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비행 / 남방 우편기 펭귄클래식 37
생 텍쥐페리 지음, 앙드레 지드 서문, 허희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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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생텍쥐페리 저, '야간 비행'을 읽고.


늦은 밤, 아직도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아내의 전화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아들은 감기 기운이 있는지 아침부터 코를 훌쩍댄다. 몸도 마음도 무겁다. 나 역시 점심을 거르면서 또 하루를 살아냈다. 하지만,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이렇게 늘 있던 자리에 와 있다. 아내도 두어 시간 후면 올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에 있게 된다. 나는 그제서야 다리를 뻗고 잠을 청할 수 있을 테다.


'제자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제자리는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 아니, 지켜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가만히 멈춰있는 곳이 아니라 또 다시 돌아온 곳이다. 그러므로 제자리는 결코 정적이지 않다. 거기엔 보이지 않는 희생과 부단한 노력이 뒤따르는 법이다. 지친 하루의 끝에서 익숙한 제자리가 선사해주는 따뜻한 국밥과도 같은 친밀감이 없다면, 우린 만족이나 행복보단 불안과 두려움에 쉽사리 노출될지도 모른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우리들의 일상이, 언뜻 보기엔 지루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역동적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누군가의 희생을 배경으로 한다. 평화는 누군가에 의해 지켜져서 우리를 제자리에 있게 해주는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린 감사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현재를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랜만에 베드 타임 스토리를 해주겠다고 하니 아들이 좋아한다. 작년 중순, 그러니까 아내와 다시 함께 살기 전까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치 의식처럼, 자기 전에는 아들에게 책을 읽어줬었다. 그때가 생각난 것이다. 어차피 오늘은 엄마를 보지 못하고 잠이 들어야 하기 때문에, 괜히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인 나라도 뭔가를 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다섯 번째 챕터를 읽어나갈 무렵, 아들은 어느새 까딱까딱 가늘게 움직이다가 다시금 아기가 되어 쌔근쌔근 내 옆에 누워 잠이 든다. 사랑이 샘솟는다. 아들의 볼에 키스를 하고, 이불을 덮어준 뒤, 불을 끄고 방을 나온다.


아내는 아직 연락이 없다. 밤 늦은 시각의 엘에이는 위험하다. 운전 중일까봐 전화기를 들었다 내려놓기를 여러 번 거듭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밖에는 없다. 무력함에 기운이 더 빠진다.


리비에르가 파타고니아선 우편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물론 20마일 거리의 기다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소장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공포와 두려움을 리비에르는 밤을 지새며 홀로 고스란히 느꼈겠지만 말이다. 한 세기 전, 야간 비행을 홀로 추진하여 실행에 옮겨낸 그이기에, 한 대의 우편기가 밤을 뚫고 날아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이 그에게 있어선 피를 말리는 일과도 같았을 것이다.


같은 시각, 결혼한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파비앵의 아내는 노심초사 남편을 기다리며 밤의 적막을 꼭 잡고 있다. 그녀 역시 리비에르와 마찬가지로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파비앵은 남극지방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위험천만한 야간 우편기를 몰며 날아오는 조종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비행기 안에서 난항을 겪고 있었다. 리비에르와 파비앵의 아내가 기다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은 얄미우리만큼 청명한 별빛과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지만, 도착 예정 시간이 넘어 통신도 두절된 채 파비앵은 거대한 폭풍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 거대한 폭풍은 하늘을 구름 위와 구름 아래, 둘로 갈라놓고 있었다. 파비앵은 마침 천둥과 번개가 동반된 구름 아래의 세상에서 극도의 긴장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어둠 속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고도를 올려 구름 위로 올라왔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실 같은 별빛 하나도 희망의 모든 것이 되는 법이다. 그는 켭켭이 쌓인 구름 속에서 아주 잠시 나타난 가느다란 빛을 따라 구원이라도 받는 듯  탈출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바뀌었다. 고요한 평화. 저 잔잔한 달빛이 이렇게도 눈부신 적이 있었던가. 온 천지가 달빛을 반사하는 아름다운 빛의 향연 속으로 들어간 파비앵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 그 빛의 향연은 축제가 아니었다. 


