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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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새로운 시작.

무라카미 하루키 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두 명의 여학생과 세 명의 남학생. 언뜻 봐도 짝이 맞지 않는다. 남학생 하나가 남기 떄문이다. 또 하나, 공교롭게도, 다섯 중 하나만 자신의 이름에 색이 없다. 나머지는 모두 이름에 색을 의미하는 단어가 들어있다. 레드, 블루, 화이트, 블랙. 그러나 그의 이름에만 색이 없다. 그의 이름은 다자키 쓰쿠루. 색채가 없는 이름이다. 운명이었을까. 대학에 진학할 무렵, 다섯 명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고 유지되었던 도시 나고야를 떠나 그는 홀로 도쿄로 진학하게 된다. 그 결과, 나고야엔 다섯이 아닌, 넷이 남게 되었다. 그들이 대학교 2학년이 되기까진 공간만 떨어져있을 뿐 모든 게 똑같다고 여겨졌다. 방학 때 집으로 돌아오면 넷은 여느 때처럼 그를 반겨주었고, 마치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다시 다섯이 되었으며, 그래서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넷 중 하나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미안하지만 이제 더는 누구의 집에도 전화를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되어 유감이야.” 그는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스스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는 모호한 말밖에 없었다. 전화는 끊어졌고, 그 순간 하나와도 같았던 다섯은 넷과 하나로 분열됐다. 그리고 그 분열은 16년간 지속된다. 원인을 모른 채로. 아니, 원인을 알려고 하는 적극적인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로. 아니, 그런 시도조차 감히 할 수 없었던 채로.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중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손에 집어 들었던 건, 어쩌면 내 몸이 보낸 절박한 STOP 사인에 반응한 나의 구체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암묵적으로 내 몸이 보내온 일종의 신호를 나의 무의식이 해독한 뒤, 의식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나의 행동을 만들어낸 게 아니었을까.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기차의 엔진도 쉼이 필요하듯, 나의 머리와 나의 마음도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깊은 통찰로 인한 깨달음도 하루 이틀을 넘겨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면역이 생기는 법이다. 인간의 익숙해짐이란 교활한 돼지와도 같아서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단 몇 차례면 그새 다시 새로운 영점을 가지게 되고, 더 좋은 음식을 탐하기 마련이다. 마치 한 번도 좋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감사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늘 배고프고 불만에 가득 찬 채, 불평만 해대게 된다. 통찰이 성찰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이유다.

이럴 때면 난 늘 해독제로써 누군가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접한다. 보통은 읽는 것으로 의외로 많은 문제가 해결되곤 한다. 정갈한 문장으로 가득 찬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이에 아주 적합한 소재다. 비록 소설이지만,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일상적인 이야기.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엔 자유와 여유가 깃든다. 타자를 공감하는 일은 언제나 나 자신의 세상에 갇히는 위험에서 빠져 나오거나 미연에 방지해주는 좋은 해독제가 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하나와도 같았던 다섯 명의 공동체에서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배제 당한 뒤 수개월 간 죽음에게 온통 마음과 생각을 빼앗겼다. 그러나 어느 날 꾼 꿈을 계기로 그는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한층 성숙하고 새로운 자아로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여전히 그때의 일이 마음의 걸림돌이었다. 다행히도, 사라를 만난 후 그 응어리는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16년이나 지난 현재, 쓰쿠루에게서 여전히 어딘가 묶여 있는 듯한 모습을 간파한 사라는 그에게 네 명의 이름과 기본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쓰쿠루가 감히 용기내지 못했던 일들을 수 일만에 해낸다. 현재 그들이 사는 곳과 일하는 곳, 가정의 현황 등의 정보를 알아내어 그에게 내민다. 그 다음은 쓰쿠루의 차례였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들을 만나보기로 작정한다. 이 책의 절반 이상은 그와 한 명씩 만나는 그들 간의 재회를 통해 그때 그 일의 진상과 그 진상 이면에 감춰졌던, 지금은 세상에 없는 다섯 중 하나, 시로의 마음에 생겨났던 상처를 가늠하며 자신이 왜 배제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해나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고야는 물론 핀란드까지 직접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게 되는 쓰쿠루. 거기엔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사정이 있었다. 그가 배제되어야만 했던 이유. 그 정황. 비록 못내 아쉬운 부분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시로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기에, 쓰쿠루는 살아남은 셋과 회포를 풀며 정면으로 과거에 맞서서 16년 간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앙금으로 남아있던 문제로부터 비로소 해방 받게 된다. 물론 이때의 해방이란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잘려나간 것들을 보내주고 틀어졌던 마음을 바로잡으며 서로 간의 오해를 해결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때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던 그 무언가가 어느 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쑥 잘려나가게 되는 경험. 그 경험이 남긴 흔적, 죽음의 냄새까지 맡을 정도로 깊숙했던 마음의 상흔.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 이런 미해결의 문제들을 한 두 개씩 가슴 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 석연찮은 일의 잔재들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고 꼿꼿이 남아서 어느 순간 그때와 비슷한 정황에 처해질 때마다 유령처럼 불쑥 나타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진 않는가.

