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유진 피터슨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묵시와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다.


유진 피터슨 저,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을 읽고.


때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운 압축성과 설명할 수 없는 깊음이 진득하게 글에 배어있어,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생각의 묵직한 파편들을 그대로 떠안은 채 그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한 챕터 한 챕터를 천천히 읽어오면서 느꼈던 감동과 깨달음이 여전히 범람하여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막상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할 말을 잃고야 만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을 유진 피터슨이라는 신뢰할만한 눈을 통해 다시 느껴볼 수 있었다. 비록 아직까진 요한계시록에 대해 내게 먼저 들어간 잘못된 편견과 착각들이 바른 이해보다 내 안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 책은 내게 그것들을 무력화시키고 해방시켜주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해주었다. 마침내 드러날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함께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귀결되는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견지하기로 마음을 다잡는 하나의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유진 피터슨은 요한계시록이 우리를 각성시켜주는 힘을 가진다고 말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 읽는 책이 아니라 상상력을 소생시키고자 읽는 책이라고 말한다. 사도 요한의 묵시는 시인의 언어를 구사하여 오래되어서 무뎌진 진리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어 진리를 진리답게 우리에게 다시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새롭게 깨어있도록 도와준다.


이 책은 요한계시록의 강해가 아닌 저자의 묵상이자 강의록이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이 무슨 내용인지 조목조목 풀어주는 방식이 아닌, 요한계시록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일상의 구체적인 언어를 통하여 풀어주는 방식을 취한다. 요한계시록 본문의 순서를 따라가되, 그 본문들이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을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해석하여준다. 유진 피터슨은 현실에 기꺼이 몸담고 있으면서 현실을 품고 현실을 리드하는 영성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사도 요한을 신학자이자 시인이자 목회자로 해석하여 소개하는 대목에서 나는 동일한 해석을 유진 피터슨에게도 적용되어야 함을 간파했다. 그 역시 하나님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진지하게 연구하는 신학자이고, 철학자의 조심성과 도덕주의자의 진지함을 충분히 넘어서는 호탕함과 대담성을 겸비하여 능숙하고 정확하게 상상의 언어를 사용하기에 부족함 없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시인이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 생활이 모든 삶의 중심이 된다는 확신을 품고 성심껏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과 기쁘게 대화하는 목회자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통해, 내게는 무겁고 무섭기도 했던 요한의 묵시가 내가 속한 현실 속으로 과감히 끌어들여지는 것을 감사하게 즐길 수 있었다.


여러 챕터에 걸쳐 계속해서 강조되어지는 단어 중 하나는 '예배'였다. 예배는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몰입하는 행위이자, 우리의 방향을 하나님 중심으로 재정립하게 해주는 행위이다. 그래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중심적 행위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현실을 등한시하고 영과 육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세계에서의 예배는 인간의 사적인 유익처와 도피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하지만 예배를 비활동적이며 세상사에 비추어 볼 때 부조리하다고 판단한 나머지 예배를 그만두고 세상에 무언가 즉각적인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예배를 그만두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서 인간이 행하는 일로 초점을 바꾸어 예배를 변질시키는 사람들 역시 삶의 방향을 잃었다는 측면에선 마찬가지다.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삶이 예배라는 말을 오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을 소멸해서도 안되며, 예배가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말 뒤에 숨어 은밀히 영지주의적인 안위만을 구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배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거룩하셨듯 거룩하도록 일상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일 것이다.


또한 원제목, 'Reversed thunder (역전된 천둥: 기도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때 일어났던, 요한계시록 8장에 기록된, 하늘의 침묵의 이미지가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말을 경청하시는 하나님이 언제나 동일하신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경이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시고 들으시고 직접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행동과 말이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존엄성을 얻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 창조주이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믿는다. 온 맘 다해 찬양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Revelation 1:8)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5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J. D. 밴스 저, ‘힐빌리의 노래’를 읽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공감할 수 있다. 크든 작든 공통된 경험이 없다면, 상호 간의 소통은 어렵기 마련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으로라도 독자가 저자를 공감하지 못하면, 독서 자체는 노동이 되어 버리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특히 그 책이 회고록이라면 더욱 그렇다. 공감 없이 끝까지 읽어내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을 읽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한 백인 남성의 인생을 공감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긴 하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짧은 시간 끝까지 읽어내도록 만들었을까?