파비앵의 비행기는 곧 연료가 바닥날 예정이었다. 가까스로 거센 폭풍을 뚫고 잠시 평화를 맛보고 있지만, 구름 아래의 세상에서 폭풍과 씨름하느라 연료를 많이 소진해버린 것이었다. 육지에 착륙을 하려면, 번쩍번쩍하는 화려한 뇌우를 가득 머금은 검은 구름층을 꿇고 내려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죽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다. 연료 계기판은 30분 정도 주행할 양만을 무덤덤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고요를 누리고 있지만, 곧 연료가 바닥날 비행기 안에서 폭풍 때문에 도저히 육지로 내려갈 수 없는 이 역설적인 평화.  이 기막힌 외통수. 


조심스레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다. 아아, 감사하다. "오늘도 수고했어. 사랑해." 하늘 아래,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 은혜다. 파비앵과 그의 아내, 그리고 소장 리비에르와도 같은 이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아내는 이런 자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린 오늘밤도 모두 제자리에 있다. 오늘은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잠을 이룰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5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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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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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질병일까?


스캇 펙 저, '거짓의 사람들'을 읽고.


"악은 질병일까? 치료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이질감이 먼저 느껴지는 건 아마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신학적으로 아주 오래된 문제인 '악의 존재와 근원'에 대해서 질문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명쾌한 답이 없지만, 그래도 이 질문은 꽤 익숙하기라도 하고, 의미 있는 사유거리로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악을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본다는 관점이 낯설게만 느껴진 것은, 그만큼 우리가 '악'을 인간이 다루거나 조절할 수 없는 어떤 상위 개념으로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다. 악은 과학적인 접근이기보단, 아무래도 우리에겐 형이상학적인 접근으로 다가서야 하는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글에서 자주 인용되어 궁금증을 자아냈던 스캇 펙의 책을 이제서야 한 권 읽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거짓의 사람들'. 내용도 역시 그랬다. 읽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왜 스캇 펙을 자주 인용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깊고 예리한 통찰이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을 넘어 책 속으로 빨려 들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책을 천천히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저자가 직접 경험했던 몇몇 상담 사례들을 기반으로 이끌어낸 기독교적인 해석과 주장, 그리고 그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성경에서, 거짓의 아비는 사탄이다. 보이지 않는 악의 실체다. 비록 성경을 모르더라도, 신문과 뉴스를 통해, 악한 사람들은 거짓을 즐겨 하며 거짓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이 책에서 '거짓의 사람들'이란 곧 '악한 사람들'을 말한다.


