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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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을 읽고


이 작품도 읽고 나서 여전히 구름을 잡는 느낌이지만, 작품 끄트머리에서 화자가 앞의 두 작품 '유리의 도시'와 '유령들'의 화자임을 직접 밝히고 세 작품의 연결고리를 잠시 설명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실체가 잡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앞의 두 작품이 손에 잡히는 건 아니다. 화자가 설명하는 세 작품에 대한 짤막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세 편의 이야기는 결국 같은 이야기지만, 내 의식 속에서는 그 하나하나가 동일한 사건의 각기 다른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세 편의 이야기가 결국 같은 이야기라는 점은 스토리만을 고려하면 아마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리란 생각이다. 드러난 스토리가 아닌 그 스토리가 머금고 있는 주제랄까, 그 이면에 깔린 메시지랄까 하는 것이 같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나로서는 유일한 해결책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정체성'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세 번째 작품 '잠겨 있는 방'에서 '유리의 도시'에 등장했던 스틸먼이나 퀸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또는 퀸이 늘 들고 다녔던 빨간 공책이 등장한다고 해서, 퍼즐 맞추듯 두 작품의 스토리를 연결시켜 보려고 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실 잠시 시도해 본 결과, 드러난 스토리만으로는 말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드러난 스토리나 작품 간 공통적으로 사용된 단어들은 연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안개 같은 모호함을 헤쳐나가는 길은 세 작품의 주인공이 아닌 그들을 창조한 작가 폴 오스터의 의식 세계 안으로 들어가 최대한 유추해 보는 것일 테고, 그렇게 유추하기 위해서는 세 작품의 공통점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단순히 철학과 정신분석학이 아닌 인간의 내면, 본성, 정체성 혹은 존재에 방점이 있을 것이고, 결과가 아닌 과정, 답이 아닌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래서 결국 묘연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바로 그런 것이기에, 즉 미스터리이자 신비이기에, 우리는 이 탐험의 끝에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작품 '유령들'의 감상문에서 언급했듯이 '유리의 도시'의 주인공 퀸이나 '유령들'의 주인공 블루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잠겨 있는 방'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 (혹시 폴 오스터 아닐까?) 역시 작품 후반부에서 정신분열 증상을 보일 정도로 큰 혼란을 경험한다. 재미있는 점은, 동시에 유의미한 점은 세 작품의 주인공 모두 누군가를 찾거나 쫓아다니다가 ('유리의 도시'에서는 스틸먼을, '유령들'에서는 블랙을, '잠겨 있는 방'에서는 팬쇼를) 그런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쫓다가 결국 자신을 쫓는 것과 같은 결과에 봉착하게 된다고나 할까. 쫓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누가 누구를 쫓는지조차 무의미해지게 되는 듯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 혼란의 정도를 수치화하여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 비교를 위해서 시도해 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보이고, 그렇게 판단한 근거를 설명하다 보면 우린 미스터리의 중심부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유리의 도시'에서 스틸먼을 쫓는 퀸의 혼란을 2로 보자. 그러면 '유령들'에서 블랙을 쫓는 블루의 혼란은 3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잠겨 있는 방'에서 팬쇼를 찾는 화자의 혼란은 5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혼란의 정도가 계속 증가한다. 왜 그런가?


퀸이 스틸먼을 쫓는 이유는 외부에서 주어진 의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의뢰가 잘못 걸려온 전화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 그리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퀸 스스로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되지 않는 탐정 오스터가 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 의뢰가 현실화되었다는 점은 퀸의 자발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퀸이 스틸먼을 쫓는 건 외부와 내부의 합작인 것이다.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되는 일에 개입한 것이기에 여기서 나는 혼란지수 1점을 부여한다. 또한 스틸먼을 쫓다가 자신의 행동이 무의미하며 나중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외적인 것들 (아파트나 애인 등)을 상실하게 되고, 나아가 내면의 붕괴까지 경험하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도 1점을 부여한다. 합해서 ‘유리의 도시’는 혼란지수 2점이다.


