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 - 내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증거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지음, 정동섭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공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읽고.


사랑하는 아내와 키스를 하고 잠자리에서 빠져 나와 아들의 방으로 향한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들을 꼬옥 안아주며 볼에 뽀뽀를 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스킨십을 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사랑할 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다. 우린 인간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린 자칫 인간의 육신을 생각할 때면 제한 받고 통제 받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를 제한과 통제보다는 오히려 자유함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있고, 그 만짐으로 인해 사랑을 느끼고 비로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육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이는 곧 자유함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우리의 육체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어쩌면 천사가 흠모하는 인간의 본질은, 그들은 가지지 못했으나 인간만이 가질 수 있었던, 바로 우리 육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생명체를 연구하며 그 신비함에 깊이 경탄할 때가 많다. 특히,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정교하고도 완벽하게 디자인된 생명체의 신비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믿는 내가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창조자 앞에서 전적으로 겸허해 질 수밖에 없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생명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비밀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러한 신비가 가능한지 그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과학자로서 일상의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연구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새로운 비밀을 많이 밝히고 안다 하더라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오히려 더 알고 싶고 또 알고 싶을 뿐이다. 무한한 생명의 비밀 앞에서 과학자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칼 세이건의 제안에 따라 보이저 1호가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포착한, 희미한 푸른 점 (Pale Blue Dot)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폴 브랜드를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정형외과 의사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적인 사명을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고 한 평생을 보낸 평신도 선교사였다. 그런데 그의 선교지는 어떤 특정한 지역이기보다는 한센병과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었다.


문둥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은 자멸하는 병이다. 사지가 서서히 절단되고 코가 문드러지는 육신의 처참함을 동반하는 병이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한센병은 주로 신경 세포를 공격하여 감각을 차단시켜 버린다. 이것은 어느 날 손가락 하나가 잘려져도, 그들의 비극은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이기보다는 그 아픔을 전혀 못 느낀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폴 브랜드는 어느 날 그의 한센병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한센병의 무서운 결과는 환자들이 고통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이후 그는 한센병이 조직의 부패 없이도, 통증의 감각을 상실시킨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외과의사로서 한센병 환자들의 외과적 수술과 재활에 현격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로 그 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재활공동체를 운영하며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하는 사랑을 실천한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어느 날 필립 얀시가 아내의 벽장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한 편의 에세이를 읽고 난 후,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그 에세이의 저자였던 폴 브랜드를 직접 찾아가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느덧 기독교 작가로서 탄탄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필립 얀시이지만, 폴 브랜드를 만날 때만 해도 그는 이십대의 젊은 저널리스트였다. 폴 브랜드와의 만남은 필립 얀시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폴 브랜드가 죽고 나서 그는 회고한다. 폴 브랜드를 통해서 이론으로만 들었던 기독교적 삶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확신뿐 아니라, 겸손함을 잃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면서도 얼마든지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런 확신이 미약해질 때면 항상 폴 브랜드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린다고도 고백한다. 폴 브랜드는 필립 얀시에게 있어서 실로 거인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 출발하여 (1부), 이 책은, 골격을 유지해 주는 힘이 되는 '뼈' (2부), 다른 생명과 소통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 (3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들의 몸을 움직이는 신비한 메커니즘인 '동작'에 이르기까지 (4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들의 몸을 비유로 하여 실로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메시지를 담담히 선포한다. 바울 역시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인간의 몸과 각 기관을 비유했음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바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지체인 것이다. 폴 브랜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세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 우리들 각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라는 것이다.


세포가 가장 세포다울 때는 하나의 세포가 주위의 세포와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이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충성하여 전체 몸이 정상적인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때다 (이것이 책의 목차가 1부 ‘세포’에서 시작하여 4부 ‘동작’으로 마치는 의미이다). 세포다움은 세포의 dependence에 있기보단 inter-dependence에 있는 것이다. 작은 하나의 완벽함보다는 연약한 하나일지라도 조화롭게 모여 큰 하나를 이루는 것에 바로 세포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의 본질이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에 비유한다면,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우리들이 자본주의적이고 성공지향적이며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에 묶인 채 개인의 번영과 안녕에만,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세포들이 모여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될런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포 중에서도 어떤 세포는 자신의 생명에만 연연하여 주위의 세포들과 전혀 소통하지도 않고, 자신이 전체 몸의 일부인 것을 망각한 채 몸에 충성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독립적으로 사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세포를 우린 암세포라고 부른다. 암세포는 자기중심의 원죄를 짊어진 인간의 이기적인 본질과도 너무나 닮아 있다.