그럼, 악한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 거짓말쟁이만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진 않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은 그 대상이 타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악한 사람들의 타겟은 타인이기보다 자기자신이다. 거짓의 사람들은 남을 속이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속인다. 속이는 이유는 숨길 것이 있기 때문이고, 숨기는 이유는 숨길만한 것이, 어쩌면 숨겨야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발각되면 자신의 입지가 난처해지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숨김으로써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거짓은 진실보다 빠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때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걸며, 그리 숨기는 것일까? 바로 자신의 악한 의지다. 악한 의지는 '나'의 이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거나 파괴하는 행위까지도 서슴없이 일삼을 수 있다.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은 악의 본질인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evil (악)의 철자를 거꾸로 할 때 live (살다)가 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스캇 펙은 다음과 같이 악을 정의한다. '악이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데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또 같은 맥락에서 그는, '악이란 나르시시즘이 위협을 받을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깊은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에서 정의하는 죄를 자기중심적인 교만함으로 해석할 때, 나르시시즘은 죄의 결과이자 악의 VIP 보호 대상이다. 또한 악은 인간을 매개로 할 때만 살인과 같은 파괴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에, 악은 인간을 죄에 빠뜨린 뒤 숙주로 삼아 파괴의 무대 위로 올리고 자신은 무대 뒤에 숨어버린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이란 자기중심적인 의지의 표출로 인해 곤란해진(질) 입장을 복구하기(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거짓을 무기 삼아 죄를 숨기고 악을 기쁘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죄와 악, 그리고 자기애, 나는 이 세가지를 악의 삼위일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느 하나도 나머지 둘을 제외하고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을 정신분석학적 경험을 기반으로 정의하고, 악이 어떻게 사람을 통하여 실력을 행사하는지 고찰해 보며,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면에서 이 책은 탁월하다. 그러나 저자가 제안하고 바라는 대로 악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그는 악한 사람들을 나르시시즘적 성격 장애의 특수한 변이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다. 악함을 나르시시즘과 연결시키고, 그런 사람들을 강박증이나 공포증 같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과는 달리, 조금 더 특별하고 심각한 환자로 다뤄야 한다는 의미라면, 그의 제안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을 질병으로 덥석 규정해 버린다면, 그 진단을 받은 환자의 경우, 자신을 어떻게 여기게 될까? 앞서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하거나 다룰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나 개념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이름을 달리 해서 악을 질병으로 규정한다 해도, 자기가 악한 사람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면, 십중팔구 그들은 그 진단 자체를 부인하거나, 그 진단을 내린 의사를 신뢰하지 않고, 그를 망상가나 종교가로 치부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질병으로써 악을 규정하는 것은 치료 대상자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치료자 입장에만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런 경우 원치 않게도 인권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어, 혐오와 배제, 차별이 횡행하게 될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악한 사람을 진단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문제 또한 모호할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악함과 악하지 않음의 경계는 어디일까? 과연 그것을 수치화하거나 객관화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진단하는 의사마다 같은 진단이 가능하기나 할까? 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무래도 스캇 펙의 악을 질병으로 규정하자는 주장은, 악이란 것을 정신적 문제 중에서도 증세가 심각하여 어쩌면 과학적인 영역을 넘어설지도 모르는 문제라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치료하려면 차라리 종교적인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귀신 들림까지도 질병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귀신을 사람 몸에서 쫓아내는 '축사자 (엑소시스트)'를 악을 치료하는 치료자라고 말한다. 사실 난 이 부분에서 의문을 넘어 왠지 모를 거부감까지 느꼈다. 2천년 전의 사건을 다룬 성경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영화나 소설, 그리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몇몇 괴기스러운 사례들과 같은 비과학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까지도 과학적인 의학이라는 박스 안으로 집어넣어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를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그의 주장이 개인적으로는 무척 불편했던 것이다. 기독교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책 전반에 걸쳐 보이지만, 축사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과학이나 의학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색채보다는, 다분히 그가 경험한 단 두 차례의 축사 경험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하여 일반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으며, 그 경험에 저자 자신의 기독교적인 신앙과 믿음, 사상을 정신분석학적인 자신의 직업적 전문성과 함께 한데 버무려 끼워 맞추려는 의지가 보였다. 귀신 들림을 얘기하는 이 대목에서만큼은 그의 억지스러운 면과 치우친 면이 꽤 많이 부각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이자 과학자인 나에게도 이렇게 비춰졌다면, 비기독교인과 과학적인 사고에 길들여지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부분이 과연 어떻게 비춰질지, 나로선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한 축사에 대한 부분이 이 책의 주옥 같은 나머지 부분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책 전체나 저자에 대한 신뢰도까지도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난 우려가 되었다.