이에 반하여, 블루가 블랙을 감시하는 이유는 화이트라는 의뢰인의 부탁 때문이다. 뜻밖의 반전으로 의뢰인 화이트는 블랙과 동인인물임이 밝혀지고 (여기서 혼란지수 1점), 블루는 자신이 블랙을 감시한다고 여겼지만, 역으로 블랙으로부터 감시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 (여기서도 1점)도 밝혀진다. 타자와 나의 존재는 서로가 존재해야 가능해지므로, 내가 타자를 감시함으로써 비로소 타자의 존재가 입증되는 것이고, 반대로 타자가 나를 감시하기 때문에 나의 존재도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퀸과 마찬가지로 작품 후반부에서 블루 역시 내외면의 붕괴를 겪게 된다. 여기서도 1점이다. 이렇게 ‘유령들’에게는 3점의 혼란지수를 부여한다.


‘잠겨 있는 방’에 나는 가장 큰 혼란지수 5점을 부여했는데 왜 그런가? 먼저 화자가 팬쇼를 찾아 나선 동기와 배경부터 살펴봐야 한다. 어느 날 팬쇼의 아내 소피로부터 편지가 날아든다. 그 편지는 팬쇼의 실종을 알렸고, 실종되었을 시 남편이 부탁한 바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조처였다. 남편이 큰 여행 가방 두 개를 가득 채울 만큼의 작품들이 써진 종이를 화자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그 작품을 출판할지 여부는 화자에게 달려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옆집에 살아 집안끼리도 서로 형제처럼 지낸 옛 친구의 부탁이었고, 한때 화자는 팬쇼를 우상으로 따르기도 하고 한편으론 시기하기도 했었던 만큼 그 부탁은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화자는 꼼꼼히 다 읽어보고 걸작이라는 판단을 내린 후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참고로 화자는 작가다 (내가 화자가 폴 오스터 본인이라고 추측하는 한 가지 이유다). 작품은 대박이 나고, 덕분에 화자는 사 분의 일의 인세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 뜻밖의 횡재는 그에게 축복이었을까? 그는 태어난 지 1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키우고 있는 팬쇼의 아내 소피에게 마음이 끌리고, 남편이 죽은 거라 판단했던 후였기에 소피는 화자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까지 입양해서 법적인 아버지가 된다. 차츰 화자는 팬쇼의 빈자리를 몽땅 채우게 된 것이었다. 이 빠른 진행과 거짓말처럼 닥쳐온 상황들 속에서 겪었을 혼란에 나는 혼란지수 2점을 부여한다. 변변찮은 작가로 살다가 뜻밖의 기회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서게 된 데서 오는 혼란에 1점, 점점 팬쇼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에 1점, 합쳐서 2점인 것이다. 아직 3점이 남았다. 


본격적인 혼란은 팬쇼의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무렵 편지 한 장이 화자에게 날아들었을 무렵에 시작된다. 수신인불명이었지만, 보낸 이가 팬쇼임이 틀림없는 편지였다. 죽은 줄 알았던 팬쇼는 살아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러나 팬쇼는 아내와 아들마저도 다 그에게 책임져달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자기를 절대 찾지 말라고, 찾으려 하면 죽이겠다고 쓰고 있었다. 어릴 적 시기할 만큼 우상이었던 친구의 작품으로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아들까지도 취하게 되는 화자가 느꼈을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서 나는 1점을 더 부여한다. 


팬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혼자만 간직한 채 화자는 팬쇼의 모든 것을 누리기 시작한다. 이전보다 외적으로는 훨씬 나은 삶이 시작되었지만, 화자의 마음속엔 늘 팬쇼가 살아 있다는 사실로 인한 부채감 혹은 죄책감이 동반된 불안이 함께 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삶이 가져오는 혼란에 1점을 더 부여한다. 