내게 있어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근교다. 쉐이커 하이츠라는 도시에서 입주자의 약 90퍼센트가 흑인으로 구성되었던 한 오래된 아파트에서 3년 반을 살았다.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국에 남아 바로 옆에 위치한 인디애나주에서도 1년 반을 살았다. 의도치 않게 나의 7년의 미국 생활 중 5년을 소위 미드웨스트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살게 되었던 셈이다. 힐빌리의 애환을 담은 이 책이 외국인이자 아시안인 내게 많이 공감되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은 백인이 전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흑인들이 메우고 있었다. 히스패닉이나 나와 같은 아시안은 드물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오하이오주 미들타운과 켄터키주 잭슨은 내가 5년간 살았던 곳과 불과 차로 두세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특히 저자가 인생 대부분을 살았던 미들타운의 분위기는, 실제로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로선 머리 속으로 그려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같은 러스트 벨트에 속한 지역에 살면서 수 차례 차로 오가며 그곳들의 냄새와 분위기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20세기말, 과거엔 미국의 대표적 공업 지대로 번영을 누렸지만,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몰락한 지역을 러스트 벨트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인적이 드물고 폐허들이 산재해있는 지역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느꼈던 그 특유의 적막함과 암울함을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 지역에서 주유소에 들려야 할 때면 난 잔뜩 긴장을 하곤 했었다. 눈이 풀린듯한 사람들이 흑백을 가리지 않고 도처에 있었는데, 그들이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되었을 거라는 나의 직감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곳은 빈곤과 약물 중독이 다반사인 곳이었다.


J. D. 밴스는 힐빌리다. 힐빌리는 러스트 벨트에 살며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러스트 벨트는 미국의 북동부 지역부터 중서부 지역까지 관통하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특히 중서부 지역에 집중되어있다. 이를테면,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오하이오와 켄터키, 그리고 웨스트 버지니아와 인디애나가 이에 속한다. 저자는 힐빌리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전형적인 힐빌리로 살았지만, 대부분의 힐빌리들이 밟는 전처를 밟지 않고, 오히려 그 저주의 사슬을 끊고 나온 몇 안 되는 힐빌리 중 하나다. 1984년생인 그는 이제 자신이 힐빌리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그 가운데서도 존재했던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운명적인 여러 만남들의 도움으로, 수재들도 들어가기 힘든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해냈고, 중산층 이상의 부류에 속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수직 신분상승을 기적적으로 이뤄낸 경우인 것이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을 '더럽게 운 좋은 개자식'이라고 표현한다. 힐빌리다운 걸걸함이 단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의 대부분은 저자의 가족사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과 때론 지겹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아마 내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감동을 주는 부분도 많다. 저자의 경험과 식견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 힐빌리들의 삶은 소외되고 고립되어 마치 저주의 쇠사슬로 스스로가 꽁꽁 묶어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었다. 가난이 실제로 대물림되고 있었고, 약물 중독과 폭력, 불륜, 가정 파탄, 그리고 저학력 역시 마치 그들의 전통인 양 자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거나 오히려 더 증폭되고 있었다. 스캇 펙은 아마도 이러한 저주의 고리에서부터 악을 진단해낼지도 모른다. 저자도 간파하고 있듯이, 힐빌리들의 그러한 삶은 정부의 문제도 사회 시스템의 문제도 아니었다. 주된 원인은 그들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놓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그들 내부에 있는 듯했다.