과학자나 신앙인으로서도 여전히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부분을 겸손히 신비로 놓아두는 자세가 그에게 필요하지 않았나 싶고, 이를 생각하면 그저 아쉽기만 하다. 니체와 헤겔, 그리고 데리다가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고 살려낸 '무'의 개념에 착안하여 생각해 볼 때, 그는 모든 것을 법칙화하여 술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칸트와도 닮은 것 같고, 모든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했던 과학주의적인 구조주의 사상가들과도 비슷한 면이 많은 것처럼 여겨진다. 풍부한 경험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사명감과 책임감까지 덧붙여 그가 주장하고 바랐던, 악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일의 문제점은, 악을 질병으로 규정하면 마치 치료가 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 있다. 그는 악의 치명적인 독성을 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하여, 악과 악한 사람들이 가진 훨씬 커다란, 아직 드러나지 않아 모르는 부분인 '무'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과학과 의학으로 악을 다스리려고 시도했던 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악한 사람도 악 자체가 아닌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했던 한 사람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캇 펙은 오래토록 사람들에게 기억되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똑같이 배우거나 경험하진 않지만,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심리에 대하여 그는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신비한 타자의 영역을 존중하여,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아 모르는 부분이 언제나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을 감안하고, 좀 더 신중하고 준비된 자세로 악의 치료를 고찰하고 도모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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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양장)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 옮김 / IVP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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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유진 피터슨 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IVP 출판)을 읽고.


정갈하면서도 뼈가 있고,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을 만난다는 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커다란 행운이다. 그 글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보석 같은 메시지를 들추어내어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때보다 더 큰 신선함과 놀라움, 그리고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을 조용히 전달해주는 글. 난 이런 글을 만날 때면 어느새 경건한 자가 되어 한층 더 낮아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마침내 나를 넘어서는 기로에 서게 된다. 벽을 뛰어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영문판, 원서 제목은 'Leap over a wall'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야 처음으로 만난 유진 피터슨의 저서,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은 내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다윗의 이야기가 주로 적힌 사무엘 상하서를 기본 틀로 하여, 유진 피터슨은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들어 익숙한 이야기에서부터, 비록 잘 알려져 있진 않으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에 이르기까지, 때론 상상력을 발휘하여 총 스무 개의 에피소드를 짤막하게 다시 들려 주며, 그것들이 가진 깊은 의미를 캐내어 현재 우리가 숨쉬고 있는 21세기로 소환해낸다.


2천 년이 훨씬 지난 다윗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걸어오는 말을 통해 저자가 소환해낸 메시지는 좌로나 우로, 혹은 도덕주의나 세속주의로 치우친 영성이 아니다. 제목이 분명하게 말해주듯, 그가 책에서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영성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밟고 있는 이 땅, 이 현실에 철저히 뿌리박은 영성이다. 눈물을 자아내고 적당한 반성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힘은 있으나 구름 속에 있어 손에 잡히지 않는, '영성'이란 탈을 쓴 막연한 '감상'은 결코 세상 속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이 될 수 없다.


다윗 이야기에는 우리가 흔히 정의하는 기적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으며, 저자는 다윗 이야기야말로 현실에 기반한 하나님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을 인식하고 올바른 영성을 기르는 데 적절하다고 말한다. 다윗은 제사장도 아니었고, 선지자도 아니었다. 그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위대한 사무엘이 방문했을 때조차 그의 앞에 데려오지 않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만큼 주목할 것 하나 없는 막내였고, 그저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는 평범했다.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독차지하지도 않았다. 그에겐 신비한 힘이 솟는 머리카락도 없었고, 기도할 때마다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도 없었다. 알고 보면 다윗은 그야말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일개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은 거룩한 성소나, 제사장들의 구별된 장소나, 기적을 일으키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신비한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나라는 우리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 실재하며 거기에 충만하게 임한다.