출판사 대표와 대화를 나누다가 팬쇼의 전기를 쓰면 좋겠다는 제안이 나왔고 화자는 승낙하고 만다. 전기를 쓰면 팬쇼를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전기를 쓰려면 인생 전체에 대한 방대한 자료 조사를 해야 하는데 이 과정 중에 화자는 팬쇼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가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좇아 프랑스까지 다녀온다. 그는 전기를 씀으로써 팬쇼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점점 더 팬쇼의 살아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되고 자신이 팬쇼가 되어가는 듯한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술에 취하고 방탕한 삶에 취하기도 하며 그는 자신의 내면의 붕괴를 경험한다. 이 과정의 혼란에도 혼란지수 1점을 부여한다. 이렇게 해서 도합 5점이 된다.


쫓는 사람이 점점 쫓기는 사람과 동일화 과정을 겪게 되는 정도도 ‘유리의 도시’보다 ‘유령들’이, ‘유령들’보다 ‘잠겨 있는 방’이 더 구체적이고 심화되는 듯하다. ‘유리의 도시’에서는 쫓는 사람 퀸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위기를 경험하지만, 쫓기는 사람 스틸먼과 동일시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퀸과 스틸먼은 떨어져 있다. 반면 ‘유령들’에서 쫓는 사람 블루는 쫓기는 사람 블랙 (이기도 하고 화이트이기도 한)과의 거리가 한층 좁혀진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보면 블루는 블랙에게 이용당한 것이지만,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블랙이라는 한 사람의 영향권 아래 종속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작품 ‘잠겨 있는 방’에서 팬쇼를 쫓는 화자는 이미 외적인 부분에서는 팬쇼가 누려 마땅한 것들을 누리게 되었지만, 팬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내면에서는 팬쇼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닌, 즉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삶을 살게 되는 경험을 한다. 쫓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의 거리가 훨씬 더 가까워져 극심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세 작품 모두 미스터리 같이 모호한 스토리와 주제를 선보이면서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 곧 인간일 것이다. 쫓는 사람이나 쫓기는 사람이나 모두 인간이고, 누군가의 삶에 깊이 개입하게 되면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건 타자가 아닌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 결국 모든 사람은 인간이라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이어져 있다는 것. 모두가 다르지만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 정의 내리기조차 어려운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 미스터리이자 신비로 영원히 남겨둘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을 정체성 혼란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깊고 풍성하게 생각하게 만들어준 ‘뉴욕 3부작’을 나는 이렇게 마친다.


*폴 오스터 읽기

1.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 https://rtmodel.tistory.com/1788

2.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https://rtmodel.tistory.com/1791

3.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 https://rtmodel.tistory.com/1794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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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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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유령들'을 읽고


난해하다거나 심오하다고 말하기에는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대중성을 폄훼하는 듯한 뉘앙스라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르이고, 그게 소설의 최대 장점인 줄 안다. 그러나 그 상상력이 한낱 꿈의 조각처럼 파편적이거나, 두서없는 망상으로 표현된다면, 적어도 나는 읽어야 할 것들이 언제나 밀려 있는 평소의 상황에서 그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기발함이나 재치 위주의 말초적인 자극이나 충격을 주려는 목적으로 써진 현대 소설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써내려가면서, 아무나 알 수 있지만 누구나 깨닫지 못하는 일상 속에 빛바랜 진리를 재발견하고 재해석해 주는 소설 (주로 고전문학)을 나는 사랑한다.  


