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트루트 헤르만 헤세 선집 5
헤르만 헤세 지음, 황종민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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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


헤르만 헤세 저, '게르트루트'를 읽고.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모진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우린 이런 면에서 커다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올해 들어 세 번째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게르트루트'에서 난 또 다른 헤세의 자아와 그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소설 '게르트루트'는 '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음악가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다. 헤세는 이 소설 속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쿤'과 오페라 가수인 '무오트'로 분열하여, 자아의 스펙트럼 중 ‘예술가’라는 하나의 채널을 선택하여 증폭시킨다. 그러면서도 그 채널을 역으로 타고 프리즘을 거슬러 올라가 빛의 근원에 도달하려고 시도한다. 거기는 헤세 자신과 ‘수레바퀴 밑에’의 한스, ‘싯다르타’의 싯다르타, ‘데미안’의 싱클레어, 그리고 우리 모두의 거짓 없는 자아가 녹아 있는 곳이다.


이 책은 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을 회고하면서 시작된다. 뚜렷한 미래를 꿈꿔본 적이 없었지만, 어릴적 바이올린을 배웠고 음악의 즐거움을 알게 된 기억 덕분에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학교 진학을 결정한다. 비록 능동적이진 않았으나, 어쨌거나 음악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음악이 좋아서 들어갔지만, 학교에서 요구되는 규칙과 규율과 의무에 부딪혀 그는 힘들어했다. 현실세계에서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해보니 그는 그저 자신이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던 철부지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그는 실로 학습되지 않은 천재였다. 그의 안에선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는 그러한 자신을 깨닫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음악에 대한 회의를 느끼던 어느 겨울날, 그는 짝사랑했던 리디라는 소녀의 철없는 제안으로 가파른 언덕으로부터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다가 커다란 나무에 부딪혀 큰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그는 평생 다리를 절룩거리는 불구가 된다.


그런데 그 사고 덕분인지, 쿤은 음악에 대한 사랑과 동경, 그리고 그의 피에 흐르는 예술가적 기질에 집중하게 되고, 그로부터 기쁨과 위안을 얻게 된다. 음악만이 그에게 유일한 벗이자 휴식처가 된 것이었다. 복학한 뒤에도 그는 전에는 자신을 옥죄는 것으로만 느꼈던 학교 생활까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외적으로 불구가 되었으나, 내적으로는 성장하여 강해진 것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절름발이 인생의 시작이 그의 내면에 있던 예술가적 자아를 일깨우고 꺼집어내어 음악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음악가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것이었다.


재탄력을 얻은 그의 예술가적 기질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휴가기간 동안 자연과 함께 누린 철저한 고독과 침묵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는 자신의 첫 소나타와 가곡을 작곡하게 되는데, 학교 선생을 통하여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유명한 오페라 가수, 무오트에게 곡이 알려지고 인정까지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오트와의 만남은 쿤에게 있어 또 다른 낯선 세계로의 진입이었다.


첫 만남 이후, 무오트는 쿤에게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는 쿤의 곡들을 가장 먼저 사랑해 주었고, 무엇보다 그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가장 먼저 진심으로 인정해 주었다. 실로 무오트는 수면 아래 있던 쿤을 수면 위로 올려주는 다리였던 셈이다. 또한 무오트의 유명세는 무명인 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나중에 쿤은 곳곳에서 그가 작곡한 곡들이 연주될만큼 유명해지고, 신문에도 실리며,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평도 듣게 될만큼 성공한 음악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는 무오트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음악가의 인생도 사람의 인생인 법. 음악가의 인생에서 무오트는 쿤에게 정체성을 확립시켜주고 성공까지 가져다주는 다리가 되어 주었지만, 사람의 인생에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랑을 앗아가는 주범이 된다. 쿤은 자신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연인으로 지내자는 적극적인 제안까지 유일하게 했었던 여인, 게르트루트를 무오트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는 친구로 지내자는 게르트루트의 확고한 응답을 받은 불구자였고, 무오트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닌 오페라 가수였다.


비록 무오트의 고질적인, 카사노바적이면서 사디스트적인 성향 때문에 고결했던 영혼의 소유자 게르트루트조차도 결혼 후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별거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게르트루트의 눈에선 더 이상 고결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쿤은 그들의 결혼 때문에 맘먹었던 자살 생각도 이겨내고, 그들의 별거로 인해 고통받는 게르트루트와 무오트와도 관계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성숙한 인격을 보여준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와의 서먹했던 관계에서 왔던 영향도 이겨내며 쿤은 한층 더 성장하게 된다.