저자 역시 어린 시절 충분히 불행했다. 굳이 조부모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그의 엄마는 간호사 자격증을 딸 정도로 재능이 있었으나, 허구한 날 남자를 바꾸었고 마약에 중독되어 폭력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일으켜 범죄기록이 많은 여자였다. 저자는 이 때문에 자신의 라스트 네임에서 혼란을 느꼈고, 실제로 엄마에게서 살인을 당할 뻔한 위기도 모면했던 적이 있다. 더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힐빌리들의 많은 가정이 부모 둘 중 하나는 약물 중독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고, 불륜과 폭력, 가정 파탄이 그들의 일상처럼 되어있었기 때문에 저자의 어린 시절의 삶이 특별하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갇힌 세상 속에서 그들은 국가와 정부를 탓했고, 사회 시스템을 탓했다. 누군가의 경제적 도움이 주어지면 그 돈으로 마약이나 알코올을 구입하는 데 탕진했다. 아이들은 버림받은 거나 다름 없었고, 한 부모 가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총체적인 난국을 맞이한 힐빌리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구조적 모순 속에서 여전히 하층민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자신의 가정이 여느 힐빌리 가정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비록 엄마가 마약 중독이었지만, 외할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이 그에게 그나마 안정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었으며, 친 누나의 엄마 역할과 이모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 우물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해병대 지원과 제대로 삶의 규모를 배우게 되었고, 오하이오 주립대를 우등생으로 단기간에 졸업하면서 점점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장악해 나가게 되었으며,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 졸업하면서 운명적인 멘토와의 만남과 평생 반려자와의 만남으로 완전히 힐빌리의 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으로는 상류층 사회에 속해있지만, 여전히 힐빌리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어릴 적 각인되었던 힐빌리들의 결코 좋지 않은 문화가 가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힐빌리와는 정반대의 문화 속에서 자라난 아내와 그 가정 덕분에 그는 점점 치유되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방인인 내 안에도 힐빌리가 살고 있음을 느낀다. 화통 삶아먹은 듯 소리칠 때나, 내게 불이익을 준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나, 괜한 자존심에 주위의 시선을 왜곡하여 내 안에 갇혀 웃음을 지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힐빌리의 피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공감하며 읽어내려간 주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그를 규정지을 수 없길 개인적으로 바란다. 그래서 그의 개척이 힐빌리들에게 메시지가 되어 그들에게 각인된 저주의 DNA를 치유할 수 있는 메신저가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이방인인 내 안에도 존재하고 있을 힐빌리도 깨끗이 치유되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7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경계에 서서.


J. D. 샐린저 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책 제목의 의미를 처음으로 눈치챌 수 있는 장면은, 주인공 ‘홀든’이 여동생 ‘피비’에게 선물할 레코드 음반을 사기 위해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걸어가고 있을 무렵 들려온 한 꼬마의 노래에서다. 그 꼬마는 “호밀밭을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을 부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지나가는 차들의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관통했고, 그 꼬마 부모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홀든의 귀까지 전달되었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잠입한 자기 집에서 피비를 깨워 얘기를 나누던 중, 좋아하는 한 가지만 말해보라는 피비의 질문에 홀든이 머뭇거리다가 답한 장면에서 비로소 그 뜻은 명확해진다. 다분히 문학적이고 순수하며 이상적인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홀든은 이미 여러 차례 퇴학이나 자퇴로 고등학교를 그만 둔 이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펜시’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이번에도 퇴학을 당했다. 이 책은 퇴학이 결정된 후, 아직 부모에게 공식적으로 통보되기 전의 며칠 간, 홀든이 학교를 먼저 떠나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방황 기간을 주로 다룬다. 홀든은 부모님이 공식적인 퇴학 통보를 받기 전, 그러니까 방학이 시작되기 전 집으로 들어간다면 받게 될 뻔한 의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홀든은 학교를 떠나 집이 있는 뉴욕으로 향한다. 호텔에서 머물며 그 시대 어른들이 하던 위선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에 그대로 노출된다. 이미 직간접적으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아직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홀든은 어른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대우받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어른처럼 술을 시켜서 먹고 싶고, 담배도 당당하게 피고 싶고, 여자와 섹스도 하고 싶어하는, 즉 고등학생이면 의례히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될 욕구를 충족하길 원했던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홀든이 원하는대로 거의 이뤄지지도 않았지만, 홀든이 보여주는 행동과 말들, 그 안에 흐르는 그의 생각의 흐름과 감정의 변화,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여 보여지고 들려오는 어른들의 행동과 말들을 보며, 난 지금도 거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저자인 샐린저가 하필이면 평범하지 않은 한 고등학생의 눈으로 그 당시 미국 사회 (이 책의 출판은 1951년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를 바라보며, 때론 직설적이고 때론 냉소적인 표현을 동원하여 미국을 그려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미국이 아닌 모든 기성세대에게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가식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제목에 힌트가 있다고 본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중간인,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으며, 어른들의 세계가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답습하려는 생존본능과 그것에 저항하려는 욕구 사이에 놓인 강을 아직 건너지 않은 한 청소년의 눈에 비쳐진 세계를 통해 샐린저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인 것이다. 이미 정립된 기성세대의 관점으로 봤을 땐 바보 같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홀든은 기꺼이 사랑스런 여동생 피비와 같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한다. 호밀밭은 낭떠러지와 닿아 있다. 그 낭떠러지는 아마도 기성세대가 정립한, 마치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이나 퇴폐적인 술집과 호텔 같은, 세상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마구 뛰어놀기만 할 뿐, 그 어린아이의 세계가 낭떠러지와도 같은 어른들의 세계와 맞닿아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중간인으로 나오는 주인공 홀든은 그 경계를 알고 있다. 강을 건너려고 시도도 해봤다 (홀든이 퇴학생으로 그려진 숨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홀든의 고백으로 보아선, 여느 청소년들이 가는 그 길을 가지 않고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남는 위대한 결단을 나중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공부도 잘 하고 잘난 학생들의 눈에는 자기애와 욕심에 눈이 멀어, 낭떠러지라는 실체가 그저 살아남고 밟고 일어서기 위하여 계속해서 올라가야 할 피라미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아주 평범하다고도 볼 수 있는 홀든의 눈에는, 오히려 두 세계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였고, 아이들의 세계가 가진 가치가 훨씬 더 소중하게 여겨진 것이다. 인생을 바쳐 보호하고 싶을만큼.