한편, 사라와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 그렇게 형편없을 만큼 불공평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떠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를 찾아주는 사람도 있다. 아픔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아픔을 치유해주는 사람도 있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는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 참 고마운 사람. 그건 분명 은혜일 것이다. 언제나 구원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다. 자꾸만 안으로 침잠하려는 자아에 거스르는 희망의 빛. 진정한 새로운 시작은 과거의 유령으로부터 피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서 매듭을 지을 때 시작되는 게 아닐까. 단순히 그 일이 생기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치유와 회복은 '과거의 나'가 아닌 '현재의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마음 속 교통 정리랄까. 조그만 상처에도 필요없이 부풀어오른 딱지를 제거하는 작업이랄까. 외부의 도움으로 인해 과거의 자아와 마주하여 치유를 받고 현재를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의 평범한 이야기. 이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양장본인 이 책을 감싸고 있는 컬러풀한 껍데기를 벗기면, 무채색의 하드커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알고 보니 그는 색채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색채가 없었던 게 아니라, 색채를 가진 이들과의 진정한 교류를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 관계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다면, 그 어떤 아름다운 색채도 무채색으로 변색되어 버리지 않을까. 색채가 있든 없든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 사라를 만나고 쓰쿠루는 그제서야 그런 관계를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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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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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파괴된 관계에 구원이 임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죄와 벌'을 읽고.


찌는 듯이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해질 무렵,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미 수십 번이나 머리 속에서 계획했던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사전 답사를 가는 길이다. 대상은 전당포 주인이자 고리대금업자였던 한 노파였고, 살인 도구는 도끼가 될 예정이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감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가난했다. 돈이 없어 다니던 대학도 휴학했다. 그가 사는 숨막힐 듯 작은 방은 이미 월세가 많이 밀려 있다. 잘 먹지도 못해 건강도 나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사전 답사 다음 날, 때마침 배달된 어머니의 편지에서 그는 여동생이 돈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듣게 된다. 그는 여동생이 자신에게 돈을 부쳐주기 위해 일부러 희생하려 한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고, 즉시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마음이 들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모든 게 돈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사전 답사를 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살인을 망설이고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나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살인은 반드시 실행에 옮겨져야 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고독한 이상주의자이자 몽상가였다. 주위와 단절된 채 관 같은 작은 방에 틀어박혀 생각만 해댄 지 벌써 한 달째였다. 그가 가진 해괴망측한 사상은 자신을 포함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단번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였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돈을 많이 가진 극소수의 이 (lice) 같은 인간들을 제거하여 그들이 가졌던 많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설프게 산술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본성 (특히 양심의 존재)을 깊이 고려하지 못한 심각한 오류에 불과했다. 이론적으로 아무런 결함이 없더라도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순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인간에게도 살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은 여기서 또 한 번 큰 오류를 범한다. 살인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과 비범인 (초인)으로 나누는 이론을 믿기 시작한다. 살인을 하기 위해선 범인이 아닌 비범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같은 극소수의 사람만 해당되는 비범인.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범인들에겐 모든 것이 허용되며, 심지어 사람을 죽여도 죄를 짓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는 묻는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 영웅이 된 자들이 과연 죄인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칭송 받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이 만약 여기에서만이라도 멈춰줬더라면 아마도 살인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신이 비범인에 속할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모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참으로 불행하게도, 그는 이를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계획했던 대로 살인을 저지른다. 운이 잘 따라주어 살인 현장에 이르기까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계획했던 도끼를 구할 수 없어 잠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지만, 신기하게도 아주 우연찮게 다른 도끼를 손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 참으로 기막힌 순간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운명인 것만 같았다. 자신이 비범인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는 한 사람을 더 죽여야만 했다. 예정에도 없었던 그 무고한 희생자의 이름은 리자베따, 전당포 주인의 여동생이었다. 분명 그녀는 그 시간에 다른 곳에 있어야 했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라스꼴리니꼬프는 노파를 죽이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언제나 우연을 끌고 들어오는 법. 그녀의 약속이 바뀌었었는지, 도끼에 찍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있는 언니를 발견한 채 어느새 방 한 가운데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서 있는 것이었다. 리자베따는 언니에게 학대 받던 가난한 백치이자 유로지비 (holy full, 바보성자)였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녀의 언니인 전당포 주인을 죽여서라도 보호하고 도와주고자 했던 부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그녀까지 죽여야만 했다. 유일한 목격자이기 때문이었다. 비극이었다. 이 의도치 않은 두 번째 살인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적 오류가 무고한 피를 흘림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기도 했다.