쿤이 열등감을 가진 헤세와 우리의 자아라면, 무오트는 오만함을 가진 헤세와 우리의 자아다. 책에서도 쿤은 게르트루트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친절과 사랑을 동정으로 생각하곤 하는 오류에 자주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열등감의 표출인 것이다. 반면, 무오트는 많은 것을 가졌으나 정작 내면의 안정을 찾지 못하여 늘 가학스러우리만큼 탐욕적인 사람으로 그려진다. 오만함의 병폐인 것이다. 책에서는 비록 오만함이 열등감을 이겨 게르트루트를 아내로 얻게 되지만, 그 승리는 오만함의 파멸로 이어진다. 게르트루트와의 별거로 인해 결국 무오트는 자살을 실행에 옮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열등감이 오만함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열등감과 오만함은 야누스의 두 얼굴과도 같다. 그 정체는 바로 교만, 둔갑의 귀재인 교만은 약자에게 가서는 열등감이 되고, 강자에게 가서는 오만함으로 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약자의 열등감과 강자의 오만함을 넘어설 때 우린 비로소 '진정성'과 마주한다. 열등감과 오만함은 우리 안에 자주 공존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것들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한다. '나'만 아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 그래서 나를 속이고 남도 속이는 죄악의 실체. 모든 폭력의 근원, 패망의 선봉, '교만'은 '진정성'의 대적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나'를 넘어 '남'에게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이라면, 험난할지라도 교만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게 되는 과정이 우리의 인생이라면,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적인 영역에 갇힌 자아가 공공성을 띠게 되는 모습에는 분명 희망이 있다. 공공성의 무게중심은 '내'가 아닌 '남'에 있으며, 그래야 '우리'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진정성과 함께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린 마침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세는 무오트를 통해 오만함으로 표현된 교만에 막혀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 인간의 유형을, 쿤을 통해 열등감으로 표현된 교만을 이겨내어 자신을 넘어서 성장과 성숙을 이룬 인간의 유형을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교만은 우리 안에서 언제나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분열한다. 그리고 마치 정반대로 보이는 두 축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하나의 다리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했던 소중한 사람 게르트루트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교만을 넘고 나를 넘어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오트가 아닌 쿤처럼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6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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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카멘친트 헤르만 헤세 선집 10
헤르만 헤세 지음, 김화경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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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 시인에서 인간으로.


헤르만 헤세 저, '페터 카멘친트'를 읽고.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쉬지 않고 일한다. 끊임없이 들어주고, 끊임없이 말해준다. 자연은 찾는 이에게 훌륭한 상담가인 것이다. 페터를 붙잡아 주었던 존재도 사람이 아니었다. 장엄하게 늘어선 산맥과 첨탑처럼 솟아오른 산봉우리, 그리고 그 위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구름이었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그에게 안식을 주었고, 난해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었으며, 잠자고 있던 그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선생이었다. 변함 없지만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자연은 그렇게 페터를 맞이했고 또 성장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사랑했던 어머니도, 첫 우정으로 성큼 다가왔었던 리하르트도, 수줍어하는 듯 큼직한 눈을 가졌던 작고 연약한 영혼의 아그네스도, 그리고 그에게 진정한 사랑과 미덕을 가르쳐주었던 불구자 보피도 모두 짧은 생을 뒤로 하고 페터를 떠나 죽음의 세계로 먼저 가버렸다. 또한 사랑의 불을 지펴 그의 마음을 후벼 파듯 아프게 했던 에르미니아 알리에티도, 또 엘리자베트도 페터를 스쳐 지나가며 각기 제 갈 길을 갔다. 그러나 자연만은 변치 않고 남았다. 사랑도 죽음도 그를 지나쳐갔지만, 자연만은 언제 찾아가도 가만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고,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어루만져 주었으며, 그에게 따스한 말을 건네주었다. 지친 그의 영혼은 자연 속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페터는 스위스 알프스 산자락에 놓인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의 성은 카멘친트, 마을 사람의 대부분이 가진 성이기도 하다. 가까운 친척과 먼 친척의 구분만이 있을 뿐인 그 작은 마을 니미콘은 식물의 한 군락처럼 대대로 자연 속에서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페터에게 니미콘의 순리를 거스르는 순간이 찾아온다. 어쩌다가 쓰게 된 편지 한 통 때문에 마을 수도원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김나지움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있어 산골 소년의 운명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자신도 몰랐던 글쓰기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의 일부로써 그를 형성했던 자연의 풍성함은 페터를 작가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연은 그를 시인이 되게 했다.