소설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시공간을 창출해 내기도 하는데, 이게 가능해지는 이유는 개연성 때문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엔 이해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사실 (팩트)이라고 부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다르다. 이상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이 현실적이 되려면 진짜 현실과 같아선 안 된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은 개연성을 갖춰야만 한다. 추리소설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흩어졌던 파편들이 마치 퍼즐처럼 맞춰져 앞뒤가 마침내 맞아떨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로 변모하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추리소설 독자들은 기대하고 고대한다. 누군가가 죽었는데, 단지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미해결 사건을 조사하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조명하는 소설이라면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도 등장인물들 사이의 연관성, 그들의 과거, 현재 경험과의 연결성이 미흡하면 완성도 측면에서 그 소설은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사건에 주목하든, 인물에 주목하든, 개연성은 소설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뉴욕 3부작’ 중 두 번째 단편소설 ‘유령들’을 읽고 쓰는 이 감상문 제목을 ‘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이라고 정한 이유는 첫 번째 작품 ‘유리의 도시’와 비슷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우선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주요 인물이 탐정 역할을 한다는 점이 닮았다 (‘유리의 도시’에서는 오스터가 된 퀸, ‘유령들’에서는 블루). 그는 의뢰인으로부터 부탁받은 어떤 한 사람을 미행하게 되는데 (‘유리의 도시’에서는 스틸먼, ‘유령들’에서는 블랙), 두 작품 모두 미행당하는 사람이 딱히 위험하거나 특별한 일을 벌이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혹은 블루가 도저히 이렇게 사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할 만큼, 소소한 일상을 영위한다는 점도 두 작품 모두 비슷하다. 


여기엔 작가 폴 오스터의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다. 미행하는 사람은 의뢰인의 말만 믿고 삶 전체를 의뢰받은 일에 올인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그래서 자기 내면으로 계속해서 침잠하게 될 정도로, 내면의 혼란을 겪으면서 의뢰받은 일의 의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까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 (그런 과정 중에 독자들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두 주인공은 의뢰받은 일의 지극히 단순함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혼선을 빚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작품 모두 탐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여느 추리소설과는 달리 사건의 해결이나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그저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는 점,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철학적이라 할 만한, 인간 보편적인 질문들에 독자를 초대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하겠다. 


작품 끝에서 탐정 블루는 사건을 의뢰했던 화이트라는 남자가 자신이 미행했던 블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의 최대 반전일지도 모른다). 화이트와 블랙은 동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즉, 화이트는 블루가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미행하길 원했던 것이다. 게다가 블루는 불시에 블랙의 집으로 찾아가 블랙이 써놓은 종이들을 집으로 가지고 와 다 읽어보는데, 그것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미행하는 내용이었다. 화이트이기도 한 블랙은 블루에게 자기 자신을 감시하길 의뢰해 놓고 그 자신도 블루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 기묘한 상황이란! 


여기서 독자들은 궁금해진다. 왜 화이트는 그런 일을 요구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저자는 시원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것을 생각하는 건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충격과 함께 저자가 선물하는 열린 결말이라 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개연성이 부족하여 독자들을 미궁에 빠뜨린 채 유유히 도망가는 저자의 무책임한 결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묘하게 철학적이고 인간 보편적인 무엇인가를 건드려 섣불리 무책임하다고 불평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소설을 조금 써보기도 하고 많이 읽어본 눈으로 볼 때, 과연 이 모든 게 작가인 폴 오스터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닐 것이다’라는 쪽에 나는 한 표를 던져본다. 글을 (여기선 소설을) 쓰다 보면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난감해질 때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무언의 압박 속에서 재치를 발휘하여 이런 결말을 선택한 게 아닌가 싶다. 즉 초기 계획에 없는, 나중에 글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니 선택하게 된 하나의 길, 어쩌면 최선의 길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거나 이 결말은 독자들을 생각에 깊이 잠기게 만든다. 소설을 읽어 보면 이 작품이 환상 소설인가 싶은 구석도 보이는데, 특히 감시 및 미행하는 블루와 그것을 의뢰했던 화이트, 그리고 결국 화이트 자신이었던, 블루에게 감시 및 미행의 대상이었던 블랙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묘한 기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감시하는 사람이 감시를 당하고, 감시를 당하는 사람이 감시를 요구했던 사람이며, 감시를 요구했던 사람도 감시를 실행했던 사람을 감시하게 되는 이 상황. 작품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아마도 나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은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 것인지, 자신이 타자를 감시하는 것인지, 혹시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감시하고 있던 건 아닌지, 혹은 이 작품의 제목처럼 모두가 유령들이었던 건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철학적으로도 내가 존재하기 위해선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나로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와 타자가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한 주제이긴 하다고 본다. 