감칠맛 날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가 전체 소설의 약 1/6에 해당되는 내용을 살인 동기 위주로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마지막 장,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80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소설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추는 살인사건 이후부터 자백하기 전까지의, 약 2주 간에 걸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이 얽히고 설킨 실타래라고 볼 수 있다. 그 복잡한 실타래는 모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되어 주인공의 불안하고도 혼란스러운 심리 변화를 적나라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탁월한 도구가 되어준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러시아 특유의 등장인물의 다채로운 이름과 짧은 시간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의 맞물림, 그리고 등장인물의 화려하고 긴 언변에 휘둘려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소설의 마지막까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읽는 내내 잠시도 엉덩이에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인간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만큼 탁월한 작가가 또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책의 본론 부분이야말로 과연 진미였다. (사실 이 부분은 내가 중학생 시절 너무 지루해서 미처 다 읽지 못하고 포기했던 부분이다. 나도 ‘언젠가 한 번은 '죄와 벌'을 읽어야지’ 했던 많은 독자들처럼 이 부분에서 길을 잃고야 말았었다.) 다시 말해, 죄를 저지른 이후 그 죄를 자백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이 이 소설의 핵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죄와 벌'을 읽어냈다고 하는 건 이 부분을 얼마나 소화해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자백할 때도, 또 자백한 이후 시베리아에서 1년 간 감옥 생활을 할 때조차도 사실 그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지 못했었다. 비록 양심이란 것이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직접 깨닫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분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죄를 자백한 이유는 그저 그 편이 더 유리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 뒤에 덧붙여진 짧은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라스꼴리니꼬프는 구원에 이른다.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을 깨닫고 난 이후였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친 이후, 그는 단절되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열게 되어,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환희의 순간이었다. 소냐도 라스꼴리니꼬프의 내적변화를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그는 마침내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죽여 이중적인 생활을 해왔던 소냐, 그리고 타인을 죽이고 자신도 죽여서 정의도 자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단절과 소외, 괴로움과 고독 속에서 딴 세상을 마치 벌을 받듯 살아왔던 라스꼴리니꼬프, 두 사람 모두에게 그 구원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주위 환경이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얼어붙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마음엔 처음으로 기쁨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남아있는 7년이란 감옥생활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고난 가운데에도 분명히 존재할 사랑과 희망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구원은 철저히 외부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책을 통해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도 양심도 돈도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과연 열매를 맺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소냐의 사랑이 차디차게 얼어붙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마음을 마침내 녹여냈던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자유를 찾았으며, 바닥에서 하늘을 맛본 자였다.


책을 덮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구원의 감격이 밀려왔다. 읽는 내내 긴장을 동반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더럽고 추한 인간의 본성에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 역시 그러한 인간이란 사실에 처절한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책 속에 나온 죄도 벌도 모두 나를 빗겨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겉으론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나도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았고, 모든 것이 인과응보대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서로 죽고 죽이는 추악한 인간의 삶 속에도, 한 줄기 구원의 서광이 비취게 되면, 동일한 환경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며, 그 동일한 환경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타락에서 구원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결말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신학서적에서도 잘 그려지지 않는 기독교적인 구원이 오히려 이런 문학 작품에서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놀라웠다.