나도 한 때 피비처럼 아이였고, 홀든처럼 중간인이었으며, 이젠 그 시기를 훌쩍 뛰어넘어 기성세대가 되었고, 피비와도 같은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일개 범인이다. 홀든과는 달리 난 경제적 배경이 전무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지만, 이렇다할 큰 어려움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물론 홀든을 통한 저자 샐린저의 관점이 녹아있는 책이겠지만, 난 홀든의 나이일 때 홀든이 했던 고민과 생각들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홀든보다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세상과 사회에 대한, 기성세대에 대한 부조리와 위선에 대해서는 그리 큰 의문을 가져보지도 않았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다가온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사적인 복음만을 강조했고, 이는 나의 내면의 평안과 생존과 번영만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들었다. 공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며 평안과 평화를 도모하는 세상이 허공에 뜬 이론이 되지 않기 위해선, 현재 내가 처한 좌표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고 적실하게 말이다. 이런 면에서 홀든은 나보다 훨신 나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미국 나이로 마흔 하나가 되어버린 나. 전체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아온 나. 몇 년 전에서야 홀든이 가졌던 생각들을 하게 되었던 나.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전진한다. 의로운 세상을 위한 삶을 살기를 도전한다. 꺼져가는 등불이나 상한 갈대와도 같은 자이지만, 결코 꺼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라는 소망을 가지고서.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받는 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바로 이런 세상이 샐린저가 홀든을 통해 꿈꿨던 세상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1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미니즘과 기독교 - 개정판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페미니즘의 눈을 통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고찰하다.


강남순 저, '페미니즘과 기독교'를 읽고.


'결함이 있는 남성', '잘못된 남성', '악을 가져오는 위험한 존재'. 자,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렇다. 놀랍게도, 우리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아내, 우리의 딸,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 10달 간 머물렀던 자궁의 주인이자 우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바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어처구니 없는 여성에 대한 표현들이 어떤 정신병자에 의한 오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유명한 철학자와 신학자 (모두 남성이다), 각각 이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한 여성에 대한 이해였다. 누군가는 세 위인 모두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며 적당히 이해해보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질없는 시도다.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였던 마르틴 루터조차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 이후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았고, 또 다른 종교개혁가 존 칼빈도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신의 창조질서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굳이 수 세기 전에 이미 사라진 위인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그 어디나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위주로 된 문화 시스템들이 마치 물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소위 ‘자연스럽다’고 하는 많은 법과 규범, 질서와 체제, 그리고 문화를 바라보는 눈이, 사실은 색안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착용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 색안경이 우리 눈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전혀 이상함을 못 느낄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숨쉬듯 자연스러운 가부장적인 제도에 노출되는 우리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와 배제, 차별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우리 눈에 부착된 색안경을 인지하고 뜯어내는 작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이 시대의 키워드를 통해서 말이다.