필립 얀시를 통하여 폴 브랜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이지만, 똑같은 기능을 가진 클론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세포로 분화되어 있으면서도, 그래서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러므로 서로 연합하고 봉사하고 헌신하여 건강한 공동체 (교회)를 이루는 임무를 맡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을 둘러보면, 교회만큼 상이한 사람들이 모인 기관도 없다.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치체계나 기준으로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의 집합으로 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머리로 삼고 있는 존재라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연합함의 비밀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유사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폴 브랜드 역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합의 근거와 시작이 되어주는 다양성은 또한 우리들이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만남을 가질 때에도 하나님나라가 임한 사람이라면, 함께 한 몸을 이루는 세포요, 서로 공동체를 이뤄야 하는 존재임을 간파하며 결속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이유가 된다. 처음 보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이기에 금새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다른 기관을 이루는 세포이지만, 그래서 피부색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는 일부인 것처럼,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부다. 우리는 형제, 자매요, 가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게 남겨진 사명이요,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만족함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의 환희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랑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폴 브랜드는 암세포의 반항을 교회 내의 반란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월터 윙크가 간파한 것처럼 폭력이 신이 되어버렸고, 그 폭력으로 평화와 부를 얻어낸 미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서구 세계와 심지어 전 세계에 걸쳐 팽배해진, 자본주의 체제로 말미암은 부의 편재는 교회 안에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미국이나 영국의 세포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고 폴 브랜드는 목소리를 높인다. 이는 선민사상 속에 갇혀 있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과도 같을 것이며, 번영신학으로 점철된 대형교회의 리더들과 추종자들과도 같을 것이며, 기독교의 옷을 입은 이교도적인 기복, 무속신앙에 사로잡혀 개인의 안녕만을 추구하는 자들과도 같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서로 다른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고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정상적으로 움직인다는 상식을 통하여 폴 브랜드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부요, 그래서 조화롭게 연합해야만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책을 덮고 글을 쓰니 어두워졌다. 나는 곧 잠자리에 들어가 잠을 청할테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다시 사랑스런 아내의 키스와 사랑하는 아들의 포옹으로 내일을 시작할테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폴 브랜드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건강한 세포가 우리 몸을 이루고 있으며, 골격을 유지해 주는 튼튼한 뼈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가 내게 있음은, 그저 나 자신의 건강이나 내가 속한 가족 안에서의 소통만을 위한 것이 더이상 아님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야만 하고 충성해야만 하며, 나와 가족을 넘어선 모든 하나님백성들과의 연합을 생각해야 한다고 나의 온 몸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하나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좀 더 머리로부터 오는 시그널에 민감해져야 하고, 그 시그널에 우선순위를 두고 삶의 패턴과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지경이 더 넓혀질 시간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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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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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화인가, 순수함인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기적이 일어날 거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침묵’이라는 제목으로부터 이야기의 결론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긍정적일 수 없을 결론을 예측하며 난 책을 펼쳤다. 엔도 슈사쿠를 처음 만났다.