니미콘을 떠나 도시에서 대학도 다니고, 비록 성공하진 못했으나 사랑에도 빠져보고, 여행도 수없이 다녀보고, 졸업하여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도 보았지만, 그의 자연에 대한 동경과 사랑, 그리고 애찬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러나 페터에게 부족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에 대한 지식의 부재였다. 유달랐던 자연에 대한 강한 애착이 남긴 뜻하지 않았던 효과였다.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나서부터 그의 시상을 담는 메모장과 기억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된다. 그의 연구 대상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보피였다.


페터도 반신불수의 꼽추, 보피를 첫 대면부터 좋아하진 않았다. 처음에는 여느 사람들처럼 그를 흉측하고 불쾌하고 거북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어느 날, 그를 혼자 친구의 집에 놓아두고 친구 가족과 함께 소풍을 나갔을 때였다. 그가 늘 연구하며 사랑해 마지 않았던, 그래서 이웃 사람들에게 늘 이야기해 주었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섬광처럼 생각이 났고, 그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신의 목소리로 들렸다. 페터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바로 옆에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 하나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여태껏 무엇 때문에 성자의 삶을 연구하고 그의 사랑의 노래들을 부르고 외우고 또 사람들에게 가르쳐왔는지, 떠밀려오는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자신의 모순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한달음에 자물쇠가 걸린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다.


보피는 선천성 불구자였지만 사람과 자연, 인생과 세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은 지혜로웠으며 그의 영혼은 아름다웠다. 페터의 부족했던 부분 (사람에 대한 지식)이 가족이나 친구, 사랑했던 여인이 아닌, 하마터면 쉽게 스쳐 지나갈뻔했던 불구자 보피로부터 채워지게 된 것이었다. 사랑의 실천과 지혜의 나눔을 통해 마침내 사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보피의 죽음을 지켜보며 가슴을 또 한번 쓸어 내렸지만,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고향에 돌아온 페터는 또 다시 자연 속에서 치유함을 받는다. 그리고 한층 성장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책상 서랍에는 필생의 역작을 쓸 자료들이 준비가 되었지만, 그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 바로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라고 고백한다. 실로 자연은 그를 치유하여 작가나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더불어 사랑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까지도 깨닫게 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페터는 시인에서 인간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는 '게르트루트'처럼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소설이다. 그러나 '게르트루트'와는 달리 이번에는 헤세의 자아가 두 개로 분열되지 않고 주인공인 페터 카멘친트에게 온전히 들어가 있다. 헤세를 작가의 대열에 합류시킨 첫 번째 소설이었기 때문인지, 나는 내가 읽어온 헤세의 소설 중 가장 가미되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헤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페터는 상류층도 아니었고, 극빈곤층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는 천재도 아니었으며, 바보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평범했다. 페터의 성장과정은 평범한 우리들의 삶과 별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일까?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일상의 조각들이 기술된 이 책에서 난 나의 일상을 보았으며, 작은 굴곡을 지나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의 성장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생각과 그가 하는 행동들이 나의 그것들과 겹쳐졌다. 책을 덮고 나니, 나도 페터처럼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한 것 같은 느낌이고, 그에게 사람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던 사랑과 지혜라는 소중한 열매를 내가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스위스의 알프스 산자락에서 말이다. 덕분에 내가 어릴 적 올랐던 동산은 알프스 산맥을 이루는 하나의 봉우리가 되었고, 내가 메뚜기와 잠자리, 하늘소와 사슴벌레, 가재와 올챙이를 잡던 초원과 계곡은 돌연 스위스의 그것이 되었다.


인생은 성공이 아닌 성장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성장은 성공과 실패를 모두 포괄한다. 성공도 실패도 성장을 이루는 요소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성공을 거뒀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성장을 이뤘는지가 더 중요한 가치이지 않을까 한다. 햇살이 산을 비출 때 생기는 음영에 의해 산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듯, 인생도 굴곡이 있기 때문에 더욱 풍성하고 윤택해지는 게 아닐까 한다.


인생의 절반이 지나간다. 나이 마흔이 넘으니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것만 같고, 익숙히 알았던 것들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 뒤에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하고는 뛸듯이 기뻐한다. 여유가 생기고 조금은 지혜로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페터는 작가요 시인이었지만, 그리고 나이가 들어 고향에 돌아왔지만, 정작 그의 역작은 책에서는 끝내 완성, 아니 시작도 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의 인생은 아직 열매를 맺기에는 무르익지 않았다.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 열매를 맺기 위해 자료들을 모으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과학자에서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페터 카멘친트', 내겐 뜻밖의 위로가 되었다. 어릴 적 자연에서 뛰어 놀던 때가 몹시도 그립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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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늑대 헤르만 헤세 선집 4
헤르만 헤세 지음, 안장혁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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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 공존과 대립을 넘어.


