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영향력 - 선교적 삶과 비즈니스 선교
김진수 지음 / 선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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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영향력: 소금의 바른 존재감 드러내기.


김진수 (Jinsoo Kim) 저, '선한 영향력'을 읽고.


책을 덮고 조용히 내 가슴을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소금인가? 맛을 잃진 않았는가? 아니면 너무 강한 맛을 내어 음식 맛을 버리고 있진 않는가?”


책 중간 즈음에 소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알던 얘기지만 선한 영향력이라는 컨텍스트에서 읽었을 때 새롭게 다가왔다. 때론 몰랐던 것이 아닌 이미 알고 있던 것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추출해낼 때 갑절의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번이 그랬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음식은 맛을 내지 못한다. 반대로 소금이 강한 맛을 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싱거워도 짜도 음식은 제 맛을 낼 수 없다. 소금은 음식이 필요로 하는 만큼 적당히 들어가 음식 고유의 맛을 살려야 한다. 소금의 존재감은 음식에서 소금 맛을 내게 될 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소금 자체의 맛은 사라지고, 음식에 스며들어 음식과 하나가 되어 음식 본연의 맛을 내도록 도와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늘 소금은 음식 옆에 있으면서 음식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쓰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이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선한 영향력'의 실체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외딴 산 속이 아닌 세상 가운데 존재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어두움이 존재하기 때문에 빛이 필요하고, 음식이 부패하지 않고 제 맛을 내기 위해 소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현실에서의 빛과 소금들은 너무나도 다르다.


어두움과 함께 있어야 할 많은 빛들은 이미 자칭 빛들로 가득한 조명상사 안에 바글대고 있다. 빛들끼리의 교류에만 머물며,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적인 안위만을 간구한다. 어두움을 이기기 위해 갑이 되어 다스리고자 한다. 어두움은 빛이 피해야 할 대상이자 빛을 공격하는 대상으로 오인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어두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빛은 빛끼리 있다가 소멸된다. 선한 영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금은 어떠한가. 소금을 자처하여 썩어가는 음식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많은 경우 정체성이나 사명을 잃어버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반면, 음식 맛이 소금 맛이 될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어 선전하기 좋아하는 경우도 많다. 두 경우 모두 소금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된다.


자신이 소금임을 아는 정체성 인식, 음식을 부패하지 않고 제 맛을 내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명 인식, 이 두 가지를 모두 했다고 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럴싸한 이론적인 구호만으론 어림도 없다. 현실은 소금으로 하여금 음식 옆에 대기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필요할 때 언제든 음식에 뿌려지도록, 그래서 소금 맛은 사라져도 음식 맛이 살아날 수 있도록 요구한다.


선교지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인과 현지 상황과는 별 상관없이 마치 '따로국밥'처럼 섬으로 홀로 거룩하게 존재하거나, 현지인과 현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온 진공 속 프로그램으로 선교를 달성하려고 노력한다. 안타까운 이 두 경우 모두 소금이 음식에 제대로 녹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현실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자는 음식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곁에서만 고결하게 서성이고 있는 경우가 되겠고, 후자는 음식 맛을 소금 맛으로 만들어버린 원맨쇼의 경우가 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소금은 소금으로 존재할 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소금은 음식에 스며들어 음식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소금은 음식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금의 숙명이자 존재감의 발현이다. 스며드는 것, 바로 선한 영향력의 시작이다.


저자인 김진수 장로는 자신을 선교사 모자를 쓰지 않은 선교사라고 말한다. 그는 신학교 배경이 없을 뿐더러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해당되는 후원 교회도 없고 파송되지도 않았다. 그는 캐나다 서부에 위치한 인디안 원주민들을 위하여 소금이 되기로 한 귀한 평신도 선교사다.


후원 교회나 후원금이 없이도 선교가 지속되는 이유는 그가 자비로 시작한 비지니스 덕분이다. 그는 이미 창업에 성공해본 유경험자다. 실수나 실패를 포함한 과거의 모든 점들이 이어져 하나의 선이 만들어지는 기적을 맛보고 있는 자이며, 그 과정 자체가 곧 선교라고 믿는 자다. 그 선들은 머지않아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말하는 비지니스 선교는 ‘선교로써의 비지니스 (BAM: business as mission)’이다. 기존에 있던 ‘선교를 위한 비지니스 (BFM: business for mission)’가 아니다. 둘은 큰 차이가 있다. BFM의 경우, 비지니스는 선교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다. 비지니스에서 얻어낸 결과물, 즉 물질적인 열매가 선교를 위해 쓰여지는 구조다. BAM에서는 비지니스의 결과 뿐 아니라 모든 시작과 과정 자체가 선교다. 소금으로 비유를 하자면, BFM은 소금이 들어가 만들어낸 음식으로 얻은 수입으로 선교를 하는 것이고, BAM의 경우는 소금이 음식 옆에 내팽겨치지 않고 음식의 신뢰를 얻으며 대기할 수 있게 되는 과정부터 서서히 음식에 스며들어가는 과정 모두가 선교와 동격이 된다.