이 책에서의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의미한다. 고난과 역경 한 가운데 놓인 하나님의 백성을 기적을 일으켜 구해주는, 영화나 소설 속의 슈퍼 히어로나 마법사 하나님이 아닌, 17세기 일본, 천주교의 박해 중심에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시고 묵인하시는 하나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죽음도 무릅쓰고 극심한 고통을 담대히 선택한 자신의 백성들 앞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끝까지 침묵만을 지키셨다.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실화와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소설이다.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포르투칼 신부가 일본에서 박해를 받다가 결국 배교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줄만큼 소설적인 요소보다는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드리고 신부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편지조차도, 덕지덕지 찢어지고 빛바랜 모습으로 어느 박물관엔가 보관되어 있을 법한 기분도 들게 만든다. 그만큼 이 책은 소설이지만 아주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글쓰기로 쓰여진 이 책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그저 공감이 된다. 때로는 의심으로,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적의에 가득 찬 채 하나님께 따지고 원망하며 화를 내 본 우리 자신들의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상기시키게 만든다. 이 책은 비록 지금으로부터 4세기나 차이나는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일본이란 낯선 곳에서 벌어진 일을 그려내고 있지만, 21세기 현재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이 여전히 똑부러지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가슴이 한없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바로 시공간과 사건을 초월하여 동일한 결론을 모두 경험하고 그것이 마음 속에서 끝내 대답되지 않은 채 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뿌옇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침묵하심에서 하나님의 동일하심을 찾는 건 신자로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이야기의 플롯은 예수의 수난 과정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여기엔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개인적으로 나는 그 의도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의 죽으심 때에도 철저하게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이지 않겠냐는 추측에서 찾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침묵을, 여전히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더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드리고 신부를 예수에 대치시키고, 로드리고 신부를 돈을 받고 판 기치지로를 예수를 은 30냥에 판 유다에 대치시킨다. 또한 관리들에 의해 조롱당하는 장면이나, 감옥을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귀를 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취조당하는 과정에서 오늘 밤 반드시 배교할 것이라는 통역의 말에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키는 것까지도 모두 예수의 수난 과정 중에 있었던 여러 가지 장면들과 겹쳐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읽는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받으셨던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도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닮은 부분이 여럿 있다 하더라도 큰 차이점도 있다.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처럼 극심한 육체적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고, 최후의 죽음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는 끝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자신의 발로 직접 밟고 배교했다. 마치 예수의 말 그대로 닭 울기 전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박하고도 극단적인 상황을 통하여 엔도 슈사쿠는 우리에게 묻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답은 책의 결말에도 주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열려져 있는 질문인 것이다. 통역이 계속해서 지껄였던 ‘형식적’으로만이라도 배교를 하라는 말이 귓전에 남아 있다. 단지 성화를 밟는 행위가 과연 신앙을 져버리게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 수 있을까? 로드리고 신부는 기도를 하며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신부가 들었던 그 음성이 내겐 끝내 소화되지 않을 음식처럼 목에 걸려있다.


갈릴레오가 자신이 주장해 온 지동설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자기 스스로 구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을 거론할 때면 모든 사람이 갈렐레오를 떠올리는 것처럼, 어쩌면 성화를 밟고 배교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여러 신도들의 목숨까지도 살린 로드리고 신부의 행위는 결국 예수 믿는 신앙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실제적으로 일본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진 않았을까? 아니면, 신부가 만약 신도들의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과감하게 선택했었다면, 자신 앞을 먼저 간 배교의 스승, 페레이라 신부도 끝내 회개하고 다시 순교하며 신앙을 순수하게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이 책이 전달해 주는 우울함은 그 힘이 무척이나 강력하다. ‘합리화’하는 행위와 ‘순수한’ 신앙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재정의해보는 기회가 된 건 좋은데, 내 안에 남아 있는 이 찝찝함은 어쩐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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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 10주년 기념판, 은혜 없는 세상을 향한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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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된 은혜에 사랑을 더하다.


필립 얀시 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읽고.


누군가는 ‘은혜’라는 단어를 자신의 잘남과 높음, 그리고 상황의 잘됨으로 연결시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큰 은혜 받았던 때를 내게 묻는다면, 난 나의 못남과 낮음, 그리고 상황의 안됨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들을 말하지 않고는 도저히 내겐 ‘은혜’를 설명해 낼 재간이 없다.


여전히 지금도 일상 중에 ‘은혜의 구경꾼’으로 설 때가 더 많은 ‘부끄러운 나’이지만, 필립 얀시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나 역시 한없는 은혜의 수혜자였음을 다시 고백하게 만들어 주었고 감사를 회복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그러나 그 고백을 하기에 앞서, 나는 3년 전 클리블랜드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 때의 암울했던 기억들을 소환해 내야만 했다. 단 몇 초만 생각해도 금새 우울해지고 아직도 아픈,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난 끝내 건져내어 졌지만, 모든 걸 다 잃을 것 같아 두려워 밤을 지새며, 극단적인 결단도 할 뻔했던 그 때의 기억들이 자꾸만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내게 있어 진정 ‘모든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깨닫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고, 이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 잃어도 괜찮다’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인정은, 실은 내가 ‘다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또 잊고 있었다. 내가 Second Chance를 부여 받은, 수렁에서 건져 내어진, 죽었다가 살아난 죄인이란 것을 말이다.