헤르만 헤세 저, '황야의 늑대'를 읽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스펙트럼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빛도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빛보다 더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인간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프리즘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하나의 몸과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 여러 개의 자아로 분열하게 되는 걸까? 그 분열된 자아는 전체 자아의 일부일까, 아니면 그들 자체가 수많은 작은 전체들의 집합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그렇게 분열된 자아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큰 자아일까, 아니면 여러 자아들이 뒤섞인 채 그저 하나의 몸에 갇혀 있는 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헤세는 소설을 통하여 과감히 자아를 분열시킨 후 대립적인 성향을 지닌 등장 인물들에게 그의 분열된 자아를 불어넣어 독립된 인간을 창조해낸다. 올해 들어 다섯 번째로 읽은 그의 소설 '황야의 늑대'에서도 그는 또 다른 자아를 선택, 증폭, 대립시킨다. 헤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커다란 줄기라고 할 수 있는 자아 성찰, 발견, 성장이 이 책의 중심부에도 굵직하게 뻗어있지만, 이 책에는 그의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특이한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이 아닌, '하리 할러'라는 한 개인의 내면에서 두 개의 자아가 공존, 대립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두 자아 중 하나가 인간이 아닌 짐승, 늑대라는 것이다.


'늑대'의 이미지는 타고난 개성을 지닌 채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을 의미하는 반면, 그와 반대되는 '사람'의 이미지는 - 책에서는 '시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 체제와 질서에 길들여져, 어쩌면 클론처럼 독립된 개성이라곤 전혀 없이 획일화된 여느 시민을 대표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과 늑대라는 두 자아가 공존하는 장소가 늑대가 아닌 한 인간의 내면이기 때문에 늑대는 아무래도 시민에게 숙주의 컨트롤 타워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늑대의 입장에서 하리 할러의 내면 세계는 맘껏 살기에 척박한 황야가 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하리는 결과적으로 자기 안의 두 자아가 만든 괴리감으로 인해 내면의 고뇌를 감싸 안고 한 시대를 부유하는 현대 인간의 대표격이 된다. 하리는 척박한 세상을 황야의 늑대처럼, 마치 숙명적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다분히 현대적이다. 헤세가 그의 처녀작, '페터 카멘친트'에서 자연의 순수하고 풍성하고 자유로운 감상적 이미지를 강조했었다면, 그의 무르익은 완숙함과 천재성이 단연 돋보이는 이 책 '황야의 늑대'에서는 도시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다. 책을 덮고 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삐쩍 마르고 늙은 회색의 늑대 한 마리가 네온 싸인이 가득한 어두운 도시 한 가운데를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늑대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가히 입체적이다. 상상 속 하리의 얼굴인 것 같다가도 늑대의 얼굴은 내 얼굴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 황야의 늑대는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되고 억눌린 자아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듬어지지 않고 결코 길들여지지 않은 채 외롭고 처절한 방황 속에서 연명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민'에게 꾸준히 주도권을 내어주는 존재, 우리 모두의 내면에도 이와 같은 황야의 늑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헤세의 자아 분열은 곧 우리의 자아 분열이기에, 우리 내면에서의 여러 가지 목소리 중 시민과 늑대의 채널을 찾아 귀를 기울인다면 우린 이 책의 주인공 하리에게 우리 자신을 어렵지 않게 대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하리 할러'라는 이름의 중년 남성이 그의 쇠약해진 육체와 영혼을 이끌고 오랜만에 고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고향은 하리에게 있어서 젊었을 적 시민의 삶을 영위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그 시절 덕분에 세상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음악과 문학,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자가 되었다. 책도 냈으며 신문에 글도 기고하는 지성인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찾은 고향에서 잠시 거주하기로 했던 곳은 시민적인 느낌을 주는 어느 하숙집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마치 금새라도 산뜻한 비누 냄새가 날 것 같은 청결하고도 모범적인 집이었다. 