인간은 소원을 성취하고 싶어하며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 인간만이 가진 이성은 이때 강력한 힘이 되어주지만,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성이 아무리 옳고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이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파괴하는 방향으로 쓰이게 될 땐 이성조차 죄가 된다. 살인은 명백한 죄다. '죄와 벌'은 살인이 피해자만이 아닌 살해자 역시 결국엔 살해한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보여주었다. 살인은 타자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본질적으로 이중살인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한, 조금 더 넓은 해석을 적용해보자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살인이지만, 관계를 죽이는 것도 살인이라고 볼 수 있다. 관계의 단절과 고립, 파괴를 야기하는 모든 행위가 살인에 해당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인을 저지르고 난 이후 라스꼴리니꼬프의 삶은 죽음보다 못한 죽음의 삶이었다. 그건 죄에 대한 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관계의 죽임이 죄라면 그 죽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벌이다. 이런 이유로 구원은 관계 속에 임한다. 막히고 끊어지고 파괴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소냐의 사랑이 없었다면 라스꼴리니꼬프의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라스꼴리니꼬프의 구원이 가능했던 것은 소냐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냐의 사랑을 드디어 느끼고 그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사랑해준다는 것, 이는 언제나 우리에게도 구원의 빛이 임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은 구원의 통로로써 진정한 은혜이자 선물이다. 글을 마치며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관계 속에서 사랑을 주거나 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관계는 살아있는가.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1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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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죄 -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올바른’ 믿음보다 신뢰를 원하는가?
피터 엔즈 지음, 이지혜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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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환대하기.


피터 엔즈 저, '확신의 죄'를 읽고.


의심은 예고도 없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간다. 사소하고 우연한 일상의 조각들도 모두 의심의 통로가 될 수 있기에, 우린 달갑지 않고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한 이 손님의 방문을 결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의심은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이다.


이 방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주무시지도 않고 성실하신 의심님의 공격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급이 차단된 채 안에서 곪거나 굶어서 자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불청객을 오히려 환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은 무너지는 것이 결국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버티는 동안은 자신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믿음의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전사로서 명예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끝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처절한 인지부조화와 복합적인 합리화로 가득 찬 위선적인 자기기만, 그리고 파멸이다. 이 결말은 이 책의 저자, 피터 엔즈가 정의하는 '확신의 죄'의 열매가 아닐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교회 목사의 진공 포장된 설교와는 너무도 다른 현실세계를 경험하면서 의심의 순간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반석과도 같았던 안전지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크레바스 바로 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의심의 씨가 우리 마음 밭에 싹을 틔우고 속수무책으로 자라나면서 그 동안 믿어왔고 확신해왔던 세계는 소리 없이 은밀히 함몰되기 시작하고, 이는 곧 내면세계의 비가역적 붕괴를 가져온다. 이 부분에서 피터 엔즈는 말한다. 퓨즈가 끊어지고 믿음이 멈추는, 이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순간들을 통과하도록 묵묵히 인도하신다고. 아멘. 그렇다. 의심은 신앙생활의 적이 아니라 주요 요소이며, 의심과 신뢰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비로소 예수를 닮는 삶을 현실에서 일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믿음과 의심, 그리고 알고자 하지 않는 지혜로움에 대한 책이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의 시작이요 과정이자 끝"이라고 한다. 그는 확신을 추구하고 고수하는 신앙생활의 위험을 간파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믿음은 올바른 생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역설하는데, 그는 이를 '확신의 죄'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태도가 '죄'인 이유는, 우리가 확신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실재이신 하나님을 지적인 영역에만 가두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우상 숭배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지에 대해선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불청객, 의심을 환대하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부분이라 쓰고 '모든'이라 읽는다)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신앙을 가지게 된 건 사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직관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이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어 회심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단 하나라도 존재했었다면, 그 많은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들은 모두 퇴색되어 버렸을 것이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며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연습을 하는 우리들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신비’ 이외에 적당한 단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신비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자 예수를 닮는 삶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내는 과정 또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뢰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이성이 우리를 배신해도 그대로 남아있는 신뢰. 그것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확신에만 가득 찬 믿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확신에 찬 신앙, 앞뒤가 딱딱 떨어지는 깔끔한 신앙,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은 우리 자아에게 모든 통제권을 재부여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역했던 죄인의 옛자아가 적절히 타협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타인들에게 가치를 두지 않는 나르시시즘으로 살아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유있고 인자하며 친절한, 모든 일상이 그저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신앙인들은 스스로 회심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만큼 비겁하거나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책에서 예로 드는 것처럼, 시편과 전도서, 그리고 욥기에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어쩌면 당돌하고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 구약 기자들의 솔직한 고백들이 많이 담겨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무사안일, 안빈낙도는 기도제목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구약 기자들이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나서도 결국엔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을 볼 때,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피터 엔즈가 말한 것처럼 “어쨌거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신뢰하는 삶이란 흔들리지 않는 독단적 확신을 넘어서 우리 삶에 지속되는 신비와 불확실성을 정상적인 신앙의 일부로 포용하여, 확신이 사라졌을 때에도 확실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하며, 우리의 이성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함으로 우리의 통제권을 일체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한 신뢰는 우리의 지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길들일 것이고, 의심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은 하나님이 보내신 신성한 손님이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9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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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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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백치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읽고.