고난의 정의를 ‘은혜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극적인 순간’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 은혜는 철저하게 외부에서, 그리고 철저하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나는 갈증이 갈증임도 못 느끼는 탈수증 환자와도 같았다. 물만 공급되면 되는데,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인데도, 그리고 손만 뻗으면 물을 마실 수 있는데도, 그 필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다른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던, 오직 나로 가득 찼었던 인간이었다. 나 역시 우물가의 여인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필요했었던 것이다. 은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필립 얀시는 이 책에서, 교회에게만 기대할 수 있으며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 바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는 비참해 질대로 비참해진 한 창녀의 실화를 예로 들면서, 은혜 베푸는 유일한 기능을 상실해 버린 교회의 실추된 이미지를 적실히 꼬집어낸다. "교회요?! 거긴 뭐하러 가요? 안 그래도 충분히 비참한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에요!" 교회에 도움을 청해봤냐는 질문에 대한 창녀의 대답이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가 아니라, 거짓과 위선으로 양 날개를 삼아 거룩한 체하는 인간들로 채워져, 은혜가 아닌 도덕과 율법으로,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높은 곳에 서서 막대기를 휘둘러대는 집단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란 본질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함에도, 교회에 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마치 도덕적이고 율법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오해되어졌다.


그는 또 강조한다. 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업보,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교의 법전은 모두 노력으로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는 반면,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는 것은 기독교뿐이라고 말이다.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소외된 자, 연약한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은혜다. 그들의 노오력이 아닌 것이다. 필립 얀시는 탕자의 비유에서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은혜는 값없는 용서와도 같다고 한다. 용서는 주판알을 튕기는 어떤 계산이 필요한 산수가 결코 될 수 없으며, 오직 불가항력적으로 타오르는 사랑의 힘에 짐짓 무너져 내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일 뿐인 것이다.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을 만큼, 그 은혜의 힘은 실로 막강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아닌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하는 용서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필립 얀시는, 용서는 인간의 비본성적 행위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래서 그 어떤 행위보다도 어려우며 때론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도 있지만, 우리가 용서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수혜자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나도 바로 그 은혜와 사랑의 수혜자인 것이다. 그래서 용서할 수 있고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머리로 이해한 만큼 세상에 은혜 베푸는 일을 그다지 잘 해내고 있지 않다고도 분석한다. 역사적인 실례를 들며, 특히 신앙과 정치라는 영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비틀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결국 은혜에서는 사랑이 가장 핵심 되는 본질이라며, 사랑을 몰아낸다면 예수의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우리는 예수의 복음에서 사랑만을 뺀 채 사람들에게 '정제된 은혜'를 베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랑이 빠진 '정제된 은혜'는 결국 율법주의와 도덕주의에 갇힐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게 되었고, 그 숙명은 곧 현재 교회의 이미지로 진화해 버린 것이다.


우린 예수가 행한 기적에 놀라워 한다. 그러나 필립 얀시는 예수가 행하신 용서와 은혜의 선물이 예수의 기적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다. 기적은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은혜의 용서는 도덕적 법칙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율법주의와 도덕주의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이 시대에 유일하게 그 법칙을 초월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은혜라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놀랍게도 불완전하고 모자라고 연약하고 유한한 우리들이 이 땅을 나그네로 살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수 있으며, 오직 그 때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은혜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리고 그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복음이다.


암울했던 클리블랜드에서 은혜의 인디애나를 거쳐, 지금 난 여기 캘리포니아에 와 있다. 계획에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던 인생이다. 하지만 나에겐 성공지향적 가치관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하나님나라 가치관으로 끊임없이 변화해가고 있는 소중한 언약의 여정이다. 나의 삶을 통한 이 작은 나눔의 목적은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나의 나눔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내가 거쳐온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립 얀시가 책의 서두에서 말했듯, 나 역시 이러한 나눔이 은혜를 설명하는 것이기 보다 은혜를 전달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쓰여지길 간절히 바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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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동연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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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역설: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의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침묵 가운데서도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침묵’은 ‘침묵의 소리’로 다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침묵’을 오독했던 독자 중 하나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침묵’을 ‘침묵’으로만 읽었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묵의 소리’는 ‘침묵’에 해제를 붙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침묵’에 대한 오독이 엔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독 덕분에 우리들은 엔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좀 더 친밀하고 좀 더 친절하게 말이다. 나도 그랬다. ‘침묵의 소리’를 읽으며 ‘침묵’ 너머에 있는 엔도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침묵'을 읽을 때에는 못 느꼈던 것들이었다.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엔도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침묵’을 집필하게 되었던 이유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인생과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전해지지 않았던 (침묵했던) 엔도가 내겐 비로소 전해졌다 (소리로 들려졌다).