강남순 교수의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나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나 강연 등을 부끄럽게도 여태껏 직접 접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수준의 책이다. 이 책에는 페미니즘의 간략한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가중시키고 대중화시켜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각인이 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가 페미니즘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다층적이고도 심층적인 대답을 찬찬히 해나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의외의 상황 파악에 섬뜩할 정도로 놀란 부분이 있다. 가부장주의적인 교육과 가치관의 내면화가 견고해질대로 견고해져 급기야 일종의 카르텔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가져다 주는 안정감에 익숙해진 존재가 남성 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여성 스스로도 자신의 해방을 위한 페미니즘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지도자를 선택할 때도 여성보다는 남성을 더 지지하고 신뢰하게 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대부분 피해자의 위치에 놓였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해방보다는, 비록 남성의존적이고 불합리하고 불의하더라도 그 상황이 가져다 주는 모종의 안정감에 길들여져버려 그 상황을 지속하길 원하게 되는,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난 이 부분에서 최근에 읽었던 모세오경 중 민수기 편이 생각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억눌렸던 노예체제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하기보다, 광야생활 중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기만 하면 차라리 그 노예 시절이 더 나았다고, 차라리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불평, 불만하는 상황과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인된 노예근성이 구원 받은 하나님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오랫동안 이어져온 가부장주의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여성들에게 각인된 억압근성이 여성 평등을 넘어 성, 인종, 사회적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의외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천부인권설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가 오히려 여성 혐오, 배제, 차별을 합리화시켜 버리고 남성우월주의를 마치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것처럼 만들어버린 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으로서 나도 수치를 느낀다. 먼 과거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성 차별은 존 파이퍼 같은 유명한 목사들에 의해서도 현재진행형으로 왕성하게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재미난 사실은, 이렇게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기독교 리더들도 자신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서의 근거는 그 자신이나 그가 속하고 자라온 교단이나 전통이 부여한 편향적인 해석에 불과할 뿐 하나님이 직접 지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해석을 진리로 착각하고, 또 전통성이 그것을 진리로 만들어줄 것처럼 여기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분명 반성과 회개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교적 남성우월주의가 진하게 묻어있는 기독교에 마음과 생각이 물들어있을 것이므로, 이 책을 꼭 한 번쯤은 읽어보길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본인이 은연 중 가지고 있을, 여성이 '자연스럽게' 배제된 기독교 신앙이 과연 진정한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과감하게 던져보길 바란다. 강남순 교수도 지적했듯,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양립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선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생각해야 비로소 본 질문에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영점 위치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페미니즘이 어떻게 생성되고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배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용도로도 읽힐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눈과 일체가 되어버린 가부장적인 색안경의 실체를 인지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찰해보며 스스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조금이라도 수정이 가한다면, 아마도 이 책의 저자, 강남순 교수의 목적과 바람이 절반 정도는 성취되지 않을까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8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김승섭 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많지 않은 분량에 훌륭한 가독성,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의 인품이 묻어나는 친절한 필체 덕분에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막히지 않고 책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술술 읽혔다고 해서 이 책이 가볍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책을 이루고 있는 이야기들은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책은 저의 공감을 넘어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전달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가 바라는 세상 사이에 나있는, 그 동안 잘 보이지 않았거나 어쩌면 아예 보길 원하지 않았던, 깊고 어두운 계곡을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가 이 땅에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제가 속한 사회가 아픔이 생겨도 깊은 흉터 없이 치유될 수 있을 만큼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저와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만큼 이 책은, 인간이라면 가져야 마땅할 보편적인 가치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후, 객관적인 자료를 모아 의미심장한 결과를 도출해내고,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해내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다시 점검하도록 도와주는, 한 마디로 이 시대의 훌륭한 자정작용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입니다.