그런데 하리 안에 있는 늙고 굶주린 늑대의 눈에는 그 집이 너무나도 규율과 규범에 의해 자로 잰듯하여 반듯한 느낌을 주어 신물이 날만큼 역겨운 곳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늑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어 자살이 마지막 해결책이라고까지 생각할 만큼 자신의 과거와 올곧은 시민적 삶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그가 그렇게 시민적인 하숙집을 선택했던 이유는 그의 안에 여전히 그가 태어나고 자란 안정적인 시민적 삶에 대한 동경과 본능적인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늑대'라는 자아가 '시민'이라는 자아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헤세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두 자아로 인해 발생하는 괴리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책을 읽고 있던 내게 이런 복종의 모습은 약간의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자연스럽고 안전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역사를 지속해오며 탄탄히 굳혀온 가치체계, 즉 개성을 거세시키고 획일적인 인간의 대량생산을 유도하는 이 시대의 조류 자체가 다름 아닌 '시민의 탈을 쓴 늑대'와도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헤세는 하리를 통해 어쩌면 암묵적으로 묵인되는 이 세상 흐름의 부조리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우리 모두의 고유하고 숭고한 개성의 말살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시민과 늑대의 대립은 결국 시민에 대한 늑대의 현실적인 복종으로 이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늑대의 복종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지 못했다. 하리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 보았을 때, 오히려 그것은 인간성 상실의 위기를 가져다 준 것 같았다. 책 전반에 걸쳐 하리는 끊임없이 자기 안의 이중성 때문에 고뇌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까지도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환상 속 살인까지 저지르는 모습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하리가 자살을 계획하고 있을 무렵 헤르미네라는 여성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는 자살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는 정반대된다고 볼 수 있는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로 몸을 담그는 시작이었다. 춤을 배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도 조금씩 하며 뒤늦게 사랑을 배웠다. 50세가 되기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삶의 빈 자리가 채워져갔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어져갔다. 그런 향락적인 삶조차도 또 다른 시민적인 삶의 일환일 뿐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하리는 예전에 심취했던 고전 음악과 고전 문학에 대한 꿈을 꾸게 됨으로써 하나의 답을 얻게 되는데, 그가 사랑했던 불멸의 위인, 괴테와 모차르트가 각각 다른 꿈에서 나타나 공교롭게도 같은 메시지를 그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그가 여태껏 견지해온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나, 헤르미네를 만나고 뒤늦게 배웠던 삶의 자세를 모두 넘어서는 유머, 즉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우르라는 메시지였다. 차안에도 피안에도 안주하지 않는 삶의 자세, 그것은 곧 시민과 늑대와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였으며, 하리의 분열된 두 자아가 독립적이기보단 서로 보완해나가며 상생하는 하나의 큰 자아를 이루고 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였다. 


난해하게도 느껴졌던 이 책을 읽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우리 인간들이 각기 다르고 고유한 개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면, 우린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이유를 하나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다름의 아름다움을 잡음으로 여기고 재단하려고만 한다면 그런 세상은 프로크루스테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각 사람을 바라보는 눈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고, 각자가 스스로 내면의 자아를 바라보는 눈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프로크루스테스가 키를 잡고 있는 세상은 주로 승자독식과 약육강식, 그리고 소수층이 무시되어 언제나 사회에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들이 들끓게 되어 있는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곳이기에, 헤세는 '황야의 늑대'를 통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과 그것의 배후에 내재된 인간의 근원적인 죄된 속성, 즉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의 실체까지 수면 위로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더욱이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였기 때문에 이미 전쟁을 직접 한 번 겪은 헤세 자신의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그리고 전쟁이 상징하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의 면목을 조용히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황야의 늑대일지도 모른다. 시대는 날로 편리해져가고 외적인 모든 것들은 풍요로워져간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까지 연장되고 있으며 질병으로부터도 점점 해방되어져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인 속성은 그에 부응하지 않고 오히려 황야의 늑대처럼 삐쩍 말라가며 방황하고 있진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성 상실, 내면 세계의 붕괴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결과로 타인을 죽이거나 자신을 죽이는 사건도 일상이 되어간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괴테나 모차르트의 조언처럼 어쩌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유머일지도 모르겠다. 유머라는 의미는 각자에게 다르겠지만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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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헤르만 헤세 선집 6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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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로 향하는 삶.


헤르만 헤세 저, '크눌프'를 읽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가?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눈 앞에 펼쳐지는 낯선 세상, 그리고 비로소 대면하는 익숙하고도 낯선 자아. 함께 떠난 여행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우린 혼자 떠난 여행에서 선물로 받아오곤 한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은 피부와도 같았던 견고한 보호막을 깨부수고 나오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엔 아픔이 동반되기 마련이며, 때론 그로 인해 깊숙하고도 치유되지 않을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대개는 상처가 아닌 치유로 수렴한다. 여행에서 돌아온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린 자신의 내면 세계를 한층 더 거짓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고, 한 단계 성장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홀로 여행을 떠난 자는 대자연이 주는 웅장한 침묵 속에서도 자기 안의 소란스런 여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소음을 느끼고, 광장의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도 기어코 자신의 내면으로 숨어들어가 고독에 잠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으로서, 홀로 떠난 여행자는 고독과 침묵 가운데 자신의 내면세계에서도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삶의 주인공 자리를 잠시 내어놓고 삶의 구경꾼으로서 자신의 삶과 그 삶을 이루고 있는 훨씬 더 큰 그림을 보게 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목이 곧은 우리들은 좀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놓지 못한다. 언제나 보이는 것은 부족한 것들과 더 성취해야 할 것들뿐, 만족이란 없다. 조금이라도 더 열정을 쏟아 부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여기서 멈추면 분명 무슨 큰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절대 멈출 수 없다. 무조건 전진이다.