영성은 어떤 신비한 힘을 뜻하지 않는다. 영성이란 인간이 신격화되는 모습이 아닌, 가장 인간다워지는 모습에 있다. 그리고 이는 곧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모든 하나님백성이 지녀야 할 궁극적인 모습일 것이다. 원래 창조된 인간으로 회복되어지는 여정, 우리는 이를 성화 과정이라고도 하고, 영성이 훈련되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을 감히 일상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우리는 모두 천로역정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한 영성 훈련이란 우리의 힘을 키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어떤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쓰임 받는 깨끗하고 투명한 질그릇이 되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거기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만이 언제나 가장 우선시되는 현장이다. 그리고 그 현장은 바로 우리의 일상,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메시지일 것이다. 바로 그때 우린 현실에 가로막힌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우린 다윗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영성을 배우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벽을 뛰어넘는 현장은 곧 우리 자신을 뛰어넘는 현장이며, 사탄의 체제에 대항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땅을 일구는 현장일 것이다.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들의 일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 받고 나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계략으로 곤경에 처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갈 정도로 환란을 겪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늘 침묵만을 지키고 계신 것만 같다. 그 세력은 힘이 있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일 때도 많다. 때론 사탄의 체제 아래 놓여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질서를 지키며 연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정의와 공의의 기준조차 애매모호해질 때 쯤이면 우린 자신의 존재까지도 원망하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충동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지만,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문제들은 안팎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터진다. 승승장구할 때도 경험하지만, 바로 그때 유혹에 휘말려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셨고 또 계속해서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조차도, 죄와 악으로 가득 차 제거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조차도 모두 합하여 선을 이루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란을 이겨내는 묘안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부족함을 메우는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신뢰하며 소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부족함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일상이라는 인생 여정을 통하여 결국 우리가 얻는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영성이다.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하나님나라의 영성은 죄와 악으로 물든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다. 어두운 땅 속에 박힌 씨앗 하나가 발아하여 대지를 뚫고 나오는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그 견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 생명이 충만한 영성은 죄와 악으로 물든 현실이라는 대지를 뚫고 나와 바로 그곳에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만드는 힘이다. 후회와 미련, 원망과 절망으로 가득하고, 철저히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해 보이는 우리들의 현실 속에 깊게 뿌리내린 영성이야말로 생명이 있기에, 바로 그 생명은 하나님이기에, 마침내 싹을 틔우고, 그 대지를 뚫고 자라나 열매를 맺고,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다.


다윗을 생각한다. 양치기에서 소년 영웅으로, 궁중 악사로, 도망자로, 작은 공동체의 리더로, 왕으로, 그리고 모든 힘을 내려놓고 무릎 꿇고 앉아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할 줄 알았던 하나님백성, 다윗. 다윗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인 나를 돌아본다. 내 현장을 돌아본다. 영성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 여정과 현재 나의 일상 속에 거하는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근력, 그 작은 몸부림. 나를 통해서도 누군가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꺾임조차도 생명의 빛에 의하여 굴절되어 무지개가 되고, 남에게 힘이 되는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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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윌리엄스 대표작 세트 - 전2권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제자가 된다는 것 로완 윌리엄스 신앙의 기초 3부작
로완 윌리엄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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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겸손: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로완 윌리엄스 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읽고.

 

진리처럼 믿어왔던 것들이 하나의 의견에 불과할 수 있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서있던 자리가 치우친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언젠간 그 시간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닫혀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꾹 잠겨있던 녹슨 눈과 거미줄 쳐진 귀가 마침내 열리는 순간, 누군가에겐 자신이 쌓고 지켜왔던 성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인생의 극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기꺼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겐 한동안 놓고 있던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삶을 재조정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대학생 때 교회를 잠시 떠나기까지 다녔던 여러 교회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다시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였다. 내가 배워서 알고 있던 기독교에 관한 모든 정보는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교단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내게는 오직 그곳에서 배워 처음 알게 되었던 지식이 기독교와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전부였다.

 