‘백치’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한영사전에선 ‘(informal) idiot, (offensive) moron, (offensive) imbecile’로 설명되어있다. 즉, ‘백치’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만약 누구든지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충분히 모욕적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설사 실제로 뇌에 의학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의학용어가 아니기에, 결코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는 단어인 셈이다.

‘죄와 벌’에 이어 이번에 읽은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소설 중 두 번째로 쓰여진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제목이 ‘백치’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찾아본 나로선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왜 그는 굳이 이런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했을까? (러시아어로 된 원제목 역시 같다)

그의 첫 장편소설인 ‘죄와 벌’의 경우, 책을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한 뒤에야 ‘죄’와 ‘벌’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말해 제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심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가 소설 전체에 깔려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많았다. 

반면, 이 책 ‘백치’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설의 초반부터 백치가 누구인지 공공연하게 드러나있을 뿐더러, 그 설정은, 다분히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새어버려 읽다가 자칫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책의 중간부분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심지어 반전 하나 없이 소설의 끝까지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치’가‘ 죄와 벌’보다 약 200페이지 더 길다.)

자정이 넘은 밤,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 숫자인 943 고지를 탈환한 뒤 책을 덮고, 나는 상하권 각각이 약 500페이지가 되는 묵직한 두 권의 책을 책상 위에 쌓아보았다. 한 손에 잡히지가 않는 이 두꺼운 책을 약 2주에 걸쳐 짬 날 때마다 읽어왔다. 무언가 해냈다는 약간의 뿌듯함도 느끼며, 모두 잠든 캄캄한 밤, 홀로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도스토예프스키는 1,000페이지에 달하고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이 장편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에서 ‘백치’로 설정된 주인공의 이름은 레프 니꼴라예비치 미쉬낀. 그는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서, 나이 스물 일곱의 젊은 공작이다. 그가 백치라고 불리는 상황은 내가 사전적 정의로부터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모욕적이진 않아 보였다. 공작 스스로도 그 사실을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간질병을 어릴 적부터 앓아왔다. 언제든 발작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 그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훌륭한 귀족이 공작을 돌봐주기 시작하면서 그는 간질병으로 인해 얻은 백치라는 딱지에서 조금씩 해방 받게 된다. 그는 최근 약 3년간 스위스에서 요양 겸 치료를 받다가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재정을 지원해줬던 귀족이 죽었기 때문이다), 반강제적으로 러시아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이 소설은 그가 러시아로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시작된다.

이 ‘기차 안’이라는 공간은 소설의 도입부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빠르펜 세묘노비치 로고진’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로고진은 공작과 같은 연령대였으나, 상인 집안 출신으로서 신분이나 교양, 혹은 배운 지식으로는 미쉬낀 공작과 비할 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 사는 눈치 만큼은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빨랐으며, 어떠한 일도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청년이었고, 게다가 곧 막대한 돈을 상속 받을 예정이었다. 