그는 토종 일본인이면서도 서양에서 전해져 온 기독교 (카톨릭)를 받아들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도, ‘어릴적부터의 기독교는 자신이 믿지도 않은 세계에 자신의 몸이 내던져진 사람이 겪는 이문화 체험’이라고 고백한다. 엔도에게 기독교는 그만큼 이질적인 문화였고, 그 속에서 그는 혼란스러웠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자인 김승철 교수 역시 서문에서, 엔도에게는 어릴적 자신이 받았던 세례에서부터 ’기독교가 일본에서 자란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늘 그를 따라다니던 물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엔도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일본인인 자신의 몸에 맞는 신앙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결심이 마침내 소설가 엔도를 탄생시켰다고 역자는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실로 소설 ‘침묵’은 엔도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책인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로부터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혀지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판 경우에는 아예 누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배교한 기리시단들을 한데 모여 살게 했던 기리시단 주거지에서 20년에 걸쳐 간수로 일했던 어느 하급 무사가 남긴 일기 형식의 문서이다. 엔도는 이 실제 문서를 약 10분의 1정도로 줄이면서 발췌해서 고쳐쓰는 방식으로 ‘관리인의 일기’를 작성하였고, 이를 ‘침묵’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게 해두었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번역판을 읽은 나에게 ‘침묵’의 마지막은, 끝내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와 이미 배교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향하여, 그리고 끊임없이 간교함과 성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던 기치지로를 향하여 결코 좋지 못한 시선을 줄 수밖에 없게 해 주었었다. 이는 반대급부로, 끝가지 후미에를 밟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낌없이 버린 순교자들을 향한 시선을, 마음 아프지만,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침묵이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샌가 배신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신앙을 버리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자 김승철 교수가 직접 해제 및 번역과 주해를 한, 이 책에 수록된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읽고 난 후, 난 비로소 의문이 해소될 수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강한 자들의 입장이 옹호되어지는 반면,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으며 배교하여 목숨을 건진 약한 자들의 입장이 멸시되어지는 듯한 분위기에서 나는 비로소 해방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기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하고 다른 이들에게 포교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간교함을 얼굴에 써놓은 듯한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예전과는 달리 로드리고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의 회복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침묵의 소리'의 도입부에서 엔도는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 안에서 동판에 새겨진 후미에를 만나고 그 나무틀에 남아있던 수많은 검은 발자국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믿는 것을 발로 밟았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약자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침묵'의 주인공으로서 담대하게 순교한 강자가 아닌 끝내 배교한 약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침묵의 소리' 책 안에는 엔도의 다른 단편 소설들이 몇 개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아버지의 종교, 어머니의 종교'에서는 엔도는 가쿠레 기리시단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시작은 순교가 아닌 배교였다. 그들의 신앙은 승리자의 신앙이 아니라 실패자의 신앙이었다. 그들 신앙의 출발점은 자신들이 배교자, 약자라는 자각이었으며, 그 어두운 출발점이 그들의 신앙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신앙이, '어머니 되시는 분'이란 단편 소설에서 말하듯이, 오랜 시간을 비밀리에 거쳐오면서 불교나 다른 종교, 심지어는 토속적인 미신까지 뒤섞여 있는 종교로 변질되었지만, 그들의 아픔과 회한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단번에 이교도나 이단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엔도가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침묵'을 썼다는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다. 때문에 '침묵'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찝찝함은 말끔히 해소가 되었다. 예수의 예언대로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엔도의 표현대로라면, 가쿠레 기리시단의 조상들처럼 후미에를 밟았던 셈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세 번의 부인함으로 인해 예수께 질책을 당하거나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지도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페레이라나 로드리고, 그리고 간교한 기치지로라고 해서 그들의 배교 행위 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며 그 영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았을 지 그 누가 알겠는가!