불행하게도, 별 문제가 없었다. 교회에서는 신앙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으로 통했다 (공부 잘하는 인간이 교회에 결석하지 않고 출석하며, 질문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기까지 하면, 백이면 백 신앙 좋다는 소리 듣는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지금도 그러리라는 데에 오백원 건다). 그러나 내게도 어느 날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그 일련의 과정이 처음엔 인생의 극소점을 넘어 최소점으로 다가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가 아닌 기회이자 발판으로 재해석되어지기 시작했으며, 나중엔 그때를 생각하면서 현재 내 삶의 키를 재조정하는 기억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때였다. 내가 알고 믿었던 것들이 가졌던 찬란한 유일성과 엄숙한 절대성이 깨어지게 된 건. 메커니즘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위치한 지점이 가운데가 아니라 상당히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름 좀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기독교 관련 지식들이 하나의 해석이나 주장에 불과한 게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주 작아졌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여러 교파가 기독교라는 지붕 아래 존재한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성공회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라고 이해하면 성공회를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내가 읽었던 신학책의 꽤 많은 저자들이 성공회 배경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번에 처음 접한 로완 윌리엄스 또한 성공회 소속 신학자이다. 그는 천 년 전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성 안셀무스 이후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지도자라는 평까지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을 가진 아주 짧지만 묵직한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요소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할 가장 핵심 요소 네 가지를 친절하게 풀어준다. 자상한 선생님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려주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세례와 성경, 성찬례와 기도, 이 네 가지에 관한 지식은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배워왔던 기본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또 한 번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 전부가 아니었고, 상당히 편향되어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도 신학적인 요소들이 매일 접하는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 거룩한 백성의 참 의미가 결코 어떤 위력을 행사하며 겉으로 드러난 집단이나, 저기 산 속에 따로 존재하는 은둔형 단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죄악과 혼돈이 가득하고 여전히 유혹이 넘쳐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그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요, 그 세상과 똑같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 세상 속에 존재하되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 연약하고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나도 용기 내어 몸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 세상 속에 존재하는 죄악과 혼돈을 피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맞서는 것, 그 삶을 기꺼이 끌어안는 것, 모든 사람을 섬기며 모든 사람에게 복이 임하길 간구하는 것, 그러나 위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것, 그래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도움을 구하여 우리가 쓰여지는 것, 예언자적인 사명으로 불의와 죄악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 상하좌우의 모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다리를 놓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더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고, 예전엔 몰랐던 많은 숨겨진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간다. 성공회 대주교의 글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모범답안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것 또한 만남의 축복이라 믿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운다는 것은 어느 정상에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만해지지 않기 위함이다. 세상엔 정말 탐험할 것이 많아 교만해진다는 건 곧 옹색함이요 게으름이며, 용기 없음일지도 모른다. 조만간 성공회 교회를 찾아 예배에 직접 참석해봐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4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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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길 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지음, 김유리 옮김 / IVP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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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라 외롭지 않을 순례자의 여정.

유진 피터슨 저, '한 길 가는 순례자'를 읽고.

'지금, 여기'를 누리는 종말론적 신앙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순례자들의 삶의 자세다. 결코 일회성 쾌락을 추구하는 관광객들의 그것이 아니다. 비록 종말론적 신앙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지만, 그 의미는, 과거로부터의 맥락이나 미래를 향한 소망도 없이 그저 오늘을 말초적으로 즐기자는 한탕주의와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오늘은 어제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왕이신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오시어 완전한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내일을 소망하는 간절한 현재다. 제자 된 그리스도인의 순례 여정에는 관광객들에게는 없는 목적지가 있다. 평생의 여정이 한 곳, 즉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다.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이것은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쓴 동기가 된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에서 인용한 문구다. 마치 관광객의 구미에 맞는 상품처럼 짜맞춰지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의 실태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그 종교 안에서 목적도 순종도 없이 즉흥적인 입맛만을 만족시키며 살아가는 현대판 그리스도인을 비판하면서, 제자와 순례자의 정체성을 띠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자세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기 위해서다. 첫 장에서부터 그는 예수의 제자도를 강조하며 따끔하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관광객의 자세로는 성숙할 수 없다."

이 책은 시편 120 - 134편, 흔히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라고 알려진 15편의 시편 본문을 골자로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깊은 기도 생활 없이는 결코 길고 긴 순종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과, 소개하는 15편의 시편 본문이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장기간에 걸쳐 그들의 모든 삶을 기도로 옮기고 또 그들이 기도한 그대로 살기를 배울 수 있는 주요 방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또한,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로 살기로 다짐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안내서와 지도로서의 실용성뿐 아니라, 여행 노래로서의 흥겨움까지도 겸비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우리들이 이 15편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로 다시 기도하길 권고한다. 