그러나 인생의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러한 '계속 전진'형의 종말은 파멸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시 정지’ 버튼 없이 ‘재생’ 버튼만 눌러댄다면, 언젠간 배터리가 소모되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주인공과 관객의 자리를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변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야 할지 잘 분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높은 곳에 올랐을 때 가질 수 있는 성취감뿐만이 아닌, 이런 잠시 멈춤의 순간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망각의 동물인 인간의 삶에서의 풍성한 아름다움은 여러 '일시 정지'의 순간이 만들어내는 향연일지도 모른다. 기억해 내고, 곱씹게 해주어 잃어버릴 추억을 소화시키고 기념해 나가는 것이다.


소설의 장점 중 하나는 소설을 통해 이런 '일시 정지'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린 실상의 분별력을 얻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 낯섦이 허구와 실상을 관통하여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크눌프. 그는 방랑자다. 평생을 홀로 여행을 떠난 자다. 삶 자체가 여행이 되어버린, 잠시 멈춤의 시간이 너무 길어져 ‘일시 정지’가 아닌 ‘정지’의 삶이 되어버린 한 사람의 삶의 단면을, 난 올해 들어 여섯 번째로 읽은 헤세의 단편 소설, '크눌프'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한편으론 삶의 구경꾼이던 크눌프의 삶을 구경하는 이차적인 구경꾼으로서, 또 한편으론 방관하고만은 있을 수 없어 그의 삶에 녹아 든 아픔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공감하고, 미처 쓰여지지 않은 그의 삶의 여백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시에 그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독자로서 난 이 책을 읽어냈다. 이로써 나 역시 크눌프를 만나 일깨움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내게 다가온 크눌프의 삶은 ‘정지’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보다는, ‘정지’도 다른 차원에서는 하나의 ‘재생’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지’는 재생의 여집합이 아닌 또다른 세계일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정지’는 ‘재생’과 동등한 위상을 가지고 서로 공존과 공생을 하는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알려주었다. 그렇다. 크눌프의 삶을 통해 나는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소위 질서라고 믿어왔던 상하우열의 관계를 좌우평등의 관계로 바라볼 수 있었다.


크눌프는 고아도 아니었고,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가정에 불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지적인 면이나 감성적인 면에서 뒤떨어지는 아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라틴어 학교에 다닐만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성적도 좋았으며, 여러 방면에서 잔재주도 많아 친구들로부터 경탄과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보스가 아닌 부드럽고 겸손한 리더였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변이 없었다면 아마도 어른이 되어 큰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크눌프에게 작은, 아니 그에겐 인생 전부가 되었던, 이변이 생기고야 말았다. 라틴어 학교를 다닐 때였다. 2살 연상의 한 소녀가 그의 앞에 나타났고, 크눌프는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에 빠질만한 남자라면 적어도 라틴어 학교에 다녀선 안된다고 했다. 적어도 공립학교에 다녀 기술을 배운 사람이라야 된다고 했다. 학자나 교수 따위는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크눌프는 학교를 못 다니겠다는 말을 했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야단을 맞고 나서, 학교에서 쫓겨나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일부러 공부를 게을리하고 일부러 틀린 대답을 하며 수업이나 과제를 빼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원하는 공립학교로 옮기게 되었지만, 약속되었던 그녀의 사랑은 끝내 받지 못했다. 대신 은근히 경멸하는 듯한 눈빛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작업공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크눌프는 모든 것을 잃은 것만 같았다.


