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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평점 :
인간의 본성에서 찾아낸 정직함과 인간다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정직한 도둑’을 읽고
‘정직한 도둑’이라니. 형용 모순인가 싶다. 도둑은 정직보다 거짓에 더 가깝다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작품을 보기 좋게 관통하고 함축한다. 나는 이 작품 속 정직한 도둑을 인간이라 읽는다.
이 작품을 좀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다른 두 단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가난’과 ‘연민’이다. ‘가난’은 ‘정직‘과 ’도둑’을 ‘연민’이라는 통로를 이용하여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이끈다.
작품은 조촐한 독신자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난한 일인칭 화자의 일상에 아스따피 이바노비치라는 더 가난한 세입자가 침대 하나 놓을 공간 없는 작은 방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어느 날 누군가 현관으로 들어와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훔쳐가는 일이 벌어진다. 화자도 세입자도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대낮에, 그것도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을 가뿐히 뛰어넘는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 아스따피 이바노비치는 곧 그 도둑을 뒤따라갔으나 10분 만에 빈손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유별나게 흥분했던 아스따피 이바노비치와의 대화는 그의 2년 전 과거 기억을 소환해 낸다. 에멜리얀 일리치라는 이름을 가진, 아스따피 이바노비치보다 훨씬 더 가난한 식객이자 술주정뱅이와 함께 보낸 나날들이다. 그리고 이자가 바로 ‘정직한 도둑’이다.
아스따피가 소중히 아끼던 승마용 바지가 있었다. 가난한 그에겐 소유물 중 가장 값비싼 물건이었다. 어느 날 그 바지가 사라진다. 그날은 그 누구도 집에 들어온 적 없었고, 오직 에멜리얀만 외출을 하고 돌아와 자주 그랬던 것처럼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초자연적인 일의 발생을 고려하지 않는 한 범인은 에멜리얀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에멜리얀은 수차례의 추궁과 의심의 눈초리 끝에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한 듯한 뉘앙스로 집을 나가고 만다. 증오가 사라지고 미안한 마음이 든 아스따피는 에멜리얀을 기다리고 찾아 나서기까지 한다. 닷새째 되는 날, 형편없는 몰골로 에멜리얀이 돌아오고, 아스따피는 죄책감에 그를 위로하고 다시 보살피기 시작한다. 제발 끊으라고 노래를 부르던 술을 권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에멜리얀은 고열과 오한을 동반한 채 몸상태가 좋지 않아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앓아누운 지 닷새째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작품의 마지막 두 페이지엔 에멜리얀의 마지막 날 아스따피와 나눈 대화가 실려있다. 자기의 낡고 구멍이 뚫린 허름한 외투를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아스따피에게 묻는 에멜리얀. 누더기 같은 옷을 누가 사겠냐마는,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에멜리얀에게 3 루블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거짓말하는 아스따피. 자신이 죽으면 꼭 외투를 팔아 가계에 보태라고 말하는 에멜리얀. 그 순진무구한 말에 마음이 아파 아무 말도 못 하는 아스따피. 그리고 마침내 그 바지를 자기가 훔쳤노라고 고백하는 에멜리얀. 이미 용서를 한 지 오래였던 아스따피. 무언가 더 말하려고 하다가 결국 창백한 상태로 고꾸라져 마지막 숨을 쉬게 되는 에멜리얀. 이렇게 작품은 조금은 허무한 상태로 끝을 맺는다.
재미있게도, 세 명의 등장인물은 도난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한다. 현재의 화자는 눈앞에서 외투를 도난당했지만 큰 분노까지 치닫지 않는다. 비록 두 벌의 외투밖에 없는 가난한 처지였지만, 외투 하나가 남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긴다. 한편, 현재의 아스따피는 비록 도난당한 외투가 자기 것이 아니었지만 마치 자기 것인 듯 외투 주인보다 더 속상해한다. 과거의 아스따피 역시 도난당한 승마 바지 때문에 분노했다. 에멜리얀을 원망하고 책망했다. 그리고 정작 도둑이었던 에멜리얀은 자신이 범했던 도둑질에 대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을 만큼 마음 아파했던 것 같다. 아스따피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모습에서도 나는 뻔뻔함 보다는 측은함을 느꼈다. 어쩌면 아스따피가 에멜리얀이 범인임을 알면서 그를 용서했던 이유도 이와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연민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화자가 눈앞에서 자기 외투를 도난당했을 때 극심한 분노에 빠지지 않았던 이유도 어쩌면 그 도둑에 대한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기도 충분히 가난하지만 자기보다 더 가난해 보이는 사람에 대한 연민. 이런 자들 사이에서 물건을 훔쳐가는 행위를 단순히 범죄라고 매도하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그 훔치는 행위 이면에서 나는 사람의 ‘악함’보다는 ‘약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이해가 가진 자들의 그것보다 내겐 더 인간답게 보인다. 동일한 일이 가진 자와 더 가진 자 사이에서 벌어졌다면, 거기에는 법과 심판과 처벌과 복수 등의 단어들이 심심찮게 등장하여 결국 도난당한 자조차도 인간다운 면을 상실할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왜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 속 도둑에게 ‘정직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다시 묻는다. 그리고 나는 그 정직함은 곧 인간다움이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답해본다. 나아가 그 인간다움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의 본성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가 고찰하고 얻어내고 싶은 궁극의 열매가 아니었을까 하고 조용히 생각해 본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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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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