이제 ‘뉴욕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잠겨 있는 방’이 남았다. 폴 오스터를 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제 조금 감을 잡을 수 있는 것 같다. 조만간 읽고 다시 감상문을 남겨 보도록 하겠다.


*폴 오스터 읽기

1.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 https://rtmodel.tistory.com/1788

2.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https://rtmodel.tistory.com/1791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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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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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를 읽고


퀸은 작가였다.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지금은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쓰며 산다. 추리소설의 주인공 탐정 이름은 맥스 워크이다. 퀸은 윌슨이 되어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한편으로 그는 워크가 되어 여전히 세상에 발을 걸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워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하고 미행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퀸에게는 허구일 뿐이다. 이쯤에서 나는 궁금해진다. 퀸이 사는 세상은 실재하는 것일까? 허구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퀸에게 실재와 허구는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닐까? 구분이 되기는 할까?


어느 날 전화가 걸려온다. 잘못 걸려온 전화다. 퀸도 윌슨도 아닌, 폴 오스터라는 탐정을 찾는 전화다 (알다시피 폴 오스터는 퀸과 윌슨과 워크를 창조한 이 책의 작가 이름이다). 윌슨이기도 워크이기도 한 퀸은 자기는 폴 오스터가 아니라며 전화를 끊는다. 다음날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만 받지 못한 채 끊어지고 만다. 퀸은 호기심이 일었다. 운명 같은 걸 느낀 듯했다. 이젠 그 전화가 다시 걸려오길 기다린다. 며칠 뒤 놓치지 않고 전화를 받은 퀸은 즉흥적으로 (아니 이미 계획된 것일지도) 오스터가 되어 사건을 의뢰받는다. 여기서도 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전화를 받았던 오스터가 된 퀸은 윌슨이었을까, 워크였을까? 어쨌거나 퀸은 그 전화 이후 무너지기 시작한다.


오스터가 된 퀸은 사건 의뢰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접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듣는다. 경도된 이단적 사상에 심취한 엘리트 교수 아버지로부터 어릴 적 9년간 감금 당해 정신은 물론 몸까지 망가져버린 한 성인 남자가 피해자이자 의뢰인이었다. 문제는 아들 감금으로 인해 13년간 감옥 생활을 하던 아버지 (스틸먼)가 내일 출소하여 뉴욕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의뢰자의 아내는 그 아버지가 돌아와 남편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두려워 퀸에게 아버지를 감시하며 남편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퀸은 알겠다며 착수금까지 폴 오스터 이름으로 수표 500달러를 받는다 (미국에서 수표는 받는 사람만 현금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퀸은 수표를 현금화할 수 없다). 마침내 퀸은 폴 오스터까지 된 것이었다. 돈과 상관없이 사건을 맡아 버린 것이었다.


스틸먼은 예상대로 도착했고, 비슷한 사람과 헷갈릴 뻔했으나 퀸은 실수하지 않고 그를 미행하기 시작한다. 의뢰자나 퀸의 우려와는 달리 스틸먼은 그저 노인으로 보일 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는 허름한 여관에 숙박하면서 매일 뉴욕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잡동사니들을 주워 모았다. 퀸은 지루해졌고 미행을 멈추고 스틸먼을 직접 만나 대화해 보기로 작전을 바꾼다. 스틸먼은 경도된 사상에 여전히 심취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변혁을 일으킬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날 대화를 했지만 스틸먼은 퀸을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퀸이 스틸먼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대화를 했던 날도 있었는데, 스틸먼은 전혀 아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안에 갇히고 자기 사상에 갇힌 자일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틸먼이 사라진다. 그가 머문 여관에 가보니 체크아웃을 했다고 했다. 아뿔싸. 퀸은 스틸먼을 완전히 놓쳐버린 것이었다. 