크눌프에겐 라틴어 학교보다 그녀와 연인 관계가 되는 것이 더 큰 가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철없는 십대들의 불장난 같은 거라 치부하고, 바보같은 짓을 하여 인생을 망쳤다고 하기엔 크눌프는 너무 가진 재능이 많았고 게다가 멋졌다. 그는 그 이후로 어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내게 인상적인 것은 떠돌이 크눌프를 만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었다. 그들은 모두 크눌프를 아꼈으며, 그에 대해 불쌍하다는 마음보단 약간의 동경과 함께 존경을 담아 보냈다.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돈과 권력은 차치하고서라도 크눌프에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집과 가정도 없었지만, 대신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의 존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치들을 떠올리게 해주었고, 그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다시 풍성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맞이했다. 똑같은 일상에 지쳐 인생의 무의미함을 맛보고 있을 가정에 며칠 간 묵게 된 크눌프는 그 가정에 다시 생기가 돌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대접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대접받는 그에게 고마워해야할 입장이 수시로 연출되기도 했다. 크눌프는 어쩌면 산소나 천사와도 같은 역할을 본인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눌프는 보통 사람들이 잃어버린지조차 잊어버린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자유'였다. 정착을 하고 소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려고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와 같은 삶을 살다가 자연스럽게 잃어버리게 된 자유로운 삶, 깊숙한 마음 한 켠에 먼지가 잔뜩 덮인 채 존재하고 있는 그 자유에 대한 동경. 그렇다. 크눌프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자유의 세계로부터 각박한 현실 세계로 파송된 일종의 전도자였던 셈이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잊혀진 자유의 가치를, 마치 오래전에 책갈피로 끼워두었던 만원 짜리 지폐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가 어느 날 우연찮게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쁜 심정으로, 발견했던 것이다. 잊어버렸던 '일시 정지'의 버튼을 다시 발견하고 지금도 누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오랜 방랑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크눌프는 결국 폐결핵에 걸렸고, 때마침 만난 의사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마지막까지 그가 선택한 곳은 병원이 아니라 길 위였다. 어느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크눌프는 죽음을 맞이했다.


재미있게도, 죽기 전 그가 믿었을지도 모를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크눌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후회와 원망을 토로했고, 하나님은 크눌프에게 그의 삶이 방랑으로 이루어져왔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으니 만족하기를 요구했다. 크눌프의 방랑과 그 동안 받은 조롱과 고통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진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리고 크눌프에게 있던 방랑벽도 하나의 특성으로 인정하시며 그 특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거라고 말씀하셨다. 크눌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한탄할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다고 인정과 고백을 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나의 정체성을 이루기도 하는 '기독교인'에 대해서,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서. 묘하게도 크눌프의 삶과 겹치는 게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저 주고 거저 받고, 내 것을 움켜쥐거나 내 것을 크게 부풀리려 하지 않고 남들과 나누는 삶, 비록 세상에서 정의한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삶, 비록 스스로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자 방랑자로서의 삶을 살아 가지만, 어느 곳에 가든지 환대를 받으며 오히려 환대를 해준 사람의 삶이 그를 만난 이후로 더욱 풍성해지는 삶, 그 풍성함을 보고 또다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다른 곳을 향해 미련없이 떠나는 삶. 오늘은 은혜로운 설교 말씀이나 감동을 주는 귀한 글보다 크눌프의 삶이 내겐 더 묵직하게 와닿는다. 나 역시 결국은 이방인이요 나그네란 사실을 다시 떠올린다. 안정된 정착을 구하는 삶보다 불안함을 각오하고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크눌프가 했듯 평생의 여행이 되더라도, 나를 떠나 남에게로 향하는 삶을 살고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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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할데 헤르만 헤세 선집 8
헤르만 헤세 지음, 윤순식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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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심장.


헤르만 헤세 저, '로스할데'를 읽고.


책을 덮고, 아들을 향한 나의 마음은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함께 후회와 반성으로 벅차올랐다. 태어난 지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들은 간질병 진단을 받았었다. 아직 젖도 끊지 않았고 말도 못하는 갓난아이에게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과도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상징후가 발견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아들에게 부모인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의사가 처방해 준 정신과 약을 먹이는 것이 다였다. 인간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나는 그 조그마한 어린 생명을 통해서 오랫동안 충분히 먹먹해질 만큼 통감했었다. 어느 날 새벽, 예고도 없이 찾아온 사건이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우리에겐 가히 치명적이었다. 수개월 동안 나와 아내가 겪었던 그 절망감과 탄식, 소리 없는 절규와 기도의 외침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나 나를 감쌌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비록 아들은 기적적으로 치유가 되었고, 그래서 일단락된 사건이지만, 결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기억 속으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책을 읽고 나서 말이다.