엔도는 말한다. 자신 역시 페레이라이고 로드리고이며, 또 기치지로라고. 자신 속의 여러 인격을 각각 독립시켜 그것을 작중 인물로 그려나갔던 것이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차이로 인해 다행히(?) 나는 고문과 죽음이 문 턱에 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뿐, 일상 속에서는 밥 먹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매일 배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이다. 가쿠레 기리시단은 일 년에 한 번씩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지속해야 했지만, 그 행위 이외에는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머리와 입으로는 하나님나라를 생각하고 말하고 가끔은 마음까지 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이 관성에 의해 나만의 가치관에 의해 나를 움직인다. 마치 기계 돌리듯 말이다.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겠지만,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통해, 약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신앙 지키기는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지 신은 침묵한다는 메시지나, 침묵 속에서도 말한다는 메시지를 넘어서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종합해 볼 때, 아니 내가 만난 엔도를 느껴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나 늘 잊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스스로 곱씹게 만들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시든지 침묵하지 않으시든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게 된 것이다. 엔도를 통해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약한 페레이라, 로드리고, 기치지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순간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침묵하시든 침묵으로 말씀하시든 상관없이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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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선집 박스 세트 - 전12권 헤르만 헤세 선집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외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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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탈리엔의 빛.


헤르만 헤세 저, ‘유리알 유희’를 읽고.


살아가면서 우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생을 마감할까.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알고 사랑하고 섬겼다면 그 인생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이 만남이고 만남의 가치가 양이 아닌 질에 있다면, 의미 있는 인생이란 깊이 있는 교제와 그 사람에 대한 깊고 풍성한 앎에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숨쉬며 서로의 이름을 알고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론 스킨십을 나누면서 오감을 길들이는 것이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반적인 방법이겠지만, 점점 각박해져 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자연에서 우린 더 이상 경이감을 느끼지 못하며, 날마다 편리해져만 가는 문명의 파도에 떠밀려가며 춤 추듯 살아간다. 사람을 직접 만나기 위해 시간을 약속하고 손목시계를 보며 기다리던 낭만은 간편한 스마트폰 덕분에 말끔히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화상전화의 발달로 인해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언제든 얼굴을 보며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낭만과 여유라는 틈새는 효율과 편리가 메워버린 것이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만나게 되었지만, 과연 우린 예전보다 사람을 더 깊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작년 말, 아내로부터 헤르만 헤세 전집을 선물 받아, 올 한 해 다 읽고 모두 감상문을 남기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나 나이 마흔을 넘기며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마음껏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글 읽기와 쓰기였다. 녹슨 고철이나 고인 우물처럼 정지해버린 나의 인문학적 소양을 소생시키고도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계획했던 검소한 방법은 몇몇 고전문학 작가들을, 할 수 있는 한도에서 깊게 만나보는 것이었다. 내게 평생 짐이 되어버린 안경을 쓰게 만들었던 추리소설을 탐독하던 중학생 시절, 어머니의 소개로 접한 첫 고전문학이 '데미안'이었다. 어느덧 25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첫 관문으로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내겐 적격이었다.


또한, 정신적인 전환기를 거치며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란을 경험했기에, 숙명적으로 나는 서로 다르면서도 상보적인 두 세계의 경계에 설 수밖에 없었고,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물음, 그리고 진리를 비롯한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고, 난 외로웠다. 응답되지 않은 무수한 질문들은 늪이 되어 나를 삼키기 시작했고, 나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내 자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치고 힘들었다.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의심의 숲을 지나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쳐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테지만, 지난한 이 시기가 쏘아대는 화살의 방향은 아무래도 외부보다는 내부를 향하는 법이고, 함부로 던져진 화살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다. 내 안의 자아는 그렇게 아파하며 치유를 소망했다. 다행히 반성과 성찰은 현미경과 같아서, 희미하기만 했던 자아에 대한 발견과 재발견, 그리고 하나인 것 같았던 자아가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선 아주 오래된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난 겨우 성장할 수 있었다.