남들 앞에서 내세워 보일 만한 건, 비록 몰락했지만, 그나마 귀족 출신이라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미쉬낀 공작과, 믿을 건 돈 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 같고 실제로 돈의 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살아가는 인간 로고진과의 대비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책에서 의도한 중요한 설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설정이 비록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할지라도, 이건 표면적이라고 봐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그러한 대비 이면에 더욱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신분이나 돈의 유무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차이는 다름 아닌, 공작이 로고진과는 달리 ‘백치’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로고진이라는, 즉 공작과 대비되는 인물을 통해 '백치'에 씌어진 부정적인 의미를 해체하고, 대신 순수한 인간성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과정을 통해 '백치'의 역설적인 승화를 이루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공작이 가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 그 때묻지 않은 감성과 지성. 비록 바보처럼 어수룩하게 보여, 소위 시대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경우'에 맞지 않는 말과 생각, 행동을 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상하다는 시선도 곧잘 받지만, 결국 사람들은 공작에게 찾아와 진심을 털어놓고 고민을 얘기하며, 공작이 사실은 전혀 백치가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임을 마음 속 깊이서부터 인정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 책을 읽고 어른들 (소위 상류계층의 사람들이나 지식인들을 모두 포함)의 지혜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다시 물어본다. 세상의 지혜는 그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나 온갖 미디어를 통하여 몇 수 앞을 내다보라고, 그래야만 남을 밟고 설 수 있다고 우리들을 부추긴다. 그러나 그 듣기 좋은 말들의 향연도 모두 이 세상이 피라미드 경쟁체제라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살아남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다. 내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시스템.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자가 과연 가장 강하거나 가장 지혜로운 자일까. 사람이 아프면 그것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거나 아무 계산 없이 도와주려는 마음이 고작 유아적인 행동으로 치부되고 말아야만 하는 것일까. 철저한 이해타산적인 계산을 진행하여 나 이외의 모든 타자를 내가 중심인 체스판 위에 올려놓고 넘어서거나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또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면서 은밀하게 타자를 속여서 이윤을 얻어내는 것이 과연 지혜자의 모습일까. 과연 시대의 '어르신'들이 공들여 쌓아놓은 'norm'에 따라, 그것의 도덕적 가치나 정의로움을 따져보지도 않고, 맞춰 살아가는, 소위 '처세술'이 지혜의 다른 이름일까. 만약 그것이 지혜라면, 어찌 지혜의 열매가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며 살인까지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행위를 낳는단 말인가. 그래 놓고도 과연 그것이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참지혜란 피라미드라는 사탄의 체제를 해체하고, 모함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며 나와 타자의 수직적인 위계를 무너뜨리는 나라에 있지 않을까. 

이 시대에, 시대가 정의하고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겐 참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는 지혜롭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보 같다고 무시 받고 천대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책의 '백치'처럼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로고진은 결국 '나스따시아 필리뽀브나 바라쉬꼬바'를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살인자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징역을 가게 된다. 주어진 로고진의 캐릭터를 고려할 때 그리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뜻밖인 첫 번째 사건은 공작이 살인자인 로고진을 나무라지도 않고 죽은 몸이 된 나스따시아와 함께 로고진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었다. 두 번째는 공작이 다시 백치가 되어 스위스로 보내지게 되는 부분이었다. 그는 스위스로 보내지기 훨씬 이전 상태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다시 스위스에서 공작의 치료를 맡은 슈나이더 교수는 공작의 지능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넌지시 알리기까지 했다.

첫 번째 사건은 공작의 순수함으로 설명이 대충 가능하다. 무리가 좀 있지만, 살인자까지도 품는 마음으로 해석도 가능하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어린애처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냥 얼어버렸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은 내게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참지혜로 대변되는 백치가 결국엔 참지혜인 척하며 지혜의 자리에 앉은 어른들의 norm에 의해 결국엔 꺾여버린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작은 예빤친 장군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주위 사람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었겠지만, 결국 공작은 희생당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백치가 모든 사람에게 전염이 되어 norm을 해체하길 바랐던 나의 소망은 굳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예수가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이나,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죽지 않고 뛰어내려 결정적인 순간에 상황을 단번에 전복시키길 기대했던 사람들의 바람과 한낱 같은 맥락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진행시키다 보니, 처음에 내가 물었던 질문, "왜 저자는 백치라는 제목을 사용했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래서 난 다시 묻는다. 과연 누가 백치였던가. 등장인물 소개에서도 버젓이 미쉬낀 공작이 백치라고 나와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저자 도스토예프스키가 파놓은 함정이 아니었을까. 공작이 아닌 나머지 모든 사람이 바로 진짜 백치 아니었을까. 