언젠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묵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한 과정이 곧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메시지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궈낸 어떤 큰 성과가 필요하신 분도 아닐 뿐더러 그런 것들보단 우리가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더 큰 관심이 있으시다고 믿는다. 우리의 목적 성취도 그분에게는 동일한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사는 삶은 어떤 특정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가 되는 이유도 된다.


나도 소금으로써 녹아들고 스며들길 원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정직하게 신뢰를 얻으며 음식을 위해 기꺼이 쓰임받는 하나의 소금이 되길 원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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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언어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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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관의 유쾌한 공존.


프랜시스 S. 콜린스 저, '신의 언어'를 읽고.


군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던 나는 그 해 제대를 했다. 2000년도는 내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하나의 작은 이정표가 되어주었지만, 인류 역사에서는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진 놀라운 해였다. 세계적으로 10년이 넘게 투자된 Human Genome Project가 완성되던 해였기 때문이다. 그 해엔 네 종류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전체 약 30억 개 길이의 인간 유전체 서열이 모두 밝혀졌음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공개되었다. 우리 몸의 설계도 초안이라 할 수 있는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 지도가 드디어 처음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 유명해진 제임스 왓슨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Human Genome Project를 끝까지 이끌었던 책임자로서 2000년 6월 백악관에서 열렸던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성을 축하하며 선포하는 감격적인 자리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옆에 서있던 사람의 이름은 프랜시스 S. 콜린스였다. 그는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전문 과학도서도 아니고 신학도서도 아니며 자서전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진솔한 목소리가 곳곳에 잘 침투되어있어 이 모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책이다.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Human Genome Project를 이끈 과학자로서,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를 거쳐 나와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아내며 유신론적 진화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과학과 신앙 사이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하고 답을 해온 선배로서의 프랜시스 콜린스를 우린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논리정연하면서도 진정성이 여과없이 드러난 필체는 덤이다.


생물학자인 나에게 그의 목소리는 이 분야를 앞서간 그 어느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호소력이 있었다. 진지하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모두를 포함해서, 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그의 진솔한 내러티브는 분명 하나의 빛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어두웠던 부분을 밝혀줄 것이다.


그가 이끈 프로젝트가 역사상 처음으로 밝혀낸 것은 인간의 모든 염색체의 뼈대가 되는 DNA의 염기서열이다. 그는 이를 감히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다.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관여하여 어렵사리 밝혀낸 그 암호와도 같은 염기서열은 분명 현대과학과 지성이 일궈낸 쾌거일진데, 그 프로젝트 리더가 자신의 입으로 그 암호를 ‘과학의 언어’가 아닌, 종교적 색채가 단박에 드러나는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린 과학과 신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제목만 곰곰히 씹어봐도 우린 그 안에서 과학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잡음없이 공존하며 더욱 풍성하게 서로를 강화시키고 성숙시키며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생물학적 진화를 정의할 때 필수요소인 DNA 변화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진화를 엄연한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 진화의 정교한 메커니즘이 다름 아닌 신의 창조방법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렇다. ‘유신론적 진화’라는 말이 주는 불완전한 뉘앙스 때문에 책에서 ‘바이오로고스’라 칭하자고 제안까지 하는 그의 관점을, 나도 한 명의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받아들인다.


엄연한 과학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화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만 하면 알러지 반응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여기거나, 진화나 과학을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거나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말해주고 싶다. 과학과 신앙은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으며, 그 유쾌한 공존이야말로 원래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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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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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된 아름다움을 만나다.


무라카미 하루키 저,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때묻지 않고 홀로 빛나는 원석이 카프카라면, 손이 많이 가는 정제과정을 거쳐 마침내 간결함과 고유함의 옷을 입은 보석은 하루키다. 함부로 던져진 것 같은 무례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성실하고 고운 정성이 자리잡았다. 정갈하고도 완숙한 글을 만났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그를 만난 건 행운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갈한 책을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는 ‘죽음’이다. 죽음은 곧 상실, 이 책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죽음은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흠뻑 적시고 있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와 직간접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놓인 소수의 등장인물 중 절반이 실제로 죽음을 맞이했다.


