위로가 되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꼭대기나 골짜기라는 개념 역시 한낱 인간의 눈에서 정의내린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 역시 비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를 모두 통과하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믿음을 시험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곳은 꼭대기보다 골짜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나 역시 골짜기를 지나오며 세 번째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여정을 가르는 지점은 꼭대기가 아닌 골짜기였다. 다만 나는 스크루테이프가 원수라고 부르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을 살고 싶다. 

6. 쾌락은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은 증대시키는 게 우리가 쓰는 방식이야.
>>> 쾌락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쾌락주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배후에 악마가 있다고 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쾌락을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만을 증대시키는 방법은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그것을 얻기 위해 인생을 거는 무모함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탐욕에 빠진 인간의 실체를 다시 직시하게 된다.

7. 환자는 이른바 주변의 두 세계를 다 포용하는 완전하고도 균형잡힌 복합적 인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처럼 최소한 두 집단의 인간들을 끊임없이 배신하면서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내심 자기만족에 취하게 된다 이 말씀이지.
>>> 미국에서도 보았다. 불신자들을 위해 교회 문턱을 낮춘답시고 그리스도 이야기를 빼고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들을 축소시키는 행위들을 말이다. 이러한 맥락과 비슷한 것이 바로 맘몬의 파라오 시스템과 야훼의 시스템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는 행태, 나아가 그렇게 겸비하는 것이 마치 균형잡히고 성숙한 신앙인인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을 조장하는 행태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그 두 주인은 바로 하나님과 맘몬이다.

8. 여하튼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두거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 행함이 없는 믿음은 반쪽 믿음, 아니 가짜라고 했다. 즉, 진짜 믿음은 행함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바른 생각, 바른 믿음은 행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악마라도 행함을 거세시킨 독실한(?) 믿음을 부추길 것이다. 진짜를 제거하는 방법보다는 가짜를 퍼뜨리는 편이 훨씬 더 사탄의 왕국 건설엔 효율적일 테니까.

9. 우리의 임무는 인간을 영원과 현재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 닮은 우리 인간은 영원에 속해 있는 영적 존재이자 육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숨 쉬고 있는 유한한 존재다. 이 모순된 정체성이 가장 잘 발휘되는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다. 과거에 묶여 현재를 과거의 연장으로 삼아 현재를 망치게 만들거나, 미래를 준비한답시고 현재를 땔감으로 사용하며 현재를 가치 없게 만드는 방법. 우리의 시선을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에 묶어두는 방법.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을 관념적으로 만드는 사탄의 고도의 전략일 것이다.

10. 비이기주의자들 사이의 의견 충돌은 제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게 아니라 거꾸로 상대편의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것이거든. 만약 처음부터 각자 자기 뜻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면 이성과 예의라는 테두리를 지킬 수 있었을 테다. 환자의 영혼을 확보하려면 소소한 진짜 이기주의보다는 정교하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비이기주의의 초기 징후들이 결국엔 더 값진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 이기주의자보다 더 이기적인 비이기주의자의 행태를 이용해 먹는 방법 역시 사탄의 고도의 전략일 것이다. 이는 거짓말쟁이보다 거짓 겸손을 떠는 자가 더 악질인 논리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놀라운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 중에서도 이런 비이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장과 위선에 능한, 양의 탈을 쓴 늑대들에겐 저주가.... 아니 그들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임하길.

11. 풍요로운 중년기를 보내는 인간은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사실은 세상이 자기 속에서 자리를 찾은 것인데도 말이야. 갈수록 높아지는 명성, 넓어지는 교제권, 나는 중요인물이라는 의식, 열중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의 가중되는 압력 등은 이 땅이야말로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고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바다. 
>>> 정착과 떠남의 무한반복을 살아가는 나그네 삶이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현주소라고 믿는다. 중년이 되고 경제가 청년 때보다 안정적이 되면서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님, 안정을 빙자한 정착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잊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1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https://rtmodel.tistory.com/1658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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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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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시스템에서 생명의 시스템으로

월터 브루그만 저, ‘안식일은 저항이다’를 읽고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안식일은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불안과 강요와 배타주의와 과중한 일에 대한 저항, 아니 이 모든 것들을 생산해 내는, 아니 생산해 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다. 브루그만은 안식일이 저항인 이유를 ‘안식일이 상품 생산과 소비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끝없는 욕망, 끝없는 생산, 끝없는 노동을 요구하는 물질주의, 즉 맘몬의 방식은 이미 우리 삶에 팽배해 있으며,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파라오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쉼으로 들어가는 것이 절박하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브루그만은 계속해서 말한다. 늘 불안에 떨며 더 많은 벽돌을 찍어 내려고 애쓰는 삶을 잠시라도 멈추면, 우리가 지는 짐은 가벼워지고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는 쉬워진다고. 그리고 예전과 같이 지금도 얼마든지 다른 삶을 즐기며 구가할 수 있다고. 요컨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체제로 돌입한 물질만능주의, 상품지상주의에 저항하라는 것이다. 이는 곧 구약의 안식일 정신을 지금, 여기에서 회복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브루그만은 우리가 저항해야 할 ‘죽음의 시스템’의 모델을 출애굽 이전의 ‘파라오 시스템’에서 찾는다. 이 시스템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모나 동포를 천대할 수밖에 없고, 다른 이들이 위협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폭력에 가담할 수밖에 없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성관계를 상대를 학대하는 상품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면 그것을 강탈할 수밖에 없고, 이익을 얻으려고 왜곡과 말 돌려하기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탐욕에 헌신할 수밖에 없다. 파라오 시스템에는 불안과 강요와 배타주의와 과중한 일이 일상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위협과 경쟁자만이 있을 뿐 이웃이 없었다. 그러나 야훼가 내리신 명령에는 파라오의 명령과 달리 사회에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 가운데 이웃이 들어 있고,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 유지를 대담하게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이 기이한 요구는 이웃에게 쏟는 사랑으로 불안만을 야기하는 생산성 중심 풍조에 맞서라는 것이었다. 안식일의 핵심은 쉼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쉬셨듯, 우리도 쉴 수 있다. 아니, 쉬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쉴 때에는 우리 주위 이웃들도 쉴 수 있고, 또 쉬어야만 한다. 불안만을 야기하는 파라오 시스템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저항의 시스템은 곧 하나님의 안식일, 즉 쉼의 시스템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의 시스템에 붙잡힐 필요가 없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받고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스스로 그 시스템에 붙잡혀 노예가 되어버렸다.