의뢰자의 아내에게 보고를 하려고 전화를 해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어떻게 해도 연락이 불가능했다. 그날 이후 퀸은 의뢰자의 아파트 앞에 노숙자 신분으로 살아가며 몇 달간 의뢰자가 아파트를 나가는지 살피기 시작한다. 먹고살 돈이 바닥나자 퀸은 노숙자로 살기 시작하기 전 잠시 찾아갔던 폴 오스터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수표를 현금화해서 자기에게 준다고 했던 일은 어떻게 됐냐고 묻는다 (폴 오스터를 직접 찾아갔던 이유는 그가 진짜 탐정일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작가일 뿐이었다. 대신 이름이 같기 때문에 수표를 현금화할 수 있었고, 퀸의 자초지종을 듣고 난 이후 현금화해서 돈을 부쳐준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때 진짜 폴 오스터는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냐고 묻는다. 수표는 부도가 나 현금화할 수 없었고, 그가 미행하던 스틸먼은 두 달 반 전에 브루클린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말했다. 퀸은 전화를 끊고 의뢰자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번호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노숙자 신분으로 살 필요가 없어진 걸 깨닫고 퀸은 집으로 찾아가지만 그 집엔 전혀 모르는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퀸이 몇 달간 집을 비워 아파트 주인이 짐을 모두 처리하고 새로운 세입자에게 아파트를 임대했던 것이다. 퀸은 집까지 잃게 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퀸은 의뢰자가 살던, 이제는 텅 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그 공간에서 퀸은 자고 쓰고 먹고 (누가 음식을 준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환상일지도) 하다가 자취를 감춘다. 


이 작품의 화자가 누군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작품 끝에서야 알게 되는데, 화자는 퀸도 아니고 전지적 작가도 아니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 폴 오스터의 친구이다. 퀸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오스터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퀸이 빼곡하게 적어놓고 아파트에 남기고 간 빨간 공책에 써진 글로 미루어 작성된 것이다 (즉 이 책의 써진 글은 정확한 사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없다. 동시에, 읽다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도 독자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작가에게는 논리적 일관성이나 개연성의 결핍을 보완할 수 있는 일종의 탈출구로 작용한다). 


퀸은 무엇을 쫓았던 것일까? 유령을 쫓았던 건 아닐까? 모든 게 누군가의 설계로 인해 진행된 연극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누구의 설계였을까? 왜 그는 퀸을 파괴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한 사람의 운명이 기구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긴 작품인 것일까? 


언뜻 복잡해 보이기도 하고 헷갈릴 여지도 충분히 있는 작품이지만, 저자의 글쓰기는 내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스틸먼의 경도된 사상을 써놓은 부분을 읽을 땐 움베르토 에코를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오로지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소유물인 것으로 보였다. 이야기 전개에서 논리적으로 잘 맞지 않는 부분도 보이고 엉성한 구성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그다음 작품을 읽어봐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다. 글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가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뉴욕 3부작'의 나머지 두 편, '유령들'과 '잠겨 있는 방'도 마저 읽어봐야겠다.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느끼려고 하며 읽어볼 생각이다.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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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열다 -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가해한 세계 앞에서 비아 시선들
토마스 머튼 지음, 정다운 옮김 / 비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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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기 위한 정직한 자세


토마스 머튼 저, '성서를 열다'를 읽고


제목이 '성서를 읽다'가 아닌 '성서를 열다'라는 점에 주목한다. 읽기 위해서는 먼저 열어야 하는 법. 그렇다. 이 책은 성서를 본격적으로 읽는 단계가 아닌 그 전단계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는 어떤 책인지, 성서를 읽는 나는 누구인지, 성서를 읽을 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성서를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저자의 탁월한 통찰과 뛰어난 필력은 덤이다. 