고등학생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의 자살은 이 책에 등장하는 첫 죽음이다. 이 죽음은 이 책을 구성하는 중심 이야기의 발단 역할을 하며, 이 책의 마지막 죽음인 나오코의 자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그 사이에 소개되는 죽음도 넷이나 된다. 먼저 과거에 있었던 나오코 언니의 자살, 역시 과거에 있었던 미도리 어머니의 병사, 그리고 와타나베가 직접 만나기도 했던 미도리 아버지의 병사, 마지막으로 와타나베의 학교 선배 나가사와의 애인이었던 하츠미의 자살이 그것이다. 죽음을 육체적 의미만이 아닌 정신적 상실의 관점에서 본다면, 와타나베의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특공대의 갑작스런 사라짐까지도 이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이 책은 하나하나의 의미있는 죽음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며 살아남은 자였다.


소개된 죽음의 절반 이상이 자살이라는 점은 나를 슬프게 했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원인을 불문하고 비극이다. 하루키 역시 기즈키나 나오코, 나오코의 언니, 그리고 하츠미의 자살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와타나베라는 남자 주인공의 눈으로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상의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자살을 포함한 죽음, 죽음을 포함한 상실은 우리 삶의 끝이 아닌 삶의 현재에서 버젓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겠지만, 역시 죽음과 함께 현재 숨쉬고 있는 존재다. 죽음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으며, 또 우리 바로 곁에 있다. 상실의 아픔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Loss is all around.


상실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상실은 어느덧 높아졌던 인간의 자의식을 낮아지게 만드는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진다. 또한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를 직시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겸허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특급 도우미이기도 하다. 우린 상실로 인하여 같아진다. 상실은 인간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도구로 역할한다.


비록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죽음으로 커다란 상실을 경험했지만, 하루키는 그에게서 자살의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오히려 자살을 스스로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 (기즈키, 나오코, 하츠미)에게 힘이 되었던 존재였으며, 곧 암으로 죽을 상황에 처했던 사람 (미도리의 아버지)에게까지도 편하고 뭔가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음의 이미지가 아닌 삶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하루키는 와타나베의 이미지를 죽음이 아닌 삶으로 부여함으로써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일종의 희망을 보여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와타나베의 몸과 마음을 몇 년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나오코의 죽음은 어찌보면 그에게 부여된 상실의 시대를 지나 꿋꿋하게 생생한 일상을 살아내가는 미도리와의 관계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버젓이 존재하듯이 삶 또한 그렇다. 죽음과 삶은 시작과 끝이 아닌, 공존하며 다른 두 개의 존재일 뿐이다. 우리의 삶은 죽음과 삶의 복잡한 혼합물일지도 모르겠다.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그런 존재였다. 나오코가 죽음이었다면 미도리는 삶이었다. 둘은 함께 존재했으며 서로를 알았다. 그 둘 사이에 있던 와타나베는 먼저 간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옆에 와있던 삶에 안착한 것이었다. 그렇다. 이 책은 나오코로 시작하여 미도리로 끝을 맺는다. 상실의 시대에서도 삶은 끈질기게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지만 지나가버리는 죽음을 먼저 보내고 우리를 살아남게 해주는 것이다. Life is all around.


책을 다 읽고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찾아 들었다. 정제된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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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왕조실록 - 이야기 역사신학, 열왕기서 새로 읽기
배경락 지음 / 샘솟는기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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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멸망사에 흐르는 예언자적 목소리.


배경락 저, 도서출판 샘솟는기쁨 출판, ‘성경 속 왕조실록'을 읽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여 동일한 시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해서,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네 개의 책이 신약의 사복음서라면, 구약에도 동일한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두 권의 책이 있다. 열왕기서와 역대서가 바로 그것이다. 두 책의 구체적 차이는 신학자들의 몫이겠지만,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도 그 명징한 차이는 직접 읽으며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동일한 왕의 통치가 기록된 부분을 간단히 비교만 해봐도 두 저자의 서로 다른 목적이 무엇인지 충분한 짐작이 가능하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멸망사다. 긍정적인 뉘앙스로 동일한 역사를 기록한 역대서와는 달리, 열왕기서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꽤 우울하고 부정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열왕기서 저자의 역사 기록 목적은 단순한 역사 전달이 아닌, 그 역사라는 증거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메시지 전달에 있다.