헤세를 읽어낸다는 것은 헤세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두 세계의 존재와 그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넘어 공존과 화합에 이르기 위하여 끊임없이 내적 성찰을 거치며 성장해 나가려는 자아의 고뇌와 의지를 깊숙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렇다. 나는 헤세를 알도록 운명 지어져 있던 것처럼 헤세를 읽어냈다. 내 인생 전체를 봤을 때 헤세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건 참 다행이었다. 그로 인해 난 참 행복했으며, 내 마음은 감사함으로 충만하다. 많은 빚을 졌다.


두 세계는 자아의 서로 다른 외부 세계일 수도 있고, 한 육신을 공유하며 공존하는 서로 다른 두 자아일 수도 있다. 헤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헤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아의 성찰과 성장, 그리고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때론 상반된 두 자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독립된 두 인물을 창조해내기도 하고 ('수레바퀴 밑에', '게르트루트',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해당), 때론 서로 다른 두 자아가 한 인물 안에서 분열하도록 만들어 갈등을 넘어 통합으로 향하는 변증법적 자아성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페터 카멘친트',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 부분적으로 ‘크눌프’에도 해당). ‘유리알 유희’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담고 있다.


두께 (약 800페이지)에 압도당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던 건 어쨌거나 내겐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큼직한 내 손에도 묵직하게 잡히는 두께의 책을 일주일이 넘도록 시간을 들여가며 비로소 읽어냈을 때, 내게 남은 여운은 후련함이 아닌 아쉬움이었다. 800페이지가 오히려 짧게 느껴질 정도로 내 안의 나는 더 읽기를 갈구했다. 뜻밖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아직도 내 가슴 속엔 유리알 유희의 명인 자리를 내려놓고 마기스터 루디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카스탈리엔 밖, 즉 세상으로의 도약을 감행했던 요제프 크네히트와, 그의 마지막을 삼켜버린, 빙하가 만들어낸 그 고요한 호수가 잔상으로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했던 때는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여 아름답게 비치던 어느 스위스 산골의 이른 아침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마음은 아직 그곳에 머무는 듯하다. 호수가 차갑고 슬프다.


'유리알 유희'는 13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쓰여진 헤세의 마지막 소설로써, 그의 노벨 문학상을 결정짓게 만든 대작이다. 여기엔 그의 모든 작품이 다 녹아있기도 하다. 이 책을 그의 전집 중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던 이유는 적어도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을 모두 '유리알 유희' 안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물처럼 숨겨진 각 작품의 정수들이 이 곳에서 모두 한데 어우러져 그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혼자 몰래 마른 침을 삼키며 난 전율했다. 그렇다. 나는 그 전율과 함께 이 책을 읽어냈다. 각각의 작품에서 독립적으로 표현되어진 두 세계의 통합을 추구하는 헤세의 바람은, 그의 작품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땐 바로 이 책, '유리알 유희'에서 마침내 실현되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난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유리알 유희란 모든 학문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고, 고도로 발전된 어떤 기호와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비밀 언어로 표현되어지는 정신적 유희이다. 하나의 유리알 유희는 예를 들어, 천문학과 수학과 음악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총체적이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서양의 문화와 전통 뿐만이 아닌 동양의 지혜까지도 균형 있게 포함하고 있기에, 우린 유리알 유희를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높고 순수한 인간의 정신성을 대변하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을 그 목표로 하는 유희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유리알 유희는 현실에서 존재하진 않는다. 그저 헤세의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피부에 와 닿도록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책을 읽어도 도대체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리알 유희가 탄생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왜 헤세가 이런 상상력을 발휘했는지 조금은 더 이해를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직접 겪었던 헤세는 20세기를 인간의 정신성이 곤두박질친 시대로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순수한 정신적인 부분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된 특정 구역의 이름이 바로 '카스탈리엔'이다. 카스탈리엔은 타락한 정신성이 회복되어 이상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신적 유토피아인 것이다. 이곳은 세속적인 국가를 포함한 세상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면서 국가로부터 모든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세상 속에서 영재만을 발굴하여 데리고 온 후 그들에게 전 인생을 바쳐 오로지 순수 학문 연구를 수행하게 하고, 과거 수도원에서의 생활처럼 금욕적이고 경건하면서도 검소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구별되어진 작은 세상이다.