저자는 우리가 종종 성서를 일방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성서를 현실과 상관없이 영적인 세계의 이야기로만 여긴다든지, 거룩하고 독실한 신자들의 전유물로 여긴다든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심지어는 상식에 반하는 책으로 여기는 경우도 왕왕 벌어지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성서가 어떤 책인지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뼈아픈 말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우려한다. '그리스도교가 광신으로, 어리석은 종교성으로 왜곡될 때 우리의 지성은 모욕당합니다'라고.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최근 들어 특히 심해진 것 같은, 창조과학을 내세우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그것도 선택적으로) 읽는 근본주의자들의 반지성적인 주장과 활동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복음과 상황' 2024년 5월호에 실린, 최근 창조과학 비판으로 징계 위기에 처한 서울신대 박영식 교수의 인터뷰 기사 제목, '두려움은 근본주의를 만들지만, 참된 신앙은 두려움을 이긴다'라는 문장도 연이어 생각났다. 쓰인 지 50년이 넘게 지난 토마스 머튼의 통찰과 우려는 지금 이 시대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창조과학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의 존재는 성서 해석의 자세와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실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성서를 향해 묻기 시작하면 성서 역시 우리를 향해 묻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성서를 읽는 것은 단지 읽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서 읽기는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고 상호적인 대화여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성서에서 물으면, 성서는 우리에게 언제쯤 그렇게 진짜 삶을 살기 시작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성서 읽기는 지식과 경험의 축적, 혹은 소원성취나 문제해결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마치 예수가 성육신하신 것처럼, 마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처럼, 우리의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것인지를 위한 목적을 띠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서를 읽는 우리들은 불편하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성서를 한 번 이상 읽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 목사의 설교에 인용되는 구절을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성서 읽기일 정도다. 성서 안에 모든 답이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조차도 성서를 잘 읽지 않는다는 모순은 성서 읽기가 현실 신자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님을 반증한다. 성서는 결코 편한 책이 아니다. 친절하지도 쉽지도 않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어본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깊이 우려하는 점이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혔다. 결코 편안한 책이 아닌 성서를 우리는 익숙해지다 못해 편안하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진지하고 치열하게 읽어보지도 않고, 마치 신앙생활을 오래 한 열매인 듯 우린 경건의 모양만 갖춘 채 성서와 별문제 없이 지내는 법을 터득해 버린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성서를 잘 안다고 확신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말한다. 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분투의 여정이라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성서 안의 극명한 걸림돌과 모순을 정직하게 마주하려 분투하는 길이며, 우린 그 길로 나아가려 애써야 한다고. 우리의 목표는 그러한 모순을 손쉽게 해결해 치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넘어선, 그러면서도 때로 우리와 불가사의하게 얽혀 있는, 기이하고 역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나는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계속해서 뼈 때리는 통찰을 진행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명제에 지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성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며, 성서에 인격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성서에 대한 참여는 그분과 기꺼이 논쟁하고, 때로 저항하면서도, 우리의 분명한 잘못을 깨닫고 마침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그 전 과정을 포함한다고. 성서는 부정직한 순종보다 정직한 항변을 더 높이 본다고 (아, 명문이지 않은가!). 


저자는 우리가 종종 편향되게 성서를 해석한 뒤 그 한 가지 관점을 '신앙'이라 부른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어서 선포한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오히려 신앙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우리의 편향은 우리가 성숙해질 책임에서 도피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을 배제하고, 그것을 몰이해 속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나아가, 우리의 선입견, 우리의 한계로 쪼그라들지 않도록, 정해진 답을 가지고 성서를 열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성서를 대함에 있어 지름길로 가고픈 유혹, 절반의 진실에 안주하고픈 유혹을 이겨야 한다고. 우리의 편견에 안성맞춤인 편안한 해석으로 성서를 협소하게 만들면 결국 우리는 성서를 오해하다 못해 진리를 위조하는 데 이르게 될 거라고 경고하면서 말이다 (두렵지 않은가? 창조과학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여). 


두 시간 정도 집중해서 이 책을 읽으며 통쾌함과 동시에 착잡함을 느꼈다. 답을 얻었다는 데에서 통쾌함을 느꼈고, 이런 저자의 가르침을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던 수십 년 전에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착잡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신앙은 성서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때론 무속적이기도 한 것 같은 뉘앙스가 많이 묻어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아마도 한국 교회에서 신앙을 배운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경우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성서를 제대로 알고, 성서를 읽는 우리를 제대로 알고, 성서의 가르침을 하나씩 배우며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길 간절히 기원한다. 