열왕기서의 신학적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기술해가며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곧 나그네된 신분을 잊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겼던 것에 대한 사실적이고 통렬한 비판, 그리고 그것을 통한 반성과 회개의 촉구이며, 예언서들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는 곧 이스라엘의 회복 소망으로도 이어진다. 열왕기서는 역사서이지만 그 저자는 역사가적 입장이 아닌 다분히 예언자적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과 반성은 회복을 소원하는 간절한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바람은 은혜가 풍성하시고 죄인들의 돌아옴을 언제나 기쁘게 받아주시며 언제나 동일하시며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언뜻 암울하게만 읽힐 수 있는 열왕기서의 기저에는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목회자나 일반 성도 모두가 읽기 쉽게 쓰여졌다. 전문적인 신학지식이 없어도 이 책을 읽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저자의 쉽고 친절한 설명 덕분에 성경에 대한 관심과 성경을 직접 읽고싶은 마음이 증대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 책은 열왕기서의 한 장 당 한 챕터씩 다루고 있지만, 자세한 주해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저자의 개인적 묵상만을 옮겨놓은 묵상집도 아니다. 이 책은 그 두 스탠스의 경계에 위치한다.


또한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각 챕터 당 이스라엘 역사를 열왕기서 순서에 따라 네 페이지 안팎으로 쉽고 간단하게 풀어주면서, 매 챕터의 끝마다 항상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상황과 연결을 시키며 현재를 살아내는 우리에게 필요한 반성과 회개, 개혁을 예언자적인 목소리로 덧붙이고 있는 부분이다.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세상과 구별되어 세상를 정화시키고 사랑과 섬김을 비롯한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할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버린 한국의 씁쓸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있다면, 저자의 이러한 목소리는 결코 작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라는 정체성으로 시작한 이스라엘의 멸망 수순은 내리막길을 걷고있는 한국 기독교 상황과도 놀랍도록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사적인 안위만을 위한 수단 정도로 전락해버리고, 하나님나라가 개인의 평안만을 뜻하는 용어로 추락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예언자들의 목소리일 것이다. 예수의 태어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을 강조하여, 죽으면 어딘가 있을 천국으로 가는 구원 티켓을 얻거나,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마치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기는 타락하고 혼합된 믿음이 아닌, 예수가 공생애 기간 중 행하신 일들에 흐르는 하나님나라, 구약이 동일하게 외치고 있는 정의롭고 공의로운 세상을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구현해내는, 행동하고 살아 숨쉬는 믿음일 것이다. 배제와 혐오를 배제하고 혐오할 수 있는 바른 눈과,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린 약자들을 돕는 사랑의 마음과 손과 발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과거 패망의 아픈 원인을 기록한 열왕기서의 저자와 이 책을 쓴 저자의 바람일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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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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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을 통해 본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주제 사라마구 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산둥 수용소’에서 랭던 길키는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충분히 넘어서며 그것들보다 더 깊이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을 보고한다. 그리고 그 ‘이기심’은 책에서 인간의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그 책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도 취할 수 있으며 나중엔 그 행동까지도 합리화해버리는 존재였다. 인간의 관대함과 인격적 성숙이 한낱 껍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그 껍데기 안에는 이기적이고도 위선적인 자아가 숨어있어 언제든 상황이 허락할 때면 즉시라도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를 내어 단번에 인간의 몸과 마음을 장악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면서 난 랭던 길키의 ‘산둥 수용소’가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두 책은 큰 차이가 있다. 하나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동일하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만, 적어도 산둥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눈은 멀쩡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산둥 수용소에선 비록 강압적이었지만 외부세력이었던 일본군에 의한 질서가 적어도 존재하긴 했다는 것이다. 이 책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무대로 나오는 수용소는 산둥 수용소에서 이 두 가지 차이를 제거하면 이해하기가 수월해진다. 외부의 개입이 없는, 눈먼 자들로만 이루어진 수용소. 생각해보라.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내부의 상황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아주 기본적이라 할 수 있는, 먹는 것과 입는 것, 자는 것과 싸는 것이 어떻게 해결되어질지.


더욱 극한 상황의 연출은 더욱 깊은 내면에 위치한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실제 역사로 자리잡고 있는 ‘산둥 수용소’와는 달리 ‘눈먼 자들의 도시’는 순전한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읽어나가며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거기엔 동일한 질문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진지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아주 기본적이고 철학적인, 어쩌면 신학적일 수도 있는 질문. “인간의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인간인가?”