'로스할데'는 요한 페라구트라는 저명한 화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나의 아들과는 달리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죽어간 7살의 어린 아들, 피에르가 살았던 저택의 이름이다. 그곳은 시내와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위치해 있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장소였던 로스할데는 화가에게 늘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진지하고 고상한 아내에게는 표면적이나마 평화를 선사했으며, 엄마와 아빠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던 피에르에게는 동화 속을 체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로스할데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행복은 먼 과거의 산물이었고, 현재에도 여전히 빛나는 로스할데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빛 바랜 추억을 덮어주는 황금가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용히 끈질기게 지속된 가정의 불화는 로스할데의 깊은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었던 것이다. 참지 못한 큰 아들 알베르트는 그 때문에 다른 지방에서 기거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화가인 요한 베라구트는 3년 전에 별채를 지어, 작업은 물론 식사 외의 모든 일상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었다. 본채와 별채를 자유로이 들락날락 거리는 피에르는 오래된 로스할데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방금 앉은 딱지가 깊은 상처를 치유한 증거가 될 수 없듯, 그들의 오래된 불화는 굳게 다문 입술처럼 굳어져 보였을 뿐, 속에서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어느 날, 인도에서 온 화가의 옛 친구, 오토 부르크하르트의 방문은 그 딱지에 작지만 치명적인 구멍을 내는 뾰족한 못 역할을 해낸다. 로스할데의 풍부한 아름다움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적나라한 현실이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나 타인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제 3자인 부르크하르트의 눈에도 그들의 불화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베라구트는 부르크하르트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숨김없이 토로했고, 친구가 돌아간 이후에 혼자서 침잠하며 오래된 문제의 본질과 그 동안 미뤄왔던 해결책을 실행에 옮기기로 서서히 결단해 나간다. 그의 유일한 미련은 바로 아들 피에르였다. 수면 아래 깊숙이 있었던 오래 묵은 문제를 끄집어낸 뒤, 그는 더욱 예술가의 혼에 집중하여 그림을 그려나갔고, 그러면서 점점 아들 피에르까지도 단념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러면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결코 마음 먹은 대로 되어지지 않는 법. 아내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피에르까지 내려놓기로 결단하고, 그래서 모든 것에서 초월한 듯한 가벼운 마음까지 갖게 되었지만, 피에르가 기다려주지 않았다. 피에르는 뇌수막염에 걸려 며칠 만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심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유일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아들이 죽고 나서, 화가는 다시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초연해져서 아내와 큰 아들에게 모든 것을 양도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하면서 여행을 떠나 보낸다. 모든 것을 놓아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욱 예술가의 영혼을 불태우며 그림 그리는 일에 매진한다. 어쩌면 영원한 떠남이 될지도 모르는 부르크하르트와 약속한 인도로의 여행을 기쁨으로 기다리면서 말이다.


저자인 헤르만 헤세 역시 첫 결혼에 실패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결혼 후 10년 뒤에 출간되었고, 그의 평탄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의 얼룩진 자국이 짙게 묻어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하고도 흥미로운 건, 그가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예언해 버린 셈이었다는 점이다. 헤세 역시 이 책의 주인공 역인 화가 요한 베라구트처럼 문학이라는 예술에 정진하기 위하여 아내와의 공식적인 이혼을 책을 출판한 후 9년 뒤에 치러내기 때문이다.


헤세는 아마도 이 책을 통하여, 예술가의 혼을 꺼뜨리지 않고 더욱 깊은 우물을 파내는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가져다 주는 행복마저도 내려놓을 수 있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암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결혼 생활이 불행으로 치달을 줄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겠지만, 베라구트가 아들의 죽음 이전에 아들을 포기하는 장면과, 아들이 죽은 후 마치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이를 잘 뒷받침하는 듯하다. 아들 피에르는 예술가의 심장이 아닌 한 아이의 아빠로서의 심장, 또한 한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심장을 유일하게 뛰게 해주었던 존재였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멈춰버린 그의 따뜻한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사랑이 그에게 다시 찾아올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예술가의 심장만이 남은 화가에게서 난 왠지 모를 차가움과 가련함이 느껴졌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석연치 않은 질문이 남는 건 그저 나의 기우에 불과한 걸까?


만약 내게 두 개의 심장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베라구트나 헤세와는 달리 후자를 택할 것이다. 예술적인 면에선 어떤 의미를 남길지 몰라도, 자기 자신을 건조하게 만들며 바싹 태워 차가운 뼈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육체에 남은 심장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를 택한 헤세의 선택 덕분에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내게도 그의 예술가적인 성향은 충분히 영향을 미치지만, 그의 삶을 생각하면, 특히 그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어떤 면에선 능동적인 선택이라기보단 되어진 일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입히고 재해석한 결과이겠지만, 그래도 한 인간의 행복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것이 내겐 훨씬 더 가치가 있어 보인다. 나 같은 냉철한(?) 과학자의 눈에는 읽히지 않는 영역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오늘은 헤세가 슬퍼 보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2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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