안식일은 단순한 쉼이나 단순한 멈춤을 넘어선다. 안식일은 강요와 경쟁에서 벗어나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연대성에 비추어 사회의 모든 삶을 재고해 보는 계기가 된다. 즉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혹은 피동적인 멈춤이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멈춤이다. 이스라엘이,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안식일에 멈추고 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시스템에서 해방받고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은 그것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탐욕의 지옥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지나 훨씬 더 후대의 본문인 이사야 56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을 논하며 모세의 옛 율법과 어긋나는 조치를 취하며 모세의 율법을 뒤집어엎기 시작한다. 배타주의를 거부하고 포용주의 원리를 강조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표지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결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사람다움을 지키도록 이웃과 더불어 일을 멈추고 쉬는 것만 언급한다. 일을 멈추라는 이 명령은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다. 동성애자, 여자, 남자, 흑인,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 히스패닉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안식일을 지킬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모이는 자리에 모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은 구성원이 될 ‘자격이 있다’는 개념을 부숴 버린다. 배타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브루그만은 여기서 덧붙인다. ‘선한 열매’는 안식일이 안겨 주는 평화를 누리는 것에서 생겨난다고 감히 생각한다고. 나 역시 동의한다. 피 묻은 피라미드 시스템에서 선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으려면 안식일이 있어야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예전과 같이 돌아갔다. 모양은 다르지만, 다시 상품지상주의가 주가 되는 죽음의 시스템으로 복귀했다. 이는 이집트에서 건져내 주신 하나님을 잊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는 뜻이고, 더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을 만들어 내리라는 확신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이집트 노예 때와는 달리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표면적으로는 지키면서도 상품을 획득하려는 탐욕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불안을 야기하고 강요와 착취를 일삼는 행위가 그치지 않은 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 탐욕스러운 행위에는 불안과 강요과 착취라는 원동력이 있었고, 이것은 안식일 속으로 곧장 침투하여 안식일을 무너뜨려버렸다. 쉼을 누리는 위대한 축제는 말 그대로 쉼을 없애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육 간의 쉼을 누리는 마음과 생각과 실천에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쉼이 없는 안식일은 인간 안에 내재된 탐욕의 패턴을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탐욕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것이 그치지 않은 예배는 신실한 예배일 수 없었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정의를 행하도록 이끌지 못하는 예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사는 엉터리 안식일일 뿐이었다. 아모스는 모든 이가 쉼을 누리는 안식일을 거부하는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했다. 이렇게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브루그만은 말한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나눈다는 사람이 내내 시계만 들여다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찬송한다는 자가 가난한 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동시다중 작업을 하면서 여기저기에 마음이 팔여 있다는 것은 진정 일을 그치고 쉬지 않는다는 말이요, 성공하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탐욕에 빠져 무언가를 얻으려고 일하면서 동시에 인간다운 소통을 나누어 보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상품지상주의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진정한 표지다.”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십계명 전체와 연관 지어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아멘을 외치고 말았다. 브루그만은 탐심을 경계하는 열째 계명을 안식일을 지키라는 넷째 계명의 맥락 속에 놓고 탐욕이라는 죽음의 순환 고리를 끊어 버릴 방법을 고려한다.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은 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숭배와 탐심이 동일시되는 이유는 이 둘 모두가 실체를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식일은 상품을 예배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자 상품을 추구하는 행위까지 거부하는 것이다. 강력하고 죽음의 시스템에 전복적인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안식일은 탐욕의 힘을 깨뜨릴 실제적 바탕이자 탐욕을 제한하는 데 강조점을 두고자 하는 공중의 의지를 만들어 낼 실제적 바탕이라고. 안식일은 불안을 물리치는 해독제라고. 안식일은 우리가 소유가 아니라 선물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당이요, 우리가 상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신실한 관계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당이라고. 그리고 그는 안식일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는 우리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며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파라오 시스템이 인간의 쉼 없는 탐욕이 바탕이 된 죽음의 시스템이라면 하나님의 안식일 시스템은 그것으로부터의 저항이자 대안이며 생명의 시스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브루그만은 안식일이 우상숭배와 탐심에 초점을 맞추는 거짓 욕구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본다. 우리의 번지르르한 욕구들이 거짓인지 모르는 이유는 쉼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안식일의 정신을 지키며 삶에서 쉼을 가져보는 것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실천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안에 어떤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쉬운 방법이라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도 나는 이를 기반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깊은 감사를 하게 된다. 안식일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서도 늘 되새기고 그 정신을 실제 일상에서 살아내자고 다짐하게 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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