유리알 유희는 바로 이 카스탈리엔 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즉, 타락한 인간 사회의 반동적인 힘이 끝내 다다른 지점에 바로 유리알 유희가 있는 것이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비록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내적 갈등을 겪다가 카스탈리엔 밖으로 나가게 되지만, 카스탈리엔 안에서 가장 존경 받고 영예로운 유리알 유희의 명인으로 성장했었다. 이 책은 요제프 크네히트의 성장기라고도 할 수 있고, 한 인간의 성장과 자아의 재발견과 성찰, 이어진 내면의 갈등, 그리고 마침내 갈등을 이겨내고 초월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크네히트는 세속적인 부와 명예, 그리고 그것들의 정반대에 위치한, 정신적이기만 한 모습까지도 모두 던져버리고, 보다 통합되고 완전하면서도 순수한 것을 향하여 홀로 꿋꿋이 전진하는 정신적 승리자였다. 그는 실로 세속적 세상도 넘어서고 정신적 유토피아, 카스탈리엔도 넘어선 조화로운 통합의 상징, '유리알 유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해 본 자에게는 중재자나 화해자로서의 역할이 암묵적으로 기대되는 법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현실에서 그들은 그 특권을 거부하고, 오히려 분노에 가득 찬 채 가장 효과적인 파괴자로 군림하거나 아니면 고독한 아웃사이더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은 한 세계를 넘어 두 세계를 모두 얻고 싶어하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남을 향한 삶으로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깊숙이 숨겨졌던 지배욕과 몰래 감추었던 나르시시즘의 본격적인 발아 시기와도 같다. 그 결과, 중재나 화해가 아닌 견제와 장악이 선택되고야 마는 이 비극은 과연 인간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양쪽 진영을 모두 알아 화합과 통합을 도모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른 극소수의 사람들조차도 결국에는 두 세계를 모두 파괴하거나, 두 세계를 모두 등지고 떠나 고독한 방랑자가 되어버리는 이유는 아마도 우린 인간 내면에 뿌리깊게 각인된 근본적인 죄와 악에서 그 답을 찾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특권의 자리에 가도, 범인의 자리에 머물러도, 우린 모두 ‘인간’으로서 같은 선상에 위치해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네히트는 파괴자도 아웃사이더도 아닌 길을 선택했다. 그 둘을 모두 내려놓았지만, 죽기 직전까지 그는 그 둘의 화합과 통합을 위한 소망을 놓지 않았다. 비록 육체적 죽음을 맞이했지만 말이다. 난 이 부분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구별되어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카스탈리엔은 한 땐 세상의 모든 정신적인 부분을 총괄하고 배포하며 타락한 인간의 정신성 회복에 앞장섰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갇힌 우물이 되어갔다. 어찌 보면 크네히트는 지진이 일어날 것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지하는 예민한 동물처럼 카스탈리엔의 몰락을 예감했던 것이다. 카스탈리엔은 우리 시대의 일부 종교집단이나 상아탑 안에 갇혀 국민의 세금만으로 자기 배를 채우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 특권층의 사람들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거나 정화하는 peacemaker 역할이 애초부터 주어졌지만, 그 안에서만 머물며 세상과 소통 없이 고상함만으로 안락하는 peacekeeper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의 거짓과 불의를 정화시키고 그 이전으로 회복시킬 공적인 사명을 담당해야 할 기관이 사적인 안위만을 취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린, 특히 기독교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들은 우리들의 카스탈리엔이 본질적 임무를 다하고 있는지 점검해야만 하고, 우리에게 크네히트가 준비되어 있는지 자문할 때다. 장망성은 세상보다 카스탈리엔에서 먼저 시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세상 속에 함께 존재할 때 카스탈리엔의 빛은 흐려지지 않고 밝게 빛날 것이다. 교회와 나그네 된 하나님백성의 바른 위치와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점검할 때다.


#김영웅의책과일상


1. 수레바퀴 밑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43022562409185

2. 싯다르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50722494972525

3. 게르트루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4071523637622

4. 페터 카멘친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69595666418541

5. 황야의 늑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93746594003448 

6. 크눌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04866382891469

7. 로스할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844402088937898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906654982712608

9. 데미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771433049568136

10. 유리알 유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61378043906966

11. 요양객: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13336575377776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0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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