#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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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말하다 - 비극으로, 희극으로, 동화로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오현미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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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싶은 설교


프레드릭 비크너 저, '진리를 말하다'를 읽고


설교자들이 주요 독자층인 듯한 이 책은 설교를 주로 듣기만 하는 나에게 다시 설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해 주었다. 저자가 말하는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에 잠시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설교를 들어본 횟수가 손꼽을 정도인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 시대 이 한국 교회에 목사는 참으로 많은데 참 설교자가 요원하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말이다.


진부할 정도로 너무 당연해서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명제 중 하나는 '설교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일 것이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비슷한 여정을 겪는다. 특히 늙어가는 중엔 비틀거리면서도 어쨌거나 가야 할 길을 인도받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오랜 시간 길을 잃거나, 완전히 길을 벗어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꽤 오래 길을 벗어났었다 (어쩌면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른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왔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지나야 했다. 그때 내게 가장 갈급했던 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하나도 몰랐었다). 깨닫기 위해선 먼저 들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그것을 듣지 못했다. 내 귀가 가려져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무도 내게 진리를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어두운 옛 기억의 저장고를 방문해 본다. 그리고 가정문으로나마 이렇게 바라게 된다. '그때 내 옆에 복음의 진리를 담백하게 들려주는 설교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하고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 비크너는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아니 어쩌면 유일한, 설교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 그는 복음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비극의 소식이라고 한다. 반면, 복음은 누군가가 그 인간을 위해 희생하여 그 인간은 어쨌든 사랑받고 죄 사함 받으며 구원을 경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희극의 소식이라고 한다. 나아가 이 비극과 희극의 만남은 너무 좋아서 있을 법하지 않은 사실 같은, 즉 동화 같은 소식이라고도 한다. 복음은 비극이기도, 희극이기도, 또 동화이기도 한 진리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바로 설교라는 것이다. 


그렇구나 싶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임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깨우는 것이 설교자의 몫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 은혜 이전에 죄에 빠진 상태를,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 이전에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임했던 흑암과 공허와 혼돈을 직시하게 도와주는 것, 그러니까 희극의 소식 이전에 비극의 소식을 먼저 들려주는 게 설교의 바른 순서라는 생각이다.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은 채, 다시 말해 비극의 소식이 거세된 희극의 소식만이 설교라는 타이틀로 전해지면, 그 소식은 영적인 사실을 외면하고 엉뚱한 말로 소망과 위로와 힘을 주려는 가식과 위선의 말장난에 그치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많은 설교가 이런 모습을 띠고 있다!). 


나아가 비극과 희극이 만난다는 것, 빛이 어둠에 최종 승리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의 동화라는 비크너의 말이 지금도 내 귓전에 맴돈다. 그리고 그 동화는 허구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일어나고 있는 실제 역사라는 말도 큰 감동이 된다. 현실의 수레바퀴 아래서 이런저런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세상 풍파에 살아남는 처세의 달인, 즉 어른의 모습으로 서려고 나도 모르게 애쓰던 내 모습을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경이에 찬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복음의 진리를 계속 듣고 싶어 하고 그 진리의 성취를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며 실제로 동참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갖게 된다. 매주마다 기대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설교, 하나님 백성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설교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꼬박꼬박 듣고 싶다. 나 자신을 직시하여 깨어지고 회개하고 참회하게 되는 설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믿음이 감사와 축복으로 충만하게 여겨지는 설교,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설교, 그런 설교가 모든 교회에서 들려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 프레드릭 비크너 읽기

1. 주목할 만한 일상: https://rtmodel.tistory.com/762

2.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https://rtmodel.tistory.com/1059

3. 진리를 말하다: https://rtmodel.tistory.com/1783


#비아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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