인간 심리를 철학자나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들보다도 더 세밀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소설에 모두 녹여낸 도스토예프스키. 그 유명한 철학자 니체도 그를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고 고백하지 않았었던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을 좀 더 알아간다. 어떻게 인간 심리를 문학 작품에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그의 작품 중 읽을 책이 읽은 책보다 아직 훨씬 많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기대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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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의 기도 - 개정판
김영봉 지음 / IVP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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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 사귐이 있는가?

김영봉 저, '사귐의 기도'를 읽으며.

몇 달이나 꽂혀 있었을까. 며칠 전, 새롭게 읽을 책을 하나 고르려고 뻔한 내 책장을 찬찬히 훑는 순간, 이상하게도 내 눈은 김영봉 목사의 ‘사귐의 기도’에서 멈췄다. 예전에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이후 책장에 꽂아두고 한 번도 끄집어낸 적이 없던 책이었다. 항상 다른 책에 우선순위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나로선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던 경험이라, 책을 꺼내어 앞부분을 들춰보다가 순식간에 수십 페이지를 읽고 나서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잠시 책을 덮고 조용히 묵상하며 나의 내면세계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되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었을 무렵, 고질적으로 영과 육을 나누는, 공식화된 이분법에서 점점 벗어나면서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의 책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사적인 복음의 충만함이 결코 공적인 복음으로 자연스레 넘쳐 흐른다거나, 누적포인트 전환하듯 바꿀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신앙의 본질이자 전부라고 여겼던 '개인 영성'을 위한 책들과는 부지 중에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책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가진 복음이 오로지 개인적인 경건함과 성숙함만을 향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함몰되어, 내가 아닌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타자들을 돌아보는 눈을 다시 잃게 될까 두려웠고, 개인 간의 거짓과 위선이 아닌 구조적인 불의와 악습 같은 것들로부터 저항하는 마음 보다는 그저 참고 견뎌내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듯한 삶을 또 다시 맹목적으로 살아갈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것이다.

24시간 예수 바라보기로 대표되는 개인 영성을 강조하다 보면, 희생자의 희생과 견뎌낸 자의 수고함을 치하하고 박수를 보내는 일에는 게으르지 않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희생하고 견뎌내는 자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와 응원도 아끼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진 너무나 좋다. 그러나 그러한 불필요한 희생과 견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놓치기 쉽다는 점이 간과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체제로 발현하는 사탄의 모습을 대적하기는 커녕 용인해주는 꼴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사탄은 "영적"인 존재에 국한되어야 할뿐, 가시적인 체제로 드러나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한 신앙은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적극적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인 사회 참여 자체를 불경하게 여긴다거나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여기는 경향까지도 갖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개인은 피해자나 희생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어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시스템, 즉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인 부조리를 인정하고 합리화시켜 버리는 역할까지도 충실히 해낸다 (비록 뜻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오로지 개인의 평안을 더 도모하고 의지를 더 굳건하게 만들어서, 어쨌거나 그 역경을 견뎌내도록 개인을 유도한다. 또한, 세상은 장망성이기 때문에 그저 그런 시련 속에서 꾸준히 경건함과 성숙함을 도모하여 죽기까지 지속할 것을 가장 큰 사명이자 신앙의 유일한 지향점이라고 판단하도록 간접적으로 조장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으로부터 그렇게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구조를 인정하고 아무런 저항이나 참여를 거부하면서 개인의 영적 상태만을 돌보는 행위가 과연 신앙인의 참된 모습일까? 거짓과 불의에 분노하거나 저항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참고 견대내면서도 묵묵히 바보처럼 착하고 바르게 살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과연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일까? 과연 그 모습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원하시고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습일까?

머리가 커지면서 여전히 개인 경건과 성숙에 함몰되어 있는 목사들의 설교를 언젠가부터 더 이상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교만한 자로 낙인 찍고 속으로는 온갖 정죄를 단행하면서도, 겉으론 마치 사려 깊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곤 했다.