어느 마을 사거리, 빨간 신호등 때문에 멈췄던 차들은 기다렸던 파란 불이 들어왔기 때문에 일제히 다시 가속페달을 밟아야 할 참이었다. 그런데 맨 앞의 차 한 대가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른 채 계속 멈춰있다. 운전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멈춘 차 안의 운전자는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를 정도로 딴짓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신호가 바뀐 것을 몰랐던 건 맞다. 그러나 알 수가 없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싶지만, 그 남자가 갑자기 눈이 먼 것은 사실이었다.


이 책은 위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시작을 한다. 저자는 그저 한 남자에게 벌어진 기이한 일을 기록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 일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그 남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 차를 도둑질한 남자, 눈먼 남자의 아내, 함께 안과를 찾아갔을 때 탔던 택시의 운전수, 안과 의사, 간호사, 안과에 온 환자 몇 명을 시작으로 점차 눈이 머는 현상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까지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다. 눈이 멀어버린 상황에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안과 의사였지만 아내는 남편을 돕기 위해 수용소로 함께 향했다. 자신도 눈이 멀었다고 모두를 속이면서 말이다.


전염성이 확인되자 국가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눈먼 사람들과 그들과 가까이 있어 보균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어떤 낡고 버려진 정신병원 건물에 강제 수용되었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격리된 그들에게 먹을 것을 비롯한 생필품을 전달해주었지만, 군인들도 나중에 가선 모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에 누구도 다른 누구를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라진 감시와 통제는 자유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모든 사람이 눈이 먼 세상에서 자유란 어떤 의미일까? 혹시 자유라는 것은 눈이 보여야만 가능하고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


수용소 안에서라면 동병상련이란 이유로 서로를 더 공감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남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먼저 챙기게 되는 파렴치한 존재, 우리 인간 말이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눈이 보일 때 마음껏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졌다. 그러나 그 자유라는 것은 대부분 인간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도덕성과 합리성에 반하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은밀하고도 수치스러운 행위들이 난잡하게 행해졌다. 무정부상태. 그것도 서로 보지 못하는 세상.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이미 정상적인 눈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도 예전의 사고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동물, 아니 어쩌면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고통의 의미를 묻고 수치심을 느낄 수 있으며, 누군가 인간 내면에 입력해 둔 도덕성을 인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백 명이 넘는 인원이 수용된 곳이라 아무런 질서도 없는 상황에서는 힘있는 자가 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총을 가진 어떤 깡패가 그곳에 조달되는 음식을 중간에서 가로채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폭력을 무기로 돈과 여자를 요구했고, 유일한 먹을 것을 포기하고 죽느니 그들의 요구에 따르며 살아내는 것을 선택했던 눈먼 자들은 그 굴욕적인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차피 싸게 될 것들을 먹고 하루를 더 살아내기 위해 아내를 강간의 제물로 바치는 남편들을 보면서 난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일었으나, 나를 그 상황에 투영시키자 그 분노는 연민과 애절함으로 바뀌었다. 나는 달랐겠는가 묻는다.


의사의 아내는 유일하게 전염되지 않아 눈이 정상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그 사실을 일부러 숨겨오고 있었지만, 비참하고 굴욕적인 상황을 맞이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그 깡패를 죽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깡패는 총이 있었고 그녀에겐 달랑 가위 한 자루가 있었다. 그러나 그 깡패는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가위는 총을 이겼다. 다른 동료 여성이 그 깡패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이 잠입하여 그의 목을 따버렸던 것이다. 첫 번째 살인이었다. 그녀에겐.


군인들도 다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에 수용소는 더이상 수용소가 아니었다. 이를 나중에 알게된 눈먼 자들은 누군가에 의한 방화 때문에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도 달라질 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밖은 커다란 수용소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길거리는 배설물로 가득했고,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뒹굴고, 그 시체를 뜯어먹는 개들이 가득했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볼 수 있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그녀가 본 세상은 처참했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의사의 아내의 이타적인 행동 때문이다. 그녀조차 차라리 자신도 눈이 멀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일행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애썼다. 일행을 모두 집으로 데려가서 남은 물을 함께 마시는 장면에서 난 경건해지기까지 했다. 저자는 눈먼 자들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고, 그녀를 통해서는 어떤 희망과 인간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지만 인간에겐 희생과 헌신을 양날개로 하는 이타심과 사랑이 이기심 말고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9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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