이 책은 이미 여러 곳에 실렸거나 연재되었던 짧은 글들의 모음집입니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이면서 낱개로 있었던 글들이 각기 하나의 중요한 장기가 되어 살아있는 하나의 큰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부제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만 봐도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지요.


저자 김승섭 교수는 여러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사회역학자입니다. 사회적 원인으로 어떤 질병이 발생했다면, 아무래도 그 질병은 기득권 세력이 아닌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되기 마련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어두운 면에 달라붙어 기생하며 사회의 기득권을 누리면서 그 힘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탕진하는 자들에게 있어선, 서민들의 인권이나 복지 따위는 언제든지 희생해도 되는 가치일 뿐일 테니까요.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과 한을 마주하고 함께 하는 건 사회역학자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김승섭 교수는 시대에 부응하는 학자로서 한국 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책은 단적으로 이를 증명하는 셈이지요.


책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한국은 국가적, 사회적 재앙이나 재난에 대응, 대처하는 능력은 물론, 재앙과 재난 이후를 처리하는 능력까지도 현저하게 떨어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사례에 대한 저자의 연구 결과와 해석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제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과연 이 나라에 희망이 남아 있을까 하는 염려도 되었습니다. 비록 경제 성장을 단기간에 이룩해낸 국가이지만, 그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차별과 배제, 혐오와 낙인 찍기 등으로 심하게 얼룩져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똑같은 태양 아래이지만 사회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약자들의 아픔을 직시하고 공감하고 경청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들이기도 했고, 생명을 담보로 하기도 했던 불의한 폭력 앞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이기도 했으며, 사회에 암묵적으로 만연한 승자독식, 약육강식 체제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억눌린 자들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소수자이기도 했고, 참사 이후의 생존자들과 그의 가족이기도 했으며, 지금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고스란히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때로는 그들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민감한 질문까지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에게 부당하게 전가되었던 사회적 질병의 원인의 주인을 되찾아주고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동안의 많은 과거 사례들에서와 같이 보통 역사에 남지 않는 약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해두기 위해서는, 사실 그대로의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수 차례 거쳐왔기 때문에 이런 귀한 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돌 같은 마음을 가진 저에게까지도 전달되어 저로 하여금 사회 참여자로서 살아야겠다는 구체적인 다짐까지도 하게 만들었답니다.


무분별하게 부당한 희생을 당한 약자들이 자꾸만 생겨나는 원인이 사회구조적 이유라면, 이를 역으로 생각할 때, 그 사회공동체의 건강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치유책이 될 것입니다. 저자는 심장병 발생이 유난히 적었던 로세토 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확신,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함께 해줄 것이라는 확신은 기꺼이 힘겨운 삶을 꾸려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292 페이지)"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얼마나 거대하고 또 중요한지에 대해서요. 당신에게도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 우리의 공동체는 안녕하신지요? (295-296 페이지)" 저도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어떤가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김승섭 교수는 말합니다. "우리 이기심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요. (297 페이지)" 그렇습니다. 사회역학자인 저자는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물으면서, 그 사회구조 이면에 놓인 원인의 원인을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공동체,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며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공동체, 약하고 가난한 자나 억눌리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구제 받고 신원 받는 공동체, 기득권을 내려놓고 서로 나누고 돕는 공동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참으로 인간다운 공동체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결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일개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이 책에서 꿈꾸는 정의로운 건강이 회복되는 공동체가 바로 구약이 끊임없이 말하는 공의와 정의가 행해지는 하나님나라와도 많이 닮았다는 점을 발견하며, 아픔이 길이 될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눈과 귀를 열고 이웃들에게 더욱 사랑을 실천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승섭 교수님. 약자들의 아픔을 눈물로 보게 해주시고 신앙을 넘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알게 해주셔서요. '나'를 넘어 '남'을 향하는 삶을 살도록 저도 열심히 노력할게요.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0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