제자도를 다시 짚어주면서 시작한 이 책은 15편의 시편 본문에 각각 의미를 부여하며 한 편 한 편 묵상해 나간다. 15편에 해당되는 15개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각 장의 제목이다). 회개, 섭리, 예배, 섬김, 도움, 안전, 기쁨, 일, 행복, 인내, 소망, 겸손, 순종, 공동체, 송축. 이 단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한 길 가는 순례자의 여정에 있어 필수 코스 같은 인상을 준다. 회개로 시작하여 송축으로 끝나는 여정, 곧 예수의 제자 된 그리스도인의 인생이 아닐까. 비록 이 15편은 히브리 순례자들이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순서대로 불렀던 노래로 보이지만,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는 충분히 이 본문을 그리스도인의 인생 전체로 확장시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15개의 키워드 중에서 내게 가장 와 닿아 새롭게 깨달아진 단어는 '공동체'였다. 사적인 복음의 한계와 그 폐단을 절실히 알게 된 이후 복음의 공공성을 향한 나의 생각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었다. 이는 곧 하나님나라의 두 기둥인 정의와 공의에 대한 이해와,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윤리적인 측면에서 따져보게끔 만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분히 공동체적이지 못했다. 기독교에서 공동체가 가지는 의미를 모르지도 않았음에도, 나의 질문은 늘 개인의 윤리적 삶과 이웃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사랑의 실천 등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나는 언제나 홀로 고립되어 외로워하며 고뇌하고 있었다. 아마도 기존 장로교가 주축이 된 한인 교회 시스템 안에서 겪은 갈등과 상처가 한 몫을 톡톡히 담당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지만, 공동체와는 유리된 듯한, 이 모순적인 나의 삶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윤곽을 보다 명징하게 드러냈다.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결코 사적이고 비밀스런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또한, "성경은 고립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공동체의 일원이다. 창조는 공동체가 생기고 나서야 완성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고립된 개인들과 함께 일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항상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일하신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존재로 볼 때, 우리가 주고받는 관계는 훨씬 깊어질 것이다."

왜 난 하나님을 향한 여정, 곧 순례자의 길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소망을 가지고 홀로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고 여겼던 것일까. 왜 난 나도 모르게 고독한 철학자나 구도자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홀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여겨왔던 것일까. 분명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봐도, 신약의 초대교회를 들여다 봐도, 모두 혼자가 아닌 공동체가 존재했고, 하나님은 늘 그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셨는데도 말이다. 

물론 일대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인의 삶에서 체험하는 것과, 그 체험과 어제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약속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례들과의 공통점을 발견해내는 것, 그리고 본인의 삶에서 세상의 삶과 예수의 삶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믿음과 결단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공동체의 뒷받침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언제나 함께 떠올려야 한다. 혼자서는 넘어질 수 있다. 낙망할 수 있다.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라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소망이 증폭된다. 먼 길을 갈 때 혼자 운전하는 것과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운전하는 것의 차이와도 같다. 약한 개인이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안전하며 견고해질 수 있다. 서로를 향한 의지, 이는 곧 신뢰에서 오며, 그 신뢰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사랑이 이웃사랑으로 전환되는 경험이다. 또한 순례의 여정을 지속할 때 닥쳐올 어려움을 서로를 의지하며 이겨낼 때 우리는 공동체의 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도움을 인정하며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웃사랑이 하나님사랑과 다르지 않은 이유다.

한 길 가는 순례자. 처음에는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독한 길처럼 여겨져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함께 가는 길이라 생각을 확장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 길 가는 순례자는 단수이자 복수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도 있고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도 있는 것이다. 후자를 좀 더 생각하게 되니 참 힘이 된다. 유진 피터슨이 바랐던 것처럼 내 삶 속에서도 복음이 살아 있기를 소원한다. 깨어있는 순례자, 그리고 그 순례자들의 공동체. 구약의 히브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먼 길을 떠나는 그 길을 상상해본다. 거기에는 개인이자 공동체인 그리스도인이 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3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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