유전자의 기능을 생체 내에서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특정한 유전자를 제거해보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물처럼 공기처럼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나보면 그 공간이 가진 편협함과 가식과 위선으로 오염된 모습과 더불어 조금은 더 객관적인 위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안에서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고 거기에 맞는 설교를 공급받으며 살아갈 땐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순수함은 배타적인 분리의 칼이 되었고, 그들의 열심은 더 큰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게 막는 눈가리개가 되어주었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 칼과 눈가리개로 훌륭하게 무장한 인간이 사실 작금의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왔던 주된 세력의 실체 아닌가. 어쩌면 개독교라는 말을 잉태한 산모 역할을 담당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즉 개인 영성으로의 치우침은 초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하나님나라의 모습과는 (믿지 않는 자들이 봐도 충분히 알 만큼) 거리가 멀어지도록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개인 영성 훈련 관련 책들을 멀리하게 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정치학적인 인간사회라는 현장과는 무관한, 마치 진공 속과도 같은 공간에서만 이뤄질 것 같은 가르침들을 계속 그런 책들을 통해 공급받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르침들과 내가 일상으로 살아내는 현실과의 간극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고, 그 괴리감은 이내 내게 죄책감으로 작용했으며, 그 죄책감을 나는 또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부족해서 그렇구나.'라는 말로 어떻게든 이해하고 합리화하려는 나의 몸부림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약의 희년법은 사적인 복음보다는 복음의 공공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난이 되물림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법을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큰 두 기둥인 정의 (미슈파트)와 공의 (쩨다카)를 근간으로 하여,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헤세드)의 실현이 바로 희년법의 의미 아니었던가. 예수의 핵심 사상 역시 '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님나라'라고 나는 믿는다. 구약이 그저 배경이 되는 신약이 아닌, 구약을 전제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더 크고 풍성하며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하나님말씀이 바로 성경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 24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하는 데에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언제나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한 법. 24시간, 아니 25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한다고 해서 희년법과 같은 하나님나라의 법이 아름답게 표현된 실체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복음의 공공성을 함께 모여 추구하는 것이 타당한 수순 아니겠는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진행되고, 다시 난 책을 폈다. 그리고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또 다른 내 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공적 복음의 중요성을 외치는 것까진 좋지만, 내가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똑바른가 하는 질문. 억압받는 타자에게 자유가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들이 바라는 무수히 다양한 것들을 어떻게든 성취가 되게 해주려고 도와주는 일이 과연 복음의 전부인가 하는 질문. 아무래도 사회정의 실현과 약자들을 돕는 일 쪽으로 알아가다 보면, 삶이 무미건조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삶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고, 해서 뭐하나 하는 체념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게 인생이려니 하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인이 되어간다. 예수는 서서히 증발되고 예수가 했을법한 행위들만 남아 복음을 실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억압된 자가 해방되고, 가난한 자가 구제 받는 등의 일들이 일어날 땐 보람과 희열도 느끼지만, 그것 역시 여전히 억압받고 소외 당한 무수히 많은 약자들을 생각할 때면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그러면 감사와 기쁨은 순식간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내 삶을 다 바쳐도 구제하지 못할 약자들의 부르짖음 소리에 눌리고 만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이 아닌 예수의 공생애 기간 때의 행적들을 좇아 일상에서 실천하며 살아내려는 초기의 의도와는 달리, 그 끝은 여느 인간 지혜자가 도달하는 최종결론처럼 '삶의 무의미함'이 되어버린다.

우익의 복음에 천착한 삶에서 염증을 느꼈지만, 좌익의 복음에 길들여지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몸부림에서는 허무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결국 그 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을까. 예수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존재 자체가 나와 함께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하나님과의 사귐이 내게 있는가. 그것으로 나는 기뻐하는가. 감사해 하는가. 혹시 그것 없이 내가 참여하고 도운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함으로만 나의 훈장을 하나씩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썩어질 면류관을 난 사모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예수의 사상과 행적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명분 하에 결국 내가 했던 건 예수를 증발시키고 나의 행위만을 남기는 짓을 하진 않았을까.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계된 모든 질문의 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거룩한 시간과 공간. 그래서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웃을 향한 사랑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는가.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이 책을 가능한 천천히 읽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의 내용보다는 이러한 질문으로 묵상하며 성찰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좌우에 치우친 복음이 아닌 하나님나라 복음.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지만, 언제나 이런 점검을 하며 앞길을 내디딜 수 있기를.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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